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핑크 뮤지엄, 그린 뮤지엄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어두운 터널 속에서 언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또 빠져나오는 끝에서 환한 빛을 보긴 했는지, 실은 무엇 하나 또렷하지 않다. 하지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 과정이 단순히 눈앞을 바라보고 똑바로 걸어나오는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깊은 땅 속에 파묻혀 있는데 누군가가 부단히 물을 주고, 영양분을 주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 위로 올라와 싹을 틔운 일에 가깝다고 이츠키 슈는 생각했다. 

슈 자신에게도 없는 그 인내심과 굳은 신념의 소유자는, 지금 침대에 누워 온몸을 완전히 슈에게 맡긴 채 한없이 이완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승님 메인터넌스… 은제 받아도 윽수로 좋구마…." 

 

귀국이 오랜만이라, 메인터넌스도 몇 주 만에 겨우 받았다. 미카는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주무르고 문지르는 그 손길을 새삼 황홀하게 받아들였다. 뭉친 근육은 조금 센 힘으로 꾹꾹 눌러 풀어 주고, 림프절 부분은 부드럽게 쓸어내리듯 마사지해서 노폐물을 배출시키고, 혈 곳곳을 짚어 막힌 곳을 뚫어 주고, 거칠어진 피부에는 오일과 크림으로 영양과 윤기를 더해 주는 슈의 메인터넌스는 사실 제대로 돈을 주고 받으려면 금액을 다 따지기도 힘들 터였다. 

하지만 미카에게 메인터넌스는 그 프로급의 관리 실력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온전히 베풀어진다는 데 더 큰 가치가 있었다. 성실하고 집중력이 좋은 슈는 작업을 할 때 결코 딴전을 피우지 않고, 눈앞의 일에만 온 신경을 다한다. 흐트러짐 없는 그 눈길과 손길이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에게 못박혀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미카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인 셈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혼자서도 어느 정도 잘 해내고 있는 모양이군." 

 

그야말로 정수리에서부터 발바닥까지 빠짐없이 꼼꼼하게 훑은 슈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누워 있는 미카 옆에 걸터앉았다. 

 

"응아~ 아직 부족하지 않나? 내는 역시 스승님 없으믄 안 된데이. 혼자서 열심히 해 보고는 있는데… 그래두 인간답게 잘 해 보기가 쉬운 일이 아이다. 다들 친절하게 도와줘가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마안…." 

 

저도 모르게 우는 소리가 흘러나와 아차, 하고 입을 막으려 했지만 슈는 딱히 질책하지 않고 방금 자신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정성껏 헤어 오일을 발라 부드러워진 미카의 찰랑이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농. 카게히라, 너는 충분히 잘 하고 있다는 것이야. 늘 멀리서 내가 지켜보고, 네 활약을 든든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다오." 

"응헤헤… 오늘의 스승님은 평소보다 훨씬 더 다정하데이. 오랜만에 봐가 그런가?" 

 

연락도 자주 하고, 이렇게 시시때때로 직접 만나고는 있지만 그래도 1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각자가 상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사시에 큰 장벽이 된다. 지난번에는 웬 게임 속에 통째로 잡혀먹힐 뻔했고, 또 얼마 전에는 자기 자신이 선물한 인형에게 몸을 빼앗긴 일도 있었다. 지금의 미카는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지만 그 날개는 너무나 연약하고 가벼운 나비 날개여서 도처에 산재한 거미줄에 쉬 걸리곤 하는 모습으로밖에, 슈의 눈에는 비치지 않았다. 

 

"네 팔다리에 줄을 묶고 인형의 집에 가두어서 세상의 모든 좋지 않은 것들로부터 격리시켜 두는 것도 내 욕심이라면, 딱히 떠나고 싶지 않다는데 굳이 날개를 달아 날려보내서 그 날아다니는 모습을 아름답다며 감상하는 것도 내 욕심이지. 아아, 너를 위해서 한다는 모든 일이 사실은 나 자신의 이기심의 발로다. 우스꽝스러운 나를 비웃어 다오." 

"응아아~? 스승님이 또 먼가 혼잣말을 하고 있데이…. 내는 스승님캉 같이 있을 수만 있으믄 멀 우짜든 다 좋은데…." 

 

느닷없이 시작된 슈의 참회에 미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슈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쳤다. 이 손 또한 슈의 솜씨로 핸드크림을 마디마디 꼼꼼하게 발라 매끄러우면서 잡티 한 점 없는, 옥으로 빚은 듯 새하얗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응아, 스승님. 내는 일케 생각했데이. 스승님은 윽수로 커다란, 세상에서 젤루 큰 미술관에 걸려 있는 젤 크구 유명한 작품이제. 아이다, 그 미술관 그 자체라캐도 상관없구마. 아니믄 마, 바티칸 대성당 천장에 있는 천장화라 캐도 좋구. 암튼 글케 장엄한 예술인기다." 

"…?" 

"그라믄 내는… 미술관이라믄 항상 있지 않나, 출구 옆에 그 선물가게. 그기다." 

"선물가게… 뮤지엄 숍을 말하는 것이야?" 

 

슈가 눈을 껌벅거리자 미카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미술관에는 윽수로 많은 작품들이 있어가 정신없이 막 보믄서 돌아다니지 않나? 그카구 와~ 내 쪼매난 몸뚱이로 다 소화하기 쉽지 않구마~ 예술의 세계 기막히게 심오하데이~ 하믄서 지쳐서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데가 선물가게 아이가? 어두운 조명 속에서 예술품에 압도돼가 멍~ 하니 있다가 팟! 하고 밝고 화사한 선물가게로 나오는기제! 방금 전까지 봤던 마 위대하고 엄청난 예술품이 귀여운 엽서에 냉장고 자석에 연필에, 쥬얼리에, 멋하믄 인형에까지, 작고 편한 모양새로 맹글어져서 잔뜩 진열돼 있는기다. 내는 딱, 스승님 옆에 고 정도로 붙어 있으믄 행복할끼다." 

"카게히라…." 

 

미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슈 입장에서도 이해가 안 될 바는 아니었다. 최근 들어서는 아이돌로서의 인기로 따지면 해외에서의 활동이 활발한 슈보다 TV에, 잡지에, 인터넷에 자주 나오며 비교적 친근한 이미지를 쌓은 미카가 더 높을 정도였고 그렇게 생각하면 대중성이라는 의미에서는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세속적인 의미로는, 미술관 입장료와는 별도로 미술관을 유지하게 해 주는 힘이기도 했다. 예술에만 몰두하느라 활동비에 소홀하던 슈 대신 없는 체력을 깎아 가며 열심히 자금을 벌던 미카의 모습도 겹쳐졌다. 

하지만 아마도 미카는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닐 터였다. 그 또한 슈는 알고 있었다. 

 

"하하… 그래서는 내 미술관의 뮤지엄 숍에 온통 알록달록한 사탕통과 기묘한 생김새의 봉제인형으로만 가득할 것 같으니 사양하겠다는 것이야." 

"머고! 내 그런 짓 안한다 아이가! 스승님의 작품을 최선을 다해 치켜세우고, 매력을 더 돋보이게 해 주는 굿즈를 잔뜩 맹글끼다! 아아, 스승님 작품밖에 없는 미술관의 뮤지엄 숍, 진짜로 한 번 기획해 보고 싶구마… 거가 천국이제…." 

 

미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농. 정신을 차리거라, 카게히라. 내 작품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겠다고 그토록 발버둥치며 노력하지 않았더냐?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려 하다니, 그렇게 안이해져서는 발전이 없을 것이야." 

"윽, 이거는, 굳이 따지자믄 내 작품 활동이 아이고 취미활동, 팬 활동이라고나 하까…." 

 

입술을 오물거리다 결국 말을 흐리고 만 미카의 두 손을 잡고 슈가 차분하게 말했다. 

 

"이런 것도 정신적 메인터넌스에 들어갈 테니, 이참에 단단히 말해 두마. 카게히라, 내가 미술관이라면 너 또한 하나의 미술관이라는 것이야. 우리는 대등한 파트너, 그렇지?" 

"응아~ 으, 응아아~." 

 

늘 하던 말이었는데도 맞잡은 양손의 깍지를 끼고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하니 미카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고개만 위아래로 열심히 끄덕거렸다. 

 

"…그렇게 웅얼거리지 말고 그 어느 때라도 똑똑히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언어의 조율까지 필요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만… 크흠, 카게히라. 팬시한 뮤지엄 숍의 가치를 비하할 생각은 없으나, 네가 고작 내게 딸린 부속품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 다오. 그래서는…." 

 

-후세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야. 무슨 아까운 짓을 했느냐고… 이 이츠키 슈라는 녀석은 어리석은 놈이라고, 말이지.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던 슈는, 이미 그때와도 자신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후세 사람? 그렇게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지금의 자기 자신부터가 질타하고, 규탄하고, 애통해할 것이다. 

 

"너의 예술을 사랑하고, 네가 지어올린 미술관에 가기를 고대하고 있는 팬들을 배반하는 행위가 될 것이야." 

 

결국 슈는 그렇게 마무리지었지만, 미카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스승님은?" 

"음?" 

"스승님은, 내 미술관에 안 와 줄끼가?" 

 

언제부터 이렇게 당돌해졌더라? 마냥 버림받는 것만이 두려워 오들오들 떨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움츠러들기만 했던 그 앳된 인형이. 자신이 머쓱한 마음에 굳이 내뱉지 않고 숨기려 했던 말을 반드시 듣고야 말겠다고, 보석 같은 두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게 언제부터였더라? 

 

"물론, 가지 않을 도리가 없지." 

 

심장이 사랑스러움으로 차올라 뜨거운 피로 가득 물드는 것을 느끼며 슈가 그렇게 말하자 미카는 활짝 웃었다. 

 

"응헤헤, 스승님한테는 24시간 개방이데이! 휴관일도 없꼬, 마감시간도 없꼬, 뮤지엄 숍도 마카 다 꽁짜다 안카나! 은제든지 오기만 하이소!" 

"하하, 그래서는 금방 경영난에 부딪히고 말 터. 다음에는 미술관 경영학에 대해 가르쳐야겠구나." 

 

슈는 미카의 미술관에 채워질 작품들의 배경을 생각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의 생활,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보냈던 나날들, Valkyrie에서 인형이었던 시절, 교내 아르바이트, 슈 자신이 졸업한 후 유메노사키에 홀로 남겨진 시간…. 삶 그 자체를 갈아넣어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에게 역경은 어쩌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사고 싶은 재료일지 모르지만, 결국 그것은 생명을 깎아먹는 요인이기도 하다. 

미카의 생명을 깎은 원인이 일정 정도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 생명을 늘려 줄 책임 또한 자신에게 있지 않을까. 함께 손을 잡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걸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슈는 문득 물었다. 

 

"카게히라, 장수를 꿈꾸는 예술가를… 모순적이라고 생각하느냐?" 

 

미카는 그 말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님은 오래오래 살아야 한데이. 세계의 보물이다 안카나,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보여줘가 천국으로 인도해야제."

 

미카의 미술관은 들어가면, 아마도 첫인상은 어두컴컴할 것이다. 팝아트풍 귀신의 집 같은 분위기일지도 모른다. 명화들이 전부 테디베어로 재현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가난한 여인네들이 이삭 대신 빨간 사탕을 줍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은 기괴하면서도 또 그 기괴함과 조화를 이루는 귀여움으로 가득하고, 배고픈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 무엇보다 이츠키 슈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슈는 그 찬란한 완전긍정 앞에서 눈이 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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