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당신에게 부디, 모르페우스의 축복이 있기를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짙게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서 고양이를 주웠다. 

신비로운 분홍색 털의 늘씬하고 키가 큰 고양이. 내가 손을 내밀자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다가왔지만 품에 안겨 주지는 않고, 발 밑에 웅크리고 앉아 앞발을 핥기 시작했다.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에 헤헤 웃으며, 어차피 쓰다듬으려 해 보았자 피할 게 뻔하지 싶어 차마 손조차 내밀지 않고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게히라! 이 모자란 실패작 반푼이 인형 같으니, 분명히 레슨이 있다고 말했는데 어디서 농땡이를 피우는 것이지? 어디서 꾸물대고 있었던 것이야? 뱃속의 솜을 전부 빼내서 새로 채워 줘야 할 정도인가?" 

"응아아! 스승님, 미안타!"

   

문득 고개를 드니 그곳에는 커다란 모자를 소중히 한 손에 든 채 찌푸린 미간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스승님의 익숙한 모습이 있었다. 방금 전 스승님과 비슷한 무언가를 봤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승님 옆에서는 완벽한 인형으로 꾸며진 나즈나 형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빨리 오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쪽으로 달려갔다.

   

"아아아! 아름다운 니토는 오늘도 빈틈없이 준비가 되어 있는데, 카게히라! 라이브 무대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으면 그것은 전부 네 탓이야!" 

"자, 잘 해볼끼다! 내도 열심히 할끼다!" 

"농! 열심히 하겠다는 말로는 부족해! 실제로 완벽하게 해내야만 Valkyrie의 무대라고 할 수 있는 법! 세 치 혀로만 그 자리를 어설피 모면하고자 하는 말은 듣지 않겠다는 것이야!" 

"걱정 마래이! 내도 암만 부족하고 실패작이어도 스승님의 인형인께!"

   

무대에서만큼은, 스승님이 원하는 바를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인형이 될 것이다. 

그것만이 스승님에게서 인정받는 방법. 버림받지 않을 길.

 

    

*** 

  

 

이번에도 실패했다. 

슈는 무거운 마음으로 무거운 머리를 들며 엎드려 있던 책상에서 몸을 일으켜, 아직 옆에서 잠들어 있는 미카를 바라보았다. 미카는 잠꼬대로 끙끙 앓으면서도 통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교내 아르바이트에 바빠 제대로 잠잘 시간도 내지 못하는 미카를 굳이 깨울 생각은 없었고, 억지로 깨운다 한들 미카가 꿈 속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몇 번의 시도를 통해 알고 있었다. 

옆에서 기다리던 나츠메가 눈빛으로 물었다. 슈는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젓고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의자를 뒤로 밀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 형, 내 마법도 만능은 아니Ya. 게다가 같은 마법을 너무 여러 번 거는 것은 몸에 좋지 않Ah. 기껏해야 앞으로 한두 번이 최대한일 거Ya. 조금 서두르는 게 좋겠Eo."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것이야."  

 

거의 Valkyrie 전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수예부실 안에는 아직 잠든 미카와 슈, 나츠메, 그리고 소리 없이 바느질을 하면서 계속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는 츠무기가 있었다. 나츠메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더니 아무 말 없이 수예부실을 나갔고 슈는 책상 한쪽에 쌓여 있던 옷감을 끌어모아 와서는 다시 자리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15분쯤 조용히 시간이 흘렀을 무렵 마침내 미카가 "응아아…."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내 또 잠들었었나?! 5시부터 아르바이트 가야 되는데! 빨리 안 가믄 늦겠구마!" 

"…복도에서 뛰다가 넘어지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다리에 힘을 주고 똑바로 걸어가라는 것이야." 

"응아! 다녀온데이!"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간 미카가 대답과는 반대로 우당탕 뛰어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한숨을 내쉬었다.

   

"슈 군, 괜찮은 건가요?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는 것 같은데." 

"…네가 참견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야."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저도 일단은 수예부원이기도 하고, 슈 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츠메 군도 기뻐할 거라는 생각에 나츠메 군을 데려온 건 저니까…."

   

츠무기가 책임을 느낄 일도 아니고 애당초 츠무기가 없었다면 나츠메의 마법을 거쳐 미카의 꿈을 들여다본다는 발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슈 자신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츠무기에게 그런 말을 늘어놓으며 일종의 위로를 건넬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기에 슈는 못 들은 체하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츠무기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무시하는 건가요?! 그건 슬퍼요…."  

 

말없이 섬세한 레이스뜨기에 집중하던 슈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안개가 너무 짙어,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었지." 

"네?" 

"두 번째는 그 애가 내 존재를 인지하는 데에서 그쳤고, 이번에는 그래도 발 밑으로 다가가는 데까지는 성공했다는 것이야. 조금씩 진척이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한두 번이라면 시간이 없어. 어서 내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켜, 꿈 속의 그 환각과 격리시켜야 하는데… 조급해지니 짜증이 나고, 짜증이 나니 우아하지 못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군."  

 

슈가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자 츠무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제로 누군가를 타인의 꿈에 개입시키는 마법은 나츠메 군에게도 상당한 부담이 되는 것 같기는 해요. 슈 군이 잠들었던 시간, 항상 기껏해야 2~3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뇌에서 인식하는 건 그것보다 더 길었을 거라지만."  

 

미카는 최근, 자꾸 잠을 잔다. 

처음에는 교내 아르바이트에 지쳐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냥 안타깝게만 여기던 슈였지만 차츰 그 빈도가 기이할 정도로 높다는 것이, 싫어도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슈가 보는 앞에서 미카는 거의 자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야 학년과 반이 다르니 어떻게 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방과 후 수예부실에서, 그리고 또 집에서는 거의 자는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눈을 뜨면 방금 전처럼 잽싸게 아르바이트를 하러 뛰쳐나가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건강에 문제가 있나 싶어 메인터넌스를 제안해 보니 그것은 또 뛸 듯이 기뻐하며 받아들였고, 꼼꼼히 몸 상태를 훑어보았으나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러니 결국은 누적된 피로의 문제라고밖에 볼 수가 없었고 그 점에서 슈는 미카를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말려도 이 부분에서는 듣지 않으니 도리가 없다. 

같은 수예부원이어서 그 모습을 간혹 보던 츠무기가 나츠메에게 도움을 청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고, 슈는 잠시 망설이다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동의했다.

   

"꿈에 들여보내는 것 자체는 가능한De… 아마 슈 형의 지금 모습으로 등장하진 않을 거Ya." 

"그게 무슨 뜻이지?" 

"미카 군의 꿈에는 당연히 미카 군이 상상하는 슈 형이 나올 거잖Ah? 그런데 거기에 전혀 상상하지 못한 또다른 슈 형이 나오면 미카 군이 혼란에 빠지지 않겠Eo? 하지만 그게 슈 형이라는 건 미카 군도 어렴풋이 느낄 테니Kka… 미카 군의 꿈 속에서 슈 형은 아마 미카 군이 생각하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거Ya. 그 점에 당황하지만 말아 달라는 이야기Ji." 

 

어떤 모습일까. 슈는 그것이 어쩌면 커다란 괴물 같은, 끔찍한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변명 삼아 추악한 아집으로 똘똘 뭉쳐 고압적으로 찍어누르다 결국 비극을 불러 온 자신의 모습은 미카의 내면에서 충분히 그렇게 형성되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 괴물일 거라면, 그래도 예술적인 형태의 괴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덤이었다. 

그러나 미카의 무의식이라는 짙은 안개 속에 내려앉고 보니 뜻밖에도 시야가 낮았고, 네 발로 걷는 감각이 있었다. 카게히라! 하고 부를 생각으로 입을 여니 뜻밖에도 야옹~ 소리가 들려 기겁을 했다. 자신의 몸을 재빨리 살펴보자 머리카락과 비슷한 분홍색 털로 뒤덮여 있었다. 

짙은 안개 너머에 미카의 실루엣 같은 것이 어렴풋이 보였지만 첫 시도에서는 그것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금세 마법의 잠에서 깨어났다. 

실루엣만 겨우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츠메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누구든 자기 무의식에 다른 존재가 침투하는 걸 거부하는 건 당연한 거니Kka… 그래도 안개 너머로 목표하는 인물의 실루엣이 보였다는 것만 해도 첫 시도치고는 괜찮은 결과라고 Bwa. 조금 더 시도해 볼 가치가 있겠Eo." 

"카게히라가… 나를 거부한다고…?" 

 

나츠메는 비교적 긍정적인 판단을 내린 편이었지만, 슈는 뜻밖에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야말로 자신이 미카를 포함하여 모든 세계를 거부했던 시기를 생각하면 우스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미카에게 자신이 거부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슈 군, 저도 생각해 봤는데… 평상시 자꾸 잠이 드는 것도, 어쩌면 현실 속에서도 슈 군의 존재를 거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옆에 있던 츠무기가 태평하게 말했다. 슈는 눈을 부릅뜨고 그쪽을 홱 돌아보았다.

  

"지난번에 미카 군이 쓰러졌을 때 말이에요." 

"…." 

 

그 이야기를 끌고 나오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진다. 방 청소를 하던 미카는 우연히 오래된 테디베어 인형 하나를 떨어뜨렸고, 너무나 낡았던 그 인형은 가벼운 충격으로도 팔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 때문에 미카가 가출했던 일을 생각하면 슈는 아직도 가슴이 철렁한 기분이었다. 제가 가 봤자 어딜 갔을까, 기껏해야 학교나 친구 집 정도겠지, 하는 당연한 생각조차 미카가 돌아오고 나서야 겨우 들었을 정도였다. 

안즈를 통해 겨우 연락이 닿았을 때 자신이 무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는지조차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그만큼 슈는 그때 당황하고,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하필 그 자리에 츠무기가 있었다. 

 

"저는, 사실 두 사람의 일에 참견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때 슈 군의 달라진 요즘 모습에 미카 군이 얼마나 주저하고, 망설이고, 당황하는지를 보았어요." 

"나는… 그냥, 그 아이에게 조금 더 다가가고 싶었을 뿐이야. 아침 인사를 건네고, 길가에 핀 꽃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날씨가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런 사소한 일상을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예술 이야기를 할 때면 누가 상대이든 몇 시간이고 끊임없이 떠들어댈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미카에게 그런 사소한 말을 건넬 때면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소 어색한 미소와 익숙지 않은 작은 단어들. 

그것이 가출을 감행하고, 함께 있는 시간에도 잠으로 도피하게 만들 만큼 미카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면. 

 

"부정적인 감정들은 물론 훌륭한 예술의 원동력이 되지만, 내가 오로지 분노와 증오만으로 예술을 한다고 그 아이가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내 불찰, 내 부족함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두 번째로 미카의 꿈 속에 들어갔을 때, 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미카는 지난번보다 약간 걷힌 안개 저편에서 고양이 슈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리로 오라는 듯 손짓도 했다. 하지만 고양이 슈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 옛 유닛복을 입은 자신의 환영이 나타나 미카를 불렀다. 그 옷을 입고 활동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압적이고 난폭하며 분노에 찬 모습이었다. 

미카는 사뭇 기가 죽은 표정을 지었지만 재빨리 그 뒤를 따라갔다. 마치 눈앞에 유일하게 내려진 생명줄이라도 붙잡고 있는 듯. 

황야에 내쳐져, 매달릴 곳이라고는 모호한 신의 존재밖에 없었던 어느 고대 백성처럼. 

 

"…그렇다고 이제 와서 예전과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다는 것이야. 그럴 마음도 들지 않고." 

 

슈는 한숨을 내쉬며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마드무아젤을 바라보았다. 조언을 해 주면 좋겠지만, 원래도 마드무아젤은 슈의 머릿속에 없는 말은 해 주지 않는다. 

 

"저는 슈 군의 변화,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만요…. 미카 군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일 뿐이네요." 

 

 

*** 

 

 

바위처럼 단단한, 견고해서 아무런 빈틈도 없는 보라색 덩어리가 있었다. 

나는 옆에서 계속 그 보라색을 향해 말을 건다.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 반 친구들과 나누었던 대화,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었던 해프닝, 안즈쨩이 신경 써 준 이야기. 

보라색 덩어리는 아무 말도 없다. 

 

"스승님, 우지 마래이." 

 

나는 그 보라색 앞에 식사를 내려놓고, 마실 것을 내려놓고, 스승님이 좋아하는 인형들을 내려놓고, 팔을 떼어 내려놓고, 다리를 떼어 내려놓고, 심장을 꺼내 내려놓는다. 

 

"내 모지란 인형이라 미안하데이. 할 수 있는 기 이런 것밖에 없꾸마. 캐도 스승님이 잠깐 쉬고 있을 뿐이란 거,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줄 거란 거만은 흔들림 없이 믿고 있응께 걱정 없다. 내는 믿는다." 

 

행복한 왕자처럼 온몸의 모든 것을 다 벗겨 내려놓는다. 이제는 내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지도 모르겠지만, 해체된 신체 부위 하나하나가 전부 보라색 덩어리를 향하고 있다. 바라보고 있다. 

덩어리는 여전히 미동도 없고 숨소리도 없다. 

 

"스승님, 머라 말 좀 해 도."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겨우 쥐어짜 그렇게 말했다. 아아, 전부 조각조각내서 줘 버렸으니 당연하겠지. 내게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지만, 괜찮다. 전부 스승님을 지키고 있으니까. 

 

-키야앙, 캬악!

  

그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고양이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나씩 바닥에 늘어놓았던 온 몸의 부위들이 의식도 못 한 사이 원래대로 돌아와 멀쩡해져 있었고, 분홍색 고양이는 사납게 울면서 보라색 덩어리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나는 손도 대지 못할 만큼 견고하고 튼튼했던 그 덩어리가 고양이의 발톱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태에 나는 깜짝 놀라 고양이에게 달려들었다. 

 

"안 된데이! 머 하는 기고! 우리 스승님한테! 고마해라! 그라믄 스승님 깜짝 놀라 죽어버릴끼다!" 

 

하지만 고양이가 찢어버린 보라색 덩어리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공동(空洞)을 보고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아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저 속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이 꿈 속에서, 공허를 향해 계속 나 자신을 바치고 있었다는 것을.

  

 

*** 

 

 

"…오늘은 웬일로 늦잠을 자지 않았군. 막 깨우러 가려던 참이었다." 

 

장갑을 끼고 크루아상을 오븐에서 꺼내던 슈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미카가 잠이 덜 깬 눈으로 키친 입구에 서 있었다. 

 

"응아… 잘 기억은 안 나는데에, 꿈자리가 사나웠데이." 

 

꿈이라는 말에 슈가 움찔했다. 나츠메를 집으로 부를 수는 없으니 밤의 꿈까지 들여다보지는 못하는 상황인데, 대체 무슨 꿈을 꾸었길래 이른 아침부터 침대를 빠져나오고 싶어졌을까. 

 

"날이 흐리니 우산을 가져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야. 현관에 챙겨 둘 테니 잊지 말고 지참하도록." 

"고맙데이, 스승님." 

"일본에서는 누구나 비가 오면 우산을 꺼내 쓰지만, 비가 워낙 흔하고 금세 그치곤 하는 유럽에서는 비가 올 때 우산을 꺼내는 사람을 외국인으로 취급하곤 하지… 나는 그것만큼은 적응이 안 될 것 같지만, 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라는 것이야." 

"응아, 멋있는 트렌치코트 입고 다니믄 되지 않나? 스승님은 코트도 잘 어울리니께. 마, 안 어울리는 기 없지마는."

  

샐러드를 차리던 슈가 문득 미카를 돌아보았다. 

 

"…와 그라노?" 

"아니, 이렇게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눈 것이 퍽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미카가 입을 다물었다. 슈는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도 미카가 금세 입을 다시 열었다.

  

"긍가…? 근데 내는 그래 생각 안 든데이. 항상 스승님이랑 같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함께 있기야 있었다마는…." 

 

그것은 내가 아닌, 네가 만들어낸 네 꿈 속의 내 모습이었을 뿐. 

너는 너를 학대하고 모멸감을 주던 과거의 내 환상이나마 곁에 두고 있었기에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스승님? 와 그래 쓸쓸한 눈빛이고?" 

"내가?"

  

슈는 정말로 당황했다. 

 

"응아… 미안하데이, 내 요새 바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잠만 자뿟더니 스승님을 쓸쓸하게 맹글…." 

"농! 그런 일 없…."

  

쓸쓸했다고, 내가? 

카게히라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서? 

지금까지 어두컴컴한 외길 통로 안에서 오로지 미카의 속마음만을 쫓아 정신없이 달리던 중, 눈앞에 느닷없이 거대한 거울이 내려꽂힌 느낌이었다. 

슈는 습관처럼 소리를 지르려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어서 식사를 시작하지 않으면 지각하겠다는 것이야." 

"…? 응아, 잘 묵겠심더."

  

갓 구워 따끈따끈하고, 호호 불어 찢으면 껍데기가 사르르 무너지면서 겹겹의 하얀 속살과 함께 버터 향기가 피어오르는 크루아상. 

미카가 그것을 작은 입으로 소중히 베어무는 모습을 보며 슈는 역시나 예전 같은 관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비록 미카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 과거로 회귀하려 한다 해도, 현실을 자꾸만 밀어내고 꿈으로 도망가려 한다 해도, 결국 자신은 지금의 모습으로밖에 다가갈 수 없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미카의 말마따나, 너무나 쓸쓸한 일이다. 

슈는 고심 끝에 할 말을 골랐다.

  

"카게히라, 혹시 오늘도 교내 아르바이트 스케줄이 있느냐?" 

"응아, 저번에 청소 도와달라칸 데가 있기는 한데…." 

 

미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음, 혹시 늦어지게 되면 수예부실에는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자기 전에 내 방으로 오도록." 

"스승님 방에?" 

"음. 꼭 오라는 것이야." 

"아… 알았데이."

  

일방적인 통보에 미카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어째서인지 희미하게 기뻐 보이는 눈치였다. 

 

***

 

 

"스승니임~ 안에 있나…?" 

"아, 들어오거라."

  

저녁식사를 마치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미카가 두어 번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목욕도 마쳤는지 머리가 아직 덜 말라 있었다.

 

"머리카락은 항상 완전히 말리고 자라고 하지 않았느냐. 쯧… 이쪽으로." 

"응아아…." 

 

따뜻한 바람과 함께 슈의 손가락이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오자 미카는 약간 쭈뼛거리며 파르르 떨었다. 머리를 말려 주는 일쯤이야 메인터넌스 때나 평상시 관리가 소홀할 때 가끔 있었던 일이지만 일부러 자기 전 방을 찾아오라고 한 데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미카는 아직 눈치를 보고 있었다. 

 

"되었군. 이리로 오거라." 

"응… 응아?! 스승님?!"

  

스스로도 이미 잘 준비를 마친 슈가 먼저 침대에 누워 손짓하고 있었다. 미카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뭘 그렇게 놀라지? 내가 하는 말을 듣지 않을 셈이냐?" 

"그, 그건 아인데… 스승님, 갑자기 와 그라는데? 머 잘못 뭇나? 어데 아픈 건 아이제?" 

"불쾌하군. 내 판단에 무슨 문제라도 느껴졌다는 건가? 감히 불만이라도?" 

"아이다! 아이다! 스승님 말은 늘 옳제!" 

 

미카가 후다닥 침대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불 속에서 몸을 움츠린 채 쭈뼛대는 태도는 여전했기에, 슈는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일이니, 무슨 사정인지는 묻지 말아 다오. 지금은 그저 입을 다물고 휴식을 취하는 데에만 집중하라는 것이야." 

"응아… 알았데이."

  

고상한 빛깔의 간접조명 속에서 미카는 눈을 감고 잠이 들려 애썼지만 이상하게도 낮에는 그토록 쉽게 쏟아지던 잠이, 막상 자야 할 시간인데도 통 오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조금씩 뒤척거리던 도중 문득 옆에 누워 있던 슈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슈는 미카가 고전하는 사이 이미 잠들어 버렸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곱게 잘 잠들었구마." 

 

미카는 한쪽으로 몸을 돌려 슈의 잠든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슈가 학교로 복귀하면서 잠이 든 슈의 얼굴을 보는 건 꽤나 오랜만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슈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던 시절,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지쳐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자 버리던 모습은 의외로 자주 보았었는데. 

 

"우리 스승님, 진짜 최고로 아름답고 멋지고 예술적이고 결코 틀리지 않는 신 같은 사람이지마는… 와 갑자기 같이 자자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캐도 마, 이래 편히 자는 모습을 보니께 내 마음까지 편해지는구마." 

 

미카는 조심스럽게 손을 이불 밖으로 빼내, 한참 망설이다 슈의 이마 쪽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단정한 이마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살살 넘겨 주자 슈가 서늘한 미카의 손이 기분 좋게 느껴졌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딘가에서 본 고양이 같았는데, 어디서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스승님… 무신 꿈 꾸나? 라이브하나? 옆에 내도 있나…?" 

 

본격적으로 몸을 돌려 엎드린 채 슈의 귀에 대담하게 속삭여 보고 있는데 갑자기 슈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카게히라…." 

"히익! 잘몬했심더!"

  

미카는 후다닥 몸을 뒤로 뺐지만 슈의 그것은 정말로 잠꼬대였는지 그 후로 아무 말도 없었다. 잠시 식은땀을 흘린 미카는 헤헤 웃은 뒤 그 뒤로 한참이나 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스승님 꿈에 내가 나오나…? 스승님 취향으로, 째그맣고 이쁘게 나오나…? 그랬으믄 좋겠구마…."

  

이윽고 미카는 따뜻한 이불 속으로 편안하게 기어들어가, 두 사람 몫의 따끈따끈한 체온 속에서 꿈 없는 깊은 잠을 잤다. 

새벽녘 무렵 예쁜 고양이가 무릎 위로 올라와 그릉거리던 꿈을 얼핏 꾼 것도 같지만 금세 지나가는 바람에 잊어버렸다.

  

 

***

  

 

"요즘은 미카 군이 전처럼 꾸벅꾸벅 졸거나 툭하면 잠들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태평하게 바느질을 하던 츠무기가 문득 말했다. 슈는 못 들은 체했다. 

 

"그런데 슈 군, 그래서 미카 군의 꿈 속에 슈 군은 어떤 모습으로 나왔어요?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못 들은 것 같은데." 

 

슈는 못 들은 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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