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왕

카이진 / 최애가 동사무소에 가 준다면 난 죽어도 좋아

남자는 정말 최악의 존재다.

좋아했던 걸 쪽팔리게 하는 놈은 죽어야 한다.

덕질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는 트위터 3대 재난 문자 중 하나다. 이 트윗이 타임라인에 흘러 들어오면 ‘오늘도 누군가의 최애가 떠내려가는구나’라며 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 최애가 그 죽어야 하는 놈이 될 줄은. 세상에는 아직 안 터진 장르와 이미 터진 장르 두 가지밖에 없다는 말처럼, 반년 전, 내 최애가 KC컵 개회식 불꽃놀이만큼이나 거하게 터졌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묻지 마라. 생각만 해도 화병이 도지니까.

최애의 이름이 안 좋은 의미로 실시간 트렌드를 오르내릴 때, 나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여태까지 모은 포토 카드며 포스터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러고는 영혼 뺏긴 사람마냥 하루하루를 허무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도미노쵸에 사는 친구가 KC컵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개회식부터 폐막식까지 화려한 볼거리가 많으니까 재밌을 거라며.

“야구도 룰은 잘 몰라도 어쨌든 재밌잖아. 치킨이랑 맥주 먹고. 그런 거랑 똑같아. 그냥 이기는 팀이 우리 팀이야.”

언제까지고 (구)최애를 잃은 상실감에 허덕이며 지낼 수만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친구에게 거절하기도 미안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내가 앉았던 3열 중앙은 10배까지 플미가 뛴 좌석이었다. 친구는 나의 상처받은 오타쿠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그 귀한 좌석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예년 같았더라면 그렇게까지 비싸지진 않았을 거라고 한다. 그해는 유독 천정부지로 플미가가 치솟았다. 이유인 즉, 카이바 세토가 출전하기 때문이었다.

카이바 세토.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유명한 대기업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CEO.

이십 대에 스시버거, 아니, 수십억 원을 벌어들이는 남자.

듀얼리스트로서의 기량도 뛰어나다고 하나, 근 5년간 대회에 나온 적이 없었다. 오랜만의 복귀인 만큼 듀얼리스트들과 그의 팬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티켓팅이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곳에서 나는 실물 카이바 세토를 처음 보았다.

그의 얼굴이 대형 전광판에 비쳤을 때, 나는 나도 몰래 중얼거리고 말았다.

“얼굴 미쳤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늘 비담만 잡던 얼빠인 내가 그에게 반하는 것은 예정되어 있던 운명인지도 모른다. 혹은 듀얼리스트의 세계에 발을 집어넣게 하려는 친구의 큰 그림이었을지도 모르고.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나는 카이바 세토 최애가 되었다.

내 (현)최애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었기에 그만큼 다양한 팬덤이 있었다.

그의 사업가적 면모를 좋아하는 사람들, 카이바 랜드의 총괄 프로듀서를 좋아하는 사람들, 카리스마 듀얼리스트를 좋아하는 사람 등등.

나는 어느 쪽이냐면, 나조차 놀랍게도, 듀얼리스트 카이바 세토 파(派)였다.

KC컵 결승전을 직관했을 때, 압도적인 역량 차이로 도전자를 굴복시키던 그의 새파란 눈동자, 한여름의 바다처럼 뜨겁고 사나우며, 언뜻 비릿하게까지 느껴지는 열정적인 냉소가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검색 결과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한 달 후에는 도미노쵸에 원룸을 구했다. 출퇴근할 때마다 환승 2번에 편도 1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좋았다. 듀얼의 D도 모르던 나를 위해 친구가 덱 등록을 도와주었다. 그러면서 나도 나만의 덱을 만들게 되었다.

듀얼놀이하실? 나 이번에 새덱짰음ㅋㅋ

좋아ㅋ 퇴근하고 집으로 놀러와

듀얼놀이 어떰? 새덱들고감

올 기대할게ㅋ

듀얼놀이ㄱ?

ㅇㅋ 나도 새 덱 짰음

듀놀?

ㅇㅇ

ㄷㄴ?

편하게 대전할 듀얼 메이트를 만들려고 했던 거라면 대성공이었다. 어느새 나는 팩깡을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본론 시작. 빵빠레 크게 울리며 시작.

듀얼리스트로서의 카이바 세토를 덕질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인물이 있다.

스피어리움Ⅱ 개발자이자 듀얼 킹, 무토 유우기다.

지금은 게임 개발에 몰두하고 있지만, 듀얼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타이틀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왕.

그와 카이바의 듀얼을 유튜브로 본 적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노도와 같은 기세로 휘몰아치는 카이바와 달리, 무토 유우기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때를 노리다 완벽하게 숨통을 끊는 타입이었다. 특히 아이가미 선수와의 듀얼에서 자신의 함정 카드로 3체인을 걸었을 때는 내가 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카이바는 듀얼 킹의 명예를 얻기 위해 무토 유우기에게 도전했으나 그 빛나는 영광을 손에 넣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오래 덕질한 트친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카이바가 살벌하게 달려들었던 모양이다. 공석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를 편하게 대하는 것이 보이는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 바로 그게 세월씨피의 맛이죠^^

스피어리움 시리즈의 스폰서인 KC의 사장과 개발자. 카이바 세토가 인정한 유일한 라이벌. 심지어 둘이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고 동급생이기까지 했단다.

세월CP에 환장하는 부녀자, 즉, 나 같은 사람이 두 사람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극악무도한 알페스 운영자였던 나는 결국 듀얼리스트 알페서가 되었다. (구)최애와 함께 터뜨렸던 트위터 계정과 포스타입은 (현)최애 덕질 및 알페스 계정으로 되살아났다. 물론 이전 트윗과 게시물은 전부 삭제했다.

두 사람은 함께 지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떡밥도 많았다. 무심코 아아, 조르주, 이렇게까진 좀…… 하고 탄식할 만큼 차고 넘쳤다.

동급생이었던 데다,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라이벌이면서 동시에 친구고, 게임을 개발하고, 스폰서가 되고, 같이 테스트를 하고, 함께 차기작을 구상하고…….

이게 친구 사이면 나는 친구가 없다.

그야말로 편견이 지켜주는 사랑이었으나, 며칠 전, 도미노쵸에서도 동성 파트너십 제도가 인정되면서 두 사람 사이를 우정으로 포장할 수도 없게 되었다. 승인이 발표되었을 때 타임라인은 축제 분위기로 불타올랐다.

@: 파트너십 제도 승인? 어째서일까?ㅎㅎ

@: 사장이 말아주는 kiom(카이진의 써방 용어다)를 이길 수 없다

@: kiom의 악마, kiom의 권위자, kiom의 대마왕, kiom의 지배자, kiom의 제왕, kiom의 대명사

@: 이건 분명히 결혼의 복선이다

@: 이렇게까지 그와의 사이를 법적으로 확실히 묶어두려는 사장이 무섭다

그날은 평일이었음에도 새벽 3시까지 탐라가 멈추지 않았다. 물론 나도 그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무토 유우기의 공식 계정에 “도미노쵸의 동성 파트너십 제도 승인을 축하합니다”라며 무지개색 하트까지 달린 트윗이 올라온 이후로는 빠르게 리젠되는 탐라가 무서워서 트위터를 켜기가 두려워질 정도였다.

뇌피셜 아니냐고?

12564명의 팔로워를 걸고 단언컨대, 절대 아니다.

카이바 세토를 덕질하면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은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고, 흥미가 없는 것에는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천성이 독선가였다. 제멋대로에 고집불통. 천상천하 유아독존. 게다가 눈에 거슬리는 것은 곧바로 치워버릴 수 있는 권력도 재력도 충분히 갖추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그가 도미노쵸에 동성 파트너십을 인정한 것은 그가 동성과의 파트너 사이를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카이바 세토라는 남자는 이토록 단순하고 간결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최애가 사고를 쳐버렸다.

카이바 세토가 수많은 기자 앞에서 당당하게 왼손 약지를 내보였다.

백금으로 된 반지에 박힌 블루 다이아몬드는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반짝거렸다. 기자 회견이라면서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는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자들을 모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결혼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인 모양이었다. 제아무리 굴지의 대기업 사장이라곤 하지만, 역시 카이바 세토도 귀엽고 평범한 남자아이였다.

아, 파트너는 물론 짐작대로다.

그의 옆에서 필사적으로 부끄러움을 참으며 반쯤 강제로 왼손을 들고 있는, 그 네 번째 손가락에 카이바 세토가 낀 것과 똑같은 반지를 하고 있는, 무토 유우기 씨.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에 나는 충동적으로 반차를 썼다. 집까지 너무 멀었기에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다. 뭘 주문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가장 근처 빈자리에 앉아서 뉴스에 실린 혼인 신고서를 보았다. 보고 또 보고 또 봤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읽든 어떻게 읽든, 기재된 글자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도미노쵸 파트너십 증명서

카이바 세토 · 무토 유우기

상기 두 명은, 도미노쵸 남녀평등 및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진하는 조례

제10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해,

파트너십의 관계임을 증명한다.

난 카이진을 좋아하긴 하지만, 진짜 사장을 보면 내 어중간함에 신물이 난다.

남자란 정말로 최악의 존재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함께였던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법을 바꾸는 남자는 더더욱.

나는 이 킹받는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트위터를 켜고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 카떤남자 정말 최악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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