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그곳에, 작은 침대 하나면 충분한 이유
#파리동거시공 #후회 #위로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똑같은 어둠 속에서 미카는 문득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무척 피곤하고 지친 것을 보니 오늘도 교내 아르바이트가 있었던가 보다. 잘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설거지나 청소 종류는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자신이 침대에 눕지 않고,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라믄 여긴, 스승님 방인가.'
여전히 보랏빛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는 슈의 곁에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떠들어대다, 불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 밤이 찾아옴과 함께 자신도 맨바닥에 앉아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더러 있는 일이라 미카도 딱히 놀라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바닥, 썰렁한 공기. 그리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아니나 다를까, 가까운 곳에서 고요한 숨소리가 들렸다.
'잘 자고 있는 모양이구마.'
등교도 식사도 대화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있는 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늘 웅크린 상태이기에 때로는 한밤중에도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는 경우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깊은 잠이 든 눈치였다.
슈가 잠들어 있다면 마드무아젤과도 대화를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미카는 슈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동하여, 어둠 속을 더듬거려 슈의 곁으로 다가갔다. 손을 내미니 익숙한 감촉의 이불이 손에 잡혔다. 아아, 슈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침대에 눕지 않고 바닥에 웅크려 앉은 채로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끔 발작을 일으켜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며 신경질을 부리다 지쳐 나가떨어졌을 때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 피로는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미카는 그 온기에 몸을 바짝 붙였다. 싸늘한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느껴지는 확실한 감각에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스승님."
어차피 깨어 있을 때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제멋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기에, 미카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내 꿈 꿨데이. 진짜 행복한 꿈."
"…."
"스승님이 무사히 학교 졸업하구, 프랑스로 유학가서… 먼저 자리잡고 있다가 내도 따라가가 같이 사는 꿈이었다 아이가. 응헤헤, 을매나 리얼한지 내 진짠 줄 알고 막 설렜데이."
"…."
"Valkyrie도 부활해가, 스승님캉 내캉… 나즈나 형은 결국 안 돌아왔지마는, 캐도 마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 열심히 하구… 외국 나가서도 활동하구, 그런 꿈이었데이. 응아~ 내 너무 많은 걸 바라믄 나중에 천벌 받을지도 모르는데. 자꾸 바라는 기 많아져서 우야노."
"…."
"꿈에서 있제, 스승님이 내 무라꼬 이거저거 마이 맹글어줬다 안카나. 물론 전에도 내 식사 관리를 해 주기는 했지마는, 프랑스 와가 같이 살믄서 해주는 밥은 또 각별하드마. 응헤헤, 그카구 커다란 아틀리에도 있어가 거기서 같이 옷도 맹글구, 작품 회의도 하구… 진짜 그런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구, 내 잠깐 행복했었데이."
"…."
"미안타, 스승님. 스승님 지금 마이 힘든데… 내 혼자만, 좋은 데 갔다 와가…."
이불 너머로 느껴지는 슈의 온기에 미카의 눈꺼풀은 다시 차츰 감겨 왔다. 하암, 하고 하품을 한 뒤 이불째 끌어안고 미카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 함만 봐 도, 스승님… 내 꿈에서는 잠깐 어데 갔다 오더라도, 절대 진짜로 떠나지는 않을끼다…. 세상 사람들 다 등 돌려도, 내는 끝까지 스승님 곁에 있을 끼고, 스승님을 지켜 줄 테니께…."
이불 속에서 코를 들이마시는 듯한 소리가 작게 났지만, 다시 잠든 미카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
묘하게 따뜻하다고 생각하면서 미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납기가 밀려 둘이서 정신없이 밤늦게까지 아틀리에에서 작업을 하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던 기억이 있는데, 옆을 돌아보니 곤히 잠들어 있는 슈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응아아…?"
등 뒤로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은 아틀리에에 가져다놓은 간이 침대였고, 둘이 간신히 함께 덮고 있는 것은 슈의 익숙한 보라색 이불이었다. 잠들기 전의 상황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꾸벅꾸벅 조는 자신을 슈가 옮겨 놓고 같이 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미카는 시계를 확인하고 슈를 흔들어 깨웠다.
"스승님, 스승님~. 인나래이~. 아침이다~."
"으음…."
긴 속눈썹과 섬세한 눈꺼풀이 몇 번 흔들리다 차츰 위로 올라가고 그 속에서 자수정 같은 두 보랏빛 눈동자가 나타나는 모습을 미카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보통은 아침이면 슈가 먼저 일어나 미카를 깨우는 편이었기에, 잠에서 깨어나는 슈를 보는 건 의외로 꽤 레어한 장면이었다.
"…아아, 벌써 아침…."
"응에에?! 스승님, 와 눈이 그래 빨갛게 부었는데?!"
흐뭇한 기분으로 슈를 바라보던 미카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슈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울었나?! 자믄서?! 요새 마이 힘들었제?! 응아, 응아아… 우야노, 일단 내 얼른 찬물에 수건 적셔 갖고 오…."
"아침부터 까악까악 시끄럽다는 것이야."
슈는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미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끌어당겼다. 허우적거리던 미카는 손쉽게 슈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응아, 스승님? 와 안 일어나구…."
"오늘은 스케줄도 없고, 긴급히 해야 할 작업도 없으니… 조금 더 쉬어도 되겠지. 카게히라, 너도."
슈의 가슴에 귀가 딱 붙어 버렸기에 두근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그야말로 고막을 뚫고 들어오는 듯했다. 잠깐 얼굴이 빨개졌던 미카는 입을 다물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살아 있는 소리, 힘찬 소리였다.
"귓가에서 요란하게 떠들어대며 법석을 떨 때는 언제고 또 쥐 죽은 듯 조용해지는군…. 뭐, 네가 변덕스러운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만."
귀찮다는 말투와 달리 미카의 어깨와 허리를 껴안은 팔은 묘하게 단단해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최근 들어 근육이 꽤 붙은 다리까지 척 들어 미카의 종아리 위로 얹어버리는 바람에 그야말로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슈의 몸으로 완전히 포박당한 미카는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스, 스승님? 내 숨 쉬기 쫌…."
"나는 네 덕분에 결국 기운을 차려 다시 세상과 맞설 용기를 얻었고, Valkyrie는 부활했다. 물론 니토는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니토의 새 길을 축복해 주고 싶고, 우리 둘이서 함께 미래를 개척해 나가고 싶다는 것이야. 이 모든 것이, 결코 꿈이 아니다. 카게히라."
"응아? 다, 당연하제. 스승님이 당연히 다시 일어설 줄 내는 알고 있었고…."
미카가 놀라서 대답했지만 슈는 미카의 입술에 검지를 대고 말을 가로막은 뒤 자신의 말을 이었다.
"내가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 왔고, 이어서 네가 졸업하고 또 이곳으로 온 일. 물론 그 사이에 여러 가지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 꿈이 아니었다. 어느덧 너도 이 동네에 많이 익숙해졌고, 함께 장을 보러 나가기도 하고, 새로운 수예점을 찾아내기도 하고, 이 아틀리에에서도 많은 작업을 함께 했지. 그 중 꿈인 것은 하나도 없어. 모두 현실이고, 너와 내가 함께 쌓아 온 시간이다. 카게히라."
"갑자기 와 그라는데…? 내 아무리 머릿속에 톱밥만 꽉 차 있어도 그런 걸 다 꿈이라고 생각은 안 한데이."
영문을 모르는 미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슈는 부은 눈으로 미카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너는 약간의 틈만 있으면 금세 과거로 돌아가 내 어리석은 행위를 꾸짖고 그간의 일들을 전부 행복한 꿈으로만 치부하려 하니…!"
"내, 내가?!"
기억이 없는 미카가 눈만 깜박거리자 슈는 긴 한숨을 내쉬며 그렇지 않아도 꽉 껴안고 있는 미카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엎질러진 물도, 깨진 거울도 되돌릴 수 없듯이 과거에 뱉었던 말들은 돌이킬 수 없고, 내 과오는 반성하기에 충분하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가끔 생생한 네 상처를 코앞에서 마주할 때마다 나로서는 정말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이야. 카게히라, 어떻게 하면 네게 '지금'을 가르칠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네 영혼을 '지금'의 내 곁에 붙들어 놓을 수 있지? 제발 가르쳐 다오. 그러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렇게 육체에 매달리는 것뿐이다."
정말로 숨이 막힐 듯한 포옹 속에서, 아니, 이쯤 되면 정말 포옹이라 불러도 좋을지 알 수 없는 속박 속에서 미카는 기묘하게도 편안함을 느꼈다. 어차피 아무데도 갈 생각은 없었지만 마치 생떼를 부리는 어린애 같은 슈의 집착이 자신을 향한다는 것 자체가, 인형이었을 때와는 또 다른 사명감을 심어 주는 듯했다.
"응아~ 내 어젯밤에 잠꼬대로 먼 소리를 했나 몰라도, 스승님을 불안하게 했다믄 미안타…."
손을 뻗어 머리를 긁적이던 미카는 문득 슈를 올려다보았다. 비록 그 눈동자에 담긴 불안이 아끼는 장난감을 잃어버릴까 겁이 난 어린애와도 같은 감정일지라 하더라도, 미카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바라봐 주기만 한다면.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며 빙긋 웃는 미카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슈는 입을 삐죽이며 금세 코웃음을 쳤다.
"보나마나 또 시원치 않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말해 두겠는데 함께 인간이 되자고 약속한 이후로 난 널 단 한 번도 인형이나 장난감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이야. 이 또한 언제까지 입이 아프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만."
"응아, 글치만 스승님. 사람은 이래 껴안으믄 숨 맥혀 죽는데이."
그제야 슈의 포옹이 조금 느슨해졌다. 틈을 놓치지 않고 거기서 빠져나온 미카는 좁은 1인용 침대에서 내려와 구겨진 옷깃을 펴면서 슈를 돌아보았다.
"음~ 내 생각해 봤는데, 아마 스승님이 말하는 그런 꿈을 꿨다믄… 그거는 그때의 내한테 행복을 노나 주고 싶어서 그런 기 아일까, 싶구마."
"행복을 나눠 준다고?"
"응, 벌써 그것도 오래 전 일 아이가. 내는 물론 그때의 내가 그래 막 불행하다꼬 생각은 안 하지마는, 지금이 행복한 기는 확실하니께. 쫌만 참고 견디그라, 그라믄 이런 행복한 미래가 찾아오니께… 하는 걸, 그때의 내한테도 알려주고 싶어서… 그런 꿈을 꾸는 게 아일까, 그런 생각이 든데이."
"…."
"스승님캉 이래 속까지 탁 터놓구 단둘이 살 날이 오리라고 그때는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나. 내는, 물론 내한테는 당연한 일이었지마는, 그래도 그때 참 끝까지 스승님 곁에 딱 붙어 있었던 내가 자랑스럽데이. 막 칭찬해 주고 싶데이. 역시 니 눈이 틀리지 않았다, 그게 옳은 선택이었다카는 얘기를… 내도 해 주고 싶은 기제."
좁은 침대에서 긴 팔다리가 쭉 뻗어나와, 아틀리에에 딸린 간이 세면장으로 향하려던 미카를 포획해서 다시 침대로 끌고 들어갔다.
"응아아?!"
"…상처받은 과거의 자신을 다독이고 노고를 치하하려 하다니, 그런 일은 미숙한 네겐 아직 백 년은 이르다는 것이야. 그 역할은… 너보다 경험이 아주 조금 풍부한, 한 살 많은 형인 내게 맡겨 다오."
머리를 쓰다듬는 그 크고 따뜻한 손은 그야말로 행복의 상징, 그 자체.
미카는 왠지 콧등이 시큰한 것을 느끼며, 좁은 1인용 간이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슈에게 더욱 바짝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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