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나도 해 본 적 없는데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처럼 둘 다 스케줄이 없는 어느 주말 오후, 슈가 만들어 준 보송보송한 파자마를 입고 테디베어를 껴안은 채 소파에 앉아 멍하니 커피를 마시던 미카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한 손에 문고본을 들고 책장을 넘기던 슈는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지?"

"응아… 아, 아무 것도 아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미카를 본 슈가 미간을 찌푸렸다.

"끝까지 숨기지 못한다면 애초에 티를 내지 말라는 것이야. 물론, 그렇게 교묘한 행동을 너 같은 반푼이 녀석이 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만."

"내 모지라서 미안타…."

그러면서도 흘끔흘끔 이쪽을 자꾸 훔쳐보는 시선에 결국 얼마 안 되는 인내심이 금세 끊겨버린 슈가 다시 입을 열기 직전, 목을 거북처럼 움츠린 미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실은…."

"음."

"얼마 전에 낫군이 드라마를 찍었지 않나. 미케지마 선배캉 시이나 선배도 나오는."

"…그 끔찍한 텐쇼인의 이름은 일부러 피하는 모양이군."

"응아아… 스승님도 아는구마. 암튼 TV 틀었다가 우연히 낫군 나오는 부분만 잠깐 봤는데, 그, 청춘 연애 드라마 아이가. 순정만화가 원작이고… 캐가 낫군이랑 여주인공이랑 분수대 앞 벤치에서 알콩달콩하는 기를 봤는데에…."

또다시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 끙끙 앓는 미카를 보고서 슈는 책 읽던 손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몸을 미카 쪽으로 돌렸다.

"그런 통속적인 연애물을 보고 뭔가 속물들이 가질 법한 바람을 품었다면, 나라고 뭐… 내용에 따라서는, 그렇게까지 완강히 거부하지 않을 수도 있다만."

"응아?!"

"그러니 어디, 말을 해 보지 그래."

왠지 조금은 재미있어하는 슈의 표정을 읽었는지, 미카는 눈을 꽉 감고 입을 열었다.

"그… 응아아, 무, 무, 무릎베개…!"

"…무슨 베개?"

"나, 나나나낫군이 분수대 앞 벤치서 졸고 있는데, 지나가던 여주인공이 무릎베개를 해 주는 장면이 있데이! 그거 보니께 응아아, 낫군은 참말로 좋겠다아… 카는 생각이 들어가꼬… 아, 암것도 아이다! 그냥 몬 들은 걸로 해 도!"

도대체 어떻게 하면 벤치에서 졸다가 여주인공의 무릎을 베고 눕는 전개가 펼쳐진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슈는 잠시 그 모습을 떠올려 보고, 미카가 그것을 부러워한다면 협력 못 해 줄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딱히 슈의 미학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다.

"…원하는 것이 그 정도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해 줄 수 있다만."

"응아앗! 진짜가?!"

"흠.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읽던 책에 꼼꼼히 책갈피를 끼워서 한쪽으로 치운 슈는 가볍게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미카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얹었다. 그 순간 놀란 듯 미카의 몸이 잠시 경직되었다.

"으, 응아아! 그, 아니… 스승님, 내는, 저어…."

"음?"

"아, 아이다… 응헤헤…."

방금 전 분명히 말했다시피 미카가 드라마를 보면서 부러웠던 것은 여주인공이 아니라 나츠메였고, 아까부터 슈를 흘끔흘끔 쳐다보던 것은 슈의 무릎을 베고 누운 자신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하니 통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서였다. 설마하니 슈가 냅다 누워버릴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미카는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 말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도 없었기에 결국 두 손만 파닥파닥 내젓다,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진 채 웃는 미카를 보고 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원하던 게 이게 아닌가? 내가 모르는 무릎베개가 따로 있었나? 물론, 이 행위를 '무릎베개'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지 않나 싶기는 하지만…. 이럴 경우 머리를 얹는 대부분의 부위는 허벅지에 해당하니 말이지."

"응아아, '허벅지베개'는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지 않나. 아이다, 아이다, 스승님. 응헤헤, 내 소원 들어 줘가 고맙데이. 어떻노, 편하나?"

살짝 몸을 뒤척여 편한 자세를 취한 슈는 잠시 낯선 감촉을 음미했다. 미카가 입은 것은 보송보송한 반바지 파자마였고, 다리를 내리고 소파에 앉아 있으니 바지 자락이 말려 올라가 맨다리가 거의 드러난 상태였다. 

뺨에 서늘한 허벅지의 맨살이 살짝 닿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매끄러운 피부와 그 아래의 탄력 있는 근육이 생생히 느껴져, 지금 베고 있는 것이 인형이 아니라 정말로 혈관을 타고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사람의 다리라는 실감이 뚜렷해졌다. 

그렇군, 속물들이 걸핏하면 언급하는 '무릎베개'의 의의는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어….

"응아, 스승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잠시 아무 말이 없는 슈를 보고 불안해진 듯 미카가 물었다. 손 둘 곳을 찾지 못해, 애매하게 팔을 벌린 채 가슴 앞에서 들고 있는 기묘한 자세였다.

"…취침시 베고 자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실제 베개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이야."

"역시 글켔제~. 응헤헤, 내 삐쩍 말라가 딱딱하구 불편할끼다. 스승님, 고만 일어나도 된데이."

미카는 머쓱하게 웃으며 재촉했다. 하지만 일어나기는커녕 몸을 살짝 돌려 반듯하게 누운 슈가 미카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검지를 세운 채 팔을 쭉 뻗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은데.」"

그것은 나츠메가 연기하는 후배 역할이 여주인공의 입술을 검지로 가로막고 속삭인 대사 그대로였다. 역할의 대사여서인지 평상시의 슈 목소리보다 다소 앳되게 들려, 미카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스, 스, 스승님도, 봐, 봤나?"

"…그 통속극 속에서 꼬맹이가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예상이 가니, 한 번 흉내를 내 봤다는 것이야. 후후…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군…."

자신이 방금 전의 대사를 내뱉은 순간 파르르 떨리는 미카의 긴 속눈썹이 바로 코 밑에서 보였다. 놀라서 조금 굳어진 전신의 근육과 신경, 그리고 조금 올라간 체온까지도 그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아주 예민하게 느껴졌다.

메인터넌스를 할 때면 이것보다 더욱 몸이 밀착될 때도 있고, 그에 따라 미카의 신체적 반응을 즉각적으로 느끼는 일도 흔히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의 자세는 묘하게도 상대의 움직임을 더욱 민감하게 감지하는 듯했다. 상대의 신체에 자신의 귀를 붙인 자세로 머리, 즉 급소를 내주고 있기 때문일까. 

조금만 더 집중하면 상대의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마저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이미 관절부의 맥박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몸을 맞대고 있으니 차츰 심장 박동의 리듬조차 동일해질 것만 같다. 마치 하나의 심장을 둘이서 나누어 뛰고 있는 것처럼.

"응아아, 그, 글타믄 다행이데이. 저어, 리츠 군이나 나루쨩한테도 자주 무릎베개 해 줬는데, 아무래도 딱딱하고 불편하제? 해도 괘안타 카기는 했지만, 둘 다 상냥하니께…."

그 순간 슈의 눈썹이 움찔했다.

"자주?"

"응아아, 더러 성주관 방에서 셋이 모여가 쥬스도 마시고 잡담하믄서 파자마파티를 했데이. 그럴 때…."

미카의 서늘한 허벅지 감촉을 느끼며 잠시 좋아졌던 기분이 어째서인지 바닥으로 내리꽂히듯 급강하했다. 슈는 미카에게서 등을 돌려 누우며 물었다. 목소리에서 조금 토라진 톤이 배어나오는 것을, 스스로도 조절할 수가 없었다.

"그 둘뿐인가? 네가 무릎베개를 해 준 건."

"아이다, 옛날에 고아원에 있을 때 동생들한테 이미 많이 해 줬데이. 글카구 하지메 군캉 교내 아르바이트 하다가 억수로 피곤해 보여가 한 번 무릎 빌려준 적 있었구… 성주관에서 살게 된 후로는… 응아, 언젠가 북 룸에서 어쩌다 보니 츠무쨩 선배한테 한 번 해 준 적 있고, 공유방에 앉아 있는데 아마기 선배가 갑자기 달려들어가 베고 누워가꼬 내사 마 깜짝 놀랐데이. 생각나는 기는 마, 그 정돈 거 같은데…."

"…."

이런저런 사람들의 무릎베개를 해 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카의 두 손이 내려와, 슈의 어깨와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그러나 슈 쪽에서 "…농."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미카는 움찔 놀라 두 손을 재빨리 떼었다.

"미, 미, 미안타. 내 감히 스승님 몸에 손을…."

"농, 농! 안 돼, 절대 안 돼!"

"응아앗, 내 잘못했데이! 인제 안 건드릴…."

몸을 돌려 미카 쪽을 바라보고 누운 슈가 손가락을 들이대며 목청을 높여 화를 냈다.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야! 내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어 사쿠마와 나루카미까지는 어떻게 이해해 보려 했건만, 아오바에 아마기라니! 농! 안 돼! 그 누구도 안 돼!"

"응아아아, 방금 스승님 몸 만진 것땜에 그러는 기 아이가? 와카노? 머가 안 되는데?"

"무릎베개!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에게 이 자리를 내주다니, 절대 허락 못 해!"

"응아?"

미카가 눈만 깜박거리는 사이 슈가 말을 마구 쏟아냈다.

"애당초 퍼스널 스페이스에 이렇게나 둔감한 자세를 아무하고나 공유하다니, 배려가 없다는 것이야! 항상 타인과는 적정 거리를 유지할 것! 아무리 친밀한 교우관계라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어! 이토록, 파렴치한, 지나치게 가까운, 숨결조차 닿을 듯한 자세를, 나보다도 먼저, 다른 누군가와…."

"…미, 미안타! 잘못했데이! 내 안 하께!"

놀라 허둥거리던 미카가 슈의 머리 밑에서 서둘러 다리를 빼내려 했다. 그러나 슈는 미카의 납작한 배에 얼굴을 묻은 채 팔을 뻗어 가느다란 허리에 둘러서,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

"스승님…?"

당황한 미카가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슈 쪽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미카로서는 밀어낼 수 없는 팔힘으로 계속 붙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응아, 알았데이. 내 다 잘몬했다 안카나. 기분 풀그라."

왠지 이 상황이 익숙하다 했더니, 고아원에서 여러 번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다고 문득 미카는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토라지면 곧잘 제일 큰 미카 형아, 또는 미카 오빠를 찾아와 허벅지를 베고 옆으로 누워서는 미카의 배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누워 있곤 했다. 등을 토닥여 주며 자장가를 불러 주면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들고, 깨어날 때면 금세 방긋 웃는다.

슈가 갑자기 고아원 동생들처럼 토라진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누구나 풀이 죽을 때가 있는 법이고, 그럴 때 타인의 온기는 가라앉은 마음을 데워 주는 햇살처럼 느껴진다. 

미카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슈의 등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농! 하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기에,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그 단정한 뒤통수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는 어렵다. 그래도, 언젠가는.

"스승님이 하지 말란 기는 안 하께. 내, 인제 인형은 아이지만… 그런 거랑은 상관없이, 스승님이 싫어하는 일은 웬만하믄 안 하고 싶데이."

"…카게히라."

"응."

몸으로 가로막혀 먹먹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했다는 것이야. 절대, 다른 누구에게도… 이 자리를 내주지 않겠다고."

이전처럼 강압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은 차라리 익숙하지만, 칭얼대듯 약속을 요구하는 것은 어째서인지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늘 한 살 많은 형이라는 사실을 강조해도 이럴 때면 세 남매 중 막내인 모습이 은연중에 드러나곤 한다는 느낌에 미카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응후후, 그러엄. 내, 절대 스승님 말고는 아무한테도 무릎베개 안 해주께. 약속이데이."

아직도 미카의 배에 얼굴을 묻은 슈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계속 자세를 바꿔 가며 몸을 뒤척이기는 했어도 일단 미카의 허벅지에 머리를 댄 이후로 한 번도 떼지 않고 오히려 팔을 뻗어 꽉 붙들고 있는 것이─걱정했던 것만큼 그리 불편하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미카는 간질간질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억지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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