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How many angels can dance on the head of a pin?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사와 이름 있는 모브 있음 

 

 

 

 

선물을, 좀 과하게 샀다. 자주 귀국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거리를 산책하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앤티크 소품, 그 아이가 좋아할 것 같은 기괴한 취향의 장식품, 고급 디저트, 정교한 사탕 공예품…. 띄엄띄엄 손에 집어들다 보면 커다란 캐리어가 가득 차는 것은 정말이지 순식간의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늘 그 아이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친구 나루카미, 자신이 자꾸 선물을 사 오는 바람에 기숙사 방이 좁아진다고 불평하는 룸메이트인 레이의 남동생 몫까지 챙기다 보면 더욱 양이 불어나곤 했다. 

그래서 슈는 오랜만에 이민가방을 꺼냈다. 프랑스에 처음 올 때 가져왔던 아주 커다란 캐리어였다. 수하물 추가요금을 내야 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그 아이가 알면 '응아아~ 스승님, 선물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돈 애껴서 무대 설치에 보태 쓰믄 안 되나?'하고 불평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떨어져 있어도 꽤나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 파트너의 반응을 이제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음식의 경우, 그 아이는 눈을 떼면 자꾸 먹지 않고 보존시켜 두려 하는 습성이 있어 최근에는 가방에서 꺼내자마자 슈 스스로의 손으로 포장을 찢어버리곤 했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제지하던 그 아이도 요즘은 '응헤헤, 스승님이랑 티타임이데이~.'하면서 조금씩 익숙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있어도 또렷하게 그릴 수 있는 웃을 때 휘어지는 눈매를, 빙긋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살짝 엿보이는 송곳니를 떠올리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입가를 살짝 가린 채 고개를 숙이게 된다.  

 

"슈~! 며칠 학교에 나오지 않을 거라고 들었는데, 모국에 돌아가는 거야~?"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브리엘." 

"모국에는 슈의 천사가 있지~? 좋겠네~." 

 

이런 식의 놀림에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슈는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숨기려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또 그러네~! 방금 전 얼굴에 아모르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뚜렷하게 씌어 있었는데. 슈, 지극한 마음이 너무 넘치면 어딘가로 터져나올까 걱정이 돼서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무의식적 행동이야. 하지만 사랑은 표현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감정이지~!" 

 

레오가 툭하면 미카를 미카엘이라고 부르는 탓에, 같은 천사의 이름을 가진 이 친구를 슈는 조금 친근하게 느끼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사적인 부분을 성큼성큼 짓밟고 들어오는 것은 불편하기도 했다. 

 

"나는 어서 공항에 가 봐야 한다. 급한 볼일이 없으면 이만." 

"에이, 에이~! 가는 길에 마주친 것도 우연인데 이야기나 좀 하자고. 그런데 슈, 토마스 아퀴나스를 알아?" 

"중세의 교부철학자이자 신학자가 아닌가?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맞아. 그런데 또 다른 별명이 있거든~. '천사 박사'라고~." 

 

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브리엘은 한 가지 화제에 꽂히면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남자였다. 박식하기 때문에 대화하면 재미는 있으나, 지금처럼 볼일이 있어 가는 길에 붙잡히기에는 최악인 상대였다. 슈는 정말로 발길을 돌리려 했다. 

 

"가브리엘, 다음 수업 때 보지. 지금은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다는 것이야." 

"아퀴나스는 중세 천사학에서 천사를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이런 질문을 던졌지~!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핀 위에서 춤을 출 수 있을 것인가?' 천사를 영적인 존재로 보는 사람들은 무한히 많은 천사들일 것이라 했고, 천사가 물리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은 단 하나도 없다고 했어~. 또 신성모독적인 질문이라고 화를 낸 사람들은…." 

 

등 뒤에서 가브리엘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슈는 결국 그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어나서 버렸다. 이런 대화는 여유가 있을 때 카페테리아에 앉아 홍차라도 마시며 차근차근 나눈다면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캐리어도 무거운데 붙잡혀 있을 시간이 없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핀 위에서 춤을 출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째서인지 슈의 마음 속에서 침전물이 되고, 비행 시간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핀 위에서 춤을 추는 천사. 

슈의 눈앞에, 그것은 영원히 단 하나뿐이다. 

 

 

*** 

 

 

"응아아~ 스승님, 선물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차라리 돈 애껴서 무대 설치에 보태 쓰믄 안 되나?"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에 슈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으나 꾹 참았다. 

 

"보다 많은 것을 접하고, 많은 것을 느껴야 너의 예술도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야. 인터넷으로 사진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한들 실제로 만져 보고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지. 이 앤티크 시계의 정교함은 작동 원리에 있는데…." 

"알았데이, 알았데이. 글케 하나하나 꺼내서 설명하지 말고 일단 짐 정리부터 해야겠구마. 스승님, 또 이래 산더미처럼…." 

 

리츠가 방을 비웠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또 옆 침대에 엎드린 채 싱글싱글 웃으며 지켜보고 있을 것이 뻔했다. 리츠 군 오기 전에 정리할 거 정리하고 수납할 거 수납해야제~ 하고 슈가 꺼내 주는 물건을 하나하나 받아드는 미카의 얼굴은, 물론 잔소리하는 입과는 달리 환하기 그지없었다. 

 

-모국에는 슈의 천사가 있지? 

 

문득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떠올라, 슈는 미카를 새삼 바라보았다. 싱글벙글하며 열심히 손을 움직이던 미카가 문득 고개를 들어 이쪽을 마주했다.

 

"와 그라노, 스승님? 내사 머 실수한 기 있나?" 

"농, 그런 것은 아니다만…. 내가 네 얼굴을 사랑하는 것은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응아…. 맞다, 그랬제." 

 

어이없어할 제삼자가 없는 관계로 두 사람의 그런 대화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글타~. 스승님이 잔뜩 사오는 선물도 직접 보는 기 좋지마는, 내는 스승님을 실물로 보는 기 젤 좋다 아이가." 

"영상으로도, 일반 통화로도 아쉽지 않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만?" 

"응아아, 실물로만 보충할 수 있는 영양분이 있다 안카나! 간만에 왔으니께 내도 스승님 성분 실컷 들이마시고 잔뜩 채워 놔야겠데이. 비축분이 금방 떨어지는 게 문제지마는." 

"사람을 무슨 영양제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이야…." 

"아믄. 영양제가 아이고, 그보다 더 좋은 기다. 비교할 수가 없제. 말하자믄 스승님은 내 신이니께. 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얘기 안 했나?" 

 

신, 신 같은 사람. 

정말로 신이라면, 천사 하나 정도는 자신의 것으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 

슈는 문득 그렇게 불경한 생각을 했다. 

 

 

*** 

 

 

일본에서의 스케줄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날, 슈는 문득 선물을 가득 담아 왔던 그 커다란 캐리어를 여전히 성주관 미카와 리츠의 방에 놓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필요한 물건이 담긴 다른 가방은 호텔에 두었지만 그 캐리어는 어차피 비어버렸기 때문에 가져가는 것을 깜박 잊었던 참이었다. 

어차피 미카와 저녁을 먹으러 나갈 생각이었기에 슈는 별 생각없이 성주관으로 향했다. 프리티 5라고 했던가, 미카가 서클 활동을 할 때 발견한 좋은 레스토랑이 있다며 신이 나서 이야기하던 가게로 갈 생각이었다. 

 

"카게히라, 안에 있느냐?" 

 

노크를 해도 소리가 없기에 문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려 보니 문은 힘없이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커다란 슈의 캐리어만이 미카의 침대 발치에 놓여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기다리던 슈는 이윽고 휴대전화를 꺼내 미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벨소리는 방 안에서 들렸다. 예의 보라색 휴대전화는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었다. 

 

"카게히라…?" 

 

슈는 문득 심장이 철렁해졌다. 요즘 들어서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미카가 자취를 감춘 전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버틸 수가 없었다. 저녁식사 때 연락하겠다고 분명히 말해 놓았는데, 휴대전화를 방 안에 두고 어디로 간 걸까.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슈가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문득 문제의 캐리어가 눈에 띄었다. 

 

"…설마." 

 

이민가방 사이즈가 크기는 하지만, 미카가 아무리 말랐다고는 하지만 키가 171센티미터는 되는 10대 후반의 청소년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 속에 들어가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슈는 혹시, 정말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떨리는 손을 뻗어 닫혀 있던 캐리어의 뚜껑을 살짝 들어올렸다. 지퍼가 잠겨 있지는 않았다. 

 

"…."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슈는 말을 잃었다. 

기묘한 방향으로 팔다리를 구부리고 웅크린 미카가 그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어떻게 잠을 자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 때로 뼈가 없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유연한 동작을 선보이는 미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몸을 작게 웅크릴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손을 내밀어 미카를 흔들어 깨우려던 슈의 손은, 그러나 뻗어나가지 못했다. 

지퍼를 채우고 조용히 가방을 들어 밖으로 나가면 이 아이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도 모르는, 단둘만의 세계로 떠날 수 있지 않을까. 고통도 없고 번뇌도 없는 온화한 곳으로, 고요한 황야로. 

 

"…응아… 스승님…?" 

 

그때 빛이 비쳐들어 잠이 깼는지 미카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녁식사를 하러 가자고 찾아왔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 잠들어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것이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왜 멀쩡한 침대를 내버려두고 이렇게 비좁고 불편한 곳에서 잠을 잤지? 그 텅텅 빈 모자란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한계가 고작 그것이야?!" 

"응아~. 스승님 폭언 진짜 오랜만이구마. 반갑데이." 

 

미카가 포근하게 웃었다. 그리고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 뜻밖에도 쉽게 캐리어 속에서 빠져나왔다. 정말이지 연체동물 같은 동작이었다. 

 

"내도 진짜 잘라꼬 들어온 기는 아이고…. 걍 스승님 가방이 몇 날 며칠 내 발밑에 있응께, 쳐다보믄서 왔다갔다 하다 보니 잘 하믄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함 누워봤드마 딱 맞는기다. 와, 인터넷에 보믄 그런 사진 있지 않나? 여행갈 때 내도 데려가 도~. 하믄서 강아지나 고양이가 가방 속에 들어가 있는 거. 함 흉내내 봤다. 근데 스승님 가방이라 근가 역시 편안하드마. 잠이 소~올솔 오데." 

"…어떤 사고방식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야…." 

 

슈는 자신이 가방에 든 미카를 통째로 들고 나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들킬까 두려워 더욱 요란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응아, 스승님… 캐도 진짜 스승님이 내를 짐짝처럼 들고 갈 수 있으믄 얼매나 좋겠나 싶데이. 내가 쫌만 더 쪼그맸어도…." 

"농,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예술을 꽃피우자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졸업 후 파리에 오겠다면 나는 물론 환영이다만, 지금은 너도 이곳에서 할 일이 너무나 많아. 심약해진 마음가짐과 어설픈 발상으로 Valkyrie의 격식에 흠을 내서는 안 될 것이야." 

"당연하제! 스승님의 Valkyrie는 내가 일본에서 끝까지 지켜낼끼다. 걱정 마래이." 

 

미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서 슈는 문득 이미 먼 옛날이 되어버린 듯 느껴지는 기억을 떠올렸다. 

소리가 끊어진 무대. 

꼼짝도 하지 못하던 세 사람. 

Valkyrie에게 찾아온 끝. 

거기서 유일하게 흘러나온 노랫소리. 아슬아슬한 핀 머리 위에 홀로 서서, 위태롭게 휘청거리면서도 춤을 추던 천사. 

그 후로는, 무대에 함께 선 후로도 한 걸음 물러서서 네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지고의 행복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가방 속에 담아 보관하면서 늘 태엽을 감아야만 움직이는 인형이었다면 미카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치면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자신이 모시는 신을 위해 몸을 내던질 줄 아는 천사였기에 미카는 행동했다. 

슈는 새삼 손을 내밀어 미카를 일으켜세웠다. 

 

"그래, 부탁한다는 것이야. 자, 레스토랑 예약 시간에 늦기 전에 어서 가자." 

"응!" 

 

자다 깨서 그런지 따뜻한 손이었다. 늘 서늘하게만 느껴지던 미카의 높은 체온을 느끼니 어째서인지 코가 시큰해서, 슈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다음에도…." 

"응아?" 

"다음에도, 이 가방에 이만큼의 선물을 담아 올 테니…." 

"그니까 선물은 고만 됐다니께!" 

 

다만 욕심을 부릴 수 있다면, 네 몸이 들어가 꼭 맞았던 이 캐리어를 아름다운 물건들로 하나하나 채우며 네 사랑스러운 육체를 내 손으로 재조립한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을 허락해 다오. 

 

 

***

  

 

"슈! 돌아왔네~. 모국은 즐거웠어~?" 

"아, 가브리엘." 

 

슈는 몇 주만에 만나는 학우를 보며 빙긋 웃었다. 자신이 타인을 귀찮게 군다는 자각이 있는 만큼, 슈가 자신을 보며 반가워하는 모습에 가브리엘은 다소 당황했다. 

 

"그런데, 지난번에 하던 아퀴나스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느냐는 것이야." 

"응? 어… 아! 그때 공항 가던 길에? 그게 왜?" 

"…하던 이야기는 끝을 맺어야지, 자신이 꺼낸 화제에 벌써 흥미를 잃어버리다니 정말이지 즉흥적인 남자로군. 헌데 핀 위에서 춤출 수 있는 천사가 과연 몇 명일까, 하는 질문에 내 입장에서 대답하자면…." 

 

슈는 눈을 감았다. 

고독한 뒷모습, 결의로 찬 용감한 어깨. 

자신이 받드는 신과 그 신앙을 위해 망설임없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고결한 영혼. 

 

"그 천사가 조만간 파리에 놀러 올 테니, 다음번에 소개하겠다는 것이야. 나의 미카엘과의 만남을 기대하도록." 

 

가브리엘은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가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트레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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