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MIKA IN THE BOX! **2023 Shu HBD**

#슈 생일 #할로윈 #싸움 #수수께끼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할로윈을 이틀 앞둔 싸늘한 아침, 자기 자신의 체온만으로 데워진 침대에서 눈을 뜬 슈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거점을 옮긴 미카는 슈와 함께 생활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때때로 일본에서의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작년에 슈가 그랬듯이 빈번히 비행기를 타곤 했다. 아이돌로서의 입지가 궤도에 올라 단독으로 들어오는 오퍼도 적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같은 항공편을 타고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치 않다. 

그것은 슈 입장에서도 잘 알고 있었고,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지내는 일은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며칠 전 프로듀서에게 전화가 왔을 때 당사자의 의향을 묻지도 않고 미카의 개인 스케줄을 승낙해 버렸던 것이다. 

 

"응아, 이미 결정해버렸다꼬?!" 

 

뒤늦게 집에 돌아와 이야기를 들은 미카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슈는 그런 미카의 어깨를 다정하게 쓸어내려 주며,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느냐, 카게히라? 작년 겨울의 네 피처 라이브를 좋게 봐 줬다던 그 프로듀서에게서 꼭 와 달라고 정중한 부탁이 왔다는 것이야. 너의 그 '무섭고 귀여운' 취향을 전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조금 으스스하지만 즐거운 할로윈 생방송 버라이어티 특집이라더군. 일반적인 저속한 방송이었다면 나도 막았겠지만 이것은 네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한 명의 예술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길로 여겨졌기에 허락했다. 다녀오거라." 

"응아~ 할로윈 생방송이니께, 결국 스승님 생일 담날 아이가! 프랑스에서 첨으로 같이 맞는 생일인데! 12시 땡 칠 때까지 옆에서 기다렸다가 생일 축하한데이~ 하구, 누구보다 젤 먼저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마음은 고맙다만, 지금은 이 일을 우선하는 것이 먼저다. 카게히라, 공과 사를 착각하지 말거라. 예술가로서 한 단계 더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 게다가 생일은 어차피 매년 돌아오는 것이 아니냐?" 

 

색이 다른 미카의 두 눈동자에 눈 깜짝할 사이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슈는 당황했다. 도대체 이 말의 어디에 눈물을 불러올 요소가 있었단 말인가? 

 

"스승님은 진짜 암것도 모른데이! 바보! 멍충이! 둔탱이! 내 얼마나 기대했는데!" 

"뭐라고?! 농! 나는 널 위해서…." 

"됐구마! 어차피 이미 부소장한테도 다 말해가 뱅기표도 끊코 스케줄 잡아 놨겠제! 알았데이! 가믄 될 거 아이가, 가믄!" 

 

유메노사키 재학 중 이츠키 가의 별채에서 함께 살며 미카가 일방적으로 슈에게 순종했을 때와는 달리 파리에서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꽤 빈번하게 다투었다. 하지만 이미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의 싸움은 그리 크지도 않고 오래 가지도 않았다. 결국 둘 중 하나가 사과하고 금세 끝났으며, 그 비율은 미카 쪽이 더 높기는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슈가 머쓱한 얼굴로 먼저 다가가는 일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슈도 양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미카의 취향에 잘 맞는, 좋아할 법한 일이었기에 흔쾌히 승낙했으며 나중에 이야기를 들은 미카도 뛸 듯이 기뻐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게히라! 도대체 왜 화를 내는 것이야? 오히려 네가 TV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는 것이 그 무엇보다 훌륭한 생일 선물이 되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냐?" 

"응아아, 스승님이 글타믄 글켔지만, 글도 내는, 내는…." 

 

결국 그날은 애매해진 분위기에서 서로 고개를 돌린 채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짓지도 못했고, 슈가 외출했다 돌아오자 미카는 이미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한 후였다. 도착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연락 한 통 없는 것을 보니 꽤나 토라진 모양이지만 슈 입장에서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으므로 먼저 연락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홀핸즈로 경로를 확인해 보니 일본에 잘 도착해서 프로듀서와 합류하여 즉시 방송국으로 향한 듯했다. 

함께 살게 된 후로도 둘 다, 또는 둘 중 하나가 스케줄 때문에 며칠씩 집을 비우는 일은 흔했기 때문에 홀로 침대에서 눈을 뜨는 일 자체는 전혀 신기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뒷맛 찜찜하게 헤어진 후 한참이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빈 집의 공기가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굳이 네 귀가를 기다리면서까지, 길게 시간을 들여 생각할 이유가 없는 안건은 아니지 않았느냐는 것이야. 어차피 너는 이야기를 들으면 하고 싶어 할 테고, 나는 당연히 허락했을 테니…." 

 

흔히들 '서양 풍습'이라고 한 마디로 표현하곤 하지만 할로윈은 본디 켈트 전통에서 유래한 날이므로 유럽 대륙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유럽 내에서 영미권만큼 가장행렬과 Trick or treat? 등의 놀이를 대대적으로 하는 곳은 많지 않고, 다음날인 11월 1일의 만성절은 묘지를 찾아가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경건한 공휴일로 여길 뿐 할로윈이라고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지 않는다. 클럽에 모여 할로윈 파티를 벌이거나, 호박 속을 파내서 잭 오 랜턴을 만들거나, 거리 곳곳을 주황색과 보라색으로 화려하고 음산하게 치장하고 소란을 피워대는 등의 행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본토의 할로윈'을 기대한 동양인들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최근의 젊은이들이 파리 디즈니랜드 등에서 제법 크게 행사를 벌이기도 하지만 본디 카톨릭 전통이 짙은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이 너무 상업적인 이벤트라며 꺼려하는 분위기다. 

그러니 오히려 상투적인 호러풍 할로윈 분위기를 즐기고 싶으면 차라리 일본에 돌아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고 슈는 생각했다. 파티다, 코스프레다 하면서 시끌벅적 소란을 피워대는 지긋지긋한 속물들과 섞이고 싶지 않은 슈로서는 차분한 파리의 분위기가 훨씬 편안하지만 할로윈이 다가올수록 어린아이처럼 기대감으로 몸이 근질거리며 즐거워하는 눈치를 보이는 미카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경우, 그저 사탕─그것도 빨간 것이라고만 대답하던 지난날의 나에서는 이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만…." 

 

슈가 생각하는 미카의 취향은, 조금 괴상하다. 굴러다니는 눈알과 잘린 손가락, 흐르는 피, 날카로운 송곳니. 고어한 분위기 자체도 버거운데, 심지어 그것을 귀엽게 연출한다는 기발한 발상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분야였다. 하지만 미카가 그런 소재들을 가지고 즐겁게 예술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그 예술의 결과물이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모습을 보면 자신과 완전히 다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동등한 입장의 파트너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동반자를 찾을 때,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같은 길을 걸을 사람을 원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가능하면 미카가 좋아하고 잘하는 방향을 최대한 지원해주고 싶었다. 그 결과가 이번의 할로윈 생방송 버라이어티였다. 

이츠키 슈는, 도대체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방식으로 뛰쳐나갔다고 일까지 무성의하게 할 만큼 사리분별을 못 하는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만. …어찌되었든 방송은 챙겨볼 것이야. 완벽하지 않을 경우 당연히 호되게 야단칠 것이고."

 

슈는 한숨을 내쉬며 외출 준비를 했다. 연락이 없은 지도 벌써 며칠째고, 내일이면 미카가 그렇게 연연하던 자신의 생일이다. 미카의 성격상 아무리 화가 났어도 생일 당일에는 연락이 오겠지만 이번 싸움에서 자신에게 고쳐야 할 점이 있다고는 생각이 도무지 들질 않으니 막상 생일 축하한다고 연락을 받았을 때 무슨 이야기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솔직히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질 않았다. 

 

 

*** 

 

 

늦은 저녁, 볼일을 마치고 귀가해서 어두운 거실의 불을 켜니 변함없이 썰렁하고 조용한 공간이 슈를 맞이했다. 일본은 한창 새벽일 테니 미카는 한창 깊은 잠에 빠져 있을 터였다. 계속해서 스케줄이 있으니 방송 준비를 위해 푹 자고, 일찍 일어나야겠지. 

밖에 있는 동안에는 일부러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락이 왔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지금까지는 연락이 왔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었다. 고집으로 말하자면 자신이나 상대나 비등비등하다. 큰 계기가 없으면 상황을 해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역시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묻지도 않고 스케줄을 정한 것은 사실이니. 하지만 어차피 결국은 할 일이었을 텐데….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던 상태로 무심결에 휴대전화를 켠 슈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카게히라?" 

 

미카에게서 홀핸즈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열어 보니 그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코멘트 한 마디 없이, 전에 슈가 귀가하는 길에 사다 주었던 초콜릿 틴케이스만 달랑 찍혀 있었다. 미카가 프랑스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사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법 큼직한 그것은 핑크색과 초록색의 옷을 입은 테디베어가 가득 그려져 있어서 귀여웠고, 초콜릿을 다 먹은 후에도 소품 수납용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편리하다며 미카가 기뻐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옆방인 미카의 침실에 있을 그 상자를 슈더러 열어 보라는 뜻일까? 

 

"흐음…." 

 

슈는 순수하게 흥미를 느꼈다. 그야 할아버지의 생전장례 소동 때 집 창고에서 찾아냈던 일기장 자물쇠만큼 무슨 복잡한 장치가 되어 있지는 않겠지만, 이런 식의 자그마한 수수께끼 유도는 슈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함께 이런저런 일을 헤쳐나온 파트너이자 전우인 미카도 그것을 다 알고서 하는 행동일 터였다. 슈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것도 미카가 먼저 내민 일종의 사과 제스처라고 생각하면 응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게 무슨 깜찍한 행동인지 모르겠지만, 뭐… 일단 가 보도록 할까." 

 

주인이 없는 방에 들어가는 것은 솔직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미카의 방은 이미 여러 번 드나든 적이 있었고, 게다가 지금은 미카가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문제없다고 판단한 슈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겨 있지 않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봉제인형으로 가득한, 익숙한 냄새가 풍기는 침실이 슈를 반겼다. 그래, 반겼다. 아무도 없는데도 어째서일까─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항상 안에서 "응아, 스승님!"하는 들뜬 목소리와 함께 자신에게 덥석 안기는 아이가 있었기 때문일까, 신기하게도 빈 방마저 자신을 반긴다는 느낌이 들어 슈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로 반기기라도 하는 것인지 초콜릿 틴케이스는 금세 눈에 띄었다. 그것은 침대 옆 협탁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이걸 열어 보라는 뜻인가… 어디 그럼, 잠시 실례." 

 

딸깍 소리를 내며 틴케이스는 쉽게 열렸다.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고 미간을 찌푸리던 슈는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보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지난번에 쓰던 여권 케이스로군. 금세 낡아버린 바람에 얼마 전에 새로 사서 갈아끼웠으니 이건 버렸을 줄 알았는데, 이런 곳에 넣어 두다니. 그리고 이건 잉크가 다 닳아서 나오지 않는 볼펜, 이건 얼룩이 도저히 빠지지 않아 못쓰게 된 손수건… 이건… 다 먹은 사탕 껍질이 아닌가? 이런 건 왜 곱게 펴서 넣어 둔 거지?" 

 

맥락을 알 수 없어 하나하나 훑어보던 중 겨우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 자잘한 물건들은 틴케이스 자체를 포함하여 하나같이 미카가 프랑스에 온 후로 슈가 일상생활 틈틈이 선물로 주었던 것들이었다. 이전에도 물건을 둥지에 주워모으는 까마귀 같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쓰레기 같은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 두고 있었다니. 

틴케이스 바닥에 작게 접은 종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잠시 망설였으나, 종이가 새것인 것을 보니 미카의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슈는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Mon trésor #3. 

 

어린아이 같은 미카의 글씨였다. 간단한 프랑스어 단어였기에 슈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의 보물'. 정말이지 소박하다못해 사소하고, 슈의 눈에조차도 하찮아 보이는 그 물건들은 오로지 슈가 미카에게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미카의 보물이 되었다. 이미 제 용도를 다하지 못하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소중하게 보관되는 그것들이, 마치 한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카의 처절한 헌신을 받던 자신의 모습과 잠시 겹쳐 보여 슈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두 팔이 떨어져 나가도록, 무엇 하나 내려놓지 못하는 아이." 

 

그것은 작년에 자신이 선물한 인형에게 잠시 미카가 영혼을 빼앗겼을 때, 슈가 그 인형을 설득하면서 한 말이었다. 당시에도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고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 말이 지독하게도 새삼 와 닿았다. 

긴 한숨을 내쉬며 틴케이스 뚜껑을 닫으려다 문득 #3이라는 글씨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2와 #1도 있다는 뜻일까? 이것이 미카가 자신에게 낸 수수께끼일까? 

휴대전화를 다시 확인해 보았지만 홀핸즈에는 틴케이스 사진 이상의 메시지가 와 있진 않았다. 슈는 고개를 몇 번 절레절레 내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보다가 예의 인형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걸 굳이 여기까지 가져오다니." 

 

마드무아젤과 다르게 유리알 눈으로 이쪽을 말끄러미 바라보는 그 인형의 눈빛이 어째서인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아, 슈는 저도 모르게 마주 노려보고 말았다. 

 

"그렇게 쳐다보아도 소용없다는 것이야. 나와 그 애가 의견 충돌을 빚을 때마다 지난번처럼 그 애를 데려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네가 아무리 귀중한 인형이라 하더라도 나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견제의 의미를 담아 약간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당연하게도 인형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기분 탓인지 표정이 살짝 새침해진 듯 보이기도 했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어디까지나 슈의 기분 탓일 터였다. 

 

"…흠, 이것은 내가 그때 만들어 주었던 옷이로군." 

 

지금 그 인형이 입고 있는 옷은, 미카가 낡은 옷을 새것으로 바꿔주려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가며 고전하던 중 슈가 한 발 먼저 만들어서 가져다주었던 옷이었다. 그때 일이 문득 생각나 옷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니 문제의 인형 외에도 미카의 방에는 봉제인형이 당연하다는 듯 가득했다. 그나마도 프랑스로 거점을 옮기면서 다 가져올 수가 없어, 성주관에 어쨌든 이름이 걸려 있는 방에도 인형이 가득 남아 있다고 들었으니 여기 있는 것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소중한 아이들일 터였다. 대충 보아도, 그 하나하나가 어떤 경위로 미카의 곁에 오게 되었는지 슈는 다 알 수 있었다. 다 아는 아이들이었다. 

 

"이건… 아아, 오랜만이라는 것이야." 

 

그 중에서도 특히 침대 가장 가까운 곳, 손을 뻗으면 바로 닿는 자리에 놓인 테디베어를 보고 슈는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집에 있던 낡은 테디베어를 잘못 건드렸다가 팔이 떨어지는 바람에 놀란 미카가 가출 소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때 길길이 날뛰는 슈에게 미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새로 사 온 테디베어를 내밀었고,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받은 슈가 답례로 직접 만들어 준 물건이었다. 

안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슈는 이미 하룻밤 꼬박 맘고생을 한 후였다. '스승님~?'하는 멀쩡한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들려왔을 때 정말이지 얼마나 안도하고, 또 화가 났는지 모른다. 

여하튼 그때 선물했던 테디베어니 말하자면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얼마나 품에 안고 잤는지 벌써 꽤나 낡아 있었다. 미카가 돌아오기 전에 조금 수선이라도 해 놓을까 생각하며 테디베어를 쓰다듬다 고개를 드니 또 꽤나 그리운 물건이 눈에 띄었다. 

 

"이건… 유메노사키 재학 시절 유닛의상이 아닌가? 이건 또 굳이 여기까지 왜 가져왔지?" 

 

평상시 슈가 보는 미카의 방 모습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침대나 의자에 앉은 미카에게 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슈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미카가 고양이처럼 냅다 팔짝 뛰어 쫓아 나오니 안을 차분히 둘러볼 시간이 없었으므로─의외로 문 옆 벽까지 둘러볼 틈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보통 미카가 앉아 있는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드니 그곳에는 구 유닛의상이 여봐란 듯이 떡하니 걸려 있어 슈는 조금 당황했다. 

슈의 졸업 전, 스타페스에서 나즈나와 셋이 함께 마지막으로 입은 후 한 번도 만져 본 적조차 없었던 구 유닛의상. 그 다음 해 코즈프로에 들어가면서 새롭게 단둘만의 유닛의상을 제작해 입은 후로 그것은 거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었다. 그런데 미카는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심지어 프랑스에 일부러 가져와 늘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걸어 놓았다. 

슈는 한동안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치수를 재고 유닛의상을 만들어 주었을 때 네가 눈물을 글썽거린 일이 있었지." 

 

그때는 왜 당연한 일을 가지고 감격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어느덧 미카와 함께 긴 시간을 보내면서, 슈도 이제는 그때 미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카는 '자기 몫'을 가질 기회가 별로 없던 아이였다. 다인원의 공동생활을 하면서 항상 물려받은 옷을 입고, 양이 부족한 음식을 나누어 먹어야 했다. 그래서 이츠키 집안의 별채에 들어와 살면서 컵 등의 사소한 물건까지 자기 전용으로 하나하나 부여받을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반응했던 것이 저 유닛의상이었던 일을, 슈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당시 미카가 받았던 것은 단순히 옷 한 벌이 아니라 Valkyrie의 일원이라는 위치, 온전히 자신이 있을 곳이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런 미카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읽을 수 있게 된 자신이 조금 자랑스러워졌다. 

 

"어때, 카게히라. 나는 이제 네가 낸 수수께끼를 풀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야." 

 

기분이 좋아진 슈는 몸을 돌려 본격적으로 미카의 방 안을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했다. 방 주인이 없는 틈에 이렇게 함부로 둘러보아도 되나 싶기는 했지만, 이제 슈에게 그 행동은 남의 방 무허가 수색이 아니라 사랑하는 파트너가 낸 수수께끼풀이였다. 

사소한 다툼으로 조금 멀어진 것만 같은 네 마음에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무슨 수단이든 이용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으랴. 

새삼 미카의 방, 미카의 소지품을 둘러보면서 느낀 것은, 이 안에 있는 물건들 중 슈가 모르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은 슈가 준 물건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슈가 지나가는 말로 별 생각 없이 언급했던 걸 미카가 어딘가에서 구해 온 물건이었다. 미카의 방 한가운데에 서서 슈는 전율했다. 마치 설탕시럽에 흠뻑 적신 얇은 페이스트리의 속살처럼 이 아이의 세계는, 정말로 온통 이츠키 슈로 절어붙어 있었다. 

 

"함께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로 약속했으니 이제는 네 사생활에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어도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만…."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그 사실에 새삼스럽게 기쁨과 충만함을 느끼는 자신이 있다. 

슈가 의자에 걸터앉아 그런 스스로를 꾸짖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벌써 날짜가 바뀌어 정확히 10월 30일의 12시였고, 발신인은 미카였다. 

 

"…아아, 그쪽은 이제 아침이겠군. 수면은 충분히 취했느냐는 것이야." 

-응아, 스, 스스, 스승님! 생일 축하한데이! 내 딴 사람보다 먼저, 젤 빨리 축하할라꼬 전화한기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두 사람은 동시에 말을 내뱉었고, 동시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전화가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슈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카게히라, 나는 네게 그 스케줄을 권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네가 내 생일을 곁에서 함께 보내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했던 점, 진심으로 미안하게 여기고 있다. 용서해 다오." 

 

슈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했는지 다소 굳어 있었던 미카의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졌다. 

 

-응아아… 아이다, 아이다. 스승님이 내 생각해가 해 준 일인데 내도 괜히 씅질 내고 나온 거, 미안했다 안카나. 

"후후. 두 사람이 서로 사과하고, 서로를 용서하는 것만큼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모습은 없지. 그런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아직 네가 낸 수수께끼의 정답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야. 출제자에게 직접 묻는 일은 편법이겠지만 이미 타임 리밋이 온 것 같으니 이제 답을 공개해 다오. 그 문제의 정답은 무엇이었지?" 

 

전화기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미카는 깜짝 놀라며 당황했다. 

 

-수, 수수께끼이~? 내 은제 그런 거 냈는데에? 내는 암것도 안했데이. 

"음? 하지만 홀핸즈로 보낸 사진은…." 

-응앗, 혹시 그 사진 스승님한테 간 기가?! 우짠지 나루쨩한테서 답장이 없드마…! 

"…나루카미?" 

 

전혀 예상치 못한 흐름에 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 스승님이 쩌번에 쪼꼬렛 사줬는데 엄청 맛있었다꼬 내 나루쨩한테 막 자랑했더니… 나루쨩이 브랜드 알려달라 해가, 먼저 찍어 놨던 사진 보내줬는데에… 내 잠이 안 와가 스승님한테 메시지 보내까, 마까 고민하믄서 창 왔다갔다 하다가 착각해가꼬 잘못 보낸기다… 미, 미안하데이…. 

 

입이 딱 벌어지고, 어깨에서 힘이 탁 풀려버렸다. 

 

"나는, 그 상자 속에 mon trésor #3이라고 씌어 있는 종이쪽지가 있기에… 당연히 #1까지 도달하면 네가 낸 문제의 해답이 있을 거라고만…." 

-응아아, 스승님 상자 열어봤나?! 우야노… 쓰레기라꼬 막 버리믄 안 된데이!! 그거 다 내 보물이라 아이가! 

"…아무리 나라도 그 부분은 이제 학습했다는 것이야. 그럼, 정말로 사진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것이지?" 

-으으응… 이래 말하믄 스승님 좀 기겁할 수도 있겠지마는, 지금 mon trésor 상자가 그 방에만 #30까지 있데이. 그거 다 찾다가는 날 샐끼다. 

"30?!" 

 

하기야, 생각해 보니 미카가 프랑스에 온 후로 자신은 꽤나 들떠 있었다. 작년에 프랑스와 일본으로 갈라져 지낼 때도 귀국할 때마다 바지런히 선물을 사가곤 했지만, 집에 가면 미카가 있는 나날이 일상이 되면서 들떴던 건 사실이다. 솔직히 인정한다. 그래서 길가에서 눈에 띄는 자잘한 물건, 귀여운 소품, 한입거리 간식 등을 얼마나 사다 주었는지 기억도 잘 나진 않으므로 확실히 그 정도 숫자는 나올 테니 납득은 가지만… 개수를 세어 보지도 않고 열심히 물어다 주는 데만 바빴던 자신도, 그리고 그 하나하나를 전부 보물이라며 그야말로 팔이 찢어질 정도로 껴안고 내려놓질 못하는 미카도 정말이지 구제불능이다. 

둘 다 구제불능이라, 어이없게도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렇다면 나는 네게 허락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네 방을 뒤졌다는 말이 된다만… 어떻게 사과해야 좋을지…." 

 

자신이 저지른 일의 의미를 깨닫고 슈는 당황하기 시작했지만 전화 너머에서는 마치 꿈을 꾸는 듯, 보송보송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후후, 스승님인데 머. 내는 스승님이 멀 어카든 상관없다고 늘 말하지 않았나. 그카고 이건 비밀인데 파리의 그 방은, 통째로 내 보물상자다 아이가. 방부터가 스승님이 마련해줬꼬, 그 안에 있는 것들도 전부 다 스승님이 준 내 보물이데이. 

 

그 말에 슈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농, 카게히라. 너의 그 방이 일종의 상자라고 한다면… 가장 필요한 요소가 빠져 있다는 것이야." 

-응아? 

"어서 일을 마치고 내 곁으로 돌아와 다오, 카게히라. 네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방은 너라는 선물이 담긴 커다란 선물상자가 될 테니." 

 

그 말에 미카가 까르르 웃었다. 

 

-그라믄 내는 상자 뚜껑 열자마자 퐁! 하고 튀어나가는 깜짝상자가 될낀데, 개안나? 

"후후, 할로윈 전날을 생일로 둔 자에게 그렇게 커다란 잭 인 더 박스를 선물하다니 더할 나위 없이 센스 있는 아이디어로군. 합격이다." 

 

스케줄을 마치고 두 사람의 집으로 돌아온 미카가 자기 방 안에서 얌전히 앉아 기다리고 있으면, 슈가 시치미 뚝 떼고 방문을 노크할 것이다. 그러면 미카는 문이 열리자마자 그야말로 잭 인 더 박스처럼 용수철이 달린 듯 튀어나와 슈의 품에 안기겠지. 이미 수백 번은 본 광경인데도 가까운 미래에 다시 볼 그 모습을 상상하니 슈는 그야말로 생일선물을 받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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