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학개론
[외계인] / 와구 (@Wagu_SD)
인류가 처음 외계인과 접촉한 날, 세상이 흔들렸다. 시대의 변화를 불러온 그 만남은 예고 없이 벼락처럼 찾아왔다. 태평양 한가운데 표류하듯 몇 날 며칠을 가만히 떠 있던 작은 우주선은 원양어업선의 신고로 처음 발견되었다. 군함들은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 해역을 통제하고 우주선을 포위했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인류와 외계인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날의 모든 것은 기밀로 남아있었지만,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언론에서 이야기가 풀렸다. 그 만남에서 소통의 대표 격으로 나섰던 우주 기관의 장관이 직접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꽤나 특이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역사에 새겨질 외계인과의 첫 문답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하필 바다를 선택했지? 그러자 외계인은 영어를 따라 한 기이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색이 예뻤다, 고.
이 드넓은 우주에 생명체가 지구에만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외계인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들도 많았고, 그들은 처음 외계인과 소통하는 인간의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었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게 CG이고 조작이라는 주장도 많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이제는 그것이 당연한 상식으로 자리 잡을 날만 남았는데.
인류는 외계인과 접촉하여 교류하기 시작하며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건 지금까지의 상식을 전면에서 부정하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외계인에 관한 수업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세상은 변해가고 있었으며, 그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분야를 삶의 일부분에 집어넣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저 우주의 세계와 여전히 미지로 가득한 외계인들에 관한 수업을 명확히 할 수는 없었다. 교수들도 모르는 것이 한가득한데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다만 시사와 관련된 내용 또는 현재까지 밝혀진 얕은 지식들을 가르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아직 정식으로 학과는 설립할 수 없지만, 교양 과목으로 하나 추가하는 건 가능했다는 소리다.
잠뜰은 우주나 외계인들에 대한 이야기에 크게 관심이 없었으나 수강 신청을 할 때 손가락을 삐끗해서 한 과목을 놓쳤다. 그러다 플랜B로 생각해 놓은 외계학개론 수업 과목 코드를 입력했고, 신청에 성공했다. 그게 지금 잠뜰이 지루하게 수업하기로 유명한 교수의 뒤에서 하품을 쩍 하고 있는 이유였다.
“이 강의의 목적은 여러분들이 외계의 존재에 대해 더 잘 알게 하고 견문을 우주까지 넓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는 외계인들과의 공생이 불가피한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부정적인 쪽으로든 긍정적인 쪽으로든 앞으로의 인류의 역사는 그들과 함께하게 되겠죠. 오늘은 첫날이니 외계인의 종류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알아보겠습니다.”
강의 목적을 읊는 교수는 자연스럽게 수업 주제로 넘어갔다. 잠뜰이 한숨처럼 숨을 내뱉었다. 아, 졸려. 월요일 9시 수업인 것도 불만인데 저 교수는 첫날부터 수업을 하고 있다. 잠뜰은 벌써 왜 강의 평가가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OT를 10분 만에 끝내길래 기대했더니 수업을 시작해 버렸으니 당연한 일일 테다.
“여러분들 중에서 실제로 외계인과 만나본 사람 있나요? 아마 없을 겁니다. 아직 외계인들은 우주 보안 협회가 지정해 놓은 구역에서만 돌아다니는 중이며, 허가 없이 민간인들과 접촉하는 게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인간이 그러하듯 외계인들도 정해놓은 규칙을 마냥 지키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거든요.”
잠뜰이 제 시간표를 슥 훑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점심 뭐 먹지.
“외계인과 인간의 유전자를 대조하여 종족을 구분하는 기술은 개발되었지만, 외형을 변형시킬 수 있는 외계인들의 경우에는 애초에 발견부터 잘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발견되지 않으면 그 기술로 구분하길 시도조차 할 수 없겠죠. 10년 전 미국 콜럼버스 주에서 일어난 사건, 대부분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외계인이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세뇌시켜 약 30년을 들키지 않고 사람들 틈에서 살아온 사건이 있었죠. 그건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정면의 칠판에 빔 프로젝터로 PPT 화면이 띄워졌다. PPT까지 재미없게 그림 하나 없이 글자로만 가득 차 있었다. 뒤편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현재 학계에서 구분해 놓은 바로는 외계인은 크게 세 분류로 나누어집니다. 실체형, 의식형, 환상형. 용어 외워두세요. 시험에 나옵니다. 먼저 실체형(Substantive Type)입니다. 외계인을 실체형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다시 말하는 거지만, 생명공학과인 잠뜰은 절대 이 외계인 얘기나 하는 교양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이건 정말로 시간이 맞는 수업도 튕기지 않은 수업도 이것밖에 없어서 벌어진 참사다. 잠뜰이 턱을 괸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학점은 나름 잘 주는 교수님이니까 아주 최악은 아니다. 적당히 듣고 학점만 잘 받고 치워야지⋯.
그때, 달칵. 강의실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맨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앉은 잠뜰은 그 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수업이든 지각생이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지각생은 조용히 걸어오더니 제 옆자리의 의자를 끌었다. 다른 자리도 좀 남아 있었는데 하필 제 옆이었다. 잠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노을을 닮은 눈동자가 보였다.
“안녕. 옆에 앉아도 될까?”
그게 황수현과의 □□□ 만남이었다.
외계학개론
이론과 현실과 이상과 동화
“아~ 나도 외계학개론~~⋯⋯.”
적당한 소음이 떠도는 교내 카페 안. 잠뜰은 테이블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로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첫날부터 과제를 내준 어느 미친 전공 교수 때문이었다. 본인 말로는 간단한 거라 삼십 분 만에 끝낼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구라다. 잠뜰은 지금 두 시간째 과제를 하고 있었다. 밤에 교수 뒤통수 후려치고 도망갈 사람 고용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제 앞에 반쯤 의자에 드러누운 채로 있는 상대는 계속해서 칭얼거렸다. 덤으로 쟤 뒤통수 후려칠 사람도 고용해야지.
“누구는 외계학개론 듣고 싶어도 못 듣는데~ 아이고 배 아파라.”
“그러게 잘 잡던가.”
“네가 넘겨주면 되지.”
“강의 드랍하면 다시 뜨는 시간 랜덤으로 돌아가는 형식으로 바뀐 게 언젠데 양도 타령이야.”
입을 삐죽 내민 공룡이 텀블러에 꽂힌 빨대를 쪽쪽 빨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냄새가 옅게 퍼졌다. 잠뜰이 외계학개론 수강신청을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그는 계속해서 잠뜰을 귀찮게 굴었다. 원래도 귀찮게 굴긴 했는데, 이번에는 아쉬움이 컸는지 더 그랬다. 그는 천문학과인 데다가 원래 외계인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으니 당연한 일이겠다만.
“외계인 수업 제대로 해주는 교수님 그 교수님밖에 없는데⋯⋯.”
“그리고 넌 어차피 외계인 동아리 들어가 있잖아. 에일리월드인가 뭔가. 올해 드디어 만들었다면서?”
“엉. 부원도 무려 13명임. 그리고 엘로월드야. 헬로 월드에서 따웠대.”
“구려.”
“그거 회장이 직접 지은 건데. 각별이.”
“구리다고 전해줘.”
오케이. 내심 동의하고 있었던 건지 공룡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 대신 총대 메고 동아리를 만들어 준 선배를 위한 커버 따위는 없었다. 대충 허리를 편 그가 턱을 괴고는 과제에 열중하는 잠뜰을 바라봤다.
“경암관에서 하는 수업이면 친구 없겠네. 자발적 아싸 박잠뜰 씨한테는 상관없나?”
“⋯친구 있거든.”
“누구?”
순간 열심히 타자를 치던 잠뜰의 손가락이 멈췄다. 잠시 고민하는 건지 눈동자가 굴러갔다.
“있어. 황수현이라고.”
“무슨 관데?”
“경영학과. 오티 때 말 걸던데. 동갑이더라.”
으음, 공룡이 소리를 냈다. 크게 흥미가 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잠뜰이 새 친구를 사귀든 말든 그와 크게 관련 있는 이야기는 아니니 당연하겠지만. 그러나 그건 그 새 친구가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일 경우다. 잠뜰이 어제 통성명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러자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근데 애가 좀⋯, 특이해.”
“엥. 어느 부분이?”
“몰라. 그냥 좀 이상해.”
“와, 잠뜰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단편적으로 판단하네. 그러면서 친구라고 하고. 우우, 규탄한다.”
“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전거 타다 넘어져서 다리 부러진 거 알더라.”
공룡이 멈칫했다. 장난기 가득하던 눈동자가 느리게 가라앉았다.
“⋯⋯찍어 맞춘 거 아니고?”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냐?”
“⋯그건 좀 이상하긴 하네. 아는 사이였던 거 아니야?”
“난 기억 안 나는데⋯. 아는 사이였으면 걔가 먼저 말했겠지.”
통성명 이후 사소한 대화를 나누던 그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것처럼 말했을 때, 잠뜰은 가장 먼저 그와 제가 어디서 만났던 가에 대해 생각했다. 일단 제 기억 속에는 없었다. 만약 우리가 아는 사이임에도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거였다면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별거 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제 옆에 앉아 있기만 했다.
친해지려는 노력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제게 관심이 없어 보이지도 않는다. 실제로 잠뜰은 수업 내내 제게 닿는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찝찝한 기분이 들게 하기 충분했다. 할 말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건지. 마지막에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 그럼 우리 이제 친구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해 주기는 했는데, 여전히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뭐, 지켜보면 알겠지. 일단은 공룡의 말마따나 처음 만난 사람이니까. 거리를 두는 건 며칠 더 지켜보고 나서 해도 될 것이다. 잠뜰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넘겼다.
외계학개론 수업은 월요일과 수요일에 있는 수업이었고, 끔찍하게도 9시 수업과 10시 반 수업이었다. 잠뜰은 다시 한번 이 수업을 플랜B로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제 운명을 탓하며 아이패드를 켰다. 교수님이 미리 올려주신 수업용 PPT 자료가 화면에 떠 있었다.
“저번에는 실체형과 의식형에 대해 설명했으니 오늘은 환상형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첫날 말씀드렸던 콜럼버스 주에서 일어난 사건 기억하시나요? 그때 발각되었던 외계인도 이 환상형에 해당됩니다.”
수업 시작하고 출석을 부르자마자 사담 없이 바로 시작된 수업에 어딘가에서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탓이 아니겠지만, 오티 때 봤던 사람보다 수가 많이 줄어있었다. 그리고 수현은 또다시 제 옆에 앉아 있었다. 저번에 친해진 이상 오늘도 같이 앉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제 옆을 차지하길래 조금 놀라긴 했다. 친화력이 좋은 건지,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건지.
“외계인을 환상형으로 분류하는 기준은 ‘인간의 기억 속에 남는 존재감’과 ‘형태의 불안정성’입니다. 형태의 불안정성으로 보자면 의식형과도 유사합니다. 다만 어느 다른 생명체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의식형과 다른 점이라면, 환상형은 살아가는 동안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갖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의 형태를 죽을 때까지 유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고 하죠.”
“너 아무것도 안 챙겨왔어?”
아이패드 화면을 넘기던 잠뜰이 텅 빈 수현의 책상 위를 보더니 물었다. 들어올 때부터 의문스러웠던 부분이다. 그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가방은 물론 심지어는 휴대폰까지도.
“응.”
“프린트라도 해오지.”
“깜빡했어.”
“⋯같이 봐. 오늘은.”
공부 안 하는 앤가⋯, 생각하며 잠뜰이 제 아이패드를 수현 쪽으로 밀었다. 수현은 눈을 깜빡이다가 가볍게 웃었다. 고마워. 부드러운 미소였다. ⋯사람은 착해 보이는데 말이지. 수현을 향해 눈을 흘기다 잠뜰이 다시 정면의 화면을 바라봤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 분야는 현재 열정적으로 파헤치고 있는 새로운 분야입니다. 그 배경이 우주인 탓에 우리가 알아낸 것들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겠지만, 인류는 새로운 세계에 한 걸음을 내딛고 있죠. 그러니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볼 부분은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구와 소통하고 협조하는 외계인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인간과 교류한 사례 하나하나가 소중하거든요. 그래서 이 부분은 조별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뭐? 잠뜰이 표정을 구겼다. 분명 에타에서는 조별 활동이 아예 없다고 나와 있었는데. 설마 올해부터 바뀐 건⋯⋯.
“하하, 벌써 학생들의 표정이 좋지 않네요. 원래는 개인으로 진행하려 했는데, 의견을 나눌 상대가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바꾸게 되었습니다. 미안해요. 그래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우연으로든 인위적으로든 인간과 접촉한 외계인의 사례에 대해 조사하고 토론한 후에 보고서로 정리하면 끝이에요. 간단하죠?”
이런 망할⋯⋯. 잠뜰은 격렬하게 이마를 짚고 싶어졌다. 일부러 조별 활동 없는 강의를 고른 건데, 강의계획서에 미리 써두지도 않고 마음대로 바꿔버리다니. 이건 사기야. 교수님, 교수님은 모르시겠지만 이건 사기 행위란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잠뜰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교수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는 편한 대로 짜도 좋습니다. 두 명 혹은 세 명으로 조를 짜서 다음 시간 전까지 저한테 알려주세요. 혹시 조원을 구하지 못한 학생들이 있다면 마지막에 남은 친구들을 모아서 제가 조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두 명이라는데. 나랑 할래?”
교수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수현이 물었다. 그는 이 강의실에서 교수가 던진 폭탄에도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주변은 불만 어린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래.”
잠뜰이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 힘없이 대답했다. 내가 뭐 선택권이 있겠니⋯⋯. 너 아니면 아예 모르는 사람이랑 해야 하는데. 그래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랑 하는 게 낫지. 조원을 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으나 여전히 좋지 않은 표정의 잠뜰이 신경 쓰였는지 수현이 덧붙였다. 걱정 마. 나 외계인에 대해서는 좀 아는 것 같으니까. 다른 인간들보다는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잠뜰은 생각했다. 도움은 모르겠고 네가 이상한 애라는 사실에 대한 근거만 하나 추가됐거든, 지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신이 피곤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교수가 남은 양심이 있었던 건지 과제 기간을 꽤 넉넉하게 잡아줬다는 거였다. 그래서 좀 느긋하게 해도 될 듯했지만 이미 전공 과제들만으로도 벅찬 잠뜰은 더 바빠지기 전에 미리 이 과제를 끝내놓고 싶었다. 수현도 그에 동의했다. 정확히는, 선택권을 온전히 잠뜰에게 넘겨줬다. 잠뜰은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사적으로 따로 만난 수현은 생각보다 더 괜찮은 애였다. 가끔, 아니, 사실 꽤 자주 이상한 소리를 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다정했으며 사근사근했다. 가끔 짓는 무표정은 쎄한 느낌이 들기도 했으나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조별 과제에 열심히 참여했다. 마치 그것밖에 할 게 없는 사람처럼. 게다가 잠뜰의 말에 잘 따라주고 자신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꺼내주니 조별 과제 파트너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상대였다.
그렇게 찾아온 심리적 안정감에 수현에 대한 잠뜰의 경계심은 언제 존재했냐는 듯 사그라들었다. 이제 그가 하는 이상한 말들은 그가 예상외의 괴짜라고 판단한 후부터 흘려들었다. 이미 제 주변에도 괴짜 한 명이 있기에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저런 사람들은 이해하지 않는 게 마음 편하다. 어쨌든 사람만 좋으면 됐지 뭐.
그래도 휴대폰 없는 건 좀 심하잖아.
“휴대폰이 왜 없는데?”
“⋯⋯고장 났어. 조만간 바꾸려고.”
하지만 그 대답 이후 이 주일이 지날 때까지도 그는 새 휴대폰을 장만해 오지 않았다. 보통 휴대폰은 없으면 불편하니까 바로바로 마련하지 않나. 잠뜰은 휴대폰 없는 삶에서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는 듯한 수현을 보며 휴대폰 중독자와는 거리가 멀구나, 같은 생각보다는 신기함을 느꼈다. 이건 중독의 문제가 아니라 편의의 문제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들과 연락은 어떻게 하면서 지낸단 말인가?
⋯⋯아, 몰라. 알아서 하겠지. 잠뜰은 몰이해의 영역에 더 다가서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마련할 테니 지금 당장은 사정이 있겠지, 하며 넘겼다.
수업이 늦게까지 있었던 탓에 수현과의 만남도 조금 늦어진 어느 목요일의 저녁이었다. 괜히 제 탓에 수현이 이 시간까지 집에 가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저녁을 산 후, 잠뜰은 집에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수현은 배웅해 주겠다며 옆에 같이 있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서서히 불어오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도로를 달리는 차가 적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평선이 제 눈동자를 닮은 색으로 물든 하늘 아래서 수현이 문득 말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산들산들 흔들렸다. 잠뜰은 휴대폰을 쳐다보다 말고 그를 바라봤다.
“넌 가끔 그런 소리 하더라.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없다면서?”
“처음에는 불확실했거든.”
“뭐야, 그럼 우리 만난 적 있었다는 소리야?”
“글쎄. 아마 그럴걸?”
잠뜰은 수현이 하루 한 번 이상한 말을 하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렸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만 볼 때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을 리가 없다. 이제는 또 헛소리를 하는군⋯쯤으로 알아듣고 흘려듣고 있지만. 이 녀석 가끔 보면 김각별보다 괴짜력이 더하다니까. 이건 잠뜰이 할 수 있는 괴짜를 향한 최고의 한 마디였다. 물론 수현은 괴짜라기보다 정말로 사는 세계가 다른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말이다.
뭐, 과거에 만난 적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기도 하고. 설령 진짜 예전에 만난 적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한가. 둘 다 제대로 기억도 하지 못하는 거라면 별거 없는 관계였을 게 분명했다. 잠뜰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보던 휴대폰을 다시 내려다봤다. 그렇게 침묵이 다시 그들 사이를 잠식했을 때쯤, 수현은 또 뜬금없는 소리를 꺼냈다.
“환상형 외계인이 정말 자신이 인간이라는 걸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걸까?”
“⋯갑자기 토론의 연장선?”
“그야 이상하잖아. 세상에 없던 인간이 하루아침에 존재하게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아무리 기억을 조작한다고 해도 증거가 갑자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정말 거기서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우리의 곁에서 숨어 살아가는 두 종류의 외계인이 있다. 하나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의식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의식형 외계인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 환상처럼 자신의 존재를 지웠다 드러냈다 하며 살아가는 환상형 외계인이었다. 실체형 외계인은 그 생김새부터가 도저히 숨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제외하고.
처음 환상형 외계인의 존재와 콜럼버스 주에서의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직후 우주 보안 협회나 일반 경찰서를 향한 신고 전화가 빗발쳤다. 평소 수상하게 여기던 주변 사람에 대한 신고 전화였다. 그 당시 대부분이 애꿎은 사람에 대한 신고였으나 실제로 걸린 외계인도 극소수 있긴 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자신이 인간인 줄 아는 외계인 중 90%가 스스로가 외계인임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고 알려졌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갑자기 생겨난 것에 대한 이상함을 느낀 사람이 10%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럼 당연히 그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쪽으로 저울은 기울어진다. 그야 그런 식으로 여러 환경에서 살아온 존재들인데 생존에 적합하게 무언가가 발달됐겠지. 애초에 기억을 조작한다는 부분부터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의심을 품지 않도록 세뇌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것도 조사했을 때 나왔잖아. 그것도 감안해서 자기 세뇌를 한다고. 뭐 자기가 시설 출신이라서 돈도 지인도 없다던가 얼마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그렇겠지⋯⋯.”
대화가 끝나자마자 저 멀리서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점차 엔진 소리가 가까워지자 잠뜰은 말끝을 흐리는 수현을 힐긋 쳐다보고 나서 지갑에서 교통카드를 꺼냈다. 이내 버스가 느리게 정류장 앞에 섰다. 그때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 잠뜰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그 세뇌가 완벽하지 않았다면, 기억이 불안정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걸까?”
“⋯뭐?”
“어쩌면 위화감을 느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몰라. 그들 모두가 인간으로 살고자 바란 건 아닐 테니까.”
버스의 문이 열렸다. 수현이 잠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내일 보자. 그 태연한 인사에 잠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왜 안 타냐는 버스 기사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 찜찜한 얼굴로 인사를 받은 잠뜰이 버스에 올라탔다. 대충 근처 자리에 앉자 창문 너머로 수현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단정한 얼굴이었지만 저를 쫓는 시선만은 이질적이었다. 지가 제일 외계인 같구만 뭘⋯⋯.
버스가 출발하며 수현과 점점 멀어지자 그제야 잠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공룡이랑 만나게 하면 대화는 잘 통하겠네. 둘이 아주 쿵짝이 맞아서 앞으로 이상한 얘기는 둘이서 나눌지도 모른다. 내일 정공룡 팔아먹어야지, 같은 생각을 하며 잠뜰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잔잔한 팝송이 흘러나오며 버스는 어두운 밤길의 도로 위를 달렸다.
그날 저녁 수현이 한 이야기는 잠뜰의 머릿속에서 꽤 오랜 시간 맴돌았다. 외계인의 사고를 이해하려는 듯 구는 수현의 태도가 기이했기 때문일까. 현시대의 사람들은 과거보다는 훨씬 외계인을 지척에 있는 존재로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게 인간들이 외계인을 받아들였다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우주에서 찾아온 손님을 집안에 들이기엔 인류가 지구만을 하나의 세계로 통칭한 지 오래였다. 외계의 존재를 하나의 이웃으로 대하는 건 몇백 년은 지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이해보다는 분석의 단계에 가까운 외계인과의 관계.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외계인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들을 사람처럼 대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가 황수현이다. 잠뜰은 다시금 수현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곱씹었다. 어쩌면 위화감을 느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몰라. 그건 추측보다는 확신에 가깝게 들렸다.
⋯⋯그러게. 사실 환상형 외계인이 인간들 틈에서 살아가고자 스스로를 세뇌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게 없었다. 교수님은 그게 평생을 방랑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생존법이자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셨지만, 말했다시피 인간의 사고와 외계인의 사고는 아주 동떨어져 있진 않았다. 누군가는 그저 인간으로 살아보고 싶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계인의 사정을 일일이 따지기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 경우의 수가 많으면 보고서에 첨부해야 하는 내용이 많아진다. 잠뜰은 방금 한 생각을 그저 자신의 머리 한구석에 묻어두기로 했다. 외계학개론 수업만 아니었다면 딱히 관심 가지지 않았을 주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후 계획한 대로 잠뜰은 수현에게 공룡을 소개해 줬다. 첫날 제가 공룡에게 한 이야기 때문인지 처음 공룡은 수현을 관찰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밝아진 얼굴로 따봉을 날렸다. 대화가 통하는 오타쿠 동지를 찾은 듯한 표정이었다.
“야 근데 특이한 애는 맞긴 하네. 나보다 과몰입 심한 듯.”
그렇게 말하면서도 딱히 싫어하는 티는 보이지 않아, 잠뜰은 그가 새로운 인연에 꽤 만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뭐. 한순간에 바뀐 태도가 좀 어이없긴 했지만 잠뜰은 그냥 대충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제 지인 두 명이 서로 잘 지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한동안은 그런 식으로 평화로운 듯했다. 조금 특별함이 첨가된 학교생활은 잔잔하게 이어졌다. 조별 과제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후 잠뜰은 완전히 수현을 제 바운더리 안에 들였다. 이 수업이 아니면 더 볼 일 없을, 비즈니스 친구 관계처럼 생각하던 것도 그만뒀다. 그를 괜찮은 사람으로 판단했고 오래 인연을 이어가도 될 상대로 생각했다. 조금 특이하다는 점은 관계를 끊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그 평화는 한순간에 깨어졌다.
기묘하게도 아주 익숙한 방식으로.
오늘은 특강이 있는 날이었다. 우주 보안 협회에선 전 세계의 학교로 강사들을 보내 학생들에게 관련 지식을 알려주는─대부분 외계인의 위험성에 대한 것이지만─강의를 하게 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게 우리 학교였던 것이다. 교수님은 매우 들떠 보였고 학생들도 썩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어쨌든 꽁으로 보낼 수 있는 수업이었으니까. 특강은 시험 범위에 들어가지 않으니 말이다.
공무원 얼굴상 그 자체인 강사는 교수님보다는 재밌게 강의를 이어갔다. 확실히 교수님이 말해줄 수는 없는, 실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줘서 그런지 흥미가 일었다. 호흡기관 없는 외계인이 땅 위보다 바닷속을 편하게 여겼다거나 아주 호의적인 외계인들은 자신들 행성의 물건을 선물로 건네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꽤 재미있긴 했다. 외계인들도 종족마다 쓰는 언어가 다르다던데, 그건 어떤 느낌일까. 잠뜰은 자잘한 궁금증을 떠올려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외계인과 민간인이 접촉할 수 없도록 하는 게 민간인 보호 차원에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뿐만은 아닙니다. 물론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긴 하지요. 인간들과 완전한 신뢰 관계를 구축한 외계 종족은 우주 보안 협회 설립 이후 역사상 단 한 종족밖에 없으니까요.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인류와 소통한 것으로 유명한 그 종족입니다. 그들은 지구의 환경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적어도 지구에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요.”
담담한 어투의 강사가 잠시 말을 멈추고 시계를 바라봤다. 어느덧 강의 시간이 절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는 뭘까요? 바로 외계의 존재가 살아가기에 지구의 환경은 부적합하다는 겁니다. 그들이 살아온 터전과 지구는 너무나도 환경이 달라 대부분의 외계인이 지구에 오래 머무른다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협회는 특정 지역을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개조하여 머물 수 있게 만들어줬지만, 사실 거기서도 오래 머물지는 못합니다. 아직 완벽히 외계의 환경을 구현해 낼 기술력이 없거든요.”
이야기를 이어가던 강사는 이쯤에서 주제를 돌리기로 했는지 구석에 서 있던 보조 요원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복도로 나가더니 어떤 기계가 올려져 있는 카트를 끌고 돌아왔다. 오오, 흥미 어린 감탄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 기계는 원격 외계 생명체 구분 장치입니다. 기존의 외계 생명체 분석 기계는 개인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그것마저도 직접 접촉해야만 제대로 된 분석 결과가 나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개발된 이 장치는 본체를 기준으로 반경 20M 이내의 외계인을 감지해 낼 수 있지요. 아마 뉴스나 신문 기사에서 한 번쯤 이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강사의 손이 가볍게 기계 위를 짚었다. 수현이 시선이 느리게 그를 따라갔다.
“만약 장치의 감지 범위 내에 외계 생명체가 있다면 여기 있는 이 전등에 빨간색 불이 들어오고, 경보음이 울리게 됩니다. 현재로서는 아직 감지 범위가 좁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어렵지만, 많은 연구기관에서 작동 범위를 넓혀 빠른 시간 내로 간편하게 1차 검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네, 거기 모자 쓴 학생. 말씀하세요.”
“그 장치로 외계인을 감지한다면 누가 외계인인지도 알 수 있나요?”
“좋은 질문이네요. 아쉽게도, 그 부분은 저희가 개선해야 할 기능 중 하나입니다. 지금으로써는 작동 범위 내 외계인의 존재 유무만을 판별 가능합니다. 다른 질문 있나요? ⋯네, 그러면 이제 작동하는 모습을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다들 주목해 주세요.”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강사의 말에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단상 위로 쏠렸다. 하이라이트였다. 잠뜰도 한동안 뉴스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던 그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하긴 했기에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수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져 그를 곁눈질로 힐긋 바라보았다. 그는 늘 그랬듯 곧은 자세로 가만히, 또 편하게 앉아 있었다.
다만 눈빛만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그건 그가 무언가 때가 왔을 때 짓는 눈빛이었다. 잠뜰이 한 번 본 적 있던⋯⋯.
⋯⋯.
⋯⋯본 적이 있었다고?
알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잠뜰이 그대로 굳어버린 사이 강사는 잠시 부지런히 조작을 하더니 준비가 다 된 듯 학생들을 바라봤다. 셋 세면 작동시키겠습니다. 자, 하나, 둘⋯⋯, 셋. 보란 듯이 레버가 내려간다. 아주 천천히. 잠뜰은 반투명한 유리창 안에서 돌아가는 복잡한 형태의 팬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현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친 탓이었다. 그는 턱을 괸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있잖아, 잠뜰아. 내 생각에 내가 외계인인 거 같거든.”
목소리가 허공에서 유영한다. 그래, 역시 본 적이 있다. 저 눈을.
아주 잔인했던 순간에.
“그리고 그걸 아는 인간이 너밖에 없는 것 같아.”
그 직후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 퍼졌다.
*
[ 인기 게시판 ]
[속보] 외계학개론 수업에 외계인 출몰
뭔소린지 설명해 보겠음.
어제 ㄱㅇㅎ 교수님이 하는 외계학개론 교양 수업에 우주 보안 협회에서 외부 강사 초청돼서 찾아옴. 그리고 그 강사님이 이번에 새로 개발된 신제품이라면서 반경 20M 내에 있는 외계인 구분할 수 있는 무슨 기계를 단상에서 작동시킴.
근데 그 기계에서 ㅈㄴ 시끄러운 삐삐 소리가 남. 막 빨간 불도 들어오고... 강사도 놀라서 당황하고 애들 다 소리 지르면서 소름 돋는다고 그럼. 그거 고장 난 거 아니냐고 하니까 바로 전 학교에서도 멀쩡히 작동됐다고 함. 애초에 이렇게 특강 다닐 때 빨간 불이 들어온 적이 처음이라고.
여기까지는 그냥 해프닝 중 하나라고 여길 수 있었음. 근데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임. 그 강사가 혼자 심각해져가지고 다음에 협회 요원들이랑 재방문한다고 함;; 오늘 강의 들었던 사람 모두 모여달라고... 검사할 게 있다고...
그러니까 이제 사람들도 심각해져서 걱정함. 다음 주 월요일에 온다던데 진짜 이 중에 외계인 있는 거 아님? ㅋㅋㅋㅋㅋ
익명 1 | 겠냐
익명 2 | 오류겠지... 그런 외계인 판별 기계 오작동해서 생사람 잡은 사례도 많잖음 그래서 이중 검사가 필수화된 거고
익명 3 | 진짜면 개재밌을거 같은데 기사 나올듯ㅋㅋㅋ
ㄴ익명 4 | 미친 외계인들은 사람도 죽이는 거 모르냐? 재미는 무슨 이거 까딱 잘못하면 대형 참사 날 수도 있음;
ㄴ익명 5 | 아무튼 재밌어 보이면 개추 ㅋㅋ
ㄴ익명 6 | ㄹㅇㅋㅋ 아무튼 내 수업 아님
ㄴ익명 7 | 이러니까 나라가 망하지
*
잠뜰의 인생은 아주 무난했다. 그녀는 특출난 재능 없이 괜찮은 성적으로 초중고를 졸업했으며 운 좋게도 좋아하는 과목과 잘하는 과목이 일치해 원하는 학과에 수시를 넣어 합격했다. 그리고 대학 수업을 들어 보니 이쪽 분야가 예상한 것보다도 더 저와 잘 맞았고, 나름 괜찮은 대학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잠뜰의 인생에도 특별한 사건은 있었다. 유성우가 쏟아지는 열여덟 시절의 밤이었다. 잠뜰은 공부를 하다 답답할 때면 새벽 산책을 나가곤 했고, 그날도 그저 그런 날이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잠뜰의 산책 루트를 누군가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는 거였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고, 그 인간─맞나?─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두운 하늘에게 지배당한 이 밤에 노을이 보였다. 잠뜰이 아무 말도 않고 있자 그 인간─맞나 보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린 인간이네.”
결코 잊지 못할 첫 마디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잠뜰은 이상한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잔잔한 목소리로 저를 보고 어리다고 하는 또래의 남자애를 그냥 지나쳐서 지나갔다. 그렇게 끝날 일인 줄 알았다. 그다음 날에도 그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잠뜰은 그 이상한 애와 친해질 마음이 1도 없었다. 정말 하나도. 그런데 그런 그녀가 우연히 제 산책 시간에 그 애와 마주칠 반복한 지 다섯 번째가 되었을 때, 그 애가 앉아 있는 그네 옆에 앉게 된 건 그저 신경이 쓰여서였다. 다섯 번째 만남에서 그 애는 평소처럼 길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지 않고 근처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있었다. 잠뜰은 그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가출 청소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현실적인 키워드가 상당히 가능성 있는 것으로 보여지자 잠뜰이 그 애에게 갖던 찝찝함은 한순간에 희미해졌다.
잠뜰은 아주 크나큰 용기를 내어 그 애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 그, 실례지만 혹시 집 나왔니? 조금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직설적인 한 마디에도 그 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음, 비슷하긴 해. 그리고 잠뜰은 제 가정을 확신했다. 이런 젠장.
그 애의 이름은 황수현이었다. 잠뜰은 이름까지 들은 이상 이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는 걸 직감했다. 잠뜰이 조심스럽게 혹시 경찰의 도움이 필요한 거냐고 묻자 수현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렇겠지. 경찰의 도움을 받고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진작 얘가 직접 경찰서에 찾아갔을 것이다. 대충 슥 훑어보니 어디 다친 곳도 없고 표정도 잠잠한데⋯⋯. 그래서 더 예상이 가지 않았다. 대체 왜 길거리를 떠도는 건지.
하지만 대체로 집을 나온 아이들의 사정은 복잡하다. 높은 확률로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고 제가 도울 수 있는 범위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잠뜰은 사정을 캐묻기보다 그 옆에 앉아 사소한 이야기나 나누는 걸 택했다. 그런 잠뜰이 신기했는지 수현은 처음에는 잠뜰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가 점차 제 이야기도 꺼내기도 했다. 잠뜰의 눈에는 그게 마치 마음을 연 것처럼 보였다.
수현은 아주 특이한 애였다. 그는 잠뜰이 새벽 산책을 나올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의 산책 코스 어딘가에서 발견되었으며, 늘 잠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제는 잠뜰이 말하는 횟수보다 수현이 말하는 횟수가 더 많았다. 처음 그들의 만남은 5분 남짓이었으나 그 시간도 갈수록 늘어났다. 수현은 자신의 이야기보다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으며,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솔직히 재미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특이한 애라는 인식은 강해졌지만 뭐 어떤가 싶기도 했다. 어차피 일주일에 두세 번 밤에만 잠깐 만나는 애고, 이 이상 서로의 일상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상상이 가지도 않았다. 그런 관계라면 만남에 부담이 덜했다. 상대가 좀 평범의 기준에서 많이 벗어났어도 감안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잠뜰이 수현의 정체를 알게 된 날에는 좀 고민이 되긴 했다.
“너 진짜 우주 좋아하나 보네. 별걸 다 알고 있고.”
“뭐, 그렇지.”
수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휘는 눈꼬리가 잠뜰을 향했다.
“난 외계인이거든.”
아무래도 이런 대답을 들으면 누구든 만남을 이어가는 것에 대해 재고해 보지 않을까. 그때 잠뜰은 가정 하나를 더 추가했다. 혹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하지만 그 의혹은 머지않아 사라졌다. 정체를 밝힌 이후부터 수현이 더욱 깊은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들을 들은 잠뜰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자세한 외계의 이야기들과,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인간의 형체를 잃어가는 수현의 몸이. 이거 볼래? 라며 산뜻한 어투로 제 손을 짙은 보라색 형체의 무언가로 바꿔버리던 그 행동이⋯⋯.
그런 걸 본다면 눈앞의 상대가 인간이 아님을 부정하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사실 처음에 그 기괴한 형태를 봤을 때는 두렵기도 했다. 그건 미지의 것과 마주한 인간이 당연히 품는 두려움이었다. 그래도 잠뜰은 최대한 그 두려움을 표현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그 결과 다시 수현에게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수현이 몸의 형태를 바꾸는 짓은 다시 하지 않기도 했고.
이제 산책을 나갈 때면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답답하지 않아도 최소 이틀에 한 번은 밤에 밖을 나갔다. 그러면 언제나 수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특별한 비밀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어린 나이라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하듯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친구가 생기자 저까지도 특별해지는 것만 같았다. 순수한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 친구는 왔을 때처럼 잠뜰을 떠나갔다. 벼락과도 같이.
“⋯⋯뭐라고 했어, 지금?”
우뚝 선 잠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가로등 아래 서 있던 수현이 가만히 잠뜰을 응시했다. 오늘따라 무표정인 그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오늘 네 기억을 지울 거라고.”
거리가 고요했다. 잠뜰의 귀에는 시끄럽게 뛰는 제 심장 소리만이 들려왔다. ⋯⋯왜? 겨우 다시 물은 말에 수현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마저도 담담해 보여 잠뜰의 속이 비틀렸다.
“음⋯⋯.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지구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거든. 난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 슬슬 떠나야 하고. 그래서 네 기억을 지워야 해.”
“⋯⋯나 너 신고 안 할 거야.”
“미안. 내가 못 믿어서.”
수현은 몇 주간 함께했던 기억이 전무하다는 듯 평온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마치 그 기억이 내가 너를 믿게 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잠뜰은 순간 울컥할 뻔했지만 이내 다시 진정했다. 상대는 외계인이다.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저 녀석이 우리와 다르게 사고하는 방식을 그 몇 주 동안 봐왔지 않나.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았다. 수현이 존재하는 잠뜰의 기억들은 그녀가 살아온 18년의 세월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기억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단호한데 내가 거부한다고 해서 그를 막을 수 있는가? 잠뜰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가 다정한 이임은 알고 있지만 그건 고작 몇 주간의 관찰에서 알아낸 단편적인 부분일 뿐. 잠뜰은 여전히 그를 완전히 알지 못했다⋯⋯.
주먹이 꾹 쥐어진다. 길게 느껴지는, 아마도 실제로도 길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잠뜰은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 그럼. 지워.”
예상 밖의 순순한 수긍이었는지 수현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잠뜰은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선언하듯 내뱉었다.
“대신 다음번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안 지우는 거다. 내가 지금 너한테 신뢰를 줬으니까. 알겠지?”
외계의 존재에게 받는 신뢰란 참으로 기이하다. 수현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그에게는 인간이 외계인이었으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게 배신당했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수현은 최근 몇 주간 만난 인간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제가 외계의 존재임을 알고도 피하거나 적대하지 않고 친구로 받아들여 준 인간은 잠뜰이 처음이었으니까. 수현이 제 정체를 대수롭지 않게 밝힌 것도 잠뜰이 자신을 거부하지 않을 것 같다는 미묘한 확신이 들어서였다. 물론 그 확신이 틀려도 상관없었다. 그냥 기억을 지우고 떠나면 되니까. 만약 그랬다면 우리의 인연은 거기까지가 한계였을 테지.
하지만 잠뜰은 그러지 않았다. 수현의 확신에 보답했다. 그러나 그 보답이 수현의 안전을 내걸 정도는 아니었다. 인간들 틈에 숨어든 외계인이 우주 보안 협회에 끌려가면 아무도 모르게 실험체가 된다. 그들은 겉으로는 평화와 협력을 이야기했으나 뒤로 정보를 얻어낼 기회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수현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고, 그런 처지가 되고 싶지 않았으므로 조금의 위험 요소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잠뜰을 불신한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잠뜰을 신뢰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녀는 결코 수현을 신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보가 새어 나가는 건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도 언제든 발생한다. 잠뜰이 한 단 한 번의 말실수가 수현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좋은 관계를 구축했지만, 그것이 저를 온전히 맡길 수 있을 정도의 무게가 되기엔 부족했다.
나는 너를 믿지만 인간은 실수를 하는 존재니까. 수현은 제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잠뜰을 응시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허락한 주제에 툭 건들면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도망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도망친다면 수현은 잠뜰을 붙잡지 않을 수도 있는데.
신기하지,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를 믿어.
“그래, 약속할게.”
그리고 그건 아주 기꺼운 일이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벽돌길 위에서 우주를 닮은 보랏빛 빛무리가 퍼져나간다.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빛무리 앞에서도 잠뜰은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기억이 사라질지언정 수현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은하수를 닮은 빛이 잠뜰의 머리 주변을 맴돌고, 수현은 빛이 잠뜰에게 스며드는 광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시간이 지나 점차 빛이 희미해지고 잠뜰의 눈앞도 흐릿해지기 시작할 때. 그 빛이 완전히 꺼지기 전에 수현이 잠뜰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멍한 정신 틈으로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믿어줘서 고마워. 너는 잊겠지만 선물을 하나 줄게.
내 진짜 이름은⋯⋯.
⋯⋯.
잠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거리에 혼자 서 있었다. 어쩐지 머리가 띵해 잠뜰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뭐야. 나 왜 이쪽 길로 왔지? 잠시 의문하던 잠뜰이 이내 떨쳐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뭔진 몰라도 적당히 바람은 쐰 것 같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요즘 들어 자주 산책을 나왔더니 몸도 좀 건강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나 왜 그렇게 자주 산책을 나왔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럼 별거 없는 이유였겠지. 그리고 그날 이후 잠뜰이 밤산책을 나가는 일은 없었다. 대신 바람을 쐬고 싶으면 창문을 열었다. 괜히 산책을 나가면 무언가 기대하던 것이 없어진 것처럼 허한 기분만 들었다.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없다는 듯한 직감이 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잃어버린 게 없는데. 분명 그럴 텐데도⋯⋯.
외계인이 아무리 인간처럼 군다고 해도 흉내에는 한계가 있다. 사소한 의심이 곧 ‘저 사람 외계인 아니야?’라는 의문을 품도록 만들 수 있는 시대. 실제로 숨어지내는 외계인들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은신에 더 집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찾아오는 불운은 있었다.
달이 머리 위에 뜬 밤, 수현은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육체를 흉내 내고 있는 탓에 벅차오는 숨을 몰아쉬면서. 저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은 점점 커지는 것만 같았다. 달리는 걸 멈춘 수현이 얕은 기침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무작정 뛰다 보니 어느새 공사장까지 와 있었다. 수현이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의심을 산 걸까. 고작 길에서 마주친 사람이 뭘 보고 나를 신고했지?
분명 무언가 이상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잠뜰도 가끔 수현의 행동을 보고 그러면 의심받는다고 지적하곤 했으니까. 여전히 수현은 대체 어느 부분이 ‘인간답지’ 않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단번에 신고당할 정도면 그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었을 거다. 잠뜰이가 하는 말 좀 더 잘 들어둘 걸 그랬나. 그는 의미 없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잠시 인간의 형체가 일부분 풀렸을 수도 있었다. 그는 이 인간 형체의 몸으로 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작은 실수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인간의 신체는 다른 외계 종족들보다 세밀하고 복잡한 면이 있어 더 신경 써야 하니까. 스스로가 정의 내리는 자신에 따라 몸의 형체가 유지되는 그들 종족의 특성상 방심했다간 본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완벽한 생존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정신까지도 변화한 종족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고.
말했던가? 스스로를 타 종족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 종족의 생존 방식 중 하나라고.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인간들 틈에서 살아가는 외계인들은 많다. 다만 그들조차도 자신이 외계인인지 모르고 있기에 알려지지 않은 것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위기를 피했을 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도 없다. 그때는 이미 자신을 인간이라 믿고 있는 데다가 원래대로 돌아올 방법도 잊은 후니까. 그러니 그건 영원한 도피처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지척까지 다가온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건물의 외벽에 비친 붉은색과 푸른색의 빛이 합쳐져 점멸했다. 곧 여기까지 경찰이 들이닥치겠지. 그럼 그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미 그에 대한 수많은 사례에 대해 그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수현이 아무도 없는 공사장 한가운데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당장의 위기를 피하는 것이 나 자신을 잃는 것보다 가치가 있는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면 종족의 본능이 답한다. 생존보다 우선되는 건 없다고.
자신이 외계인임을 잊게 된다면 돌아올 방법도 잊게 된다고 했지. 사실이다. 다만 아예 돌아올 수 없는 건 아니다. 언젠가 돌아오고자 하는 자라면 누구든 자신을 버리기 전에 트리거를 하나 남겨두기 때문이다. 그것만을 건들면, 전체가 작동되는 트리거.
언젠가 한 인간의 소중했던 기억을 앗아간 빛이 다시금 발화한다. 인간이 되어가며 수현이 되뇌인다. 박잠뜰을 찾아. 네가 이 지구에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야. 숨을 들이쉰다. 그러면 너는 그 곁에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어. 그녀가 너를 다시 우주로 돌려보내 줄 거야. 그 인간이 네 ‘이름’을 알아⋯⋯. 저 광활한 우주의 기억이 흐릿해진다. 만들어진 기억이 새로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다만 키워드 하나만이 아주 깊숙한 기억 어딘가에 잔존한 채로.
빛이 흩어져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눈을 뜬다.
이제 이곳에 외계인은 없었다.
엉망진창으로 끝난 수업 직후, 잠뜰은 강의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진정되지 않은 소란스러움으로 가득한 강의실을 뒤로하는 그녀의 뒤를 수현이 졸졸 따르고 있었다. 그 소음과 적당히 멀어졌을 때쯤 잠뜰이 멈춰 섰다. 그러자 따라오던 발걸음도 멈췄다. 하얀 복도 위에는 두 사람만이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서 있었다.
“⋯⋯네가 외계인인 것 ‘같다’고.”
“응.”
“대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경위가 뭔데?”
평소라면 헛소리라며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않았더라면. 입술이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렇게 정체를 밝혀버릴 거라면 왜 그때는 그런 짓을 했냐는 이상한 배신감이 치밀어오르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제 감정일 터인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운데 고요히 가라앉은 수현의 표정을 보니 더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저 표정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이렇게 차분히 헛소리를 받아주는 것도 잠뜰에게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수현은 잠뜰의 물음에 고민하는 듯싶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나한테 부모님이 있어.”
“어.”
“근데 지금은 집에 안 계셔. 여행을 가신 것 같아. 그런 설정 같거든.”
“⋯⋯뭐?”
“그리고 뭘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돼. 장기가 내 게 아닌 것 같아. 뭐 안 먹어도 딱히 배고프지도 않고. 남들 다 있는 사진 한 장 없고, 지인도 한 명도 없어. 나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달까. 또 결정적으로⋯⋯.”
그리고 폭탄을 떨어뜨렸다.
“나 주민등록번호 없어.”
삐끗.
“⋯⋯뭐가 없다고?”
“주민등록번호. 아, 민증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하나 만들긴 했어. 위조지만.”
“너, 너, 너 그럼 입학은 어떻게 했어?”
“안 했어. 나 사실 여기 학생 아니야. 너 이 학교 다니는 거 알고 이 수업 출석부만 살짝 수정했어. 모르던데?”
이거 미친놈이다. 잠뜰이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래도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만약 이게 다 사실이라면 아주 X된 일이다. 당장 다음 주에 우주 보안 협회 요원들이 들이닥치는데 출석명단 위조한 놈 + 주민등록번호 없는 놈 + 그날 강의실에 있었던 놈 = 다 한 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애초에 출석명단 위조한 건 굳이 그 요원들이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들켰을 것이다. 그러니까, 얘 진짜 뒷일 생각 안 하고 막 저질렀다는 거다⋯⋯.
“미친놈⋯⋯.”
“음. 그래서 나 도와줄 거야?”
“내가 왜? 너 진짜 외계인인 거면 나 엮이는 순간부터 인생 꼬이거든? 우리 오늘부터 절교하자. 만나서 안 반가웠고 앞으로 잘 지내.”
“하지만 네가 유일한 내 편이라고 했는데.”
“⋯⋯누가?”
“내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마법처럼 단번에 가라앉았다. 어쩐지 그 말만큼은 날카롭게 받아칠 수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잠뜰이 잠시 침묵하다가 겨우 입술을 뗐다.
“⋯⋯내가 너한테 뭘 해주면 되는데?”
그러자 수현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 이름을 불러줘.”
“⋯⋯황수현?”
“그거 말고.”
“이거 네 본명⋯⋯. ⋯아니겠네. 아오.”
잠뜰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근처의 복도에선 방금 같은 수업을 들은 사람들인 건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진짜 우리 중에 외계인 있는 거 아냐? 기대와 흥미로 가득 찬 목소리에 부정적인 감정은 전무했다. 그 소리가 서서히 멀어질 때 다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수현은 가볍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미소가 상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는 일반적 원리를 아는 생명체처럼.
“외계학개론 수업 들으면서 내가 생각한 게 있어. 아마 나는 환상형 외계인인 것 같아. 너도 기억하지? 환상형 외계인이 인간들 틈에서 몰래 살아가는 법.”
“⋯⋯스스로를 인간으로 세뇌시켜 살아간다고.”
“그리고 원리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다른 인간의 기억도 지우거나 일부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도 알려져 있지. 내가 네 기억을 지운 게 아닐까? 유독 뛰어난 외계인은 타인이나 여러 사람들의 기억에도 한 번에 손댈 수 있다고 했으니까.”
도저히 와닿지 않는 이야기에 말문이 막혔다. 그럼에도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장 부정할 수 없는 건 잠뜰이 느끼고 있는 이 이질적인 감정 때문이었다. 항상 싫은 건 싫고 좋은 건 좋다고 명백하게 구분됐는데 얘한테는 그게 안 됐다. 정말 우리가 어떠한 인연이 있었던 걸까. 정말로 네가 내 기억을 지웠던 걸까. 그 비현실적인 일이 나도 모르는 새 내게 닥쳤을 확률이 존재한다고⋯⋯.
“⋯⋯이런 걸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내가 웃기지도 않네.”
작게 비소를 뱉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잠뜰은 이미 이 웃기지도 않는 주제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웃음을 거두고 수현을 바라봤다.
“그보다 기억을 지웠다는 건 좋은 얘기로 들리지 않는데. 그냥 지웠을 리가 없잖아. 지워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던 거 아냐? 그럼 다시 찾았을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거고.”
“문제가 생기면 다시 지워줄게.”
“⋯⋯진짜 그게 해결책이라고 생각해?”
“⋯아니야?”
“너 T야?”
“MBTI 검사 안 해봤는데.”
하고 올까? 그렇게 묻는 수현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잠뜰은 뭐라 더 말을 얹으려다 힘이 빠져서 그냥 포기했다. 쟤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니 여태까지 괴짜 같다고 생각했던 모습들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그럼 사회성을 가르치는 선생처럼 굴어도 별 소용 없을 거라는 점도.
⋯⋯사실 진짜로 기억이 지워진 게 맞다면 다시 돌려받고 싶기는 했다. 이쯤 되면 궁금증이 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나타나 자신이 외계인이며 네게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게다가 나도 그 녀석이 외계인임을 어느 정도 믿고 있는 상태라면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당연히 궁금해하지 않을까. 그에 따를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뭐, 그 위험이 뭔지 알기 위해서라도 일단 기억이 돌아와야 한다는 건 사실이니까.
“하나만 약속해.”
“뭘?”
“나를 해치지 않겠다고. 기억을 되찾았는데 너랑 내가 사이가 나빴던 걸 수도 있잖아.”
잠뜰의 말을 들은 수현이 눈을 깜빡였다. 그런 선택지를 고려해 본 적도 없다는 것처럼.
“그럴 일은 없을걸.”
당연한 걸 말하는 듯한 어투가 묘했지만, 그래도 대답은 마음에 들었다. 물론 기억을 되찾고 나서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확답을 받아놓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잠뜰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제 인생의 가장 빅 이벤트는 수능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거대한 게 닥쳐온 기분이다. 어쩌면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어 버릴 수도 있는.
교실 내에 외계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지든 말든 수업은 그대로 진행됐다.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등교는 하는 판에 외계인은 그와 비슷한 위험 요소 라인업에 끼지도 못한 듯했다. 그것 가지고 휴강을 하기에는 오바인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도 꽤 많았고. 그래서 잠뜰은 이틀 내리 밤을 설친 눈으로 강의실에 등장했다. 밤을 설치게 만든 범인은 뻔뻔하게 잠뜰의 옆에서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다. 괜히 괘씸한 기분이었다.
“지난번에는 다들 놀라셨죠?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긴 했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없을 겁니다. 기계 오작동일 거예요. 그래도 다음 주 월요일 수업에는 꼭 참여하셔야 합니다! 검사를 받지 않으면 후에 자택으로 직접 방문한다고 하니까.”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전과 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교수님은 혼자 단상 위에서 열심히 말을 하고 학생들은 가만히 앉아 듣고만 있는 일상적인 광경. 그들은 다음 수업 시간이 단체 검사 시간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지 않을 테니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오늘 듣는 수업은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아무래도 옆에 외계인(자칭)이 앉아 있는데 같이 외계인 수업을 듣는다고 하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때 잠뜰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너는 지금까지 이 수업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너 자신을 찾기 위한 단서를 수집하고 있었나. 그렇다면 그건 상당히 기이한 일이겠다. 타 종족의 수업에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니.
실체형과 의식형을 지나 환상형 외계인의 신체 구조에 대한 설명이 나오자 잠뜰은 귀를 기울였다. 교수님은 환상형 외계인은 다른 외계인과는 달리 심장이 뇌의 완전한 하위기관이라고 설명했다. 신체를 바꾸면서 심장의 형태는 변화하곤 하지만 기억 조작과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중요 기관이 뇌이기 때문에 그것만은 태어날 때와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고.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변형과 적응. 그건 진화와는 달랐다. 우리도 카멜레온이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색을 바꾸는 걸 진화라고 부르지는 않으니까. 물론 카멜레온과 비교하기엔 한참 깊은 무게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저⋯,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다음 장으로 PPT가 넘어가기 전에 잠뜰이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질문이 있다고 하자 교수의 눈이 매우 반짝거렸다. 네, 질문이 뭐죠?
“환상형 외계인이 스스로를 다른 종족으로 인지하도록 자기 기억을 조작해서 살아간다고 했잖아요. 그럼 다시 기억이 돌아올 방법은 아예 없는 건가요?”
“오, 좋은 질문이네요! 바로 그 부분이 현재 학계에서 크게 다뤄지는 주제 중 하나에요. 환상형 외계인이 다시 제 기억을 되찾은 사례는 현재까지 두 가지가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고향 행성의 사진을 봤을 때 기억이 돌아온 사례고, 다른 하나는 차에 치여 중상을 입고 죽기 직전에 기억을 되찾은 사례죠. 사실 그 종족이 조금 비협조적인 종족이라 정확한 기준은 알 수 없지만, 저희는 기억을 잃기 전 어떠한 조건을 정해놓고 그 조건을 달성하면 다시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조건을 달성하면 기억을 되찾는다고⋯⋯. 잠뜰이 힐끔 수현을 바라봤다. 그럼 얘의 ‘조건’은 내가 이름을 불러 주는 건가. 참 복잡하고 까다로운 조건이다. 그냥 ‘초콜릿 사 먹으면 기억 돌아옴’ 같은 걸로 설정하면 안 되는 거였나. 가오가 없어서 안 되나. 근데 가오 챙기기엔 너무 중요한 부분 아냐?
반쯤 넋을 놓고 괴상한 생각을 이어가던 잠뜰이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의문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기억을 잃었다면서 그건 어떻게 기억하는 걸까. 중요한 거라서 무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건가? 이런저런 가설들을 세워보던 잠뜰은 문득 이런 고민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야 바로 옆에 물어볼 상대가 있지 않은가. 깨닫자마자 바로 잠뜰은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너 근데 기억 잃었다면서 나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몰라. 그냥 본능처럼? 그리고 너 만나고 나서부터는 조금씩 뭔가가 떠오르더라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도?”
정면을 응시하던 주홍빛 눈동자가 그제야 이쪽으로 굴러왔다.
“잠뜰아, 우리는 이 기나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생존인 존재들이야.”
나긋나긋한 말투에 비해 문장은 지독하게 이질적이었다. 순간 잠뜰은 그가 기억을 잃지 않은 것 같다고 착각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수현은 처음부터 저랬다. 자신이 인간이 아닌 것 같다고 짐작하고 있다고 말했으면서 이미 많은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기억을 떠올리고 있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가진 기억이 너무 많아서 기억이 ‘조금’ 돌아왔다는 기준이 인간과는 다른 걸까.
“우리는 삶과 관련해서는 아주 강렬한 이끌림을 느껴. 그게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나를 살려줄 사람인 걸 아는 거지.”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네가 하니 그럴듯한 소리처럼 들렸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 주면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나는 살아남을 테고.”
그럼 나는 영원히 너를 기억하게 되겠지. 수현이 읊조린다. 대화가 끝나자 현실의 수업이 금방 다시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잠뜰은 여전히 그가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만큼 인상적인 말이었다. 미지의 존재가 저 광활한 우주로 돌아가서도 나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될 거라는 건. 네가 말하는 영원이란 어느 정도의 기간일까. 나의 영원은 100년도 채 되지 않는데,
인간은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이상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죽어도 저 우주에서 살아간다는 말일까.
정공룡이나 좋아할 법한 낭만적인 말이었으나, 그녀도 빠르게 심장이 뛰었다. 결국 낭만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는 법이라.
어떻게 수현과의 기묘한 협력 관계가 맺어지긴 했으나, 잠뜰은 아직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진 못한 상태였다.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거대한 내용이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맘 편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잠뜰은 꼬박 하루를 고민하다 수현에게 물었다. 나 근데 이거 다른 사람한테 말해도 돼? 당연히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네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지금 잠뜰이 익숙한 카페 내에서 공룡과 마주 앉아 있는 이유였다. 원래 공룡이 부른다고 늘 오는 애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수현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면 왔다. 여태까지는 그만큼 걔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가 생각했으나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하면 외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만큼 무언가 기묘한 느낌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쩌면 나보다 얘가 더 수상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황수현이 외계인이래.”
“⋯⋯엉?”
잠뜰은 공룡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수현이 제게 한 이상한 말들과 정체 모를 고백, 그걸 뒷받침하는 증거들까지. 처음에는 얘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은 반응이었던 공룡은 갈수록 진지해졌다가 끝내는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이 황수현이 강의실에 숨어있는 걸 우주 보안 협회 직원이 알게 됐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이미 일은 터져버린 후였다.
“와, 그러니까⋯⋯. ⋯요즘 에타에서 개 난리 난 그 사건의 주인공이 너희라고.”
“그렇게 됐다.”
“⋯넌 걔가 외계인이 맞다고 확신하고 있는 거고.”
“⋯⋯그렇지.”
눈을 굴리며 답한 잠뜰이 공룡의 눈치를 봤다. 어째선지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예상한 것보다 그리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공룡은 잠시 이상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내쉬며 제 뒷목을 문질렀다.
“아, 이거 일부러 말 안 했었는데…….”
의외의 서두에 잠뜰의 눈이 커졌다.
“너 고2 때 나한테 비밀 친구 생겼다고 말 꺼낸 적 있었거든. 설마 그게 황수현이었나?”
“뭐? 언제?”
“그래, 너 그때도 딱 그렇게 말했었다니까. 죽상인 얼굴 펴고 신나서 학원 오던 애가 어느 날부터 다시 죽상이 되어있으니까 이상하다 생각은 했었지. 그 비밀 친구랑 절교한 거냐고 물으니까 뭔 소리냐고 해서 나만 이상한 사람 됐고. 아 갑자기 억울하네.”
“내가 그랬다고? …그 질문 들은 기억은 나는 것 같기도 한데, 비밀 친구 생겼다고 내가 직접 말했었다고?”
“이것 봐, 기억 못 하네. 만약 기억이 지워졌다면 그때 지워진 거 같은데? 그런 일이 있었던 건가⋯.”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잠뜰은 미처 떠올리지 못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기억이 지워진 건 저뿐이다.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그 사라진 기억을 가지고 있던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다. 진작 주변인들에게 자신이 이상하게 행동한 적이 없었냐고 물어봤어야 했다. 잠뜰이 작게 탄식했다. 이런 중요한 힌트가 곁에 있었는데 몰랐다니.
“다른 얘기는 한 거 없고?”
“딱히. 그때 얼마나 중요한 비밀 친구길래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나 궁금했었는데, 물어봐도 네가 대답 안 해줬거든.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캐물을 걸 그랬나.”
“…그럼 그때 내가,”
망설이듯 입술이 달싹였다.
“내가 어때 보였어?”
어쩌면 그건 확신을 얻고자 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수현을 믿고 기억을 되찾아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확신. 그때의 제가 부정적인 감정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면 수현과의 기억도 좋은 것이 아닐 터였으니까. 하지만 사실 잠뜰은 질문을 꺼낸 순간부터 원하는 답이 있었다. 공룡은 제 대답만 기다리며 숨조차 느리게 쉬는 잠뜰의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어떤 생각에 잠긴 듯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열었다.
“…즐거워 보였지. 매일이.”
원하는 대답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공룡이 그렇게 본 거라면 정확했을 거다. 같은 초중고를 나와 대학에서까지 얼굴을 보고 있을 정도로 질긴 인연을 가진 이는 그가 유일했으니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만큼 그 상대에 대해 잘 알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잠뜰이 그 대답을 곱씹었다. 즐거워 보였다, 라. 그럼 분명 되찾아도 괜찮은 거겠지.
걱정이 덜어지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야기가 인생 전반을 부정하는 비현실적인 일투성이면 뭐 어떠한가. 벌어진 이상 제 현실이 되었는데. 이제 잠뜰이 몰두하면 되는 일은 단 하나였다. 아주 오랜만에 순수한 감정으로 심장이 뛰었다.
수현은 사람의 표정을 보고 생각을 읽어내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보통 눈치 빠른 사람들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 그의 눈치는 그런 보편적인 것과 느낌이 달랐다. 그는 말 그대로 상대의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딱히 그걸 숨기려 들지도 않는 탓에 속을 들킨 사람들도 수현이 어디까지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잠뜰이 모든 준비를 끝냈음을 그가 눈치챘다는 소리다.
다음 외계학개론 수업, 그러니까 우주 보안 협회의 조사 날로부터 D-1. 그날은 일요일 밤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사라진 기억은 안개 속에 있었다. 당장 내일이 수현이 잡혀갈지 말지가 정해지는 날인데 아직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상황에서 맘 편히 잠에 들 수 있었을 리가 없었으므로 그들은 현재 함께 있었다. 언제 마음이 희망과 기대로 부풀었냐는 듯 잠뜰의 눈은 조금 퀭해진 상태였다. 그 옆에서 수현은 태평하게도 밤하늘이나 구경했다.
일주일 동안 기억이 다시 떠오르게 할 수 있을 만한 일들은 다 해봤다. 교수님이 말해주신 사례처럼 고향 행성을 보면 기억이 돌아올까 온갖 행성 사진들을 찾아봤고, 같이 갔을 법한 장소들을 찾아가 봤으며, 심지어는 제 집에 초대도 했다.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만들기 같은 실행 불가능한 일들을 제외하면 진짜 더 이상 시도해 볼 만한 게 없었다. 아이디어도 고갈됐다. 그야,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법 같은 걸 내가 알겠냐고.
“이쯤 되면 내일 튈 계획을 세우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은데.”
벤치에 앉아 있던 잠뜰이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마음 결정하면 뭐 하나, 기억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는데. 이렇게 된 이상 지금부터라도 내일의 조사를 피할 변명거리를 강구해 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애가 아파서 못 왔다고 할까. 오래 시간을 벌 수는 없겠지만 며칠은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잠뜰이 고민하는 사이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색 눈동자가 느리게 그를 따라갔다.
“너도 고민 좀 해봐. 누가 보면 내일 잡혀가는 게 네가 아니라 나인 줄 알겠네.”
“음……. 모르겠는데.”
“야.”
남 일 얘기하듯 나온 대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생존이라는 애가 뭐 저렇게 대책이 없지. 아니, 환상형 외계인은 다 그런가? 생각해 보니 교수님이 환상형 외계인이 외계인들 중에서 멸종 위기종 같은 거에 속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진짜 환상 되고 싶나. 다행히 잠뜰이 그를 환상보다 환장에 가깝다고 판단하기 전에 수현이 덧붙였다.
“농담이고. 강하게 바라야 하지 않을까?”
“…강하게?”
“뭐든 진심을 쏟아부을 때 기적이 찾아오는 법이니까. 너희도 기억상실증 환자가 어떠한 강렬한 계기를 통해 기억을 되찾았다는 사례가 많고.”
“나 이미 진심인데.”
“그런 느낌이 아니라……. 아, 이건 너희가 알 텐데. 설명하기 어렵네.”
곤란하다는 듯이 수현이 턱을 긁적였다. 강하게 바란다라. 추상적인 소리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어떻게 이보다 더 강하게 바라야 하는 건지 몰라서 그렇지…. 잠뜰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수놓인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주가 보였다. 저 중 하나가 네 고향일까,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나저나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도 요원들과의 대면을 피할 수는 없을 텐데, 어떻게 해결할 거야? 일 커져서 계속 쫓길 생각 아니면 결국 한번은 만나긴 해야 할 걸.”
“기억만 되찾으면 능력도 돌아올 거야. 그 후는 내가 알아서 수습할게.”
“…그전까지 기억을 찾지 못한다면? 그럼 도망치려고? 너 혼자서?”
물음에 수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게 너한테 중요해?”
마치 나를 걱정한다는 것처럼 말하네. 잔잔한 어조와 미동 없는 표정은 그가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반사적으로 잠뜰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야, 잃어버린 기억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기억 속에서도 여태까지 친구로 지내왔으니까. 걱정 좀 될 수도 있는 거 아냐? …너한테는 지금까지 우리가 지내온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가 봐? 그런 생각을 하며 어쩐지 잠뜰은 이런 배신감을 이전에도 받은 적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네 담담한 행동이 정말로 아무 감흥도 없기 때문인 건 아님을 알고 있다는 점일까. 잠뜰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외계인이 별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에 상처 입기엔 그녀는 이제 어른이었다.
“난 너를 걱정해.”
한숨처럼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현이 고요히 그녀를 응시했다.
“넌 내 친구고, 네가 불운한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약간의 용기를 필요로 할 뿐이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잠뜰도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걸어가자 불어오는 찬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수현의 옆에 선 잠뜰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언덕진 자리에 위치한 휴식터에선 그녀의 집이 보였다. 익숙한 골목과 놀이터, 늘어선 주택과 깜빡이는 가로등. 잠뜰의 반평생 삶이 닮긴 장소.
수없이 봐온 장소는 이제 눈을 감아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지만, 황수현 같은 외계인이 또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이보다 낯설게 느껴질 수 없었다. 이제 외계인과 공존하는 시대가 찾아왔다며 매일 같이 TV에서 사람들이 떠들어대도 사실 여태까지는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제 현실로 닥쳐오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모험 같은 느낌이라서 그런 걸까. ……모험이라.
“애초에 너는 지구에 왜 온 거야? 우주에 비하면 지구는 별 볼 일 없었을 거 같은데.”
“…놀러 왔을걸? 난 여기저기 행성 구경 다니는 걸 좋아했거든.”
“……진짜 별 이유 없네.”
“외계인도 여행 다녀. 끝나면 집에 돌아가고. 지금 상황은 그러니까……, 집에 가야 하는데 여권이 없어진 거지.”
“비유 그거 맞아? 여권이랑 기억을 비유하는 게?”
“없으면 집에 못 가는 건 똑같지 않아?”
…똑같나? 듣고 보니 설득당하는 기분이다. 지금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날 선 밤바람이 목 언저리를 스쳐 지나가자 잠뜰이 뒷목을 쓸어내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밤 11시 56분. 오늘 자정에 하늘에서 유성우가 떨어진다고 했던가. 분명 아침에 봤던 뉴스에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았다. 참 신기한 타이밍이지….
“그럼 만약에 모든 게 잘 해결되면, 나 배웅해 줄래?”
적막 속에서 수현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가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무슨 이상한 말을 해도 익숙한 잠뜰이 고개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건 너한테 중요하고?”
“솔직히 중요하진 않지. 그래도 한 번쯤 그런 거 받아보고 싶었어. 한 번도 내가 어디 갈 때 누가 손 흔들어 준 적 없었거든.”
저런 말은 반칙 아니냐. 저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니 알아서 집에 가라고 말하냐고. 애초에 인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자랐을 녀석이 겨우 이런 걸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묘했다. 못 해줄 건 물론 없지만. 그래도 너무 당연하게 내가 네 편을 들고 네가 돌아갈 때까지 네 옆에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넌 나를 너무 믿어. 내가 네 이름을 떠올린다고 해도 불러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거잖아. 내가 널 팔아먹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아무리 제 본능이 이끈 상대라고 해도 기억이 없는 이상 나라면 일단 거리를 둘 텐데. 실제로 외계인 목격 신고에 대한 포상금은 꽤 큰 편이었다. 평생 먹고살 정도는 아니지만 누구나 혹할 만한 금액이었다. 잠뜰도 흘러가듯 포상금에 대한 기사를 보고 어디 신고할 외계인 안 나타나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정작 그 외계인이 눈앞에 나타난 지금은 어째선지 전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지만 말이다.
“안 해.”
그걸 아는 듯이 수현은 웃는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난 아무한테나 내 이름 안 가르쳐 주거든.”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고 잠뜰은 의문한다. 너한테 이름이란 무슨 의미일까. 그게 뭐길래 네 운명을 맡겨뒀다는 것처럼 구는 걸까. 이름이 그저 사람을 칭하는 기본적인 호칭이며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탓에 별다른 애착을 가지지 않는 데다 원한다면 언제든 바꿀 수도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뭐든 간에 아주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걸 제게 맡겼다는 것까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주에서 왔으면서 노을을 닮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친 그 순간 잠뜰은 강렬하게 염원했다. 기억을 되찾고 싶다. 분명 그건 내게 아주 가치 있는 것을 테다. 네가 이름을 내게 알려주게 되기까지 함께한 미지의 추억들을 영원히 잃고 싶지 않다.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곱씹고 싶다. 그것들을 다시 내 인생의 일부로 만들고 앞으로도 그런 기억들을 더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딸칵, 어딘가에 있는 시계의 숫자가 바뀌어 12시를 가리킨다. 하늘에선 유성우 하나가 추락했다. 누군가의 소원을 낚아챈 채.
곧이어 쏟아지기 시작하는 유성들 아래. 짙은 남색의 하늘에선 어디서 나타난 건지 희미한 보랏빛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건 아주 이질적이었기에 쉽게 눈에 띄었다. 수현의 뒤편을 차지한 그 빛을 잠뜰이 눈으로 좇았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빛 같았다. 잠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 빛을 손에 쥐었다. 당연하게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어떠한 선명한 형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명백히 이곳에 존재하는.
그래, 마치 너 같다.
그때도 네게서 이런 빛이 새어 나왔던가. 그러다 무슨 마음에선지 너는 내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네 이름이었나. 기억이 떠오른다. 짙은 안개가 걷혀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선명해진다. 도깨비불처럼 떠다니는 보랏빛 빛무리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저희의 주위를 맴돌았다. 동시에 잠뜰은 생각한다. 어차피 직후 잊어버릴 네 이름을 왜 내게 알려줬을까. 그건 분명 네게 가장 귀한 것이었을 텐데.
나도 네게 특별한 존재였나? 정말 그랬었나?
만약 그런 거라면.
⋯⋯.
…다행이다⋯⋯.
“네 이름은⋯⋯.”
별빛이 쏟아진다. 잠뜰은 그 아래서 본능처럼 입술을 뗐다. 뇌를 거치지 않은 단어가 흘러나온다. 질서 없이 떠다니던 빛무리가 잔잔해지고 잃어버린 기억들이 완전히 제자리를 찾아간다. 물건을 전달받듯 가만히 서 있던 수현이 밀려오는 제 것들을 받아내다 이내 웃었다. 그조차도 자신이 그렇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정도로, 환하게.
그러니까, 이건 아주 진부한 동화 같은 거다.
주인공은 어릴 적 만난 외계인과 친해져 그와 특별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한여름 밤의 꿈과 같던 기적은 한순간에 사라진다. 주인공은 기억을 잃고 그를 떠나간 외계인도 불운한 이유로 기억을 잃었다. 이제 누구도 더 이상 서로를 기억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으레 모든 동화가 그렇듯, 기적은 찾아온다. 둘은 재회한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잠긴 자물쇠를 풀어낸다. 그렇게 기억을 되찾는다. 외계인의 돌아온 능력을 이용해 그들을 잡으러 온 악당들의 기억을 조작해 돌려보낸다. 그리고 비로소 두 친구는 재회의 기쁨을 완전히 누리며 행복해진다.
진부하지. 뻔해. 이런 클리셰는 차고 넘쳐. 그래서 잠뜰은 동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첫 장만 읽어도 엔딩이 예상가는 이야기를 읽자고 제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세상에 동화는 없다. 차라리 어느 순간 세계가 멸망하기 시작하는 아포칼립스가 더 실현 가능성이 있겠지. 적어도 제 세상에선 와닿지 않는 기적보다 침범하는 불행이 더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세상에 동화는 없을까? 떠올려 봐라, 여태까지 당신들이 봐온 동화의 주인공들은 어떤 마지막을 맞이했지? 그들의 서사는 얼마나 많은 엑스트라들이 알고 있었지? 결국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행복해지지 않았던가?
어쩌면 너도 모르는 새 네 주위에서 누군가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을지도 몰라.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언젠가는 네가 그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너는 아주 기꺼울 거야.
잠뜰은 생각한다. 그래, 그렇더라. 아주 기꺼웠지. 영원히 그 진부한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싶을 정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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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외계학개론 사건 결말
어떻게 남?
익명1 | 그거 외계인 없는 걸로 결론남 요원들 빈손으로 돌아갔음
ㄴ익명1 | 그 강의실 근처에서 사람들이 카메라 들고 대기타고 있었는데 요원들 터덜터덜 걸어 나와서 다 해산함
ㄴ익명2 | 아 노잼
ㄴ익명3 | 당연한 거지 ㅋㅋㅋ 외계인이 진짜 있었겠냐
익명4 | 근데 그 외계학개론 수업에 이 학교 학생 아닌데 몰래 수업 듣던 애 한 명 있었다던데
ㄴ익명5 | 엥 미쳤나 뭔 학교는 그런 것도 모름; 어케 한겨
ㄴ익명4 | 출석 명단 조작했대
ㄴ익명5 | ??? 그게 어떻게 가능함??
ㄴ익명6 | 진짜가 숨어있었네
ㄴ익명7 | 그래서 걔는 어떻게 됐는데
ㄴ익명4 | 제명했지 근데 다음 수업부터 알아서 안 나오던데
ㄴ익명8 | 걔가 외계인 아님? ㅋㅋ
ㄴ익명9 | 외계인 없었다니까 걔는 걍 이 사건 터지고 들킬까 봐 튄 거겠지 요원들이 다 조사하니까
ㄴ익명8 | 걔가 거기 사람들 기억 다 조작하고 튄 걸 수도 있지
ㄴ익명10 | 네 다음 소설
*
우주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들이 특정한 미지의 공간이었다. 아무리 꽤 많은 것을 알아낸 지금조차도 마찬가지다.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규모의 세계에서 우리의 세계는 먼지보다도 못하다. 천문학자들의 자살률이 높다고 했던가. 공룡은 그런 선택을 한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그가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사실 그 반대였다. 자신이 한없이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걸 알아갈수록 살고 싶었다. 언젠가 저 우주로 나아가고 싶었다. 죽어도 저곳에서 죽고 싶었다.
잠뜰이 새로 사귄 친구가 외계인이며 그녀가 그와 함께 떠나길 택했을 때는 그 생각이 더 강해졌다. 단 한 번도 인생에서 우주를 갈망한 적 없는 잠뜰이다. 그런데 기억을 되찾았다며 흥분해 자신을 붙잡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의 눈은 지독하게 익숙했다. 공룡이 거울 속에서 보던 자신의 눈과 같았으니까. 제 친구가 자신과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기묘한 느낌이 들기도 한 건 사실이었다.
대체 너는 외계인에게서 무엇을 봤길래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도 더 먼 곳을 바라보게 된 걸까. 그만큼 그 기억이 아름다웠던 걸까. 이론과 사진으로만 꿈을 꿨던 공룡이기에 그 꿈을 현실로 맞닥뜨린 잠뜰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사실 조금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그 동화의 주인공이 한평생 우주를 꿈꿔온 자신이 아닌 잠뜰이라는 게.
“야. 정공룡.”
상념이 깨진다. 날카로운 호명에 공룡이 고개를 돌렸다. 벽에 반쯤 기대어 서 있던 그가 자신을 부른 상대의 얼굴을 보더니 무표정을 풀어내고 장난기 어린 낯을 띄웠다.
“어허, 선배.”
“⋯⋯공룡 선배. 뜰누나 못 봤냐?”
“그건 또 무슨 신종 반존대니? 덕개야.”
“누나 왜 휴학했는지 너 알지.”
쏘아붙이듯 제 할 말을 하는 남자, 잠뜰과 같은 과이자 1년 후배인 박덕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꽤 잠뜰을 잘 따랐으니 갑자기 사라진 잠뜰의 행방에 분명 의문을 가졌을 터였다. 그건 잠뜰이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그 뒤처리까지 제게 맡기고 떠나버렸지만.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냅다 휴학할 리가 없거든? 그리고 그 누나가 얼마나 바쁜데. 이 시기에 휴학계 쓴다는 거 자체가 엄청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거라고.”
“어유, 우리 덕개가 자기 생각보다 잠뜰이랑 안 친했나 보네. 불쌍해라.”
“아오 진짜.”
덕개가 제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었다.
“그냥 말해. 문제 생긴 거면 나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어디 갔는데?”
재차 묻는 말에도 공룡은 태연하게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글쎄. 뭐 하러 간다던데.”
“뭘?”
아니, 단순한 창밖보다는 지평선 너머를 찾는 것에 가깝다. 아주 멀리서 온 친구와 그를 배웅하겠다며 같이 떠난 친구가 저 어딘가로 사라졌으니까. 어디로 갔는지는 그도 모른다. 잠뜰이 수현을 집에 데려다주려 한다며 제게 이야기를 꺼냈을 때, 공룡은 딱 한 번 그녀를 만류했다. 낭만 또는 모험과는 별개로 외계인 하나 믿고 여정을 떠나기엔 걱정되는 부분이 많은 탓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이었다. 당연하게도 잠뜰은 괜찮다며 떠났고, 공룡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라도 떠났을 테니까.
그리고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공룡아.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네가 나를 찾으러 와. 너만이 나를 찾을 수 있으니까.
어떨 때 보면 잠뜰은 공룡보다도 무모했다. 미지의 생명체와 우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떠나길 택하고 겨우 한 명의 학생일 뿐인 공룡에게 자신의 일상으로의 복귀를 맡겼다는 점에서 그랬다. 어느 하나라도 너를 놓치면 너는 표류자가 될 텐데.
그런 모습을 보자면 공룡은 또 그녀가 그렇게 부럽게 느껴지지 않기도 했다. 그가 바라는 건 제 스스로의 힘으로 저 우주에 닿는 거였으니까. 마냥 이끌려 가는 건 저와 맞지 않다. 그래, 아무리 기적 같은 행운이라 해도 그런 걸 바라는 건 나랑 어울리지 않지. 물론 정말 너를 찾으러 가야 할 때가 오면 찾으러 가겠지만. 아마 나는 그걸 기꺼워하겠지만…….
바람이 불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느릿하게 휘날렸다. 공룡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작별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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