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치친푸이푸이고요노온타카라 아메쨩
#기억상실 #컨디션불량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핑계를 대자면, 바빴다. 솔직히 바빴다. 하루하루 새로운 것들을 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해도 외국어 환경 속에서 정신적 소모가 없을 리 없었고,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낯섦이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은 먼저 전화하는 것을 게을리했다. 인정한다. 하지만 연락이 없는 날이 길어지면 상대방 쪽에서 전화하는 일도 일상다반사였고, 또 바쁜 삶 속에서 그렇게 작은 선물처럼 찾아오는 연락에 조금은 마음이 들떴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한 달이 지나 있었다. 물론 상대방 역시 한가한 입장은 아니니, 슈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짬이 난 김에 귀여운 얼굴로 마음의 평안을 얻어 볼까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었는데 몇 번을 걸어도 받질 않았다. 슈의 인내심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상대방 쪽 화면이 켜졌다.
"카게히라! 뭘 꾸물대고 있는…."
[아~ '스승님' 씨. 그게, 좀 문제가 생겼는데.]
"사쿠마?"
영상에 나타난 것은 사쿠마 리츠였다. 미카의 룸메이트가 대신 받은 것을 보니 휴대전화를 방에 놓고 나가기라도 한 모양일까. 슈는 헛기침을 했다.
"실례했군. 카게히라는 외출 중인가?"
[아니, 그….]
리츠는 잠시 고민하다가 휴대전화 화면을 어디론가 돌렸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양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마구 가로젓는 미카의 모습이 보였다.
[보다시피, '스승님' 씨한테 걸려 온 전화를 못 받겠다고 저러고 있어.]
"뭐라고?"
[나도 이유는 모르겠는데….]
[리츠 군, 화면을 와 이짝으로 돌리는기가?! 내는 싫다, 뭔지 몰라도 그 전화 몬 받는데이!]
"카게히라?"
슈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 얼굴을 본 미카가 더욱 창백해지며 이불 속으로 웅크러들었다.
[무섭다, 무서워! 그 화면 꺼 도, 리츠 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어. 정확히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부터 입에 달고 살던 '스승님' 소리를 못 들은 지 오래 됐다 싶긴 했거든. 그런데 지금 '스승님' 씨한테 온 전화를 보더니 벌벌 떨면서 저러는 거야. '스승님' 씨, 설마 미카링한테 심한 말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리츠의 표정이 험악해졌지만 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농. 마지막으로 통화를 하고 나서 나도 카게히라도 서로 바빠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는 것이야. 영문을 알 수가 없군. 사쿠마, 다시 한 번 카게히라 쪽을 비춰 주지 않겠나?"
[미카링 저렇게 무서워하는데… 흠, 할 수 없지.]
리츠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화면을 돌렸다. 꼼짝도 않고 웅크린 이불더미가 보였다. 슈는 그쪽을 향해 말을 걸었다.
"카게히라, 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널 그렇게 두렵게 만드는 게 무엇이야?"
이불 속에서 미카의 잔뜩 겁먹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츠 군, 저 사람 누고? 와 내한테 자꼬 말을 거나? 내는 모린다, 저 사람. 캐도 무섭다. 윽수로 무서워.]
리츠와 슈는 화면 너머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스승님' 씨, 미카링이 지금은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으니까 일단 미카링이랑 차분하게 얘기해 보고 나서 연락할게.]
슈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겨버렸다.
성주관으로 이사시키기 직전, 혼자 살던 집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를 버렸다는 이유로 크게 싸운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미카는 정면으로 슈의 얼굴을 쳐다보며 화를 냈을지언정 저렇게 두려워하고 벌벌 떨며 모르는 사람이라고 피하지는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슈는 며칠간의 스케줄을 전부 취소하고 나리타행 항공편을 끊었다.
***
미카의 마중이 없는 귀국은 오랜만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꼭 짬을 내서 강아지처럼 공항에 달려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찾는 모습이 귀여워, 가끔은 인파 속에 몸을 숨기고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기도 했던 일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 후 사쿠마 리츠가 알려준 스케줄에 의하면 이 시간쯤 미카는 한창 도내 모 스튜디오에서 잡지 화보를 촬영하고 있을 터였다. 기본은 인형처럼 쿨한 표정이지만 작은 컷으로 함께 실리는 약간 느슨해진 표정의 B컷이 인기가 좋아 최근에는 B컷의 크기가 조금씩 커진다는 사실도 슈는 체크하고 있었다. 이쪽이 너무 커지면 Valkyrie의 격조에 지장이…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니, 이츠키 씨? 오늘 오신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요."
"갑자기 시간이 비어서. 카게히라는?"
낯익은 스태프를 발견한 슈가 물었다.
"지금은 촬영이 다 끝나고 잡지 인터뷰를 하는 중이에요. 3층 라운지에서 진행 중인데, 가 보시겠어요?"
"음. 잠시 들러야겠군."
엘리베이터가 열리니 인터뷰가 진행 중인 미카와 기자의 모습이 바로 보였다. 미카가 이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고, 질문지를 넘기던 기자가 땡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슈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술에 손가락을 댔고, 기자는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미카 군, 다음 질문인데요. 최근 같은 유닛 멤버인 이츠키 슈 씨가 프랑스에서 활동하게 됨으로써 개별 활동이 늘어났죠. 자주 듣는 질문이겠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흘렀으니 또 물어볼게요. 전과 비교할 때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응아… 그, 잘 모르겠심더… 큰 차이 없는 것 같은데예."
기자가 슈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너희 싸웠니?'라는 눈빛이었다. 슈는 지난번 전화 소동으로 인해 약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전에는 스승님 없이 내 몬산데이~ 캐도 내를 믿고 스승님도 자유롭게 예술활동을 하러 떠난 기니께 걱정 끼치잖게 잘 해내야제~ 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 혹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덕분에 많이 익숙해진 건가요?"
"마, 맞심더! 그깁니더!"
미카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지 않아도 오드아이 눈동자가 나란히 흔들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슈는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질문인데요,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해 알려줄 수 있을까요? 많은 것을 밝히기 힘들다면 조금의 힌트 정도라도."
"그… 내는 혼자라도 개안타고,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고 제 갈 길을 잘 갈 수 있다꼬, 그래 써 주이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미카 군, 다음에 또 만나요."
기자가 질문지를 정리해서 먼저 일어선 뒤 슈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러고 나니 넓은 라운지에 미카와 슈, 단둘만이 남았다. 어색한 자세로 엉거주춤 일어서던 미카는 뒤를 돌아보다 슈를 보고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려버렸다.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아, 압니더. 이츠키 선배지예. 리츠 군한테 얘기 들었심더."
카게히라 미카가 이츠키 슈에게 한 말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죄송합니더. 머가 먼지 한나또 모르겠는데, 같이 Valkyrie를 하던 멤버라고 들었심더…. 내는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진짜 기억이 안 나는데예…. 와 그라는지 모르겠심더. 죄송합니더."
미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만 꾸벅이며 더듬더듬 말했다.
슈는 그것이 단순히 기억이 안 나는 상대에 대한 미안함 때문만이 아니라, 이유 모를 두려움과 거북함 때문이라는 것도 느꼈다. 슈가 미간을 찌푸리자 미카는 더욱 움츠러들며 빠른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 어케든 최대한 떠올려 볼 테니께 너무 화내지 마이소! 내 잘못했심더. 리츠 군이 이츠키 선배 화가 많이 나셨을 거라고 했심더. 다 내 탓이니께…."
"…그만해 다오. 시간도 늦었고, 오늘 이게 마지막 스케줄이라고 들었다. 성주관 기숙사로 데려다 줄 테니 나가자."
"…응아아."
전 같았으면 자연스럽게 머리에 손을 올리고, 어깨를 감싸 안고 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잔뜩 굳어버린 미카의 두 어깨에서는 묘한 거절이 느껴져, 슈는 올리려던 팔을 어색하게 내리고 미카를 앞세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택시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가는 동안에도 미카는 최대한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창 밖에만 고정한 상태였다. 마냥 의아하고, 약간은 반신반의하던 슈의 기분에 조금씩 분노가 스며들었다. 나를, 이렇게까지 거부할 이유가 대체 무엇이지? 이건 단순히 낯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보다 더 매몰차지 않은가?
"카게히라."
슈의 낮은 목소리에 미카가 움찔했다.
"사쿠마가 나에 대해 뭐라고 했지?"
"…예?! 아, 리츠 군이… 예, 그… 선배가 졸업하기 전부터 같은 유닛으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예. 진짜 죄송합니더, 진짜 암것도 기억이 안 나서…."
"농! 그 말도, 사과도 이미 들었다는 것이야. 그것 말고."
"응아… 엄청난 예술가라고 하데예. 캐서 리츠 군이 노래하고 영상을 몇 개 보여줬심더. 근데 참 이상하지예. 내가 그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을 춘 기억은 분명 있는데, 누구캉 같이 했는지가 도통 기억이 애매한기라. 사실 그간 Valkyrie의 무대를 몇 번 혼자 했는데예, 아무 문제 없었심더."
그 말에 슈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활동하는 데도 문제가 없고, 일상생활에도 지장은 없어 보인다. 리츠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이 안 나는 상태로도 어색하게나마 인터뷰에서 슈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크게 당황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던 것을 보면 머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다.
오로지 이츠키 슈에 대한 기억만이 사라졌을 뿐.
"기억을 찾든, 찾지 못하든 세간에서는 너와 나를 Valkyrie로 인식하고 있다. 싫어도 함께 활동해야 해. 나 또한 너 외의 다른 파트너를 찾을 생각은 없다는 것이야."
"그라믄…."
"음?"
"아, 아입니더."
슈 쪽을 쳐다보던 미카의 두 눈이 약간 혼탁해지는 느낌이었지만, 금세 깨끗한 빛으로 돌아왔다.
"내가 방금 머라칼라 했노. 암튼 안 그래도 사무소에서 이츠키 선배 오셨응께 Valkyrie 미니 라이브 스케줄 잡을끼라 캅니더. 오늘이나 내일쯤 얘기가 있을끼라예."
"아까부터 계속 느꼈다만… '이츠키 선배' 외에 나를 부를 말은 떠오르지 않는 건가?"
"예?"
미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때는 자신이 그렇게 부르도록 종용한 적도 있는 호칭이지만 이런 형태로 듣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러고 보니 리츠 군이 머라 다른 이름으로 부른 것 같기는 했네예.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내 머라꼬 불렀던가예?"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부르든 자유지만, 매스컴 앞이나 라이브 공연장에서는 '스승님'이라고 부를 것. 네가 갑자기 나를 '이츠키 선배'라고 공공연히 부르면 물어뜯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금세 Valkyrie 불화설을 퍼뜨릴 것이야."
"스승님… 알겠심더."
팬들 사이에서는 미카가 한 방송에서 '스승님'을 몇 번 연호하는지 세는 놀이가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소문에 어두운 슈조차 들어서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미카가 '스승님'이라는 호칭을 이토록 낯설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슈는 형언하기 힘든 씁쓸함을 씹어 삼키며 반대편 창을 돌아보았다. 몇 달만에 보는 도쿄 거리의,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초저녁 풍경이 묘하게도 가슴에 서렸다.
***
성주관 앞에 택시가 섰다. 미카가 우물쭈물하면서 먼저 내리자 습관적으로 따라 내리려던 슈는 생각을 고쳐먹고 가볍게 손짓만 했다. 고개를 꾸벅하고 돌리는 미카의 얼핏 보인 옆얼굴에 안도의 빛이 역력해서, 슈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만족감과 지울 수 없는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택시가 다시 출발하자 슈는 한 호텔의 이름을 댄 뒤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얼굴을 찌푸리며 전화를 꺼내 드니 뜻밖의 이름이 떠 있었다.
"…애송이? 네가 내게 전화를 하다니 별일이 다 있다는 것이야."
[아아, 슈 형 지금 일본이Ji? 생각보다 빨랐Ne.]
나츠메의 경쾌한 목소리에 슈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한 말투군."
[응, 알고 있었Eo. 슈 형이 형의 인형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Do.]
"…설마 네녀석이 관련된 문제였나, 애송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Eo. 내가 미카 군에게 마법을 건 건 사실이지만 기억을 잃게 하는 마법은 아니었거Deun.]
"자세히 설명해."
[비밀을 이렇게 일찍 공개해버리면 재미없Ji. 그래도 우리 사이니까 힌트를 주자면, 그 마법은 슈 형밖에 풀 수가 없Eo. 후후, 나도 참 정에 약하다니Kka.]
슈가 짜증을 내기 직전 전화는 툭 끊겨버렸다.
슈는 애꿎은 화면에 대고 고함을 질러대려다 이미 시커멓게 꺼진 것을 보고 긴 한숨만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추궁해 봐야 더 나올 것도 없어 보였다.
어쨌든 무슨 병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슈는 크게 안도했다.
이마를 짚으며 방금 나츠메가 한 이야기를 톺아보고 있는데 마치 전화가 끊기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양 새로운 전화가 걸려 왔다. 재빨리 집어들고 보니 이번에는 소속 사무소의 부소장이었다.
[이츠키 씨, 카게히라 씨한테서 이야기 들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다음 주 수요일에 시크릿 게스트로 미니 라이브 스케줄이 잡혔으니 우선 세 곡 정도 무대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수요일이군. 오늘이 금요일이니… 알겠다는 것이야. …헌데 사에구사, 내가 없는 사이 카게히라에게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나?"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기억하는 한 카게히라 씨에게 특별히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렇군."
길게 통화할 생각이 없어 바로 전화를 끊으려는데 이바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약간의 컨디션 불량으로 수액을 맞고 두 시간쯤 쉰 적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후 금세 나아서 다시 스케줄을 소화했는데요.]
"컨디션 불량?"
[예, 의사 소견으로는 약간의 수면 부족이라고 하더군요.]
"수면 부족…."
[스케줄상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하루 6시간 이상의 수면은 취하도록 충고했습니다. 카게히라 씨도 수긍했고요.]
"…알겠다."
두 통의 전화를 끝내니 호텔에 도착했다. 짐을 끌고 들어가 체크인을 한 슈는 가벼운 샤워를 한 뒤 전화를 들고 고민했다. 수면부족의 이유를 추궁하고 싶었지만 잔뜩 겁을 집어먹은 미카의 얼굴을 떠올리니 망설여졌다. 무엇보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미카 앞에서 짜증 섞인 고함을 지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단적으로 말해, 지금 슈는 매우 서운한 상태였다.
"아무리 그 애송이 따위가 하찮은 마법을 걸었어도 다른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나를 잊어버리다니 언어도단이라는 것이야…."
요즘 들어 완전히 입을 다물고 만 마드무아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미한 미소를 띤 마드무아젤은 아름답고 자애로운 자태로 슈를 마주 볼 뿐,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슈는 미카 대신 리츠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날 미니 라이브용 레슨이 있다는 사실을 전달해 달라고 일렀다. 이바라가 미카의 스케줄을 조정해 준 덕분에 수요일 직전까지 레슨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사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일찍 도착한 슈가 연습복으로 갈아입고 몸을 풀고 있는데 문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얼핏 듣기에도 끌고 온 자와 끌려온 자의 공방이 벌어지는 듯했다. 예상했던 사태였기에 슈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다가가 문을 벌컥 열었다. 까만 머리 둘이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도착했으면 빨리 들어오라는 것이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으… 응아아…."
미카가 리츠를 향해 애원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이곳까지 끌고 온 장본인인 리츠는 너무나 간단히 손을 놓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미카링, 힘내."
물론 미카의 뒤에서는 불쾌하다는 오라를 풀풀 뿜어내는 슈가 버티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미카가 마지못해 연습실로 들어오자 슈는 음악을 틀며 말했다.
"네가 어떤 상태든, 무대에 오르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는 것이야. Valkyrie의 무대는 언제나 완벽해야만 해. 비록 단 세 곡뿐인 미니 라이브라 하더라도."
"응아… 내 혼자 할 때 손 놓고 한 적은 없었심더. 그거만큼은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으예."
고개를 끄덕이던 슈가 문득 미카를 돌아보았다.
"왜지?"
"예에?"
"왜지? 너는 내 존재를 잊었다. 너로 하여금 늘 무대에서 완벽을 추구하게끔 채찍질하던 내 존재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데, 혼자만의 무대에서 그렇게 열심히 할 이유가 무엇이지? 너는 이미 유명인이다. 이름을 팔기 위해 죽자사자 할 필요도 없어. 아무도 무리해서 완벽한 무대를 올리길 강요하지 않아."
미카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내는… 무대에서 0.1초 단위까지 놓치지 않고 딱딱 지키는 안무 하는 기, 글케 힘들지 않심더. 걍 할 만 하달까… 그래 하는 기 내 환희고, 기쁨이라예. 관객들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는 걸 보믄 막 속에서 뜨거운 게 끓어올라서 더 잘하고 싶고예, 더 정교하게 해내고 싶심더. 내 좋아서 그래 하는 기라, 누가 시켜서 그라는 기 아입니더."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미카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정작 그걸 가르친 나를 왜 잊어버렸느냐는 것이야…."
"응아?"
"아니다, 우선 안무 맞춰보기부터 시작하자."
본인이 말했던 대로 줄에 매인 인형처럼 슈의 손길에 맞춰 정확하게 움직이는 미카의 안무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둘이서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 벌써 몇 달만인데도 전혀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한 곡을 끝내고 나니 하얗게 질렸던 미카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관리가 잘 됐군. 그럭저럭 봐 줄 만하다는 것이다."
"응아! 스승님, 내 잘했제? 내 스승님 없는 동안에도 윽수로 열심히 연습했다 안카나!"
"…카게히라?"
믿을 수 없는 기분에 슈가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자 환하게 웃던 미카의 얼굴에 더럭 겁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겁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움츠리고 슈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너… 너무 가까이 오지 마이소."
"카게히라…?"
방금 전, 잠시 원래대로 돌아왔던 미카의 모습은 단순히 기억을 잃은 척하다 그것을 순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겁에 질린 모습 또한 진짜였으며, 무엇보다 미카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자신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잊어버린 척한다고 슈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가 있어 나츠메의 마법이 한순간 풀렸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슈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우선 연습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쉴 틈이 없다는 것이야! 공연까지 시간은 촉박해. 다시 한 번!"
"예에…!"
사실 슈가 느끼기에도 더 이상의 안무 연습은 필요치 않았다. 미카는 지금 당장 데려다 무대에 올려도 쿡 찌르면 모든 안무를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슈가 경계심으로 가득한 미카와 지금 할 수 있는 교감 수단은 오로지 이것뿐이었다. 슈는 연습복이 땀으로 젖도록 스스로도 뛰고, 돌고, 움직이면서 미카가 겁먹을 틈을 주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연습이 어느덧 점심 즈음에 들어서고 나서야 슈는 한 손을 들어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인형처럼 핑글핑글 움직이던 미카가 그야말로 끈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정지하더니 툭, 쓰러졌다.
"…무리를 시켜서 미안하다. 오후에 스케줄이 있다고 들었으니 여기까지만 하지. 적당히 영양가가 있는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카게히라?"
그저 지쳐서 누워버린 줄로만 알았던 미카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슈가 다급히 다가가 얼굴을 들여다보니 미카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카게히라, 카게히라!"
놀란 슈가 미카를 마구 흔들었지만 미카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당황한 나머지 몸 이곳저곳을 만지던 슈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미카는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응아… 리츠 군? 와 내 얼굴을 그래 뚤버져라 들여다보고 있노?"
성주관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잠에서 깨어난 미카는 눈을 뜨자마자 시야 가득 룸메이트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보고 움찔 놀랐다. 리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무리한 레슨 때문에 쓰러졌다고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아무리 완벽주의자라 해도, 그 사람이 네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그 정도까지 몰아붙일 사람이 아닌데. 그래도 일어나서 다행이야, 미카링."
"그 사람?"
"'스승님' 씨 말이야. 기억 안 나?"
미카가 벌떡 일어났다.
"스승님 왔나?! 내는 아무 연락도 몬 받았는데?! 언제? 언제 왔는데?! 어데 있노?!"
"진정해, 미카링. 넌 몇 시간 전 '스승님' 씨랑 연습실에서 레슨을 하다가 쓰러졌어. 기억 안 나?"
"무… 무신 말이고, 내 그런 적 없다."
황망한 표정의 미카와 눈살을 찌푸린 리츠가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데 마침 방에 들어서던 슈가 미카에게로 달려왔다.
"눈을 떴느냐는 것이다!"
"스승님!"
미카는 침대에서 펄쩍 뛰다시피 일어나 슈에게 덥석 안겼다.
"스승님! 올 거믄 말을 하제! 머꼬 이게, 서프라이즈가?!"
"카게히라?"
"내 스승님 보고파 얼마나 연락하고 싶었는데! 캐도 스승님 바쁠까바 참았다! 스승님 시간 나믄 연락 올까봐 밤에도 한숨 못자고…."
새끼 캥거루처럼 매달린 미카의 등을 토닥이며 슈는 그제야 수면부족의 이유를 이해했다.
"카게히라… 연락을 소홀히 했던 점은 사과하겠다. 하지만 네가 볼일이 있을 때나, 내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면 굳이 참지 않고 먼저 연락을 해도 된다는 것이야. 그렇게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나는, 설령 바빠서 네 연락을 놓쳤다 하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전화할 테니까."
"응앗… 캐도 역시 실물이 최고데이. 스승님, 이게 얼마만에 만나는 건지 아나? 일본에는 얼마나 있을끼가? 내 이번에는 절대 한시도 안 떨어지고 착 붙어 있을끼다."
"너도 스케줄이 있으니 그 정도까지는 힘들겠지. 그래도 나 또한 최대한 곁에 있어 줄 생각이다."
아기처럼 체온이 잔뜩 높아진 미카가 슈에게 안겨 훌쩍였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리츠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 모양만으로 '잘 부탁해~'라고 말하며 방을 나가고 있었다.
문득 나츠메가 '기억을 잃게 하는 마법을 걸지는 않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슈는 미카에게 물었다.
"카게히라, 혹시 애송이가 네게 무슨 마법을 걸었는지 아느냐?"
"응아? 낫군? 아…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낫군이 사탕 준 적 있었데이. 힘든 것, 아픈 것을 다 날려 주는 사탕이라 카데. 무신 맛인지 생각은 안 나는데 참 맛났다 안카나…. 또 주면 좋겠구마."
"농!!"
슈가 저도 모르게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자 놀란 미카가 눈물이 쏙 들어간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응아? 스승님이 주는 거 말고는 묵지 말라캤던 거 어겨서 화났나? 캐도 낫군인데… 낫군이 머 이상한 걸 주겠나?"
"그 녀석이 주는 건 앞으로 두 번 다시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 알겠지, 카게히라?"
"응아… 알았다…."
힘든 것, 아픈 것. 슈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도 미카는 혹독한 레슨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며 훌륭한 성과를 냈다고 슈도 생각했다. 그렇다면 미카를 힘들고 아프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연락 태만.
"크게 반성하고 있다는 것이야…."
"머를 말이고, 스승님?"
"혼잣말이다. 그보다 카게히라, 내가 일본에 왔을 때를 대비해서 조사해 놓은 것이 있겠지? 새롭게 연 소품점이나 카페, 수예점 등을 안내해 달라는 것이다."
"하모! 마음 턱 놓고 내한테만 맡기래이!"
수요일 미니 라이브가 끝나면 꼭 미카를 위한 시간을 내야겠다고 슈는 생각했다. 아무리 바빠도 정기적인 연락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은 물론.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이 모자란 인형은 자신을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타격이 되는지, 슈는 이번 일로 똑똑히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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