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서로를 묶자,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2023 Mika HBD**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카우트! 속삭이는 꽃들속에서' 스토리에서 이어짐

 

 

 

 

고요한 시간을 결코 싫어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차분한 슈의 천성에는 그 편이 더 잘 맞지만─ 아무래도 여럿이 북적거리며 한바탕 떠들고 지나간 후 홀로 남으면 아무래도 잔잔한 애수가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타고난 예술가인 슈는 턱을 괸 채 앉아 가만히 그 여운을 맛볼 줄 알았다.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옆에 앉아 있던 마드무아젤 쪽에서 마치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우후후, 슈 군. 모두 다 가 버리고 나니 쓸쓸해? 

 

최근 들어서는 완전히 입을 다물어버린 마드무아젤이지만, 결국 그녀는 슈 자신이었기에 어떤 말을 할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슈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마드무아젤을 바라보면서 들리지 않은 말에 대해 침묵으로 답했다. 

 

-인간은 파도와 같아서 한꺼번에 밀려왔다가는 또 한꺼번에 밀려가는 법이지. 그것을 서운해할 만큼 세상물정을 모르는 내가 아니라는 것이야. 

-미카쨩만이라도 조금 더 남아 있어 줬으면 했는데 바빠서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건, 아쉽긴 해. 

 

갑자기 파리에서 할 일이 생겼다며 프로듀서를 대동하고 우르르 나타나서는 카오루, 미도리, 타츠미, 레오와 함께 슈의 아틀리에에 머무르던 미카가 일을 마치고 돌아간 것이 바로 어제. 다행히 별달리 중요한 스케줄이 없어 일행을 공항까지 배웅해줄 수 있었던 슈의 팔에 미카는 끝까지 매달렸지만, 결국은 아쉬운 듯 계속해서 돌아보면서도 무리와 함께 인파 속에 섞여 탑승동으로 들어갔다. 

의상 제작에 몰두하던 날 저녁, 슈가 제때 식사를 챙기지 않는다며 제법 그럴싸하게 허리에 양손을 짚고 잔소리를 하던 미카의 모습이 마치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져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져졌는지. 하지만 미카의 말은 틀리지 않았기에 슈도 고분고분 그 말에 따랐다. 하기야 아무리 소식하는 슈라 해도, 커피 한 잔으로 허기를 때우고 밤샘작업을 진행한다는 건 다시 생각해 보면 그리 효율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은 아무래도, 급한 상황에 처하면 유연한 사고를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하기야 그때는 하룻밤 안에 네 벌의 의상을 만드느라 워낙 정신이 없었다. 재료는 미카와 프로듀서가 조달해 주었고, 실제로 꽤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모든 일정을 마치고 전원이 돌아간 것이 바로 직전이었기 때문에 아틀리에는 아직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지저분했다. 그렇지, 이제 조용한 시간이 찾아왔으니 뒷정리를 해야겠다. 슈는 피로가 덜 풀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가, 문득 그것을 발견했다. 

 

"…아아, 이건." 

 

한아름 가득 원단과 꽃을 안고 있던 그 아이가 도저히 들 손이 없다면서 입에 물고 있던 보랏빛 리본의 자투리가 남아 있었다. 의상을 만들고 남은 재료가 굴러다니는 것은 이 아틀리에에서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미카의 입술에 닿았던 물건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졌다. 슈는 저도 모르게 그 리본을 집어들고, 무의식중에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광택 있는 새틴 질감 리본의 매끈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아틀리에의 커다란 창을 통해 하나 가득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그 애가 활짝 웃으면서 이쪽을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다. 

 

-스승님! 

 

때때로 보던 환각이었지만, 엊그제는 실제로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한시도 떨어져 지내지 않았던 지난날처럼 곁에 매달려 스승님 스승님 시끄럽게 굴면서 넓은 아틀리에 안을 바쁘게 헤집고 돌아다녔다. 저녁식사를 마련해 슈에게 권하고, 밤샘 작업 중 커피를 끓여 가져다주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곁에 있었다.  

 

'역시, 너는 내 눈 닿는 곳에 있는 편이 자연스러워.' 

 

작년, 처음 유학을 떠나 파리에 도착했을 때부터 슈는 이 하숙집에, 아틀리에에 미카가 있는 모습을 당연한 듯 상상했다. 잠시 괴롭지만 서로 떨어져 사는 생활을 1년만 견디면 반으로 쪼개졌던 거울이 다시 원래대로 맞춰지듯 둘은 함께할 수 있다. 무엇보다 미카도 그러기를 바랐다. 곁에 두어 달라고, 놓고 가지 말아 달라고 계속 재잘대던 그 입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러기에 앞서 우선은 이제 채 한두 달 정도밖에 남지 않은 그 아이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 먼저다. 

지난번 자신의 생일 무렵 일본에 다녀오면서 프로듀서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슈는 12월 말경의 일본행 항공편을 진작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이제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소중해진 존재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 한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사항이었고, 슈도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며 설레고 있었다. 

 

 

***

 

 

"…칫! 칫칫! 알고도 당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가다니, 그 계집도 경력직이 다 됐다고 요즘 너무 의기양양하다는 것이야!" 

"응아, 스승님? 비행기 내리자마자 바로 일하러 와가 마이 힘들제? 시차적응도 안 됐는데 냅다 방송국으로 와야 했응께… 사탕 주까?" 

"농, 필요없… 아니다, 하나 다오." 

 

평소처럼 거절하려던 슈는 문득 마음을 바꾸어 손을 내밀었다. 미카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지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사탕을 한 주먹 꺼내서는 그 중 하나를 골라 건넸다.

 

"여 있데이, 내가 젤루 좋아하는 빨간 맛!" 

"하아… 치아가 상할 테니 깨물 수는 없지만, 솔직히 말하면 와드득 깨물어 부스러뜨리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이야." 

"오, 오늘 촬영에 스승님 싫어하는 사람 있나? 걱정 마래이! 내 옆에서 눈 부릅뜨고 가드하고 있을 테니께!" 

"농… 출연진과 특별히 실랑이를 빚을 만한 사정은 없으니 제발, 대본에만 집중하거라…."  

 

미카의 생일 즈음에 반드시 귀국하겠다는 말을 두 달 전에 미리 뱉어 놓은 것이 실수였다. 어쩐지 정확히 며칠 비행기냐고 묻는다 했더니, 시간까지 알아 놓았던 프로듀서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두 사람의 방송 섭외를 받아 놓았다. 미카가 먼저 촬영 준비를 하고 있으면, 공항에 도착한 슈가 헬기를 타고 바로 방송국으로 가서 합류해야 할 정도로 촉박한 스케줄이었다. 

일이 아니라 사적 귀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슈는 12월 24일 아침 공항에 내리자마자 느닷없이 붙잡혀 방송국으로 연행되는 바람에 깜짝 놀랐고, 도착할 때까지 프로듀서에게 화를 내고 있었더니 그 모습을 본 미카가 울상을 지으며 "스승님 미안하데이! 안즈쨩한테 오늘 일 잡아 달라꼬 내가 부탁했다 아이가! 크,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스승님캉 같이 있고 싶어가… 그, 그니께 가한테 너무 화내지 마래이…."하고 허둥지둥 끼어드는 바람에 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아니, 물론 실제로 미카가 그런 부탁을 했다손 치더라도, 프로듀서는 분명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Valkyrie의 두 멤버를 모두 제때 맞춰 연말 방송에 내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응헤헤, 실은 오늘 저녁에 소소하게 크리스마스 파티라도 할까 싶어서 케이크 사 뒀데이~. 이브날 밤에 스승님캉 둘이서 오붓하게 지낼 수 있다니 내 꿈꾸는 거 같구마." 

 

대본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던 미카가 수줍은 얼굴로 작게 말했다. 다행히 일은 오후 중에 끝날 예정이라, 미카의 말대로 저녁에는 둘 다 촬영에서 풀려날 예정이었다. 그러므로 슈가 미리 잡아 놓은 호텔방 역시 취소할 필요가 없어져, 그 점만큼은 안도가 되었다. 

 

"큼, 네가 계획한 저녁 일정에 어울려주지 못할 것은 없지만 일단 나중 일은 잊고 일에 몰두해야 한다. 내 의도와 달리 계집이 멋대로 잡아 놓은 스케줄이라고는 해도 Valkyrie의 이름으로 나가는 이상 항상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해." 

"응아~ 내도 잘 알제. 그치만 자꾸 들뜨고 헤실헤실 웃음이 나서 우야믄 좋을지 모르겠데이~." 

 

미카가 파닥거리고 슈가 야단치는 광경은 Valkyrie와 몇 번만 함께 일해 보면 금세 익숙해지기 때문에 스태프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느라 주위를 분주히 오갔다. 

완벽히 준비가 끝나고 녹화가 시작될 스튜디오로 들어가면서 문득 슈는 연속 이틀간 케이크를 먹을 경우, 얼마나 운동을 해야 그 칼로리를 소비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 

 

 

12월 25일, 이 날은 둘 다 각자 새벽부터 또다시 스케줄이 있었기 때문에 전날 밤 둘이서 그리 늦게까지 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슈와 함께 작고 예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나누어 먹으며 크리스마스 이브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미카는 무척이나 만족해서 스케줄 시작부터 계속 기분이 좋았다. 틈틈이 시간을 내서 몰래몰래 뜬 머플러도 무사히 선물할 수 있었다─미카는 몰래 뜬다고 생각했지만, 슈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건 정말이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여하간 아직도 낯가림이 남아 있던 미카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스태프들이 지나갈 때마다 인형처럼 방싯방싯 웃으며 "응아~ 메리 크리스마스데이~."하고 자발적으로 말을 붙이는 바람에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한편, 의도치 않게 미카와 다른 스케줄이 잡힌 슈는 전날 밤에도 일찍 자야 했고, 크리스마스 당일 온종일 미카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기분이 그리 좋지는 못했으나 어차피 저녁에 다시 만날 예정이었으므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일해야 한다니 재난이네요. 뭐, 이 업계에서 휴일을 챙긴다는 게 우스운 일이기는 하지만."  

 

슈의 기분이 좋지 않은 데에는 오늘 함께 스케줄을 소화할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슈는 옆을 돌아보지도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즌 애비뉴의 '하트에이드 카페테리아'와 크리스마스 콜라보를 하는 기획만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날 하필 너와 함께 있을 일도 없었겠지, 아오바." 

"저는 슈 군이랑 오랜만에 같이 일하게 돼서 기쁜데요~. 정식으로 그 카페와 계약을 맺고 아이돌로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좋고요. 옛날 수예부 시절 생각도 나고. 참, 미카 군은 잘 있나요?" 

"…멀리 떨어져 있어 가끔밖에 만나지 못하는 나보다, 지금은 네가 그 애를 볼 기회가 더 많지 않나?" 

"저도 사무소가 다르다 보니 자주는… 아아, 그러고 보니 미카 군, 얼마 전 카오루 군이랑 같이 프랑스에 다녀왔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 말에 문득 슈는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그 보랏빛 리본을 떠올렸다. 그 애가 입에 물고 있던 리본. 어째서인지 몸에서 떼어놓고 싶지 않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다 보니 무심코 여기까지 가져오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따위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아."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겨우 내뱉은, 나직한 슈의 목소리에 츠무기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슈 군이라면, 이런 기념일 같은 거 굉장히 중요하게 여길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그건 날 헐뜯는 말인가?" 

"전혀요. 아니, 그냥 순수하게 뜻밖이어서요." 

 

물론 어린 시절부터 늘 선물을 챙겨받곤 했던 슈 입장에서 크리스마스가 즐거운 기념일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눈엣가시 같은 날이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감이 낮고 스스로를 깎아내리곤 하는, 사랑하는 파트너의 생일 전날 하필 전세계가 축하하는 기념일이 버티고 있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그 아이의 생일을 흐릿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자기 생일보다 크리스마스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게 뻔한 당사자 미카를 생각하면 슈는 한숨이 나왔다. 

 

"내가, 일이 없으면 자기 생일에 귀국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한탄은 츠무기의 귀에 정확히 꽂혔다. 

 

"아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 미카 군 생일이군요? 케이크랑 선물은 이미 마련해 뒀나요? 미리 마련하지 않았으면, 오늘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장만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텐데." 

"선물은 파리에서 마련해 가지고 왔는데, 케이크는… 아무리 그래도 오늘 먹을 것을 며칠 전부터 미리 구입해 둘 수는 없었다는 것이야." 

 

츠무기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아아, 뭐. 걱정할 것 없겠네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요? 케이크가 가장 잘 팔리는 건 어제, 24일 이브였으니까. 오늘은 어느 빵집에 가든 떨이 케이크가 잔뜩 남아 있을 거예요. 피크가 지났으니 가게들도 서둘러 재고를 해치우고 싶겠죠. 잘 됐네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서." 

"뭐라고?!" 

 

상상도 못 했던 츠무기의 말을 들은 그 순간 슈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미카의 생일 케이크로, 크리스마스에 팔다 남은 떨이 재고를 사 간다고? 

 

"칫, 칫! 농담이 아니다! 오로지 12월 26일만을 위해 만든, 가장 특별하고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케이크가 필요해!" 

"네에~? 하지만 슈 군, 시내 어딜 찾아봐도 그런 빵집은 없을걸요? 거의 한 달 전부터 만들어 놓았던 크리스마스 케이크의 재고를 소화하는 게 우선이지, 그런 평일을 위해 따로 케이크를 굽는 데가 있겠어요? 가게들도 장사를 해야죠." 

"이래서 예술을 모르는 저속한 속물들이란!" 

 

아아, 이럴 줄 알았다면 오늘 하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스케줄을 비우고 자신의 손으로 미카만을 위한 케이크를 구울 걸 그랬다. 아니, 하지만 폐업이 안타까운 나머지 셔플 유닛을 꾸려 직접 홍보까지 했던, 아끼던 카페와의 특별한 콜라보 이벤트인데 애초에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러나 츠무기의 말마따나 일이 끝나고 미카의 곁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새 케이크를 구울 시간 따위는 전혀 남지 않는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던 사태에 슈는 눈이 빙빙 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칫, 칫칫! 농!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할인도 할인이지만, 하나같이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 얹어져 있는 케이크라는 게 문제였다. 이브날 미카가 사다 놓은 케이크도 눈처럼 하얀 크림 위에 순록과 썰매, 그리고 산타와 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된 귀여운 케이크였지만 그것은 이미 먹었다. 이미 한 차례 먹었단 말이다! 슈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온전히 12월 26일이 생일인 사람만을 위해 판매되는 케이크이지, 이미 지나가 버린 크리스마스 장식의 흔적이 덕지덕지 남아 있는 케이크가 아니었다. 

 

"아아,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손목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늦은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고, 무엇보다 슬슬 빵집들이 다 문을 닫아갔다. 슈는 입술을 깨물며 번화가를 둘러보았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24시간 영업을 하는 편의점 정도뿐이었지만, 최고급 호텔 케이크조차 크리스마스 장식이 붙었다는 이유로 전부 거부해버린 슈에게 편의점 케이크라니 거론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다. 

스케줄 때 깔끔하게 세팅했던 머리카락이 찬바람에 다 흐트러진 채 번화가 한복판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두커니 멈추어 서 버린 슈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응아, 스승님! 일 끝났나?" 

 

돌아보니 오늘 스케줄이 함께였다던 아라시, 리츠와 함께 서 있는 미카가 보였다. 아니, 눈이 마주치기도 전부터 미카는 이미 둘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슈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니 반갑기는 했지만 생일 케이크조차 마련하지 못한 자신이 과연 이 아이를 만날 자격이 있을까, 당황스러워 슈는 손조차 뻗지 못했다. 

 

"내는 나루쨩이랑 리츠 군이랑 맛난 저녁 뭇따! 스승님은?" 

"아, 아아…." 

 

저녁. 그러고 보니 일이 끝나자마자 마음이 너무 급해서 번화가로 뛰쳐나오는 바람에 끼니조차 걸렀다. 한 끼 거른다고 금세 배가 고파 꼼짝도 못 하게 되는 체질은 아니었기에 잊고 있었지만, 항상 잘 챙겨먹지 않는다고 미카를 야단치는 입장이니 아무래도 켕기는 마음이 들었다. 

솔직한 슈의 표정을 본 미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안 묵었제! 으으, 내 이럴 줄 알았데이! 내 쩌번에도 말했지마는, 스승님 자꾸 밥 거르믄 내도 잔소리 마구 할끼다!" 

"…." 

 

그래도 아무 대꾸도 못 하는 슈를 미카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와 그라노, 스승님? 혹시… 아직 피곤하나? 먼 일 있었나?" 

"카게히라…." 

 

너를 소중히 하고 싶었다. 네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케이크는 물론 그 수단에 불과하지만, 의심 많고 둔한 너는 무엇으로든 확실한 물적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면 내 사랑을 쉬 믿으려 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미안, 하다." 

"응아?" 

"케이크를…." 

 

준비하지 못했어.

 

미카를 껴안은 슈가 미카의 어깨에 턱을 얹은 채 참회하듯 말했다. 미카는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거리다, 문득 허공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두툼한 눈송이가 가볍게 떨어졌다. 

 

"스승님, 봐래이. 주변이 너무 이쁘다 아이가. 반짝반짝하고, 눈부시고, 화려하제." 

 

미카의 말에 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 전체가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장식과 조명, 일루미네이션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벌써 몇 시간 동안이나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번화가가 이렇게 예뻤던 줄, 방금 전까지는 몰랐다. 

 

"12월 되자마자 이래 이쁘게 꾸며논 거 보고, 스승님캉 같이 보고 싶었데이. 내, 지금 일케 이쁜 거리 구경 나온 거,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는구마." 

"아아, 그래, 아아…." 

"응아, 스승님. 케이크 준비 몬했다는 기 무신 말이고? 어제 같이 묵었지 않았나?" 

 

슈는 작은 목소리로 츠무기와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말해주었다. 미카의 생일 케이크를 따로 마련하고 싶었던 것, 하지만 크리스마스 떨이 케이크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 온전히 26일만을 위해 구워진 케이크를 사고 싶었다는 것, 그러나 그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 

그 말을 들은 미카가 청금석과 호박을 박은 듯 색이 다른 두 눈동자를 촉촉하게 적시며 환하게 웃었다. 

 

"내는 마, 그 말만으로도 충분하데이. 스승님이 이 추운 날 밖에서 내 줄 케이크 찾을라꼬 시간을 보냈다 생각하니께 기쁘기도 하구, 미안하기도 하구, 그치만… 뭣보다, 아깝구마." 

"아까워…?"

"응아, 그럴 거믄… 어차피 그 시간을 내를 위해 쓸 거믄… 지금처럼, 내캉 같이 있어 주는 기 더 좋다 아이가." 

 

거리의 반짝이는 일루미네이션 장식 속에서, 그 조명 장식에 못지않게 반짝이는 미카의 두 눈을 바라보던 슈가 천천히 안주머니로 손을 넣어 보랏빛 리본을 꺼냈다. 요 며칠간 계속 품에 가지고 다니던 그 리본이었다. 

슈는 리본의 한쪽으로 먼저 미카의 손목을 묶었다. 너무 꽉 조이지 않게, 하지만 매듭만큼은 단단하게. 

그리고 반대편을 자신의 손목에 두른 뒤 미카에게 내밀었다. 

 

"이쪽은 네가 묶어 다오." 

"응아아?" 

"아무리 네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내 곁에는 네가 필요하다고 말해도, 네가 말만으로 만족하고 납득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행동으로 표현하는 수밖에. 자, 서로의 손목을 묶어 이 인파 속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게끔 하자꾸나.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에 제대로 된 케이크 하나 마련하지 못한, 어리석은 남자의 궁여지책을 부디 받아 주지 않겠느냐?" 

 

잠시 망설이던 미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슈의 손목에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리본을 묶었다. 감을 때는 여유롭게, 매듭은 단단하게. 몇 번 당겨 풀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슈가 그제야 만족하고 미소를 지으며 미카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 모두의 입술이 닿은 리본이 서로의 손목을 이어 주는 모습은 오로지 슈 혼자만이 아는, 가장 로맨틱한 광경이었다. 

 

"자아, 그럼 이제 가자. 이 아름다운 거리를 걸어, 우리 둘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말해 두겠는데 정확히 자정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네게 생일 축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야." 

"으, 응!" 

 

밤바람은 여전히 쌀쌀했지만 미카와 맞잡은 손이 너무나 따스하게 느껴져 슈는 방금 전까지의 추위를 전부 잊었다. 상대의 생일에 선물을 줄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선물을 받아버린 기분이었다. 

 

"카게히라." 

"응아?" 

 

얼굴이 발그레해진 미카가 이쪽을 올려다보자, 그 시선에 꿰뚫린 슈의 입술이 멋대로 본심을 엮어냈다. 

 

"너는 네 생일도 툭하면 잊어버리고, 스스로의 이름도 썩 좋아하지 않지. 그 말인즉 곧, 자기 자신을 그리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고, 또 이전의 내 소행 탓도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니 카게히라, 네게 무리해서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야. 그 대신, 내가 너 이상으로 널 사랑해줄 테니. 무얼, 와타루에게서도 인정받은 '사랑의 사람', 이 이츠키 슈를 얕봐서는 곤란해. 후후,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두고 다투어도, 너 하나 제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라는 것이야." 

 

거기까지 단숨에 말하고 눈을 감은 슈가 긴 한숨을 내쉰 뒤,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카게히라, 나는 진심으로 너의 탄생을 감사해. 네가 너 자신의 생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해도, 너를 낳아 주신 네 부모님께 내가 더욱 감사할 것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슈는 새삼 리본으로 묶고도 모자라 손바닥 안에 꽉 잡은 상대의 온기를 곱씹었다. 

미카는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슈의 보폭에 맞춰 열심히 걷기만 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쏟아지는 함박눈과 일루미네이션의 화사한 불빛 속에 감춰지기를 바라며, 슈는 날짜가 바뀌기 전 빨리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공간에 도착하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