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 AU
미안합니다너무그뭔씹으로 길어져서 LOVE....
| 이상한 가게
금요일은 49번지에 위치한 그 가게를 처음 보았을 때 꽤나 절묘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처음에는 그곳이 가게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반지하를 포함해 2층을 이루고 있는 그 건물의 너비는 상당히 좁았고, 하필 양옆에는 커다랗고 번쩍거리는 삼층짜리 카지노와 십오층짜리 소규모 캡슐호텔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휘황찬란한 가게들 옆에서 고작 4m² 면적을 가진 회색빛 건물에 관심을 주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이곳 저곳을 오가며 배달을 할 때 할 만한 생각이라곤 주변의 거리를 보며 제멋대로 머릿속에 소설을 써내려가는 것 뿐이었기 때문에, 금요일은 불청객처럼 사이에 끼어버린 그 건물을 볼 때마다 종종 자기 좋을 대로 추측하곤 했다. 몇가지 가설을 써내려간 뒤에는 머릿속의 금요일, Friday, Cuma, الجمعة, 金曜日, venerdi 등등이 어떤 것이 제일 그럴듯한 소설인지 평점을 내리고 하나를 골라낸다. 최근 금요일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 내용은 이것이다:
폭력이 곧 대화고 힘이 정의가 된 도시에서 공권력이란 단어는 우스갯소리로 전락한지 오래였으므로 이 도시의 개발계획조차 사적인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들의 뜻에 넘어갔다. 그러나 폭력을 휘둘러 얻은 권력의 속성이 으레 그러하듯 그 주인은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순식간에 바뀌었고 그런 일은 논할 가치조차 없이 흔했다. 제일 짧은 경우는 한시간 반이었는데, 듣자하니 30여년동안 언더보스에 머무르며 불만을 품은 채 기회를 고르고 고른 끝에 그의 보스를 사살했다고 한다. 쿠데타에 성공한 장밋빛 미래에 대한 환상에 빠진 그 얼간이를 죽여버린 것은 그가 가장 총애하던 자식이었다. 금요일은 드물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농담거리가 된 멍청이의 이야기를 듣고 혀를 쯧쯧 차며 지나갔다.
어쨌든 이 도시는 그런 곳이다. 그러니 권력을 쥐는 사람 입맛 따라 도시개발은 백지가 되거나 뒤집히거나 말이 바뀌거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덕분에 신축 건물들은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 억지로 끼워넣은 블럭처럼 세워지고는 했고, 가끔 그 조그만 회색빛 건물처럼 별 이상한 곳에 툭 튀어나온 것들도 생기고는 했다. 금요일은 틀림없이 이름없는 회색 건물 또한 그런 식으로 세워졌다고 믿었다.
눈에 띄질 않으니 장사가 잘 될리도 없는 위치. 몇 번 여러 가게가 들어서는 듯 했지만 어느 순간 보면 다시 텅 빈 채 주인을 구하고 있었고, 가끔은 누군가 세를 들어 살기도 했으나 이 도시에 질려버려 나간건지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거기에 한창 기싸움을 하던 도시의 가장 거대한 두 조직이 세력을 정비하기 위해 일시적인 휴전을 맺으면서 문제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지도를 펼쳐놓고 땅따먹기 협상을 하는 중에 딱 그 카지노와 캡슐호텔 사이를 선으로 주욱 그어버린 탓이다. 지역 지도에조차 표기되지 않은 그 49번지의 건물은 결국 양 세력의 경계에 위치하고 말았다. 거기에 그 인근을 중심으로 중소규모의 조직도 틈바구니에 끼어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지라 결국 수 년간 건물은 주인을 맞지 못한 채 텅 비어있었다.
이름 모를 건물 주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금요일은 그곳에 딱히 주인이 들어오길 바라지 않았다. 어느 쪽도 아닌 경계의 위. 회색지대. 어중간함, 어영부영, 엉거주춤. 불 이 꺼져 아무도 반기지 않는 그 건물……. 그것에 동질감을 느꼈다. 그냥 여러 사정으로 비어있을 뿐인 회색 건물에 동질감을 느꼈다고 하면 누군가는 비웃을지 모르지만, 사람은 원래 무기물에도 자신을 투영하고 어쩌고 저쩌고, 대충 그런 법이다.
그래서 어느날 그 건물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했을 때 금요일은 아쉽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저 건물에 주인이 생긴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최근에는 앞서 말한 사정들 때문에 정말 오랫동안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주거를 위해서인지, 장사를 위해서인지. 싼 값에 누가 또 속아 넘어가 들어온 게 분명하다. 이번에는 몇 달만에 나가게 될지 궁금해하며 그는 곧 이 건물에 대한 사실을 잊었다.
금요일이 다시 이를 기억해 낸 것은 그로부터 삼 주일 후였다. 우연히 그 근방을 지나가다가 여전히 건물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살짝 호기심이 들었다. 보아하니 건물 입구 위에 간판도 새하얗게 비어있고, 입간판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게가 아닌가? 총총 건물의 문 앞에 다가가고 나서야 이 건물에 들어온 게 가게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앞에 종이로 된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Bar 『 Tempus 』
술집? 술집이었다고? 아니, 당장에 간판을 새로 바꿔달고 입간판 내놓고, 온갖 색깔의 풍선 아트를 가져다놓아도 눈에 띌까 말까 하는 곳인데 무슨 배짱으로 문앞에 와서야 볼 수 있는 포스터 한 장을 달랑 붙여놓은거지? 혹시 돈 많은 어느 집 도련님이 취미로 하는 일인가? 그럴 돈 있으면 나나 주지.
온갖 황망한 생각이 든 금요일은 포스터를 쳐다봤다. 제일 위쪽에 크게 쓰여있는 가게 이름 아래에는 영업시간이 적혀있다. P.M. 5:00 - A.M. 4:00. 지금은 오후 다섯 시 십분. 딱 영업을 시작했을 시간이다. 마침 오늘 의뢰받은 배달일은 방금 다녀온 것으로 끝나기도 했고, 대체 무슨 생각 없는 인간이 이런 건물에,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러 왔는지 보기나 하자. 그런 심정으로 금요일은 바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하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건물의 내부가 드러났다. 안쪽은 생각보다 무척 깔끔했고, 단정했다. 은은한 조명은 거슬리지 않는 정도였고, 가게의 벽면들에는 톱니바퀴가 훤히 보이는 아날로그 시계들이 여럿 걸려 돌아가고 있었다. 초침이 일제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취향인가? 거 참 특이하네.
그나저나 프론트 바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영업시간인데.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던 참에 가게의 좀 더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셔츠에 단정한 베스트 차림. 거기에 손에 마대자루가 들려있는 걸 보니 청소라도 하고 있던 모양이다. 오른쪽 눈가의 흉터나 묘한 눈동자 색이 특징이라면 특징일 청년이 들어온 금요일을 보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손님이라고 해야하나? 사실 뭘 사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금요일이 고민을 끝내고 대답하기도 전에 청년이 먼저 말했다.
“아르바이트생?”
“넹?”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자기도 모르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던건지, 청년이 눈을 깜박이며 말 없이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금요일을 향해 그가 다시, 천천히 이야기한다.
“문에 붙어있던 포스터를 보고 들어온 거 아니야?”
포스터? 포스터가 뭐 어쨌는데. 금요일은 그대로 뒷걸음질 쳐 자신이 열고 들어왔던 문을 휙 잡아당겨 앞에 붙어있던 포스터를 확인했다. 바의 이름, 영업시간, 적혀있는 대표 메뉴를 쭉 지나쳐간 금요일이 마침내 그 대목을 발견했다. 아래쪽에 제법 큰 글씨로 ‘아르바이트생 상시 모집합니다’ 라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아, 이런 게 있었다고? 가게의 이름과 영업시간만 보고 들어왔더니 미처 못 본 모양이다. 내용을 확인한 금요일이 문손잡이를 놓고 머쓱하게 도로 들어왔다.
“보고 들어온 게 아니었구나.”
“아하하~….”
뭐라고 대답할지 망설이는 사이에 이름 모를 가게의 주인은 마대자루를 벽에 기대놓고 프론트 바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뭘하는 건지 호기심에 쳐다보는데, 잔을 하나 꺼낸 그 사람이 물었다.
“술 마셔? 아……혹시 아직 나이가 안 되나?”
“아, 아뇨오~마실 수는 있죠! 근데 오늘 뭘 사려고 온 건 아니고요…….”
주저하는 금요일을 보고 미성년이라고 생각한건지 주인=바텐더가 물었다. 비록 이 외모를 이용하여 약 60년 정도는 청소년이라는 거짓말로 요리조리 회피하며 먹고 살기는 했지만, 조금 맹해보이는 이 가게 주인에게 진실을 고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어보였기 때문에 질문을 부정했다. 그러자 주인은 단 것은 좋아하느냐, 주량은 어떠냐 따위의 질문을 하더니 곧 언더바에서 몇 가지 병을 꺼냈다.
“돈은 안 내도 괜찮아. 처음 왔으니까 그냥 내가 사주는 것으로 할게.”
사러 온 게 아니라는 말을 신경 썼는지 청년이 그렇게 말했다. 진짜 이렇게 해서 장사가 된다고? 역시 어느 집 도련님이 취미생활 중인 게 아닌가 의심이 갔다. 금요일은 이리저리 눈을 굴렸지만 일단 그냥 준 다는 것을 거절하기도 뭣해서 얌전히 프론트 바 앞에 가서 자리에 앉았다. 내친 김에 호기심을 해결할 생각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장사는 되구요?”
“응?”
“아니이~, 들어보세요. 이 건물 원래 눈에도 안 띄는 곳에 있잖아요. 그런데 간판도 하나 없이 손님이 오긴 하나~저는 또 걱정이 되서 그렇지요…….”
“불만 켜져 있어서 궁금하다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어. 다들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문구를 보고 온 건지 물어볼 필요도 없는 복장이긴 했는데…….”
그렇군, 벌써 이 도시의 차가운 진실과 일부 마주했나본데. 아무래도 근방의 조직원이라도 몇 명 본 모양이다. 술을 섞던 청년의 얼굴이 살짝 늘어졌다.
“들어온 사람들을 그냥 보내기는 좀 그래서 한 잔씩 줬어. 다음에는 술 마시러 왔다고 오더라고. 아는 사람들도 데려올 때도 있고. 그래서 손님은 있어.”
“그거 정말 운이 좋았네용…….”
“그래?”
“그렇다니까요~. 이 도시에 살면서 명심해두면 좋은 게 몇가지 있는데…….”
진짜 매물 사기당한 도련님 같은 거 아냐? 가히 의심 갈 정도로 순진하게 되묻는 언행에 결국 금요일은 잊고 있던 상냥한 오지랖을 단전에서부터 끌어내어 수다를 빙자한 잔소리를 했다. 사실 공짜로 받기엔 뭐해서 술 한잔 값으로 건내는 정보이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마신 술은 맛이 꽤 좋았다. 이름이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이랬나. 손님이 없지 않은 이유는 알 만했다. 그래도 이렇게 가다간 얼마 장사를 못 할텐데. 뭐, 그게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내 코가 석 자란 말이야.
금요일이 적당한 인사치레와 함께 가게를 나서려고 할 때 즈음에 가게 주인이 말했다.
*보드카, 쿠앵트로, 크랜베리 주스, 라임 주스로 만든 칵테일. 짙은 분홍빛에 가까운 색을 띈다.
“나중에 또 봐.”
또 볼 일은. 저대로 가다간 얼마 가지 않아 가게 접고 돌아가거나 누군가에게 잘못 시비가 걸려 비명횡사해버릴거야. 그래서 이름도 묻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는 누군가의 이름을 알아서 좋을 게 없다. 이름을 알아봤자 마음 속에 부르지 못할 짐만 쌓여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요일은 그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은 채 그저 사람 좋게 손만 흔들었다. 어차피 남이고, 신경도 쓰지 않게 될 일이다. 내일부터는 배달할 때 다른 길로 가야겠다.
| Bar 『 Tempus 』
“자~Bar 『 Tempus 』에서는 뭐라구 했지요 손님? 네, 맞습니다, 싸움절대금지, 오, 빠른 대답. 추가점수 드립니다! 자 그럼 이제 승패를 건 필살의 묵찌빠를 하세요, 이긴 분에게는 이걸로 때릴 기회 딱 한번 드립니다아~”
금요일이 뿅망치를 흔들거렸다. 왁자지껄한 웃음이 작은 바에서 흘러나왔다. 종종 다른 조직원들끼리 시비가 붙으면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금요일이 하는 행동은 꽤나 용감하기도 했지만, 이건 또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이 가게는 무척 절묘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어 두 거대 조직과 서너개 중소조직의 세력권 사이에 걸려 있었다. 때문에 누구나 이 장소가 우리네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 작은 싸움이 조직 간 다툼으로 번지기 딱 좋았다. 누가 횡포를 부리는 순간, 다른 조직원이 ‘지금 여기가 네놈들 영역이라고 주장하는거냐?’라고 말하면 대답할 말이 궁했다. 몇십년 전의 거대한 충돌에서 소모한 힘을 전부 회복하지 못한 조직들은 아직 균형을 깨뜨리길 원하지 않았고, 다른 조직에게 빌미를 주는 일을 엄금했기 때문에 심지가 타오를랑 말랑 하는 이 가게의 평화는 가까스로 지켜질 수 있었다.
삑! 뿅망치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울렸다. 장난감으로 얻어맞은 조직원의 얼굴이 울그락푸르락 해졌지만 여기에는 자기만 있는게 아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입을 꽉 다물었다. 묵찌빠에서 승리한 이는 그거 하나가 뭐라고 으스대며 웃고는 바에서 잔을 닦던 바텐더에게 외쳤다.
“이봐, 셴야! ‘파라다이스Paradise**’ 한 잔!”
**진, 살구 리큐어, 오렌지 주스, 레몬 주스로 만드는 칵테일. 노란색 빛을 띈다.
잔을 닦던 바텐더, 셴야는 잔을 내려놓고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금요일은 눈을 깜박이면서 방금 술을 주문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요즘 꽤 씀씀이가 커졌네, 저 사람은. 전에 왔을 때엔 큰 건 하나 맡았다더니 성공했나보지. 전에는 XANUDU-981 구역에 갔다고 했던가~? 금요일이 이리저리 정보의 조각을 맞추어보며 바텐더를 흘끔 바라본다. 그의 고용주이자 바텐더는 살짝 웃으면서 파라다이스 한 잔을 금요일에게 내밀었다. 금요일은 잔을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만 가져간 뒤 서빙용 쟁반에 얹었다. 잠시 금요일의 손을 주시하던 셴야는 뒤를 돌아 장부를 꺼냈다. 온갖 재생시술과 개조수술이 판치는 이 시대에 아날로그틱한 방법이지만 이 가게에 걸린 오래된 시계들을 본 사람들은 가게의 주인이 수기로 장부를 작성하는 것을 순순히 납득했다.
뭐, 저건 장부가 아니라 정보판매용이지만. 원래 뻔뻔하게 행동할수록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금요일은 속으로 손님에게 쏙 혀를 내밀고는 겉으로는 싹싹하고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 칵테일을 배달했다.
“여기 ‘파라다이스’ 한 잔입니다 손님~”
신발에 달린 롤러를 쭉 밀어 다시 프론트 바로 돌아온 금요일은 셴야가 기록하는 장부를 흘끔 흘겨보았다. 그의 고용주 취향대로 정한 암호를 알지 못하면 평범한 수기 장부처럼 보이는 노트의 내용이 보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어왔던가! 금요일은 나지도 않는 눈물을 촉수로 훔치는 시늉을 했다.
결국 금요일은 그 날 이후 이 바에 다시 찾아오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이 신경쓰이기도 했고, 이리저리 배달을 오가는 도중 나쁘지 않은 생각도 떠올라서였다. 게다가 술 맛을 보니 가게는 단골의 입소문만 탄다면 표면적인 장사 수입도 그럭저럭 괜찮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힘이 있는 자들은 으레 자기만이 아는 특별한 무언가를 찾고는 하기에, 종종 고급스럽게 포장한 바보다는 이런 외진 곳에 있는 바를 은근히 선호하기도 했으므로.
반갑게 맞아주는 가게의 주인에게 아르바이트생을 하겠다고 말한 뒤(그 때 금요일은 이 가게의 주인이자 바텐더 이름이 셴야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열성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셴야님, 자, 한 번 들어보세요. 이런 최적의 위치에 있는 가게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칵테일 팔기? 아니죠! 정보라고요, 정보. 알코올 들어가면 사람들이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쉽게 불어버리거든요. 하지만 그 조각조각이 모이면 꽤 명확한 단서가 되는 법이에요. 물론 대놓고 하진 않을거구요. 솔직히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런 것 한 두가지 쯤은 하고 있어야해요. ‘저긴 건드리려면 건드릴 수는 있지만, 그러고 나면 귀찮아 질 일이 좀 더 많으니까 내버려둘까’ 가 우리 목표예요! 아……그런거야? 그런거예요.
금요일은 손수 이 맹한 고용주에게 자연스럽게 수신호를 보내는 법이나 암호문 작성법이나 이런저런 것들을 알려주었다. 이게 바로 이 미친 도시에서 수십년 넘게 살아온 비결이다. 그걸 제대로 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고, 정보상으로서 기능하기까지도 또 몇 년. 이제는 제법 안정적으로 자리잡았다. 거진 몇 년을 알고 지내며 금요일은 셴야의 사적인 정보도 얻게 되었는데, 이 도시의 사람이 아닌 건 맞았지만 처음 상상한 어디 있는 집 도련님이라는 추측과는 정반대의 사정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여태 썩 좋은 환경에서 지낸 것 같지도 않던데, 이 성격으로 여태 살아남은 게 운이라면 운이다.
이제 그들은 바텐더와 아르바이트생, 정보수집가와 배달부로 성실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금요일은 이 건물의 2층에 머물 권리도 얻었다. 나쁘지 않은 동업자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셴야도 늘 금요일이 없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계속 일해주었으면 좋겠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4일 근무 및 복리후생 보장과 유급휴가 필수, 4대보험, 공휴일 보너스 등을 제안했다. 어차피 잘 되어가던 가게에서 나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몇가지 조정을 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받아들였다.
금요일이 과거의 순간을 추억하는 동안 어느덧 시끌시끌하던 가게는 조용해졌다. 곧 마감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마지막 손님까지 나간 뒤에야 가게를 쓸고 닦고, 식기를 정리하고, 창고 정리를 끝마쳤다. 이제 금요일의 업무는 몇 군데에 배달을 다녀온 뒤 그대로 퇴근하면 끝이다. 오늘은 금요일, 그러니까 그가 휴일로 지정한 날 중 하나였기 때문에 오후의 가게 오픈에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 시간을 틈 타 금요일은 간만에 도시 외곽에 갈 예정이기도 했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용, 사장님~”
금요일이 가볍게 신발 앞을 바닥에 두드리며 ‘배달’할 것을 챙겨들었다. 금요일이 오늘부터 도시 외곽에 다녀올 것임을 아는 셴야는 마지막으로 가게를 닫을 준비를 하기 위해 열쇠를 챙겨들다가 고개를 돌렸다.
“응, 너도.”
“아무렴요~, 배달은 제대로 끝내고 갈 테니 걱정 마시구요!”
“그래, 아……. 참.”
“넹?”
금요일이 말할 것이 있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셴야가 웃으면서 바의 한 구석에 처박혀있던 접이식 우산을 건네주었다.
“오늘 오후부터 비가 많이 내린대. 가져가.”
“에엥, 그래요? 사장님 아녔음 큰일날 뻔 했네! 그럼 저 갈게요? 무슨 일 있으면, 꼭, 꼭! 부르시구요, 알았지요? 별로 중요한 일 아니니까 금방 올 수 있어요!”
가끔 허술하게 구는 사장을 두고 가는 게 걱정되는지 몇 번이고 당부를 한 금요일이 손을 한껏 흔들며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셴야는 그 모습을 보며 한 번 웃고는 옷을 정리한 뒤 가게의 문을 잠근 뒤 팻말을 ‘CLOSED’ 로 뒤집었다. 금요일은 마치 세상이 단 한순간에 뒤집힐 수 있음을 아는 사람처럼 종종 저런 걱정을 내비치고는 했다. 하지만 여태 몇 년간 이 근방은 평화로웠다. 가게에 찾아오는 조직원들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호탕하게 웃는 붉은 머리의 청년이나 그가 어느날 어깨에 팔을 두르고 끌고 온, 꽤나 친해보이는 사이의 분홍빛 머리를 가진 무심한 청년, 늘 기이한 장미향을 몰고 오는 ‘조향사’, 서늘하고 냉랭한 표정의 검은 드레스를 입은 ‘도자기 인형’……. 비록 요즘은 다들 발걸음이 뜸한 듯 하지만 말이다.
별 일이야 있을까. 셴야는 열쇠를 주머니에 찔러넣고 2층을 향해 올라갔다. 오후에 오픈을 하기 위해서는 빨리 잠자리에 드는 편이 좋았다.
| 폭풍은 예고없이 찾아온다
덜컹. 문이 한 차례 흔들렸다.
셴야는 무료함에 홀로 큐브를 돌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오늘 오후부터 돌풍을 동반한 폭우가 내린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오픈 한 시간 전인 네 시부터 비가 심상찮게 쏟아지더니, 오후 다섯시 부터는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지금은 벌써 아홉시. 밤이 찾아와도 폭풍을 그칠 기미가 없었고, 이제는 창문틀을 뽑아낼 것 처럼 빗소리와 바람소리가 윙윙 울렸다. 이 건물이 그리 방음 좋게 지어진 곳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온갖 문을 꽉 닫아두었는데도 빗소리가 이만큼 크게 들릴 정도로 나쁜 건 아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는 ‘음, 오늘은 손님이 별로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고, 창문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오늘은 아무도 안 오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게를 찾아주는 고마운 단골 손님들은 많지만, 솔직히 생각하건대 이런 미친 바람을 뚫고 와서까지 마실만한 가치는 없는 술이다. 우산을 쓰고 와봤자 옷이 젖는 것을 피하기 어려운 날이니 그냥 얌전히 집에나 있는 게 좋았다. 만약 이곳에 자리를 구할 때 바로 윗층까지 구해 주거구역으로 쓰지 않았다면 셴야도 오늘은 얌전히 문 닫은 채 내버려두고 출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자리를 구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에게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법이나 술을 고르는 법 등을 알려주었던 전 주인의 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즈음에 마피아 간의 항쟁이 심해져 보호세를 과도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가 가진 재산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가게를 처분한 뒤 다시 바를 차릴 곳을 찾아 떠도는 데, 마침 이 도시에 도착한 뒤 만난 부동산업자가 여태 매물이 나가지 않은 좋은 건물이 있다고 꼬드겼다. 솔직히 허술하고 잘 속는 성격의 셴야도 의심이 갈 만큼 싼 값인지라 건물을 직접 보기는 했다. 위치가 장사하기 좋은 것은 아니지만 셴야는 이만하면 괜찮다고 여겼다. 이전에 있던 가게도 그리 목 좋은 곳에 있는 게 아니었지만 술 맛을 들이고 찾아와주는 이들 덕에 먹고 살만큼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건물을 계약하고, 자리를 잡았다. 가게가 들어섰으니 간판을 달아야겠지만 턱도 없지. 그럴 돈은 없었다. 금요일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주었던 아무런 홍보조차 없던 건물은 결국 돌고 돌아 돈 문제가 원인이었다. 결국 하는 것이라곤 지나가다 이게 무슨 가게인지는 알려준다는 식의 포스터 한 장을 문에 붙여둔 일 하나였다.
이 건물에 오랫동안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가게를 열고 얼마 되지 않아 사람 좋아보이고 체격 좋은 붉은 머리의 누군가가 들어왔다. 차림이 아무래도 아르바이트생 구한다는 말 보고 온 것 같지는 않아 물어봤더니 그냥 여기에 불 켜져 있길래 궁금해서 들어왔단다. 왠지 그냥 보내기도 멋쩍어서 칵테일 한 잔 만들어 대접했더니 맛이 괜찮다고 칭찬해주고는 가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솔직히 그 사람이 데려온 이들 중 단골이 적지 않아 늘 셴야는 붉은 머리의 청년에게는 감사의 의미로 여러가지 서비스를 주고는 했다.
그 후로 몇 주 뒤에는 다소 둥글어보이는 인상의 청년도 한 번 방문했는데, 그 사람이야말로 아르바이트생 공고를 보고 왔나 했더니 또 헛다리를 짚었다. 친절하게 여러가지를 알려준 사람이니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아쉬움을 삼키고 그의 머리색과 어울리는 칵테일 한 잔을 건네준 뒤 돌려보냈다. 그랬더니 마치 너의 친절에 상을 내리마, 라고 누가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청년이 다시 찾아왔다. 물론 그가 고용되길 원한다는 말과 함께 들고 온 제안은, 셴야에게는 생각도 못한 당황스러운 내용이기는 했으나 듣고 보니 그럴듯 하다 싶어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덕분에 평범한 바의 지하는 정보판매점이 되질 않나, 암호문을 기록하거나 수신호를 보내거나, 간단한 호신술까지 배워버리게 되었으나 나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직원인 금요일의 말대로 이 도시는 꽤 번잡하고 혼란하며, 다른 세력을 완전히 짓누를만한 제 일의 세력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 심지에 불이 붙을 준비가 된 폭탄 같은 도시였다. 그 폭탄이 터지면 금요일이나 자신처럼 평범한 사람은 그대로 휩쓸려 날아가버릴 것이므로 안전장치 하나 쯤은 마련해두는 게 나았다. 정보란 것은 팔 수도 있으나, 그 자체로 ‘경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세력의 경계선에 위치한 이 조그만 가게라면 더더욱. 역시 사기당한 것 같아, 위치를. 셴야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동안 생각에 빠져있던 셴야를 깨운 것은 다시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였다. 그와 함께 한 순간 바의 불빛도 깜박였다. 혹시 이 돌풍에 전신주까지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명을 한 번 쳐다본 셴야는 큐브를 내려놓고 술병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문 닫을 시간까지 사람이 오지 않을테니 정말 창문 하나 날아가 비바람이 들이닥치기 전에 미리 술병들을 잘 넣어두자는 생각이었다. 술병에는 이 바에 오는 여러 사람들이 걸어둔 이름이 있었다. 졸리 로저의 술이 몇 병. 이건 아로마. 이건 미……술도 안 마시면서 하나 쯤 해보고 싶다고 걸었다. 그 뒤로도 몇 몇 사람들의 이름을 발견하며 남몰래 웃었다. 이름을 걸어둘 만큼 자주 온 사람들과는 오랫동안 이야기 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뭐, 사는 세계가 다른 이들이지만 셴야는 그래도 나름 친구같다고 마음대로 생각했다. 적어도 그들이 일반인인 자신에게 날을 보인 적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맨 위쪽에 있던 술병을 꺼내보니 걸어둔 이름표에는 심플한 세 글자만이 적혀있다. POE. 이게 이 구석에 있었나? 셴야는 고개를 기울이며 조금 더 안전한 안쪽으로 넣어두었다. 생각해보니 요즘은 자주 오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술병을 저 위에 놔둔 줄도 까먹을 만큼. 나머지 사람들도 최근에는 바빠보이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정보상을 한다고는 해도 조직들의 ‘진짜’ 내부 사정은 알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의문은 단순한 수준에서 그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오래 고민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깜박. 깜박. 조명이 또다시 불안하게 흔들린다. 침음을 흘린 셴야는 창고 구석으로 향해 상자를 한참 뒤져 양초와 성냥을 찾아내 가져왔다. 이런 시대에 도대체 이게 무슨 구식이냐, 싶겠지만 이 가게에는 그런 ‘아날로그’가 가득했다. 셴야의 취향이기도 했고,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던 이가 그런 걸 좋아했기 때문에 소모품 중에는 그런 종류가 많았다. 셴야 또한 딱히 쌓인 물건을 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종 시대를 잊어버린 듯한 물건이 출몰하고는 했다. 금요일은 종종 창고를 정리하다 그런 물건이 나오면 황당한 얼굴로 웃었다. ‘저희 집에나 남아있을 줄 알았던 게 여기에도 있네용…….’
혹여나 정전이 될 경우를 완벽히 대비하고 난 뒤에는 할 일을 찾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다가, 결국 습관적으로 잔을 하나 하나 닦기 시작했다. 똑딱거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와 비바람, 문이 덜컹이는 소리, 치직하는 전선의 스파크소리……. 여러가지 소음에 뒤덮여 있었으므로 딸랑, 하고 울리는 문가의 종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빗소리에 묻혀버린 종소리를 대신해 귀에 들려온 건 찌걱……하는 끈적한 액체가 바닥에 달라붙는 소리였다. 퍼뜩 고개를 든 셴야가 뒤를 돌아보았다. 문가에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커다랗고 검은 장우산을 접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몇 분전까지 생각했던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포. 비가 이렇게 내리는 데 온 거야?”
“그럴 기분이라서.”
늘 그렇듯 무심한 투로 답한 포는 물이 쉴새없이 떨어지는 우산을 우산꽂이에 덜컹 걸어두고 천천히 프론트 바로 걸어왔다. 코트를 걸친 어깨는 빗물에 젖었고, 완벽하게 발목에 맞춘 바짓단도 흙탕물을 피하지 못한 것이 보였다. 깔끔 떠는 성격에, 이런 날씨에 올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며 코트를 난로 곁에서 말려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무언의 뜻을 알아차린 포가 걸치고 있던 묵직한 코트를 벗어 얹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셴야는 아주 희미한 향을 맡았다. 코트를 건네기 위해 팔을 뻗은 순간 상대에게서 풍겨온 금속 냄새, 탄 냄새, 화약냄새……. 한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서서 코트를 난로 가까이에 있던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비에 젖어서 이렇게 무거운건가, 이 코트는? 아니면 그냥 내 기분 탓인가?
코트를 걸어둔 채 프론트 바로 돌아오자 턱을 괴고 앉아있던 포가 미간을 손으로 몇 번 문지르더니 말했다.
“에버클리어Everclear*** 가 든 것으로 아무거나.”
“뭐?”
***알코올 도수 95%를 가진 위스키.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위험하기에 주로 칵테일용으로 사용.
갑자기 자주 찾지도 않던 걸…….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포를 바라보던 셴야는 일단 주문대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오늘의 유일한 손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게 안에는 쉐이커를 흔드는 소리 하나만 추가되었을 뿐이다.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어보이는 포를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앞쪽에 칵테일 잔을 밀어주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 질문에도 여전히 대답할 마음이 없는지 앞에 가져다 준 술 잔만 들어 몇 모금을 삼켰다. 술을 가져다주기 위해 가까이 갔을 때 분명, 코트를 받았을 때도 맡았던 향이 났다. 그보다 조금 더 강하게.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이 맡아본 냄새를 모를 수가 없었다. 종종 어떤 임무를 다녀온 직후에 가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이들에게서도 피 냄새는 나긴 했지만, 그런 것 치고는 눈 앞의 청년의 차림새는 단정해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난처하게 눈치를 살피며 행주를 들어 잔을 닦으려던 찰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이곳은……계속 중립지대로 둘 예정인가?”
“오늘따라 뜻 모를 질문만 하네…….”
머뭇거리던 셴야는 긍정했다. 어딘가 한 곳에 속하는 순간 다른 곳에는 빌미를 주게 될테고, 그렇게 된다면 이 도시의 기폭제는 바로 이 가게가 될 게 틀림없다. 딱히 죽고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이 가게에는 자기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무사를 위해서라도 중립지대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선택이 불가능한 문제였다. 대답을 듣고 나선 잠시 말이 없던 포가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중립지대, 를 손에 넣으려는 놈이 있으면 연락하고.”
묘하게 강세가 들어간 단어에서는 발음과는 전혀 다른 뜻이 느껴졌다. 중립지대는 그 어느 곳에도 보고를 할 의무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마치 자신이 그에게 보고를 올리는 듯한 표현이지 않은가? 거기에 그렇게 하라니, 그런 표현은 일개 조직원이 쓰기에는 다소……건방지기도 했다. 이 몇 년간 보아온 포 첼란이라는 사람이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성정을 가지고있음은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그런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로 넘어가기엔 묘한 단어의 선택 뿐이다. 문득 셴야는 그 피냄새가 어디서 묻어왔는지 직감한다. 천조각을 쥔 손이 조금씩 떨렸다. 비바람 소리가 더욱 거세진다. 그에 따라 조명의 불빛이 불안정하게 깜박인다. 그림자와 빛이 순간순간을 오간다.
“……뭐하고 왔어?”
깜박.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모든 것을 손에 틀어쥔 독재자가 미소지었다.
깜박. 깜박.
방금……웃었나? 등골이 서늘해진다. 한순간 어둠이 찾아온 탓에 제대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다시 불빛 아래에서 본 포 첼란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으나, 셴야는 그가 웃었다는 기분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는 손을 앞치마에 문질렀다.
“그냥 평소처럼 집청소를 하고 온 것 뿐이야…….”
느릿한 말투에서는 아무리 둔한 자라도 읽어낼 수 있는 암시가 담겨있다. 그럼 왜 여기에 왔을까? 왜 하필 오늘, 이 비가 내리는 날에……고작 이런 질문들을 하러……. 결국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바텐더가 질문했다.
“오늘은, 술을……마시고 싶어서 온 거지?”
마지막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긴 대부가 붉은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파직. 그 대답을 끝으로 전등이 완전히 나가버린다. 사위는 어둠에 잠기고, 조용한 바 안에서는 늘 그렇듯 똑딱거리는 시계소리와 비바람소리가 들렸다. 셴야는 멍하니 어둠 속을 바라보다가 허둥지둥 프론트 바 위에 올려두었던 양초와 성냥을 찾았다. “잠깐만, 여기 양초가…….” 더듬거리다보니 두꺼운 양초가 잡혔다. 하지만 성냥갑은 도대체 어디있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안 보이는거지. 손은 왜 또 이렇게 미끄러워……. 다들, 다들 어디간걸까. 어떻게 된걸까. 내가 아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건가? 사람이란게 이렇게 한 순간에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곳인가, 여기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을 더듬던 중에 칙,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점이 밝아졌다.
작은 불꽃을 든 단단한 손이 셴야가 올려두었던 양초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은은한 빛 아래에서 마주한 눈빛은 속내를 전부 짐작했다는 것처럼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곳의 조명은 다시 보수하는 편이 좋겠어.”
덤덤하게 조언한 포 첼란이 손에 성냥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꺼져버린 전기난로 근처에서 코트를 빼내어 팔에 걸치는 모습이 성냥의 작은 불빛 안에서 어렴풋이 일렁거린다. 묵직한 발걸음은 그대로 문간으로 멀어져간다. 퍼뜩 정신을 차린 셴야가 양초를 손에 들고 서둘러 뒤를 따라갔다. 꽤 길이가 있는 성냥이라곤 해도, 그것을 입에 문 채로 솜씨 좋게 코트를 다시 걸친 포가 장우산을 손에 들었다.
“또 오지.”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막아주고 있던 세찬 비바람소리가 귓전에 때려박힌다. 자그마한 성냥불은 폭풍의 기세에 이기지 못한 채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한참이나 멍하니 문간을 바라보고 있던 셴야는 손님이 다녀간 가게를 정리해야 함을 깨달았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려던 도중, 찌걱……하는 소리가 났다. 바닥이다. 양초를 든 셴야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붉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닦고 닦아도 완전히 지울 수 없을 것처럼 말라붙어있는 무언가가.
문을 열기 전에……그 사람이 웃었던가?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셴야는 얼굴을 팔에 파묻은 채 비바람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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