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바보들의 발할라

#코즈프로 휴게실 #쌍방짝사랑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코즈프로 사무실이 있는 층의, 춥지도 덥지도 않게 환경을 잘 갖춰 놓은 휴게실은 아이돌들이 스케줄 틈틈이 들러 잠시 대본을 확인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약간의 빈 시간을 때울 때 자주 사용하는 곳이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교복도 채 갈아입지 못하고 ES빌딩으로 달려온 미카는 회의실 안에서 아직 슈가 외부 프로듀서와 미팅을 하고 있는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확인하고는 그 휴게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평일 오전 귀국이었기에 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던 미카는 공항 마중을 나가지 못한 것을 몹시도 원통하게 여겨, 최소한 미팅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전날 저녁 늦게까지 개인 스케줄이 있었고, 또 밤에는 밀린 작업을 하느라 제법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던 미카는 휴게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그만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이 감기고, 턱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러다 결국 탁자에 엎드려 잠이 들어버렸다. 

 

"…." 

 

자신의 개인 스케줄과 관련된 미팅을 끝내고 나온 슈는 통유리 너머로 휴게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인다 싶더니,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서는 잠든 미카의 옆에 서서 그 정수리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에는 뻗친 흔적이 다소 남아 있었다. 

슈는 머뭇거리다가 그 별빛 같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 살며시 쥐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허리를 든 순간. 

 

'슈- 우- 구- 운-.' 

 

통유리창 바깥 복도에서 같은 코즈프로 소속, Crazy:B의 아마기 린네가 히죽히죽 웃으며 안을 들여다보면서 입 모양으로만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슈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휴게실을 나왔다. 

 

"캬하하핫! 아니, 뜻밖에 재밌는 걸 봐 버렸네? 이걸 어쩐다?" 

"…내게 볼일이 있다면 간결하게 말하도록. 네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헛소리에 어울려 줄 시간은 없다는 것이야." 

"나도 그렇게 시간이 많지는 않거든? 방금 생각 못 한 임시수입이 들어온 참이라 돈이나 불리러 가려고 했다고. 그런데 창 너머로 달달~ 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 아니겠어? 게다가 나도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지…." 

 

슈는 불쾌해하려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치고 린네의 표정이 꽤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워들은 이야기?" 

"나도 말이야, 왔다 갔다 하면서 요새 미~ 땅이 기운이 없네~? 하는 생각은 했단 말이지. 그런데 얼마 전에 우리 동생 군하고 아이쨩이 얘기하는 걸 얼핏 들었는데, 슈 군~? 최근 들어 일본에 와서도 미~ 땅을 거의 안 만난다면서? 그래서 오! 이거 유닛 내 불화인가! 했는데 방금 전 그 장면을 봐 버렸으니…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유리창 너머로 아직도 잠들어 있는 미카를 돌아보았다. 

 

"네게 이렇게 섬세한 감정을 이해할 감수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만…." 

"어이어이, 이래봬도 나도 사랑노래를 할 줄 아는 아이돌이거든~?" 

"사랑노래, 라." 

 

슈는 린네와 사실 긴 이야기를 할 생각도 없었고,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낼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이 남자에게서는 묘한 안정감이 풍겼다. 이것이 태어나면서부터 '형'이었던 자 특유의 분위기일까. 슈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마기, 너는… 이유 없는 사랑을 해 본 적 있나?" 

"에엥?"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에 린네는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농담으로 치부하고 웃어넘기기도 뭣한 상황이었기에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보자, 이유 없는 사랑이라면 우선 동생 군은… 동생 군이니까? 혈육이고, 어렸을 때부터 예뻐했고, 나를 잘 따랐으니까? Crazy:B 멤버들은 우리 멤버들이니까… 얼마 전 그 어려운 시기에도 끝까지 곁에 있어 줬고 말이지. 특히 니키는 죽어가는 날 살려 준 적도 있으니 생명의 은인으로 모시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지갑을 갈취… 아니, 곁에서 함께할 각오는 되어 있고…. 그렇게 따지면 이유 없이 사랑하는 상대는 없다고 봐야 하나?" 

"잠시 불온한 말이 섞여 들려 온 것 같다만… 역시 그런 것이 아닌가? 사랑을 줄 때는 그에 상응하는 가치가 필요하지. 누군가가 내게 사랑을 담아 무언가를 해 주었기에, 나 역시 그것을 사랑으로 갚는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야." 

"흐응~? 뭔가 좀 다른 것 같은데… 아무튼 그래서?" 

 

슈는 또다시 휴게실 안의 미카를 돌아보았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부드러워 린네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아마기. 나는, 지금까지 저 아이의 헌신과 일방적인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안주했다. 하지만 동시에 빈틈없이 감사하고 있었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너도 방금 생명의 은인 이야기를 했지만, 내게도 저 아이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으니까. 받은 사랑을 갚아 나가며 이미 평생을 곁에서 함께할 각오는 이전부터 되어 있었다는 것이야." 

"휘유~ 뜨겁구만.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안 만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게…." 

 

슈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커다란 손에 두 뺨의 절반 정도가 가려졌지만, 그래도 붉은 물이 뚝뚝 흘러넘칠 정도로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린네는 점점 더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요즘은 자꾸 감사의 마음을 잊을 정도로, 그저 저 아이가 마냥 사랑스럽기만 해서 곤란해." 

"하?" 

 

린네가 새총 맞은 비둘기 같은 표정으로 슈를 쳐다보았다. 

 

"인형을, 보는 것과는 달라. 인형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지. 그것만 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어. 하지만 저 아이는 인간이고, 살아 움직이는 인간으로서의 사랑스러움이 무엇인지 내게 여실히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이야. 처음에는 그렇게나 생명력과는 인연이 없고 마치 삶과 죽음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듯 서 있던 것 같은 아이가… 삶을 배우고, 예술을 배우고, 자기 손으로 미래를 움켜쥐려 발버둥치는 모습이 지금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벅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마치 거대한 미술작품을 보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그, 그래… 응…." 

"아마기, 혹시 알고 있다면 말해 다오. 이제는 저 아이가 존재만으로도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나머지, 이전에 그토록 헌신하고 나를 보살폈던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카게히라를 사랑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저 아이의 노력을 소홀히 하고 하찮게 여기는 일이 되지 않는 건가?" 

"…." 

"모르겠다는 것이야, 나는. 이 일방적이고도 거대한 감정을, 카게히라의 소박한 눈동자 앞에서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좋을지. 나조차 감당이 안 되는 마음을 상대에게 과연 보여주는 것이 옳은 일일지…. 너의 노력과 무관하게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고백해도 좋을지." 

"그래서 피해 다니고 있었던 거구만?" 

"…말하자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야." 

 

린네는 팔짱을 꼈다. 

 

"Valkyrie가 예민한 사정을 안고 있다는 건 나도 풍문으로 듣긴 했지만…. 뭐, 의외로 스트레이트하게 말해버리는 것이 지름길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농, 그것은… 아름답지 못해." 

"캬핫! 사랑이라면 다 아름답다고 말할 법한 슈 군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네?" 

 

슈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예전에도 나는 그 애에게 말을 걸기 위해 날씨가 좋다, 꽃이 피었다, 경치가 아름답다… 고작 그 정도의 어휘밖에 동원하지 못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더욱 심해. 카게히라의 앞에 있으면 머릿속이 하얘지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그저 기백 없는 눈빛으로 멍하니 바라보게만 될 뿐이다. 아아, 이렇게 꼴사나울 수가! 스승으로서의 권위도, 한 살일지언정 연장자로서의 위엄도 전부 잃고 말았다니!" 

"지금은 청산유수구만, 뭘…." 

 

그때 슈의 휴대전화에서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신인을 확인한 슈는 린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했다. 일이 생겨 급히 가 봐야 할 것 같군. 그럼 이만."이라고 말한 뒤 전화를 받으면서 성큼성큼 걸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뒤에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린네와, 휴게실 안에 아직 엎드려 있는 미카가 남았다. 

린네가 휴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태연하게 불렀다. 

 

"미~ 땅?" 

"…." 

"다 들었지, 미~ 땅?" 

"…." 

 

슈가 휴게실을 나오면서 문을 꽉 닫지 않은 바람에 틈새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슈는 자신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느라 미처 깨닫지 못한 눈치였으나 워낙 목소리가 큰 관계로, 휴게실 안에 있는 미카가 그것을 다 들었을 것은 뻔했다. 

그 증거로 슈는 휴게실 쪽에 등을 돌리고 있어서 몰랐던 모양이지만 엎드려 있는 미카의 귀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붉어지는 모습을 린네는 계속 보고 있었다. 

 

"어~ 이, 미~ 땅. 나 파칭코 가게 5천 엔만…." 

"… 아까 임시수입이 들어왔다 카지 않았나." 

"저런, 거기서부터 다 들었어? 그럼 머리카락에 키…." 

"응아아아아아악!" 

 

미카가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더니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스승님 와! 진짜! 그런 말은! 내한테! 직접! 하믄 안 되긋나! 뽀뽀도 깨 있을 때 해 주믄 안 되는 기가!" 

"와아, 폭주한다…." 

"그라믄 이 상황에서 내가 어케 반응해야 하는 긴데?!" 

"그, 그러게…."

 

미카는 바닥에 털썩 쪼그리고 앉아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무릎 사이에 푹 숙인 채 바들바들 떨었다. 

 

"…저, 그…." 

"내 어지럽데이, 아마기 선배… 지금 말 시키지 말아 도…."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대답은 뻔해 보이지만, 그… 일단 묻겠는데 슈 군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내는 원래 바보천치 같았데이! 스승님이 좋으니까! 스승님 앞에서 제대로 말도 몬하고! 걍 보기만 해도 좋아서! 맨날 헤헤거렸다 아이가! 걍! 좋으니까!" 

 

아까의 슈만큼이나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미카가 외쳤다. 

 

"그 감정만큼은, 내가 선배데이! 내가 더 잘 안데이! 거긴 원래 위엄 같은 거 없꼬! 권위 같은 것도 없다! 스승님은 바보라카이!" 

"…그래, 그렇겠지." 

 

피식 웃은 린네는 미카의 머리를 한 차례 헝클어 주고서 휴게실 밖으로 나왔다. 

다시 탁자에 털썩 엎드린 미카의 머리 위로 한 줄기 김이 푸쉬쉬 피어오르는 듯했다.

 

 

***

 

  

얼마 후, 예의 휴게실 안에서 슈와 미카가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며 한참이나 앉아 있는 모습을 밖에서 우연히 목격한 린네는 재빨리 뒷걸음질을 쳐서 그 자리를 후다닥 벗어났다. 

히이로와 아이라에게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전달해 놓았고, 남의 연애사에 굳이 깊이 끼어들었다가 골치를 썩을 필요는 없겠다는 도박사의 빠른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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