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BG3] AFTER ■■■■■

발더스 게이트3, 윌×타브 영화 「애프터 양」 AU

  • 윌×여성 타브(더지)

  • 현대~근미래의 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 「애프터 양」의 AU로, 「애프터 양」의 내용과 플롯을 패러디하였습니다.

  • 가내 더지의 이름이 나옵니다.

  • 안드로이드인 타브(더지)가 고장난 뒤, 그 안에 남겨져 있던 기억 장치를 통해 안드로이드가 남겨두었던 기록을 보는 윌 레이븐가드의 이야기입니다.


I wanna be… 

“뭐 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가고, 그녀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개를 든다.

“잠시만….”

“빨리 와. 네가 없으면 ‘가족’ 사진이 아니잖아.”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멍한 표정으로 나와 아버지를 바라본다. 달칵, 달칵, 찰칵. 오래된 디지털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지는 소리와 타이머가 흘러가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그녀는 큰 보폭으로 우리에게 걸어온다.

I wanna be just like a melody…

몇 초간의 정적. 바람 소리와 하늘의 구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그 몇 초가 흘러가고 나서야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의 셔터가 닫혔다가 열린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리고 나와 아버지는 동시에 그녀를 바라본다.

셔터가 닫혔다가 열리는 그 몇 초 동안 그녀는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듯 쓰러지고 느리게 바닥을 향해 추락하는 그녀의 몸을 동시에 두 사람이 붙잡는다.

“에클라브!”

그녀의 이름이 숲을 가득 메운다.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도 더욱 어둡게 가라앉아 있다. 우리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다. 그녀를 보내줄 때가 왔다는 것을.

 

Just like a simple sound like in harmony…


AFTER ■■■■■

“연식이 너무 오래된 모델이에요. 수리하기는 힘들겠는데요.”

“중고로 산 ‘제품’이라고 하셨던가요? 판매자를 찾아가는 편이 빠를 겁니다.”

“이런 걸 지금까지 썼다는 게 놀라운데….”

이 정도면 사실상 ‘친절한’ 반응이지. 정비소를 세 개쯤 돌고, 나는 그들이 메카닉에게 얼마나 매정한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메카닉’들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들을 낯설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기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나는 인간처럼 힘없이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둘러업고 밖으로 나선다. 이 세계에는 ‘메카닉’, 아니, ‘안드로이드’라고 불리는 것들이 널리 퍼져 있다. 안드로이드를 메카닉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았다. 안드로이드가 안드로이드지 그들이 뭐라고 ‘메카닉’이라고 불러줘야 하냐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종족들이 존재하는데도, 사람들은 그들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내가 그들에게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지당했다. 안드로이드라고 해서 그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가족이자, 친구이자, 지금은 내 등에 아무렇게나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업혀있는 ‘에클라브’ 또한 안드로이드였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에클라브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다. 내가 눈을 떴던 그 순간부터 내가 그녀를 등에 업고 마을에 있는 정비소란 정비소는 전부 돌아다니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그녀는 우리 가족과 함께했었다.

우리 아버지는 군인 출신의 장교로 집 안에 있는 시간보다 집 밖에 있는 시간이 더 긴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여 나를 돌봐줄 수 있도록 ‘데려와진’ 것이 에클라브였고. 그녀는 나의 가족이자 친구로서 내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다. 원래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그녀는 일반 사회에 대한 지식은 부족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낳고 돌아가셨던 어머니와 집에 잘 들어오지 못했던 아버지의 역할을 에클라브는 맡아서 해주었고, 나는 그 덕에 나에게 주어진 ‘가족과의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보모’가 아닌 ‘가족’이었기에 아버지와 나의 시간 속에도 그녀의 흔적은 잔뜩 남아있었다. 아랫도시의 바닷가에서 낚시할 때도, 바닷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잔뜩 놀고 난 뒤 말라붙은 끈적한 발에 모래가 달라붙을 때도, 인어를 보겠다며 무턱대고 바다에 뛰어들어 나를 구하러 온 아버지가 나를 구하러 왔을 때도, 복숭아 하나를 훔쳐 불주먹 용병대에게 쫓겼을 때도, 그 모든 순간에 그녀가, 에클라브가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늦은 저녁, 문을 닫기 직전의 정비소를 발견한 나는 그녀를 업은 채로 정비소 안으로 들어간다. 정비소 안에는 테라리움과 키가 큰 관엽식물들이 늘어져 있다. 기계를 다루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장소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에클라브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비소의 사장은 퇴근 직전에 들어온 나를 보며 내켜 하지 않는 것 같은 기색을 내보이다가도, 나보다도 덩치가 큰 에클라브를 등에 업은 탓에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까지 스며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본 그는 내게 흔쾌히 수건을 내밀며 자리에 앉으라 안내한다.

그는 그녀의 몸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뒤, 그녀의 가슴께를 열어 부품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그녀는 당연하게도 눈을 뜨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일어나 내 이름을 부를 것 같은 표정을 한 채로 누워있는 그녀를 보기 힘들어 나는 고개를 돌린다. 곁눈질로 본 정비소의 사장은 인상을 쓴 채로 에클라브를 이리저리 뜯어보다 무언가 발견한 듯 감탄사를 내뱉는다.

“아.”

나는 그의 반응을 놓치지 않는다.

“고칠 수 있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는 에클라브의 몸에서 작은 장치 같은 것을 꺼낸다. 그는 무언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어간다.

“이건 스파이웨어예요. 몇몇 기종에만 들어가 있는 거죠.”

“…그래서, 고치지 못한다고요. 그럼 다시 데려가겠습니다.”

까칠스러운 반응을 한 것을 순간 후회하면서도, 나는 고집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요구한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녀에게 남을 감시하는 장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아니라 그가 그녀를 고칠 수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뿐이다. 그는 마지못해 대답한다.

“고치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데려갈 거라면 기억을 보고 난 다음에 가져가도록 하세요. 만약 기록을 열었는데, 보기 불편한 기억이 있으면 이 로봇을 더 이상 집에 두고 싶지는 않을 것 아녜요. 어차피 부패하기 시작하면 다른 데서는 값도 제대로 못 받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시뮬레이터에 연결해 둘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기억 장치와 함께 특수 개조한 연결 장치를 연결한 특수 판독기를 내밀었다. 아주 고가의 장비라느니, 기억 장치가 있는 로봇은 본 적 없어서 흔쾌히 주는 것이라느니 따위의 말들을 덧붙였지만,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그냥,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에클라브도, 그저 그녀를 기계라고 생각하는 이 남자도, 기계 냄새가 잔뜩 나는 이 장소도, 지금은 너무나도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무인 차량에 몸을 싣고 눈을 감자, 차량에 내장되어 있던 라디오에서는 언제나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참을 돌려 들어 이제는 가사를 전부 외워버린 노래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기도 했고.

“I wanna be just like the sky. Just fly so far away to another space….”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불러주는 그녀가 없다. 읊조리는 것인지 흥얼거리는 것인지 모를 자그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이제 없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그리움이나 슬픔 따위의 감정을 느낀다. 상념이 머리에 가득 찬다. 이럴 때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저 이 감정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리면 차량 내에서 연락이 왔다는 알람이 시끄럽게 울린다. 나는 익숙하게 전화를 수락하고 발신인을 향해 대답한다.

“네, 아버지.”

“그래서… 에클라브는 고칠 수 있다고 하더냐?”

“그게,”

물론 이런 화제가 나올 줄 알았지만, 예상한 것과 실제로 그 말을 듣는 것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과 고칠 수 없을 것이라는 당연한 추론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다. 당연한 사실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아버지께서는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실 뿐이다. 나는 결국 입을 열어 한숨 소리가 섞인 말을 내뱉는다.

“좀 복잡해요.”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에클라브는 연식이 있는 모델이잖아요, 심지어 중고고. 이제 더는 그녀를 수리할 수 있는 부품이 없대요. 그거 알고 계셨어요? 그녀의 몸 안에 스파이웨어가 심겨 있다던데요.

내뱉지 못한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은 말은 아버지의 짧은 말로 가라앉는다.

“그래. 알았다. 일이 바쁘니 이만 끊으마. 집에서 보자.”

“…네.”

내 짧은 대답을 끝으로 아버지와의 전화는 거기서 끝난다. 길게 숨을 내뱉으며 몸을 조금 더 좌석 쿠션에 파묻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천장에는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영화관의 빈 화면처럼 텅 빈 회색빛의 캔버스 같은 낮은 천장만이 가득하다.

에클라브는 아버지와 닮은 면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보다도 에클라브가 더 오래된 모델일지도 모르니 아버지가 에클라브와 닮은 면이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표정이 다양하지 않았고, 때로는 무심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태도로 타인을 대했다. 그들이 다정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그들이 부드러운 성정을 가진 자들은 아니었다. 투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나 제가 위험해질 때면 언제든 가장 먼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손 같은 것을 보고 그들의 다정함을 추측할 뿐이었다. 타인을 멋대로 추측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들 말하지만, 에클라브에 대해서만큼은 그녀에 대한 것을 모두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기억 장치를 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지도―.

끼익, 부드러운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춘다. 도착지는 당연하게도 소드 코스트 해안 인근에 있는 레이븐가드 저다. 나는 느리게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 집 안으로 향한다. 에클라브가 갑자기 쓰러지는 탓에 정신없이 마을을 돌아다니느라 엉망이 된 집을 치우고 있노라면,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에클라브일 리는 없으니, 소리의 근원은 바로….

“윌.”

아버지다.

“오셨어요.”

“그래서, 부품에서는 뭘 좀 찾았고.”

“부품이요?”

군인 된 자의 특징인지, 아버지께서는 본론만을 간결히 말하는 버릇이 있으셨다. 아버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인상을 미약하게 찌푸리며 재차 말을 반복하셨다.

“그래. …에클라브 말이다.”

“아.”

생각도 못 한 곳을 찔리자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지는 건 나였다. 분명히 아버지가 돌아오면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잔뜩 있었으나, 아버지의 질문 하나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에클라브는 인간이 아닌 ‘부품’일 뿐이었다. 그녀는 평생 부품일 것이었고, 부품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아뇨, 아직은요….”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무언가 껄끄러운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 걸까, 무엇에 슬퍼하고 있는 걸까. 그녀를 인간으로 봐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걸까? 아니면 그녀의 작동이 멈췄다는 것에 대한 슬픔일까? 답을 낼 수 없는 질문들이 쌓여간다. 아버지는 나를 몇 초간 바라보시더니, 곧 짐을 챙겨 다시 현관 쪽으로 향한다.

“다녀오마.”

“어디 가세요?”

“급한 용무가 있어. 아마 새벽 늦게나 돌아올 거다.”

“다녀오세요.”

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현관 밖으로 나선다. 나는 아버지를 배웅한 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 곧 소파에 몸을 파묻는다. 정비소 사장이 준 특수 판독기를 주머니에서 조심스레 꺼내 손 위에서 굴린다. 선글라스를 닮은 그것은, 에클라브의 모든 기억을 볼 수 있는 장치치고는 너무나도 가벼웠다.

에클라브, 너는 무엇을 기록했어? 우리는 너를 기계라고 기억하겠지. 너는 어때? 너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렸지? 판독기를 쓴 뒤, 그녀의 일련번호를 읊는다.

“일련번호 1381O85332R4.”

언제나 불리던 이름이 아닌, 차가운 숫자와 영문의 조합이 낯설다.

“비밀번호, 976586.”

그리고 암전. 검은 공간 속에서 태초의 빛이 태어나듯 광활한 우주에서 작은 별 하나가 빛나듯 반짝거리던 점을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점이 광활한 공간을 가득 채우며 빛난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나는 그 점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 안에는 에클라브가 저장해두었던 기록이자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광활한 우주를 가득 메운 빛은 모두 에클라브가 장식한 것이었다.

우주를 닮은 것 같기도, 빛이 없는 어두운 동굴을 닮은 것 같기도 한 이 장소 안에 영상의 형태로 존재하는 기록들의 길이는 그리 길지 않았다. 기록 장치 안에는 고작 해봐야 5초를 겨우 넘기는 짧은 영상들로 가득했다.

“재생.”

영상이 재생된다. 익숙한 풍경이다. 언제나 나와 에클라브가 함께 뒷자리에 타고 갔었던 무인 차량의 풍경이 펼쳐진다. 차량의 창문 밖으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펼쳐져 있는, 푸른빛이 가득한 바닷가의 풍경이 펼쳐진다. 에클라브의 시야에 비치는 바다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하다. 그녀의 시선으로 본 바다는 윤슬이 가득했고, 파도와 햇빛이 만나는 부분에서는 반짝거리며 보석 같은 흰 물방울들이 튀어 올랐다가 다시 바다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기라도 했는지 초점이 잠시 흐려지고 그 옆에 있던 소년티를 막 벗기 시작한 어린 청년에게 시선이 돌아간다. 거기에 있는 소년은 나다. 윌 레이븐가드가 그녀의 곁에 앉아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To be away from all…”

나는 언제나 무인 차량에서 틀 수 있는 음질 좋은 노래들보다도 낡아서 망가지기 직전의 낡은 카세트 라디오를 들고 다니며 노래를 듣길 즐겼다. 잡음이 낀 듯 지직거리는 라디오 음질과는 달리 그녀의 기억은 지나칠 정도로 선명했다. 소년의 반쯤 감긴 눈과 그의 속눈썹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는 태양의 색깔을, 소년의 뺨에 태양이 닿으면 소년의 뺨이 어떤 색으로 빛나는지를 그녀는 알고 있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년의 목소리 위로 읊조리는 것 같기도, 흥얼거리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겹친다.

“To be one of everything….”

그리고 재차 암전.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단어를 중얼거린다.

“반복.”

기록은 반복되어 재생된다. 무인 차량의 풍경, 차창 너머로 반짝거리는 윤슬, 보석 같이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아직 앳된 티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청년의 모습. 겹치는 두 개의 목소리. 약 5초 정도의 짧은 영상은 금세 끝나버린다.

그 이후로도 나는 에클라브의 기억을 한참이나 살펴봤다. 아버지나 내가 찍혀 있는 영상의 개수만큼 주변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영상들이 있었다. 푸르른 창천을 느릿느릿 유영하는 구름의 모습이라거나 언젠가 에클라브와 둘이서 향했었던 마을 외딴곳에 있었던 고물상의 지붕에 달려 있었던 풍경들이 바람을 타고 느리게 부딪혀 청명한 소리를 내는 모습 같은 것들이 잔뜩 있었다. 어딘가에는 태양이 느리게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영상이 있었고, 또 어딘가에는 파도가 모래에 부딪혀 흰색의 물거품을 일으키며 모래에 스며드는 영상이 있었다.

에클라브가 우리 집에 처음 왔었을 때의 영상 또한 남아있었다. 지금보다 앳되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과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작은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한눈에 봐도 인간의 것은 아닌 잿빛의 피부를 가진 누군가가 아이를 향해 손을 뻗고, 아이를 받아 든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의 이름을 안드로이드에게 한 자 한 자 알려준다.

“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리면, 아이는 손을 뻗어 내밀어진 손가락을 한 손으로 감싸 쥔다.

“윌 레이븐가드.”

몸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윌 레이븐가드.’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재차 내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판독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아닌 현실의 음성임을 깨닫는다. 급히 판독기를 내리고 제 어깨를 부드럽게 흔든 사람을 바라본다.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은 영상에서 봤던 것보다 조금 더 주름져 있고, 초췌하다.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들은 그리 길지 않다. 무얼 하고 있던 거냐. 에클라브의 기억을 보고 있었어요. 그 앤 좋은 안드로이드였다. 아버지에게도요? 그래, 내게도. 시간이 늦었다. 어서 들어가거라. 네. 곧 들어갈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아버지.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 판독기를 한참이나 손안에서 굴리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향한다. 내 방 옆에 있는 에클라브의 방의 방문을 열어볼까, 하는 생각에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도 문을 열지 못하고 손을 아래로 떨어트린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기에 그녀의 방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걸까. 나는 도망치듯 에클라브의 옆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침대 위에 몸을 아무렇게나 뉘이고,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리게 내리감는다. ‘잘 자. 윌.’ 잠을 자지 않던 에클라브는 밤마다 눈꺼풀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말해주곤 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눈꺼풀을 쓸어내려 줄 사람이 없어,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린다.

다음 날에도 에클라브의 수리에는 진전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어제와 똑같이, 나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판독기를 쓴다. 일련번호를 말하고, 그 뒤에는 비밀번호를 말한다. 승인되었다는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어제 한참이나 들여다봤기 때문인지 그새 익숙해진 풍경을 다시 한번 마주한다.

“섹션 베타. 열람.”

용량이 부족합니다. 섹션 감마를 압축하시겠습니까?

“섹션 감마를 압축.”

다시 한번 명령어를 입력해주세요.

“섹션 감마를 압축한다.”

섹션 감마를 압축합니다…. 압축 완료. 섹션 베타를 열람합니다.

다시 한번 기록의 파도가 범람한다. 내게도 익숙한 기록들이 느리게 눈 앞을 흘러간다. 인간과는 달리, 에클라브는 하루에 단 몇 초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과는 달리 그녀의 기억은 빛바래지 않고 선명했다. 아버지와 나의 시간 속에 남아있었던 그녀의 흔적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가, 금세 흩어진다.

“재생.”

바닷가에서 잔뜩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던 소년은 양손 가득 바닷물을 담아 제 앞에 있는 자를 향해서 뿌린다.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려 자신에게 튀는 물방울들을 막는다. 물방울들에 햇빛이 닿아 한순간 물방울들이 무지갯빛으로 빛났다가 곧 그녀의 피부에 닿아 굴곡진 피부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린다. 소년의 맑은 웃음소리가 모래사장 위로 울려 퍼진다.

“재생.”

추운 겨울날, 눈이 사락사락 내려 파도와 맞닿아 사라지는 겨울 바다에서 검지와 중지에 신발을 걸고 바짓단을 두어 번 접어 올린 소년이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소년의 발은 겨울 바다에 오랫동안 담겨 있었던 탓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다. 모래사장으로 걸어 나오는 소년의 발에 은빛 모래가 달라붙었다가 느리게 떨어진다.

“재생.”

바닥을 구르는, 누군가가 한 입 크게 베어 먹은 복숭아가 바닥을 구른다. 화면이 크게 흔들리고, 소년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에클라브, 빨리 달려!’ 소리치며 달리는 소년의 입가에는 차마 닦아내지 못한 복숭아의 과즙이 여름날의 햇살에 말라붙어 끈적하게 자국이 남아있다. 소년과 안드로이드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난처한 미소를 짓는다.

“…재생.”

바다 한가운데에 빠진 소년이 보인다. 아니, 소년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다. 소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고, 석양이 바다 위로 흩뿌려져 주황빛의 바다가 소년의 얼굴과 퍽 조화롭게 어울린다. 소년의 아버지가 다급하게 소년을 데려오기 위해 바다에 몸을 담그는 풍경이 보인다.

“재생….”

소드 코스트의 절벽 아래, 물이 얕은 바닷가 어딘가에서 물에 젖은 모래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화면이 보인다. 소년은 낚싯대에 미끼를 끼우고, 바다를 향해 낚싯대를 던진다. 화면 구석 어딘가에서 흐릿하게 낚싯줄이 날아가 바다에 빠지고, 갈고리가 바다의 수면에 닿아 파문이 이는 장면이 보인다. 소년은 기대감에 부푼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인간의 기억은 간사한 것이라,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단편적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아주 작은 단서만 있다면 물꼬를 튼 듯 그때의 풍경이 되살아나 그때의 일들을 마치 지금 겪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다. 에클라브의 기록을 넘어, 아주 오래전에 겪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어제 겪은 것 같기도 한 기억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그날은 처음으로 아버지 없이 홀로 낚시를 하러 나갔던 날이었다. 홀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니 에클라브와 함께 다녀오라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에클라브와 함께 해안가로 나갔던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파도가 넘실거리며 우리의 발목을 적셨다. 바닷물이 신발 안쪽까지 들어가 양말을 적셨고, 우리는 파도가 우리의 발을 마음껏 간지럽힐 수 있도록 신발을 벗었다.

나는 낚싯대 끝에 걸려 있는 갈고리에 미끼를 걸어, 낚싯대의 줄을 풀고 바다를 향해 멀리 던졌다. 곁에 있던 에클라브는 물과는 친하지 않은 탓인지, 쪼그려 앉은 채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위아래로 둥실거리는 낚싯대를 바라보더니 문득 내게 물었다.

“낚시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나도 몰랐어.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고.”

“낚시에는 갑자기 왜 빠진 거야?”

“그러게….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낚싯대를 받침대에 올려 고정한 뒤, 그녀처럼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가슴께로 끌어당겨 쪼그려 앉았다.

“낚시하는 동안은 하염없이 푸른 바다를 바라볼 수 있잖아. 무슨 물고기가 잡혔을지 기대되기도 하고. 즐겁지 않아?”

“그런 감정은 잘 모르겠는데.”

“직접 해보는 건 어때?”

글쎄… 그녀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 말을 끝으로 나와 그녀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흐르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침묵이 있었다. 어색하지 않은 편안한 침묵이. 우리는 하염없이 위아래로 둥실거리는 낚싯대를, 수평선을 바라봤었다. 소금기를 머금어 조금은 짠맛이 나는 바람이, 발가락 끝에 닿는 파도가 시원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낚싯대가 크게 흔들리며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다는 신호가 오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낚싯대의 릴을 감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물고기가 수면 밖으로 튀어나와 펄떡거렸고 나는 익숙하게 물고기의 아가리에서 갈고리를 빼내 물고기를 다시 바다에 놓아주었다. 곁에 앉아있던 에클라브는 조용히 내 행동을 관찰하듯 바라보다,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다.

“나도…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 즐겁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현실의 내가, 과거의 나와 동시에 대답한다.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어?”

그녀는 나를 바라본다. 고요한 눈빛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있다. 깊이를 알 수 없지만, 두렵지 않고 외롭지 않은 어둠이.

“아니.”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솨아아, 바닷바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우리는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에클라브의 기록은 나로 가득했다. 그녀는 나를 통해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그녀는 나를 통해 그녀 자신을 보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이 수많은 기록을 남김으로써, 잊고 싶지 않은 풍경들을 남기며 자신을 쌓아 올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당연하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제이다. 그녀는 안드로이드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녀의 기록을 보며 그녀가 느꼈던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녀의 기다림 속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리움과 그리움의 크기만큼의 기대가 담겨 있다. 이 기록들은 사랑의 증명이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의 사랑이, 이 안에 가득 녹아들어 있다.

그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은 내 오만이자 자만이었다. 그녀의 기록에는 그녀가 느꼈을지도 모르는 감정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안드로이드들은 느낄 수 없는 다정함이 그 기록들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녀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으며, 나는 그 이후로도 그녀의 기록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그녀가 우리에게 오기 전의 기록들도 전부. 우리에게 오기 전의 그녀는 지금보다도 더욱 매서웠다. 다만 그 기록들은 대부분 깨지고 망가진 영상들이었기에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 위에서 거미가 느리게 기어가는 영상이나 어두운 곳에서 한참을 있다 처음으로 태양 빛을 마주했을 때의 영상 같은 것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었다.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그녀의 마지막 기록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 장면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장면이다. 바로 며칠 전의 기억이었으니까. 화면에는 푸른빛이 아닌 녹빛이 가득했다. 그 풍경 속에서 아버지와 나는 어색하게 서 있었고 소년티를 벗은 청년인 내가 손을 흔드는 장면이 보인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가고, 그녀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개를 든다.

“잠시만….”

“빨리 와. 네가 없으면 ‘가족’ 사진이 아니잖아.”

숨을 멈춘 것 같은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은 우리를 담고 있었다. 어색하게 서 있는 아버지와 나, 우리의 뒤로 펼쳐져 있었던 푸른 묘목들. 산들거리며 불어오는 바람, 따사로운 햇볕, 바닥을 가득 메운 잔디에 진 녹음…. 나와 아버지를 가득 담고 있었던 화면은 고장이라도 듯 같은 장면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아니, 실제로도 고장이 난 상태였겠지. ‘빨리 와. 네가 없으면 ‘가족’ 사진이 아니잖아….’ 똑같은 문장이 하염없이 반복된다.

나는 무얼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지금까지도 나는 그것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에클라브는 에클라브인 채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녀가 무슨 기록들을 남겼든, 그녀가 감정을 느낄 수 있든 없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우리의 가족이었고 그 사실만큼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테니까.

다음 날, 나는 정비소가 여는 시간에 딱 맞춰 정비소로 향했다. 정비소의 주인과 아주 오랫동안 입씨름을 한 뒤, 결국 나는 시뮬레이터 안에 들어가 있던 에클라브를 데리고 와 정비소에 처음 왔을 때처럼 그녀를 둘러업고 정비소를 나섰다. 에클라브의 팔다리는 축 늘어져 있었고, 기계 부품으로 만들어진 몸은 무겁기만 했다.

차창 너머로 우리가 언제나 함께했던 바닷가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윤슬이 반짝거리고, 바다의 포말이 모래사장 위에서 일렁거리는 풍경이 잔상처럼 남아 아른거린다. 나는 그녀를 업고 그녀의 방문을 연다. 그녀의 방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단정하다. 나는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뉘인다. 그녀는 아마 천천히 부패해갈 것이다. 아니, 녹이 슬어가는 것일까. 우리는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네고 그녀를 보내줄 것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닌 가족을 떠나보낼 준비를 할 것이다.

그녀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낡은 라디오에 카세트테이프를 집어넣는다. 재생 버튼을 누르면,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몇 초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 목에서는 무언가를 읊조리는 것 같기도, 흥얼거리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To be away from all, to be one of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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