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그 장미가 말하기를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홀핸즈를 들여다보았더니 소속사의 부소장 사에구사 이바라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사무적인 표정으로 메시지를 넘겨 보자, 그 내용은 요전번에 미카가 혼자 출연하게 되었다며 불안한 목소리로 연락했던 예의 잡학 버라이어티 방송의 본방 전 영상 체크 요청이었다. 

아이돌로서 벌써 어느 정도 경력이 되는데도 여전히 여러 패널들 사이에 섞여서 허둥거릴 모습은 굳이 영상을 보지 않아도 쉽게 상상이 되었다. 그 아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위기에서는 놀라운 담력을 보여주는 주제에 별 것도 아닌 상황에서 쉽게 패닉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는,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이츠키 슈 입장에서 카게히라 미카의 머릿속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전부 꿰뚫어볼 수 있는 작고 아둔한 뇌이자, 죽을 때까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영원의 미스터리이기도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전송된 영상을 열어 보니 시작부터 패널들 속에 오도카니 앉아─흥,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살짝 치켜든 자세는 합격점이군. 하지만 표정 관리까지는 아직 멀었어─어색하게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과연 예상대로라 슈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엊그제 새해가 온 것 같은데 벌써 1월이 다 가고, 밸런타인데이가 얼마 안 남았어요! 대부분 연인들의 날로 알고 있는 이 밸런타인데이, 사실은 생각지도 못한 기원이 있다는데…!』

MC의 호들갑과 함께 밸런타인데이의 기원에 관련된 VCR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슈는 벌써부터 지루해져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뻔히 아는 내용을 세기의 발견인 양 과장해서 만든 영상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가끔 화면 한구석에 지나가는 미카의 얼굴이 비춰질 때마다 매번 새로운 표정으로 바뀌어 있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발견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직접 메인터넌스를 해준 게 언제였더라, 저 앞머리는 자기 손으로 자르진 않았을 테지…. 

지루함을 버티며 겨우 VCR이 끝나자 밸런타인데이에 관한 여러 가지 퀴즈가 시작되었다. 수준 낮은 퀴즈에 한숨이 나왔지만 머릿속에 정답이 계속해서 떠오르니 입 밖에 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게 출연진들이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파리 하숙집의 슈가 퀴즈에서 혼자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의기양양해하다 문득 목이 말라 옆에 놓여 있던 홍찻잔을 집어들려던 순간, '그것'이 등장했다.

『자, 마지막 퀴즈입니다! 밸런타인데이에 연인들끼리 꽃 선물을 자주 주고받곤 하죠. 특히 새빨간 장미가 가장 인기인데요! 사실 이 장미의 송이 수에도 꽃말이 다 있다고 합니다! 한 송이는 '첫눈에 반함', '당신밖에 없어요', 두 송이는 '이 세상에 우리 둘뿐'! 자, 지금 송이 수에 따른 꽃말이 자막으로 나가고 있죠?』

장미 세 송이는 '사랑합니다', '고백'.

네 송이는 '이 마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아요'.

다섯 송이는 '당신과 만나 정말 기뻐요'.

그리고 일곱 송이는 '비밀스러운 사랑'… 으응?

『여기서 문제! 장미 여섯 송이와 여덟 송이의 꽃말은 각각 무엇일까요?』

힘차고 낭랑한 MC의 목소리와 함께 슈는 하마터면 뜨거운 홍차가 남실남실 들어 있는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문제적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문제인 만큼 난이도가 꽤 높죠? …어, 잠깐만요, 카게히라 씨! 카게히라 씨가 아시는 것 같은데요? (좌중 웅성웅성)』

『응아, 스승님이 장미를 좋아해가, 그런 기 있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나루쨔… 어데서 듣고 조사해 뒀심더… 근데 이래 허무하게 걍 맞춰도 되능교?』

『이것도 '스승님 찬스'로 들어가는 건가요! 역시 Valkyrie 하면 장미! 네, 네! 어서 말씀해 주세요!』

웅성거리던 MC와 패널들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미카를 주시했다. 미카는 우물쭈물하다 결국 카메라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여섯 송이는 '당신에게 푹 빠졌어',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무엇이든 함께 나눕시다'.

여덟 송이는 '당신의 배려와 격려에 감사합니다'입니더.』

『카게히라 씨, 정답! 정확합니다!』

박수와 환성으로 스튜디오가 끓어오르는 가운데 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화면 안의 미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면, 혹시 어쩌면 지난 '쇼콜라 페스' 때 자신이 했던 행위의 의미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은 장미 초콜릿 여섯 개를 그냥 줄 수도 있었는데 굳이 자투리로 두 개를 더 만들어 총 여덟 개를 주었던, 당시 자신의 진심을.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이며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 있는 미카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긴장감 하나 없는 웃음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슈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잠깐, 아니, 혹시.'

지난 달, 그러니까 작년, 미카의 생일에 있었던 일이다.

크리스마스와 생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 일부러 귀국한 슈는 단골 호텔에 방을 잡고 미카를 불러내 연말연시를 이곳에서 함께 지낼 것을 엄숙히 선언했다. 침대가 하나뿐인 것을 보고 미카는 다소 당황한 눈치이기는 했으나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문제는, 그날 밤 미카가 봉제인형을 껴안고 소파에 웅크려 잠이 들었다는 부분이었다.

"카게히라, 카게히라…. 이런, 너무 깊이 잠들었나…."

개인 스케줄이 있어 늦게 들어온 슈는 소파에서 자고 있는 미카를 보고 이마를 지끈 짚었으나, 보나마나 한 침대에서 자는 게 너무 황송하다든가 뭐 그런 이유로 사양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고 어깨와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미카를 안아올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침대로 옮겨서 한쪽에 잘 눕힌 뒤, 자신도 그 옆에 누워 함께 꼼꼼하게 이불을 덮고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미카는 잠꼬대를 하며 몸을 몇 번 뒤척이더니 배시시 웃으며 금세 다시 깊은 잠에 빠졌고 슈는 옆의 온기에 만족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미카가 또다시 소파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응아! 스승님, 잘 때 불편하지 않았나? 미안하데이, 내 습관적으로 스승님 찾아가 침대로 기어들어간 모양이구마. 새벽에 깜짝 놀라가 튀어나왔다 아이가. 낼부터는 조심할 테니께 신경 쓰지 마래이."

전날 밤의 일에 대해 물었더니 미카가 당황하면서 두 손을 내저었다. 두 명이 자고도 남는, 멀쩡하게 넓은 침대를 놔두고 왜 자꾸 소파로 가느냐고 물어도 미카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 도통 침대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한 침대에서 잔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툭하면 포옹을 조르곤 하던 아이가 그 즈음 들어서는 한 번도 슈의 곁으로 다가와 고양이처럼 어깨에 이마를 비비대는 등의 어리광도 부리지 않았다. 그때는 도무지 영문을 몰랐지만 어쨌든 함께 지냈다고는 해도 각자 일이 바빠 그리 긴 시간 곁에 붙어 있지 못했기에, 볼일을 마치고 해가 바뀐 뒤 슈는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설마, 나루카미에게서 장미 꽃말을 듣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긴 건 아니겠지?'

한 번 그렇게 생각하니 도무지 아닐 가능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당시 자신은 미카의 헌신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싶었고, 마침 초콜릿으로 만든 장미가 있었고, 두 송이를 더하면 감사의 말이 그 안에 담기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정 어두운 미카가 당연히 모를 텐데도 그런 소극적인 수단을 취한 자신이 비겁하다는 것도 충분히 잘 알았지만 그때의 자신은 아직 직접적으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그러니까, 미숙했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하여 초콜릿을 건넨 후 벌써 시간이 흘러 두 번째 밸런타인을 목전에 둔 지금 슈의 마음은 굳이 따지자면─물론 감사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해가 없도록 언급해 둔다─당초의 여덟 송이보다는 여섯 송이의 의미에 훨씬 가까웠다. 하지만 여섯 송이에서 굳이 두 송이를 추가해 여덟 송이로 만든 당시의 행동은 어떻게 생각하면 '사랑으로 오해받기 싫어 감사의 의미로 바꿔버린' 일로도 해석이 되지 않던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식어버린 홍찻잔을 앞에 두고 슈는 진심으로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때 소극적인 방법으로 표한 감사 때문에 자신은 카게히라 미카와 연인이 될 가능성을 뿌리부터 뽑아 버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말이다.

 

***

"스승님! 이래 금방, 우얀 일이고? 당분간은 귀국 일정 없다카지 않았나? 그래서 연말에 오래 있다 간다고…."

허둥지둥 공항 마중을 나온 미카가 재빨리 슈의 캐리어를 받아 들며 물었다. 기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일단은 마냥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기본적으로 고양이에 가까운 타입이지만 이럴 때는 떨어져 나갈 정도로 붕붕 흔들어대는 강아지 꼬리가 뒤쪽에 보인다고 생각하며 슈는 딱히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데 미카의 어깨를 안아 자신 쪽으로 바짝 붙였다. 

"화급히 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 볼일을 앞당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야. 카게히라, 오늘의 스케줄은?"

"응아, 스승님 온다캐서 안즈쨩이 최대한 조절해 줘가꼬 오전에는 괘안타! 근데 내 오후에는 촬영 가야칸데이…."

시무룩해진 미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슈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흐음, 그래. 마침 잘 되었군.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스케줄을 마치고, 저녁때 다시 만나자는 것이야. 나 역시 준비할 것이 있으니 시간을 좀 다오. 이것은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아주 중대한 과정이니…."

"응아? 미래? 중대?"

영문을 모르는 미카가 눈만 깜박거렸다. 하지만 자신의 어깨가 슈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더니, 깜짝 놀라며 몸을 뒤로 빼며 슈의 캐리어를 끌고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스, 스승님! 배 안 고프나? 피곤하제? 일단 내 짐은 호텔로 옮겨 줄 테니께, 가가 짐도 풀고 점심도 묵재이!"

식은땀을 흘리며 걸음을 서두르는 미카의 뒤통수를 가만히 노려보던 슈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이 혹시나 되풀이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저녁 예정된 의식은 한층 더 중대하게 치를 필요가 있었다.

***

"응아아! 내 왔데이, 스승님!"

"음."

지난번, 둘이서 침대와 소파 공방전을 벌이던 그 호텔 바로 그 방으로 돌아온 미카는 문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저녁에 퇴근하믄 스승님이 기다리고 있다니 꿈만 같구마~'하고 잔뜩 들뜬 기분이었지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이 다 머꼬, 스승님? 장미가 지금 다 몇 송이가?"

"귀가했으면 우선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오라는 것이야. 이쯤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일이 아니더냐."

미카가 들어왔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허리를 굽혀 자기 할 일에만 열중하던 슈 쪽에서는 그런 말이 날아왔다. 미카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화장실 쪽으로 총총 들어갔으나, 얼굴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

"다 했데이…. 응아, 스승님, 진짜 꽃이 와 이래 많은 기가? 혹시 담번 무대에 쓸 소품이고?"

"농. 언젠가는 생화를 쓰는 무대를 선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아니야. 그보다…."

그제야 하던 작업이 다 끝났는지 슈가 손목을 주무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너끈히 백 송이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새빨간 장미들이 방 안에 가득한 가운데, 슈는 꽃집에서 포장해 준 꽃다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전부 풀어서 자신의 이상에 맞게끔 새로 싼 모양이었다. 

그 공격적인 색과 향기에 미카가 어질어질해하고 있는데 슈가 미카의 손을 잡아서 끌어당겨, 방 한가운데에 가져다 놓았던 의자에 앉혔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 앉은 미카의 앞에 슈는 망설임없이 무릎을 꿇었다.

"스, 스승님! 와카노! 스승님이 와 내 앞에 무릎을 꿇는데! 무신 일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미카를 제지하고, 슈는 우선 꽃다발 무더기 속에서 한 송이짜리 장미를 가져왔다.

"'첫눈에 반함', '당신밖에 없어요'. 장미 한 송이의 꽃말은 그것이었지."

"으, 응…?"

"들어 다오. 나는 내 예술의, 인생의 파트너로 오로지 너와만 함께 살아가기로 맹세했다는 것이야. 최근 들어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날 때마다 새삼 네 아름다움에, 네 천진함에 매료되곤 한다. 너만 허락해 준다면, 이것을 '첫눈에 반함'이라고 이름짓고 싶다는 것이야."

미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입을 뻐끔거리며 무어라 대꾸하려 했으나, 슈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막은 뒤 우선 장미 한 송이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들고 의자에 앉은 채 굳어버린 미카의 앞에서 슈가 이번에는 두 송이짜리 꽃다발을 꺼내 왔다.

"두 송이의 꽃말은 '이 세상에 우리 둘뿐'. 하하, 카게히라. 이 이상으로 너와 나를, 우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너와 내가 가진 가냘픈 가시로 세상에 맞서는 우리 Valkyrie는 그야말로 장미 두 송이와 같지 않겠느냐?"

두 송이 또한 미카의 손으로 건너갔다. 이쯤 되니 미카도 무어라 말하기를 그만두고, 슈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려는 자세가 되었다. 슈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세 송이짜리 꽃다발을 집어들었다.

"세 송이는 '사랑합니다', '고백'이었지."

이미 한껏 붉어져 있던 미카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귀에서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물들었다. 그 모습에 슈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로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이는 일이 이토록 고귀하고도, 내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네가 알게 해 주었다, 카게히라. 직접적인 사랑의 속삭임은 앞으로도 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을 테니, 일단은 다음으로 넘어가자꾸나."

네 송이.

"나는 내 마음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다만, 어차피 내가 영원을 속삭인다 한들 너는 믿어 주지 않겠지. 그러니 의심 많은 네가 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행동으로 보여 주겠다는 것이야."

다섯 송이.

"너를 만난 것은 이보다 더할 수 없는 내 인생의 가장 큰 기쁨, 더없는 축복이다. 나의 유일한 인형이었던 너도, 그리고 지금 이렇게 대등한 파트너로서 내 곁에 서 있는 너도, 늘 존재로서 내게 기쁨을 주고 있음을 잊지 말아 다오."

그리고 여섯 송이 꽃다발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슈는 똑바로 일곱 송이에 손을 뻗었다.

"후후, 비밀스러운 사랑이라… 나는 내 사랑을 감출 자신이 없다만, 뭐, 아이돌로서 열애설이 퍼지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겠지. 당분간은 너와 나, 둘만의 비밀로 하자꾸나. 네가… 고개를 끄덕여 주기만 한다면, 말이지만."

한 송이부터 일곱 송이까지, 어느덧 미카의 품은 장미 꽃다발로 가득했다. 옆에 내려놓는다는 방법도 있을 텐데 고집스럽게 전부 품에 안고 놓지 않는 미카를 바라보며 슈는 여섯 송이와 여덟 송이 꽃다발을 한꺼번에 집었다.

"아마도 내 짐작으로는,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만…."

그 말에 미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문제? 무신 문제?"

"아아, 응. 그래. 너는 문제로서 인식도 하지 못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듣자하니, 최근에 장미의 송이 수 꽃말에 대해 나루카미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지?"

"응아? 어케 알았노?! 스승님은 에스퍼가?!"

"…무의식중이었겠지만 네 입으로 말했다는 것이야. 그래서, 여섯 송이와 여덟 송이의 차이를 듣고…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물어도 되겠느냐?"

한아름 꽃다발을 안은 채, 미카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응아? 그래 송이송이 꽃말이 다 있는 줄 몰랐구마, 사람들 마 촘촘하데이~ 하는 기분?"

"…."

슈가 미간을 좁혔다.

"저, 그, 카게히라.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응아, 웅."

"지금까지의 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느냐?"

"스승님…."

"그래."

마른침을 삼키는 슈를 향해 미카가 뺨을 긁적이더니, 헤헤 웃었다.

"꼭 내한테 사랑 고백 하는 거 같아서 설레 죽는 줄 알았데이! 내 깜빡 속을 뻔 했다 아이가! 그래서, 이건 무신 연습이고? 아이믄 혹시 각본 쓰나?"

"농!!!!!!"

***

"내, 내는 그냥, 진짜로 자투리 쪼꼬렛 남은 기 아까버서 같이 장미로 싸서 준 줄 알았데이…. 그때부터 장미 개수 따지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몬했다 아이가…."

"…."

"그, 그니께 내 그때 답례 쪼꼬렛 주지 않았나! 쪼꼬를 받았으니께 쪼꼬를 준 것뿐이데이!"

"그래, 그걸 만든다고 한밤중에 집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바람에 도둑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고 말이지…."

여전히 슈에게서 받은 장미 꽃다발을 품에 꼭 껴안은 채, 사정 이야기를 들은 미카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슈는 아직 준비한 장미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지쳐서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벌렁 드러눕지 않은 것만은 최소한의 프라이드였다.

그래서, 그렇다면, 자꾸 자신을 피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침대에 끌어다 놓아도 도망치고, 공항에서 재회했을 때도 서둘러 걸어나선 이유는?

"…스승님, 10월에 스승님 생일 때 왔다가 안즈쨩한테 그랬다카데. 내 생일 때는… 무신 일이 있어도 귀국할끼라 캤다고."

"그랬다만. 그리고 실제로 내 말을 지켰지. 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을뿐더러, 계집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어도 무조건 올 생각이었다."

"나중에 얘기 듣고… 내, 하마터면 착각할 뻔했데이."

미카가 품에 안은 장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장미가 얼굴인지, 얼굴이 장미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새빨간 얼굴이었다.

"스승님이 내를 그만큼 애끼고 사랑해 준다꼬… 스승님의 첫 번째가 내라꼬, 그 무엇을 제쳐두고 내 생일에 달려와 줄 맹키… 내를 소중히 여겨 준다꼬, 착각할 뻔했다 아이가. 내 분수도 모르고… 미안타."

"…방금 한 말에 틀린 점이 하나도 없다만? 대체 무엇을 사과하고 있는 거지, 너는?"

고개를 든 미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진짜가? 스승님의 첫 번째가 내라꼬?"

"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하게 만드는 것이야! 이 장미를 준비한 이유도 멋대로 상상해서, 사람의 진심을 곡해하고… 머릿속의 톱밥을 다 끄집어내서 새로 갈아 주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응후후, 스승님 그거 내 너무 좋다 아이가."

결국 인내심이 끊어진 슈가 고함을 버럭 지르자 어째서인지 미카는 폭언을 듣고 헤헤 웃었다.

"…아무튼… 자꾸 그래 착각하고 내 막 나대다 스승님 심기를 거스를 거 같아가, 스승님한테 너무 붙어가 귀찮게 굴믄 안 되겠다고 생각했데이… 내는 진짜 첫날에는 잠결에 내가 스승님 침대로 기어들어간 줄 알았구마."

"카게히라."

"진짜… 진짜, 맞나? 내가 스승님한테 첫 번째가? 그래 믿어도 되나…?"

지금까지 쏟아진 슈의 모든 말들이 자신을 향한 사랑 고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미카는 오히려 겁먹은 눈치였다.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떨면서 눈에는 눈물까지 고이고 말았다. 

그런데도 슈가 지금껏 건넸던 장미 꽃다발은, 단 한 번도 품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중간에 생각지 못한 불상사가 발생하여 잠시 중단되었다만, 나는 아직 하던 일을 끝맺지 못했다. 그럼 재개하도록 하지."

"응아…?"

슈는 잠시 옆에 내려놓았던 여섯 송이와 여덟 송이 꽃다발을 다시 집어들었다.

"여섯 송이는 '당신에게 푹 빠졌어',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무엇이든 함께 나눕시다'. 여덟 송이는 '당신의 배려와 격려에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굳이 그것을 바꾸어 말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게 건넬 감사와 사랑의 말에서 무엇 하나 빼거나 더할 필요가 없어. 그저,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말을 다 주면 그만이라는 것이야. 카게히라, 나는 언제나 머릿속에 네 생각뿐이다.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무엇이든 함께 나누는 대등한 관계가 되고 싶고, 네 배려와 격려에 늘 감사하며 지내고 있어.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으니."

미카의 품에 꽃다발이 늘었다.

"아홉 송이, '언제나 당신을 생각합니다', '항상 곁에 있어 주세요.' 열 송이, '당신의 전부가 완벽해'. 열한 송이, '최고의 사랑'. 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네게 하고 싶은 말이다. 카게히라, 전부 받아 다오."

정말로 품을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꽃다발이 미카의 품을 꽉 채웠다. 미카는 바들바들 떨면서 한아름 가득한 꽃다발을 힘주어 껴안았다. 겁이 나고 두렵고, 설령 슈의 말을 아직 다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실제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큼은 정말로 두 팔이 찢어져 나가더라도 내려놓지 않으리라는 기백이 엿보였다.

"열두 송이, '나와 사귀어 주세요'."

슈는 긴 한숨을 내쉬며 꽃다발을 건넸다.

"나는, 우리가 이미 교제하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만. 어쩌면 작년 쇼콜라 페스의 내 실수로 마음이 엇갈리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것이야."

"응아…?"

"카게히라, 내 연인이 되어 다오."

미카의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뚝, 흘러내렸다.

한아름 안겨 있는 장미 송이 위로 떨어진 그 물방울이 마치 아침이슬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슈는 꽃다발을 안은 미카의 어깨로 팔을 두르고 눈가에 입술을 댔다. 파르르 떨리기는 했지만, 공항에서처럼 빠져나가지 않은 덕에 더없이 안도가 되었다.

"카게히라, 이 방 안에 있는 장미가 총 몇 송이인지 알겠느냐?"

미카에게 안겨 있지 않은 바닥의 장미까지 포함하여, 그 전체 개수는─.

"백 한 송이. 그 의미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긴 고백이 겨우 끝났다. 슈는 자신의 품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미카를 내려다보며 잠들지 않은 그 뺨에 입을 맞추고, 꽃다발과 미카를 함께 안아든 채 계속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침대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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