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동승객 여러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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셴야는 몇 장 적어내려가지 못한 수첩을 팔락거리며 넘겼다.
처음 iTAKA에게 공격당한 날부터 써내려가던 기록은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역시 자신에 대해 남기는 일은 낯설고 어렵다. 그래도 이대로 두기에는 조금 아까운데. 소파에 기대 앉아 새하얗게 텅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네모난 모양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그것은 둥그런 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 그보다 각이 진 것도 같고. 머릿속에서 새하얀 공간은 수없이 접혔다가 펴지기를 반복하며 섬광과 함께 목격했던 존재할 수 없는 모양에 가까워진다.
……그것에 대항하는 것에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나의 자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면, 우리가 실패하게 되면. 어쩌면 누군가는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되겠지. 하고 싶지 않은 상상은 끝없이 늘어나기만 한다.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다. 그는 늘 세상에 두려움을 가진 채 살았고, 끊임없이 실체없는 고통과 외로움에 쫓겨다니며 그에게서 벗어나거나 숨기 위해 애썼다. 어딘가에 머물지 못하고 수없이 돌아다니던 것도, ‘나’를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감추던 것도 전부 그랬다.
한숨을 쉬며 머리를 소파에 기댔다. 헬멧을 벗어도, 나를 드러내려고 애써도 나를 이해할 수는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작은 수첩 하나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채우지 못했다. ‘자아自我’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보며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 내 얼굴? 목소리? 기억? 감정?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뒤바뀌는 것에서 무슨 답을 찾을 수 있는가? 생각의 끝은 어느 형사가 적어온 기록에 닿는다.
스스로 있는 나, 혹은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나.
철학의 시작은 나에 주목하고, 나를 발견하며, 나를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나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배운 적이 없다. 헬멧을 썼던 어느 시계공이 아는 것은 어느 요리사의 말따마나 세상을 비추고 눈치보며 바라보는 것 뿐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시계공이 펜을 들었다. 거울에 맺힌 상은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을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거울이 생긴 대로 왜곡되고 구부러지고 뒤집힌다. 그것으로 거울은 자신이 거울임을 증명한다.
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면, 세상에 비치는 상으로부터 더듬어나가자. 타인으로부터 찾아가자. 검은 잉크가 작은 수첩의 페이지를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나를 걸고 나 자신을 증명하는 싸움을 일생에 두 번이나 걸게 되다니, 세상이 참 녹록치 않아. 진 . 세상에 나의 일부를, 흉터를 숨긴다는 건 언젠가 그것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때로는 그 흉터가 우리를 증명하기도 할거야. 당신이 잊지 않겠다고 한 것처럼, 그것에 담겨있는 인생과 감정은 오롯이 나 자신의 것이고, 하나 된 것에는 존재하지 않을 나의 증거이므로. 그 점에서 우린 닮았지.
그래도 역시 나는 당신같은 플레이어는 되지 못하겠어. 겁이 많거든.
성실한 의뢰인이자 미래의 동업자일지도 모를 금요일에게. 고친 시계는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네. 움직이지 않으면 다시 말하도록 해. 우리와 이별한 이들의 시계는 멈추고 말았지만 우리가 가진 시계는 여전히 똑딱똑딱 우주가 도로 한 점이 될 때까지 움직일테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게 올바를지 모르지만, 내가 그때 했던 답은 여전히 생각이 변하지 않았어. 당신은 내가 그랬듯이 잊어버리는 대신, 그걸 짊어진 채로 이곳에 왔으니까 걱정하는걸 너무 나무라지는 마. 무거워보이면 같이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수 없단 말이야. 누구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은 무섭지, 나샤. 세상은 너무나 쉽게 부서지고, 감정은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살아가며 폭력에, 배척에, 이별에 수없이 짓밟히는 인연과 생명을 봤어. 나는 오랫동안 그게 두려웠어. 쉽게 사라져버릴 세상을 사랑하다 받을 상처가 너무 아파서 애써 무시하고 도망쳤던 걸지도 몰라. 우리는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구나.
하지만 부서진 것은 다시 세울 수 있더라. 그 모습이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는 달라도 여전히 아름다워. 너는 도망치다 못해 나처럼 스스로를 세상에서부터 숨기지 않았고, 나가고자 한 용기를 가지고 있으니 다시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거야.
닥터, 솔직히 고백하는데 우리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해도 당신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더라고. 세상에는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사람도 있는 거겠지. 그래서 세상은 반복되는 듯 하면서도 조금씩 바뀌고 다르게 나아가는 것일테고.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당신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부탁해.
아주 만약에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만은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COGiTO 재단은 세상에서 제일 가는 멍청이 집단이라고 전해줘. 이게 끝이야.
내 작은 친구, 세상의 안내인 피피. 우리는 서로의 삶을 전부 끌어내 보여주었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너를 이해해. 네 인생을 보고 너를 위해 흘린 눈물은 내 온 마음을 다한 진심이었어.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그래서 멈출 수 없는 시간의 단면만을 잘라 마음에 간직하고자 했지. 마음도 추억도 세상도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알고 있어, 당신에게는 금세 스치고 흩어질 작고 연약한 것에도 기꺼이 마음을 다할 담대함이 있다는 사실을. 그게 나와는 조금 다른 점이야.
마음 약하고 상냥한 래널프, 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놀라고 대신 속상하다고 말해줬던 게 늘 고마웠어. 우리는 삶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도망치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애썼지. 도망가고, 숨기고, 가리고. 그게 우리가 가진 삶의 공통점일거야.
세상은 만만하지 않게도 도망치러 온 우리의 앞에 가장 큰 벽을 세워주고 말았네. ‘나’에게서 도망갈 수 없도록 말이야. 당신이 그 장갑을 벗을지, 벗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상처투성이의 손을 맞잡고 길거리를 함께 걸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해.
레이맥, 그 ‘비빕이’는 잘 챙겨주고 있는 것 맞지? 다들 그걸로 당신을 힐난하길래 나도 한 번 동참해봤어. 나는 대부분의 일을 혼자 해오곤 했는데, 여기에 와서는 당신과 이것저것 만드는 게 꽤 재미있었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았지. 그 커피 기계도 말이야.
나에게 함께 할 때의 즐거움을 알려줘서 고마워. 그 여행 제안도 고맙고. 돌아가게 된다면 나도 함께 가게 될지도 모르겠어. 그 때 당신 고향에도 가서, 아름다운 노을을 보자. 어떤 높은 건물도 세워지지 않은 풍경의 벅참과 설렘을 모르는 나에게도 알려줘.
사실 말하자면, 나는 당신에게 돌려줄 축언을 생각하고 있어, 로잘린. 그저 지나가듯 우연히 주어지는 축복도 있다고 했지만, 나만 받는 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서. 당신이 아는 것처럼 멋지고 좋은 말이나 고전미를 담고 있는 노랫말은 전혀 몰라서, 멋들어지게 말해줄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법을 아는 당신에게 배운대로, 여기에 당신에게 하고 싶은 축언을 남길게.
우리가 설 마지막 시험대에서 당신이 당신 자신을 찾을 수 있기를. 나아갊에 즐거움이 있기를. 외로움보다 큰 기쁨이 있기를. 행운이 있기를Good Luck !
우리의 최연장자 로제움씨. 인생을 나누면서 당신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걸 듣는 것은 꽤 오랜 다음으로 미뤄야할 것 같아. 숙제가 하나 생겼으니까. 어떤 일이 생겨도 당신만은 늘 굳건한 중심을 잡고 있던 걸 기억해. 그게 나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겠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고, 날카롭게 상황을 읽어내는 것 말이야.
사람의 수명이 숫자놀음이 된 시대가 와도 내가 나임을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솔직히 많지 않다고 생각해. 육체는 바꾸어도 정신은 그저 평범한 인간이니까. 수백년을 견딜 수 있는 ‘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180억이 뒤섞인 거대하고 붉은 눈 앞에서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믿어.
아름다운 비올라를 연주하는 법을 아는 마치. 이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당신의 고향에 가서 연주를 조금 더 듣고 싶어. 그거 알아? 레이맥과 제이가 밴드를 한 대. 당신도 한 번 끼어보는 건 어때? 한 번만 듣기에는 솔직히 아쉬운 연주였고, 다른 사람들도 당신의 아름다운 ‘조율된 소리’를 듣길 바라고 있거든.
시계를 다루는 법은 이 다음에 알려줄게. 당신은 잘 할 수 있을거야. 절제된 음색을 낼 수 있다면 아주 작은 틈새를 채우는 일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테니까.
미, 시계는 마음에 들어? 헬멧의 일부를 변형해서 만드느라 조금 오래 걸렸어. 당신하고 어울리기엔 좀 투박한 모양이라서 걱정도 되고. 우리의 첫 걸음은 같은 곳=죽음을 위해 뗀 발자국이지만, 이제 당신의 끝까지 어울려줄 수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해. 사실 그 시계에 내 이름 말고, 당신의 이름을 새긴 건 그 조그만 이름 조각을 보고 당신이 이곳에 남아주었으면 해서 그랬어.
하지만 떠나고자 하면 막지 않을게. 나와 다른 길을 걸어가는 타인을 억지로 끌어오고 싶지 않고, 그게 유쾌하지도 재밌지도 않다는 건 잘 아니까. 그래도 마지막에 떠나게 된다면 꼭 작별인사는 건네고 가. 이게 내 소원권이야.
슬프지만 일어나는 법을 아는 베이스. 어쩔 수 없이 서글퍼지는 때가 온다고 말한지가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우리에게는 또다른 ‘어쩔 수 없는 때’가 다가오고 있네. 그래도 슬퍼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야. 실컷 울고 난 다음에는 내일을 생각할 수 있는 힘도 같이 돌아오니까.
친구를 기다리기 위해서는 변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만큼, 당신은 당신으로서 돌아가야겠지. 저 거대한 별의 일부가 되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친구를 맞아줄 수 없으니까.
서왕모, 친애하는 의사선생. 이해받지 못하며 홀로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아온 우리들이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거란 생각을 종종하고는 해. 그랬더라면 조금 더 외로움을 일찍 덜어낼 수 있었을까, 내가 찾던 해답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가정을 해도 소용없겠지.
나와 달리 불가해에 직접 몸을 부딪히고,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걸어온 선생. 그 길에서 만난 타인이, 도왔던 사람이, 약속이 당신을 無의 바다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붙잡을 닻이 되길 바라.
두 병의 향수는 여전히 내 코트의 품 속에 넣고 다니는 중이야, 아로마. 어디에 두고 다니다가 잃어버릴까봐. 우리 사이의 공통점을 찾자면, 당신의 말을 빌려 ‘필연’적인 만남으로 일을 선택했다는 것일까. 세상은 가끔 선물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안겨주고, 재앙처럼 평생 품고 갈 줄 알았던 것들을 빼앗아가. 그래도 당신이 실망하고 슬퍼하던 내게 말해주었던 것처럼, 필연은 찾아올거야. 하나의 불행이 있으면 언젠가 하나의 행운이 찾아오듯이.
당신은 그런 희망을 남에게 전해주는 법을 아는 사람이니까. 모든 향이 전부 날아가버리더라도 그것 하나 만큼은 남아있을테니까, 나는 그걸 할 줄 아는 법을 몰라. 그러니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줘.
내가 시계를 만드는 법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해, 아에테르. 꽤 급한 일정이라 서둘러 만들어야 해서 미처 다 보여주지 못했지 뭐야. 대신 가이아로 돌아가게 되면 새로운 시계를 만들 때 반드시 당신에게 보여주겠다고 약속할게. 톱니바퀴가 일정하게 돌아가는 모습이, 무대에서 함께 춤추는 것과 또 닮은 구석이 있거든.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아름답다는 걸 알고 있겠지만, 역시 아에테르라면 ‘그렇다고 *하나*가 되고 싶은 건 아니야!’ 라고 말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안심돼. 나중에 공연 보여주겠다고 한 것도 잊지 마.
아, 맞아. 걱정하지 마, 아울로슨. 당신 바이저는 내가 제대로 고쳐놓을 예정이거든. 우리가 저 붉은 바다 속에 뛰어들면 말짱도루묵이 된다고 해도 말이야. 가끔 당신을 보고 있으면 헬멧을 쓰고 있을 때의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생각하게 돼. 저 너머의 얼굴은 무슨 색을 가지고,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져.
볼 수 있어서 좋았어. 나와는 전혀 다른 눈매도, 색도, 표정도. 역시 ‘달라서’ 좋은 것 같아. 안 그래? 상담사 입장에서 볼 때는 어때?
고지식하고 올바른 형사 아크아바. 우린 아주 많은 것이 다르지만, 결코 진정한 ‘해解’를 얻을 수 없는 질문을 들고 이 우주선에 올랐다는 점은 꽤 닮았다고 생각해. 그게 사실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도. 그걸 당신은 스스로 어리석다, 혹은 고집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내 생각에 삶이란 평생을 가도 알 수 없는 질문의 답을 알기 위한 여정이야.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그리움은 무엇이고 사람은 선할 수 있는 존재인가.
나는 신념이랄 게 없었지만, 그런 것을 가진 이들은 부서지는 순간을 괴로워하고 원망했어.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지 않도록 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평범한 질문에 매달리고 휘청거리는 일은 꼴사나운 게 아니야. 그저 살아가는 중인거지,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의 작은 양 위니비니. 언젠가 당신이 스스로가 겁이 많다고 했던 말을 들었던 것 같아. 우리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그 점일거야.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겁이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거든. 그래서 늘 오지 않을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며 도망쳐다녔어.
하지만 당신은 몰라서 무서웠기 때문에 알아가고자 했다고 말했지. 알고 나면 두렵지 않다고. 앎이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라는 걸 일찍이 알았을텐데, 포기하지 않고 알고자 하는 당신은 내가 아는 제일 가는 용기있는 탐험가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마음에 담고 있는 유보. 떠다니는 당신을 세상에 잡아주고 있는 것은 필시 그의 존재겠지. 나는 타인과의 헤어짐을 가정할 수 없는 인연도, 깊이도 상상할 수 없지만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렴풋이 내가 모르던 것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어.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칠 수 있는 인연이 있기도 하다는 걸.
그래서인지 늘 그랬듯 안심하게 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타인을 아는 당신이라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걸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을 것 같거든.
유와, 오늘의 기분은 어떤가? 당신이 이 마지막 시험에 최선을 다하리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어. 추락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만큼, 그 때가 오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추락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을테니까. 우리가 그것을 이기지 못한다면 당신이 기다리고 있던 진정한 최후의 순간이 될까? 우리가 통로가 되어 ‘고향’을 멸망시키는 단초가 되는 것만큼 절망스러운 일은 없겠지.
나도 최선을 다할거야.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이유랑은 다르겠지만, 역시 내가 아무리 외롭다고 해도 ‘하나’가 되어 외로움을 없애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거든.
공동화분관리인 유타, 우리 화분은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해봤어? 나는 최근에 하루에 한 번씩 가서 살펴보고 있는데, 왠지 대책없이 수가 늘어나는 것 같아. 온갖 동물 모형도 섞여서 꼭 작은 모형정원같이 되어버렸어. 이것때문에라도 우리는 다시 돌아와야해, 이걸 그냥 죽게 둘 수는 없잖아. 가이아로 가서 어디엔가 심어두던가 해야지, 안 그래?
당신에게는 또 친구도, 가족도, 소중한 이들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그것’의 붉은 시선을 마주치면 당당하게 말해,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하나는 안되겠다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도연이 널 불렀었는데, 그것과 마주하기 전에 미처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여기에 미리 적어둔다. 볼지 안 볼지는 모르지만. 사실 다시 같이 일할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니던 와중에, 나는 누구랑 같이 다닐 생각은 없냐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네가 떠올라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수년간 하지 않고 살았지. ‘나’를 보여주지 않고 그저 그런 대로 넘기려고 했던 게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었던 이유고, 공통점일거야.
차이가 있다면 너는 기꺼이 그래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벽을 부수고 성큼성큼 넘어와버린다는 거겠지. 얼마나 떨리고 스스로가 부끄러웠는지 넌 평생 가도 몰라. 네 고민은 GAiA에 돌아간 다음에 천천히 얘기해줘. 돌아가게 된다면 서로의 인생을 들려줄만큼 시간이 아주 많을테니까.
녹색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면 안심되는 이솔프. 우리의 인생은 같은 패를 뒤집어놓은 것처럼 닮았지. 나와는 다른 불가해한 타인들 사이에서 자라난 인생. 슬프지 않아 외로웠던 나와, 슬펐기 때문에 외롭기를 선택한 당신. 닮은 듯 다른 인생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분해 내는 것은 마치 모래사장에서 알갱이를 하나씩 골라내는 일처럼 느껴지는군. 이것은 작고, 이것은 크고.
당신이 스스로 ‘나’를 찾아냈을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에 대한 증명을 찾고 있다면 내게 해준 말을 증거로 건네주고 싶어. 불가해한 타인을 규정하지 않은 채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분명한 ‘이솔프’의 의견이라고 생각하거든.
제이, 혹시 가져온 피아노는 쳐 봤는지 궁금한데, 아직 물어보질 못했어. 그 피아노가 네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길 바라. 휴게실의 피아노는 부서져버렸고, 당신이 치던 오래 전의 피아노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겠지만, 살다보면 이렇게 부서지고 망가진 것이 다른 형태와 인연으로도 찾아오는 법인가봐. 나도 이제야 조금 이해하고 있어. 사라진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자신이 알 수 없는 것, 달라지고 싶은 것, 변화하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히 물어보는 건 굉장한 용기야. 나는 여태 그러지 못했거든, 그래서 알아. 그런 질문을 했다는 건, 다른 사람과 좀 더 이어지고 싶다는 말로 이해할게. 그러려면 힘낼 수 밖에 없겠다. 닿고자 함은 우리가 타인일 때에만 가능한 일이니까.
로저, 황혼을 닮은 별바다를 표류하는 우주 해적이 되어 본 소감은 어때? 이만한 붉은 바다는 어디 가서도 찾기 어려울거야. 물론 그게 180억의 자아가 담긴 용광로라는 사실을 잊을 수만 있다면 더 낫겠지만. 우리가 닮은 점? 잘 모르겠어. 슬프게도 어디에나 널린 인생을 걸어왔다는 것이 공통점이라고 하면 공통점인가?
비록 이제 우리는 지구의 푸른 바다를 볼 수는 없겠지만, 살아가기로 했으니까, 한 번만 더. 인생의 가장 거대하지만 마지막은 아닐 파도를 넘어 돌아가자.
우주 최고의 바리스타 캐스터, 오늘의 날씨는 좀 어때? 우주 최고라는 말을 지적하지는 마, 어쨌든 지금 우리가 표류하고 있는 태양계에서는 당신을 따라올 ‘바리스타’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어버렸잖아. 매일 아침마다 당신의 커피를 마시면서 타인이 주는 상냥함에 대해 생각해. 시고 쓴 맛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달콤함에 대해. 그것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시간을 쓴 다정함에 대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건넬 수 있는 다정함을 아는 당신이라면 우리가 별개로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을테니까. 여기까지만 쓸래.
어떤 트렌드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멋쟁이 디`토! 용감하고,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당신과 내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는데, 우린 생각보다 꽤 다른 사람이더라고. 굳이 골라보자면 우린 아직도 ‘운이 좋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내가 당신의 농담을 좋아하는 것. 이걸 말했더니 다들 이상하게 보더라. 나는 늘 당신의 농담을 좋아했다는 걸 알아줘.
트렌드Trend 라는 것은 그 자체로 변화이고, 물결이고, 끊이지 않는 흐름을 의미하잖아. 그저 갇혀있는 어항 속에서는 흐를 수 없지. 당신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것이 왜 홀로 존재해야만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대답해버려. 트렌드는 ‘하나’로는 만들 수 없다고.
어떤 작은 쓰레기에서도 쓸모를 찾아낼 수 있는 만능 고물상 페이. 어린 날의 그림자에 붙잡혀 걸어온 억울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 세상은 불합리하게도 딱 한 순간 때문에 평생을 고통에 빠져살게 하면서도, 어떤 때에는 딱 한 순간을 바라보며 조금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그게 정말 이 우주의 원망스러우면서도 그저 원망할 수 없게 만드는 점이지.
당신은 나와 달리 욕심쟁이니까, 그 과거마저도 끌어안고 내일로 갈 수 있을거야.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과거지만 그 순간으로부터 걸어온 당신의 길이 존재증명의 시험에서 내가 누구인지 선명하게 가르쳐줄테니까.
四 라는 글자를 새기면서 당신과 어렴풋이 닮았다고 생각했어. 말한 글자를 찾기 위해서 AI에게서 고대-지구의 글자를 찾아보는데, 어떤 곳에서는 죽음과 같은 음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 그런 동시에 가장 안정적이고 꽉 막힌 모양을 가진 게 어울리지? 서로가 걸어왔던 인생처럼, 지울 수 없는 죽음이나 이해할 수 없이 막혀버린 타인들과 같이.
여전히 생과 사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면, 시계를 봐. 톱니바퀴가 계속 돌아가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어.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답은 이전의 답을 제외하곤 그것 뿐이야. 차이점을 나열하자면 공통점처럼 한도 끝도 없어서 생략해야겠어. 일단 나는 요리를 못하고 당신은 GAiA 제일의 요리사라는 것부터.
상냥한 탐정 헤이즐, 연기도 잘하고 눈물도 많은 탐정 양반. 우리는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하지.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인가봐, 당신이나 나처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이가 되던, 파트너가 되던, 친구가 되던, 혹은 그저 우연히 사 주간 함께한 아무것도 아니었던 동승객에 불과하던 상관없이.
그래도 역시 다른 점이라면, 당신은 잃어버린 인연을 기억하면서도 인연을 이어가길 포기하지 않았다는 부분일까. 나는 오랫동안 그게 무서워서 피해버렸는데 말이야.
글자는 빼곡히 새하얀 여백을 채워간다. 한 두 줄이나 채울까 싶었던 글은 생각에 생각을 더해 수없이 불어난다. 어느덧 수첩의 빈 공간은 딱 한 장. 마지막 페이지밖에 남지 않았다. 고민하던 시계공은 직접 건네지 않을 편지를 그곳에 마지막으로 써내려갔다.
직접 전해주지는 않겠지만, 혹여 돌아올 수 없게 된다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을.
─ 친애하는 동승객 여러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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