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이 세상에 우리 둘뿐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퐁 뇌프 양 옆으로 흐르는 센 강변에는 항상 헌책 노점이 즐비하다. 산책 도중 근처 단골 꽃집에 들러 꽃을 사고 나면, 크게 사고 싶은 책이 없어도 별 생각 없이 그 노점 옆을 따라 걸으며 옛 성현들의 내음을 맡는 것이 최근 슈의 취미였다. 오래된 책에서는 오래된 책에서만 풍기는 그윽한 향기가 있다. 책을 스쳐 간 여러 주인들의 손길을 감상하다 보면, 때로는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보물이 발견되기도 하는 비밀스러운 재미가 있다. 보석 같은 예술의 진수는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을 수 있다는 지론에 따라, 슈는 가장 낡은 책부터 훑어보곤 했다. 

특별히 찾는 작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제목에 '사랑'이 들어가면 아무래도 손이 간다. 최근 슈의 마음 속 가장 큰 화두가 사랑이었던 탓이다. 이전에는 예술과 사랑에 대해 논하고자 하면 사흘 밤낮을 떠들어대도 화제가 끊이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요즘은 전처럼 이야기하고자 해도 도통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프랑스의 학우들은 그런 슈를 보며 '진짜 사랑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라고 짓궂게 놀려댔지만 슈는 도무지 짚이는 데가 없었다. 자신은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고,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정하면서도 예술에 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매사를 바라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대꾸하면 놀림은 더욱 심해졌기에, 결국 두 손 들고 고개를 가로저어 버리곤 했다. 인형을 들고 다닌다고 놀림받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대처 방법이 많이 어른스러워진 편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한다. 

아, 물론 이것이 일본에 남아 있는 악우들이었다면 또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하간 그날도 사랑에 관한 책 몇 권을 들고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슈는 문득 한 권의 책을 구입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그저 귀에 약간 익은 이름의 어느 철학자가 사랑에 대해 쓴 책이었기에 조금의 호기심이 발동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 홍차를 우려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책을 펼친 슈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조용히 넘기던 도중, 점점 책을 통해 들려오는 철학자의 목소리에 완전히 빨려들고 말았다. 

포옹.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위. 어쩌면 섹스 이상으로-크흠!-서로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합일(合一)의 경지. 자신이 유일하게 부모님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이 사지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칭칭 감싸고, 빈틈 하나 남기지 않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을 수 있는 행위. 쌍방의 합의가 있어야만 그토록 온전한 포옹이 가능하며, 또 쌍방의 합의가 있어야만 완전한 포옹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로 다른 곳, 다른 시간, 다른 상태로 태어난 두 사람이 마치 두 조각의 퍼즐처럼 이토록 완벽하게 하나로 맞아떨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완벽한 사랑 형태, 그것이 바로 포옹이라고 철학자는 역설했다. 

 

"…카게히라."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것은 '스승님, 내 안아 도!'하고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천진난만한 웃음. 때때로 그 아이의 별 뜻 없고 솔직한 말 속에서 마치 예술의 진리와도 같은 무언가를 벼락처럼 깨닫게 되는 일이 지금까지도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시 인간의 본질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나온다던 어느 성인의 말을 슈로 하여금 늘 피부로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미카였다. 

가끔 머릿속이 톱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즉흥적으로, 또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그 어린아이가 무슨 철학적인 사유를 기반으로 포옹을 조를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본능에서 우러나는 그 요구는 너무나 본질을 꿰뚫고 있고, 그것이 슈의 사고를 자극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시키는 일은 지금까지 왕왕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책 한 권으로 근거를 얻었을 뿐. 

그러니까 한 마디로, 슈는 지금 당장 미카를 포옹하고 싶어졌다는 뜻이다. 아주 격렬하게.

 

 

***

  

 

"응아~ 스승님, 이번에는 내 시간이 나가꼬 공항으로 마중 나올 수 있어서 참말 다행이다 안카나!" 

 

손을 흔들며 멀리서 다가오는 미카가 이전보다도 더욱 아름다워 보여 슈는 눈을 살짝 비빌 뻔했다. 최근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었다고 홀 핸즈로 연락을 받았긴 했지만, 등장인물에 완전히 몰입했는지 이전처럼 긴장감 없이 헤헤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은 사라지고 등도 곧게 펴고, 표정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일정이 바쁘면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늘 말하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야." 

"내한테는 시간이 있는데 스승님 마중을 몬 나오는 기 무리가 된다카이…. 그 스트레스? 가 쌓이믄 안 좋다꼬, 나루쨩도 그랬데이." 

 

미카는 슈의 옆을 나란히 걸으며 자신의 근황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확실히 달라졌다. 이전 같았으면 호들갑을 떨면서 얼굴을 보자마자 냅다 안기기부터 했을 텐데,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한 미카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져 슈는 무심코 물었다. 

 

"이번 드라마 배역이 다도의 달인이라고 했던가? …어때, 늘 부산스러운 카게히라로서는 소화하기 쉽지 않은 역할일 텐데." 

"응아~ 캐도 마, 스승님도 'Valkyrie의 격조를 해치지 않는 괜찮은 배역으로 보이니 허락하지'라고 하지 않았드나? 그니께 내도 최선을 다하고 있제. 솔찌키 말하믄 아직 녹차 맛은 잘 모르겠데이. 쓰기만 하구…." 

"그렇다고 곁들임 화과자만 너무 많이 집어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야. 차에는 차 본연의 맛이 있는 법. 그것을 즐길 수 있기 전까지는 다도를 안다고 할 수가 없어." 

"역시 스승님은 어른이구마… 멋지데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공항을 가로지른 둘은 비교적 사람이 없는 한산한 곳으로 나왔다. 슈는 살짝 주위를 둘러본 뒤 캐리어를 잠시 세워 놓고 미카를 향해 가볍게 팔을 벌렸다.

  

"자,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잘 참았구나. 칭찬해 주마." 

 

하지만 미카는 약간 당황한 눈빛으로 그런 슈를 마주보았다. 

 

"으, 응아아… 스승님이 먼저 안아 준다꼬 할 줄은 몰라서 내 맘의 준비가 안즉 안 됐는데…." 

"마음의 준비고 뭐고, 항상 포옹을 먼저 조르는 것은 네가 아니었느냐?" 

 

이 반응에 슈가 더욱 당황했다. 그 사람 많은 공항 안에서 얼굴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덤벼들어 덥석 안기곤 하는 버릇에 자신이 여러 번 야단을 쳤기에, 이번에는 그것을 학습했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설마 이런 표정이 돌아올 줄이야. 

 

"그… 스승님, 내 이번에 다도의 달인 역할을 맡으믄스 진짜 다도의 달인 쌤한테 지도를 받게 됐다 아이가." 

"으음?" 

"내 평소 자세가 영 안 좋다고, 절대 허리를 꼬부정하게 수그리지 말라꼬 단단히 혼이 났데이. 평상시부터 자세가 좋지 않으믄 드라마 슛 드갔을 때 새삼 반듯하게 고친다캐도 표시가 난다꼬." 

"그… 그래서?" 

"내도 마 스승님 아니믄 누가 시키는 거 고분고분 따르고 싶지는 않지만… 자세를 바르게 하라는 기는 마 스승님도 했던 얘기고, 항상 단전에 힘을 바짝 주고 코어 근육을 기르라고 했던 것도 스승님 얘기니께… 알았다 캤데이. 캐서 요새는 이래 반듯하게 허리 펴고 있는 것 말고 딴 자세는 안 하는 중이라…." 

"안 하는 중이라…?" 

"드라마 끝날 때까지는 앵기는 것도 안 할라고…." 

"농…." 

 

당황한 슈의 표정을 보고 미카는 어떻게 해석을 했는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덧붙였다. 

 

"그… 글타고 진짜 그 쌔임이 하는 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고대로 인형처럼 따르기만 하는 기는 아이다! 내, 내도 내 판단 가꼬 하는 일이니께 화내지 마래이!" 

 

아아, 관심이 없을 때는 늘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가 막상 그쪽으로 시선을 쏟으면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 같은 존재여.

  

 

*** 

 

 

[다도는 곧 그 사람의 마음. 차선(茶筅)을 저을 때의 손놀림은 물론, 차솥에서 물을 떠서 찻사발에 따를 때조차도 항상 평정을 염두에 두고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집중해야 할 것이야. 한 잔의 차 안에 이 넓은 우주가 있고, 또 자기 자신의 세계가 있는 법. 늘 명심하여라.] 

"후후, 미카쨩. 처음에는 어떻게 연기해야 하나 굉장히 고민하더니, 역시 옆에 본보기가 있어서 그런지 곧잘 하잖아." 

"…물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기는 하다만, 명확한 이미지 없이 흉내만을 낸다고 되는 것은 아니거늘…." 

 

성주관 공유룸에 앉아 홀 핸즈에 올라온, 아직 TV에 공개되지 않은 미카의 드라마 리허설 영상을 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라시가 뒤에서 슬쩍 들여다보았다. 슈는 방해받은 기분에 얼굴을 찌푸리려다 상대가 아라시인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탁자에 세워 함께 볼 수 있도록 했다. 

 

"아무리 대본을 외워서 줄줄이 읊는 데 능숙하다 한들, 저 애는 아직 녹차의 맛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야…." 

"어머, 꼭 무언가에 조예가 깊어야만 드라마를 찍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도둑질을 해 보지 않았어도 픽션에서 도둑 역할을 할 수는 있는 것처럼." 

 

아라시의 말은 정론이었지만 애당초 슈는 아라시와 말싸움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기에, 아니 그보다 더 심란한 일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다시 휴대전화의 작은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두운 빛깔의 기모노를 반듯하게 차려 입고,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슈의 평상시 말투를 흉내 내며 근엄한 다도의 달인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미카의 모습은 그야, 상당히 그림이 되기는 했다. 아름다웠다. 원래도 새까맣고, 새하얗고, 새빨간 일본 인형 같은 차림새가 꽤나 어울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슈 자신이 잘 알고 있었으니, 역할 자체에 불만은 없었다. 다만. 

 

"그러고 보니 드라마 촬영이 꽤 바쁜 것 같던데, 미카쨩하고는 자주 만나고 있는 거야?" 

"대체로 밤이면 퇴근은 하지만 새벽까지 오지 않을 때도 있다.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그 애는 자꾸 수다를 떨고 싶어 하지만, 내가 강제로 재운다는 것이야. 그렇지 않아도 체력이 부족한데." 

 

그래서 이렇게 화면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품에 안을 수 없는, 아름다운 카게히라 미카의 이데아를. 

모처럼 긴 비행을 거쳐 일본까지 돌아왔는데 이래서야 프랑스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흐응~." 

 

아라시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슈를 빤히 쳐다보더니, 드물게도 공유주방에 가서 차를 준비해 주었다. 

 

"나루카미…?" 

"이츠키 선배가 평상시 마시는 고급 차는 아니겠지만, 일단은 얘기를 들어 줄 수는 있어." 

 

슈가 의아한 표정으로 찻잔과 아라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라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그렇게 우수에 찬 눈빛으로 화면 속 미카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걸 보니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일단 미카쨩이 '스승님'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진 않았으니, 이번에는 '스승님' 쪽 얘기를 들어 줘도 될 것 같고." 

"…미안하군. 카게히라가 늘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야." 

"흐흥, 마치 자기 자신은 신세진 적 없다는 말투네?" 

 

이 화제가 나오면 항상 두 손 들 수밖에 없다. 

결국 슈는 차 한 모금으로 마른 입을 축이고, 정직하게 말했다. 

 

"정말로 이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내가 다시 카게히라를 안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야." 

"푸웁!!!!" 

 

뜨거운 차를 있는 힘껏 내뿜는 나루카미 아라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었지만 슈는 아라시가 왜 차를 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디 몸이라도 좋지 않은 건가?"하고 물으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탁자를 닦아 주었다. 아라시는 허둥지둥 손수건을 빼앗아 들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저, 저, 그…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이츠키 선배, 프랑스에서 음담패설을 배워 온 건…?" 

"방금 내 말의 어디가 대체 음담패설이라는 거지?" 

"아… 응, 그래. 설마 이츠키 선배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후후. 둘만의 사정은 둘이 있는 곳에서만. 그래, 그래. 그냥 허그를 말하는 거지? 그치?" 

"포옹 외에 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야…." 

"응, 그래. 알았어. 이번 건은 내가 미안했어." 

 

아라시는 진심으로 사과했고 슈는 대체 왜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얼굴만 찌푸렸다. 

 

"그래서, 무슨 말이야?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다시 포옹을 할 수 있을 거라니? 지금은 못 하고 있다는 말이야? 미카쨩이 너무 바빠서?" 

 

슈는 공항에서 미카에게 들었던 대로 '다도의 달인 선생님' 이야기를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라시는 손깍지를 끼고 턱을 괸 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흐응, 이츠키 선배. 미카쨩이 선배한테 안길 수 없어서 아쉬워한다면 모를까, 선배가 그걸 고민하고 있다니 뜻밖인걸." 

"…더는 인형이 아니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 애에게는 아직 내 메인터넌스가 필요하다는 것이야. 그것은 단순히 몸 상태에 대한 면밀한 점검뿐만 아니라 일정 정도의 스킨십도 포함되어 있는데… 넘치도록 받은 사랑을 되갚아 줄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 중 하나를 빼앗기고 나니 솔직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좋지?" 

 

아라시의 입술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한때는 온 힘이 담긴 주먹을 날려 주고 싶을 정도로 화를 낸 적도 있는 상대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 고지식한 남자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일이 자꾸 생긴다. 받은 만큼의 사랑을 되갚아 주겠다는 낯간지러운 말을 지극히 엄숙하게 내뱉을 수 있는, 성실한 로맨티시스트. 

아라시는 불현듯 물었다. 

 

"정말… 정말로, 그게 전부야?" 

"음?" 

"미카쨩에게서 받은 사랑을 되갚아 주기 위해,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그 애를 꼭 껴안아 주고 있었던 거야?" 

 

슈는 갑자기 목이 탔다. 눈앞에 있는, 적당히 식은 찻잔을 무심결에 집어들고 흘려넣으려 했지만 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낙심한 눈빛으로 잔을 흘끗 내려다본 슈가 꽤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사랑에 안주하는 한심한 인간으로 보였다면, 그 인상은 정정해야만 하겠군." 

"그거야, 선배." 

 

그제야 아라시가 빙긋 웃었다. 

 

"말을 하면 되잖아." 

"음?" 

"오로지 네가 포옹을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껴안아 주고 싶다고. 그렇게 말을 하면 되잖아." 

 

휴대전화 속 영상에서 미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례(茶禮)는 차를 대접받는 사람과 대접하는 사람, 양쪽이 모두 있어야만 성립하지. 차를 마실 상대를 생각하며 정성을 다해 차를 준비하고, 그것을 받아 마시는 사람 또한 감사의 마음과 차맛 감상을 반드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의를 갖추어 서로를 대하되 상대가 애정을 갖고 자신을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하지만… 그 애는 역할에 최선을 다해 몰입하기 위해 지금도 고통스러운 자세를 견디고 있어.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고 건강에도 좋지만, 평상시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자세를 통제하지 않던 사람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내 욕심만으로 그것을 강요하기는…." 

"어휴! 그렇게 똑똑한 척 하면서 왜 이럴 때는 바보가 되는 거야, 정말!" 

 

아라시가 찻잔을 옆으로 밀고 슈 앞으로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미카쨩은 허그를 좋아하지만, 평소에는 선배가 귀찮아한다고 생각하니까 이 일을 선배를 기쁘게 해 줄 기회로 삼은 거잖아! 자기가 강요하던 허그니까! 선배는 싫지만 억지로 해 주는 거라고 생각해서! 이유가 있어서 허그를 안 하면 선배가 마음속으로 좋아할 거라는 생각에!"

"…!" 

"정말,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으면 모르다니 스승님은 헛똑똑이라니까." 

 

슈가 의자를 뒤로 밀어내며 일어섰다. 

 

"실례했군. 차는 맛있었다. 나중에 카게히라와 함께 인사를 하러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그래요, 그래~. 어서 가 보기나 해." 

 

아라시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역시 사랑의 큐피드가 되는 일은 즐겁다고 생각했다.

 

  

***

  

 

휴대전화로 스케줄을 확인해 드라마 촬영 현장의 위치를 확인한 슈는 즉시 택시를 불렀고, 도착할 때쯤 되니 마침 촬영이 끝난 참이었다. 

 

"카게히라!" 

"응아, 스승님! 내 델러 왔나?!" 

 

막 메이크업을 지우고 나온 미카가 환하게 웃으며 슈를 맞이했다. 그리고 스태프들에게-물론 허리를 반듯하게 편 채-꾸벅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슈에게 달려왔다. 

 

"카게히라, 이리 온." 

 

슈는 문답무용으로 미카에게 다가가 그 야윈 몸을 껴안았다. 

 

"응아앗?!" 

 

아아, 그랬어야 했다. 오랜만에 공항에서 만났을 때부터, 미카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만 끄떡했을 때부터 주위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이렇게 안아 주었어야 했다. 우리는 Valkyrie, 세상에 단둘뿐인 동포. 어차피 세간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지, 그런 것은 이미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퍼즐 조각을 맞추듯 이렇게 둘이서 하나가 되면 충분했다. 이 얼마나 충만하고도 위대한 행위인가. 서로가 서로를 감싸는 순간 우리 둘은 세계에서 유리되어 오로지 한덩어리의 완벽한 존재로 완성된다. 

벌써 한참 전부터 들끓던 욕구가 미카의 체온을 전신으로 느낀 순간 겨우 평온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스, 스승님… 내, 안 앵긴다구…." 

"흥,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 네가 안기지 않는다고 했지 나의 포옹을 금지당한 기억은 없다만." 

"그, 그기는 글치만…." 

 

미카가 어색하게 안긴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드라마 촬영장의 스태프들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대부분 두 사람에게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간혹 슈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눈인사를 건네고 가는 게 다였다. 

 

"언제부터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만큼 건방져졌지?" 

"응헤헤, 내 스승님 그거 진짜 좋아한데이." 

 

슈가 일부러 턱을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하자 미카가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 품에 얼굴을 묻었기에 보이지 않았다. 미카가 얼마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

  

 

얼마 후, 갑자기 바쁜 스케줄이 생겨 파리로 돌아간 슈에게서 미카를 경유하여 프랑스 명품 브랜드의 한정판 신상품이 아라시 앞으로 전달되었다. 사정 모르는 미카는 그저 빵싯빵싯 웃으며 '스승님이 선물 주라캤데이~. 내는 스승님이랑 나루쨩 사이가 좋아서 요새 참 좋다~.'라고만 말했고 선물을 받아든 아라시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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