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쥰히요] 여름의 정열

쥰히요 by 임시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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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수위 암시가 있습니다.


평소와 같은 여름 풍경이었다. 마당 밖으로는 매미 소리가 들리고 잔에 담긴 얼음이 녹아 달각이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여름.

히요리는 무방비하게도 제게 등을 돌린 채 휴대폰을 들여다 보고 있는 쥰을 바라보았다. 휴대폰 속에는 훈련 때의 그와 자신의 움직임이 당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번처럼 스텝이 꼬이는 실수를 반복할까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지금은 모처럼의 여가시간. 자신이 옆에 있는데도 저를 방치하다니 그것만큼은 괘씸해서 참을 수 없는 히요리였다.

"쥰 군~."

히요리가 쥰의 등에 몸을 기대며 말끝을 늘렸다. 후끈한 체온이 몸에 달라붙어 답답하게 느껴졌다.

"잠깐만요, 아기씨. 지금 중요한 부분이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하는 그의 모습에 살짝 열이 오른다. 그가 자신에게 익숙해진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에게 소홀해지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히요리는 조금 더 강도높게 그를 방해하기로 했다.

"더워~ 어떻게 좀 해보란 거네!"

"들러붙으니까 더 그런 거잖아요. 애초에 더운데 왜 끌어안는 거예요?"

"응? 이러려고."

"우왓, 또 집어넣었어!!"

옷 속에 들어간 얼음에 그가 튀어오르듯 몸을 일으킨다. 몇 번을 봐도 유쾌한 광경에 히요리가 호쾌하게 웃는다. 쥰이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한다.

"남은 노력하고 있는데 장난치지 말라고요!"

"그렇게 말해도 쥰 군은 실전파잖아?"

히요리가 얼음 때문에 빨개진 손가락으로부터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시뮬레이션도 좋지만 시뮬레이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이런 건 결국 몸을 움직이며 해결해야 할 일이네. 쥰 군은 생각이 많으면 끙끙 앓잖아? 그런 쥰 군은 가여우니까 이 내가 불쌍히 여겨 특별히 구해주겠단 거네! 감사하도록 해!"

언제나처럼 당차게 말하는 히요리의 말에 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순순하지만은 않은 긍정의 표현이었다. 쥰이 비꼬듯 말한다.

"당신, 제가 안 어울려주니까 심심해서 그런 거잖아요."

"지금 날 심심한 아이 취급하는 거야?"

"아닌가요? 제가 보기엔 별로 달라보이지 않는데요."

"제대로 봤네."

"우와, 차가워!!"

방금 전까지 얼음을 들고 있던 히요리의 손가락은 차가웠다. 히요리는 차가운 손 끝을 쥰의 옷 아래로 집어넣어 피부를 간지럽혔다. 손끝이 탄탄한 근육을 스칠 때마다 그가 몸을 움츠리며 "와하하, 잠깐, 진짜─" 같은 말을 내뱉었다. "이─" 하고 말을 끊은 쥰이 반격을 시작한다.

"적당히 하라고요!"

"와아─!!"

쥰이 몸에 무게를 실어 누르며 히요리를 마룻바닥에 밀어눕혔다. 그대로 옷 속에 손을 넣어 그가 제게 그랬듯 부드러운 살결을 간지럽힌다. 버둥거리는 히요리의 몸을 밀착해 제압하곤 손을 움직이자 웃음 섞인 숨이 마구 새어나왔다. "잠깐, 그만─" 하는 절박한 말들에 쥰은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느 순간 손이 멈췄다. 숨을 고르는 히요리의 가슴팍이 살짝 오르락 내렸다. 웃음을 완전히 거두지 못한 채 눈에 살짝 고인 눈물은, 보라빛 눈동자가 뭔가를 욕망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정말이지 더운 날이었다.

쥰은 말없이 그 눈동자를 빤히 내려다 본다. 히요리 역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금빛 눈동자에는 물기와 열기가 같이 서려있다. 그 눈빛이 몹시 사랑스러워서, 히요리는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손을 얹은 뒤 엄지로 그의 눈매를 살살 쓸어보았다.

곧, 그가 천천히 거리를 좁혀 키스해온다. 조심스럽게 맞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살짝 찍어누른 입술이 떨어졌다가 고개를 기울여 다시 닿아온다. 뜨거운 혀가 얽히고 서로의 숨을 빼앗는 것만으로, 풍경에 녹아들 듯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열이 머리 끝까지 올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마치 몸이 물처럼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겨우 입술을 떼어낸 쥰이 아쉬운 숨을 내쉬며 히요리의 목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히요리는 쥰의 머리카락을 달래듯 쓰다듬으며 작년 여름의 일을 떠올렸다.

첫 키스 때의 일이다.

여름의 열기 때문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었지만, 히요리는 그 무엇도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행동했다. 쥰은 뭔가 말하려 했던 것 같지만 그런 히요리의 태도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사과나 진심의 말도 없이 넘어간 해프닝.

그때의 쥰은 지금보다도 감정을 숨기는 게 서툴러 뭐든 투명하게 비쳐보였다. 그런데도 감정을 드러내질 못해서 분하고 초조해했다. 그런 쥰의 모습을 본 히요리 역시 자신을 유지하는 게 버거워졌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주변 사람들도 어딘가 달라진 두 사람의 기류를 느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사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사람은 꽤나 깊은 관계가 되어있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얕았다. 세간에서 이런 관계를 뭐라고 부르는지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단지 히요리가 싫다하거나 밀어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분위기를 타 이어져 온 관계. 감정이 엇갈린 채 행위만이 거듭된 실수처럼 이어져, 해소되지 못한 열기가 서로에게 아프게 남았다.

차라리 포기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포기 할 수가 없었다. 상대 쪽에서 먼저 끝을 내줬으면 생각하다가도 도저히 그런 미래를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있었다. 먼저 이기적으로 군 건 히요리 자신이었는데, 집착하는 것도 자신이었다.

조금의 틈도 아까운 듯 붙어있던 두 사람은 진심을 고하지 못한 죄로 서로를 갉아먹으며 곁에 있었다.

결국 히요리를 무너뜨린 건 상대의 다정이었다.

"사귀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플만큼 간절한 목소리로 쥰은 그렇게 말했다. 담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그러질 못할 때 내는 소리 같았다.

"그저… 이대로 아기씨 곁에 있을수만 있다면, 저는."

저는 만족할게요, 그 어떤 말보다도 그 말이 아팠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 들어 히요리는 더 이상 참을수가 없었다. 저를 사랑하며 곪아가겠다는 그의 선언에 히요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됐어."

히요리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팔로 눈을 덮어 가렸다. 주먹은 꾹 쥔 채였다.

"됐으니까 말해, 쥰 군."

지금이라면 무슨 말을 하든 들어줄 테니까, 히요리의 항복 선언에도 쥰은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단지, 살짝 시야가 트였다. 쥰이 눈을 가리고 있던 히요리의 팔을 조심스럽게 걷어냈기 때문이다. 축축한 눈가에 공기가 닿아 조금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그 서늘함을 물기와 함께 다정한 손끝이 닦아낸다. 그 모든 걸 상회할 만큼의 감정이 쏟아져내렸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아기씨…."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사귀게 된 게 한 달 전, 역순으로 진도를 빼던 그들답게 오히려 이어지고 난 다음부터 쥰은 히요리를 더 조심스럽게 대했다. 평소 두 사람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지만, 관계를 시작 할 때의 쥰은 늘 조심스러웠다. 아무리 도발을 해도 그랬다. 이것만큼은 아쉬운 히요리였다.

'이전에는 집착 비슷한 게 있었던 것도 같은데. 꽤 대담했던 것도 같고? 아…….'

한편으로는 '이 아이는 날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하고 싶었던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게 그가 사랑을 대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이어질 수 없다는 조바심에 그러지 못했던 걸지도. 조심스러우면 닿을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까지 해온 게 있는데, 당분간은 맞춰주겠지만… 생각하고 있으면 쥰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다른 생각하고 있죠."

분한 기색이었다. 단호한 어조였지만 말에서 베어나온 초조한 기색에 흐응, 하고 히요리는 웃어넘겼다. 이럴 때의 쥰 군은 놀리고 싶어지는 쥰 군이었다.

"쥰 군, 눈치가 많이 늘었네?"

"늘었네?가 아니잖아요. 하기 싫으면 싫다고 제대로 말해 달라고요."

쥰의 말에 물론 히요리는 제대로 해명한다. 그와의 일을 무엇하나 실수로 치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싫다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네. 행위에 집중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부드럽게 쥰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히요리는 말한다.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제대로 쥰 군을 생각하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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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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