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인형사의 회고록

#회고록 #피그말리온 #독점욕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슈미카_전력_60min 

주제: 회고록

 

 

 

 

늦은 밤, 파리의 학우들과 함께하게 된 전시회 준비에 쫓기다 겨우 집에 들어온 슈는 이미 자고 있을 미카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거실에는 환한 불이 켜져 있어, 슈는 미간을 찌푸렸다. 늦어질 것이 뻔하니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했는데도, 도무지 이 아이는. 

한숨을 내쉬면서 한쪽을 돌아보니 아니나다를까 미카가 있었다. 단, 자고 있었다. 탁자에 엎드려서, 주위에 찢어버린 노트 페이지가 가득한 채. 

 

"그러고 있으니 제법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예술가 같은 풍모가 있다는 것이야. 후후, 아직 풋내기일지언정." 

 

마치 밤새 쓰려 했지만 몇 줄 쓰다 구겨 버리고, 또 몇 줄 쓰다 구겨 버리는 바람에 결국 러브레터를 완성하지 못한 순진한 소년의 모습 같다고 생각하며 슈는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창작이란 그러한 것이 아니던가. 영감(인스피레이션)의 여신과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러브레터를 써 보았자, 결국 스스로의 성에 차지 않으면 보내지 못하는 휴짓조각이 되고 만다. 

 

"츠키나가처럼 툭하면 찾아올 정도의 빈도까지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지 않을 때는 정말로 목마르게 갈구해도 오지 않으니. 카게히라도 그 기분을 수없이 겪으면서 어엿한 한 명의 예술가가 되어가는 것이야." 

 

슈는 외투를 벗어 걸어 두고 우선 미카를 안아올렸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그래도 깨지 않았지만, 외투 속에서 온기를 보존하고 있던 슈의 가슴팍에 뺨이 닿자 미카가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비벼댔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슈는 문득, 미카의 눈꼬리에 희미하게 남은 눈물자국을 발견했다. 

 

"?!" 

 

당황했지만, 일단 오늘 미카가 하루종일 틀어박혀 이 작업에만 몰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슈는 일단 감정을 추스르고 미카를 침실로 옮긴 뒤 이불을 턱 밑까지 잘 덮어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떨어지는 슈의 손이 아쉬운지 미카는 머리를 비볐지만, 평소 같았으면 그 고양이처럼 사랑스러운 동작에 미소를 지으며 조금 더 쓰다듬어 주었겠지만 지금의 슈는 그러기에는 그 눈물자국이 너무 신경이 쓰였다. 

탁자의 구겨진 노트 페이지 사이에 이미 여러 장 찢겨나간 노트가 있었다. 슈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Avec amour, pour toi》. 

 

문제의 작품이 무엇인지 슈는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다기보다, 정확히 말하면 슈가 미카에게 맡긴 작업이었다. 

얼마 전 이츠키 가의 가족과 친척만이 모인 공간 안에서 열렸던 가극 '레종 데트르'의 일반공개를 거절한 이후로도 두 사람의 무대를 보고 싶다는 요청이 끊이지 않았는지, 프로듀서는 집요하게 '그 비슷한 것이라도 해 주세요'라며 일본에서 계속해서 연락을 해 왔다. 결국 그 끈기에 진 슈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이야기를 들은 미카가 먼저 손을 들었다. 

 

"스승님, 내 한 번 해 볼란다." 

 

미카는 파리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슈가 '레종 데트르'의 각본을 쓰고, 무대를 구상하고, 노래와 의상을 만드는 모습을 옆에서 24시간 내내 지켜보았다. 그야말로 도제처럼 그 옆에서 일을 거들고, 심부름을 하고, 스승의 수발을 들면서 배운 것이 많을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잡힌 스케줄이 있었던 슈는 고민하다 결국 이번 건은 전적으로 미카에게 맡기기로 했다. 

프랑스로 거점을 옮긴 후 확실히 전보다는 시간이 많이 생긴 미카는 기쁘게 작업에 착수했고, 지금은 아직 각본의 플롯을 쓰는 단계였다. 슈는 본디 미카의 각본이 완성될 때까지 내용을 묻지 않고 기다릴 생각이었다. 독자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면 자신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미카 특유의 예술이 무척 기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눈가에 묻은 눈물자국 때문에, 결국은 슬쩍 들여다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내용을 쓰고 있기에 혼자 울다 잠이 든 걸까.

 

 

***

 

 

"응아~ 내 침대에서 잤었나?" 

 

눈을 비비며 일어난 미카는 순간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으나 잠옷으로 갈아입혀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았다. 

 

"스, 스승님!" 

 

허둥지둥 거실로 뛰쳐나갔으나 전날 밤에도 늦게까지 작업했던 슈는 아침에도 일찍 나가고 없었다. 주방의 식탁 위에 영양 밸런스를 고려해서 속을 채운 크루아상 샌드위치와 커피메이커에서 아직 김을 피우고 있는 커피가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응에에, 왔으믄 깨워 주지, 잘 때 들어와서 잘 때 나가는 기는 진짜 너무하데이…." 

 

함께 살고 있는데도 벌써 사나흘 슈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미카는 외로움에 울상이 되었다. 그리고 방금 지나쳐 온 거실을 무심코 돌아본 순간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았다. 

 

"응아아…! 종이 싹 치아뿟네! 그, 그라믄 다 본 기가…?! 내 완성될 때까지 안 본다고 해놓구선…!"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작업은 진전도 없고, 수면도 잊고 밤늦게까지 거실에 앉아 작업하다가 그대로 엎드려 잠들어 버리고, 끼니도 시원찮고… JNLC 당시의 자신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만 같아 미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구나 그 모습을 또다시 슈가 봐 버렸으니 몸 둘 바를 모르는 기분이었다. 

머리를 움켜쥐고 버둥거리던 미카는 깨끗한 탁자 위에 덜렁 놓여 있던 노트를 무심코 집어들고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기다, 어느 순간 동작을 우뚝 멈추었다. 

 

"…여기서부턴… 스승님 글씨 아이가…?" 

 

미카가 쓰다가 막힌 부분, 그 페이지 너머로 낯익은 유려한 글씨가 이어져 있었다. 

 

☆☆ 

 

어느 곳에 고독한 인형사가 살고 있었다. 인형사는 자신이 만든 아름다운 인형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 인형에게 생명을 달라고 날이면 날마다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신은 인형사의 간절한 기도를 듣고 인형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다. 

인형사는 눈을 뜨고 움직이기 시작한 인형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자신의 반려로 삼았다. 인형 또한 오랫동안 자신에게 사랑을 퍼부어 준 인형사를 사랑하게 되었고, 둘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 

인형사는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이 들 때까지 인형의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인형은 처음에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인형일 때는 몰랐으나 인간이 되고 나니 자신은 늙고 추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형사가 그토록 찬양하던 아름다움이, 유일하게 칭찬해 주던 장점이 마치 모래시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인형은 다시 신에게 기도하여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했다. 그저, 인형사의 눈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고 싶었다. 신은 이번에도 인형의 기도를 받아들여, 다시 숨도 쉬지 않고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는 인형으로 만들어 주었다. 

 

 

☆☆ 

 

 

미카가 쓴 부분은 여기까지였다. 사실, 이 뒤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은 피그말리온 이야기의 답습이 아닌가. 게다가 기껏 인형사가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자신의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고 만 인형의 마음에 저도 모르게 이입하다 보니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존재를 그토록 간절하게 빌어 준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인간인 채로는 그 상대의 소망을 이루어줄 수가 없다니. 

울면서 뒤를 잇지 못하고 잠든 문장 뒤로 자신의 것이 아닌 달필은 이렇게 이어졌다.

 

 

☆☆ 

 

 

인형과 평생을 함께하려 했던 인형사는 절망했다. 다시 신에게 매달려 보았지만 애석하게도 인형이 다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수단으로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방법밖에 몰랐던 어리석은 인형사는 왜 인형이 다시 움직임을 멈추었는지 알지 못한 채 매일 인형의 이마에, 손등에, 뺨에, 입술에 입을 맞추며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으려 노력했다. 

그러던 중, 문득 인형의 얼굴에 자신과 함께 지냈던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그제야 발견했다. 그것은 인형사의 슬픈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어 주었다. 

인형사는 하루하루 인형이 자신과 함께 보내며 늙어갔을지도 모르는 모습을 상상하며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실제 인형은 그 이후 전혀 나이를 먹지 않았으나, 스케치북 속에서 인형은 인형사와 함께 계속 늙어 갔다. 

이윽고 인형사가 수명이 다해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신은 평생을 바친 인형사를 가엾게 여겨 마지막으로 인형에게 생명을 잠시 불어넣어 주었다. 인형이 스케치북 속에 그려진 늙은 모습이 되어 나타나자 인형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두 사람은 마지막 입맞춤을 나눈 뒤 나란히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후대 사람들은 인형사의 곁에 놓인 한 권의 회고록을 통해 이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된다. 

 

 

☆☆ 

 

 

노트를 품에 안은 미카의 눈에서 새로운 눈물이 흘러넘쳤다. 

 

"으흑, 스승님… 스승님…." 

 

슈의 글씨 위로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번져 나갔다. 단순히 스토리의 막힌 부분을 뚫고 뒷이야기를 제시해준 정도가 아니라, 마치 자신의 마음 속 차가운 불안을 따스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안심시켜 주는 것만 같은 문장들이었다. 

미카가 훌쩍훌쩍 흐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 쪽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펄쩍 뛰며 집어드니 슈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미카는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눈을 문지르려다, 곁에 있지도 않은 슈에게서 '그렇게 사정없이 문지르면 추후 붓지 않겠느냐!'하는 호통을 들은 것만 같아 서둘러 부드러운 손수건을 집어들고 배운 대로 톡톡 찍어서 눈물을 닦은 뒤 전화를 받았다. 

  

"응아, 스승님…." 

-아아, 카게히라. 일어났느냐? 아침식사를 준비해 놓고 왔으니 빠뜨리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는 것이야. 그리고 오늘은 일찍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으니 저녁은 같이…. 

"으에에엥…." 

-?! 왜 우는 것이야? 혹시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건가? 

 

전화 너머에서 슈가 깜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슈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터져나오는 오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아픈 기 아이고, 스승님, 스승님…. 내, 내는…." 

-크흠, 카게히라. 

  

헛기침을 한 슈의 목소리가 다소 다정해졌다. 

 

-나는, 어젯밤에 한 통의 열렬한 러브레터를 받았다. 

"응아?! 누구한테?!" 

 

눈물이 쏙 들어간 미카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슈는 미카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그 아이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내게 스스로를 바치는 데에만 열중하다, 사랑받을 가치가 떨어지면 언젠가는 버림받을 것이라 생각한 끝에 내게 버림받기 전에 먼저 사라지는 편을 택하려는 것 같더군. 한때는 지옥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했거늘, 정말이지 매정하기 그지없는 아이가 아니냐. 아아, 개탄스럽구나. 

"으, 응아아…." 

 

뒤늦게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미카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것은 러브레터가 아니라는 말도 해야 했고, 그런 생각으로 쓴 것이 아니라고 해명도 해야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너무 많이 터져나와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는데 슈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각오를 담아 답장을 써 놓고 왔다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 

"스승님…?" 

-안타깝게도 카게히라, 나는 한 번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주위에서 누가 뭐라 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 인간이다. 그것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으, 으응…." 

-나는 이미 너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그 어떤 이유가 있다 한들, 내 앞에서 결코 사라지려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 내 한평생의 회고록을 널 찾는 이야기로만 가득 채우고 싶지 않다면. 알겠지? 

 

미카는 말문이 막혔다. 

 

"스승님의 귀중한 한평생에 예술을 해야제, 와 내를 찾노…." 

 

간신히 대꾸했지만, 슈는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농. 나는 인간에게 상처받고, 인간에게 질리고, 인간이 싫증나 인형이 되기를 택한 네게 인간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어 줌으로써 다시금 인간으로서의 너를 내 옆에 묶어 두기로 맹세했다는 것이야. 무얼, 그 또한 일종의 행위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결국 미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아아, 스승님이 쓰잘데없는 데 시간낭비 안 하게 내 집에 딱 붙어 있을 테니께 걱정마래이…."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 자, 여하간 어서 아침식사를 하고, 플롯이 완성되었으니 각본 작업을 시작하라는 것이야. 

"응아? 싫데이. 딴 얘기 새로 쓸끼다. 시간은 쪼매 걸리겠지마는." 

-뭐? 

 

슈도 전화 너머에서 눈이 동그래진 눈치였지만, 미카도 못지않게 눈이 동그래진 채 주장했다. 

 

"스승님이 내한테 준 러브레터 아이가? 그걸 와 남들한테 보여주노? 내 혼자만 갖고 있을끼다. 내 혼자만 볼끼다. 남들 보여주기 싫다 아이가." 

 

넉넉히 3초 후, 슈가 기쁨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인간만이 이토록 무의미한 욕심을 부릴 수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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