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

[신] / 익명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 몰리게 되면 신을 찾는다.

필연

차원을 한 번 넘었으면 인간은 발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공룡은 217번 지구에 불시착했다. 아니, 잠깐. 이것을 불시착이라고 말할 수 있나? 하나씩 조목조목 따져보면 그냥 내려야 할 곳에 내린 사람이 될 텐데. 우선 첫 번째, 자의는 전혀 아니었고 좀비 때문에 인류의 종말을 바라보다가 결국 기존의 세계를 버렸다. 테스트 서버까지 돌려가면서 세계를 어떻게 구할지 고민까지 했다. 그렇게 이동하고 살아남기 위해 연구를 지속한 연구원으로서 한마디 하자면, 좀비 하나 박멸하기 힘들어서 이 짓거리를 또 하게 생겼다는 거다. 두 번째로는 똑같은 세계의 똑같은 상황이라 전혀 당황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좀비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환멸이 날 정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공룡은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세계를 한 번 뛰어넘는 노력까지 곁들였으면 어떤 것 하나는 멀쩡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좀비가 하나도 없는 지구에 쫓겨나거나. 전 우주적으로 좀비가 유행인가? 공룡은 이 좀비 사태를 해결하고 싶어서, 어쩌면 회피하고 싶어서 지구를 건너왔건만….  너무 유토피아적인 망상인 건가? 모르겠다. 이렇게 주변에 온통 좀비만 넘쳐나는 세계에서는 그런 큰 희망을 품어도 누가 무어라 하지 못할 테니까.

좀비가 한 번 생겨나기 시작한 세계는 과학의 발전을 포기하게 된다. 원래 뛰어난 발전을 이루고 있던 지구라 하더라도, 관측했던 수많은 결괏값에 의해 살펴본 바로는 과학 기술의 퇴보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 원시적인 인류로 돌아간다. 돌멩이 같은 것들을 열심히 부닥치며 불을 붙이고 동굴 아래에서 비를 피한다. 이미 과학의 정점을 맛본 것 같은 현대 인류들이 좀비라는 것 하나를 피하려고 이 짓거리를 지속한다니. 천만다행으로 좀비가 현대 문물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과, 탱크 같은 것들을 끌고 다니는 놈이 없다는 것에 공룡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만약 그런 좀비가 있었다면 마음 편하게 좀비의 삶을 택하는 것이 가장 좋을 테니까. 그런 부분을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어째서 총을 든 좀비는 없을까? 라는 질문마저도 생기게 된다. 과거에 분명 수많은 영상매체를 본 결과가 있었을 테니 어떻게든 작동시킬 수는 있을 텐데…. 좀비들은 살아남은 인류와 유사하게 원시적인 도구들까지만 사용할 줄 알았다…. 뭐, 이런 건 끼리끼리 닮는 건가. 과연 과학을 포기한 인류의 종말다운 모습이다.

인간이 신을 찾게 되는 순간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라고들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공룡은 신을 찾으면서 부르짖은 적이 정말 사소할 때밖에 없었다. 중요한 연구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서 컴퓨터가 터지지 않기를 원할 때 정도? 그런 상황이 아니면 굳이 신을 찾지 않아도 세상만사 평화롭게 해결되는 일이 잦다. 게다가 신을 부른다고 해서 응답을 주겠는가. 원래 무형의 존재에게 실체를 달라고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짓은 꽤 비효율적이란 소리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허공에서 인간이 어떻게 나타나지? 아니, 순간이동도 있는 세계에서 크게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복장이 너무 특이하다. 요즘 누가 저렇게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는가. 누가 봐도 고위직 간부처럼 생겼는데.

"어, 뭐지…? 설정을 잘못했나."

"저기요?"

"분명 제대로 설정했는데…."

"이봐요. 지금 안 도망치면 당신 좀비한테 물려요."

공룡이 두 발짝 더 다가가서 앞에 있는 사람의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제 말을 듣고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닌 것 같아서. 그제야 그 사람은 무어라 중얼거리던 행동에서 빠져나오더니 공룡을 똑바로 마주한다. 그와 동시에 눈이 커진다. 사람을 만날 줄 몰랐다는 것처럼.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좀비라니 무슨 소리예요? 제가 기억하는 과거들은 좀비가 전혀 없었는데."

"…. 모르세요? 지금 좀비가 오고 있잖아요. 저기요."

그제야 상대방은 좀비를 인지했는지 주변을 빠르게 둘러본다. 언뜻 보면 평범한 인간처럼 생긴 것들이 반쯤 눈이 돌아서 뛰어오고 있는데 어떻게 멀쩡한 인간으로 보겠는가. 녹색의 피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두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평범한 인간이 저렇게 달려드는 것도 충분히 공포스러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처음 보는 사람이 좀비에 대해 무지한 건 알 바가 아니었으므로 공룡은 일단 칼을 들었다.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순 없지. 얼빠진 사람을 미끼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세상에 몇 안 남은 생존자 아닌가. 사람 하나가 귀한 시대다. 또한 좀비를 베는 것은 익숙하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현실성이 떨어지고 있다. 이미 차원까지 넘어간 유경험자의 입장에서는 이 사태가 없는 세계를 찾아내는 게 빠를 정도로 좀비는 질렸다.

좀비를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은 공룡이 하는 일을 유심히 지켜보는가 싶더니 도망치지도 않고 꿋꿋하게 서 있었다. 그 점에서 공룡은 흥미가 생겼다. 그러니까, 좀비도 모르는 사람이 크게 무서워하지는 않는단 말이지. 이 사람이 이 지구에서의 좀비 사태 원인인가, 라는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은 일단 제쳐두고 공룡은 좀비가 주변에 없어지고 나서야 가장 적절한 말을 골랐다.

"이름이 뭐예요?"

"아…. 음, 클로소라고 불러주세요."

"클로소씨? 일단 여기가 어딘지는 아세요?"

그 물음을 듣고서야 클로소라고 불린 사람이 총기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확인한다. 우거진 숲과 반쯤 정신을 놓은 사람들. 이를 흔히 좀비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클로소 본인은 아는 게 없다. 우선 이런 단편적인 공간만 보고도 어느 나라의 어느 위치인지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며, 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인데 본인이 기억하는 한 이렇게 숲이 우거진 곳은 특징적으로 나온 곳이 몇 군데 안 되었으니까…. 확정적으로 모르는 곳이다. 게다가 영화 촬영이라고 하기엔 방금 확실하게 사람이 죽었다. 죽음을 한두 번 본 사람도 아니고. 클로소는 생명이 꺼져가는 소리를 명확히 들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사람은 죄책감이 전혀 없고 오히려 자신을 의심스럽다는 듯 보지 않는가. 그제야 생각 정리를 마친다.

"…. 아니요, 처음 보는 곳이에요."

"그래요? 일단 제 소개를 먼저 할게요. 저는 공룡이에요."

"아, 공룡씨.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여긴 어디인가요?"

"굳이 따지자면…. 숲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대답을 바라시는 건 아니겠죠. 여긴 딱히 무어라 말할 장소는 아니고 좀비들을 피해 도망가고 있는 넓은 세계라고 할 수 있겠네요."

클로소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멍청했나. 그건 아닌데. 분명 마지막 기억상으로는 남극에서…. 짧게나마 그런 고민을 하다가 이전부터 쭉 들었던 의문을 하나 끄집어냈다.

"….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좀비가 왜 있는 거예요?"

"저도 모르는데 그걸 저에게 여쭈어보시면…."

공룡은 황당했다. 상대가 좀비라는 것에 대한 인식은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질문을 들을 줄은 전혀 몰라서. 그러나 이곳에서 길게 수다나 떨 수 있는 환경은 전혀 아니다. 좀비는 곧 그들을 찾아올 것이고 공룡은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안다. 그래서 이전에 만들어둔 보트를 넓은 강가 위로 얹더니 눈앞의 사람을 끌어다 뒤에 태웠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흐름에는 따라주는 모습이 얼마나 다행인지. 공룡은 나무로 만들어진 보트가 부디 튼튼하게 잘 버텨서 바다를 건널 수 있길 바라며 노를 젓기 시작했다.

"일단 움직여요. 좀비들이 몰리기 시작하면 우린 절대 도망가지 못해요."

"어, 네?! 아니 잠깐만요, 저도 같이 가야 하는 거예요?"

"같이 노 젓기라도 좀 하시죠? 우리가 인류의 마지막이에요…. 열 명 정도 남아있을걸요, 아마도."

"…."

둘은 이후 한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노를 저었다. 말이 적은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정리해야겠다는 명목하에 합의된 침묵이다. 공룡은 여전히 신의 존재유무에 대한 의문과 클로소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고, 클로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했다.

한참 동안 물을 따라가니, 넓은 바다가 나와서 공룡이 먼저 손을 멈췄다. 주변에 지형지물이 옅게 보일 정도의 거리가 되는 넓은 바다가 펼쳐진 공간. 왜 이런 곳에서 멈추는 것인지, 클로소는 이제 안다. 좀비라는 것들이 바다로 쫓아오는 것에는 시간이 제법 걸리는 모양이지. 이후 공룡은 사람 두어 명이 올라설 수 있는 공간을 작게 만드는가 싶더니 아직도 보트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클로소에게로 시선이 내려간다. 어떤 말을 꺼낼지 잠시 고민하던 두 사람 중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공룡이다.

"저는 연구소 소장이었어요. 좀비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 자기소개 시간이에요?"

"네, 그러니까 잘 들어줘요. 저랑 다른 사람들은 다른 차원에서의 기억이 있어요. 그러니까, 똑같은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는 시점의 기억만요. 어떤 게 원인인 줄도 모르고 우리는 그때의 과오를 다시 겪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

"그런데 지금 이거 봐요. 좀비들의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요. 문제가 또 해결되지 못할 징조라는 소리예요."

공룡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앞에 둔 사람에게로 시선이 닿았다. 이게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냥 우연히 기억이 들어와서 되찾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정말 차원을 넘어서 새로 불시착한 것인 줄 알았으나, 그저 똑같은 세계의 공룡이 이 의지를 이어받은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세계가 다르게 보였다. 여전히 즐비한 좀비들, 소수밖에 남지 않은 인류, 아무도 얻어내지 못한 백신까지. 수많은 임상 실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신을 더 쉽게 만드는 방법이 감히 생각나지 않았다. 인류를 구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나름 큰 희생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싶은 찰나 공룡은 그 생각을 싹 접게 되는 계기가 생겼다. 이번 차원에는 처음 보는 변수가 생겼다. 자꾸 이상한 말을 하고 좀비라는 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온 시점에, 우리는 모두 기억을 되찾고 이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되새기며 헤어졌다. 물론 이 사람이 언제 이 세계로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의 가설을 되짚어 본다면 이 사람만이 유일한 변수다.

거기까지 생각한 공룡은 결심한 듯 클로소를 똑바로 응시한다.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듯, 대답을 기어코 들어야겠다는 듯 결의가 다져진 표정이다. 정작 질문을 곧 들을 당사자는 바닥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깊게 고심하는 태도를 고수한다. 보트에 탄 직후부터 계속해서 이런 모양새다. 마치 공룡이 인류를 위해 희생할 마음이 충분히 들었을 때의 표정을 보는 것만 같다…. 남의 얼굴을 감상하는 것도 거기까지, 공룡은 미루다가 결국 질문을 뱉어낸다.

"사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게 있어요. 물어보면 솔직하게 대답해 주실 건가요?"

"…. 네, 물론이죠. 뭔가요?"

"당신이 기억하는 과거가 뭔지 궁금해요. 아까 만나자마자…. 꼭 시간을 여행하는 사람처럼 말했잖아요."

설정을 잘못했나, 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을 공룡은 들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말한 것을 어떻게 듣지 못하겠는가. 클로소는, 잠뜰은, 바닥으로 향한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잠뜰은 모두의 운명을 바꿀 순 없지만 지구 하나의 운명을 바꾸고자 행동하는 인간이다. 감히 인간이 도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는 시간의 영역까지 손을 대버린 사람.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음에도 굳이 지구를 살리겠다고 한 과학자.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이유는 역시 타임 스테이션의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 명석하고 뛰어난 두뇌는 이미 이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안다. 그렇기에 공룡과 시선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전 시간을 여행할 줄 알아요. 게다가 다른 차원의 사람이죠. 과학이 너무 발전해서 차원까지 이동해버릴 줄은 몰랐어요."

잠뜰의 명쾌한 대답에도 공룡은 여전히 망설임이 많은 표정이다. 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잠뜰은 이미 알고 있음에도 상대가 대답을 정리할 수 있게 기다렸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저 멀리에서 좀비가 오는 것 같다는 직감이 들 즈음에서야 공룡은 입을 열었다.

"…. 그럼 부탁 하나 드려도 돼요?"

"당신이 할 부탁은 뻔하죠. 걱정하지 마세요. 아, 보트 하나 더 있어요? 그리고 당신 연구소 위치도요."

공룡은 얼떨결에 예비용 보트를 하나 더 꺼내준다. 두 명이 탑승하면 꽉 차버리는 보트가, 이제 각자 탈 수 있게 되니 널널하게 놓인 느낌이다. 공룡은 잠뜰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 당장 이 사람을 만난 지 십 분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기억에 남을만한 일이라고는 허공에서 나타났다는 것 하나? 그러나 이제야 할 일을 찾아 나설 수 있겠다며 잠뜰은 기지개를 켜곤 나란히 서 있는 보트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곤 공룡을 다시금 응시한다. 이제 헤어지면 둘은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당신 이름 클로소 아니죠?"

"당연하죠. 이 시간선에 제가 너무 개입하면 안 되니깐요. 그냥….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

"진짜 걱정하지 마세요. 저 생각보다 머리 좋거든요. 늦지 않게 해 볼게요."

인류가 열 명 겨우 남짓하게 남아있다. 인류가 실시간으로 쓰러지는 모습은 남아있는 인류가 자동으로 알게 된다. 그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잠뜰은 아니다. 다른 차원에서 온 인류가 어떻게 그들과 동일 선상에 놓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보다 더 뛰어난 과학기술이 있기 때문에 정말로 발전된 인류라고 할 수 있겠다만... 잠뜰은 이런 세계의 인류마저도 저버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곳에서도 인류를 위해 선택을 하고자 노를 저었다. 더 늦어버리면 이도 저도 못하고 모든 것이 끝난다. 공룡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더 말을 얹지 않고 잠뜰과 작별 인사도 없이 뒤를 돌아 바다를 넘어간다. 다른 생존자들이 부디 오래 살아남길 바라면서.

잠뜰은 한참이고 노를 젓고 산을 넘었다. 그 과정에서 좀비를 만나는 것은 필연적이었으나, 사람을 피해 다니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다. 좀비의 후각이 뛰어난 것인지는 몰라도 쉽게 따돌리는 건 불가능했으나 지나다니는 길목마다 가벼운 함정을 파두는 건 쉬운 일이니까.

공룡이 말했던 연구소는 이미 한 번 모든 것이 쓸려나간 자리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과학 기술이 크게 퇴보되어 있는 현재는 아니라서, 잠뜰은 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부품들을 쏟아부어 타임 스테이션을 다시 제작한다. 연구소의 문을 걸어 잠가두고 좀비가 몰리든, 들이닥치든 당장 자신의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할 일이 있는 잠뜰에게는 크게 방해될 것들이 아니다. 한 번 해본 것을 간이로 제작한다는데 뭐 얼마나 어렵겠는가. 진짜 타임 스테이션만큼의스테이션 만큼의 거대한 가상 현실까지 만드는 것은 힘들지만 시간 하나는 돌릴 수 있다. 또한 가설까지 전부 세워두었다. 타임 스테이션으로 시간을 돌려서 이 지구의 시간이 통째로 돌아간다면, 잠뜰은 원래 이 세계에 속한 인물이 아니니 원래 거주하던 시간대로 돌아갈 것이다. 타임 스테이션을 열심히 설정하고 있던 때로. 그렇게 된다면 이 세계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유일한 생존자가, 타임머신을 돌린 것처럼 여겨지겠지. 세계는 이런 식으로 모든 영웅을 기억하지는 못하고 결국 흘러간다.

잠뜰은 이런 끝을 제법 좋아하는 편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텐데. 시답잖은 생각까지 끝낸 이후, 연구소의 정문이 부서지는 소음이 시끄럽게도 난다. 그제야 좀비가 만연해 있고, 남은 인류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늦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조금 늦어버렸나.

그러나 잠뜰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거대하고 붉은 버튼을 눌러 그대로 타임 스테이션을 작동시켰다.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뜰은 제 몸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것 같다는 감상을 느꼈다. 아,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구나. 이 간이 타임 스테이션이 이후에도 제대로 작동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으나,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잠뜰은 할 만큼 했으니, 이후의 개연성은 앞으로 이 차원에서 살아갈 그들의 몫이라 생각했다. 부유하는 신체와 희미해지는 시야, 익숙한 진동과 함께 모든 것들이 점멸하고 난 순간 이후의 세계는…. 다시 타임 스테이션이다. 잠뜰이 지내던 원래의 세계. 그들의 세계는 다시 한 번 구원을 받았겠지. 잠뜰 역시 다시 본인의 세계를 살리기 위한 여정을 준비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부딪히던 시절을 뒤로하고, 세계가 흘러가는 흐름을 감히 바꾸는 신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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