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God bless 1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까마귀와 양털

살을 에는 듯한 바람과 함께 멀리서 갈매기 소리가 끼룩끼룩 울려 퍼진다.

같은 나라 안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먼 북부 변방까지 올 일은 거의 없다. 슈가 본래 살던 곳은 날씨가 훨씬 온화하고, 비가 좀 잦지만 밀농사는 잘 되는 중부였다. 이렇게 궁벽하고, 스산하고, 아무리 대단한 심미안을 갖고 있어도 매력적인 부분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기 힘든 지역은 도무지 피부에 낯설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깁니다."

노를 젓던 수도사가 지평선 너머에 떡 버티고 있는 무슨 덩어리 같은 그림자를 가리켰다.

물이 빠지면 뻘밭이 되고 단단한 길이 나타나 걸어갈 수 있다고 하나 지금은 한창 물이 차올랐을 때라 쪽배를 타고 나아가고 있다. 물결을 타고 조금씩 앞으로 향하다 보니 그림자는 차츰 커지면서 뚜렷한 모양을 자아냈다. 커다란 돌산, 그 위에 세워진 무뚝뚝하고 멋없는 수도원.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곳, 20대에 맞이한 영원한 무덤.

슈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 안에 몇 명이나 있지?"

"수도사가 한 스무 명 될까요.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을 돌보는 하인들이 예닐곱 명쯤 됩니다."

"하인?"

슈는 얼굴을 찌푸렸다. 수도사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신변을 전부 스스로 돌보는 것까지가 신앙생활이다. 아무리 귀족 출신이었다 해도, 심지어 이런 벽지까지 신께 몸을 바치기 위해 온 자들이라면 직접 먹을 것을 마련하여 하루의 삶을 꾸리는 일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했다. 

슈 또한 모든 것을 버리고 몸뚱이 하나, 그리고 유일하게 몸에서 떼어놓지 못하는 도구인 실과 바늘만 가지고 이곳에 찾아온 입장이었다.

수도사가 허둥지둥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가문에서 데려온 시동이나 하인이라는 뜻은 아니고요, 이 먼 땅에도 고아들이 있어서요. 근처 마을에서 버린 아이들도 있고, 어쩌다 흘러흘러 여기까지 온 전쟁고아도 있습니다. 물론… 말씀드리기 힘든 출신의 아이도 있지만, 이해하시겠지요. 각자 다 다른 사정이 있는데, 아이들 중 어느 정도 머리가 좋고 신앙심이 돈독한 경우 수도사가 되기도 하지만 개중에는 신앙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 결국 수도원 옆에 살면서 허드렛일을 하며 끼니를 해결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통틀어 하인이라 부를 뿐, 무슨 위계가 있는 건 아닙니다."

"흐음."

말씀드리기 힘든 출신이란 아마도 귀족의 사생아들이겠지. 슈는 결국 신분 낮은 여자들에게 손을 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지만, 겉모습으로는 실컷 고고한 체하는 귀족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이곳이 북쪽에서 비교적 최전방에 들어가는 지역이라고 들었는데, 전쟁고아가 그리 많지는 않은 모양이군."

"아아,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십 수 년 전까지는 바다 건너에서 쳐들어오는 야만인들과 상당한 전투가 벌어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과 협정이 체결되어 최근 들어서는 조용해졌지요."

"흠."

"서로 다른 민족 사이의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저희는 이곳에서 그저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주님께서 굽어 살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그 야만인들도, 언젠가는 은총을 받을 날이 오겠지요. 아멘."

노를 젓는 수도사의 팔뚝은 꽤나 탄탄했다. 슈 스스로도 완력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지만 막상 큰일이 벌어지면 그야말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뭐, 어차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슈는 스스로를 말려 죽이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찾아왔다. 그 과정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오히려 명예로운 죽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까는 흐릿하게 보였던 돌산 위의 수도원이 어느덧 꽤나 가까워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돌산도 우람하고, 수도원도 거대했다. 먼 옛날, 육지에서 이만큼이나 떨어진 곳에 이런 거대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오직 신앙이었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야기였다. 

"…낯선 자가, 그것도 이런 풋내기가 갑자기 수도원장이라고 찾아오면 원래 지내던 자들도 꽤나 당혹스럽겠지."

슈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열심히 노를 젓던 수도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온화한 생김새에, 눈 밑에 점이 두 개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원장님의 조부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이 수도원은 이미 오래 전에 무너져 폐허가 되어 버렸으리라는 사실을."

"차라리 할아버님이 직접 오셨다면 달성하신 위업이 있으니 그만큼의 환영을 받으셨겠지만, 나는 그냥 그분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 전부인 풋내기일 뿐이라는 것이야. …뭐, 그 또한 전부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겠지."

앞날은 수도원 뒤로 펼쳐진 망망대해처럼 아득했지만, 슈는 마음이 자꾸만 가라앉으려 들 때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생각했다. 북방의 변두리 수도원행은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자, 또 일종의 자해였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슈는 몇 번이나 스스로를 타일렀다.

***

건너편 해안에서 볼 때는 한참 멀다고 생각했는데 배는 생각보다 빠르게 나아가 금세 도착했다. 물결이 그리 세지 않았는데도 다소 현기증과 구토가 느껴져, 슈는 뱃전을 꽉 붙들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보잘것없는 선착장에 쪽배를 대고, 수도사의 안내에 따라 돌산 입구에 있는 커다란 수도원의 정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수도원 아래에는 뜻밖에도 작은 마을이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사는지 의아할 정도로 척박한 이 돌산에 마을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마을 사이로 난 좁은 돌바닥 길을 따라 올라가니 묘한 운치가 있었다.

"지금은 바다로 가로막혀 있어 배로 이동해야 하지만, 물이 빠지고 길이 나타나면 이 너머에 있는 벌판으로 다들 양을 치러 갑니다. 거기서 농사도 조금 짓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보았던 너른 풀밭에 까만 얼굴에 하얀 털을 지닌 양들이 점점이 있었던 것 같다.

안내하는 수도사가 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설명해 준 뒤, 덧붙여 충고했다.

"바닷가다 보니 대체로 늘 엷은 안개가 끼어 있습니다. 경사가 심한데다 발 밑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십시오."

처음 듣는 말이 아니라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고립된 지역이다보니 집집마다 희미하게 열린 창문 틈새로 이쪽을 향하는 호기심에 찬 시선이 느껴졌다. 드문드문 누더기를 입은 어린아이들이 슈와 수도사를 보더니 거미새끼처럼 후다닥 도망쳐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슈는 어깨와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며 반듯한 자세로 걸어 수도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거창하게 부임식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정식 소개는 저녁식사 자리에 모두 모였을 때 이루어질 겁니다. 우선은 방에 먼저 들어가 쉬고 계십시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내 고맙군."

여기까지 데려다 준 수도사가 고개를 깊이 숙인 뒤 나가자, 슈는 자신에게 주어진 방을 둘러보았다. 아무 칠도 하지 않은 돌벽, 간소하고 딱딱한 침상, 작은 책상과 의자. 바닥에 깔고 기도할 때 쓰는 용도인지 다 꺼진 작은 방석이 하나, 그리고 양털로 실을 잣는 물레가 하나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자꾸 떠올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에 살던 저택의 호화로운 방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려한 비단과 모피, 태피스트리, 온갖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품. 전부 자신의 취향이 반영된 물건들이었다. 

수도원장의 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휑하고도 좁다란 공간 한가운데 서서 슈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나무문 쪽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시, 시, 시, 실례합니더. 제가 오늘부터 원장님 모실낍니더. 잘 부탁드립니더."

아까 그 수도사는 평탄한 억양이었는데 이번에는 꽤나 남방 사투리가 강한 말씨였다. 이런 북부 끄트머리에서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말투였기에 고개를 갸웃하던 슈는 문을 열고 눈앞에 나타난 한 소년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모신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너는 누구고?"

"응아아, 다른 뜻이 아이라예! 걍, 여 온 지 얼마 안 되셨으니께 이것저것 마… 불편한 기 있음 저한테 말씀하심 됩니더. 저는 원래 수도원에서 큰 고안데, 이번에 원장님 새로 오시믄 잘 도와 드리라~ 하꼬 지시를 받았심더."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의 소년이었다. 덥수룩한 머리가 너무 길어 앞머리가 얼굴을 다 가렸다. 

"농. 허드렛일하는 하인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만, 굳이 나 개인에게 사람을 붙여 줄 필요는… 무언가 물을 필요가 있으면 그때그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질문해도 될 것을."

"아입니더, 아입니더, 제가 손발처럼 옆에 착 붙어가 도와 드릴낍니더. 쫓아내지 마시이소."

슈가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소년은 어째서인지 절박한 표정으로 매달렸다. 고개를 가로젓는 바람에 앞머리가 살짝 옆으로 밀려나, 두 눈동자가 얼핏 보였다. 그 순간 슈는 저도 모르게 소년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눈! 이럴 수가, 너무나 아름답구나!"

"응아?"

"오오, 신께서 실수로 안구를 잘못 끼워 넣으신 것인가? 한쪽은 이토록 투명한 절망의 청금석 같고, 또 한쪽은 기쁨의 비명을 지르는 호박이 아니냐! 이러한 비대칭의 일그러짐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라니, 트레 비앙! 조금 더 자세히 보여 다오, 그 두 눈동자를!"

"으, 응아아, 응아아아…."

아름다운 것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습관은 슈의 오랜 고질병이었다. 더구나 이토록 어둡고 칙칙하고 단조로운 수도원 안에 있으니 새까만 커튼 속에 가려져 있던 그 두 개의 보석이 더한층 빛나 보였다. 슈는 소년의 한쪽 어깨를 꽉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거치적거리는 앞머리를 강제로 쓸어올리며 두 눈동자를 정신없이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그 두 보석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사방으로 왔다 갔다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크흠, 실례했다는 것이야. 이 습관을 버리고자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타고난 성질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군… 저주스러워. 아아, 나는 정말로 개인 하인이 필요치 않으니 가서 원래 하던 일을 하도록."

"그, 그치만…."

얼굴이 잔뜩 빨개진 채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소년이 계속 우물쭈물하며 방을 나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어쩌면 거역할 수 없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곳에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사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은 자신도 낯선 곳에 처음 온 입장이긴 했기에, 슈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으니 혹시 어딘가에 모아 놓은 양털이 있으면 좀 가져다 다오. 어차피 저녁식사 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고, 이곳은 보통 추운 곳이니 옷을 만드는 일은 어찌되었든 보탬이 되겠지."

"응아, 알겠심더! 맡겨만 주이소!"

소년이 허둥지둥 뛰쳐나가자 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곳에서는 이럴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하루하루 끼니 마련하기도 힘든 척박한 땅으로 스스로를 내몰면, 예술에 눈이 멀어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자신만의 잘못일까?

저 지저분하고 볼품없는 까마귀 같은 소년의 두 눈이 그토록 아름다운 색채를 띠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 정말 자신의 불찰일까?

"과연 수도원 안에서도 온전히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의심스러워지는군."

돌벽에 조그맣게 뻥 뚫린 창으로 싸늘한 바닷바람이 불어들었다. 슈는 겨우 몸을 일으켜 나무창을 닫고, 책상 위에 그나마 놓여 있던 촛대를 가지고 복도로 나가 복도의 횃불에서 불씨를 붙여 가지고 돌아왔다. 햇빛이 차단되어 완전히 컴컴해져 있던 방 안이 촛불 하나로 흐릿하게 밝아졌다.

앉아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으나 늘 그렇듯 슈는 신에게 기도를 올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늘 자신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를 뿐이었다.

***

첫날의 기세로 미루어볼 때 이쪽에서 계속 밀어내도 개의치 않고 매일같이 찾아와 옆에서 까악까악 울어대리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까마귀 같은 소년은 그 이후 통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양털을 가져오라고 시켰더니 몇 시간이나 지난 후 흙탕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흠뻑 젖은 양털을 한아름 가져와서는 "응아- 오다가 길이 미끄러바서 자빠졌심더~"하며 헤실헤실 웃기에 버럭 화를 냈더니 또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기만 하던 소년은, 어쩌면 그날 야단을 맞고 야코가 죽어 슈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첫날부터 시끄럽고 귀찮은 녀석을 시원하게 야단쳐 못 오게 한 것은 잘 한 일이라고 슈는 생각했다. 

그 청금석과 호박의 두 눈동자가 옆에서 바삐 움직이며 자신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났다.

"마을을 좀 둘러봐야겠는데."

식사 때에만 간신히 얼굴을 내밀 뿐, 몇 날 며칠이고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슈가 문을 열고 나와 지나가던 수도사를 아무나 붙잡고 말하자 상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 들었던 대로 스무 명 남짓한 이 공동체는, 미루어 짐작컨대 사실 원장 따위의 지도자가 굳이 필요치 않은 곳이었다. 오랫동안 평등하게 일을 분담하여 조용한 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갑자기 찾아온 슈는 사실 융숭히 대접해야 할 어려운 손님일 뿐이었고, 수도원장이라는 이름도 솔직히 슈의 조부 때문에 불러 주고 있을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이츠키 집안이라는 명목으로 찾아온 짐덩이나 다름없다며, 양털 실을 잣던 슈는 홀로 여러 번 자조했었다.

그래도 수도사는 자신의 일과를 잠시 내려놓고, 슈를 데리고 수도원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뭘 가져가시려는 거죠?"

슈가 방 안에서 들고 나온 것은 웬 불룩한 낡아빠진 자루였다. 크기에 비해 그리 무겁지는 않은지 한쪽 어깨에 쉽게 걸머멘 그것을 보고 수도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아, 양털로 실을 자아 만든 아이들 옷이다. 이곳에 오면서 보니 추운 날씨에 비해 마을 어린아이들 옷이 형편없더군."

"마을 어린아이들 옷을…? 직접 만드셨다고요? 실부터 짜서?"

"무슨 문제라도?"

슈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하자 수도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예, 첫 자선활동을 하시려는 것이군요. 알겠습니다. 가시죠."

이것이 과연 자선활동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슈 입장에서는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까마귀 소년이 가져다 준 양털은 깨끗이 세탁해 실을 자아 보니 양이 꽤 되었다. 슈가 실 잣기와 뜨개질에 몰두하느라 방 밖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는, 사실 수도사들이 자신들의 루틴에 굳이 슈를 끼워 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른들은 의식주를 자신들의 손으로 해결하는 데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넝마를 입고 다니는 마을 아이들 옷을 만드는 것이 더 많은 개수를 만들 수 있으니 더 보람 있고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수도사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마자 길바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이들은 낯선 슈를 보고는 도망치려 했지만, 수도사가 손짓으로 부르자 겁먹은 얼굴로 주춤주춤 다가왔다.

"원장님께서 옷을 나눠 주신다고 하니, 아이들을 더 불러오거라."

예닐곱 명이 모였다. 슈는 자루를 펼치고 옷을 하나하나 꺼내, 사이즈가 맞는 아이들을 찾아 입혀 주었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인형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털옷, 따뜻해."

"이렇게 예쁜 옷은 처음 입어 봐…."

"나도…."

"헤헤, 너무 좋다."

이곳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엉성한 만듦새의 의복에 비하면 슈가 뜬 옷들은 올이 촘촘하고 무늬도 아름다우며 훨씬 튼튼했다. 

근처 집에서 창문을 열고 내다보던 어른들도 하나둘씩 다가왔다. 아이들의 부모로 여겨지는 자들이 슈에게 꾸벅꾸벅 절을 했지만, 슈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이들 옷 입히기에만 열중했다. 깨끗이 씻기고 입혀 주면 더 좋겠지만 섬은 맑은 물이 부족하다. 일단은 추위를 막는 것이 우선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많은 양털을 다 어디서 가져오셨죠? 나중에 따로 원장님의 짐이 도착한 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지켜보던 수도사가 문득 물었다. 슈는 흘끔 쳐다보곤 대답했다.

"내가 양털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 까만 머리 소년이 가져다 주었다만."

"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퍼졌다.

"그게 원장님이 시키신 일이었다고요?"

"그랬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

"우리는 그 기분 나쁜 녀석이 도둑질을 한 줄 알고…."

"그럼 마을 공용 창고에서 양털을 가지고 나갔던 게…."

웅성거리는 목소리에 슈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 덩치 좋은 남자 한 명을 붙잡았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난감한 얼굴을 한 자였다.

"왜들 그렇게 수군거리는 것이지? 이 양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무슨 규칙이라도 있는 건가?"

"아, 아닙니다. 수도원에서 쓰신다고 하면 양털을 드리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건 질 좋은 것을 따로 골라 마을 창고에 모아 놓은 양털로, 기근이 들었을 때 급히 다른 곳에 가서 곡식과 바꿔 올 용도로 보관해 두었던 거라… 고아 놈들이 손대지 못하게 숨겨 놓았는데, 어떻게 높은 곳에 있는 창문을 열고 들어가서 훔쳐 나오는 걸 누가 봤다고 해서, 단단히 혼쭐을…. 원장님이 시키신 일인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지?"

남자는 슈의 험악한 얼굴에 눌려, 순순히 어떤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 창고 옆 오두막에 있을 겁니다요."

슈는 짜 놓았던 옷과 그것을 입은 아이들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건드리면 뼈가 부러질 정도로 영양상태가 좋지 않고 비쩍 말랐던 까마귀였다. 얼마나 심하게 '혼쭐'을 내 주었는지 몰라도, 저런 건장한 남자들에게서 린치를 당했다면 무사하지는 않을 터였다. 며칠간 얼굴을 보이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하니 부르쥔 주먹의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안에 있느냐!"

오두막의 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덜렁덜렁한 문짝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컴컴한 안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응아아… 누구신교…. 또 때릴라꼬 왔으믄 걍 바다에따 떤져주이소… 인자는 마 여한도 없꼬, 물고기 밥이나 되는 기 낫겠심더…."

마치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가늘게 뜬 두 눈만 반짝였다. 슈는 그 청금석과 호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자. 너를 물고기 밥으로 만들다니, 그것은 용납할 수 없어."

"응에…?"

슈는 자기 힘으로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들쳐업었다. 깃털처럼 가벼워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두막에서 까마귀 소년을 업고 나오는 슈를, 양털 옷을 둘러싸고 난감해하던 마을 사람들이 멀찍이서 멍하니 응시했다.

"앞으로 이 아이를 내 대리인으로 삼겠다. 이 아이가 하는 말은 곧 내 지시라 생각하도록. 알겠지?"

"…예에…."

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도원 안의 자기 방으로 향했다.

소년을 침대에 눕히고, 잠시 고민하다 얇은 이불을 힘으로 북 찢었다. 그리고 빨아서 깨끗한 천을 마련한 뒤 일단 전신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닦아 주니 하얀 피부 곳곳에 든 멍이 실로 참혹했다. 그 행위가 도둑질한 고아 소년에 대한 정당한 단죄인지, 이 비좁고 자원도 부족한 섬 안에서 사람들이 발견한 '정의로운' 오락거리인지는 소년의 몸을 보면 명백했다. 

팔과 다리도 부러진 곳이 있었다. 오히려 낫는 과정에서 잘못 붙으면 곤란할 곳이었다.

"나는 의사는 아니다만… 아직 정신이 몽롱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구나."

차라리 통증을 느낄 수 없을 테니.

슈는 소년의 팔다리를 조심스럽게 맞췄다. 소년은 정신이 혼곤한지 조금 움찔거리기만 할 뿐이었고, 오히려 슈 쪽에서 비지땀이 흐르는 작업이었다. 

땀을 닦고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을 찾아서 약초를 보관하는 곳을 물은 뒤, 그것을 이겨 상처 자리에 바른 뒤 붕대를 감았다. 부러진 곳은 뼈를 맞추고 나서 나무토막을 가져와 부목으로 대고 천으로 둘둘 감아 묶었다. 

응급처치 작업이 다 끝난 후 슈는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서 소년의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 말하지 않았지?"

어차피 대답할 수 없는 상태겠지만, 그래도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이 꼴이 되도록, 내가 시킨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지? 왜 입 다물고 맞기만 한 것이야?"

그때 소년의 입술에서 희미한 신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도… 안 믿어 주니까예. 저 같은 저주받은 고아 녀석이 하는 말 따위는…."

"?!"

"요래 불길한 검은 머리캉, 색이 다른 양쪽 눈알 땜에… 다들… 꺼리거든예. 원장님이… 가꼬 오라꼬 했다캐도, 안 믿어 줬을끼라예…."

슈는 말문이 막혔다. 소년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글치만 마, 죽기 전에 일케 원장님 얼굴 함 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예… 아인가, 내 이미 천국에 온 기가… 이래 깨끗한 침대에도 누버보고…."

"…."

슈가 처음 들어오자마자 좁고 갑갑한 감옥이라고 느꼈던 이 방이 소년에게는 천국이었다. 그 사실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나는 딱히 좋은 양털을 굳이 골라서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다. 아까 그 오두막에도 이곳저곳에 빠진 양털이 굴러다니고 있던데, 그런 것을 주워모아서 가져왔으면 이렇게까지 심한 꼴을 당하지도 않았을 터…."

"에헤헤… 원장님헌티 가져가는 긴데, 그란 건 안 되지예. 암만 글타캐도 내 젤루 좋은 거, 젤루 이쁜 것만 골라다 드리고 싶었다 안 합니꺼…."

분명 그날 처음 만난 사이다. 얼굴도 그날 처음 보았고, 말도 그날 처음 섞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왜 목숨을 걸면서까지 자신에게 헌신하려 했을까. 허울뿐인 수도원장이라는 지위 때문에? 그럴 리가.

그날 밤 소년은 눈을 허옇게 까뒤집으며 고열에 들떠 헛소리를 했다. 의사가 아닌 슈도 아이가 생사의 고비를 오가고 있다는 사실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했고, 결국 남은 것은 기도뿐이었다. 성직자답게, 가장 원초적인 행동.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살려달라고 비는 일.

슈는 태어나 처음으로 신에게 매달렸다. 소년의 손을 꽉 붙잡고 정신없이 빌었다.

"제발 이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 마디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데, 저는 아직 이 아이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부디, 눈을 뜨고 맑은 정신으로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소년의 머리카락처럼 새까만 밤의 어둠은 야속하게도 도통 물러나지 않고 슈의 마음 속을 잠식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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