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클레어 글 커미션
서나 님(@ gGlcBG6M) 커미션 백업용
'삶의 궤도에 발을 올려놓은 이에게는 허락된 기억이란 유한하다.' 어느 정도 사고가 형성된 이라면 누구나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엘프가 전생의 자신을 망각하거나 인간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어가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평가하는 이는 없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모두가 알고 있듯 기억의 총량은 한정되어 있고 새것을 채우려면 옛것을 놓아두고 떠나야 하니까.
하지만 모든 기억이 의미 없이 스러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지는 선택할 수 없더라도 어떤 기억을 남겨둘지 정도는 선택할 수 있다. 회계 사무소의 지하에 온갖 귀중품들과 함께 잠들어 있는 어느 아버지의 일기가 가장 좋은 예시였다. 읽기 속 용감하고 호기심 많은 어느 소년의 이야기는 그곳의 그 어떤 물건보다 값진 물건이다. 일기를 쓴 이의 기억이 온전치 못한 순간에도 그 이야기는 그곳에서 계속 존재할 테니까.
물론 다른 방식으로 유지되는 기억 또한 존재했다. 이 기억은 두 사람의 기억이었지만,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는 한 명뿐이다. 당사자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종이에 펜으로 기억을 옮기는 대신, 기억을 추억으로 추억이 다시 과거로 옮겨져 보존하였다. 빛바랜 종이처럼 군데군데가 낡은 이 기억은 발더스 게이트에서 시작되었다.
회색 항구는 낮에도 그리 붐비는 곳은 아니지만, 하늘이 복숭앗빛으로 물들 때쯤이 되면, 그 전보다 훨씬 한산해지고는 했다. 높은 곳에서부터 흘러내린 어둠이 하늘을 완전히 덮을 때쯤이 되면 인적이 완전히 끊겨버린다. 밀회를 약속한 젊은 연인이 아니고서야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리라 기대하는 이는 없었다.
어린 윌 레이븐가드 역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 약간의 감상에 젖기 위해 그곳에 방문한 참이었다. 촛불 하나 없는 어두운 바닷가는 심해 여왕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은 석재로 된 계단을 따라 부두 근처로 다가갔다. 같은 날 오후,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방문한 소년은 저 깊은 물 속에서 인어를 보았다. 일렁이는 물결과 바다의 소금기가 눈을 따끔거리게 만드는 탓에 흐릿하기 그지없는 시야로 아주 잠깐 본 풍경이었지만, 소년은 자신이 본 것이 인어가 맞다고 굳게 믿었다. 소년의 동그란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기 눈으로 인어를 봤다는 사실에 잔뜩 신이 난 참이었다. 벌써 인어를 봤으니 조금 더 크면, 더 대단하고 희귀한 생물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아주 유명한 모험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드래곤이나 픽시 같은 생물을 직접 볼 정도로 대단 한 모험가 말이다.
“그러려면 조금 더 커야겠지만….”
소년이 발치의 돌멩이를 툭 찼다. 하고 싶은 모험은 많은데, 자신은 좀처럼 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키나 몸집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도시를 떠나 홀로 모험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소년은 한숨을 푹 쉬더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게 웜의 망루 뒤쪽으로 돌아서 방까지 갈 생각이었다.
소년의 시선이 부두 옆, 나무로 된 다리 위에서 멈췄다. 그 위에 앉아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소년이 화들짝 놀라 그래도 얼어붙었다. 정확히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의 형체가 분명했다.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소년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상대의 얼굴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상대는 그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일렁이는 물결만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상대의 겉모습을 완전히 알아볼 수 있게 되자, 소년은 자신이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게 부주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흐릿한 새벽을 닮은 그녀의 피부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소년의 입이 떡 벌어지며, 다급함이 묻어나는 문장이 흘러나왔다.
“지하 엘프다! 맞죠?”
상대는 소년의 흘긋 바라보더니 다시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드로우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라면 맞다.”
“저 드로우는 처음 봐요!”
소년이 한 발자국, 상대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뭐예요?”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희미한 한숨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에클라브… 오즈렛.”
소년이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몇 걸음 정도로 좁아졌다. 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에클라브에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에클라브 씨는 인어를 본 적 있어요?”
윌의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웃는 얼굴 위로 소년이 어떠한 대답을 듣고 싶은지가 뻔히 드러났다.
“아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에클라브는 윌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윌은 신이 난 것이 뻔한 얼굴로 호기롭게 말을 이어갔다.
“저는 오늘 봤어요!”
“그래.”
에클라브의 반응이 윌의 마음에 들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소년은 그런 걸 신경 쓸 법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늘 오후에 있던 경이로운 만남에 대해 늘어놓을 생각에 사로잡혀, 상대의 반응보다는 하고 싶은 말에 주의가 더 집중된 상태였다. 에클라브는 소년이 이쯤에서 말을 멈추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에클라브의 입장에서 윌은 지나치게 시끄러운 꼬마였고 그녀에게는 말 많은 꼬맹이를 상대해 줄 생각도 그래야 할 의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윌은 말을 멈출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저도 흘깃 본 거기는 한대요. 확실히 인어였어요!”
“…머포크는 본 적 없지만 바다 엘프는 본 적 있다.”
에클라브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녀의 이 말이 윌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말았다. 윌이 몸을 움직여 에클라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바다 엘프요? 보기 어려운 종족이잖아요. 어떻게 보신 거예요?”
“모험을 하다 보니…. 만나게 됐다.”
그녀는 구태여 소년을 귀찮아하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그 태도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클라브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쩌면 ‘모험’이라는 말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그 외의 것에 반응할 겨를이 없는지도 몰랐다.
“누나 모험가예요?”
그는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의 모험 이야기를 몇 가지 이야기해 주는 것으로 윌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모험의 배경이 바뀌거나 윌이 처음 접하는 생물이 언급될 때마다 윌의 어깨가 눈에 띄게 올라갔다. 또래의 소년들이 즐거움이 극에 달했을 때 으레 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상체를 곤두세우는 행동 때문이었다.
에클라브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소년의 그런 몸짓에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는 덤덤하고 말투는 조용하기까지 했다. 윌의 즐거움을 위해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때마침 생각이 나 말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어투였다.
“그리고 언더다크에서는...”
마침내 언더다크라는 단어가 나오자 윌은 놀라움에 겨운 탄성을 참지 못했다.
“대단하다!”
소년의 탄성으로 인해 말이 끊긴 에클라브는 윌을 흘깃 바라보았다. 윌을 책망하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말을 더 이어갈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녀가 몇 마디를 더 해주기를 바라며, 에클라브를 보채려던 윌은 어느새 한참이나 흘러버린 시간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아버지가 사신이 부재를 모르기를 바랐지만, 운이 아주 좋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 없었다.
“저 가야 해요!”
윌의 외침에 에클라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윌이 가든 말든 그녀의 소관은 아니었다. 윌이 떠난다면, 조금 조용해지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까지는 아니었다. 집에 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윌은 잠시 멈춰서 에클라브에게 말했다.
“나중에 또 만나서 모험 얘기해 주면 안 돼요?”
줄곧 바다에 고정되어 있다가 아주 짧은 시간 움직일 뿐이 던 에클라브의 시선이 이제야 제대로 윌에게로 향했다. 느린 속도로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에클라브가 말했다.
“생각해 보고…….”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윌은 손을 번쩍 들어 몇 번 흔든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소년의 발걸음이 유독 빠르고 경쾌했다. 아주 멋진 이야기를 해 줄 새 친구가 생겼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날의 기억은 소년의 기억에 깊게 남았다. 소년은 이 기억을 기꺼이 가지고 있을 기억으로 분류했고 시간이 흐름에 따러 스러져간 다른 기억들과는 달리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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