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노을
드에인퀴 트패 디엘씨 이후 / 컬렌인퀴
트패 디엘씨 이후… 9:47년(트패 3년 뒤)쯤 시점
옛날에 쓴 함께라서 가능한 것 <이 글에서 이어집니다
컬린 2세에 관한 이야기인데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날조이므로 주의
드에2에서 저희집 호크는 마법사이면서도 성기사 루트를 탔는데요…
비록 빠른 질서회복과 사태해결을 위해서, 상황이 더 심화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았을까?
그 이후에 남겨진 마법사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종종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지금까지 케이틀린(컬렌 2세)의 존재는 이블린이 마법에 대한—그리고 마법사인 자신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떨쳐냈기에 가능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컬렌에게도 과거의 원죄와 마주하고 그것을 수용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길 바라게 되네요.
케이틀린이 살아갈 테다스는 훨씬 나은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이블린이나 컬렌이 겪었던 끔찍한 일을 다음 세대가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뭐 모든 건 드벨에 달려있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대지에 차츰 따스한 봄기운이 감돌았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커크월의 눈보라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약속했던 러더포드 부부가 다시 남녘기슭으로 돌아간 지 고작 두어 달쯤 지났을 무렵, 그들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편지 봉투에는 커크월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배릭의 인장은 아니었고 심문회 마크 역시 붙어 있지 않았으니 아마도 중독치료소에서 보낸 것일 테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컬렌은 조금 굳은 얼굴로 편지 칼을 꺼내 들었다. 다행히 치료소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니, 문제라면 문제일지도 몰랐다. 편지 속 짧은 문장을 곱씹던 컬렌이 곧바로 이블린을 불렀다.
“이것 좀 보십시오.”
“무슨 일이에요?”
그들의 마바리—스탠에게 간식을 챙겨주던 이블린이 다급히 달려왔다. 간식을 우물거리던 스탠도 그 뒤를 폴짝폴짝 뒤쫓았다. 컬렌에게서 받아 든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8살쯤 된 여자아이 보호 중. 마법사이며, 마법이 발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임. 확인 요망.
“어머.”
이블린이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고, 컬렌은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마법사라면 그냥 협회로 보내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번거롭게 구는 거냐고. 그래, 15년 전이었다면 그렇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 협회가 한 번 무너졌다 재건된 지금, 그리고 특히나 그 커크월에서 마법사들은….
“…보호자가 없는 아이였을까요? 아니면….”
“…버림받았을지도 모르죠. 커크월은 여전히… 마법사에 대한 시각이 곱지 않으니까요.”
용의시대 9:37년, 배교자 앤더스에 의해 커크월 성당이 폭파되고 수많은 무고한 이가 살해됐던 때. 당시 커크월의 용사였던 마리안 호크는 마법사임에도 스스로 친우인 앤더스를 죽인 후 성기사단의 편에 서 마법사들을 제거했다. 덕분에 사태는 빠르게 정리되었고, 가뜩이나 칭송받던 용사가 마법사 문제까지 냉정하게 해결하자 대다수의 커크월 시민은 그에게 자작 직위까지 떠맡겼더랬다.
호크는 군말 없이 자작의 관을 머리에 쓴 채 성기사단과 경비대를 필두로 커크월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제 그 관은 그의 친구 배릭에게 넘어갔지만, 또 한 번의 죽음의 문턱을 넘기고 돌아온 호크는 여전히 커크월에서 그의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 끝에 커크월은 예상보다 더 빠르게 이전의 평온을 되찾았지만… 글쎄. 그건 어디까지나 비마법사들의 생각일 것이다.
커크윌의 용사가 전면에서 마법사들과 대척하자 커크월에는 “마법사들은 마법사인 용사마저 버릴 정도로 구제 불능인 괴물 집단”이라는 인식이 삽시간에 퍼졌다. 본래도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좋진 않았지만, 그 일 이후 사태는 점차 심각해져 얌전하고 모범적인 마법사들조차 손가락질당하거나, 마법사인 자식을 괴물 취급하며 내다 버리는 빈도가 가파르게 늘었다. 그럼에도 교수대의 마법사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성기사단에 대항했던 마법사들의 말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눈앞에서 보았던 탓이다.
사태를 인지한 호크와 그의 조력자들은 상황을 개선하려 노력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러니하게도 교수대는 커크월의 마법사들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적어도 그 안에 있는 동안엔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다. 커크월 사태 이후 교수대의 마법사 처우가 개선된 것도 한몫했다.
이후 피오나가 마법사 협회를 해산하자, 그마저도 사라진 마법사들은 공포에 질려 컬렌에게 애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기사단장님. 저희는 혈마법 같은 건 쓴 적도 없습니다. 그저 얌전하게, 성기사단의 지시에 순응하며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이 밖을 나서면 우리는 전부 죽임당하게 될 겁니다. 혹은 우리가 그들을 죽이게 되겠지요. 제발, 저희를 살려주십시오.”
컬렌은 그들에게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저 역시 상황을 이렇게 만든 사람 중 하나였으므로. 컬렌은 그들을 지켜주겠노라 맹세했고, 교수대의 마법사들과 자신을 따르기로 한 일부 성기사들을 데리고 심문회로 향했다. 심문회가 해산된 후에는 그들 대부분이 이블린처럼 학회로 향해 자유와 안전을 보장받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운이 좋은 예시일 뿐이지, 모든 마법사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 호크를 필두로 한 많은 이들이 마법사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 노력했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이블린조차도 그가 심문관이 아니거나 혹은 전 기사단장 컬렌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커크월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커크월 사람들은 여전히 마법사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러니 커크월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마법사가 죽거나 버려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마 그 아이도 개중 하나이리라.
“…우리가 도와줘야 해요.”
이블린이 조심스레 컬렌의 손 위에 제 오른손을 얹었다. 그제야 컬렌은 뼈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마른세수하며 깊은 한숨을 내쉰 컬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이브. 이 일은 순전히 제 책임입니다….”
“아뇨. 우리 모두의 책임이죠. 그러니까 함께 가요, 컬렌.”
케이틀린은 평범한 8살 여자아이였다. 커크월의 평범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래로 동생이 둘 있었다. 부모님이 좌판에서 잡동사니를 파는 동안 케이틀린은 어린 동생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는데, 야무지고 성실했던 아이는 불평 한 번 않고 맡은 바 책무를 다했다. 그랬기에 케이틀린은 늘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자식이자 동생들의 멋진 언니, 누나였다. 이슬비가 내리던 이른 아침, 촉촉히 젖은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려 씨름하다 저도 모르게 마법을 써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케이틀린은 자신이 마법을 썼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지푸라기를 붙잡고 낑낑댔던 시간을 보답받은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케이틀린은 드디어 불이 붙었다고 자랑하려 부모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 그때 마주한 부모님의 얼굴이란. 케이틀린은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무척이나 끔찍한 것을 본 것처럼 일그러진, 슬픔 한 방울이 녹아 있는가 싶다가도 경악과 분노로 얼룩진—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모든 일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버지가 마치 맹수를 붙잡는 것처럼 케이틀린을 제압하는 사이, 어머니는 새된 비명과 함께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더니 근처를 지나던 성기사를 붙잡고 집 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집에 괴물이 있어요! 마법사가 있다고요!”
마법사라고? 난 그냥 불을 붙였을 뿐이야. 엄마랑 아빠가 그랬잖아. 물을 끓여야 하는데 좀체 불이 붙질 않는다고. 그래서 도와주려고 한 것뿐인데…. 그게 어떻게 마법을 쓴 게 돼? 케이틀린은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대로 잡혀가면 모든 걸 빼앗기게 될 거야. 사람이 아니라 괴물로서 살게 될 거야….
케이틀린은 근처에 있던 지푸라기를 제 아버지에게 던졌고, 아버지가 버둥거리는 사이 그 손을 홱 뿌리쳐 내달리기 시작했다.
“케이틀린!”
아버지가 그를 불렀지만, 케이틀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디로? 케이틀린의 감정이 자꾸만 일렁거렸다. 그럴 때마다 온몸이 화끈거렸다. 케이틀린은 손바닥에서 일렁이다가 사그라들었다가 하는 불꽃을 곁눈질하며 골목과 골목 사이로, 그 작은 체구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 끝에 도착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거대한 저택 앞이었다. 창조주 맙소사, 하이타운에는 한 번도 와본 적 없는데. 케이틀린은 덜컥 겁을 먹었다. 이곳에 함부로 들어가면 귀족들이 벌을 준다고 했다. 그러니 실수로라도 그곳에 향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그의 부모가 누누이 다그치곤 했었다. 그 가르침을 떠올린 케이틀린이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려는데, 미처 뒤를 돌아보지 못한 사이 한 장정과 부딪쳤다.
“으악!”
그 장정이 어찌나 크고 튼튼했던지 그 충격에 케이틀린이 저 멀리 나뒹굴었다. 한 바퀴 구른 끝에 바닥에 엎어진 케이틀린이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보다는 장정이 손을 내미는 게 더 빨랐다. 케이틀린은 내민 손 대신 그보다 더 높이 고개를 들어 장정의 얼굴과 옷을 살폈다. 만약 그가 귀족이라면 머리 굽혀 사과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는 척 봐도 귀족은 아니었다. 그의 떡 벌어진 흉터투성이 몸과 덥수룩한 수염을 보며, 케이틀린은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커크월 곳곳을 순찰하던 경비대나 성기사들이 딱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경비대? 성기사? 케이틀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끝장이다. 이대로 잡히면 그 교수대라는 곳에 보내지게 될 거야. 나도 그들 같은 괴물이 되어버릴 거야! 케이틀린의 근처에서 작은 불길이 치솟았다.
케이틀린의 눈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 그는 성기사가 맞았다. 정확히는, 맞았었다. 3년 전만 해도 성기사였던 그는 지금은 그저 환자에 불과했다.
“진정해라, 꼬마야. 나는 성기사나 경비대가 아니야.”
케이틀린은 믿지 않았다. 잔뜩 움츠러든 어린아이를 바라보던 장정—은퇴한 심문회 병사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마침 저택 안에서 나오던 사제를 향해 손짓했다. 케이틀린이 반사적으로 그가 손짓한 곳을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의 어린 수녀가 그들을 향해 조심히 다가왔다. 사제? 여기가 성당인가? 아니, 성당은 이렇게 안 생겼는데…. 케이틀린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정말이란다. 나는 그저 이곳에서 치료받고 있는 환자일 뿐이야. 너는 커크월 사람이지? 혹시 리륨 중독치료소에 대해 들은 적 없니?”
그제야 케이틀린은 저택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 수녀가 저택의 현관문을 활짝 열자, 저택의 내부가 케이틀린의 시야 가득 펼쳐졌다. 그 안에는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그를 격려하는 소리도 들렸으며, 누가 봐도 군인처럼 생긴 이들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앉아 있었고, 그 사이로 사제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전직 기사단장이 마법사 심문관과 결혼했는데, 그 후 하이타운에 웬 병원을 하나 만들었다고.
“보아하니 도움이 필요한 것 같구나. 잠시 들어와서 몸이라도 녹이지 않겠니?”
케이틀린은 여전히 경계 어린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갈 데가 없는 곳도 사실이었고,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성기사에게 붙잡히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 일이었다. 게다가…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하여간 이곳에도 마법사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끔찍한 괴물과 싸워 이겨 세상을 구했다는 바로 그 심문관 말이다. 그가 협회로 돌아가지 않은 채 학회를 지원하고 있다는 소문은 이곳 커크월에도 널리 퍼져있었다. 그 사람이라면 날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케이틀린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더 고민하기에는 너무 춥고, 아프고, 배가 고팠다….
러더포드 부부가 커크월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그동안 케이틀린은 치료소에서 지냈다. 케이틀린은 이들이 자신을 내쫓거나 협회에 팔아넘길 거로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예상대로 성기사가 찾아와 케이틀린을 찾기도 했다. 그때 케이틀린은 자신이 꼼짝없이 잡혀갈 거라 믿었지만, 컬렌의 병사 중 하나였던 라일렌은 과거의 연줄과 심문회의 이름을 들먹이며 아주 손쉽게 그를 내보냈다.
이곳 사람들이 성기사와 한 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케이틀린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다만 여전히 문제였던 것은 바로 케이틀린의 마법이었는데, 조금만 흥분해도 근처에 불이 붙는 통에 임시 보호자들은 항시 물통을 챙겨 다녀야만 했다. 비마법사인 그들이 할 수 있는 대처는 그게 고작이었다. 다른 마법사들을 부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협회나 학회에 도움을 요청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전직 성기사들의 연륜이 빛을 발했다. 그들은 성기사 시절의 경험을 살려 케이틀린의 마법에 능숙하게 대처했고, 그 덕분에 케이틀린과 치료소 사람들은 생각보다 무난히 공존하고 있었다.
컬렌과 이블린이 커크월에 도착했을 때는 막 석양이 저물고 있었다. 그들은 지체 없이 러더포드 저택—리륨 중독치료소로 향했다. 연락을 받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 한 명이 그들을 향해 묵례했다.
“상황은?”
“괜찮습니다, 사령관님. 저희가 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이 상태는요?”
“처음엔 많이 불안해했습니다만, 그래도 지금은 비교적 안정된 듯 보입니다. 협회 쪽에서 계속 연락이 오고 있는데….”
“그건 제가 해결하죠. 우선 아이부터 봐야겠어요.”
이블린이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자, 병사도 별다른 대꾸 없이 현관 문을 열어주었다. 마침 케이틀린은 바로 그 앞에 있었다. 뒷목을 반쯤 덮은 짧은 갈색 머리카락, 새로 맞춘 것인지 깨끗해 보이는 안경. 케이틀린이 열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야무진 얼굴, 살짝 처진 눈과 밝은 갈색 눈동자….
“안녕, 케이틀린. 도와주러 왔어.”
이블린이 자세를 낮추어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케이틀린은 이블린의 푸르고 붉은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곧 그의 왼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왼손 대신 그의 머리 색과 비슷한 어두운 갈색의 목재 의수가 있었다. 심문관은 외팔의 마법사래. 케이틀린은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의 의수에는 스태프가 들려 있었다.
“괜찮아. 많이 무서웠지?”
이블린은 꼭 자신의 처지를 다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마치 자신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처럼. 마법사라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고, 갑자기 낯선 곳에 내몰린 적이 있는 것처럼…. 그걸 깨닫자마자 케이틀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몽글몽글 떨어지더니, 곧 커다란 흐느낌으로 변했다.
케이틀린은 그제야 제 나이대 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케이틀린의 감정이 요동치며 불꽃도 함께 피어났지만, 이블린의 손짓 한 번에 전부 가라앉았다. 제 불꽃이 그를 해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케이틀린이 이블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블린은 그런 케이틀린의 머리칼을 소중히 쓰다듬어 주었다.
이블린은 자신이 케이틀린을 책임지고 교육하겠노라 선언했다. 우선은 학회 측에 머무는 것으로 하되, 아이의 상태가 안정되면 그에게 의사를 묻겠다는 것이다. 학회에 계속 머물 것인지, 아니면 협회로 갈 것인지를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심문관이 직접 나서자, 아무도 그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블린이 제자들을 여럿 배출한 선임 마도사였기에, 그리고 잇따른 사건으로 인해 남아있는 선임 마도사의 수가 무척 드물었기에 그의 자격에 감히 의문을 표하는 이도 없었다. 협회의 수장인 대마도사 비비엔마저 “자기라면 믿을 수 있지. 하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라며 유하게 넘길 정도였다.
“어린 마법사를 가르치는 건 참 오랜만인데. 잘 부탁해, 케이틀린.”
“네, 심문관님!”
이블린은 마법을 쓰지 않은 지 좀 돼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능숙한 솜씨로 케이틀린을 가르쳤다. 그들은 좋은 스승과 좋은 제자였다. 변덕스러운 불꽃을 길들이면서 케이틀린은 조금씩 자신감을 얻었다. 이블린은 그런 케이틀린의 변화를 유심히 살피며 그가 적당한 속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한편 마법사인 케이틀린을 언제까지고 치료소에 둘 수는 없었으므로—개중에는 여전히 마법사를 두려워하는 성기사도 있으니—거처를 옮겨야 했는데, 그렇게 케이틀린이 향하게 된 곳은 바로 배릭의 저택이었다. 하긴 당장 러더포드 부부조차 그들의 저택을 전부 치료소에 내어준 채 배릭에게 의탁하고 있었으니 애초에 선택권이랄 게 없긴 했다.
갑작스러운 객식구에 이블린이 배릭에게 양해를 구하자 배릭은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케이틀린을 마구 이뻐하며 즐겁게 웃었다.
“세상에, 범생이랑 완전 판박이잖아! 앞으로 꼬마 이블린이라고 불러야겠는걸.”
“케이틀린에겐 케이틀린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배릭.”
“뭐 어때! 꼬마 이블린아, 너도 좋지?”
잠시 고민하던 케이틀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배릭은 호쾌하게 웃었다.
“드디어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다니! 이날은 꼭 커크월 기념일로 정해야겠어.”
“예? 무슨 소립니까, 배릭. 케이틀린은 저희 아이가 아닙니다.”
“글쎄.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라고, 곱슬아. 그렇게 확언하진 않는 게 좋을걸.”
배릭의 말에 고개를 내젓던 컬렌이 슬그머니 케이틀린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케이틀린은 컬렌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홱 고개를 돌렸다.
러더포드 부부와 만난 지 벌써 수일이 지났음에도 케이틀린은 여전히 컬렌을 경계했다. 이블린에게는 첫날부터 품을 내어줬음에도 컬렌과는 눈 마주치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그러나 컬렌은 그걸로 섭섭해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는데, 케이틀린이 그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컬렌은 커크월의 전 기사단장이었다. 커크월에서 칭송받는 영웅이자, 마법사 학살을 주도한 주동자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니 당연히 마법사인 케이틀린에게는 위협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케이틀린은 컬렌이 이제 성기사가 아니라 심문회의 사령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틀린에게 컬렌은 여전히 커크월의 기사단장이었다. 그 이미지가 너무 강렬히 남아있는 탓에, 케이틀린으로서는 오히려 그가 어쩌다 마법사와 결혼했는지가 의문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다 용사 호크와 그의 동료들이 얼마나 용맹하게 마법사들을 무찔렀는지를 소리 높여 얘기하던데, 그렇게 잔인하게 마법사를 죽인 그가 마법사를 사랑한다니.
혹시 연기인 건 아닐까? 심문관님께 나쁜 마음을 품은 건 아닐까? 처음엔 그런 의심도 했으나, 그 생각은 채 하루를 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컬렌과 이블린이 서로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아직 연정이라는 감정을 잘 모르는 케이틀린조차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만약 그게 연기라면, 둘은 심문관과 사령관이 아니라 올레이의 대배우가 되어야 했다.
결국 케이틀린은 이블린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컬렌이 무섭지 않냐고. 그 질문에 이블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반대의 질문을 한 적은 있어. 마법사인 내가 무섭지 않느냐고.”
성기사가 마법사를 왜 무서워하지? 케이틀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성기사들은 언제든지 마법사를 죽일 수 있지 않나? 마법사를 괴롭히는 사람이 바로 성기사가 아니던가?
“컬렌은 나쁜 마법사에게 아주 끔찍한 일을 당했었단다, 케이틀린. 그래도 컬렌은 모든 마법사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어. 그래서 마법사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그러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그 사람은 절대로 널 해칠 수 없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케이틀린은 커크월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용의시대 9:37년, 용사와 컬렌은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왜 수많은 마법사를 죽였냐고. 이블린은 복잡한 표정으로 케이틀린을 바라보았다. 케이틀린의 질문에는 원망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의문이었다. 오히려 그 부분이 이블린에게 더 안타깝게 다가왔다.
그게 정당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걸 모두 알았다. 그렇다면 그때 호크와 컬렌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이블린은 당시 커크월에 없었다. 그래서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고 처참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당시의 커크월에는 절대적인 정답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모든 답이 잘못되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건 결국 모두를 포기하는 것이었으므로,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선 결국 어느 한쪽을 버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하여 성기사가 선택받고 마법사가 버림받았다.
호크도 그 답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었다.
“그때 앤더스는 저를 배신했죠. 그리고 저도 앤더스를 배신했어요. 그와 준비했던 모든 것, 우리가 구하고자 했던 모든 사람… 그 모든 마법사도 함께요. 그렇다고 해서 앤더스에게만 죄를 물을 순 없겠죠. 물론 오롯이 저 혼자만의 죄도 아니고요. 하지만 결국 저와 앤더스의 잘못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호크는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고 말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그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였다고. 이블린은 그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블린이 심문관으로서 내린 선택 중에도 분명 틀린 답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이블린의 최선이었다. 결코 변하지 않을, 그때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들.
케이틀린에게 이러한 전말을 말한다 한들 제대로 이해할 수나 있을까. 애초에 이 아이가 그걸 이해해야만 할까? 결국은 어른들의 사정이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 사정에 희생될 뿐이다. 그 어른들의 사정으로 이 작은 아이의 세상이 송두리째 무너졌는데, 그 와중에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 말하는 건 기만일지도 모른다. 아직 제 감정 조절조차 서툴러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불을 불태우는 어린 마법사에게는 특히 더.
이블린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이 아이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무뚝뚝하고 과묵한 케이틀린은 제 속내를 쉽게 보이지 않았으나, 그대신 여전히 불안정한 마법이 그의 상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도 케이틀린의 마법은 조금씩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나아지고 있었다. 이블린의 친절한 가르침 덕분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케이틀린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어두운 과거가 케이틀린의 발목을 잡는 날이 있었다. 종종 그날의 기억이 꿈이라는 형태로 그를 덮치곤 했는데, 케이틀린은 악몽에서 깨어나자마자 저도 모르게 러더포드 부부의 방문 앞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차마 방문을 두드리지는 못 한 채 그저 서성거리기만 했는데, 그러면 귀신같이 그 사실을 알아챈 컬렌과 이블린이 문을 열고 케이틀린을 살폈다. 처음에 케이틀린은 악몽을 꿨다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블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케이틀린의 손을 잡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케이틀린을 침대에 눕힌 뒤 케이틀린이 다시 단잠에 빠져들 때까지 그를 도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놀랍게도 이블린의 자장가는 효과가 무척 좋았다. 그렇게 다시 잠든 후로 악몽을 꾼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악몽에 잠을 설치면 이블린에게 달려가는 것이 어느덧 당연한 루틴이 되었다.
이번에도 케이틀린은 고약한 악몽에 시달렸다. 요 며칠 괜찮다 싶더니 또 이 꿈이다. 케이틀린은 꿈에서 깨어나려 발버둥 쳤다. 눈을 뜨면, 침대에서 내려가 익숙한 방으로 달려가면, 믿음직스러운 이의 품에 안기면 이 악몽도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케이틀린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무척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쉬이, 괜찮아. 악몽 따위는 너를 해치지 못하니까, 푹 잠들렴.”
이블린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더 굵고 나직한—
“…미안하다.”
그 한마디에 케이틀린의 악몽이 눈 녹듯 사라졌다. 케이틀린은 눈을 떠서 그 사람이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이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왜 제게 사과하는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왜 그렇게 슬픈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케이틀린이 깨어났다는 걸 벌써 눈치챘는지, 잘 자라는 말을 남긴 채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케이틀린은 재빨리 눈을 떠 멀어지는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익숙한 금발이 잔상처럼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부터 케이틀린은 컬렌이 자기 생각만큼 무서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생각이 굳어진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이따금 호크와 배릭, 그리고 러더포드 부부는 한자리에 모여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곤 했다. 주로 커크월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이따금 심문회나 테다스 전역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케이틀린은 그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방 안에서 머무르곤 했다. 그날도 비슷했지만, 화장실이 너무 급한 탓에 결국 회의실 앞을 가로지르게 되었다.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이블린의 목소리였다. 곧바로 컬렌과 배릭, 호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상황을 악화시킨 건 결국 저희입니다. 저희는 그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애초에 성당이 터지지도 않았을걸.”
“…비비엔이 대마도사가 된 후 커크월 협회의 사정이 많이 나아졌죠. 학회의 마법사들도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고요.”
“그렇지만—”
“그래. 대중의 인식은 여전히 심각해. 특히 여기 커크월은 더더욱 말이야."
“커크월 사람들에게 마법사들은 여전히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일 겁니다. 성당을 터트려 사람을 학살하던 미치광이, 끔찍한 혈마법사, 흉물… 커크월 사태로 인해 마법사에 대한 편견이 더 심해지고 굳건해졌죠.”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모든 마법사가 그렇지는 않다는 걸….”
호크는 문득 자신의 연인, 펜리스를 떠올렸다. 그에게 마법사는 나약하고 끔찍한 존재였다. 그 절대적인 명제에서 나는 언제나 예외였다. 그랬으므로 내가 얼마나 선한 일을 하건 얼마나 자제력이 뛰어나건 그건 마법사 전체의 특성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호크는 제 연인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했다. 심지어는 호크조차도 악한 마법사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커크월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을 들여다볼 때마다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법사이면서 마법사에 속하지 않는 사람. 그들에게 마리안 호크는, 커크월의 용사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들은 저와 심문관을 그들 상상 속의 마법사와 같은 선상에 두지 않아요. 그들에게 우리 같은 선하고 정의로운 마법사는 어디까지나 예외인 겁니다. 그렇게 뿌리내린 편견을 단기간에 바꿀 순 없을 거고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요. 세간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무리 협회와 학회의 처우가 개선된다 한들 마법사들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이블린의 말에 반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지자, 보다 못한 배릭이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끌었다.
“자! 일단 좀 쉬었다가 다시 하는 건 어때. 지금 이 방만 한여름인 거 같아. 너무 뜨겁다고. 좋은 방법이 떠오르기 전에 우리 머리가 먼저 익어버리면 곤란하잖아?”
“그러는 게 좋겠어, 배릭. 난 바람 좀 쐬고 올게.”
호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자, 케이틀린은 그제야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대화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화장실이 급했던 것도 까먹고 있었다.
케이틀린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적어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컬렌은 마법사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케이틀린은 어쩐지 전보다 컬렌이 더 친근해 보였다.
그 일 이후 케이틀린과 컬렌의 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케이틀린은 컬렌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후 그를 이블린처럼 사령관님 대신 컬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걸 들은 컬렌이 너무 감격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화가 난 것이라 오해한 케이틀린이 겁에 질려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해프닝이 생기긴 했지만… 다행히 이블린과 배릭의 개입으로 상황은 잘 마무리되었다.
셋은 종종 커크월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케이틀린이 본능적으로 로우타운을 꺼리는 통에 그들의 산책은 주로 하이타운에서 이루어졌다. 다행히 케이틀린에게 평민 주제에 왜 이런 곳에 왔느냐며 언성을 높이는 귀족은 없었다. 왜일까? 이 두 사람과 함께 다니고 있어서?
혼자 고민해 보던 케이틀린은 언젠가 둘에게 두 사람도 귀족이냐고 물었다. 컬렌은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답했고, 그 말에 이블린은 어깨를 으쓱이고선 컬렌을 툭 쳤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러더포드 경.”
“아니, 백작은 당신… 아.”
“…당신 내 남편 아니에요?”
“아니,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한 이야기가…!”
컬렌이 절절매는 걸 보며 이블린이 키득거렸다. 케이틀린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 둘은 대체 어쩌다 만나게 된 걸까? 물론 그들이 심문관과 그의 사령관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왠지 전장에 있는 둘의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케이틀린이 본 둘의 모습은 대부분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케이틀린이 보기에 러더포드 부부는 그냥 평범한 사람 같았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영웅들이 아니라 마치 제 부모님이나 옆집 이웃들 같은 평범한 사람. 케이틀린은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사실에 친근감과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특히나 컬렌이나 이블린이 고통에 신음할 때, 그들이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 케이틀린은 두 사람이 어쩌다 영웅이라 불리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나 엄청난 위업을 일군 사람들이건만, 케이틀린이 본 컬렌과 이블린은 악몽에 괴로워하고 알 수 없는 통증에 신음하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고통스러워했음에도 곧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걸 보며, 케이틀린은 저게 바로 둘의 강인함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이 언제나 보통 사람 같은 건 아니었다. 케이틀린은 커다란 병사들에게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거나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컬렌과 이블린을 종종 방문 너머에서 훔쳐보곤 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케이틀린은 이블린이 선물해 주었던 나무 스태프를 꼭 쥐었다. 더 자라면, 훌쩍 커서 어른이 되면, 이블린처럼 능숙하게 마법을 부리고, 컬렌처럼 단호하게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알고 난 후, 케이틀린은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다들 그렇게 말했으니까. 마법사들은 전부 탑에 갇혀 살게 된다고. 그러지 않은 마법사들이 이상한 거라고. 그래서 케이틀린은 자신도 그렇게 될 거라 확신했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마법사들도 분명 있었다. 언젠가 이블린의 손을 잡고 방문했던 마법사 학회에서는 수많은 마법사가 자유롭게 연구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중 누구도 괴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멋지고 대단해 보였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걸까? 케이틀린은 어느새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잘했어, 케이틀린. 이제 마력을 잘 제어할 수 있게 된 것 같네.”
케이틀린이 마법사가 된 지 1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마침내 케이틀린은 주변을 불태우지 않으면서 정확한 위치에 적당한 양의 마력을 쏘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빠르게 안정될 줄은 몰랐는데, 그동안 성실하게 잘 따라와 준 덕분이겠지. 이블린은 그런 케이틀린이 무척이나 대견했다. 이블린과 컬렌이 환한 미소와 함께 박수 치자, 케이틀린은 멋쩍은 듯 제 뒷목을 긁적였다.
“대단하군요. 마법에 소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같은 나이대의 수련생들보다 학습 속도가 빠른 것 같군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어때요, 컬렌? 당신이 보기에도 케이틀린은 이제 준비가 된 것 같죠?”
준비가 되다니? 그 말에 케이틀린은 스태프를 힘주어 쥐었다.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케이틀린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채 컬렌과 이블린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준비가 되었다는 거지? 케이틀린은 어머니의 비명을 떠올렸다. 자신을 찾아왔던 성기사를 떠올렸다. 이제 날 보내버릴 생각이야. 틀림없어.
케이틀린이 두려움에 몸을 떨기 시작하자, 잠시 주저하던 컬렌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곤 케이틀린과 조심스럽게 눈을 맞추었다.
“걱정 마렴, 케이틀린. 우린 네 의사를 최우선으로 존중할 거야. 네가 싫다면 억지로 보내지 않을 거다.”
컬렌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케이틀린은 컬렌의 손과 얼굴을 잠시 번갈아 보더니, 곧 그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1년간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건데, 컬렌은 거짓말을 잘 못했다. 아니, 거짓말이란 걸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케이틀린과 손을 맞잡은 컬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들에게 이블린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네가 선택하면 돼. 협회에 가고 싶니, 아니면 학회에 가고 싶니?”
이블린을 올려다보던 케이틀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컬렌의 손을 좀 더 힘주어 잡았다. 힘없이 떨군 고개 사이로 작고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저는… 그냥 여기 계속 있고 싶어요….”
학회에도 협회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케이틀린은 이곳이 좋았다. 정확히는 이 둘과 함께 있는 게 좋았다. 만약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면, 케이틀린은 그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게 느껴져 케이틀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케이틀린을 보던 컬렌과 이블린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곧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틀린의 몸이 별안간 높이 들렸다.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내지른 케이틀린이 컬렌의 어깨를 붙잡았다. 컬렌이 케이틀린을 안아든 것이다. 그런 둘을 보며 이블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려면 우리가 네 보호자가 되어야 해, 케이틀린. 그래도 괜찮을까?”
이블린의 질문에 케이틀린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그가 가장 바라던 일이었다.
그렇게 케이틀린은 케이틀린 러더포드가 되었다.
퍼렐던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 케이틀린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케이틀린은 지금껏 한 번도 배를 타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커다란 배는 멀리서 구경해 본 게 다였다. 언젠가 저런 배에 타볼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올라와 있다니!
그러던 케이틀린은 근처에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블린이 스태프로 갑판을 가볍게 두드리자, 가져온 짐들이 지면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이블린은 그 짐들을 어디론가 이동시키더니, 케이틀린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입을 벌린 채 이블린의 마법을 구경하던 케이틀린이 뒤늦게 이블린의 뒤를 쫓았다.
그들이 향한 곳은 갑판 아래 선실이었다. 그중 꽤 넓고 쾌적해 보이는 방 안에 짐을 차곡차곡 내려놓은 이블린이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케이틀린은 주위를 살피다가, 이블린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컬렌은요?”
“아….”
이블린은 좀 난처한 기색으로 케이틀린을 바라보았다.
“컬렌은 좁고 어두운 곳을 싫어해서.”
“그럼 컬렌은 여기 못 와요?”
“음… 보러 갈까?”
“네.”
케이틀린은 다시 이블린의 손을 잡은 채 갑판 위로 올라왔다. 저 멀리 난간에 기대어 선 컬렌이 보였다. 이윽고 둘을 발견한 컬렌이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이블린과 케이틀린도 함께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짐은 다 내려놨습니까?”
“네.”
“미안합니다. 제가 도와드려야 했는데….”
“어려운 마법도 아니었는데요.”
케이틀린은 컬렌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의식한 컬렌이 케이틀린과 눈을 맞추었다.
“왜 그러니?”
“컬렌은 왜 좁고 어두운 곳을 싫어해요?”
그 질문에 컬렌은 반사적으로 이블린을 돌아보았다. 이블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느냐, 난 최선을 다했다. 그런 뜻인 게 분명했다.
“그게… 음, 사실 난 좁고 어두운 곳에 있는 걸 무서워하거든.”
“왜요?”
“옛날에 나쁜 마법사한테 안 좋은 일을 당한 적이 있어. 그 후로 이렇게 되었단다.”
그 말에 케이틀린과 심지어는 이블린까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렇게 순순히 말해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탓이다. 그런 이블린을 보며 이번엔 컬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이런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그럼… 컬렌은 마법사가 싫겠네요?”
“응, 싫어했었지. 지금은 아니지만.”
“어째서요?”
“모든 마법사가 다 나쁜 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니까.”
그 말에 케이틀린은 뭐라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다른 사람들도 저렇게 생각했으면 좋았을 텐데. 찰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때 별안간 케이틀린의 몸이 위로 솟구쳤다. 컬렌이 케이틀린을 안아 들고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때마침 태양이 해안선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든 걸 보며 케이틀린은 문득 제 마법을 떠올렸다. 그래, 자신의 불꽃도 꼭 저런 색이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밝게 빛나는 붉은 불꽃.
“해가 지는군요. 슬슬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곧 어두워질 겁니다.”
“음… 그런데 컬렌, 진짜로—”
“제 걱정은 마십시오. 케이틀린이 찬 바람을 맞게 둘 순 없잖습니까.”
이블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컬렌을 바라보았으나 컬렌은 단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블린으로서는 드물게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렇게 웬일로 컬렌의 고집이 승리를 거두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하나 있었다.
“저도 여기 같이 있을래요.”
케이틀린의 돌발 선언에 이블린과 컬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만 끔뻑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컬렌이었다.
“안 돼. 밤이 되면 바닷바람이 더 차가워질 거다. 계속 이 위에 있으면 분명 감기에 걸릴 거야.”
“그럼 컬렌도 감기에 걸릴 수 있잖아요.”
“난 튼튼해서 괜찮대도.”
“제가 안 춥게 해줄 수 있어요.”
케이틀린이 손바닥에 작은 불꽃을 만들어 보였다. 그사이 태양을 삼킨 바다는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고, 그와 함께 하늘 역시 밀물이 차오르듯 빠르게 캄캄해졌다. 그렇게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케이틀린의 불꽃은 유독 밝게 빛나고 있었다.
컬렌은 이블린과 함께 처음 배를 탔을 때를 떠올렸다. 창조주 맙소사, 모녀가 벌써부터 이렇게나 똑같다니. 컬렌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배릭의 말처럼 케이틀린은 이블린을 무척 닮았다. 그래서인지 좀체 이길 수 없었다.
“…무리하면 안 된다. 너무 추워지면 내려가는 거야, 알았지?”
“네.”
“그럼 가서 담요랑 이것저것 가져올게요. 케이틀린, 아빠 잘 보고 있으렴.”
“네!”
“잘 보고 있으라뇨. 제가 무슨 애도 아니고….”
컬렌이 작게 항변했지만, 이블린은 대꾸하지 않은 채 빠르게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컬렌과 케이틀린의 눈이 문득 마주쳤고, 동시에 둘의 얼굴에 즐거운 웃음꽃이 터졌다.
마침 불어온 시원한 바닷바람이 부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순풍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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