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비겁하게, 교활하게, 얼마든지

#사고 연락 #병원 이송 #쌍방애원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날은 어쩐지 아침부터 꿈자리가 사나웠다. 

온 세상이 다 자신의 적인 것만 같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방 한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시절. 아아, 그래도 내게는 까마귀가 한 마리 있어. 이 보잘것없고 무능한 허수아비 곁에 끝까지 붙어 있어 주는, 어리석고 충직한 나의 벗. 더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데도 어째서인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깊은 헌신을 바치는 소중한 인형. 

그런 까마귀라면 분명, 오늘도 손도 대지 않을 식사를 가져다놓았을 것이다. 까마귀의 헌신에 조금이나마 답해 주려면 한 입이라도 씹어 삼켜야… 응? 

 

[슈 군, 정말이지 자기 좋을 대로 꿈을 꾸고 있구나.] 

 

옆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마드무아젤에게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고 둘러보니 주위는 온통 폐허였고, 마드무아젤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무너지고 부서져 내린 것들뿐이었다. 식사 그릇도, 까마귀도,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 그런 아이가 어디 있니?] 

[마드무아젤, 지금 뭐라고….] 

[어머나, 슈 군. 잘 생각해 봐. 넌 모든 것을 잃었어. 이기적인 욕심을 부리다가 그만 처참하게 파멸하고 말았지. 그런 형편없는 네 곁에 과연 그토록 끝까지 함께해 줄 사람이 정말 있을까? 네가 만들어낸 상상 아냐?] 

[….] 

 

마드무아젤의 차가운 말에 슈는 할 말을 잃었다. 머리를 둔하게 얻어맞은 충격과 동시에, 가슴이 완전히 도려나가진 듯한 시꺼먼 상실감이 전신을 잠식했다. 

 

[카게히라!] 

 

슈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두 다리를 뻗고 어린애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생떼를 쓰는 아이처럼 바닥을 마구 내리치면서 볼품없게, 꼴사납게, 할 수 있는 한 가장 악다구니를 쓰면서. 

 

[카게히라, 카게히라! 카게히라!] 

[정신 차려, 슈 군. 그 아이는 슈 군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이야. 그런 아이는 없어.] 

[카게히라를 돌려줘! 카게히라!]  

"…히라, 카게히라…." 

"어이, 이츠키. 그만하고 일어나." 

 

도저히 마드무아젤의 목소리로는 여겨지지 않는 굵고 묵직한 목소리에 슈가 천천히 눈을 뜨니, 코앞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의 룸메이트─키류 쿠로가 서 있었다. 

 

"류~ 구… 키류." 

"아침부터 대체 무슨 꿈을 꾸기에 후배 이름을 부르면서 우는 거야? 그만 일어나. 벌써 10시가 넘었어. 나는 이제 나가 봐야 해서, 악몽을 꾸는 것 같기에 깨웠다." 

"…아아, 꿈이었군." 

 

무거운 머리를 일으키니 꿈을 꾸면서 실제로 울었는지 두통이 느껴지고, 눈가가 부어 있었다. 부스스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씻고 나오자 이미 옷을 다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마친 쿠로가 그런 슈를 흘끔 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다 털어 버린 줄 알았는데." 

"…음?" 

 

슈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윽고 미간을 찌푸리고는 혀를 차며 대꾸했다. 

 

"뭘 털어 버렸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새삼 느꼈을 뿐이라는 것이야.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가 내게서 카게히라를 빼앗아 가려고 한다면 나는 다섯 살짜리 아이처럼 울고불고하는, 추한 꼴을 보여서라도 그것을 되찾아 오려고 발버둥치리라는 사실을." 

"…오, 오우…." 

 

돌발적으로 날아온, 소꿉친구의 지나치게 솔직한 속마음에 쿠로는 잠시 얼어붙었으나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휴대전화를 집어들고 외출하려던 순간 액정화면에 누군가의 이름이 떴다. 

 

"이사라? 어이, 무슨 일이야?" 

 

쿠로의 태평한 목소리와는 달리, 전화 너머에서는 마오의 긴박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키류 선배! 아아, 겨우 받았네! 이츠키 선배가 하도 전화를 안 받아서 이쪽으로 전화드렸어요! 지금 카게히라가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갔으니까! 그리로 오라고 전달 좀 해 주세요! 

"카게히라가 다쳤다고?" 

"뭐?!" 

 

슈가 그 말을 듣고 펄쩍 뛰더니, 쿠로의 전화기를 빼앗아 들고 고함을 질렀다. 

 

"카게히라가 다쳤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아, 이츠키 선배! 죄송합니다! 저도 정확한 사정은 잘 모르겠는데, 무대 자재가 무너지는 바람에 카게히라가 맞고 기절했어요!

"무대 자재가 무너져?!" 

-아무튼 빨리 와 주세요! 

 

뒤늦게 슈 자신의 휴대전화를 보니 마오에게서 온 연락이 이미 여러 통이었다. 슈는 새파래진 얼굴로 재빨리 파자마를 벗고 재킷 소매에 팔을 꿰었다. 

 

"잇쨩, 나는 스케줄이 있어서 바로 가야 하는데… 혼자 갈 수 있겠어?" 

 

쿠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슈는 이미 아무런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 아이는 슈 군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상이야. 그런 아이는 없어. 

-네가 만들어낸 상상 아냐? 

 

잠에서 깨기 직전 들었던 마드무아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아끼던 인형을 빼앗긴 다섯 살짜리 아이는 엉엉 울면서 소란을 피우면, 어쩌면 인형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미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런 방식으로는 되찾을 수 없다. 평소 같았다면 조금 더 감정적으로 행동했을지 모르지만 꿈 속에서 한 번 잃고 나니 슈는 평소보다 냉정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뛰쳐나가는 슈를 보며 뒤에서 가방을 짊어진 쿠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이, 아무리 그래도 신발은 제대로 신고 가는 게… 아니, 마음은 알겠다만." 

 

 ***

 

 

"카게히라!" 

 

병실 문을 열고 뛰어들어간 순간 침대 옆에 앉아 있던 아라시가 있는 힘껏 얼굴을 찌푸리며 쉿- 하고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 미카쨩이 깨잖아. 아아, 가엾게도. 이 모양이 될 때까지 스스로를 얼마나 몰아붙였는지, 이게 다 이츠키 선배 탓이야." 

"내 탓이라니?"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오는 도중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수업 중에 무대 자재에 맞을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에 어딜 어떻게 얼마나 다쳤을까, 학교 안 보건실도 아니고 병원까지 실려올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크게 다쳤다는 말일까… 아라시는 슈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를 가리켰다. 

 

"겉보기로는 잘 모르겠지만 머리를 부딪혀서, 만일을 대비해서 검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병원으로 온 거야. 일단 생명 자체에는 지장이 없다고 해서 재워 두고 있어." 

"그, 그렇군… 그런데 같은 반도 아닌 나루카미가 왜?" 

"왜긴 왜겠어? 나는 미카쨩의 가장 친한 친구♡니까. 는 농담이고, 수업이 지루해서 문득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한창 세트를 짓는 와중에 미카쨩이 세트 자재에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봐 버렸단 말이야. 그때 내 심정, 알겠어?" 

"…그건 재난이었겠군. 대신 사과하지."

"당신 사과 따위는 필요없네요. …하아, 사실은 나,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 이 아이가 공허한 눈으로 무대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부터." 

 

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카게히라가 왜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무대 근처에 있었다는 거지? 이 아이는 아이돌이지 스태프가 아니야. 그런 곳에 갈 이유가 없었을 텐데." 

"…그래서 이츠키 선배 때문이라는 거야." 

 

침대에 누워 있는 미카. 그 옆에 앉아 있는 아라시. 슈는 아라시가 의자를 가리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옆으로 차마 다가갈 수가 없었다. 창백한 미카의 얼굴과 어째서인지 비난 어린 아라시의 시선이, 마치 작년 겨울 어느 때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졸업생인 이츠키 선배는 잘 모를, 3-A의 신생 임시 유닛 무대가 그 수업에서 처음 공개되기로 예정돼 있었다나 봐. 미카쨩은 그 애들이 처음 무대를 공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계속 세트를 궁금해 했어. 자긴 항상 전문가들의 손을 빌려 만들어진 무대에 올라서 공연을 할 뿐이니까, 실제 무대를 만드는 모습이 궁금하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미카쨩, 무대장치 제작도 직접 하고 싶었던가 봐." 

"향상심을 갖고 노력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만… 그게 왜?" 

 

물론 초심자가 부주의하게 세트 제작 현장에 발을 들였다 사고가 났으니 마냥 훌륭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슈는 그것이 왜 자기 탓이라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라시는 다시 한 번 슈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정말로 이츠키 선배가 미카쨩을 힘들게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고, 실력행사도 얼마든지 불사할 거야. 하지만 이 아이가 엉뚱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내달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냥 선배를 책망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아라시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 슈는 저도 모르게 기겁을 했다. 

 

"농! 이, 이건…." 

"단추 잘못 끼운 것도 그렇지만, 그 슬리퍼… 이츠키 선배가 무려 슬리퍼를 신고 뛰어왔다는 정성을 봐서 이번에는 봐 줄게." 

 

가슴팍을 내려다본 슈는 재킷 단추도 하나씩 어긋났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는 이마를 짚었다. 어쩌면, 전화가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자신은 세수조차 하지 않고 뛰어왔을지도 모른다. 냉정은 무슨, 꿈의 교훈은 무슨. 

다섯 살짜리 아이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했다는 사실은 결국 변함이 없지 않은가. 

 

"선배, 어젯밤에 새벽까지 작업하고 잤다면서?" 

"음? 아… 음, 급한 의뢰가 있어서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야. 그 덕분에 귀국 후 지금까지 카게히라와 시간을 보낼 수가 없어서… 그래서 어서 일을 끝내고, 오늘은 카게히라의 하교 후 함께 저녁을 들기로 했는데…." 

"알아. 아침에 만났을 때, 오늘은 스승님캉 디너데이~ 하고 얼마나 자랑했다고." 

 

아라시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지고,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아, 제발… 서로 말이 통하도록 대화를 하란 말이야. 일부러 마오쨩이고 유즈루쨩이고 다 내쫓고 나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선배가 내 생각보다 빨리 온 것도 사실이니까 이번엔 여러 모로 봐 줄게. 아, 그리고 미카쨩. 너희 반 애들한테 미카쨩은 무사하다고 전달했으니까 그 애들의 첫 무대 공개는 무사히 진행됐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 

 

어깨를 으쓱한 아라시가 문 쪽으로 걸어가자, 슈의 눈앞에 필사적으로 두 눈을 감고 이마에 잔뜩 주름을 잡은 채 잠든 척하는 미카의 얼굴이 드러났다. 

 

"카게히라! 정신이 든 것이야? 어디 아픈 곳은… 나를, 알아보겠느냐?" 

 

머리를 부딪혔다는 말에 제일 먼저 걱정된 부분은 그것이었으나, 눈을 뜬 미카는 "응에에~ 스승님…."하고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루카미에게서 대강 이야기는 들었다만, 그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한 것이지? 다 지어진 무대도 아니고 설치 중인 무대 근처를 왜 어슬렁거려? 주위에서 더러 사고가 난다는 사실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이 머릿속에 든 것은 톱밥뿐이야?" 

"응아아, 미안하데이~! 내 잘 알아 두고 싶어가 그랬다 아이가! 하나라도 더 알아 두고 싶어가…!" 

"대체 뭘?!" 

"우… 우예 짓는지, 먼 순서로 어케 짓는지… 속에가 어케 돼 있는지… 짓는 모습을 봐 두믄 공연할 때도 도움이 될 게 있지 않을까 싶어가… 내는 머리가 나쁘니께 가까이 다가가서 잘 봐 두믄 더 좋을 거 같아가… 잘못했데이! 스승님, 내 멍청하다고 버리지 말아 도!" 

"입만 열면 버리지 말라, 버리지 말라! 안 버린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병실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음량에 미카는 혼이 빠진 표정이었다가 겨우 긴장이 풀린 듯 흐물흐물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아아… 내, 하나라도 더, 한 개라도 더, 모르던 걸 알고 못 했던 걸 배우는 기 이래 힘든 일인 줄 몰랐구마…." 

 

슈는 아까 아라시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미카의 얼굴을 더욱 바짝 들여다보며 두 손을 쥐었다. 

 

"카게히라야말로, 사라지지 말아 다오." 

"응아?" 

"모르겠느냐? 내가 너를 버린다는 말이 언어도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발, 눈앞에서 사라지지 말아 다오. 어디에도 가지 말아 다오. 이렇게 꼴사납게 애걸을 하고 네게 연민을 갈구해서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잃지 않을 것이다." 

 

-자기 좋을 대로 꿈을 꾸고 있구나. 

-네가 만들어낸 상상 아냐?

  

그것은 마드무아젤의 말이었지만, 결국은 슈 자신의 근심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헌신하고 모든 것을 바치고도 버림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존재가, 세상에 정말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 늘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 발을 걸치고 있는 것처럼 얇고 투명한 미카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늘어지지 않으면 확신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은 분명 슈 자신이 그렇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가 불가능하기에, 언제든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그, 그치마안…." 

"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스승님, 내한테 받은 사랑을 갚아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러니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 

 

슈가 얼굴을 찌푸렸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왜 그렇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는 사실… 글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 안 한데이. 오히려 내가 살아 있을라꼬, 내가 안 죽을라꼬 스승님한테 매달린 기제. 그니께 내가 얼마나 줬는지, 솔직히 모르겠는데… 스승님이 '아 고만 돼따'하는 생각이 들어뿌믄? 인자 받은 사랑은 다 갚았다, 내는 자유다! …라꼬, 스승님이 생각하는 날이 오믄?" 

"카게히라?" 

 

미카의 두 손을 잡고 두 눈동자를 들여다본 자세 그대로 슈는 굳어버렸다. 

 

"그라믄 내는… 우야노?" 

 

서로 색이 다른 두 눈동자에 물기로 막이 끼었다. 

 

"카게히라, 나는…." 

"응아아, 안다! 내도 안데이! 스승님은 쓸모 없는 인형도 안 버리고 끝까지 곁에 두는, 상냥한 사람이니께! 줄 맹키 다 줬다꼬 막 버리고 그러진 않긋제! 그치만 내는 인제 인형이 아니니께… 인형이라믄 혹시 곁에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는 인간이니께…." 

 

눈을 깜박여 눈물을 억지로 참은 미카가 말했다. 

 

"그니께 내는 노력하는 기다. 스승님이 고만 다 줬다! 하고 생각한 후에도 인간으로서의 내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라도 더 배우고, 하나라도 더 익히고… 스승님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예술가가 되려고, 그라믄 대등하게 곁에 있을 수 있을 테니께…." 

"그래서 무대 제작도 자세히 보려고 했던 것이야…? 위험할 만큼 가까이 가서?" 

"응아아, 저녁 묵으믄서 얘기해 줄라꼬 했는데에… 막 신기한 거 많았다 안카나…." 

 

결국 아라시가 말했던 '이게 다 이츠키 선배 탓이야'라는 말의 뜻을 깨달은 슈는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미카가 '엉뚱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내달린다'는 말 또한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결국, 나루카미에게는 무엇 하나 이길 수가 없군그래." 

 

슈는 미카의 어깨를 껴안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응아? 나루쨩 머?" 

"농…. 여하간, 머리를 맞았다고 하니 검사 결과를 기다리자. 일단 대화를 나누어 본 바로는 크게 문제는 없어 보인다만…." 

"응아아, 내 막 씨게 맞은 것도 아이고 걍 놀래서 기절한 기다… 혹시 무대가 취소됐으믄 진짜 미안할 텐데, 그나마 그냥 진행됐다 카니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도 없는 병실 안에서 조심조심 주위를 둘러보던 미카가 살며시 슈의 등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있으니 정말로 이 희고 네모난 병실 한 칸이 세상에서 뚝 떨어진, 그야말로 이 세상에 단둘뿐인 공간 같았다. 

 

"카게히라, 내가 얼마나 비겁한 인간인지 이야기를 들어 주겠느냐?" 

"응아…?" 

 

슈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다쳤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급해져서, 그만 슬리퍼를 구두로 바꿔 신는 것도 잊어버리고 달려왔다. 재킷 단추도 엉망진창으로 채웠지. 그리고 이 모습을 나루카미에게 보여, 매우 굴욕적이고도 부끄러웠다는 것이야." 

"스, 스승님…." 

"하지만 나루카미는 오히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분노를 면해 주었다. 너와 접촉할 수 있도록 자리도 비켜 주었지. 이런 모습이 철벽의 수문장 같은 그의 마음을 녹여, 너를 만날 수 있도록 해 준다면… 나는 얼마든지 이 방법을 동원할 생각이라는 것이야. 어떠냐, 교활하지?" 

"으, 응아아… 스승님이 바로 뛰어와 준 거는 좋지만, 그거는 Valkyrie의 격식에 지장이 가는 문제니께… 최대한 그럴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심더." 

"트레비앙, 그래 다오. 이런, 네 입에서 먼저 Valkyrie의 격식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는 것이야. 그래, 이제 내 격식도 Valkyrie의 격식도 카게히라의 손에 달렸구나. 내가 사람들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모두 네 하기에 달렸다. 카게히라가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지금 이곳에서 한 가지 더 탄생했군." 

"응아, 응아… 교활한 거 맞데이, 방금 그거…." 

"카카카카카!"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문 밖에 서 있던 아라시는 병실 안에 울려 퍼지는 슈의 호쾌한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안도하며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하긴, 저만큼이나 직설적으로 매달리고 애원해야만… 저 새까만 커튼 너머의 미카쨩에게 진심이 겨우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 점에서, 그게 가능한 게 이츠키 선배뿐인 것도 사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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