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언젠가, 마음을 불어넣는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츠키 마마 잠깐 등장

 

 

어려서 영양이 풍부한 식사를 마음껏 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비교적 작고 왜소한 체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의외로 자신보다 더 자그맣고 귀여운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물론 미카는 자신의 용모를 두고 이렇다저렇다 깊이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늘 화만 내는 스승님도 유일한 장점이라며 아껴 주는 것이 미카의 얼굴이다 보니 무슨 불만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형처럼 작고 귀여웠다면 더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미카의 마음속에 늘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어느 겨울 밤,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진 이츠키 가의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면 늘 결론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곤 했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신, 그 위대한 스승님이 곁에 놓아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과분했지만 기왕이면 머리도 쓰다듬어 줬으면 했고, 품에 꼭 안아 줬으면 할 때가 있었다.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아름다운 서양 소녀 인형, 마드무아젤처럼. 

 

'미카쨩은 내가 부럽니?' 

 

미카는 어둠 속에서 색이 다른 두 눈동자를 깜박였다. 

 

'어머, 너무 그렇게 놀라진 말아 줘. 같은 인형끼리 친한 사이잖아, 우리.' 

"마드 누이가…?" 

 

느닷없이 귓가에 울려 퍼진 여자의 고운 목소리에 미카는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당황스러웠지만 반갑기도 했고, 또 자각이 없을 뿐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게 불러 보니 가벼운 웃음 소리가 들렸다. 

 

'우후후, 그래. 너희가 부르는 이름대로 나는 마드무아젤, 몇 백 년의 시간이 흘러도 영원한 아가씨. 슈 군은 내게 진짜 이름을 찾아 주고 싶은 모양이지만 나는 이대로도 괜찮은 것 같아. 미카쨩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 내도 마드 누이 진짜 이름 알고 싶기는 한데… 그보다 갑자기 무신 일이고? 글케 얘기할 줄 알았음 평상시에 스승님 말에 대답 쫌 해 도." 

'어머, 난 언제나 슈 군의 말에 대답하고 있어. 슈 군이 듣지 못할 뿐이지. 그래도 무슨 일일까? 오늘은 신기하게 미카쨩이 내 말을 알아들었네.' 

"평소에 머라꼬 대답하는지 갑자기 궁금해지는구마…." 

 

멍하니 중얼거리던 미카는 문득 방금 마드무아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드 누이, 내보고 부럽냐고 했제?" 

'응, 그렇게 생각하는 네 머릿속이 얼핏 들린 것 같았어.' 

"마 부럽제. 와 안 부럽겠노. 내도 쪼맨해져서 마드 누이만 해가꼬 노상 스승님 품에 앵겨 다니믄 윽수로 좋아서 막 녹아내릴끼다." 

'우후후. 그럼 나랑 한 번 바꿔 볼래?' 

"웅아?" 

 

역시 이것은 꿈이라고 미카는 생각했다. 

 

"마드 누이는 요정 할무니가?"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오늘은 이상하게 그런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어때, 정말 신데렐라처럼 밤 12시까지 예쁜 마드무아젤이 되어 보는 건?' 

"응! 내 해볼란다! 에헤헤, 꿈이라도 한 번 그래 보믄 내 여한이 없겠데이." 

'좋아, 사랑스러운 미카쨩. 오늘은 내가 네 요정 대모가 되어 줄게. 좋은 꿈을 꾸길.' 

 

깜깜한 방, 미카는 편안한 어둠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꿈 속에서라도 마드무아젤과 대화를 나누니 즐거운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눈을 떴을 때 미카의 눈에 보인 것은 낯선 방 풍경이었다. 

 

'응아아?' 

 

정확히 말하면 낯설지는 않았다. 방 주인이 달가워하지 않아 그리 자주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모르지는 않은 풍경이었다. 다만 지금 보여야 할 광경이 아니었기에 당황스러웠을 뿐. 

 

'스… 스승님 방 아이가?' 

 

심지어 어째서인지 가위에 눌린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미카는 눈동자만 또록또록 굴려 이쪽저쪽 둘러보았다. 

새벽녘, 이제 곧 해가 뜰 시각이었다. 간신히 눈을 옆으로 돌리니 침대에서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슈가 보였다. 미카는 저도 모르게 스승님! 하고 부르려 했지만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아, 영문을 모르는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머… 머가 우예 된 긴지 몰라도 내가 여 있으믄 스승님한테 혼난데이!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왔다고 무지무지 도깨비처럼 혼낼끼다! 우… 우야노!'

 

그렇게 미카가 어떻게든 몸을 뒤틀며 움직여 보려 애쓰고, 만일 슈에게 들키면 뭐라고 변명해야 좋을까 고민하면서(생각해 보니 어차피 목소리도 안 나오는 상태였지만) 30분쯤 시간을 보냈을까, 드디어 슈가 눈을 떴다. 

 

"으음…." 

 

그러고는 미카 쪽을 돌아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미, 미소? 

 

"사랑스러운 마드무아젤, 오늘도 넌 정말 우아하고 아름답구나. 자, 하루가 또 시작되었으니 단장하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하자. 네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다면 난 그 지긋지긋한 어중이떠중이들로 득실대는 학교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야." 

'?!' 

 

다가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화장실로 향하는 슈를 보면서 미카는 입을 틀어막았다(물론 머릿속으로만). 어젯밤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니! 

 

'내 그라믄 오늘 하루 진짜 마드 누이로 지내는기가?! 내 머 잘했다꼬 이래 상을 주노!! 마드 누이, 내일 원래 몸으로 돌아오믄 내 옷 세 벌 지어줄란다! 없는 주머니 탈탈 털어서, 젤루 이쁘고 비싼 천으루!! 고맙데이, 진짜 고맙데이!!' 

 

슈의 품에 안겨 함께 등교해, 온종일 슈의 학교생활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미카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꿈에만 그리던 그 일이 정말로 벌어지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씻고 나서 방으로 돌아와 교복으로 갈아입은 슈가 "그럼 마드무아젤, 나는 그 실패작을 깨워서 식사를 하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도록."하고 말하는 순간 미카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 몸은? 내 몸에는 마드 누이가 들어가 있는 기가? 마드 누이, 내 대신 잘 해줄 수 있나? 이 우예 되는 기고?' 

 

눈동자만 굴리며 미카가 당황해하는 가운데, 슈는 늘 그렇듯 등을 곧게 펴고 반듯한 자세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눈을 굴려 시계를 보니 이미 등교하고도 남았을 시각이었다. 

 

'머꼬? 설마 오늘은 마드 누이를 학교에 안 데꼬 가는 기가? 와 하필 오늘?!' 

 

미카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모처럼 마드무아젤이 준 기회인데 슈의 변덕으로 이렇게 이 귀중한 하루가 날아가다니. 꼼짝도 못 하는 몸으로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키다, 꾸벅꾸벅 졸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요정 할머니 마드무아젤은 밤 12시까지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어쩌면 학교에 데려가지는 않았어도, 하교 후 방에 돌아온 슈가 인형을 품에 안고서 깜박 잊은 것을 사과하며 시간을 보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다시 가슴속에 피어올랐다. 

그러나 바깥에 어둠이 깔리고 차츰 밤이 깊어 가는데도 방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승님, 혹시 무신 일 생겼나? 어데서 사고라도 난 건 아이제?' 

 

차가워진 방 안에서 미카는 창틀에 얌전히 앉은 채 안절부절못했다. 기껏 마드무아젤이 되는 기회를 얻었는데 하루를 이렇게 날리고 말았다는 아쉬움도 사라지고, 그저 슈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들리지도 않는 시곗바늘 소리가 똑, 똑,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미카는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초조한 마음으로 12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서 움직일 수 있는 몸으로 돌아가서 슈를 찾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 

 

 

유리구슬 같은 눈을 뜬 채 누워 있는 미카를 본 순간 슈의 등골에 치솟은 것은, 오싹함이었다. 

늘 그 두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미카지만 조용히 잠든 얼굴이 인형처럼 사랑스럽다는 사실은 슈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늦잠을 잔다 싶어 들어와 본 방 안에서 미카는 눈을 멍하니 뜬 채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일어났나 싶어 "잠에서 깼으면 나태하게 계속 누워 있을 때가 아니라, 몸을 일으켜…."하고 말을 걸던 슈는 기묘함을 느끼고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어깨를 움찔했다. 

 

"카게히라?" 

 

슈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내밀어 미카의 코 밑에 대 보았다. 따뜻한 온기와 손가락을 살짝 간질이는 숨결은 느껴졌다. 숨은 쉬고 있었고, 신체 기능에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계속 그렇게 눈을 뜨고 있으면 눈이 충혈돼서…." 

 

말을 이으려던 슈는 입을 다물고 침대 위로 몸을 기울여 미카의 상체를 일으켜 보았다. 아무 저항 없이 슈의 팔에 안겨 세워지는 상체에는 아무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두 팔은 뒤로 축 늘어졌고, 고개도 옆으로 살짝 젖혀졌다. 

전신이 불 붙은 듯 뜨거웠다. 

 

"카게히라!" 

 

미카가 열에 시달리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몸이 약해 워낙 감기에 잘 걸리는데다 교내 아르바이트로 과로하는 일도 잦아, 앓아누워 결석까지 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난히 이상했다. 분명 눈을 멍하니 뜨고 있는데,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슈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바짝 들이대니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열에 들떠 헛소리까지 할 정도라니 보통 사태가 아니었다. 

 

"상태가 이 정도였다니, 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지…?"

 

인형 관리는 인형사의 몫이다. 구석구석 살펴 닳거나 해진 곳이 없는지 확인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은지 들여다보고, 적절한 영양소가 배분된 식사를 먹이고, 댄스와 운동으로 체력을 키운다. 슈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돌본다고 생각했는데도 미카는 때때로 어린아이처럼 열을 내며 앓아눕곤 했다. 한번은 미카가 이렇게 아플 때 슈의 모친이 간병을 도운 적이 있었다. 세 자녀를 키운 그녀는 숨을 색색거리는 미카의 이마를 짚어 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마음 놓고 아픈 건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이란다. 정말로 불편한 곳에서는 이렇게 아픈 티를 내지도 못 해.' 

 

하기야, 생각해 보면 그랬던 것도 같다. 고아원 생활은 직접 보지 못했으니 뭐라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제일 나이 많은 '미카 형'으로서 동생들을 돌보느라 아플 틈이 없었을 테고, 이츠키 가에 처음 왔을 때는 긴장해서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데 정신이 없었으니 그럴 여력이 없었을 터였다. 슈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그때는 정말로, 심신 양면으로 한계에 달했을 텐데도 이렇게 앓아누운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그 일로 나루카미에게서 끊임없이 원망을 듣고 있지만 죄책감이 있는 몸이다 보니 평소 장기인 비아냥 한 마디조차 나오지 않는다. 여하튼, 미카가 제대로 감기를 앓기 시작한 것은 슈가 마음의 동굴에서 나와 조금씩 바깥 활동을 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였다. 

그러니 사실은 미카가 아픈 것을 보면 걱정도 되고 죄의식도 느껴지는 동시에 조금은 안심이 되는 마음이 있다. 동물은 몸이 아플 때 본능적으로 천적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는다. 아픈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는 것은 신뢰의 증거다. 

 

"카게히라, 잠시만 기다리거라. 일단 해열제를 가져올 테니." 

 

어느 정도의 상비약은 갖춰져 있었기에 슈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수납장에서 약을 꺼내고 물을 챙겨 왔다. 아무리 끙끙거려도 의식만 있으면 약과 물을 건네면 자력으로 먹을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보아도 약을 삼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슈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자신의 입에 알약을 넣고 물을 한 모금 머금은 뒤, 허리를 숙이고 미카의 상체를 안아 올렸다. 여전히 깜짝 놀랄 정도의 열기였다. 

 

"잠시만 용서하거라. 꼭 필요한 절차여서 하는 것이야…." 

 

그리고 입술을 맞댄 순간 슈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어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승님, 가지 마래이. 

"카게히라?" 

 

놀라서 하마터면 자신의 목구멍으로 약을 꿀꺽 삼킬 뻔했으나 필사적으로 참고 약과 물을 흘려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목소리는 계속 울렸다. 

 

-가지 마래이. 내 버리지 마래이. 혼자만 남겨 두지 말아 도…. 

 

약을 먹이고 입술을 떼니 그 소리는 언제 들렸나는 듯 사라졌다. 슈는 미간을 찌푸리며 미카를 내려다보았다. 

 

"…." 

 

슈의 해외 유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결정되어 있던 일이고 미카는 그 부분에 대해 지금까지 한 마디도 솔직하게 칭얼거린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지인을 통해 하숙처를 주선해 주기까지 했으니 집안 사람들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미래였다. 물론 어딜 가나 스승에게 찰싹 붙어 다니던 미카를 혼자 놓아두고 간다는 데 망설임이 생겨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미카에게도 미카의 삶이 있고, 무엇보다 졸업까지 아직 1년이 남았다. 조금은 쓸쓸하게 만들겠지만 이해해 주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 응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슈는 미간을 짚었다. 

그때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 슈는 움찔 뒤를 돌아보았다. 

 

"미카쨩~? 아직 안 일어났니? 지각하겠어." 

"어머님!" 

"어머, 슈도 같이 있었니?" 

 

들어온 슈의 모친은 당황한 얼굴의 슈와 침대에 누운 미카를 보고는 금세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어머나, 미카쨩. 또 감기구나? 세상에, 열이 이렇게…. 슈, 미카쨩은 내가 돌볼 테니까 너는 어서 학교에 가렴. 정말로 지각하겠어." 

"아닙니다, 어머님. 이 아이는 제 책임이니, 제가 돌보겠습니다." 

 

모친은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러고 싶다면, 그러렴. 어차피 아카데미의 합격 통지서는 왔으니 이제부터의 출석으로는 큰 지장도 없을 테고." 

"아카데미의 합격 통지서가 왔다고요?" 

"그래. 어머, 못 봤니? 어제 우편함에 꽂혀 있던 걸 미카쨩이 가져왔는데." 

 

그 말에 슈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고 보니 내 방에 놓아두고 깜박했구나. 미안, 금방 가져다 줄게." 

 

모친이 방을 나간 뒤 고요해진 가운데 슈는 가만히 미카를 내려다보았다. 약이 들었는지 상태가 아주 조금은 나아진 것 같기도 했지만, 여전히 입술을 움직이며 무어라 헛소리를 하는 듯했다. 

 

"수분을, 보충시켜야…. 고열이 났을 때는 가장 중요한 게 꾸준한 수분 보충이니까…." 

 

슈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다시 한 번 차가운 물을 입에 한 모금 물고 허리를 숙여 미카의 입술에 맞댔다. 물이 흘러들어가는 가운데 미카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내는 스승님 없으믄 죽을끼다. 학교 안에서 스승님 없이 우예 내 혼자 Valkyrie를 지킨단 말이고! 스승님 지시 없이는 암것도 몬하는 모자란 실패작 인형이라 버리고 가는기가? 도로 쓰레기장에 버리고 가는기가? 내는…. 

 

미카의 입으로는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던 처절한 외침에 슈는 그만 귀를 막고 싶었으나, 입술을 떼면 된다는 것을 뒤늦게 몇 초 후에 깨달았다. 

의자를 끌어당겨 침대 머리맡에 앉아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모친이 노크 후 들어와 유려한 필체로 슈의 이름이 적혀 있는 에어메일을 한 통 건네주고 갔다. 뜯어 보지는 않은 모양이었으나 프랑스에서 우편물이 온다면 당연히 합격 통지서였을 터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내가 없어도 해내야 한다. 이미 Valkyrie는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고, 싫든 좋든 내가 몇 개월 후면 학교를 떠나야 할 것은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거늘…." 

 

슈가 기력을 회복하여 라이브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후 Valkyrie는 이전 같은 자금난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홀로 남을 미카를 생각해서 슈는 수많은 의상 제작 의뢰를 받아들여, 때로 수예부실에 밤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그 가엾은 까마귀에 대한 연민이 자신을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감상이 문득 들 때가 있었으나, 오히려 다정하게 대해 주고 자금을 남겨 주려 애쓰는 것이 그 아이를 더 쓸쓸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곧, 이별의 준비였다. 

 

"…." 

 

아직도 멀거니 뜨고 있던 눈꺼풀을 조심스레 감겨 주니 편안하게 잠든 얼굴이 되었다. 슈는 질리지도 않고 아기처럼 잠든 미카의 얼굴을 몇 시간 동안이나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실제로 이렇게 이 아이의 얼굴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면 다시 물 한 모금을 머금고 입 안에 흘려넣으며 미카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째서 입술을 맞대면 진심이 들리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미카가 열이 내리고 정신이 들면 절대 본인의 입으로는 하지 않을 말이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날것의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 슈는 계속해서 미카에게 틈틈이 물을 먹이고, 몇 시간마다 한 번씩 약을 먹였다. 수건을 적셔 와 이마에 올려 주고, 땀을 닦아 주며 시간을 보냈다. 

 

 

*** 

 

 

12시가 된 순간, 미카는 눈을 떴다. 

 

"…응아아~ 하루가 기냥 가뿟네…." 

 

결국 마드무아젤과 몸을 바꾸었어도 미카가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우울해하며 눈을 뜨니 뜻밖에도 자신은 아직 침대에 누워 있었다. 

 

"머고? 설마 꿈이었나?" 

 

눈을 깜박이는데 이상하게 몸이 나른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옆에서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게히라! 정신이 드느냐?" 

"응아? 스승님?" 

 

눈동자를 굴리며 옆을 돌아보자 어째서인지 초췌해진 얼굴의 슈가 눈을 부릅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카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무, 무신 일이고? 스승님이 와 내 방에 있나? 내, 늦잠 잤나?" 

"늦잠…. 그래, 아주 늦게까지 잤지…." 

"응아아! 지각이가? 지금 몇 시고?" 

"밤 12시라는 것이야." 

"밤 12시?!" 

 

기겁을 한 미카가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슈가 두 어깨를 눌러 나오지 못하게 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야. 너는 오늘 하루 종일 고열에 시달렸고, 이제야 좀 정신이 든 모양이다만 아직은 안정이 필요해. 일어나지 말고, 물을 조금 더 마시도록." 

"아… 알았데이. 근데 '더' 마시라꼬? 내 은제 물 마싰나? 기억이 없는데." 

"크흠! 그 시끄러운 입을 다물고 어서 마시라는 것이다." 

"응아아…." 

 

물잔을 받아들고 꼴깍꼴깍 삼키며 미카는 슈의 눈치를 살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마드무아젤의 몸 속에 들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고열로 꿈을 꾸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전날 밤 마드무아젤과 대화를 나눈 일조차 열이 올라 보았던 환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슬퍼져, 미카는 고개를 숙였다. 

 

"…카게히라." 

"응아, 넷!" 

 

슈의 지친 목소리에 미카는 움찔 놀라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반듯한 자세로 앉은 미카를 향해 슈가 차분하게 말했다. 

 

"몸이 멀어져 있어도, 이 세상에 Valkyrie는 오로지 너와 나뿐. 우리는 세상에 단 둘밖에 없는 동포라는 것이야." 

"…?" 

"카게히라, 나는 비겁했다. 니토가 떠난 후, 아무리 말해도 네가 듣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네게 새출발을 종용했지. 너는 내가 원하던 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늘 곁에 있겠다고, 수도 없이 같은 대답을 했다. 그것이 얼마나 내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야. 그러니 카게히라, 얼마든지 말로 표현해 주마. 내 마음속에서 당연했던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말하는 것조차 멋쩍게 느껴졌던 것이 네 정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슈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휴우, 하고 내뱉은 뒤 말했다. 

 

"버리지 않으마. 늘 곁에 있어 주지는 못하겠지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열 일 제쳐 두고 네게로 가장 먼저 달려와 주겠다고 약속하마. 익숙지 않지만, 전화라는 수단이 있으니 하려고 들면 못 할 것은 없겠지. 네 외로움의 근원을 끊어버릴 수는 없겠지만 눈에 띄는 상처가 나면 약을 발라 주는 역할 정도는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을 터." 

"응아? 스승님?" 

"메인터넌스가 지금처럼 잦고 꼼꼼하지는 못하겠지만 귀국할 때마다 빠짐없이 돌봐 줄 것을 약속하마. 그러니 내가 없는 동안에도 네 자리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고 내 귀환을 기다려 주겠다고 맹세해 다오. 나는 결코 네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야. 너라는 말뚝을 꽂아 놓고, 언젠가 돌아올 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이지. 그것은 오로지 너만이 해줄 수 있는 역할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갑자기 쏟아진 슈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어 곤혹스러워하던 미카가 조금씩 슈의 말을 곱씹어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에헤헤~ 내 아직 꿈에서 덜 깼나보다. 스승님이 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우예 그래 잘 알고 쪽집게같이 해주노?" 

"농! 이것은 현실이라는 것이야!" 

 

버럭 소리는 질렀지만, 병석에서 몸을 일으킨 미카의 희미한 미소를 보고 슈는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미카가 아직 조금 어지러워하는 듯했기에 다시 잘 눕히고, 이마에 새 수건을 올린 뒤 가볍게 먹을 만한 죽을 마련하러 부엌으로 향하면서 슈는 입술이 맞닿았을 때 들렸던 미카의 외침을 생각했다. 

역시나 눈을 뜬 미카는 분명 어제의 합격 통지서 때문에 열이 나 앓아누웠을 텐데도, 그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컨디션이 왜 망가졌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속으로 그렇게 썩어들어가고 있어도 아직까지 통증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데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모친의 말을 빌면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뜻일까. 

 

"언젠가는 네가 내 말에 반론하고, 내 행동에 화를 내고, 불만이 있으면 반발하는… 그런 상태까지 오지 않으면 동등한 파트너가 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야." 

 

냄비 바닥에 눋지 않도록 죽을 저으며 슈는 생각했다. 

언젠가, 네가 내게 감추지 않고 분노를 표출하고 내가 화내는 네 앞에서 쩔쩔매며 용서를 구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부터가 너와 내 관계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고. 

 

 

*** 

 

 

슈가 프랑스 유학을 떠나기 직전, 미카는 아름다운 인형옷 세 벌을 선물했다. 슈보다는 미카 취향에 조금 더 가까운 고딕 스타일의 약간 그로테스크한 의상이었다. 마드무아젤에게 주려 만들었다고 말하는 미카의 얼굴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 슈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여행가방 속에 소중히 넣으면서 자기 자신의 일부였던 마드무아젤에게 조금은 질투가 났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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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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