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나만을 바라봐 주세요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길게 느껴지는 비행이었지만, 항공기 안에서는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불이 꺼지고 창이 닫히고 사람들 모두가 죽은 듯이 잠든 가운데 대륙을 넘어 하늘을 날아가는 열 몇 시간 동안 미카는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태어나 처음 와 보는 높이, 처음 맛보는 공기였다. 

툭하면 일본에 돌아오곤 하는 스승님은 이 시간 동안에도 바쁘게 뭔가를 하고 있겠지. 서류를 읽거나, 대본을 체크하거나, 집중해서 해야 하는 바느질을 하거나. 이미 들은 이야기였기에 미카도 작은 가방에 할 일을 몇 가지 챙겨 가지고 왔지만 어째서인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눈앞의 작은 화면 따위는 더더군다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것은 딱히 좁은 좌석이 불편해서라거나, 공기가 건조해서 눈이 뻑뻑해서라는 등의 물리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미카는 원래도 불편함에 익숙한 아이였다. 다만 모든 것이 낯설어서 어깨가 얼어버렸을 뿐이었다. 기내식도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아, 간신히 물만 몇 모금 마시고 주머니에 들어 있던 사탕을 한두 개 빨아먹었다. 온통 낯선 것들뿐인 항공기 안에서 사탕의 단맛은 유일하게 미카가 아는 감각이었다. 

 

"Bienvenue, 카게히라. 혼자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굳어버린 전신을 간신히 이끌고 항공기에서 내리자 평소와 반대로 공항에 마중 나와 있던 슈가 미소를 지으며 미카를 반겼다. 비칠비칠 다리를 끌고 걷다가, 멎어 있던 전선에 갑자기 전류가 흐르듯 정신이 번쩍 든 미카가 "응아아, 스승님!"하고 달려오려다 그만 자기 발목에 발이 걸려 요란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칫, 칫! 조금은 나아진 줄 알았다만, 볼썽사나운 행동거지는 여전하군. 아아, 물론 몸이 뻣뻣해진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야. 자, 내 손을 잡고 일어나거라." 

"응아아… 내 모지라서 미안하데이…." 

 

무릎을 꽤 심하게 찧었을 텐데 크게 아픈 기색도 없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는 미카의 가벼운 무게에 슈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카게히라, 식사는?" 

"사… 사탕? 뭇따." 

"농!!" 

 

공항 안에 벽력 같은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아아, 이 부석부석해진 뺨, 수척한 이마, 터진 입술, 퀭한 눈… 어서 가자, 카게히라. 처음 온 프랑스에서 처음 입에 넣을 음식은 내가 골라 주마. 예민한 네가 비행 도중에 뭔가를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나도 하지 않았다만, 그래도 너무 긴 시간 공복을 유지하는 건 좋지 않아. 인간의 몸은 귀찮기는 하지만 계속 연료를 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야." 

"으응…." 

 

항공기에서 내려서도 여전히 모든 것이 낯설었기에 미카는 슈의 팔에 더욱 바싹 매달렸다. 공항 자체는 일본의 그것과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애당초 슈를 필두로 세계를 날아다니며 활동하는 ES의 몇몇 아이돌들과 달리 미카는 해외에 나갈 일이 드물어, 일본의 공항을 직접 이용하는 일조차도 낯설었다. 

사탕도 떨어진 지금 미카가 문자 그대로 매달릴 곳이라고는 슈의 오른팔뿐이었다. 

 

"-Shu!" 

 

그때 공항 로비 건너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슈는 그쪽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친근하게 손을 흔들었다. 슈의 또래로 보이는 프랑스 남자가 다가와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로 길게 무슨 말을 늘어놓았다. 미카는 저도 모르게 슈의 뒤에 숨었다. 

프랑스 남자가 미카 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물었고, 슈는 두 어깨를 으쓱하며 무어라 대답했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통 알 수 없는 미카는 그저 슈의 옷자락만 붙잡고 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있었다. 

남자가 떠난 후에야 슈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겁에 질릴 필요는 없지 않느냐. 저 자는 내 학우고, 공항에서 마주친 것이 우연이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 

"내… 내는 그런 거 몬 알아들었데이." 

 

낯선 언어로 낯선 사람과 꽤 길게 대화를 늘어놓는 슈가 낯설어, 미카는 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스승님… 내가 아는 스승님 맞제? 

그 말이 통 입 밖으로 떨어지지가 않았다. 

공항을 나와 택시를 타고 한참 달려 슈의 단골이라는 식당에 가니 가벼운 샐러드와 흰살생선 필레 요리가 나왔지만 미카는 거의 한 입 정도씩밖에 먹지 못했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분위기에 체할 것 같았다. 

 

"소화가 잘 되는 메뉴로 골랐으니, 가능하다면 조금이라도 더 들거라." 

"응아… 됐다, 내는 인자 배부르다 아이가." 

 

맞은편에 앉은 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식사보다 먼저 휴식을 취했어야 했을지도 모르겠구나. 불편한 좌석에서 오랜 시간을 견뎠으니 어쩌면 편한 잠자리에서의 수면이 먼저일 수도 있었거늘… 칫, 가자. 카게히라." 

"응아, 스승님도 다 안 묵었는데?" 

"나도 이미 포만감이 느껴진다는 것이야." 

 

낯익은 슈의 지갑에서 낯선 지폐가 나오는 것을 미카는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계산대에서 슈가 익숙한 듯 돈을 내밀자 상대방이 미소를 지으며 알은체를 했다. 단골이라는 말은 허풍이 아닌 듯했다. 

여전히 낯선 몇 마디 말이 오가고, 마침내 슈가 몸을 돌려 가게 문 쪽으로 걸어갔다. 

미카는 그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굳어버려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카게히라?" 

 

슈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잠시 망설이다 미카의 손을 잡았다. 그제야 미카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으, 응아아! 지금 간데이!" 

"정말로 피곤한 모양이로구나. 어서 가야겠다." 

 

식당에서 슈의 하숙집까지는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외관은 고풍스럽고 인테리어는 아늑한 그곳은 처음 오는 곳인데도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익숙한 슈의 냄새로 가득해서일까, 미카는 그제야 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슈가 일러주는 대로 뜨거운 물 샤워를 하고, 가져온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스승님, 내… 진짜 해외는 체질이 아인갑다." 

 

슈가 헤어드라이기를 가져와 특별히 직접 머리카락을 말려주고 있는데 비행기에서 내린 이후 처음으로 미카가 약간이나마 생기 있는 목소리를 냈다. 슈는 안도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이었다. 

 

"누구든 처음은 다 힘든 법이다. 너도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학생 신분을 벗어난 후에는 활동 반경이 더 넓어질 테니, 이제부터 적응해야 해." 

"응아~ 내는 기냥 내수용으로 살믄 안 되나…." 

 

목소리에 조금은 투정이 섞여나왔다. 그 덕분에 또 조금 마음이 놓였지만, 슈는 고개를 홱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농! 그런 응석은 받아줄 수 없어. 너는 격식 있는 Valkyrie의 멤버, 이 이츠키 슈의 유일한 파트너. 그에 걸맞은 자세를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야." 

"…." 

 

평소 같았으면 '응아아! 내 스승님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열심히 할끼다!'하고 가슴을 펴고 큰 소리로 말했을 텐데, 오늘의 미카는 왠지 멍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그만 자고, 내일은 오랜만에 메인터넌스를 해 주마." 

"응아…." 

 

평소였다면 시무룩해 있다가도 '메인터넌스'라는 단어만 나오면 얼굴을 퍼뜩 들고 반색을 하던 미카가 가만히 끄덕이기만 하는 것을 보고, 슈는 결국 미카를 옆구리에 끼고 날라다 침대에 밀어넣었다. 

 

"안 되겠다. 정말로 그만 자거라." 

"으응, 스승님… 잘 자래이…." 

 

혼자 사는 슈의 하숙집에 당연히 침대는 하나뿐이었지만, 다행히도 야윈 미카와 몸을 붙이고 자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는 넓었다. 그러나 슈는 밤늦게까지 해야 할 작업이 있어 지금 당장 잠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 상태의 미카를 혼자 자게 둘 수도 없어, 결국 슈는 침대 옆에 앉아 미카의 머리와 어깨를 토닥거려 주며 잠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스승니임…." 

"응?" 

"귀찮게 해가… 글구… 스승님이 사랑하는 이 나라에 바로 정을 붙이지 몬해가… 미안하데이…." 

 

차츰 작아지는 목소리와 함께 미카는 고른 숨을 내쉬며 겨우 잠이 들었다. 하지만 미카가 잠들면 바로 일어서서 일감을 갖다놓은 서재로 가려던 슈는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이나, 잠들어 버리니 더 앳되어 보이는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공항에서 미카를 마주한 순간 슈는 무척이나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자신과 미카가 최선을 다해 떨쳐내려던 작년 인형사와 인형의 관계와도 닮아 있었다. 낯선 곳에서 주뼛거리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다 슈가 나타나자 냉큼 달려와 바짝 붙던 그 모습은 정말이지 유메노사키 시절 초창기 Valkyrie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제는 지양해야 하는 모습인데도 어째서인지 그 자리에 낯선 사람이 나타난 순간 미카가 자신의 뒤에 숨는 것을 보고 슈는 가슴속에서 마치 가냘픈 들꽃이 한 송이 피어난 기분이었다. 

그것을 비밀스러운 기쁨으로 느꼈던 것이, 어쩌면 네게 못 할 짓을 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졸업 후에는 이쪽으로 와 주기를 바랐건만. 내 욕심이 지나쳤느냐." 

 

슈는 미카의 뺨을 쓰다듬어 주고, 일어나서 침실의 불을 끈 뒤 밖으로 나갔다.

 

 

*** 

 

 

고요와 적막으로 둘러싸인 어둠 속에서 미카는 불현듯 두 눈을 떴다. 자신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기분이었으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오늘은 다들 문제없이 잠든 모양이었다. 아아, 맞다. 자신은 고아원에 있었다. 수많은 작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가장 나이 많은 미카 오빠. 

늦게까지 자지 않으려 버둥거리면서 자꾸 그림책을 읽어 달라고 가져오는 아카리쨩. 아카리쨩이 좋아하는 그림책은 딱 한 권뿐이다. 북풍과 태양 이야기. 미카가 그림책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하면 미유키쨩도, 마나쨩도, 그리고 얼마 전에 들어온 세 살짜리 코코로쨩도 곁으로 다가와 함께 듣는다. 

아이들은 조그맣고 연약하고 귀엽다. 아껴 줘야 한다. 그런 아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으로 와르르 쏟아졌다가는 금세 사라지고, 그 뒤로는 '미카 오빠'가 할 일만이 남았다. 안아 주고, 얼러 주고, 쓰다듬어 주고, 위로해 주고, 보살펴 주고…. 

어두운 밤은 그런 '미카 오빠'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음놓고 푹 잘 수도 없었다.  

 

"아미쨩은 자다가 가끔 오줌 싸니께… 혹시 낌새가 있으믄 얼른 깨워가 화장실 데꾸 가야제. 그카고 스미레쨩은 자꾸 배 내놓고 자가 배탈이 난다 아이가. 이불 잘 덮어줘야고…." 

 

미카는 어둠 속에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니, 정말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체온이 높고 호흡이 빠른 아이들의 색색거리는 평화로운 숨소리조차, 단 하나도. 

 

"다들 어데 갔나…? 내 설마, 또 버려진 기가…?" 

 

아아,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자신은 그나마 머무르던 곳에서도 또 내쳐진 것이다. 고아원은 좁고, 아이들은 너무 많았고, 자신은 가장 연상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아이들을 돌봤어도,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하다못해 그때 자신에게 예쁜 옷을 줬던 그 사람만이라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으, 윽. 흑…." 

 

꽉 깨문 잇새 사이로 도저히 참기 힘든 오열이 흘러나왔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태아처럼 최대한 작게 몸을 웅크린 미카는, 이곳이 어디이고 누가 옆방에 있는지 몰라도 우는 모습과 소리를 가능한 한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도 울음을 그칠 수는 없었다. 

아주 조용히 경첩이 삐걱거리며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참으려고 했는데 소리가 새어나갔나 보다. 보기 흉하게 운다고 야단을 맞을지도 모른다. 누구인지 몰라도, 듣기 싫은 소리를 질책하러…. 

 

"카게히라?" 

 

불이 켜졌다. 

순식간에 빛이 차올라 환해진 방 안에서 잠옷 차림의 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조그맣게 흐느끼는 소리가 나 놀라서 불을 켰더니 미카가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운 탓에 눈이 퉁퉁 붓고 얼굴이 온통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몹시도 당황했는지 슈가 다급히 달려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얼굴을 어루만졌다. 

 

"무슨 일이지? 악몽이라도 꾸었느냐? 아니면 어디 아픈 데라도? 제발 말해 다오." 

"…여." 

"음? 뭐라고 했지? 모자란 어휘력으로라도 좋으니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로 표현하거라. 인간끼리는, 그렇게 소통하는 것이 아니냐." 

"신이시여…." 

 

맞아, 고아원에서 어린 동생들과 함께 TV로 봤어. Valkyrie의 이츠키 슈. 화려하고 탐미적인 의상을 입고, 인형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조종하던 그때의 그 신 같던 제왕. 당신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그래도 나는 기뻤어. 바람이랄 것이 없던 가슴 속에, 딱 한 번만이라도 보고 나면 여한이 없을 것 같던 사람이 생겼으니까. 그래서 나는 가출이나 다름없이 고아원을 빠져나와─ 

 

"카게히라!" 

"응아아, 스승님?" 

 

슈가 벌떡 일어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든 후에야 미카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랬다, 자신은 파리에 있는 슈의 하숙집에 와 있었다. 슈가 일이 있다고, 나중에 자러 온다고 해서 먼저 잠들었었다. 그리고 시꺼먼 어둠 속에서─아마도 목이 말라─눈을 떴고…. 

 

"이, 일은 다 끝났나?" 

"─!!!" 

 

눈을 껌벅거리던 미카가 그렇게 묻자 슈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온갖 폭언을 다 쏟아내기 직전의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러나 아직도 눈물자국이 또렷한 미카의 얼굴을 보더니 숨을 아주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혼자 지내는 밤이라고 매번 이러지는 않을 테고…." 

"…." 

"말해 다오, 카게히라. 지금 너의 심경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응아아~? 내 얘기 같은 거, 한나또 재미없데이. 머가 궁금한데?" 

 

미카가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슈는 이마를 짚고 잠시 생각하다가, 질문을 바꿨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카게히라, 일단… 프랑스에 오게 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지?" 

"스승님 있는 데 간다니께 내는 마 좋았제." 

"막상 와 보니?" 

"응아… 비행기 안에서는, 쫌 낯설고 머가 먼지 모르긴 했어도… 그카고 외국인들 많아서 놀래긴 했어도… 거까지는 개안았데이. 앞뒤로 일본어도 마이 들렸꼬, 내려서도 마… 걍 가라는 대로 갔더니 스승님이 있드마." 

"그리고… 그 다음은?" 

 

미카가 입술을 깨물었다. 

 

"일본에서는 스승님이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말해도 마, 우리 스승님은 원래 공부 잘 하고 머리도 억수로 좋으니께… 빨리 배웠나보다 했는데, 막상 프랑스 사람하고 프랑스어로 얘기하는 거 들으니께… 꼭 낯선 사람 같았데이." 

 

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서부터 신중해져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카게히라, 내가 일본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면… 마치 네게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느냐?" 

"응아아아, 그런 거 아이다! 그, 그냥… 내는…." 

"응." 

 

슈는 최대한 침착한 눈빛으로 미카를 응시했다. 미카는 슈의 시선을 받으며 잠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마침내 머릿속으로 이야기가 정리되었는지 입을 열었다. 

 

"응아, 쫌 전까지 내를 애끼고 이뻐해 주던 사람도, 금방 차갑게 돌아서서 내를 버릴 수 있다는 기를 아니께…." 

"농, 아니, 잠…." 

"스, 스승님이 그런다는 거 아이다! 내도 안데이! 그치만 스승님, 내가 이 물설고 낯선 외국에 와서 갑자기 스승님 잃어묵고 혼자 길에서 헤매기라도 하믄, 내는 진짜 큰일난데이! 길바닥에 픽 쓰러져 죽어뿐다!" 

 

슈는 할 말을 잃었다. 

설마하니 그런 일까지야 벌어지겠냐마는─그리고 정말로 길바닥에 픽 쓰러져 죽을 정도의 사태까지 벌어지지는 않겠지마는, 그래도 프랑스에 첫발을 내린 순간부터 미카가 맛보고 지금까지 차츰 차올랐을 불안은 단순히 낯선 곳에 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어린 시절 생존의 위협을 겪었던 일은 아직도 미카의 영혼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던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경험은 미카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일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카게히라 미카가 자신이 가진 신앙심과 연모를 전부 바치고 있는─누가 뭐래도 이 부분만큼은 자신이 있었다─이츠키 슈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신은 한때 미카에게 볼 꼴 못 볼 꼴 다 보였다는 자각도 있으므로 이제 와서 무슨 모습을 보인다 해도 달라질 게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물론 지금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멋진 모습만을 보일 작정이지만! 

그런데, 설마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이유만으로 미카가 자신을 이렇게나 낯설어할 줄이야. 

 

"그래서 혹시, 방금 전까지 버림받는 꿈을 꾸었던 것이야?" 

"응아, 마… 비슷한 기다."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미카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밝은 방 안에서 슈와 마주하고 앉아 있으니 방금 전까지 어린애처럼 잔뜩 겁을 집어먹고 훌쩍훌쩍 울던 일이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알겠다. 그렇다면… 안타깝게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고르는 수밖에." 

"최선의 방법?" 

 

슈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옆에 자리를 잡고는, 눈을 감고 몇 마디 입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미카의 두 손을 잡고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Tu es mon ange, mon chaton, ma joie." 

"응아아?" 

"Si tu n'étais pas à mes côtés, je ne pourrais pas être là." 

"스, 스승님?" 

"Je t'aime pour toujours plus que tout." 

 

낯선 그 언어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평소보다도 더욱 뜨거운 눈동자와 달콤한 눈빛, 그리고 온기를 통해서. 

 

"Crois-moi, je ne te trahirai jamais." 

"으, 응아, 응아아아…."

"어떻게 느껴지느냐, 카게히라." 

 

겨우 슈의 입에서 흘러나온 알아들을 수 있는 말에 미카는 안도했다. 

 

"스, 스승님은 먼 말을 해도 멋지데이…? 알아듣지는 몬했지만." 

"아직도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내가 너를 소홀히 여기고, 돌봐 주지 않을 낯선 타인으로 여겨지느냐?" 

"아, 아이다…." 

 

미카가 녹아내린 설탕과자처럼 결국 슈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슈는 미카의 등을 토닥거리며 계속해서 다정하게 말했다. 

 

"네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금방 적응하기 힘든 낯선 환경에 내팽개쳐진 경험이 여러 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내가 조금 더 섬세하게 배려했어야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야. 카게히라,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 땅이 나를 받아들이고 숨 쉴 구멍을 주었듯, 네게도 분명히 그럴 터이니…." 

"…."

"카게히라?" 

 

슈의 품에 안긴 미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의아하게 여겨져 얼굴을 들여다보니 그야말로 이보다 더 안심할 수 없는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하고, 방금 전에도 얕게 잠들었다 몇 시간 자지 못하고 금세 깬 것을 보면 이제야 정말로 마음을 놓고 잠들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미카를 안아서 반듯하게 잘 눕히고 스스로도 그 옆으로 몸을 뉘었다.

 

***

 

 

그 후, 프랑스어를 어느 정도 익힌 미카가 이때 슈에게서 들은 말을 새삼 떠올려 보고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완전 딴 사람 아이가! 일본어로는 그런 말 해준 적 없으믄서!"하고 고함을 질렀던 것은 한참이나 나중의 이야기. 

 

 

 

 

 

 

 

Tu es mon ange, mon chaton, ma joie. 

Si tu n'étais pas à mes côtés, je ne pourrais pas être là. 

Je t'aime pour toujours plus que tout. 

Crois-moi, je ne te trahirai jamais.

 

나의 천사, 나의 아기고양이, 나의 기쁨. 

네가 없었다면 내가 이 자리에 있었을 일은 없었을 터. 

그 무엇보다도 너를 사랑하리, 영원히. 

믿어 다오, 내가 결코 너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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