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형제[兄弟] (23.01.01 재업)
If. 이치고와 토시로가 어릴 적에 만났다면?/쿠로사키&히츠가야 과거 날조+소울 소사이어티 편 리메이크
이치마루 사투리 주의.. 수도권 토박이라 온갖 사투리 다 섞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최대한 동남 방언 찾아봤지만 장렬히 전사 OTL
약 50000자 주의.
퇴고 完
주황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가진 아이는 눈을 말그랗게 떴다. 괴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눈앞을 막아서며 내리치는 주먹을 막아냈다. 아이는 멍하니 제 위에 드리운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주먹을 막아낸 검은 믿기지 않게 얇았지만, 이상하게도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검을 들고 있는 사람은- 지난 겨울에 세상을 가득 메웠던 눈같이 새하얀 머리카락과 사진으로만 봤던 깊은 바다처럼 옥푸른 눈의 소년. 새까만 기모노에 하얀 하오리를 입고 있는 소년은 아이보다 네다섯살 정도 더 많아 보였다. 죽을 뻔했다는 상황 때문일까? 아니면, 갑자기 나타나 시선을 앗아간 이 형 때문일까? 가슴 안쪽이 빠르게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위험하다. 저런 것들에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되지.”
높은 듯 낮은 미성이 제 바로 위에서 울렸다. 아이는 조금 뒤늦게 자신이 지금 형에게 들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이 막고 있던 괴물의 커다란 주먹이 그대로 저가 있던 바로 그 곳에 꽂혀 있었다.
아이를 한손으로 들고, 형은 다른 한쪽 손으로 들고 있던 검을 단조롭게 휘둘렀다. 끝에 사슬과 초승달 모양의 날이 달린- 멋있게 생긴 검. 형이 그 검으로 궤적을 그음과 동시에 앞에서 불어온 차가운 공기가 오한이 들게 만들었다. 깜짝 놀라 눈을 꾹 감았다가 뜨니 순식간에 얼어붙은 괴물이 깨져서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와, 대단해. 아이의 순수한 감탄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형은 사뿐히 땅에 내려오며 어느새 사슬이 사라진 검을 등 뒤의 검집에 집어넣었다. 아이를 고이 내려놓고- 형은 말 없이 아이의 상태를 대강 확인해주고는 어디론가 가려는 듯 등을 돌려 걸어갔다. 돌아서기 직전에 쓰다듬어준 머리에 남은 온기가 어쩐지 그대로 형을 놓치면 안된다 말하는 것 같아, 아이는 형의 등에 대고 다급히 외쳤다.
“형아!”
멈칫, 빨라지던 고아한 걸음걸이가 멈췄다. 아이는 화색을 띄며 후다닥 달려가 형의 다리를 꼭 붙들었다. 차갑게 얼어있던 얼굴이 당황한 듯 애매한 표정을 띄었고, 흐릿해져 가던 존재감이 확 커졌다. 아- 잘 잡았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방긋 웃었다.
제 다리에 달라붙은 아이를 살짝 커진 눈으로 내려다 본 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활짝 웃는 아이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휴대전화를 꺼내 딱딱딱 두드리며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는 한쪽 무릎을 꿇어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똑바로 보는 푸른 눈이 마치 엄마의 목걸이에 달린 보석처럼 반짝이고 아름다웠다.
아이가 제 눈에 비치이는 반짝임에 더욱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는 것과는 달리- 아이의 눈에 확실히 비치는 저를 확인한 형은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보이면서 다가간 거였구나, 너.”
“응! 아저씨가 되게 아파했어! 그래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와아~하고 커졌어!”
“하필 그때, 보이는 녀석이. …위험했다고.”
“형아가 구해줬잖아?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아저씨는 어떻게 된 거야?”
제가 처했던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 해맑은 웃음과 질문에 형은 다시 한번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결국 곤란한 듯 미세하게 떨리던 청록빛 눈동자는 정이 많았기에, 혼자로 보이는 당돌한 아이를 담아놓고 무시할 만큼 매정하지 못했기에. 잠시 모습을 감췄다가 나타난 푸른 눈이 체념을 띄었다.
“…그 혼백은 소울 소사이어티에 갔다.”
“소울 소사이어티?”
“…”
아이의 의문 가득한 갈색 눈에 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했다. 소울 소사이어티, 현세의 아이는 모를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지만- 이 단어를 말해주는 것 하나도 '현세에 몰래 나오는 대신 불필요한 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스스로 정한 규칙을 깨버리는 행위였으니.
…영력이 이토록 강하니 언젠가는 우리와 엮였겠지. 그때 쓸데없는 곤란을 안 겪게 하려면.
형은 자신의 행위를 대강 합리화하며 복잡한 제 머릿속의 혼란을 능숙하게 가렸다. 굳이 혼란을 티 내서 쓸데없는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대신, 덤덤한 얼굴로 아이의 어깨를 약하게 잡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길게 뻗은 새하얀 속눈썹이 얇게 흔들리는 바다 빛 눈동자에 옅은 염려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가, 난… 항상 이곳에 있지 않아. 언제나 지켜줄 수 없어. 위험을 인지하도록 하거라.”
“응…?”
“…어린 아이를 붙들고 이런 말 해봤자 소용 없나.”
이제는 익숙해진 한숨 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묵직한 하얀색 하오리가 몸과 머리를 감쌌다. 형이 아이를 안아 들자 아이의 얼굴이 평소와 비교해 높아진 감각에 즐거움으로 가득 찬다. 머리를 가린 하오리 바깥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 아이가 위쪽의 풍경을 반기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무엇을 찾는 건지, 아니면 어디로 가려는 건지. 형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형아, 우리 어디 가?”
“네 집에. 혹시 어머니나 아버지가 근처에 있나?”
“아니! 집에서 아저씨 봐서 나왔어!”
“과연. 네 집이 어디지?”
“우음, 작은 병원~”
“…위에서 찾아야겠군.”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이 빛나고- 아이를 다시 한번 안정적으로 안아 든 형은 앞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허공을 밟고, 점차 높아지는 시야에 안 그래도 즐거워 보이던 아이의 갈색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인다. 형은 담담한 얼굴로 제게 치대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병원, 병원. 아이는 귀 바로 옆에서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마을이 한눈에 다 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서 마을을 살피던 형이 무언가 발견했는지 중얼거림을 멈췄다. 형은 아이의 등을 살짝 두드리고는 어딘가를 가리켜 보여줬다.
“저긴가? 쿠로사키 의원.”
“쿠로사키? 웅, 우리 집이야! 형아 여기서 우리 집이 보여??”
“뭐 그렇지…. 자, 네 집으로 돌아가자.”
아이의 등을 토닥여 준 형은 천천히 걸어 집 앞으로 내려갔다. 어느덧 아이의 눈으로도 집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지상에 가까워졌을 때, 형에게서 나는 차가운 겨울 향을 만끽하며 나른한 얼굴을 하던 아이가 뒤늦게 놀란 얼굴로 외치듯 물었다.
“아!! 형아, 이름이 뭐야? 형아가 나 구해줬는데 까먹고 안 물어봤어!”
“…히츠가야 토시로. 사신이다.”
“사신…? 사신이 뭐야?”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그라니 커다란 갈색 눈에 어린 순수한 의구심이 눈에 띄었다.
…사신이 무엇이냐, 라.
어린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순수한 질문에. 그리고 어린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본질을 꿰뚫을 대답이 필요함에. 형, 히츠가야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느리게 입술을 뗐다. 이 정도 나이면 아직 죽음에 대해 몰라도 될 테고. 아이의 시선에서 공감될 만한 업무라면-
“다른 사람들 눈엔 안 보이는 사람들… 보이지, 너.”
“응!”
“그 사람들이 아까 봤던 괴물처럼 안 되게 돕는 사람… 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렇구나, 좋은 사람이구나!”
“그렇게 봐주면 고맙고. 넌?”
아이의 해맑은 웃음이 의아함으로 멎었다. 나? 하고 저를 가리키며 크게 뜬 눈동자를 데굴 굴린다. 누가 봐도 되돌아온 질문이 담은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동그란 얼굴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뭐, 아이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함에도 이해와 별개로 드는 허탈감은 어쩔 수 없는지라- 히츠가야는 이 정도면 습관이 분명한 한숨을 짧게 머금었다.
“받은 게 있다면 주는 게 있어야 하는 거야. 내 이름은 말해줬으니까, 네 이름.”
“아, 내 이름! 나, 쿠로사키 이치고! 유치원생이야!”
“…날 따라 하는 건가?”
“유치원생은 말이지, 유치원에 다녀!”
“그런가.”
표정없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깃든다. 아이, 이치고는 같이 있으면서 처음 보는 것 같은 히츠가야의 미소에 말문을 잃고 그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히츠가야는 그런 이치고의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내렸다.
히츠가야가 이치고의 집 앞에 내려오자 기다리고 있던 엄마가 다급하게 달려 나왔다. 저를 보고 눈을 크게 뜨는 여인을 보곤, 히츠가야는 이치고를 감쌌던 하오리 채로 넘겨주며 입을 열었다.
“당신도 내가 보이는 모양이군.”
“…응, 보여.”
“모계 유전인가. 아이가 호로-, …아니, 괴물에게 공격당할 뻔했다. 영이 보이는 아이는 신경 써 주도록.”
“당연히 그래야지. 안 그래도 사라져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고마워. 작은 사신님은 이름이 뭐야?”
“…사신을- 알고 있군.”
엄마와의 대화에 차마 끼어들지 못하는 갈색 눈이 힐끔 보였다. 데구루루 구르며 이쪽을 한 번, 엄마를 한 번. 왔다 갔다 바쁘게 움직이는 눈을 본 차가운 얼굴에 다시 한번 부서질 듯 약하고 미세한 미소가 떠올랐다. 히츠가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히츠가야 토시로다.”
“토시로 군이구나! 이치고를 구해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괜찮다면, 식사 대접이라도 받아줄래? 은인을 그냥 보낼 수는 없으니까.”
“별로-”
무미건조한 얼굴로 대답하던 히츠가야는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멈췄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눈을 깜박이는 무의식적인 행동까지도 멈췄다가, 토시로 군? 이라는 여인의 부름에 뒤늦게 놀라며 과하게 큰 반응을 보였다. 청록빛 바다와 녹음의 눈이 당황으로 얼룩져 이전까지의 담담한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크게 흔들렸다.
“왜 그래? 뭐 있어?”
“…아니, 아무것도.”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급한 눈빛이 무언가 확인한 듯 다시 잔잔해졌다. 일그러졌던 얼굴이 담담하게 변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걱정이 가득한 두 모자(母子)의 눈을 바라보다가 히츠가야는 불쑥 입을 열었다.
“정 대접을 하고 싶다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나.”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뭔데?”
“집에선, …아니. 당신의 집에 있는 저 남자에겐.”
청록빛 차가운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껏 위로 올린 저 남자. 본래 지녔던 영력을 다 잃고는, 저를 보지도 못하면서 태연하게 웃고 있는 저 사람.
몇 년 전, 그가 아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한 마디 안 남기고 행방을 감췄던 제 상관(上官)에겐.
“내 이름이 들리는 일 없게 해줘.”
“…잇신 씨랑 알던 사이야?”
“그것까진 말할 필요를 못 느끼겠군. 아이- 이치고에게도 부탁한다.”
“나?”
갑작스레 들려온 제 이름에 귀를 쫑긋하고 있던 이치고가 손을 들었다. 이치고의 머리를 감싼 하오리를 풀어낸 여인의 눈이 등 뒤의 숫자를 확인하곤 크게 변한다.
―하오리의 의미도 알고 있군. 이 사람이 이유였나.
히츠가야는 여인이 떠올릴 심정과는 다소 거리가 먼 생각을 떠올렸다. 여인이 떨리는 손으로 건넨 새하얀 하오리를 다시 받아 입으며, 히츠가야는 작은 이치고와 눈을 마주했다.
“우리가 만난 거, 비밀이야.”
“헉…! 알았어!”
“내 외모도 비밀. 말하면 무서운 일이 생길 거야.”
“무, 무서운 일??”
“응. 그러니까 비밀.”
“알겠어! 비밀 지킬게!”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이치고의 머리카락을 짓궂게 헝클어뜨리고, 히츠가야는 여인과 다시 눈을 맞췄다. 놀란 기색은 어디로 가고 마찬가지로 비장하게 끄덕이는 똑같은 얼굴에, 히츠가야는 새 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등을 돌렸다.
“그럼, 이만.”
“형아, 또 와!”
“또 만나자, 토시로 군.”
히츠가야는 따스하게 쏟아지는 배웅에도 대답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곳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웅얼거리며 엄마를 꼭 껴안은 이치고에게 여인은 속삭였다.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
『“조심해라.”
“왜?”
“보통은 이 마을의 담당 사신이 있으니, 네가 호로를 만날 일은 없을 테지만- 혹시 몰라. 이곳의 평사신급 사신보다 강한 놈이 나타난다면…”
청록빛 아름다운 눈동자가 살짝 시선을 떨구었다. 아이는 어느덧 형의 그런 얼굴에 익숙해져 있었다.
걱정하면서도, 지켜줄 수 없을 때의 표정에. 언제나 함께할 수 없으매 가지는 미안(未安)에.
“그냥 도망쳐. 세상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니까.”
걱정이 가득 담긴 그 얼굴에, 아이는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멍하니 강둑에 앉아있던 소년은 익숙한 기척에 힐끔 시선을 돌렸다.
한겨울의 눈송이와 같은 새하얀 머리카락, 깊은 바다의 청록빛 눈. 자신은 몇 년 새에 이렇게나 자랐는데 자그마한 변화 하나 없어서 이제는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 히츠가야 토시로.
잊을 때 즈음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그의 일정은 최근에야 대강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에 며칠 전에도 그런 이유로 곧 형이 올 것 같다고 들떴던 소년- 쿠로사키 이치고는 쓰게 웃었다.
어린 아이의 얼굴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그 쓰디씀에, 히츠가야는 미세하게 새하얀 눈썹을 모았다.
“…이치고,”
“형아.”
“…”
“엄마가, …엄마가.”
“알아.”
히츠가야는 저와 거의 비슷한 체구의 이치고를 꼭 안아주었다. 그의 몸에 어린 겨울의 향이 언제나 그렇듯 물씬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차갑고 견고한 느낌에, 갈색 눈에 어린 슬픔이 물처럼 차올라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출렁거렸다.
새하얗고 섬세한 손이 뒤통수를 토닥였다. 괜찮아, 높은 듯 낮은 목소리가 읊조렸다. 상처받은 아이를 위로했다.
어릴 적에는 몰랐던 두려움이 생생했다. 저를 달래주는 사신이 그것의 제대로 된 위험을 보기도 전에 구해주었기 때문에, 엄마가 언제나 지켜줬기 때문에 몰랐던 공포가 아이의 행동을 유도했다.
이치고는 히츠가야의 하얀 옷자락을 움켜쥐고 담담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담담한 얼굴 속, 푸른 눈동자가 따스한 빛을 띄고 있었다.
“어떡해, 형아? 나, 나. 가족에게서 엄마를. 아빠랑, 카린이랑, 유즈에게서. 엄마를… ”
“아니야.”
“하지만, 형아.”
“네 어머니는, 널 지킨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응…”
단호한 목소리를 부정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 아래로 흘러넘칠 것 같은 눈물을 꾹 눌러 참다가, 이치고는 어느덧 수마에 빠져들었다.
―잠도 얼마 자지 못한 건가, 히츠가야는 속으로 생각하고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이따금 있는 휴가를 이곳에서 쓰다가 할머니 댁으로 가는 것이 요 몇 년 간 일상이 되었기에. 시바 잇신을 지켜보고, 이치고와 가볍게 놀아주고, 수상한 가게 하나를 살펴보면서 이치고의 집은 익숙한 공간이 된 지 오래였다.
건물 1층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 아이를 신경 써서 올려둔 히츠가야는 천천히 그 집을 빠져나왔다. 시바 잇신- 아니, 쿠로사키 잇신은 저를 보지 못하니. 별로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어, 오빠다.”
이치고와 마찬가지로 제법 괜찮은 영력을 가진 동생에겐 걸렸지만, 아이 또한 제가 비밀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히츠가야는 울음을 참아내던 얼굴이 저를 보고 동그라니 뜨이는 것을 보고는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며 제가 가야 할 길로 나아갔다. 이치고를 확인하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똘똘한 아이이니,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아도 될 터였다.
…쿠로가키 마사키를 죽인 범인은- 그랜드 피셔. 모든 사신이 그 영압의 소재를 보고받는, 기술 개발국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 호로.
히츠가야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랜드 피셔의 영압은 이미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다른 지역으로 도망쳤겠지. 찾아서 없애버리고 싶지만, 아콘과의 계약은 카라쿠라 마을에서만 있는 것이었으므로 이 마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벗어나면 강제 귀환하게 되는 시스템이니까. 혹시라도 억지로 시스템을 꺼버리고 이동하면- 기술 개발국에 들키고, 10번대의 사신들이 알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
결국은- 안 하는 거지. 걱정시키기 싫어서. 다시 오지 못하는 것이 싫어서. 혹시 모를 일임에도, 가능성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고개를 떨군 히츠가야는 점점 속도를 늦추다가 완전히 걸음을 멈췄다. 떨리는 눈으로 뒤돌아본 집은 이전과 변함없이 따스한 빛을 밝히고 있는 채라- 히츠가야는 입술을 꾹 다물며 청옥빛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미안해, 마사키 씨.”
부디, 얼른 낮은 번호의 루콘가에 들어갈 수 있기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친구의 죽음에도 제 이해를 따졌다는 죄악감에― 히츠가야는 간절히 소망했다.
❅
사신. 그 존재는 어려서부터 익숙한 존재였다.
청년은 제가 아는 유일한- 아니, 유일했던 사신을 떠올렸다. 겨울철 나무 위에 아름답게 피어난 눈꽃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산호초가 드리운 깊은 바다처럼 아름다운 청록빛 눈동자를.
그리고 제 눈앞의 사신을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자그마한 체구에 성격이 상당히 드세 보이는 사신.
형은 제게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이상한 마법 같은 걸 걸고선, 당당하게 소리치는 그 사신을.
“네가 갈 곳은 지옥이 아니라, 소울 소사이어티다!”
―형은 딱 한 번 말해줬던 그쪽 세계의 상식을 자연스레 입에 담는 그 사신을.
쿠로사키 이치고는 불만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형과 워낙 가까이 지내다 보니 이 정도 압력엔 익숙했다.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인지 사신은 눈을 크게 떴지만, 이치고는 그 모습을 무시했다.
“알았어, 네가 말하는 거 믿을게. 믿을 테니까 이것 좀 풀어 봐.”
“…그렇게 부정해놓고, 뭘 또 갑자기 믿겠다는 거냐.”
“네녀석이 내가 아는 사신과는 많이 달라서 안 믿었는데, 소울 소사이어티라고 말하는 거 보니까 또 믿음이 가네. 이것 좀 풀어.”
“또 어떻게 방해가 될지 모르는데, 풀어줄 것 같나. 시간이 지나면 풀릴 테니 움직일 일 있으면 나중에 움직여라.”
“거참 답답하네…”
“뭐?!”
이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신을 살폈다.
형의 외모는… 비밀이라고 했으니, 형이 다른 사신들과 달리 특이한 외모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들키면 혼나겠지만, 조그마한 건 비슷한 것 같고. 사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은 느껴지는 감각이 형이 등 뒤에 매고 다니던 검과 비슷했다. 이것도 통과.
그럼 다른 것은, 영혼의 이마를 칼자루 끝으로 누른 것. 이상한 마술을 쓴 것. 그리고, 형이 걸치고 있던 하얀 하오리를 입지 않은 것.
형은 자신을 비밀이라고 했었다. 자연스럽게 물어보려면, 일단 저쪽 세상에 대해 더 알 필요가 있었다.
“알았다, 알았어. 그럼 뭘 했는지나 말해 봐.”
“…네놈, 은근히 명령조구나…?”
“됐잖아! 나도 별로 방해하고 싶지는 않거든.”
“그래, 뭐. 그 마음은 갸륵하니 한 번만 넘어가마.”
사신은 정말 재수 없는 말투로 그리 말한 후, 단조로운 목소리로 그림까지 그려가며 저가 한 일과 이 세상의 상식에 대해 설명했다. 알아먹기 힘든 그림이 고난을 불러일으켰지만, 대충 어떻게든 이해한 이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 형이 이따금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속삭이듯 말해주던 것들의 기본 같은 느낌이라 가능한 이해였다.
설명을 다 마친 사신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더 궁금한 것이 있느냐 물었다. 지금이다, 이치고는 훌륭하게 타이밍을 만들어낸 제게 속으로 칭찬을 한 바가지 날리며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괴었다. 이것만 떠올리고 있던 것처럼 보이면 안되니까- 어느 정도 시간을 끈 다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희, 그 까만 옷 위에 흰 하오리를 걸친 건 뭐야? 그것도 사신의 옷인가?”
“…뭐?”
“왜, 등에 숫자가 쓰여 있는 하얀 하오리.”
사신의 안색이 굳었다. 못 물을 거라도 물어본 건가. 그렇지만, 형은 매번 입고 다니던데? 이치고는 느리게 제 머리를 굴렸다. 저 반응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 들키면 안되는 범죄자의 것이라든가- 아니면, 눈앞의 이 사신은 차마 입에 담기도 꺼리는 고위직의 것이라든가. 미안하지만 형이 은은히 내보이던 권위 같은 것은 없는 것 같았으니.
이치고가 가능성을 더 찾아보는 그 새에 굳었던 안색을 풀고 평정을 되찾은 사신이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얀 하오리는- 지배의 상징. 13개로 나뉘어있는 사신의 부대에서, 가장 정점에 위치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의복.”
“…!”
“각 번대의 대장만이 걸칠 수 있는 그 강함의 증표다. 네놈이 대장 하오리를 어떻게 알지? 우연히 현세에 내려온 대장님 중 한 분을 뵙기라도 한 건가?”
대장, 강함의 증표. 이치고는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그 커다란 호로를 지워버리던 형의 모습을 떠올렸다. 10년도 더 된 옛날이지만 어제 일처럼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너무나도 강하고,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차갑던- 지금껏 달라지지 않은 그 모습이.
뭔가가 추락하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눈앞의 사신에게 형에 대해 자세히 말하면 안될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의문을 지금 풀면 안될 것 같았다. 먼 옛날 형을 붙잡았을 때의 그 감각이 십수 년 만에 다시금 살아났다. 이건, 지금 말하면 안 돼.
이치고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꾹 다물었다. 이상함을 느꼈는지 사신이 추궁하려는 듯 입을 떼어냈다. 이치고가 긴장해 입술을 깨문 그 순간- 쾅, 소리와 함께 여동생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유즈.
이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를 꽉 묶은 것을 힘으로 끊어냈다. 사신이 있을 수 없는 일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뭐라 중얼거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이치고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유즈를 붙잡은 거대한 괴물- 호로 뿐이었고, 귀에 들어오는 것은 유즈의 비명 뿐이었다.
사신은 호로를 보고 빠르게 검을 꺼냈다. 하지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아니면 약한 편이었는지 준비한 것이 무색하게도 금세 나가떨어졌다. 형이 이럴 땐 도망치랬는데. 하지만 유즈가. 카린이. 아버지가.
나는, 지키는(護) 사람인데.
이치고가 그 무엇도 선택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그때, 쓰러졌던 사신이 비틀거리며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딱 하나 방도가 있다며. 위험한 일이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사신이 되어 보겠느냐고 물었다.
쿠로사키 이치고(一護)는 대답했다. 지킬 수 있다면,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칼을 줘, 사신! 네 생각대로 하자!”
“사신이 아니라… 쿠치키 루키아다!”
❅
『“아까 분명, 대장이라고 했지…”
“…”
“대답하지 않는 거냐? 됐어. 루키아에게 분명히 들었다고. 하얀 하오리를 걸칠 수 있는, 사신들의 우두머리들에 대해.”
“…뭐라…?”
“이치고, 너 무슨 소리를-”
“루키아를 끌고 가려고 하기 전에, 하나만 묻자.”
쿠로사키 이치고의 갈색 눈이 번뜩였다. 당황한 얼굴의 루키아와 경계하는 두 남자가 보였다. 그중 한 남자는 분명히 저 붉은 머리칼의 남자로부터 대장이라고 불렸던 등 뒤에 숫자가 그려진 그 하오리를 입을 수 있는 존재. 형과 같은 직위에 있는 존재- 즉, 형에 대해 알고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
이치고는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루키아와 처음 만났을 때는 물으면 안된다고 크게 울리던 경종이 이번엔 정반대의 이유로 머리를 쳤다.
―지금이다. 이번엔 물어야 해.
바람결에 흔들리면 올올이 흩어지는 눈꽃의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바다와 녹음의 청록빛 푸른 보석 같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여린 몸을 감싼 검은 사패장을, 그 위를 덮은 왠지 모르게 무거운 하얀색 하오리를, 등 뒤에 매둔 십자의 코등이와 보랏빛 츠카마키를 한 참백도를 떠올렸다. 그 모든 것이 이루는 아름다운 존재를 떠올렸다.
15년 인생을 통틀어 가장 신비로운 존재의 비밀을, 행여 들킬세라 단 한 번도 제대로 불러본 적 없던 그 이름을. 이치고는 마침내 입에 담았다.
“너, 히츠가야 토시로를 알고 있나?”
“…!!!”
루키아의 얼굴이 변했다.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너, 하고 으르렁거리며 참백도를 들어 올렸다.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작게 입을 벌렸다가 다물면서 빨간 머리를 막고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방금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긴장된 분위기에 이치고는 놓칠 뻔한 자신의 참백도를 다시 꽉 쥐었다.
왜 이런 반응이지, 형의 이름일 뿐인데. 대장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갈색 눈에 분명한 의문이 깃들었다.
“이, 이치고.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왜, 형에게 더 무슨 비밀이라도 있어? 형이 입은 하얀 하오리가 대장의 증표라며. 그래서 같은 대장이라는 저놈에게 물은 건데-, !!”
[ 박도 1, 새(塞) ]
이치고는 그제야 눈앞까지 다가온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를 발견했다. 급하게 뒤로 물러났지만, 루키아가 첫 만남 때 걸었던 박도를 당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제길, 이거 놔! 풀려고 애써봤지만 루키아 때와는 다르게 티끌만큼도 움직일 수 없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차갑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츠가야 대장에겐 미안하게 되었군.”
“…뭐…?”
“루키아를 끌고 가려고 하기 전에 묻겠다고 했던가. 히츠가야 대장의 얼굴을 봐서 그것 하나에만 답해주도록 하마.”
목 아래, 가슴 위. 쇄골 가운데를 두 손가락으로 겨누며,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느리게 말했다.
“호정 13대 역대 최연소 만해 습득자. 10번대의 대장이며 빙설계 최강 참백도의 주인, 히츠가야 토시로.”
“!”
“그를 모르는 사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 파도 4, 백뢰(白雷) ] 』
「긴급 경보, 긴급 경보! 정령정 내에 침입자 있음! 각 부대는 수호 배치에 임해 주십시오!」
대수회의가 끝나고 모든 대장들이 빠져나간 후에도 자리에 남아있던 소년은 깊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높게 올린 새하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고, 깊은 바다 빛 눈동자엔 걱정을 한가득 쌓았다. 희미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영압이라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었다. 주황색 머리카락의 여화라니, 마지막 경종이라니.
무슨 생각이야, 이치고. 무슨 속셈이냐, 이치마루-
못 만난 새에 별 짓을 다 하는 동생의 이름을, 수상한 대화를 나눈 3번대 대장의 이름을. 속으로 부르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히츠가야는 문득 느껴진 기척에 움직임을 멈췄다. 새까만 머리카락, 그 위를 장식한 귀족의 장신구. 고고한 6번대 대장- 쿠치키 뱌쿠야. 분명 나가는 것을 봤는데, 어느 틈에.
차가운 낯이 경계로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냐, 쿠치키.”
“히츠가야 대장. 해둘 말이 있다.”
“뭔데.”
“…일단, 사과하지. 경의 동생이 경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었으니.”
“……”
“그 건에 대해서는 보고하지 않았다. 경에게 쓸데없는 책임이 돌아가면 안되리라 판단했기에.”
히츠가야는 뱌쿠야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점차 아려오는 제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 사고뭉치가. 쿠치키 루키아도 아니고, 쿠치키 뱌쿠야에게 저에 대해 직접 물은 모양이지. 어디서 나온 대담함이야.
히츠가야는 답답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쿠치키와는 업무상의 용건을 빼면 제대로 대화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동생이 여화이자 사신 대행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뱌쿠야 개인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귀족의 생리에 대해서는 얼추 알기에, 히츠가야는 제 미간에 상당히 두꺼운 금을 그었다.
―만약 그 아이가 이쪽의 일에 휘말린다면. 난-
히츠가야는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만일의 사태에, 제가 해야 하는 일을 고려하고 각오했다. 히츠가야는 떨릴 것 같은 목소리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평정을 가장했다.
“…녀석이 네게 직접 말했나?”
“내가 대장이라는 걸 알아차리더니 경에 관해 묻더군.”
“하…. 그래서.”
“사과는 해두었다만, 명령대로 쇄결과 백수를 파괴했다.”
“그건 보고로 들었어. 그래서.”
“그리고 지금의 여화, 경의 동생이지. 어찌 사신의 힘을 되찾았는가는 모르겠지만.”
깊게 가라앉은 새파란 눈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검은 눈을 차갑게 응시한다. 아직 작은 몸으로는 다 가두지 못한 겨울의 한기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뱌쿠야는 저도 모르게 떨려오는 몸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한겨울, 얼음으로 뒤덮인 공간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신체의 한계 상 아직 이렇게 힘을 낼 수는 없을 텐데- 뱌쿠야는 검을 쥐지 않기 위해 자연스레 뒷짐을 지었다.
한편, 히츠가야는 그런 기온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뱌쿠야가 한기에 영향받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세 번째로 같은 말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
평소 높으면서도 낮던 목소리가 완전히 낮게 내리깔렸다. 청록빛 눈동자 속에는 감추지 않은 분노의 열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가뜩이나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 죽겠는데, 굳이 지금. 꼭 해야 하는 말도 아닌 것을. 대수 회의가 끝나고 남은 저를 기다리면서까지-
협박인가.
뱌쿠야는 아이의 생각을 읽은 듯 그 집요한 시선을 피했다. 협박-이라고 추측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한들 20년을 대장 직에서 보냈으니, 어지간한 것은 협박과 약점으로 취급하는 귀족들의 생리에도 밝을 터였고. 제게는 그런 생각이 일절 없으며 오히려 자신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해봤자 신뢰받지 못할 것은 뻔했다.
뱌쿠야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차디찬 한기에 보이지도 않는 입김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협박은 아니네. 그저,”
“그저, 뭐.”
“다음에 만나면 봐주지 않겠다고 미리 알리러 온 거네.”
“……”
“저번엔 경의 동생이니 목숨을 붙여놨네만, 여화로서 소울 소사이어티에 쳐들어온 적을 봐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그 인간의 나이로 미뤄보면- 별로 긴 인연은 아니겠지. 경의 긍지를 훼손할 정은 잘 정리하도록 하게. 그 인간은 이 쿠치키 뱌쿠야가 정리해줄 테니.”
그래서, 이치고를 죽이겠다고.
새하얀 눈썹이 한데 모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원인 모를 오지랖을 꿰뚫듯 보았다. 굳이 이런 걸 직접 말할 이유는, 답지도 않게 말을 늘이는 이유는. 사적인 대화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정도로 친분 없는 저를 이렇듯 배려해주는 이유는-
평소대로라면 이렇게 먼저 말할 때는 목적부터 말하고 근거와 추론 단계를 밟아 설득, 혹은 통보할 위인이었다. 정리가 되지 않은 생각은 말하는 편이 아니었다. 적어도 업무 중의 쿠치키 뱌쿠야는 그런 인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없는 서두로 시작해 근거를 느리게 내뱉는다. 분명- 정리되지 않은 생각. 본인도 원인을 모르는 결심.
그렇다면, 어째서일까. 쿠치키 뱌쿠야는 '동생'이라는 단어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이치고가 들어온 이유는, 아마도 쿠치키 루키아. 뱌쿠야의 동생. 그녀의 처형을 막기 위해서. 죽을 위기의 동생…
뜬금없이 튀어나온 '긍지' 또한 수상스럽다. 귀족인 그가 이쪽의 긍지가 훼손되었다 여길만한 일은- 시바 잇신의 실종 뿐이고. 그와 이치고의 혈연을 알아차릴 만한 방도는, 그가 본 것은. 쿠로사키 이치고의 얼굴은 시바 카이엔과-
어렴푸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동시에 합당한 분노가 차올라, 히츠가야는 최대한 격해지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반복했다. 배려가 아니다. 이입이자 모욕이다. 아무리 신체가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산 세월이 50을 넘은 만큼 심리 상태를 아이로 볼 수는 없는데도. 자신의 직무 수행 기간과 정신적인 나이를 깡그리 무시하는- 모욕이었다.
분노로 어둡게 끓어오르는 청록빛 눈동자가 변화 없이 담담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쿠치키 루키아가 죽기 직전인 것을, 내 동생이 자칫 잡혔다간 죽기 직전인 것에 대입이라도 했나.”
“…”
“혹은, 그 아이가 그의 아들임을 알고 내가 그 아이를 통해 그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라도 한 건가. 그게 날 아이의 몸이라 사리 분별을 못한다고 모욕하는 것과 진배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가. 둘 중 하나냐, 아니면 둘 다냐.”
“……”
“…하… 가뜩이나 정신 사나운데. 너는 내게 참 너무하군, 쿠치키.”
“…사과하지. 미처 숙고하지 못한 모양이네.”
“됐어. 내게 사과할 시간에 네 동생에게나 신경 쓰도록 해라. 나에 대한 모욕은 너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니 이번엔 넘어가겠다. 단, 또 다시 그딴 말을 지껄이면 그때는 절대 가만있지 않아. 기둥의 힘을 빌려서라도, 지금의 내 몸으론 못 버틸 힘을 사용해서라도.”
침묵을 통해 긍정의 의사를 읽어낸 히츠가야는 작은 손을 주먹 쥐어 잡았다. 당장에 참백도를 해방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저는 참을 만큼 참았다. 자멸에 가까운 경고를 내뱉자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히츠가야는 눈을 꾹 눌러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한 채 끓어오르는 제 속을 못 견디고 발걸음을 떼었다.
제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겨울의 한기만을 남기고 뱌쿠야를 지나치던 중, 아이는 무엇을 깨달은 듯 입을 작게 벌리고는 걸음을 멈췄다. 제가 자각하기에도 이렇게 머리가 뜨거워진 상황에선 떠올릴 수 없을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확실히.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금방이라도 나갈 것 같은 기세더니. 뱌쿠야는 등을 돌려 새하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생각에 빠진 듯 평소보다 작게 숙인 뒷모습이 이질적이다. 높고도 낮은, 지금은 아마도 기분의 문제로 평소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 동생은 워낙 고집 센 아이라, 네 동생을 진짜로 구해낼지도 모르지.”
“……”
“그렇게 되면 넌 해야 할 일이 없어 한가할 터이고. 이렇게 모욕을 받았으니- 네가 한가한 꼴은 보지 못하겠다. 너 또한 골치 아픈 고민을 거듭하기를 바라며, 내가 지금 알아차려 머리가 터질 듯한 것을 말해주마.”
높게 올렸던 흔적만이 남아있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살랑 흔들렸다. 모진 말과는 달리 새파란 청록빛 눈이 은밀히 주변을 힐끔거리는 것이 뱌쿠야의 눈에 띄었다. 히츠가야는 낮은 목소리를 작게 내리깔아 바로 앞에 서 있는 대장급 사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목소리의 변화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과 비교해, 기분이 별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뱌쿠야의 예민한 기감에 들려왔다.
“이치마루가 무언가 꾸미고 있음이 확실해. 아이젠에게 경계 받는 것을 보았고, 그에게 마지막 경종을 즐기라는 둥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소란 속에서, 녀석이 무엇을 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에- 내게 빚을 졌으니 얌전히 협조해라, 쿠치키.”
“…과연, 협조할 수밖에 없나.”
“네가 뿌린 씨앗이다. 뿌려달라고 한 적도 없는.”
“부정할 생각은 없네. 금번의 내 실언이 너무나 경솔하고 무례했다는 것은 인정하는 바이니- 구태여 덧붙이지 않고 경의 요구에 따르지.”
“…그럼 나중에 따로 말을 전하는 것으로-. …왜, 뭘 떠올리는 거냐. 아까 같은 모욕은 사양이다만.”
갑자기 조용해진 듯한 기색에 옆을 돌아 본 히츠가야가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생각을 얼굴에 드러내지 말라고 교육받은 귀족답게 냉담한 얼굴과 살짝 내린 시선 외엔 내비친 게 없었는데 어떻게 기억 속에 있다는 것을 읽어냈는지,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뱌쿠야는 히츠가야가 말하는 새에 기억을 더듬었다. 아이젠 소스케와 이치마루 긴. 그 둘이라면.
먼 과거, 눈앞의 어린 사신이 태어나기도 전인 머나먼 과거를 분명히 기억했다. 얼굴에 세월의 선이 그어진 노년의 사신이 말했던 것을. 5번대에는 저와 비견되는- 어쩌면 더할 수도 있는 천재가 있다는 경고를.
비교적 얼마 되지 않은 기억 또한 선명했다. 5번대 부대장으로 지금의 인사가 올라오기 전, 3번대의 대장이 이치마루 긴이 아니던 시절. 눈앞의 소년이 호정에 입대하기도 전에, 온화한 인상의 아이젠 소스케의 뒤를 지키던 사람은.
뱌쿠야의 섬세하게 뻗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고고한 분위기 속, 담담한 목소리가 차가운 목소리만큼 작게 속삭였다.
“…그런 건 추호도 생각지 않았네. 그저- 이치마루 대장이, 경이 입대하기 전 아이젠 대장의 수하였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뿐.”
“……!”
“…둘 다 조심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그자가 지금의 경보다도 한참 어릴 적부터 아이젠과 함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만.”
뱌쿠야는 말없이 조용한 눈에 제 시선을 맞추었다. 긍정하는 건지, 부정하는 건지. 몰랐던 사실에 놀란 듯 크게 떴던 청록색 눈은 어느덧 차분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침묵은 히츠가야의 짧은 부름에 끝났다.
“마츠모토.”
“예, 대장님.”
“돌아간다.”
“예.”
부름에 바로 나타나 한쪽 무릎을 꿇은 부관과 함께 히츠가야가 회의실을 빠져나가고, 넓은 회의실엔 뱌쿠야 한 사람만이 남았다. 검은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게 가라앉았다.
❅
『“마츠모토, 히나모리를 살펴라.”
소년이 들어온 후 짧은 시간 동안 무겁게 깔려있던 침묵이 흩어졌다. 헝클어진 새하얀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들어오자마자 책상 위에 거칠게 빼두었던 검을 다시 등 뒤로 둘러 매며, 소년은 제 부관의 파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닙니다. 급하시잖아요.”
부관은 고개를 숙이고 순응의 뜻을 밝혔다. 평소의 낙천적이고 마냥 밝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진중할 때에만 보이는 그 모습-. 소년의 눈에 미약한 염려가 깃든다. 소년은 제 부관이 자신의 심기를 살펴 평소처럼 안 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부관은 가볍게 눈꼬리를 접어 웃어 보였다.
“계속 고민하시던 것, 알고 있습니다. 환기 좀 할 필요가 있으세요.”
“…고마워, 마츠모토.”
“그 여화를 보러 가시는 거죠?”
“그래. 자라키랑 싸우고 있으니까.”
“…시바 대장님의 아들. 범인은, 아닌 겁니까?”
“절대. …아버지를 쏙 빼닮은 사고뭉치야. 정말이지, 너무 잘 휘말려.”
잘 웃지 않는 얼굴에 어쩔 수 없다는 양 쓰디쓴 미소까지 올리며,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오자 옹기종기 몰려있는 10번대의 대원들이 보였다. 평소답지 않게 정돈되지 않은 어린 대장의 모습에 놀라는 기색이 주변을 물들인다.
몇 명의 수색대를 제외하면 10번대의 사신들은 침입으로 일어난 소란에도, 5번대 대장의 죽음으로 일어난 소란에도 지금껏 얌전히 대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명령이- 잘 지켜지는군. 다소 만족스러운 낯을 띈 소년은 명령했다.
“소란 피우지 말고, 대사에서 대기하도록.”
“하지만, 대장님!”
“명령이다.”
“…예!”』
강대한 영압이 느껴졌다. 태양과도 같은 따스하고 강대한 영압과, 서늘하고 스산한 야수의 것과 같은 영압. 참죄궁의 근처.
히츠가야 토시로는 빠르게 이동했다. 딸랑- 방울 소리가 들렸다. 검끼리 부딪치며 무겁게 짓누르는 영압이 느껴졌다. 피부를 찢고 베여 나오는 피 냄새가 났다.
그 모든 것을 느낀 순간, 소년은 재빨리 등 뒤의 검을 꺼내 제 영혼의 일부를 불러냈다.
[ 상천에 내려앉아라(霜天に坐せ), 빙륜환(氷輪丸) ]
차갑고 혹독한 겨울의 한기가 싸움터에 내려앉았다. 소년은 칼등에 손바닥을 대며 빙륜환을 가로로 들어 내려찍는 검을 막았다. 미리 내던진 사슬과 얼음이 거대한 검을 든 이치고를 멈추었고, 빙륜환에 막힌 검이 자라키 켄파치를 멈추었다. -형,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히츠가야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저가 막아낸 칼날 너머로 살벌하게 인상을 찌푸리는 자라키 켄파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자라키 켄파치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저처럼 머리카락을 올리고 다니던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이 하얀 머리카락, 작은 체구. 청록빛의 눈동자와 겨울의 냄새를 풍기는 영압. 나름대로 바로 옆 부대의 대장이고 아이라는 이유로 봐주던 녀석- 히츠가야 토시로가 틀림없었다.
인간인 이치고가, 사신인 녀석에게 형이라고? 보자마자 투지를 잃을 정도로 친분이 있다고? 잠시 이성적인 의문이 들었지만, 그딴 것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자라키는 목구멍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와 목소리를 긁어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히츠가야… 싸움을 방해하다니!”
“그만 해라, 자라키 켄파치. 네가 졌다.”
“무슨 소리야, 승부는 나지 않았어!”
“네 참백도를 봐! 거기서 찔러넣으면 부서질 것이 당연하지 않나! 정 더 싸우고 싶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상대하지.”
자라키의 작은 눈이 살짝 굴러 이가 다 빠진 제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장한 빛을 띄었던 차갑게 내려앉은 옥푸른 눈이 힘 빠진 부분을 확인하고, 히츠가야는 검을 홱 돌려 제 키만 한 검을 쳐냈다. 검을 쳐낸 가느다란 팔이 미세하게 떨린다.
자라키 켄파치는 입술을 꾹 물고 있는 이치고를, 허리께에 겨우 오는 작은 아이를, 그리고 제 참백도를 돌아보다가 김샜다는 듯이 혀를 차며 쳐내진 제 검을 거칠게 되돌렸다.
“웃기지 마. 이치고의 형이라고는 해도, 야치루 녀석보다 얼마 크지도 않은 녀석과 싸울 수 있겠냐. 제대로 싸울 생각도 없는 놈이랑 싸웠다간 이쪽 흥만 식는다.”
“그걸 그새 들었나… 배려 고맙군.”
“내게 싸우자고 할 거면 그 죽은 눈 치우고 즐길 마음이나 갖고 와라, 히츠가야. -이치고, 다음 번엔 방해 없이 싸우자고! 야치루, 와!”
“아하하!! 이치. 다음 번에도 켄 짱이랑 싸워줘! 시로 짱, 다음에 보자!”
어느 순간 나타난 분홍색 머리카락의 아이- 야치루가 자라키의 어깨 위에 올라 타 인사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라는 히츠가야의 작은 불평을 무시한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히츠가야는 제 어깨를 확 감싸온 커다란 팔을 토닥였다. 피 냄새는 나는데, 상처가 남아있는 것 같지는 않고. 제 무게를 모르는 건지 힘을 실은 건지, 감싸인 어깨가 무겁다. 살짝 떠는 것도 같고. 싸운 지 얼마 안 돼서 뜨거운 몸은 낯설다.
“…어린 아이냐, 만나자마자 끌어안게.”
“형.”
“어.”
“나, 나 있잖아. 나, 그. …미안해.”
“내게 미안할 게 뭐가 있냐, 다친 건 넌데.”
“…비밀인데 형에 관해 묻기도 했고, 차드나 이시다나 이노우에도 데리고 와서 형 곤란하게 하고… 나 지켜도 주고…”
“쿠치키가 배려-해줬다. 별로 곤란한 건 없었어.”
“그렇지만 형 지금 피곤해 보이는데. 그거 혹시 나 때문-”
“신경 쓸 일이 조금 있을 뿐이다. 난 괜찮아. 그보다- 네게 손님이 온 것 같은데.”
히츠가야의 푸른 눈이 어딘가를 곧게 바라보았다. 야옹, 작고 여린 울음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요루이치 씨?! 라며, 놀라는 이치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츠가야는 경고하려는 듯 강하게 누르는 영압에 내렸던 빙륜환을 들어 자세를 취하며 경계를 유지했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카만 고양이. 고양이 같은 것이 하나 있다는 미확인 보고를 떠올린 히츠가야는 가볍게 그 고양이가 여화 중 하나- 나아가 이치고네를 이 소울 소사이어티로 인도한 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경계를 곤두세우고 고양이와 대치하던 히츠가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구냐.”
“히츠가야라고 했지. 그렇다면 그대- 혹시 10번대의 대장인 히츠가야 토시로인가?”
“그렇다만, 뭐 하는 녀석이지?”
“…나를 모르는군. 하긴, 그대는 어리고 나는 오래 전 떠났으니.”
“…너,”
“잠깐, 형! 아니야. 요루이치 씨는 우릴 도와주려고 따라온 거라고. 요루이치 씨, 형은 경계하지 않아도 돼.”
왠지 모르게 차가운 한기 뿐만이 아니라 스산해지는 공기를 느낀 이치고는 껴안았던 히츠가야를 놓고 고양이와 히츠가야의 사이에 섰다. 고양이가 아니라 히츠가야에게 등을 보인 것을 봤을 때, 혹시나 둘이 싸운다면 히츠가야의 편을 들 것이 분명해 보여- 고양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혀를 찼고 히츠가야는 눈을 꾹 감았다. 편애를 받은 것은 이쪽이지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라 저도 모르게 한쪽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스산한 경계로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몸만 다 자란 어린 아이의 개입에 완벽히 풀리고. 히츠가야는 고개를 들어 이치고의 등을 곧게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빙륜환을 제 등 뒤로 되돌렸다. 어차피 아이가 있으니 싸울 생각은 안 했지만―히츠가야는 자라키의 경우 막은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가 눈치 보게 만드는 것은 옳지 않았으니.
“…직접 말하지. 10번대 대장, 히츠가야 토시로다. 그쪽은?”
“요루이치로 충분하다. 이제 와서 더 덧붙일만한 것은 없구나.”
“―그런가. 알겠다. 우선, 이치고를 이끌어준 것에 감사를 표하지.”
“…둘이 그렇게 친한가? 이치고가 틈만 나면 부르짖던 '형'이 그대인 것 같은데.”
“맞아. 10년 좀 넘었어. 그렇지, 형?”
“뭐… 그렇지.”
“형!”
“알았어, 맞아. 10년 넘게 알고 지냈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삐진 것처럼 확 찌푸린 표정을 오가는 얼굴이 보였다. 아이처럼 유치한 그 얼굴에 히츠가야는 작게 미소 지었고 고양이는 비웃음이 분명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소리에 얼굴을 팍 구기는 모습까지.
히츠가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 맑게 웃었다. 두 쌍의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부관의 언어를 빌리면 복잡한 머릿속을 환기하기 위한 만남이니, 계속해서 이런 시답잖은 대화를 잇는 것이 좋을 터이다. 어떤 걸로 시작하면 계속해서 이런 분위기를 이을 수 있을까.
이전과는 달리 즐거운 고민을 하며 눈을 감았다가- 히츠가야는 멀리에서 느껴지는 영압에 슬며시 눈을 떴다. 푸른 눈에 못마땅한 기색을 한껏 드러내며 저 멀리를 흘겼다.
정말이지-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군.
바다와 녹음의 청록빛 눈에 숨기지 못한 답답함이 깊게 배여났다.
“…그럼 난 이만 가마, 이치고. 내가 지켜줄 수 없으니 조심하고.”
“어… 벌써 가?”
“너희 말고도 일이 있어서-… 10번대의 사신은 걱정하지 마라. 여화를 쫓지 말라고 명령해둘 테니.”
“응, 고마워.”
“겉으론 사신들의 소속을 구분하지 못하는 녀석이.”
“…억. 조용히 해, 댁은!”
이치고는 씩 웃어 보였다. 걱정하는 이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곳은 여화의 입장에선 위험한 인물이 떼거지인 곳인데도. 고양이의 가소롭다는 듯한 태클엔 곧바로 얼굴을 구겼지만, 다시 돌아보는 얼굴은 믿음직스럽게도 단단한 채로.
깊은 눈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새하얀 속눈썹이 나붓이 흔들렸다. 기껏 비운 머릿속이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다시금 고민을 불러일으켰다.
협조를 약속받기는 했지만 이치고를 죽이겠노라 제 앞에서 선포한 것은 별개인 쿠치키 뱌쿠야가 떠올라 걱정이 심화하였고, 이어 이치마루 긴이 수상한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울던 히나모리에 대한 걱정과 죽은 아이젠 소스케가 진짜 그인지에 대한 불확신이 섞이자 아예 찌릿한 고통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두통에 익숙한 편이라고는 해도 이런 부류의 통증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상책인데 말이다.
차라리 걱정할 필요도 없게 이치고 네가 어서 쿠치키 루키아를 구해서 빨리 현세로 돌아갔으면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으니.
히츠가야는 검은 고양이에 시선을 두고 입을 열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아바라이를 쓰러트렸으니, 경계가 심해지는 건 예상했을 거고.”
“아, 응. 안 죽었구나.”
“자라키와 싸웠는데 살아있으니… 어느 정도 강해진 것 같기는 하지만.”
이치고가 만났을 때 가장 위험한 대장이라면- 쿠치키. 쿠치키 뱌쿠야. 그가 자주 쓰는 전술은.
깊은 바다와 한낮의 녹음을 담은 청록빛 눈동자가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참백도는 천본앵이지만, 벚꽃과 같은 칼날의 폭풍은 해방할 가능성이 적으니 제외하고.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약한 것을 공격할 때는. 귀족인 그자는, 아마도-
“…속도를- 신경 써라. 안 보이면 뒤쪽부터 방어해. 네 참백도의 넓이라면 막을 수 있을 거다. 순보는 배웠나?”
“어어…? 형아, 누구 예상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쿠치키 뱌쿠야. 네가 현세에서 만났던 대장. …그를 조심해. 잔뜩 벼르고 있으니.”
“아, 그 루키아의…. …알겠어. 조심할게.”
이치고가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히츠가야는 살짝 위를 바라보았다. 눈을 살짝 키운 이치고가 살풋 웃으며 경계 없이 고개를 숙이고, 히츠가야는 자연스레 주황색 머리카락을 짓궂게 헝클어뜨렸다. 다시금 진지하던 분위기가 풀리자 고양이 또한 "형아?" 라며 이치고를 놀렸고, 이치고는 화들짝 놀랐다가 모르는 척 고양이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평화로운 모습에- 히츠가야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이치고. 내게 급한 일이 생긴다면 10번대의 대사로 오도록 해라. 요루이치- 라 하는 저 고양이가 알고 있을 것 같으니 따로 설명은 안 하마.”
“아, 알겠어.”
“내 손이 닿는 범위에선 그냥 마음대로 하고. 최대한 도와줄 테니, 너무 위험한 짓까지는 하지 마라. 자라키같은 놈이나- 잡히면 지켜줄 수 없으니까.”
“…응, 고마워.”
“그럼, 이만.”
히츠가야는 이치고의 인사를 듣지도 않고 사라졌다. 이런 작별에 적응한 지 오래인 이치고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 끝까지 손을 흔들다가 요루이치를 바라보았다. 갈색 눈이 곧게 반짝였다. 다시금 서두를 차례였다.
❅
『“이치고. 그대, 다른 만해도 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대의 형에게 부탁한다면-”
“안돼. 내 힘으로 할 거야.”
“…고집은,”
“그냥 고집이 아니라고. …형, 바빠 보였으니까.”
쿠로사키 이치고는 온천물에 한 번 잠수했다가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보았던 얼굴을 다시 그렸다. 아름다운 바다 빛 청록색 눈동자에 어려 있던 피로는 선명했고, 말끔히 정리하던 새하얀 머리카락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중간에 어딘가를 노려볼 때는 살기마저 느껴졌다.
평소엔 그런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던 사람이, 그렇게 티를 내면서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엄청 바쁜 거겠지. 힘든 거겠지. 그런 사람에게 더 시간을 빼달라고 어리광 부릴 수는 없었다.
“쿠치키 뱌쿠야는 형의 얼굴을 봐서 두 번이나 나를 죽이지 않았어… 두 번째는 그냥 죽이려고 한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머뭇거렸지. 요루이치 씨, 당신은 그 틈에 날 빼낸 거잖아.”
“…”
“켄파치도… 마지막에 그 공격, 난 못 막았어. 맞았으면 분명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을 거야. 형은 그걸 막아줬지. 거기다 켄파치가 물러나게 해줬어. 바쁘고, 힘든 거 뻔히 보이는데도. 그런 거 티 절대 안 내는 사람이 티 풀풀 내면서 굳이 와줬잖아.”
“……”
“형에게 더 민폐 끼칠 수는 없지.”
갈색 눈이 굳은 결의를 다지고 활활 타올랐다. 형 안 곤란하게, 빠르게 루키아나 다른 애들 구해서 나갈 거야. 작게 덧붙이는 목소리마저 뜨거웠다. 그 불길을 확인한 검은 고양이는 무슨 생각인지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내일을 위해 이만 쉬거라.”
“어!”』
달빛 아래 새하얀 머리카락이 한올 한올 신비롭게 빛났다. 넘치는 겨울의 한기를 품은 영압이 주변의 온도를 점차 낮추기 시작했다. 히츠가야는 뽑아 든 빙륜환을 두 손으로 쥐었다. 예리하게 날이 갈린 참백도가 달빛을 반사하여 어스름한 빛을 품었다.
마주보는 색이 보이지 않는 눈에 집중하면서도, 옆에서 영문도 모르고 크게 뜨인 연녹색 눈동자가 거슬렸다. 히츠가야는 목 아래에서부터 긁고 올라오는 포효와 같은 목소리를 최대한 억누르며 뱉어냈다.
“꺼져 있어라, 키라. 말려들게 하지 않겠다고는 못하니.”
정제되지 않은 살기가 깃들어 거칠고 뜨거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리 말하는 얼굴은 그보다 차게 내려앉을 수 없었다. 아이젠의 편지- 과연 그게 전부 사실일까. 누가 고친 건 아니고? 애초부터 그가 써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 혹은, 아이젠이 일부러-
이치마루, 히나모리, 키라, 아이젠. 이 일과 관련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믿었는데, 걱정했는데. 아무리 대장의 유언이라 하여도 제게 칼을 들이댈 정도로 망가진 히나모리와, 말할 것도 없이 수상한 이치마루. 이치마루의 충직한 심복인 키라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죽음을 믿을 수 없는 아이젠.
이치마루의 빙그레 웃는 눈이 호선을 지웠다. 저 뒤에 다쳐서 기절한 아이는 틀림없는 히나모리 모모였다. 히츠가야 토시로가 유일하게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그 존재가 다쳤다. 마음이 부서졌다.
분노해야 마땅한데, 이성을 차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는데. 검푸른 밤하늘 밑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반짝이는 청록색 눈이 얼음과 같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흔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곧고, 단단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대로.
예상이 빗나갔구마,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오만하게 굴던 남자를 떠올린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히츠가야 대장, 말과 달리 차분하구마. 무슨 생각이지라?”
“생각은 내가 아니라 네놈- 아니, 네놈들에게 있는 것 아니냐?”
“네놈들이라니, 나 말고 또 누구를 의심 목록에 넣고 있는기요. 이즈루인가예? 아니믄, 6번대의 부대장?”
“글쎄, 네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 상천에 내려앉아라(霜天に坐せ), 빙륜환(氷輪丸) ]
새하얀 빙룡이 일어났다. 넘치는 영압이 만들어낸 한기에 충분히 피하지 못한 키라는 근처에 있던 것만으로 얼어붙었다. 용에 직격으로 부딪힌 이치마루는 가볍게 용을 분쇄했지만, 얼마 안 가 검 끝의 쇠사슬에 묶여 얼어붙었다. 의도적으로 길게 만들어낸 쇠사슬 끝의 날로 다른 쪽 팔을, 참백도로 목을 겨눈 히츠가야는 쓰러진 히나모리 쪽을 흘끔 살피곤 다시 이치마루를 바라보았다.
“과연 히츠가야 토시로, 영술원에서부터 30년도 안 돼서 대장직에 오른 천재답구마.”
“…”
“헌데- 웬일로 그리 냉정을 유지하는기요? 저 아가 관련되면 금방 이성을 잃지 않았나예. 아까도 가만 두지 않겠다느니 무섭게 카더만.”
“닥쳐, 생각 중이니.”
“하이구마, 란이 슬퍼할 테니 거친 말 좀 쓰지 마이소. 술만 먹으믄 히츠가야 대장이 너무 컸다고 울더구마.”
“그건 네놈 때문이 더 클 터이고.”
“…아, 들은 모양이네예. 하기야 둘이 친해 보이기는 했더만은.”
살짝 색을 드러낸 남백색 눈이 어딘가 슬퍼 보여, 히츠가야는 또 한 번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 제 부관을 외롭고 슬프게 만드는 것은 저인 주제에 제 놈이 슬퍼하고, 쓸쓸한 낯을 해 보인다. 뭐 하는 놈이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히츠가야의 혼란과는 별개로 모든 일이 하나같이 너무나 잘 짜 맞춰지고 있었다. 모르고 보면 그저 우연히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여길 법한 일들이 하나하나 의심스러웠다. 누군지 모를 녀석이 하나하나 정교하게 꾸며낸 위험한 장기판 위에서, 모두가 놀아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쏴죽여라(射殺せ) ]
나지막한 언령이 속삭이듯 작게 들린 것은, 히츠가야가 그렇게 고민하던 도중.
초승달 모양의 날로 겨누고 있던 한쪽 팔이 어느새 참백도를 쥐고 있었다. 살짝 색을 드러냈던 눈이 어느덧 모습을 다시 감추고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제길, 방심했다. 이치마루의 능력은-
눈가로 날아오는 칼날을 피하며 히츠가야는 높게 뛰어 이치마루의 앞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단단히 그러쥔 사슬로 한쪽 팔을 밑으로 잡아당기며 제가 이곳으로 왔던 쪽을 향해 소리쳤다.
“마츠모토!”
“…!”
[ 신창(神鎗) ]
아슬아슬하게 피를 보지 못하고 새하얀 하오리를 뚫은 날카로운 검날이 늘어났다. 검 끝이 노리는 것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보랏빛 머리카락의 아이- 안쓰럽고 가여운 히나모리 모모.
얼음의 용이 몇차례 따라가 검을 막으려 하였지만, 신창은 무서운 기세로 얼음의 방해를 무시하고 끝없이 나아갔다.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히나모리에게 날이 닿기 수 초 전.
[ 박도 81, 단공(斷空) ]
귀도계 공격을 막는 투명한 벽이 펼쳐졌다 깨졌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펼쳐낸 이유는, 잘 보이지 않는 날을 막을 길을 터주기 위해.
푸른 눈동자를 가린 검이 강하게 내려찍는 검 끝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낸다. 분홍빛 옷자락이 내려앉고, 짙은 파란색 눈이 모습을 보였다. 끌어내린 팔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던 얼굴이 드러났다- 웃고 있던 얼굴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무표정. 아니, 표정이 없다기보다는 조금 일그러진 쪽에 가까울까. 히츠가야는 그 얼굴을 두 눈에 똑똑히 새겼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장님!”
“…아니야. 잘 맞춰서 왔다.”
“예. …검을 거둬주십시오, 이치마루 대장님…!”
마츠모토는 이를 악다물고 외쳤다. 푸른 눈에 어린 굳은 결심을 내려다보다, 이치마루는 검을 거두었다. 빠르게 수축한 참백도가 다시 평소처럼 단도의 형상을 띄었다. 일그러졌던 얼굴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참백도를 쥔 손까지 얼려버린 히츠가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치마루의 지독한 무표정이 왠지 모르게 아파서, 웃지 않는 마츠모토의 얼굴이 쓰라려서. 둘의 관계가 이렇게 된 것은 한 쪽의 탓인데도, 지금의 이 혼란스러운 상황도 그놈이 관련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도. 히나모리가 죽을 뻔한 직후였지만- 뭐라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히츠가야는 말을 해도 되는 때와 안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은 말을 하면 안되는 때였다. 지금은, 마츠모토와 이치마루의 시간이었기에. 그저 조용히 마츠모토와 히나모리 쪽을 살필 뿐이었다.
이치마루는 히츠가야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사라졌던 얼굴에 나긋한 미소가 떠올랐다.
“…히츠가야 대장, 어린데도 상냥하구마.”
“…무슨 소리냐.”
“아니~ 암것도 묻지 않으니까예. 이거, 좀 풀어주지 않겠지라? 차거서 뭣도 못허겄으야.”
“질문 하나에만 대답하면 풀어주지.”
“허메, 하나 가지고 되겄소? 고민이 제법 많지 않았습니꺼. 중간에도 막 딴 생각 하는 거 내가 봤는디.”
“쓸데없는 말은 붙이지 말고.”
히츠가야는 참백도를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의식적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이쪽만 바라보는 웃는 얼굴이 거슬렸다. 마츠모토의 굳은 얼굴이 신경 쓰였다. 안쓰러운 아이에게 시선이 계속 가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그의 부관이 회도를 걸어주며 이쪽을 살피고 있으리라 믿었기에. 그녀가 자신을 신경 써서 잘못된 질문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대답이 진실일지 아닐지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겨우 얻어낸 기회였다. 지금 물어야 할 것은 아무래도 소울 소사이어티의 미래와 깊게 관련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것이어야 했다. 그래야 하니까. 그것이 모두를 위한 것일 테니까.
깊고 깊은 고심 끝에, 청록빛 반짝이는 눈이 번뜩였다.
“진실만을 대답해라.”
“고거야 질문을 듣고 생각해 보겄으야.”
“…너.”
“왠지 내 멋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닌 것 같으니까예. 감도 날카로운 히츠가야 대장이 허는 질문이니.”
열쇠 하나, 열쇠 둘.
“자아,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구마.”
열쇠 셋.
히츠가야는 이치마루의 은근한 속삭임을 알아차렸다. 티 나지는 않지만 은근히 뒤쪽을 신경 쓰고 있는 기색을 확인했다. 언젠가 제 부관이 말해줬던, '선심을 쓸 때의 이치마루 긴'의 특징을 엿보았다.
열쇠 세 개. 멋대로 답할 수 있는 질문. 감이 날카로운 자신. 얼마 안 남은 시간.
“…탑에 매달려 죽어있던 아이젠은.”
“…”
“'진짜' 아이젠 소스케가 맞는가.”
눈동자를 보이지 않는 실눈이 기이하게 찢어졌다. 실실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한껏 치솟았다.
이치마루 긴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챙- 검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검은 눈이 경멸을 안고 일그러졌다.
“만해를 꺼내라…? 히츠가야 대장의 동생이라 하여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거늘… 그가 걱정되지도 않는가. 그의 긍지를 그렇게도 더럽히고 싶은가…!”
“미안한데, 우리 형은 내가 원하는 건 다 하라고 그랬어.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말이야!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의 긍지는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거야. 그러니까 이건 그걸 더럽히는 게 아닌 거고!”
“가소롭다. 그의 세월을 오래 보지도 못했을 애송이가, 그 입으로 말하지 않은 긍지를 입에 담고… 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 형에게도 한계가 있겠지. 이미 잡히면 도와줄 수 없다고도 했어. 그래도 형은, 우리 형은 내가 위험해지면 형이 할 수 있는 최대한 도와주고 살려주려고 할 거야! 루키아를 죽이려고 드는 너와는 다르게 말이야!”
“…어리석어.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네녀석도, 히츠가야 대장도…!”
[ 만해(卍解) ]
멀리 떨어져 나간 쿠치키 뱌쿠야가 참백도를 땅에 떨어트렸다. 통상적이라면 땅에 부딪혀 나뒹굴어야 할 참백도는, 그대로 땅을 통과하듯 사라졌다. 분노로 냉정을 잃은 검은 눈이 번뜩였다.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꺼내라고 했던가? 우리의 긍지를 더럽히는 자의 갈 길에 어울리지 않는 영광을 친히 보여주도록 하지.”
[ 천본앵경엄(千本桜景嚴) ]
두 줄로 일어선 거대한 검들이 바스러졌다. 분홍빛의 칼날 조각이 폭풍처럼 흩날리고, 무서운 기세로 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날카롭게 치솟은 갈색 눈이 불과 같이 타올랐다. 무슨 자신감인지, 쿠로사키 이치고는 입꼬리를 당겨 자신 있게 외쳤다.
“드디어 꺼냈구나, 쿠치키 뱌쿠야…!”』
문 쪽에 서 있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시 사라진 쪽을 곧게 응시하다가, 히츠가야는 쫓으려는 듯 자세를 취하는 부관을 잡아 멈췄다. 작은 손에 들어간 힘이 꽤 강한 것을 확인하고 자세를 푼 마츠모토가 물었다.
“쫓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키라를…”
“저건 유인이다. 쓸만한 정보를 갖고 있을 가능성은 낮아. 곧 오실 테니… 넷이서 같이 조사하면 뭔가 나오겠지. 이곳만 봐도 정보가 꽤 많이 남아있을 것 같으니까.”
“…처형은,”
“그 아이가 알아서 하겠지. 어제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거 봤어. 우키타케와 쿄라쿠도 나름대로 막을 방도를 찾았다 했고.”
히츠가야 토시로는 고개를 내젓고는 느리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살아있는 이는 저와 부관밖에 없을 것처럼 역겨운 피 냄새로 가득한 이곳에서, 예민하게 높인 기감에 잡히는 이가 있었다.
벽 뒤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귀도의 흔적- 아마도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세우지 않았다면 놓쳤을 정도로 정교한.
마츠모토의 시선이 히츠가야의 시선이 멈춘 곳에 다다랐다. 잡을까요, 마츠모토가 속삭였다. 히츠가야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느리게 젓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채우며 울렸다.
“나와, 히나모리. 따라오던 거 알아.”
“…어떻게?”
“……글쎄.”
고작 3음절로 짧게 묻는 목소리가 떨린다. 저를 믿지 않는 혼란스러운 눈빛은 여전히 안쓰럽고 가엽다. 이 일의 진상에 대해 여러 번 고민해봤지만, 가장 높은 가능성을 떠올리고도 너무나 안타까워서 여럿에게 물어가며 다른 가능성을 찾았지만. 결국 진상이 드러나면 다시 한번 상처받을 것이 훤한 아이였다.
히나모리의 떨리는 눈동자가 이쪽을 곧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지. 경문으로 보호한 곳에 얌전히 있으리라 믿지 않아서- 가 사실이었으나, 자신이 저를 불신하면 충격받을 아이였기에. 히츠가야는 차마 믿지 않았다고 대답할 수 없어 답변을 회피하곤 그 뒤를 바라보았다. 히나모리의 기척 말고도 가까워지던 기척이 도착했다.
하얀 옷자락이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허메, 이즈루가 유인허는 디 실패한 모양이구마. 둘 다 이곳에 있는 걸 보니예.”
“이, 이치마루 대장님?!”
“미끼를 곧이곧대로 따라갈 리가 없지 않나.”
“미끼라고 어찌 확신하지라? 섣부르지 않나예, 히츠가야 대장.”
모습을 드러낸 이치마루 긴은 그저께 밤의 전투가 없었던 것처럼 생긋 웃었다. 히츠가야는 대답하지 않고 어느새 꺼내든 빙륜환의 손잡이를 힘을 주어 쥐었다. 곁에 서 있던 마츠모토 역시 금방이라도 검을 꺼내 들 것처럼 몸을 긴장시켰다.
히나모리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챘는지 떨리는 몸으로 한 걸음 더 물러서려고 했다. 책상에 닿은 몸이 움츠러들었다.
평소처럼, 뱀을 연상시키는 싸한 미소를 짓고 있던 이치마루가 급하게- 아니, 별로 급하게 보이지 않는 속도로 히나모리의 어깨를 잡아 멈췄다.
“너무 성급하지 않노, 히나모리 짱.”
“네, 네?”
“기다려 본나. 아주 반가운 사람이 왔지라.”
“반가운… 사람…?”
이치마루의 뒤로-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지도 못한,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이의 등장에 히나모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미 그 생존을 짐작하고 있던 히츠가야와 마츠모토 또한 새삼스러운 확신에 입을 꾹 다물며 다시 한번 참백도를 강하게 쥐었다.
하얀 하오리가 가라앉았다. 움직임에 따라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온화한 눈을 한 배신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한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젠, 대장님.”
“오랜만이네, 히나모리 군.”
“…정말, 정말. 아이젠 대장님이세요…?”
히나모리는 떨리는 몸을 한 걸음 앞으로 옮겼다. 어깨를 잡아 그 움직임을 멈췄던 이치마루 긴은 어느새 옆으로 몇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아이젠 소스케가 히나모리를 받으려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
히나모리의 움직임은 불안정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하얀 대장 하오리를 붙잡으며 쓰러지려는 것처럼 히나모리가 다시 한번 걸음을 떼었을 때- 히츠가야는 검지와 중지를 세워 손을 뻗었다.
[ 박도 9, 붕륜(崩輪) ]
손가락 끝에서부터 뻗어나간 주황색과 노란색이 섞인 끈이 순식간에 히나모리를 잡았다. 아이젠의 손이 닿기 전에 성공적으로 묶어낸 끈은 히츠가야가 당김으로써 바로 수축해 히나모리를 히츠가야가 서 있던 곳으로 끌고 왔다.
시로 짱, 히나모리가 얼떨떨한 눈으로 저를 끌어낸 히츠가야를 바라보았다. 히츠가야는 히나모리를 뒤로 보내며 아이젠과 이치마루가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안경 너머로 흐릿한 갈색 눈이 잠시 차갑게 굳었다가 호선을 그렸다.
“…이런, 히츠가야 군. 부하와 상관의 재회를 방해하면 곤란해.”
“그런 소릴 할 거면 손에 든 참백도부터 놓고 얘기하지.”
“…아, 이걸 그새 보았나? 정말이지, 자넨 시야가 참 넓다니까. ―어떻게 알았나?”
분명히 웃고 있는데도 한순간에 분위기가 스산하게 변했다. 아이젠의 손에 들린 참백도를 확인한 히나모리의 안색이 바뀌는 것이 얼핏 보였다. 히츠가야는 아직 잡고 있던 히나모리의 손을 꼭 쥐었다가 놓으며 붕륜을 풀었다. 마츠모토, 작게 속삭인 이름에 마츠모토가 곧바로 히나모리를 안아 키라가 나간 곳을 통해 빠져나갔다.
아이젠은 잠시 그곳을 보았다가 다시 히츠가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메랄드빛 푸른 눈은 평소처럼 단단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경계를 풀지 않고, 이성을 유지하고… 어떻게? 호선을 그리는 눈에 흥미가 번졌다.
“무엇을 말이냐.”
“모른 척하지 말고. 나와 긴이 한 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말일세. 그대는 분명 긴이 3번대 대장이 된 이후에 입대하지 않았나?”
“…쿠치키가 말해줬다. 이치마루가 과거 네 부관이었다고. 그런 사실을 들으면 수상한 대화를 나눈 둘 모두를 의심하게 되기 마련이지.”
“과연, 쿠치키 뱌쿠야인가. 자네는 혼자 생각하는 편이니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네만.”
“그거참 안타깝게 되었군. 우연의 일치가 공교로웠던 모양이야.”
“그런 것 같아. 어디서 틀어졌는지 찾기가 힘들군. 이성이 있는 자네는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말이야.”
“…왜, 배신한 거지?”
“미안하지만, 아직 풀지 못한 의문이 있어서 말이야. 이쪽의 질문이 먼저라네.”
아이젠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여태껏 아이젠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비유하자면, 그래- 총대장의 위압과 같은.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오한이 멈추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와서 공격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본능적인 경계가 몸을 긴장시켰다.
이성을 잃었다면 이런 건 없었겠지. 경계하지도 못하고 섣불리 덤벼들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새삼스럽게 제 이성을 지켜준 이치고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하고, 히츠가야는 식은 땀을 흘리며 아이젠을 응시했다.
“꽤 오래 준비한 계획이 조금 틀어졌어… 일에 지장은 없지만 전부 자네가 평소처럼 굴어주고 있는 덕분이지. 어떻게 차분한가, 지금?”
“…그게 뭐, 문제라도 있나.”
“문제는 없네. 그저, 어지간해선 내 계획이 비껴가는 일은 없고- 원래라면 청정탑 거림(淸淨塔 居林)에서 히나모리 군을 만날 예정이었는데 자네와 마츠모토 군의 영압이 이 회의실에 계속 남아있어서 내가 직접 왔을 뿐이지.”
“…키라가 도망친 건 역시 유인이었나 보군. 히나모리를 홀로 남기기 위해서였나.”
“그래. 나 없이는 살 수 없도록 키워왔으니, 내가 그녀에게 베풀 수 있는 일말의 자비였지. 자네의 난입으로 안타깝게도 내 자비를 받지는 못했지만.”
말같지도 않은 소리. 히츠가야는 이를 아득 물었다. 물론 저 말로 히나모리가 왜 그리 맹목적이었는지가 밝혀진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특정한 누군가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은 없다. 설령 그랬다 할지라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선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두 명의 대장급을 상대로 혼자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말을 시키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지만, 저 되지도 않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건 이제 거의 한계였다.
…아니야, 참아. 참아야지. 히츠가야는 흐리게 느껴지는 따스한 영압을, 태양 같은 영압을 더듬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치고가 이곳에 있었다. 모모도, 마츠모토와 10번대도, 그 외의 제 책임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전부 이곳에 있었다. 행여 일이 잘못될 경우 책임져줘야 하니까. 지켜줘야 하니까. 히츠가야 토시로는 이성을 잃어도 안 됐고 자신이 잘못되어도 안 됐다. 순간적인 분노에 몸을 맡겨서는 뒷일을 책임질 수 없는 법이니 말이다.
어차피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 사람이 올 터였다. 냉정히 판단해서 아이젠의 영압을 감당할 수 없는 히츠가야로서는 시간을 쓰는 것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럼, 무슨 말로 시간을 끌어야 할까. 아무래도 아이젠 소스케는 자신이 히나모리에게만 좌우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니, 그렇다면. 아마도. 녀석에게서 최대한 길게 대화를 끌어낼 수 있을 만한 말은-. 히츠가야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히나모리가, 얼마나 네놈을 동경했는지 알 텐데도. 모두를 속이고, 그런 생각을…”
“아니까 그녀를 선택했지. 동경심을 품은 인간이 가장 조종하기 쉬우니까. 그리고 속인 게 아니야. 너희가 날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해하지 못해? 그 히나모리도 말이냐?”
“물론이지. 말했잖아? …아, 그래. 이거 하나는 가르쳐주지, 히츠가야 군. 아직 어린 자네에게 특별히 알려주는 사실이야.”
“……”
“동경심은 이해에서 가장 먼 감정이라네.”
아이젠 소스케가 빙그레 웃었다. 히츠가야는 저도 모르게 힘을 넣어 꽉 쥐고 있던 참백도를 다시 잡았다. 저도 모르게 덤벼들 뻔했다. 안 돼, 안 되지. 진정해야 한다. 여태껏 모모에게 갖은 수작을 부렸던 것처럼, 또다시 자신이 이성을 놓게끔 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일 테니까.
잠시 고삐를 놓고 활활 타올랐던 청록빛 눈이 다시 차게 내려앉았다. 가짜 시체를 생각하면, 아이젠 소스케는 무언가 환각을 보여주는 능력이 있음이 분명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모든 감각에. 그러니 어떤 움직임도 허투루 보아선 안 된다. 함부로 다가서도 안 된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니 주의를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아이젠 소스케가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한쪽 손을 들어 제 턱을 쓸어내렸다. 갈색 눈에 깃든 흥미가 더욱 깊어졌다.
“정말 놀라운걸. 아직도 냉정을 유지하다니… 자네를 꽤 잘못 보고 있었던 것 같아. 히나모리 군이 자네의 역린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평소대로였다면, 그 판단이 옳겠지.”
“호오, 평소대로가 아니라는 뜻인가. 혹시 여화- 쿠로사키 이치고와 관련이 있는 건가?”
“……쿠로사키 이치고는 누구지? 여화라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그 사신 대행 말인가.”
이치고의 이름을 또 어떻게 아는 거지? 여화의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분명 저 녀석이 죽음을 가장한 이후였을 터. 5번대엔 여화의 정보가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죽음을 가장하고 이치고와 처음 싸웠다던 11번대의 녀석들이 대화하는 걸 들은 건가. 아니, 그렇다기엔 성까지 알고 있어-. 11번대의 녀석들은 상관이 아닌 이상 이름부터 부르는 작자들이다. …그렇다면, 모습을 숨기고 참죄궁에서 이치고와 마주했던 상황을 지켜본 건가?
히츠가야는 저도 모르게 찌푸린 얼굴을 다시 원래대로 풀어냈다. 제 이마에서 한 방울 흘러내린 식은 땀을 의식했고,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만큼 차분해지려고 노력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차분하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정신과 반응을 날카롭게 벼려내고 차갑게 받아들여야 했다. 히츠가야는 아이젠의 말 한 마디에 쏟아져 내리는 생각을 최대한 비워냈다.
아이젠 소스케는 저를 노려보는 히츠가야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대견한 아이 보듯이, 여태껏 입에 담은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마치 녀석이 이런 일을 벌이기 전- 경계 없이 그를 보았던 그때처럼.
“그래, 티 내지 않는 건 중요한 법이야. 난 자네의 그 인연을 알지만, 자네의 노력이 갸륵하니 모른 척해주도록 하지. 그 반응으로 내 의문은 어느 정도 풀렸다네.”
“…!”
“한데 이를 어쩌나, 내 입장에선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다 끝났는데. 왠지는 몰라도, 자네는 시간을 더 끌고자 하는 것 아닌가?”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을 텐데.”
“어떤 것? 자네가 티 내지 않으려고 한 쿠로사키 이치고라는 인물에 대한 질문이라면 대답할 필요가 없을 텐데. …아아, 그래. 맨 처음에 질문했던 그건가.”
아이젠은 막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이미 본성을 다 드러냈음에도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이 역겹고 두려웠다. 히츠가야는 최대한 차분히, 빨라지지 않도록 숨을 크게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배신했느냐는- 상투적인 질문. 아이젠의 구미를 끌기에는 영 부족하고 뻔한 질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말이 많은 아이젠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 질문으로 시간을 꽤 끌 수 있을 것 같아서. 거짓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평소 완벽을 추구하던 아이젠은 한 번 미뤘던 질문을 무시하지 않을 것 같아서.
아이젠 소스케가 곰곰이 떠올리는 것처럼 턱을 쓸었다. 들고 있던 참백도를 내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인가. 히츠가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의문이 먼저라고 미룬 건 확실히 무례였지. 좋아, 대답해주도록 하겠네.”
“…”
“내가 배신한 이유- 아니, 정확히 내가 이 모든 것을 계획한 이유는, 더 높은 곳을 찾아서다.”
“…뭐?”
“하늘엔 아무도 서 있지 않아. 그 공백을, 내가 하늘에 서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라네.”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당연하게 입에 담는 안경 너머의 눈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히츠가야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그 눈을 똑바로 보았다. 미친 것처럼, 광기 어린 그 눈을. 그 무엇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오만함으로 가득 찬 갈색 눈을.
히츠가야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혼자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뒤에서 멀뚱히 눈만 깜빡이는 이치마루 놈이라도 대화에 참여하면 1:1로 대화하는 것이 아니니 좀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제정신이 아닌 저 놈이 끼면 더 버거워질 것 같기도 해서 한숨 밖에 안 나왔다. 일단 지금 상태로는 뭘 어떻게 하려고 해도 답이 없었다. 그냥 미친 놈들끼리 서로 상대하면 편할 텐데. …대체 언제 오시는 거야. 히츠가야는 아이젠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계속해서 기다린 그 사람을 속으로 애타게 불렀다.
조용히 서 있던 이치마루 긴이 뒤를 돌아본 것은 그때쯤이었다.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히츠가야는 안도와 함께 살며시 입꼬리를 끌어당겼고, 아이젠은 방해를 받은 사람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맘껏 내보이던 광기 어린 얼굴을 감췄다. 개인을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높낮이를 가진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만한 말이군요, 아이젠 대장. 아니… 이젠 대장이라 부를 수 없죠. 대역 죄인, 아이젠 소스케.”
“…오랜만이오, 우노하나 대장. 그대가 어떻게 벌써 여기에? ―아, 그대가 바로 히츠가야 군이 시간을 끌던 이유인가. 쌍극에 가지 않았나 보군요.”
“그 정교한 시체 인형… 히츠가야 대장의 표현을 따르면, 환각을 쓰고 행방을 감춘 이가 있는데 다른 곳에 한눈 팔 수는 없지요. 틀림없이 청정탑 거림에 있을 줄 알고 들렀다 왔습니다만.”
“아아, 그곳에 있던 건 맞소. 원래 계획대로라면 계속 있었겠지. 히츠가야 군이 내 계획에 어긋나서 이곳으로 친히 움직인 것 뿐이라오.”
“그런가요? 어찌 됐든 하마터면 늦을 뻔했군요. 차분하게 시간을 잘 끌었어요, 히츠가야 대장.”
“…별말씀을.”
검은 장발을 앞쪽으로 단아하게 땋아 내린 사신- 우노하나 레츠는 사뿐히 웃으며 다가왔다. 강대하고 단단한 영압이 내려찍듯 주변을 압박하고, 히츠가야에게 시선을 고정하던 아이젠 역시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유일하게 무거운 영압에 영향받지 않은 히츠가야는 그제야 의식적으로 유지하던 긴장을 풀어냈다.
이리로 오세요, 히츠가야 대장. 잔잔한 목소리에 히츠가야는 곧장 순보를 밟아 그녀의 곁으로 이동했다. 우노하나는 곧바로 히츠가야의 손에 손을 얹어 회도를 걸어주었다. 옥빛이 잠시 감돈 손은 엉망으로 터졌던 기색 하나 없이 말끔해졌다. 가볍게 고개 숙인 히츠가야에게 우노하나가 자상히 물었다.
“예상이 맞았나요?”
“…덕분에, 꿰맞춘 것의 대부분은요.”
“잘 참았어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조금 더 가까이.”
“예.”
“…아하… 히츠가야 군이 그대와 상의했나 보군요. 정말이지. 홀로 움직이리라 생각했는데 너무나 예상외야, 자네.”
아이젠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느리게 히츠가야를 다시 바라보았다. 우노하나에게 가까이 붙은 히츠가야는 빙륜환을 다시 힘줘서 잡았다. 혼자 움직인다- 부정할 수가 없군. 뱌쿠야에게 정보를 들었던 날의 자신을 떠올린 머리카락과 같이 새하얀 눈썹이 더 심하게 찡그려졌다.
“…아니. 분하지만 네 예상대로다. 아마 쿠치키가 말해준 것만 아니었다면 분명 홀로 움직였겠지. ―하지만, 내가 모르는 시절의 이야기는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아까도 말했지만 우연의 일치가 네게 퍽 공교로웠다, 아이젠.”
“덕분에 오래간만에 히츠가야 대장의 어린 모습을 보았지요.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넣어두시오. 그런 얘기를 하기엔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군. …그래… 우연의 일치가 참 공교로워. 나 말고도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으니…. …아, 맞아. 그러고 보니 그 얘기를 하지 않았어. 우노하나 대장, 그대. 시체 인형이라고 했지요. ”
두서없이 뭐라고 중얼거리던 아이젠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제 참백도를 들었다. 자칫했으면 히나모리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을 뻔했던 참백도는 다행히 깨끗한 상태로, 히츠가야는 경계를 가다듬으며 우노하나의 살짝 앞에 섰다. 안개와 수류의 난반사로 적을 교란하는 유수계 참백도-라 했지만, 환각을 쓸 수 있는 이상 거짓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아이젠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인형'을 그 손에 들고 있었다.
“…!”
“차라리 히츠가야 군의 표현이 더 옳소. 시체 인형 따위가 아니지. 환각에 가까운 최면이라네.”
“…역시 그런 건가…!!”
“재밌는 걸 보여줄까.”
[ 깨져라(碎けろ), 경화수월(鏡花水月) ]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난 것만 같은 착각 이후- 아이젠의 손에 들려있던 '인형'이 사라졌다. 손에 들려있는 것은, 직전에 들었던 그의 참백도 뿐. 마치 놓은 적도 없다는 것처럼 유려하게 벼려진 검은 버젓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제야 최면이라는 것의 원리를 파악한 보랏빛 검은 눈이 크게 뜨였다. 청록빛 푸른 눈이 담담하게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을 관조했다. 둘 다 금세 원래의 얼굴을 띄었지만- 예상이 엇나간 사람과 적중한 사람의 반응, 두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그 다른 차이에- 아이젠이 웃었다.
“내 참백도, 경화수월. 보유 능력은 「완전 최면」이다.”
“…”
“놀라지 않는군, 히츠가야 군. 하긴, 예상하고 있었나.”
“환각을 보여주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
“그 정도도 훌륭하지. …아아, 시간이 너무 흘렀어. 좀 더 대화하고 싶지만… 반응을 보고 싶으니. 이것만 말하고 헤어지도록 하지.”
“…뭐가 말이냐.”
“경화수월의 발동 조건은 '적에게 해방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네.”
그게 뭐- 라고 생각한 순간, 히츠가야는 번뜩 떠오른 깨달음에 얼굴을 확 굳히고 우노하나를 돌아보았다. 우노하나 역시 같은 것에 생각이 닿았는지 고아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최면- 그리고, 호정 13대의 대장들 중에 있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자. 소란 이후 다른 사신들과 똑같이 행동하던 그 대장.
두 대장이 당황해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그때, 여태껏 가만히 있던 이치마루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검은 소매에서 나타난 기다란 백색 끈이 회오리처럼 돌며 아이젠과 이치마루를 감쌌다.
“생각난 모양이군. 눈이 보이지 않는 이에겐 통하지 않아. 즉- 자네들이 알고 있는 누군가는 모두가 걸렸던 최면에 걸리지 않았다는 뜻이지.”
“…토센, 카나메…!!”
“그는 내 부하라네. 어때, 연기는 좀 괜찮았나? 별로 연기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큰일이 되겠군요.”
“대화하는 건 제법 재밌었어, 히츠가야 군. 자네에게 이런 소질이 있는 줄 몰랐네. 그럼, 아마도 마지막일 테니- 안녕히.”
휘감아오르던 천 속에서 태연히 인사하고, 아이젠과 이치마루는 사라졌다. 참백도를 든 채였음에도 너무나 허무하게 놓쳐버린 것을- 어찌할 수는 없으니. 히츠가야는 치밀어오르는 패배감을 다스리며 다급히 우노하나를 돌아보았다. 눈앞에서 사라진 것 정도에 놀라지 않은 보랏빛 검은 눈이 여전히 곧아서, 히츠가야는 빠르게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떡할까요, 우노하나 대장.”
“우선 저들이 향한 곳을 알아보고,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지요. 히츠가야 대장, 미안하지만 그대가 해주시겠습니까. 전 다른 곳에 있을 부상자들의 치유를 위해 먼저 가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우노하나는 히츠가야의 똑바른 대답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사라졌다. 히츠가야는 짧게 심호흡하고 빠르게 주변을 살펴 아무 데나 나뒹굴고 있던 먹을 구했다. 그리고는 구해낸 먹을 엄지에 묻혀서 바닥에 원으로 둘러싸인 어지러운 진을 그렸다. 특정 개인의 추적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지만, 번호가 그리 높지 않음에도 다른 것과 비교해 시전이 상당히 복잡한 귀도- 괵지추작(掴趾追雀)을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 남쪽의 심장, 북쪽의 눈동자, 서쪽의 손끝, 동쪽의 발뒤꿈치, 바람을 타고 모여 비를 쫓으며 흩어져라 ]
[ 박도 58, 괵지추작(掴趾追雀) ]
먹으로 그은 진이 빛을 발하고,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숫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츠가야는 그 숫자를 새기고, 기억하고, 외웠다. 찾는 대상의 위치를 발견해 낼 때까지. 정령정의 지리와 비교해가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숫자들을 눈으로 좇았다.
31, 64, 83, 97, 그다음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지던 숫자가 마침내 멎은 곳은- 좌표 동 332에 북 1566.
쌍극이었다.
“…제길, 결국은…!”
“대장님!”
“왔느냐, 마츠모토.”
금빛 머리카락이 뒤늦게 흩날리며 내려앉았다. 회의장에 있는 것이 제 어린 대장 한 명 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마츠모토는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취했다. 훌륭히 역할을 완수하고 돌아온 듯, 푸른 눈동자가 손수 괵지추작을 사용한 히츠가야를 미안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히츠가야는 마츠모토가 재빨리 건넨 손수건에 제 손에 묻은 먹을 닦아내고는 마츠모토의 얼굴을 곧게 올려다보았다.
“아이젠과 이치마루는 쌍극으로 갔다. 우노하나 대장은 부상자 치료를 위해 이미 갔어.”
“…!”
“이치마루를 막을 수 있는 건 너 뿐이다, 마츠모토. 그러니 너도 서둘러 가. 난 천정공라로 다른 이들에게 모든 진실을 알리고 따라가마.”
“하지만 대장님, 대장님께서 직접 천정공라를 사용할 필요는…!”
“어서! …지금은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히츠가야의 노성에 흠칫 놀란 마츠모토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부관이 사라진 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히츠가야는 손가락 끝을 깨물어 피를 내서 한쪽 팔에 문양을 그렸다. 피로 그렸지만 피가 묻지 않은 문양이 나타난 팔을 앞으로 뻗으니, 붉은색 두 개의 정사각형이 허공에 나타났다.
[ 박도 77, 천정공라(天挺空羅) ]
히츠가야는 잠시 깊은 숨을 삼켰다. 제 부관과 아이젠 일당을 제외한 모든 대장과 부대장, 부대장 대리. 그리고- 동생을 포함한 제가 아는 모든 여화들을 포착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뭘 하고 있는 건지 각자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의아했지만, 어차피 모든 사실을 들으면 전원이 쌍극에 도달할 터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히츠가야는 고민을 짧게 끝내고 머뭇거림 없이 입을 열었다. 아이젠 소스케를 비롯한 대장 3명의 배신. 하늘에 서겠다는 반역의 의사. 중앙 46실의 몰살. 이 모든 일은 최대한 빨리 알려야 하는 최우선 사항이었다.
「호정 13대 전 대장, 부대장 및 부대장 대리. 그리고 여화들에게 전한다. 이 전언은 현재 음성을 전달하고 있는 10번대 대장 히츠가야 토시로와 4번대 대장 우노하나 레츠가 공증하는 내용으로- 긴급 전언이다. 앞으로 말할 모든 것은 사실이니, 최대한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이 음성을 듣고 있는 사람은 전원 쌍극으로 이동하며 들어라.
5번대 대장 아이젠 소스케와 3번대 대장 이치마루 긴, 9번대 대장 토센 카나메가―」
갑작스럽게 공기를 울리며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은 모든 이가 당황하여 움직임을 멈췄다. 어떤 이는 좌절하고, 어떤 이는 당황하고, 어떤 이는 벌이고 있던 싸움을 멈췄다. 그들 중 몇몇은 쌍극으로 이동하면서 눈을 크게 떴고, 이동하지 않고 끝까지 음성을 들은 몇몇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움직였다. ―쌍극(双殛), 흩어져있던 많은 이들이 하나둘 집결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집결지에 있던 어떤 이는- 음성을 다 듣고서야 눈앞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곤 얼굴을 굳혔다.
어딘가에서, 친구들에게 기대고 숨을 도리던 쿠로사키 이치고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반짝 떴다. 반가워서 이리저리 둘러본 것도 잠시,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소리와 그 말의 내용에 이치고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전화 같은 걸로 자신 하나에게만 보낸 게 아닌 것 같고. 본업 중인 형의 목소리는 멋있지만, 이건 대체. 의문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친구들 역시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이치고는 안심하곤 느리게 입을 열었다.
“…뭐야? 방금. 형 목소리인데, 본업 중인 느낌나는 목소리는 멋있지만…”
“쿠로사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무슨 말인지 생각 좀 해보자고.”
“아니 멋지긴 하잖아. 인정할 건 인정하라고. …그래도, 이해하기 힘드네. 형이 왜 우리에게 이런 걸 말하지? 40 어쩌고의 몰살이라든가, 최면에, 죽음을 가장했다느니… 형의 동료 중 하나가 배신했다는 건가?”
“거짓말 아니야? 우리에게 왜 이런 걸,”
“형은 거짓말 안 해.”
“난 아무것도 안 들렸어…”
“음성을 전하는 사람은 10번대 대장이라고 했어. 우린 4번대에 잡혀있을 때 그 대장하고 만난 적이 있지만, 이노우에는 만난 적이 없으니까. …그 대장이 이치고의 형이라고…? 초등학생처럼 보이던데…”
“10번대 대장이라면… 천재잖아. 입대하자마자 만해를 사용할 수 있었고, 역대 최연소로 대장 자리에 오른 천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천재. 그런 사람이 네 형이라고…?”
“멋있지?”
“물론 그것도 충격이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쿠로사키, 모르겠어?”
각자 할 말만 하는 시장 바닥처럼 소란스럽던 공간이 노성에 확 조용해졌다. 미세하게 분노까지 섞어서 소리를 내지른 푸른빛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안경이 인상적인 퀸시, 이시다 우류가 어느덧 고민은 잊고 제 형의 멋짐만을 설파하던 이치고의 어깨를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붙잡았다.
“네 형-께서 말씀하신 걸 잘 생각해 보면, 46실이라는 건 이 소울 소사이어티의 최고 사법 기관이야. 아이젠이라는 대장은 그걸 전멸시키고 자신의 의사를 그곳의 명령인 것처럼 내렸다는 거잖아. 여태까지 계속!”
“그런가…? 그게 왜?”
“…아직도 모르겠냐! 그 목적이 뭘 것 같은데. 지금까지 그 곳에서 어떤 명령을 내려왔는지 생각해 봐!”
이시다는 기어코 한 번 더 소리를 내지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중앙 46실, 명령, 의도. 그 말만 들어서는 연관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없는 단어들이 한 가지 사실을 통해 하나로 맞춰졌다. 멀뚱히 두 눈을 깜박거리는 이치고 대신, 대답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처형?”
“그래. 이상했잖아, 계속해서 앞당겨졌던 쿠치키 씨의 처형 일자.”
“…!!”
“처형 일자를 앞당긴 중앙 46실의 명령이 그 녀석에게 날조된 거라는 건, 그 명령을 내린 게 그 아이젠이라는 사람인 거고… 녀석의 목적이 쿠치키 씨의 죽음이라는 거야!”
정답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충격적인 사실이기에 다른 친구들을 배려한 것일까. 이시다는 모든 정황을 통해 도출해낼 수 있는 정답을 말했다.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단어가 나오자 그제야 현실을 깨달은 이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친구들 모두의 시선이 쌍극이라 불리는 언덕 위를 향하고- 이시다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위를 보았던 이치고가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루키아…!!”
❅
『히츠가야 토시로는 뒤늦게 쌍극에 도착했다. 천정공라를 이동하면서 펼치는 것은 꽤 무리인 짓이었으니, 다른 이들보다 출발이 늦었던 때문이었다. 이미 많은 대장, 부대장, 그리고 이치고 일행이 모여있는 와중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검게 찢어진 하늘에서 내려온 세 개의 레몬색 빛기둥. 어느 정도 호로와 대치한 사신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길리안 따위가 지닌 쓸데없이 강력한 능력―
“…네가시온…!!”
“아, 히츠가야 대장 왔나? 수고 많았어. 다친 덴 없고?”
“정신력이 소모된 정도다. 그보다, 네가시온이라니…”
“아아… 보다시피. 아이젠이 메노스와도 손을 잡은 모양이야. 참 부지런한 양반이지, 언제 웨코문드까지 오고 가고 했나 몰라.”
불에 그을린 듯 보이지만 평소대로 분홍색 꽃무늬 하오리를 어깨에 걸친 8번대 대장 쿄라쿠 슌스이가 나긋이 대답했다. 별로 심각한 부상자가 없었는지 먼저 와있었던 우노하나가 다가와 히츠가야의 어깨를 토닥였다. 맡겨서 미안해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히츠가야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때, 새하얀 머리카락을 발견한 갈색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아, 벌써 온 건가. 혼자서 괵지추작과 천정공라를 다 하고 온 것 같은데… 역시 빠르구나, 히츠가야 군. 아까 인사했던 것이 쓸데없게 되어 버렸군.”
“…아이젠.”
“이곳에 오고 자네에게 다시 한번 감탄했어. 다른 개입이 있던 자는 거의 그대로였는데, 자네는 계속 바뀌었고… 내 예상을 계속 뛰어넘어줬지. 자네의 나이를 고려하면 정말 훌륭했네. 아니, 오히려 어리기 때문에 뛰어넘을 수 있었던 걸 수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히츠가야 대장, 더 이상 그와 대화를 나누지 말게. 그대는 이제 쉬어. …아이젠, 메노스와도 손을 잡은 거냐. 뭘 위해서지?”
예상치 못하게 들어온 방해에 아이젠은 고개를 돌렸다. 히츠가야와 같은 백색의 머리카락이지만 히츠가야와는 달리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과 갈색 눈을 가진 13번대의 대장. 히츠가야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손을 뻗어 그의 시야를 가린 우키타케 쥬시로가 그리 물으며 주먹을 힘줘서 쥐는 것이 보였다.
아이젠 소스케는 느리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뭘 위해서라, 이 질문은 아까 분명 히츠가야 군에게 대답해줬던 것 같은데- 천정공라로 전할 때 말하지 않은 걸까? 의문이 깃든 시선을 잘 보이지도 않는 히츠가야에게 고정하며, 아이젠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높은 곳을 찾아.”
“땅에 떨어졌는가…!!”
우키타케의 말에 아이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엇이 또 그리 심기에 거슬렸는지, 한결같이 미소를 짓고 있거나 아니면 표정 없이 그저 내려다 보던 얼굴이 잠시 모습을 감추고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쿄라쿠의 물음에도 우키타케는 말없이 아이젠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이 자리에서는 단 한 명밖에 이해하지 못했을 대답을 이해한 이에게, 아이젠은 시선을 돌렸다.
“교만이 지나치다… 우키타케. 처음부터 하늘엔 그 누구도 서 있지 않았어. 너도, 나도, 신조차도.”
또다시 단 한 명만 이해할 대답을 태연히 꺼내고- 잘그락, 무언가 접히는 소리가 났다. 언제나 아이젠의 콧등 위에 올라가 있던 안경이 부서졌다. 가볍게 올린 손이 갈색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날카로운 갈색 눈이 안경을 통하지 않은 채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완전히 다른 인상이 된 아이젠 소스케가, 우키타케를 곧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견디기 힘든 천좌의 공백도 이제 끝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늘에 서겠어.”
“…!”
완전히 검은 구멍에 가까워진 아이젠 소스케가 웃었다. 이전의 웃음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의, 마치 다른 사람 같은. 하지만, 아마도 그것이 본모습일.
어른들에게 보호받듯이 둘러싸인 히츠가야는 그제야 급하게 고개를 뻗어 사라지는 아이젠을 바라보았다. 이치마루 긴과 토센 카나메는 이미 웨코문드로 통하는 구멍을 넘어 사라졌음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지금까지도 소울 소사이어티의 하늘 위에 떠 있던 아이젠 소스케가 느리게 아래를 전체적으로 살폈다. 눈이 마주쳤다.
“잘 있게, 사신 제군들. 그리고- 여화 소년. 넌 인간치고는 꽤 흥미로웠다.”
그 말을 끝으로, 아이젠 소스케의 일당은 사라졌다.』
방학이 끝난 학교는 시끌벅적했다. 방학 동안 그토록 많은 일이 있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평소와 같아서, 개학하고도 한차례 거대한 전투가 있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평화로워서. 상처를 어느 정도 치료하고 등교한 동료들은 차마 이 평화로움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굴었다.
학교에 소란이 일어난 것은 그때 즈음이었다. 화려하거나 경악스러운 의미에서 눈에 띄는 몇몇 사람들이 학교의 교복을 입고 태연하게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초등학교나 가야 할 법한 소년부터- 대머리에 눈화장을 한 목도 차림의 남자까지. 소란을 일으킨 것과는 별개로 오히려 주변은 조용히 만드는 그 일행과 동행하던 방학 전에 전학 왔던 낯이 익은 친구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머리를 짚었다.
“그래서… 어느 교실이라고 했지?”
“몰라~”
“아니, 당신에게 안 물었어! 것보다 메모 들고 오셨잖아요?!”
“잃어버렸어♡”
“잃, 뭐 하는 거예요!!”
“조용. 내가 아니 조용히 해라.”
“엇, 넵…”
“네에~ 이치고가 말해줬어요?”
“뭐, 그렇지.”
“헤에, 진짜 잘 따른다~”
“…넌 슬슬 조용히 해라.”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새에 사고-같은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의 호통에 조용해졌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곧바로 입을 다문 모습에 '저 아이가 쟤네 중 짱인가…?' 라는 말이 학생들 사이에서 퍼졌지만, 어차피 덮어씌우면 되는 관계로 소년은 무시했다. 금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잠깐의 침묵을 깨버리며 다시 말을 꺼내자, 대충 대답하던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말렸다.
하지만 사고-같은 대화를 나누는 건 둘 뿐만이 아니었기에. 머리를 깔끔하게 밀고 목도를 허리춤에 찬 남자가 진심이 가득한 것처럼 들리는 높은 목소리로 불평했다.
“그나저나 뭔 놈의 옷이 이렇게 갑갑하냐…!”
“우리처럼 옷자락을 빼면 되잖아?”
“웃기지 마! 그랬다간 목도를 찰 수 없잖ㅇ-!!”
“조용히 하랬지!!”
“…넵…”
일행은 결국 소년이 불호령을 내리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이 와중에 둘은 소년을 존경하는 것처럼 바라보고, 하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속으로만 꿍얼거리고. 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행을 살피는 모습이 참- 단합이 하나도 되지 않는 꼴이라. 소년은 다시 한번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 조합이 정말 괜찮을까 새삼스럽게 걱정되었다.
복도에서 이렇게 소란이 일고 있을 때, 쿠로사키 이치고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보통은 반 밖의 멀리에서 나누는 평범한 크기의 대화는 들을 수 없는 게 정상이지만, 영압이 실려서 공기를 흔드는 목소리는 흐릿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중 하나는, 너무나도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
“다 왔다, 이 반이야. 어서 열어.”
“제가 먼저 들어갈까요?”
“…아니, 미안하지만 먼저 대화하마.”
“알겠습니다.”
문 바로 앞에서 소리가 나고, 이내 문이 벌컥 열렸다. 목소리가 들릴 때부터 문에 고정되어있던 이치고의 시야에 곧바로 들어온 것은 붉은 머리카락과 민 머리, 남색 머리카락과 금색 머리카락. 검은 머리카락과- 그리고, 새하얀 머리카락.
“렌지, 잇가쿠, 유미치카, 란기쿠 씨… 루키아…!”
오랜만에 보는 친구에게 잠시 멈췄던 갈색 눈이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렀다. 그 눈과 정확하게 마주한, 한없이 어린 것을 보듯 자상한 청록빛 푸른 눈이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미약한 호선을 그렸다. 어릴 적부터 한결같이 봐온 그 눈에- 이치고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커다란 덩치가 작은 몸을 감쌌다. 어린 아이처럼 제 몸을 끌어안는 동생을, 작은 손이 멈칫하다가 주황색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다른 쪽 손으로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 익숙한 손길에- 그저 고여 있던 눈물이 출렁거리다가 쏟아져 내렸다. 이치고는 저보다 훨씬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형…!!”
“그래, 그래… 울지 마라. 괜찮아.”
“혀엉…”
“또 많이 다쳤다며. 몸은 어때, 괜찮으냐?”
“응…”
“…어-이, 이치고. 이쪽도 신경 좀 써주라…?”
이치고는 렌지의 부름에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갈색 눈과 시선을 마주한 렌지가 아무리 그래도 다 큰 사내 놈 눈물 보고 싶진 않거든, 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옆에서 루키아 또한 저걸 받아주다니, 역시 대장님-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히츠가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히츠가야의 불호령을 알기에 입 다물고 있는 11번대와 무슨 생각인지 빙그레 웃고 있는 마츠모토가 보였다. 뒤늦게 제 눈을 흐리게 만든 물기를 거칠게 닦아낸 이치고는 히츠가야를 여전히 꼭 끌어안은 채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무슨 일이야? 교복 차림으로…”
“상부의 명령이다.”
대답이 나온 것은 시선이 마주친 렌지가 아닌 제 품 안에서. 놀라서 이쪽을 바라본 이치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히츠가야는 토닥이는 손길을 거두며 제 목을 감싼 이치고의 팔을 느리게 떼어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걸음 멀리 서서 마주한 애정 어린 청록색 눈이 책임으로 제빛을 덮으며 갈색 눈을 바라보았다.
“「아란칼」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대비하여, 현세에서 사신 대행 일행과 합류하라-고 말이다.”
쿠로사키 이치고가 처음 보는 10번대 대장의 청록빛 눈이 엄격하고 단단하게 빛났다. 힐끗 시선을 받은 렌지와 루키아, 잇가쿠, 유미치카, 그리고 마츠모토가 빠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격식을 차리는 사신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라서, 이치고는 어수룩하게 볼을 긁적였다. 뭐야, 왜들 이래. 작은 물음은 곧이어 나온 단호한 목소리에 묻혔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소울 소사이어티의 반역자- 아이젠 소스케와의 결전을 대비해서 현세에 파견된 선견대의 리더, 10번대 대장 히츠가야 토시로다.”
“…!”
“그대는?”
“…사신 대행, 쿠로사키 이치고.”
어설프게 엄숙한 분위기를 둘러보던 이치고는 느리게 대답했다. 반짝이는 청록빛 눈동자에 두터운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식으로 사신으로서 형과 만났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형은 저를 막연히 어린 아이로만 취급했으니까, 만나자마자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어리광을 부렸는데. 형이 저를 인정해준 것이 좋으면서도, 어리광 부릴 수 있는 평화가 깨지기 시작했다는 느낌에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사신 대행, 쿠로사키 이치고. 우리 호정 13대에서는 아이젠과 관련된 이번 사태에 대해 그대에게 정식으로 도움을 구하는 바이니―”
“!!”
“앞으로 잘 부탁한다.”
히츠가야는 이치고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무나 작고, 무겁고, 믿음직스러운 손. 이 손을 잡아도 될까. 형에게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시간이 끝나는 것 같은데. 형이 기껏 손을 내어줬는데도 마음 편하게 잡을 수 없는 저 자신이 한심했다. 이유도 너무 어리고, 지키지도 못한 자신이 이렇게 신뢰를 받아도 되는가 싶어서 미안해졌다.
그런 이치고의 고민을 눈치챘는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뒤쪽에서 카랑카랑한 질책이 날아들었다.
“멍청한 놈! 히츠가야 대장님의 손을 잡지 않고 뭐 하는 거냐! 대장님께선 지금 네놈에게 앞으로는 마냥 보호하지 않고 네놈을 믿어보겠다고 말하고 계시지 않느냐!”
“…아니 루키아?! 알거든!! 그냥,”
“루키아, 대장님 말씀하시는데-.”
“그냥, 뭐! 네놈 방금 하던 꼴을 보니 어리광 부릴 수 있는 대장님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구나! 멍청한 생각은 그쯤 하고 어서 대장님의 손을 잡아!”
루키아의 날카로운 말에 이치고의 눈이 흔들렸다. 당황해서 루키아를 툭툭 치며 말리던 렌지도, 히츠가야의 묵인과 이치고의 반응에 뭐라고 결심을 굳힌 듯 검은 눈을 반짝였다. 히츠가야의 깊은 눈을 잠시 들여다보았다가, 부대장 아바라이 렌지는 더이상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래. 어서 잡으라고, 이치고! 히츠가야 대장님께서 네놈과의 형제의 연을 끊으실 것 같기라도 하냐!”
“……형. …진짜, 진짜 그래도 되는 거지?”
쿠치키와 아바라이의 원조 아래- 히츠가야는 이치고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아란칼 때문에 무슨 고민도 하고 있다고 들어서, 그것 때문에 기껏 내민 손을 안 잡는 건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더 어린 아이 같은 이유에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하긴, 이치고는 변하지 않았지. 어릴 적부터 이치고는 그대로였으니. 고민 쪽은 나중에 쿠치키에게 맡기고- 자신은, 이 어린 동생의 불안감을 지워주는 역할을 수행해야겠다. 히츠가야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냈다.
“…이렇게 손을 내민 이유는- 형제의 연을 끊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치고. 이건 그저, 여태껏 감추기에 급급했던 우리의 인연을 정식으로 내세우자는 의미이지.”
“…아…!”
“안 잡아줄 거냐? 형제의 연을 계속 감추겠다면, 그래도 이해는 하겠다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잡아. 잡을래. 형이랑 정식으로 인연도 내세우고. …계속, 형에게 어리광 부려도 되는 거지?”
“당연한 소리를.”
히츠가야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자, 그제야 이치고의 얼굴이 화색을 띄었다. 여태껏 망설이던 모습이 거짓말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치고는 히츠가야가 내민 손을 꽉 잡았다. 한 손도 아니고 두 손으로.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나도. 나도 앞으로 잘 부탁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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