[슈미카] 눈을 떴을 때 네가 있었다

#용AU #겨울잠 #기억상실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백룡 슈x청룡 미카

 

 

 

 

깊은 산 속, 드문드문 우짖던 새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고요한 한겨울에는 소복소복 눈송이가 내려 쌓이는 소리마저 들린다. 봄이 오려면 한참이나 먼 이 시기, 미카는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은 채 동면에 들어가기 전 스승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냈다. 

이 산과 산 아랫마을에 봄을 가져다주는 하얀 용의 화신인 스승은 동굴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봄을 불러오는 일은 너무나 큰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겨우내 휴식을 취해 정기를 비축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낼 수 없다고 한다. 몇 개월을 그렇게 잠들어 있다가 스승이 드디어 눈을 뜨는 그 순간이 미카는 제일 좋았고, 결코 놓칠 수 없는 때이기도 했다. 잠에서 깨어난 그 제비꽃 빛깔의 두 눈동자에 가장 먼저 비치는 이는 반드시 자신이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너는, 누구지?" 

 

약간 멍한 눈빛으로, 다소 앳되어 보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그렇게 묻는 스승은 언제나 지난 1년간의 기억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미카를 낯설어하면서도 얼굴이 마음에 든다며 옆에서 떼어놓지 않으려 하는 봄, 차츰 마음이 끌리지만 어째서인지 인정하기 싫어하며 괜한 트집을 잡으면서도 막상 미카가 잠시만 자리를 비우면 찾으러 다니는 여름, 깊어진 애정에 결국 굴복하고 솔직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짧은 가을, 그리고 다음 봄을 불러오기 위해 잠에 들 준비를 하는 겨울의 초엽. 그 사계의 반복을 벌써 몇 십 번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미카는 지치지 않았다. 기억을 잃는 건 매년 너무 큰 힘을 써야 하는 반동이니 스승의 잘못이 아니고, 오히려 언제나 마지막에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모습에 가슴이 떨렸다. 고작 백 년도 살지 못하고 운명의 상대와 이별해야 하는 인간에 비하면, 영원히 사랑하는 이 곁에 있을 수 있는 자신은 얼마나 축복받은 신세인가. 그걸 생각하면 3개월의 고독 따위는 눈 깜짝할 사이였고, 상대가 자신의 존재를 잊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어차피, 금세 다시 사랑하게 된다. 어차피, 자신에게 돌아온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나를…." 

 

어느 정도 상황에 익숙해진 가을쯤 되면 스승은 언제나 그렇게 묻곤 했다. 청룡인 미카도 작은 규모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산을 갖고, 다스릴 수 있다. 이렇게 다른 용의 영역에 속박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면 미카는 늘 똑같이 대답했다. 

 

"내는 저 땅 속 깊이, 진흙탕 구덩이 속에 빠져 있던 새끼뱀이었데이. 아직 쪼그말 때, 인간 화살에 맞아가 꼼짝도 몬하고 있는데 어데서 벚꽃 꽃잎이 눈앞에 내리믄서 스승님이 내를 끌어내 줬다 아이가. 신령님이가, 했더마 진짜 신령님이라 깜짝 놀랐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 기억도 나지 않는구나." 

"응헤헤, 스승님이 기억 몬해두 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께 괘안타." 

 

이때쯤 되면 스승은 언제나 미카를 품에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스승이 벌써 몇 십, 몇 백 년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할 리 만무하니 미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스승의 변덕스러운 자비 덕분에 하마터면 진흙 늪 속에 가라앉은 채 사라질 뻔했던 작은 목숨 하나가 이렇게 아직도 부지되어, 생명의 은인 겸 사랑하는 이 곁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미카의 기쁨이자 자랑이었다. 

 

"사랑스러운 카게히라, 나의 카게히라. 너를 겨우내 혼자 지내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외로웠던 만큼, 봄이 되면 네 응석을 얼마든지 받아 줄 터이니…." 

"응아, 괘안타. 그게 스승님이 하는 일 아이가." 

 

스승은 겨울 동안 동굴 속에서 긴 잠을 자며 봄과 여름, 가을까지 좋은 날씨와 풍부한 비를 내려 주는 기력을 회복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스승을 '이츠키 님'이라고 부르면서, 위대한 산신령으로 섬기고 받들며 제사를 지내고 공물을 바쳤다. 아주 먼 옛날에는 인신공양이 있었던 적도 있지만, 미카가 촌장의 꿈에 나타나 협박한 후로는 뚝 그쳤다. 아무리 짧은 수명을 지닌 인간이라 한들 스승 곁에 자신 외의 다른 존재가 있다니 미카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카는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가을과 겨울의 스승에게, 동면에서 깨어나면 스승이 반드시 자신을 잊는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하면 스승의 아름다운 얼굴이 슬픔과 수심에 젖어 자신을 떼어놓지 않으려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승은 동면에 들기 전까지 미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어 주었고, 3개월의 잠이 끝나면 사랑하는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잠들곤 했다. 작별의 인사는 단 한 번도 이번 생의 이별처럼 서글프고 애달픈 적 없었다.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 상대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그런 가벼운 인사에 불과했다. 

미카도 그 편이 좋았다. 

 

"응아~ 스승님, 지금은 무신 꿈 꾸고 있을라나… 내를 기억은 몬해도 꿈에서 내를 봐 주믄 좋을 텐데…. 응아! 그치만 진짜 내는 지금 스승님 코빼기도 몬 보는디, 꿈 속의 내는 스승님이랑 놀구 있으믄 그거는 싫구마…." 

 

눈 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겨울이 깊어져 갔다. 겨울이 깊어진다는 것은 차츰 끝이 다가온다는 뜻이고, 그것은 그 너머에 봄이 있다는 뜻이다. 미카는 스승의 꿈을 상상하며, 졸다 깨다 하면서 설레는 기분으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겨울을 지냈다. 

 

 

***

 

 

싸늘한 날씨가 점점 누그러지고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작디작은 꽃망울이 맺힐 무렵, 동굴 밖에 있던 미카는 결계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스승이 동굴 안에서 잠이 들면 영력에 의해 저절로 생겨난 결계는 스승이 눈을 뜨기 직전 사라진다. 즉, 곧 스승이 잠에서 깨어나리라는 뜻이다. 

백짓장 같은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던 스승의 뺨에 약간의 핏기가 돌고 있었다. 미카는 두근두근 뛰는 가슴으로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스승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으, 음…." 

"응아! 응아, 응아… 처, 처음 뵙겠심더! 내는…." 

 

스승이 눈을 뜨고 자신을 낯설어할 때마다 미카는 열심히 새롭게 자기소개를 했지만, 처음에는 다소 다양한 레퍼토리로 시도해 보려는 노력도 했지만 아무래도 벌써 여러 번이다 보니 이제는 할 말도 다 떨어지고 말았다. 고민 끝에 결국 아무 꾸밈도 없는 통성명이나 하려고 입을 연 미카를 보며 눈을 몇 번 깜박이던 스승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카게히라. '처음 뵙겠습니다'라니?" 

"응아?" 

 

이번에는 미카가 눈을 깜박거릴 차례였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할 틈도 없이 침대에 일어나 걸터앉은 스승이 팔을 뻗어 미카를 끌어당겨 껴안았다. 

 

"자고 일어나니 마치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 같지만, 겨울 동안 홀로 쓸쓸했겠지. 불가항력적이라고는 하나 외로움 많이 타는 너를 그리도 오래 혼자 놓아두어서 미안하다, 카게히라. 자, 이제부터 우리의 시간을 만끽하자꾸나. 이 일대에 훈풍을 가득 채워 봄을 누리게 하고, 시간이 나면 작년에 같이 가 보기로 약속했던 카나타의 신역, 와타루의 신역에도 함께 방문하고…." 

"스승님? 내, 누군지 아나?" 

"…내 비록 아득히 긴 세월을 살아오기는 하였으나 아직 널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망령이 들지는 않았다는 것이야. 대체 왜 그러느냐, 카게히라 미카?" 

 

스승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리면서 성과 이름을 함께 부르자 미카는 어깨가 굳어버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스승님은 내를 기억 몬하는 기 당연한데, 갑자기 우짠 일이고? 

 

"아아, 벌써 이 안으로까지 봄의 기운이 흘러드는구나. 나무는 꽃을 피우고 짐승들은 짝을 찾는 이 계절, 내게도 네가 있어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 카게히라, 몇 개월간 만나지 못했던 몫까지 널 사랑할 수 있게 해 다오." 

"응아, 응아…." 

 

그 달콤한 목소리는 미카에게 독이었다. 겨울에 잠이 들기 직전, 아주 잠깐만 맛볼 수 있는 스승의 솔직한 애정이 거칠 것 없이 담겨 있는 그 목소리. 미카로 하여금 길고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방한구였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 조금만 맛보아야만 값어치가 있었다. 봄부터 벌써 이 정도라면 겨울에 잠들기 직전에는 대체 어떻게 될까? 그 정도의 짙은 애정을 세 계절 내내 받은 자신이 과연 추운 겨울을 혼자 견뎌낼 수 있을까? 

미카는 두려워졌다. 

 

"스, 스승님! 배, 안 고프나?" 

"아까부터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카게히라. 우리는 인간들처럼 먹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지 않으냐? 아아, 내게 필요한 것은 그저 달콤한 네 입맞춤뿐…." 

"응아, 내, 약초차 달여오께!" 

 

길게 자란 앞머리를 젖히고 이마에 입을 맞추려 하는 스승의 품에서 버둥거려 빠져나온 미카가 재빨리 차를 가지러 달음질쳤다. 품 속에 미카만큼의 공간이 남겨진 스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하아…." 

 

미카는 고개를 숙이고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봄이 왔으니 미카에게 새 봄옷을 지어 주겠다며 기분 좋게 재봉을 시작한 스승의 눈을 피해 밖으로 몰래 나왔다가, 그 길로 그만 산 밖까지 나와 버리고 말았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꽤나 멀리 나온 것 같은데, 어디인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돌아가서 스승과 눈을 마주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그냥 기운이 빠진 김에 주저앉아 버린 참이었다. 

 

"스승님이, 이상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왜 갑자기, 왜 갑자기 이제 와서 겨울잠을 끝낸 후에도 자신을 기억하는 걸까. 단순히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해 중에서 가장 애정이 높았던, 잠들기 직전의 상태에서 깨어나다니. 그 상태가 그대로 평상시가 되어 버린다면 아마 미카는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웬만해서는 죽지야 않겠지만, 미카의 조그만 애정 그릇으로는 도저히 받아내기 힘들 정도의 감정이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혀끝에 살짝 스치고 가기만 해도 혀가 타들어갈 정도로 달콤한 간식이기에 잠시여야 족하다. 

무리다. 온몸이 아주 작게 쪼그라들 것만 같다. 

뛰쳐나온 지 벌써 몇 시간이니 스승님이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신역인 산 안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 기분이 몹시 상해, 쌀쌀맞게 독설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아아, 차라리 그 편이 낫지 않을까. 어차피 봄이면 자신을 낯설어하며 밀어내는 스승을 어르고 달래는 데에는 익숙하다. 오히려 화를 내는 모습이 더…. 

 

"미~ 씨, 미~ 씨." 

 

그때 누군가가 미카의 어깨를 콕콕 찌르는 바람에 미카는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들었다. 꽤나 강력한 신기를 내뿜는 존재인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보면 자신은 그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응아, 다, 당신은 스승님 친구…." 

"네~. 그리고 당신은 제 다정한 『친구』, 슈의 소중한 아이죠. 그러지 않았다면 이곳에 들어오는 일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 미카는 주위가 온통 이 근방의 신령, 카나타의 기운으로 가득한 것을 뒤늦게야 느꼈다. 일단 스승의 신역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나머지 이곳이 어디인지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신역에 흙발을 들이는 일은 무례한 짓이라고 스승이 똑똑히 가르쳐 주었는데 그 가르침도 잊다니, 미카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죄, 죄송합니더! 죄송합니더! 일부러 들어올라꼬 들어온 기는 아이고예, 그게 그…." 

"후후, 저도 처음엔 당신이 슈의 『심부름』이라도 왔나 싶어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지나도 저를 부르지도 않고, 심지어 쪼그려 앉아 『울적』해하는 것 같기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다가왔어요~. 미~ 씨,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응아, 그, 그러니까 그…." 

 

카나타는 언제나 태도가 온화했기에 낯가림이 심한 미카로서도 비교적 대하기 편한 상대였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자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스승님이 너무 다정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니, 과연 이해해 줄 사람이 있을까? 

카나타가 허리를 굽히고 미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었다. 

 

"미~ 씨, 슈랑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응아, 응아…." 

"제게도 소중한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 아이들이 제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고 끙끙 『앓기』만 한다면 무척 『걱정』이 될 거예요. 슈도 분명 그러지 않을까요~?" 

 

미카는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다. 슈는 지금 무척이나 걱정하며 자신을 찾을 것이다. 같이 놀러가자고 약속했던 카나타의 신역까지 혼자 와 버렸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애타게 이곳저곳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용기가 없어서 돌아가지 못할 뿐. 

 

"스승님이, 억수로… 그… 애껴줘가꼬." 

"네에." 

"내헌티는… 분에 넘친다는 생각이 들 때믄… 우야믄 좋나?" 

 

한참이나 할 말을 고민하던 미카가 겨우겨우 그렇게 질문을 짜내자, 카나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슈가 커다란 사랑을 준다면, 그것은 미~ 씨에게 받을 『자격』이 있어서예요. 슈가 그런 『판단』을 실수할 리가 없지 않나요?" 

"자격… 내는, 잘 모르겠구마. 내가 스승님을 사랑하는 기는 솔직히 숨 쉬듯 당연한 일이지마는, 스승님은 내헌티서… 무슨 자격을 본 기가?" 

"글쎄요, 그건 슈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 아닐까요? 슈가 미~ 씨를 아끼는 『이유』는, 슈밖에 모를 테니까요." 

 

카나타의 정론에 미카는 다소 시무룩해졌다. 역시나, 결국은 그렇겠지. 하지만 미카는 두려웠다. 슈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이 낯선 것은 변함이 없었고, 미카로서는 올바르게 그 애정을 받아들일 방법을 몰랐으므로. 

 

"하지만, 저라면… 소중한 『가족』이 슬퍼하고 있다면, 이유를 알고 싶을 거예요."

"가족…?"

 

미카는 그 단어를 입 속으로 되뇌었다. 태어날 때부터 홀로였고, 슈를 만나 곁에 꼭 붙어 살기 전까지 늘 고독했던 자신에게 경애하는 스승이 '가족'이라니,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 단어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가슴속이 따스해졌다. 너무나 따스해진 나머지, 응어리가 녹아 눈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내는, 스승님의 가족이가?" 

"키득키득,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보였』답니다." 

 

미카는 카나타가 말하는 '아이들'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그 아이들 역시 우연히 카나타의 곁에 모이게 되었을 뿐, 카나타와 실제로 무슨 혈연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명랑하고 순수하며 착한 그 '아이들'과 카나타는 무척이나 친근해 보였고, 서로를 깊이 사랑했다. 그런 카나타가 자신과 스승이 '가족'이라 말한다면, 적어도 카나타와 아이들 사이에서 통하는 의미로서의 '가족'이라고는 볼 수 있지 않을까. 

미카는 무릎 사이로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그것은 슬퍼서가 아니라, 심장이 조금은 뜨거워져서였다. 

 

"고맙심더. 귀한 시간 뺏어가 죄송했심더." 

"『별말』을요. 그보다 슬슬 슈가 이 신역 『기슭』에 온 것 같으니, 나가 보는 편이 좋을 거예요." 

"스승님이?!" 

 

깜짝 놀란 미카가 허둥지둥 신역 밖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카나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숨을 헐떡이며 나타난 미카를 보자마자 슈는 문답무용으로 미카를 번쩍 안아 들고 짐짝처럼 옆구리에 끼었다. 놀란 미카는 버둥거리려 했지만, 슈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허공에 몸을 띄웠다. 울면서 뛰어올 때는 몇 시간이나 걸렸지만, 하늘을 날면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다. 

우아하게 하늘을 나는 하얀 용의 등에 탄 상태가 된 미카가 입을 뻐끔거리면서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슈가 낮은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카나타의 신역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싶었더니 사실 카나타가 웅크려 앉은 미카를 보자마자 슈에게 전령을 보낸 모양이었다. 고맙게 느껴진 미카가 한 마디 대답을 하려 했지만 슈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봄을 부르는 잠에 들기 전, 실은… 나는 마음속으로 도박을 했다는 것이야. 3개월이나 말상대도 해 주지 못하는, 스승이라 불릴 이유도 없는 나를 내버려두고 혹시 네가 산을 떠나더라도… 잠에서 깨어난 후 네가 내 곁에 없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오히려 너는 본디 홀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청룡의 아이이고, 자립적인 존재이니 계속 내 곁에 붙어 있는 것이 더욱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처음으로 듣는 슈의 고백에 미카는 숨을 들이켰다. 이것은, 기억을 잃은 슈 입장에서는 작년에 처음 겪는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간 수없이 동면에 들면서 슈가 매번 마음속으로 했을지도 모르는 각오가 아니었을까.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봄이 오면 다시 만나자, 하고 눈을 감던 슈가 사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미카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 슈의 등을 꽉 껴안고 붙들었다. 

 

"내, 내는 아무데도 안 간다고 안 했나! 내가 와 스승님을 두고 딴 델 가노! 내는 암데도 안 간데이!" 

"응, 그렇게 약속했었지. 하지만… 나는 소심하니까. 대범한 척 네가 어딜 가든 그것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도, 사실은… 두려웠던 것이야. 그래서 눈을 뜨자마자 네가 보인 순간, 얼마나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미카가, 겨울이 지나고 나면 슈가 자신을 잊는 게 당연하다는 각오를 늘 했듯이 슈 역시 동면 후 눈을 떴을 때 미카가 없어도 어쩔 수 없다는 각오를 늘 했다고 한다. 미카가 찢어지는 가슴을 간신히 부여잡고 눈을 뜬 슈에게 항상 새롭게 자기소개를 했듯이 슈도 잠이 들면서 매번 이별을 준비했다고 한다. 

기억해 주길 바랐다.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토록 강렬한 소망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 때문에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신카이 씨가, 스승님캉 내는 가족이라 캤다." 

"흐음." 

"스승님도, 그래 생각하나?" 

 

슈는 긴 수염을 흔들며 잠시 말이 없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가족이지. 가족이고─친구이자, 제자이고, 유일한 삶의 동반자이고,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존재. 내게 소중한 모든 존재가 너 하나에게 응축되어 있다고 하면 이해가 되겠느냐?" 

"응아아아아…."

 

정말이지 새봄이 왔는데도 가을과 겨울처럼 여전히 달콤한 스승님을 받아들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부림치던 미카는 결국 당황과 기쁨 중 기쁨이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슈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린 미카가 청룡의 모습으로 몸을 바꾸어 옆에서 나란히 날며 말했다. 

 

"스승님, 내 실은… 집에 가믄 할 얘기가 있데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심약한지, 또 널 잃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수치심도 버리고 늘어놓았는데 갑자기 그렇게 말하다니 내 가슴을 얼마나 철렁하게 만들 셈이라는 것이야?" 

"응후후, 괘안타. 스승님한테도 나쁜 얘기는 아일끼다. 머, 좀 놀랄 수는 있지마는…." 

 

몇 십 년 동안이나 잠든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매번 자신을 잊은 스승을 붙잡고 1년을 함께 보내며 헌신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고 말한다면. 

외로움을 꾹 참았던 자신의 행동이 스승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려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이야기해도 좋다고─미카는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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