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얕볼 수 없는 에인헤랴르
#첫사랑 #대형광고 #질투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슈미카_전력_60min
주제: 첫사랑
번화하기 짝이 없는 전철역 앞 교차로. 역에서 나와 고개를 들면 가장 먼저 보이는 커다란 전광판에 두 눈을 감은, 젖은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의 미소년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소년이 먼저 한쪽 눈을 뜨면 그 푸른 눈동자 속으로 바다가 펼쳐지고, 그 바다를 배경으로 또 새하얗게 펼쳐진 백사장에서 하얀 셔츠 차림의 소년이 양 팔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다시 소년이 반대편 눈을 뜨면 그 황금빛 눈동자 속으로 지평선에 내리는 석양과 함께 하굣길이 펼쳐지고, 교복 차림의 소년이 자전거를 끌며 옆에서 걷다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당신의 모든 순간에 완벽함을 더해줄 맑고 깨끗한 피부.
십대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초 뷰티제품 광고다.
길이 막혀 멈추어 있던 택시 안에서 차창을 내다보다 문득 전광판의 커다란 카게히라 미카와 눈이 마주친 슈는 심장이 철렁했다. 프랑스에 있을 때 콘티를 받았고 최종 확인까지 하고 자신이 분명 OK를 한 광고지만, 거대한 무언가는 그 크기만으로도 숭고미를 지니는 법이라 막상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것을 마주하니 생각보다 압도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첫사랑 이미지로 찍으라카드마, 내는 누군가의 첫사랑이 된다는 기 먼지 통 알 수가 없어서 감이 안 온다. 스승님, 내 우야믄 좋나?
촬영 전 콘셉트를 받은 미카가 난처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영상통화를 걸어 왔다. 홀핸즈로 공유받은 콘셉트 자료를 훑어본 슈는 상투적이고 흔해빠진 이미지들을 보고 두통을 느꼈으나, 이제 막 홀로서기를 시작한 이 천진한 아이의 단독 업무라면 오히려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너를 첫사랑으로 여기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고 너무 의식하지 말고, 그저 너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하거라.
-응아? 행복했던 순간?
-무르익지 않은 나이의, 자아가 미처 확립되지 않은 시절의, 세간 사람들이 소위 '첫사랑'이라 부르는 감정은 사실 동경심에 가깝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자, 또는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미성숙한 인간은 그러한 것에 끌리는 법이다. 그러니 카게히라, 있는 힘껏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이야. 눈앞의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오로지 너의 행복만을 되새기면서. 그러면 너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단 하나도 없을 테니.
슈는 '사랑'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고, 그것은 친구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래서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자못 의기양양하게 그런 지론을 늘어놓으니 미카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응아, 알았다! 내가 젤루 행복했던 순간… 응헤헤, 스승님. 고맙데이!'하고 전화를 끊은 뒤 얌전히 촬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작은 화면으로 보았을 때도 꽤 만족스러운 영상이었으나 커다란 화면으로 보니 훨씬 굉장했다. 밀려오는 파도의 알알이 튀는 물방울, 바람에 나부끼는 새하얀 셔츠 자락, 하교 후의 해방감 속에서 편안하게 굴러가는 자전거 바퀴와 하얀 운동화. 그 모든 것이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맑아, 그야말로 피부에 너무 자극적이지 않은 기초 화장품에 너무나 어울리는 요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상을 보고 카게히라 미카를 평생의 첫사랑으로 품을 이들이 슈의 눈조차 닿지 않는 곳에서 새싹처럼 수없이 움틀 것이다.
"…."
어째서일까, 그 생각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불특정 다수에게 환상을 심어 주고 매료시키는 일이 직업인 이상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 아니,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며 나아가서는 의도된 일이다. 광고에 이끌려 기초 화장품을 사러 가면 카게히라 미카의 포토카드를 얻을 수 있고, 또 운이 좋게는 Valkyrie의 라이브 티켓을 손에 넣을 수도 있다. 그 무엇으로 입문하든 그들은 결국 슈와 미카가 이끄는 장엄한 예술의 세계를 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저 청량한 미소에 이끌려 심장이 두근거릴 그들은, 사실 카게히라 미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외모가 아름답다는 것 외에는.
"…이게 무슨 추태인지 모르겠군."
전광판의 광고가 계속 넘어가고 미카의 얼굴이 어느덧 세 번쯤 재등장했을 무렵 겨우 신호가 바뀌어 택시가 출발했다. 그제야 눈앞에 다른 풍경이 나타나, 슈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기분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슈 자신도 잘 알고 있다시피 오로지 저 광고 영상 하나가 떴다고 이제야 카게히라 미카가 만인의 첫사랑이 된 것은 아니다. 슈가 프랑스에 간 사이 단독으로 여러 가지 일을 맡게 된 미카는 이미 아이돌로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고, 사에구사 부소장도 업무보고 틈틈이 미카를 칭찬하곤 했다. 그는 이미 코즈프로의 귀중한 인재이며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슈는 자랑스러웠지만 조금은 석연찮기도 했다.
제자에게 따라잡힐지도 모르는 스승으로서의 불안감?
홀로서기를 너무 잘해내고 있는 파트너에 대한 서운함?
어떻게 생각해도 그 석연찮은 기분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것보다는 조금 나은 답을 찾은 것 같기도 했다.
크고 작은 화면 너머의 수많은, 별빛 같은 눈동자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카게히라 미카에게 첫사랑을 바치고 있다. 열광하고, 환호하고, 때로는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성욕을 환기당하며….
"농!"
저도 모르게 고함을 버럭 지르는 슈의 목소리에, 택시 기사가 어깨를 움찔하기는 했으나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목적지에 조금 못 미친 상태에서 짐을 끌고 택시를 내렸다. 아무래도 좁은 공간에 갇혀 가만히 앉아 있으니 사고가 자꾸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흐른다.
프랑스는 실로 자유의 땅이다. 이 좁은 섬나라에 더러 돌아올 때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미카가 '만인의 첫사랑'이라는 시선으로 칭칭 감겨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헛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응아? 스승님 아이가! 스승님!"
결국 견디다 못해 캐리어에 손을 짚은 채 주저앉아 버린 슈를 향해 어딘가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스승님! 어데 아프나? 와 그라고 있는데!"
"…윽, 카게히라."
지금까지 온통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상대. 하지만 지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상대. 자신이 혼자서 멋대로 상상하고, 질투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그 누구보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상대.
카게히라 미카가 건너편에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럴 줄 알았음 내 마중 나갔제! 몸이 안 좋음 안 좋다구 말을 하지 그랬나! 프랑스에서 비행기 타고 오는 일이 어데 보통 일이가! 스승님! 죽지 마라! 죽으믄 안 된데이! 스승님! 스승님!"
"농! 입 좀 다물라는 것이야. 내가 그리 쉽게 죽을 것 같으냐?"
"아이제~. 응헤헤, 됐다.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거 보니께 아직 멀쩡하구마. 근데 와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는데?"
미카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켜 보니 그곳은 어느새 도착했는지 성주관 앞이었다.
"…오늘 스케줄은?"
"내 방금 끝나고 들어오는 길이었데이. 저짝서 오다 스승님 주저앉았는 거 보고 내 얼매나 놀랬는지 아나. 하아, 쪼매만 더 일찍 끝냈음 공항 가는 긴데. 시차 때문인가, 스승님 상태도 안 좋아 보인다카이."
"일에는… 집중했겠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 일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서 내 얼굴에 먹칠을 한다면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사태라는 것이야."
"내를 멀로 아노! 내 일할 때는 진지하데이!"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는 미카를 보며 슈는 문득 어깨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무대 위에서는 물론 예술적이며 완벽하다. 스크린 속에서도 당연히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시시각각 바뀌며 짧은 시간 안에 이토록 수많은 표정들을 자아내는 미카의 얼굴은 오로지 슈 자신만이 향유할 수 있는, 독점적인 작품이다. 그 사실에 조금 기분이 나아진 슈가 캐리어를 끌고 걸어나서며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사거리에서 지난번 그 광고를 봤다만."
"응아~ 아, 그거? 응헤헤, 내 챙피해서 몬살겠데이. 사람들이 죄다 '첫사랑 광고'라 안카나. 캐도 마, 응후후. 내한테는 어차피 첫사랑도 끝사랑도 다 스승님뿐이니께…."
"…카게히라?"
이번에는 혼자 입 속으로 우물우물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미카가 멈춰 섰다. 귀까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이는 미카를 보고 슈도 의아해져서 그쪽을 돌아보자, 미카가 터질 듯한 얼굴로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사람들은 우예 그래 잘 알제? 나루쨩도 글코, 리츠 군도 글코, 코즈프로 사람들도 글코, 팬들도 글코…. '카게히라 미카 첫사랑 광고'는 있제, 누가 봐도 눈앞에 스승님이 있는 거 아이냐꼬 다들 난리다, 난리. 인터넷에 보니께 막 '눈앞에 이츠키 슈 판넬을 갖다놓은 게 분명함' '아니 직전에 분명 영통했을 거임' '사실 촬영장 오려고 프랑스에서 순간이동한 거 아님?' '어차피 머릿속에 스승님 생각밖에 없음' 이래 이래 막 난린데… 다들, 어케 그래 잘 아나? 내 얼굴에 그래 티가 나나? 응아~ 헤헤헤, 스승님이 봐도 그러나?"
"…."
미카 못지않게 얼굴이 터질 정도로 새빨갛게 익어버린 슈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방금 전까지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인정했다. 오히려 바로 코앞에 있기 때문에 더욱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한 장의 스크린 너머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본 대중들의 시선이 사실은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이 사람을 이렇게나 어리석게 만든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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