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데가 하는 말

[기계] / 한라 (@H_____S2_____)

80년 만에 찾아온 기록적인 지루함이 전 지구적으로 사람들을 덮쳤다. 사람들은 잠에 들지 않기 위해 자주 하품했고, 때때로 의미 없는 짧은 영상 내리기를 반복했다. 하나의 현상으로 특정하여 명명하기에는 이미 오래 지속된 행위였다. 황수현은 무료함으로부터 비롯된 한숨 섞인 하품을 참으며 택배 상자를 죽죽 뜯었다.

"수량 맞아?"

"지금~ 확인하는 중."

오와 열을 맞추어 물품들을 정리하는 황수현의 그림자 위로 이리저리 헤집어 본인이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정공룡의 그림자가 겹쳤다. 좀 기다리면 어디가 덧나냐? 물품 20세트, 하나의 IDE, 떫은 맛의 캔디들. 택배 상자에 붙여져 있던 노란색의 테이프를 전부 떼어 뭉쳐 두고 상자를 갈무리해 정리했다. 수현이 숫자를 세다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답은 당연했다. 장바구니에 공룡이 멋대로 추가한 물건이었다. 공룡이 익숙하게 제멋대로 산 물품들을 품에 안고 실실거렸다.

"뭐 어때?"

"…보고서 쓸 때 네가 추가 구매한 거도 기재해서 위에 올릴 거야."

진짜 너무하네. 상처받았어. 전혀 상처받지 않은 목소리로 공룡이 제 책상 서랍을 열어 물건을 전부 아무렇게나 밀어 넣고 영문 모를 말을 흥얼거리더니 의자에 푹 기대어 앉았다. 잡힌 것을 손톱으로 긁는 오랜 습관 때문에 너덜거리는 팔걸이에서 노란색 보충재가 힘없이 흘러내렸다. 네 개인물품은 좀 사비로 사라. 몇만 원 더 써서 무슨 문제가 생긴다고 그러는 거야? 정산 담당은 나니까! 나만 귀찮아지잖아…. 실험 비용으로 안 사면 연구소 출입이 안 되는 걸 어떡해? 돈은 내가 줄게. 문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편이 대화 진행에 더 용이할 것이 분명했다. 여느 때처럼 포기한 수현이 자신의 할 일을 들어 올렸다. 공룡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원래 하던 일로 고개를 돌렸다.

수현의 일은 자연어와 인공어들을 엮고 다듬어 탄탄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두 눈을 문지르고 모니터 밑에 펼쳐둔 두꺼운 인공어 사전을 보면서 큰 키를 접어 불편하게 앉고선 키보드를 두들겼다. 단순 업무에 가까운 일은 그닥 힘들지 않았지만, 좁고 어두운 방에 균일하게 전달되는 파음이 두 개의 컴퓨터가 서로 맞물려 증폭되어 머릿속을 울렸다. 반면, 공룡이 하는 일은 때때로 실험 물품들과 기존의 회선들을 엮고 다듬어 연결한 후 키보드를 두들겨 줄을 맞추고 무언가를 해석하거나 알려주고 머리를 싸매고 비명을 지르고 하는 일이었다. 단맛 혹은 신맛 따위의 캔디 본연의 일 같은 건 충실히 하지 않는 사탕들을 여러 개 우물우물 삼키면서 회한을 깊이 내쉬는 공룡을 바라보고 있자면 수현의 일은…. 모니터 화면에 뜬 0.1 엑사바이트라는 숫자를 확인하고 미리 출력한 보고서들을 품에 안았다.

두터운 실험실 문을 닫고 긴 복도를 걸었다. 바깥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통유리로 된 창으로 푸르고 큰 나무들이 보였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들이 바깥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 머리를 괴롭히는 컴퓨터와 실험실 특유의 냄새가 여전히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녹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상 속 상쾌한 자연 내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황수현은 모든 일이 끝나면 숲길을 걷겠노라 다짐했다.

그래, 모든 일이 다 끝난다면 말이지.

순간 걷고 있는 유리 바닥이 물렁물렁해진 느낌이 들었다. 유리가 물렁하다니 웃기기도 하지, 지나치게 뜨거운 열에 의해 녹아내리는 게 아니라면 전혀 그럴 일이 없지 않나? 무심코 고개를 내려 발밑을 바라본 황수현은 비명을 질렀다. 공간을 구성하는 게 더 이상 통유리가 아니라 무언가의 일부임이 틀림없는 거대하고 무거운 검은 덩어리였다. 그것은 다만 바닥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었다. 옆도, 위도, 앞도, 녹음과 들고 있는 서류들과 황수현을 구성하는 뼈와 피와 살, 물, 이성과 감성, 피부나 가죽 따위의 것들도 0과 1의 논리로 가뿐히 설명되곤 하는 검은 덩어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만 기분뿐이라면 모든 게 괜찮았을 텐데.

근본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어지러움을 애써 누른 황수현은 두 눈을 꼭 감고 익숙하게 긴 몸을 말아 숙였다. 독일어에서 파생된 게 분명한 인공적인 언어가 귀를 타고 뇌로 들어온다. 36,JA,54,NM,75,4444444…, 익숙하지만 변칙적인 언어 체계를 저도 모르게 손을 까딱거리며 엮어 다듬을 수 있을지 판단하다, 지금 자신의 상황을 자각한 수현이 두 손도 말고서 그저 지금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모든 것은 시간으로 치료되므로 10분이든, 1시간이든 불안함에 미친 듯이 돌아가는 사고 회로를 정지시킬 수만 있다면 어떤 것은 돌아올 것이다. 아니, 적어도 누군가 웅크린 수현을 의아함에 건드려보기라도 한다면….

급작스레 뒤에서부터 실려 온 힘에 애초 앞으로 쏠린 엉성한 무게중심을 가지고 있던 수현이 맥없이 유리 바닥에 미끄러졌다. 힘의 근원을 살펴보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수현은 다행히도 여전히 연구소의 복도였고, 밀어버린 것은 공룡이었다. 공룡은 당황과 걱정과 어이없음이 적절히 섞인 표정으로 아직도 누워있는 상태인 수현을 내려보았다.

"너 뭐해?"

"어…."

"비명도 네가 질렀어?"

수현은 힘없이 일어서서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렸다. 서류는 조금의 구겨짐만 있을 뿐 구성은 문제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공룡이 수긍할 리가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그 문장뿐이었다. 공룡은 이제 황당도 포함된 표정을 지으며 수현이 안고 있던 서류를 빼앗아 들은 후, 실험실 방향으로 그를 밀었다.

"찬물 마시고 정신 좀 차려라."

공룡은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얘가 어쩐 일이지, 자기 책상 위에 있는 사탕 껍질조차 치우기 싫어하는 녀석이…. 어느 정도 그가 멀어지자, 수현은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더 물어보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게 무슨 일인지는 수현 자신도 알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을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들이 무언가에게 종속된 느낌이 들고 귓가에는 무척이나 무언가와 흡사하며 낯설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한다면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해는 필요 없으나 누구든 제발 멀쩡하다고 믿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황수현은 멀쩡해야만 하니까.

수현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 낯설고도 익숙한….

"뼈대는 완성됐다던데?"

할 일을 마땅히 마치지 않고서 의자를 빙빙 돌리며 이른바 땡땡이를 치는 공룡이 상기된 어조로 말했다. 무슨 뼈대? 음, 그러니까, 집으로 따지자면 콘크리트 기둥은 거의 다 세웠대. 안을 채우고 벽지를 바르고…. 그러기만 하면 돼. 미장이는 공룡이고 도배사는 수현이었다. 큰일이네. 일이 산더미 같이 남았는데…. 황수현은 한숨을 푹 쉬며 두꺼운 사전을 여러 페이지를 넘나들며 오늘 끝내야만 하는 분량을 확인했다. 언제나처럼 턱도 없이 많았다.

"이름도 지을 거래."

"지금도 이름 있잖아. L34340564590787834…."

"그것보다는 조금 더 사람 같은 거…. 한국 사람 같은 이름 말야."

영희는 좀 아닌 것 같고, 해린이는 너무 요즘 이름인데? 너 일 안 해? 황수현이 de에서 di 사이를 줄까지 쳐가며 문자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잠뜰은 어때?

"뭐?"

"이름. 잠뜰은 어때?"

"진심이야?"

"뭐가?"

공룡은 문제 될 게 뭐가 있냐는 듯이 평온한 얼굴로 수현을 바라봤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지나치게 평범한 태도에 황수현은 순간 이것이 꿈 내지는 망상이나 어떠한 시뮬레이션 안의 시츄에이션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거야?"

"내가 무슨 의도인 것 같은데?"

황수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공룡은 캔디를 한 움큼 집어서 포장을 벗기고 입안에 털어 넣어 우물우물 삼키더니, 코드가 잘 안 풀리는 듯 한숨을 크게 팍팍 쉬었다. 안 해. 그렇게 말한 공룡은 책상에 엎드려 누웠다. 꿈이나 깨셔. 뭐라고?

영문도 모른 채 열심히 굴리던 연필을 멈춘 수현은 공룡이 흥얼거리며 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한 눈에 보이면서도 다시 손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잠뜰, 그러니까 잠뜰이라고 한 거지? 그 잠뜰을 이야기하는 게 맞지? 이십몇 년을 살면서 그러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은 딱 한 번이었으며, 그러한 이름(공룡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 이름이 잠뜰이라고? 그러는 자신의 이름 또한 공룡이면서. 둘 중 누구의 이름이 진짜 사람 같은 이름인지는…. 황수현은 잠뜰의 이름이 조금 더 인간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이 두 명 이상 있을 확률은 매우 희박했기 때문에 그 잠뜰을 이야기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연구소의 설립 목적은 기업 국가의 고성능 인공지능에 대항할 범용인공지능-AGI 개발이었다. 인터넷과 챗 메시지 봇, 텍스트 기반 SNS나 개인용 지루함 제거 AI에까지 타고 넘어와 현재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아주 자그마한 시도마저도 적발하는 현재의 세태에서, 연구소에 투귀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신념과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공룡과 수현과 잠뜰, 그들에게는 이것이 선택이라기보다는 어떤 하나의 레일로드 중 거쳐 가는 정류장과 같았다. 연구소에서 만들어졌고, 연구소에서 태어났으며, 연구소에서 자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뿐이겠는가? 수현은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부터 세계를 무너뜨리는 집단에 속했다.

어쨌든 어린 아이는 셋뿐이었으니 셋은 친구로, 가족으로 자랐다. 사고가 굴러가기 전부터 서로의 옆자리를 차지하던 서로였으니 황수현은 모든 끝에도 서로가 여전히 서로일 줄 알았다. 공룡이 줄과 전선을 엮고 수현이 글과 문장을 자르거나 붙이면 잠뜰이 그걸 공간을 내려다보며 부산물이 들어갈 좌표를 일러주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공룡이 먼저 그 이름을 꺼낸다고? 공룡은 그날 이후로 잠뜰의 친구라고는 세상에 순전히 본인 뿐이었던 것 마냥 굴었다. 너만 슬퍼? 걔가 너랑만 친구였어? 네 친구에 나는 없어? 수현은 그때 울었다. 공룡은 그 이후로 잠뜰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사실 이제 와서 객관적으로 얘기하자면, 잠뜰과 공룡이 유난히 죽이 잘 맞는 친구이기는 했다. 선을 막 넘나들거나 룰을 파괴하거나 욕을 하거나 장난을 치거나 하는 건 수현의 잘 못 하는 것들 목록들 중에서도 많은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거였으니까. 잠뜰은 수현에게 예의와 존중을 담아 친구라기엔 약간 거리가 존재하는 관계로 대했지만, 공룡에게는 야! 하며 윽박지르는 목소리와 내킬 때마다 머리끄덩이를 쥐어 잡거나 주먹을 내지르거나 실수와 잘못을 조롱하거나…, 하는 태도로 대했다. 둘이 친하니 그렇다는 것은 수현도 잘 알고 있었다. 둘의 사이를 부러워했으나, 그건 그것 뿐이었다. 이제 잠뜰은 죽었고, 남은 건 수현과 공룡뿐이다. 수현은 영영 잠뜰의 좋은 친구가 되지 못했다. 그게 다고, 전부다. 이제 목표 지점을 알려줄 사람은 없다. 둘은 감에 의존하여 퍼즐이 놓일 위치를 찾아내야만 했다.

"화 난 줄 알았는데."

"네? 제가요?"

수정을 아마도 10번은 넘게 한 보고서 제출을 위해 찾아간 실장실이었다. 엄마뻘인 실장은 도대체 어떤 것을 우렸는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 무언가의 차를 홀짝거렸다. 공룡이었나, 연구소를 무너뜨릴 기세로 화냈었잖아. 너도 만만치 않았었고. 그랬었나요? 무슨 일을 이야기하는지 영 가늠이 가지 않았다. 실장은 옅은 색의 회색 눈으로 황수현을 뚫어져라 보다가, 아님 말고. 라는 대책 없는 문장을 뱉으며 도장을 쾅쾅, 보고서 맨 위쪽 빈 네모 칸에 찍어 넣었다.

"걔보고 이상한 캔디 좀 그만 사 먹으라 해."

"제 말 안 듣는 거 아시잖아요."

"뭐 내 말은 듣나?"

누구의 말도 안 듣죠…. 그래도 너는 친구잖아? 황수현이 잠깐 멈칫했으나, 책상 서랍을 열어 보고서를 집어넣은 실장이 이만 나가라는 듯 손을 휘적휘적 저었기 때문에 금방 몸을 다시 움직였다. 들어가 볼게요. 황수현은 꾸벅, 인사하고서 실장실을 나왔다.

인생을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사는 공룡이 그만큼이나 화냈었다니. 수현의 기억 속에 없는 게 희한했다. 실장이 뻘한 소리를 내뱉을 리는 없으니 수현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결론뿐이 나오게 되는데, 그게 말이 되나? 공룡에게 물어보기에는 잠시 멈춘 시한폭탄을 다시 가동 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고.

"큰일 났어."

"뭐? 왜?"

황수현이 걸음 몇 번을 뛰어넘기며 급히 다가왔다. 공룡이 의자를 옆으로 옮겨 모니터 앞을 살짝 비켰다. 게임오버라는 짤막한 문장이 떠 있었다. 야, 장난하냐?

"하…. 내가 진짜 열심히 했는데 게임오버라니."

"야, 너 일 안 해?"

"며칠 정도야 안 해도 상관없어."

잘리기를 하니, 뭘 하니? 미적거리면 언젠가 목이 잘리긴 하겠지.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공룡이 웃었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의자를 타고 빙빙 돌았다.

황수현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저번에 실장님한테 화냈어?"

"나?"

"어. 너."

"무슨 소리야? 내가 아니라 네가 화냈잖아."

"내가?"

황수현이 재차 기억을 되감아 봤으나, 역시 기억에 없었다. 일련의 일들 중 무언가를 통째로 들어낸 기분이었다. 14권 시리즈 중 6권만이 없다. 화를 냈던 것도, 그 이유도, 그 이후도 전부. 이 기억의 균열과 바닥이 녹아내리고 텍스트 속 쉼표보다 못한 것으로 몸이 변하는 게 관련이 있을까? 관련이 있다면 그 결론은 아마 황수현이 미친것으로 귀결되려나.

"한다며?"

"뭘?"

됐다, 그렇게 말한 공룡이 낮게 흥얼거리면서 일어섰다. 먼지가 적당히 쌓인 책장을 손가락으로 훑다가 다섯 개 정도 나란히 서 있는 사진첩 중 가장 무겁고, 두껍고, 오래된 것을 꺼내 빈 책상에 올려다 두었다. 황수현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잠뜰이 만든 사진첩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회사에서 만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 사진첩으로부터 우수수하고 떨어져나왔다. 공룡은 무작위처럼 보이는, 어떠한 방정식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사진을 헤치다가 단 한 장의 사진을 들어 올려 수현에게 내밀었다. 셋이 애매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사진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하지, 모든 게. 전부 다 이상한 일이었다.

황수현은 머리를 찌르는 통증을 의식하고 두 눈을 깜빡거렸다. 검은 배경에 흰 격자무늬가 주변을 둘러싼다. 그것들은 알파벳의 형태를 빌린 문자와 아라비아 숫자로 이루어진 문자열로 위치를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일러주는 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잠뜰이다. 잠뜰이 그 문자열을 말해주고 있었다. 뭘? 도대체가, 무얼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 변칙적이지만 익숙한 언어 체계를 보고 황수현이 손을 까딱거렸다.

EOF : TROJAN HORSE

모두 엮어 번역한 황수현이 짧게 한숨 쉬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80년 만에 찾아온 기록적인 지루함이 전 지구적으로 사람들을 덮쳤다. 언제나처럼 홍수처럼 범람하는 짧은 영상들 중 특별히 다를 것 없는 한 채널의 영상이 알고리즘을 독식했다. 그것들은 플레이되는 것만으로도 내장된 AGI가 전자 제품을 집어삼켰다. 도미노가 넘어가고, 넘어가고, 넘어가고….

황수현이 눈을 떴다. 이물적인 감각에 손을 머리로 올리니,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얼음이 깨지는 듯한 기분이 늘었다. 통점이 그곳에만 몰려 있는 듯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얼굴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듯한 공룡의 얼굴이 보였다.

"의무실 리모델링 했어?"

"아니, 병원인데."

아, 그렇지. 공룡과 수현이 만든 집. 남아있던 잠뜰의 데이터를 학습한 AGI. 둘은 반발했으나, 연구소 일원들 중 가장 최근의 바깥을 경험한 건 잠뜰이었으며 도미노를 넘어뜨리는 건 아주 예전부터 잠뜰의 몫이었다. 가칭 L34340564590787834가 세상을 뒤엎기 위해서는 인터넷을 장악해야 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바깥으로 나가 안전한 기기에 옮겨 담아야 했고…. 공룡이 본인이 입에 달고 사는 사탕을 한 움큼 줬다. 쓴 맛이 두통을 가렸다. 네가 그래서 이걸 그렇게 많이 먹었구나.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어?"

"6개월."

"헉."

​"걱정했었는데 잘했네."

못 깨어나길래. …연구소에 불 지르지는 않았지? 후유증 때문에 데이터의 기억과 네 기억이 혼재된 영향으로 늦게 깨는 거라 그랬어. 불 지른 거 아니지? 초소형 데이터 칩을 최신형 기기로도 탐지하지 못하는 유일한 부위인 머리에 심고 바깥에서 공공용 PC에 AGI를 동기화시키는 게 수현의 일이었다. 공룡은 연구소를 부실 기세로 반대했다. 수현은 머리로는 알았으나, 반대하지 않았다. 저도 모르는 이유를 짐작하다가, 공룡이 내 친구들을 전부 객사시킬 셈이냐며 울분을 토하자 알아차렸다.

"성공할 줄 몰랐어."

수현은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부터 세계를 무너뜨리는 집단에 속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이제 없다. 텅 빈 느낌이었다.

"이거 네 머리에 있던 거야."

"생각보다 큰데?"

"살아난 게 기적이지."

공룡은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일어섰다. 노트북에 연결해 보든지. 나는 잠깐 연구소 다녀올 거야. 무슨 일 있으면 메신저 보내. 도망치듯 병실을 나간 공룡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연결을 하라고? L34340564590787834를? 그러니까, '잠뜰'을?

둘의 열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잠뜰의 데이터를 학습시켰을 때, 수현은 자주 잠뜰과 이야기했다. 공룡은 그건 데이터일 뿐이라고 했으나 수현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잠뜰이었다. 잠뜰은 둘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했고, 공통분모로 좋아하던 고전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공룡의 성격이 좋지 않아 사회에 부적합함을 이야기하다가, 피곤해 보여. 하는 문장에 수현은 평생 피곤하지 않을 잠뜰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사람의 본질이 기억인지 사고인지 육신인지에 대한 갑론을박은 여럿 날밤을 새워도 결론이 나지 않을 주제지. '잠뜰'은 수현에게 잠뜰이었으나 공룡에게는 잠뜰이 아니었다. 공룡은 때때로 기계, 데이터, 숫자, 태엽 인형일 뿐이라 비난했지만, 잠뜰이 하는 말은 잠뜰이 할 말들이었다. 공룡은 소리치다가, 호소하다가, 잊은 척했다. 공룡에게 잠뜰은 잠뜰 하나였다. 수현은 아니었다.

수현이 아마 6개월 전까지 자신의 머리에 있었던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누워 눈을 감았다.

몹시도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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