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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사계 연작

C6 신의 기사단 스포일러

2020. 12. 25 최초 작성

2023. 12. 18 포스타입에서 옮김

※ 노아 님께 드리는 글입니다.

마비노기 팬픽션

밀레시안과 르웰린의 연정에 기반한 관계

C6 신의 기사단 스포일러

등장인물의 사망

수백 년간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을 고대의 유적을 발견한 적이 있다. 얼핏 타라나 탈틴의 스톤헨지와도 닮은 그것은 거대한 기둥을 세우거나 특별한 무덤을 만드는 일이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일임을 시사하는 듯했고, 돌 대신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 기둥은 거의 나무만큼이나 높아 인간의 힘이 아닌 초월적인 무언가에 의해 세워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인간은 불가해한 일조차도 결국에는 자아내고야 마는 존재다. 그런 사실은 언제나 일종의 경이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온전히 하루를 보냈다. 빙하처럼 추운 새벽부터 별의 베일이 드리우는 밤까지, 기둥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한 바퀴를 무결히 도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슴푸레한 회색으로 시작한 빛이 온 세상이 열리듯 환해지는 풍경을, 오후의 느긋한 햇살이 불타오르는 노을로 화하는 장엄을, 그러던 것이 사그라들어 죽음처럼 서늘하고 고요한 밤으로 지는 장면을. 그 모든 빛들이 얼음 기둥에 부딪혀 산산조각난 채 사방으로 산란하는 광경을 보았다.

땅에서는 그림자가 한 바퀴를 돌고 마침내 어둠 속으로 녹아 사라졌지만, 하늘에서는 영원할 것만 같은 어둠을 뚫고 고고하게 세상을 굽어보는 두 개의 달이 새로이 나타났다. 회중시계의 시침이 스물 네 개의 거점을 지나는 동안 하늘은 무수히 많은 물감을 그 팔레트에 풀었다 쓸어내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하늘이 가질 수 없는 색이라 생각했던 색조차도 공중에는 나타난다는 사실을 새로이 배웠다. 자연에서는 그 어떤 색도 땅이나 하늘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자리에서 시간별로 혹은 계절별로 수 장에서 수십 장에 이르는 그림을 그렸다던 화가들의 풍경 연작이 떠올랐다. 그런 작품만을 수집하는 수집가들도 존재했다. 순항의 시절보다는 격랑의 시절에 더 유행했던 그 연작들은 왕성에도, 그리고 신시엘라크의 저택에도 걸린 적이 있다. 그에게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나 조예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여 왜 같은 풍경을 계속해서 그렸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 때로는 오직 경험만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어 놓기에, 이제는 무엇 하나 같지 않음을 안다. 그저 색만 바꾼 같은 그림이 아니다. 세상은 정말로 한 순간 한 순간이 다르다. 모든 순간이 오직 한 번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모든 순간을 담아내겠다는 일념으로 그 자리에서 보이는 모든 풍경을 그리고 또 그려내었을 것이다.

어떤 색이 인간의 눈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색인가에 관한 이론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과학이 들어 올리는 기치는 대단한 것이지만, 우리는 이론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무거운 바구니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던 사람이 마차 밑에 깔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차체를 번쩍 들어 올리는 일,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을 포기하지 않은 이가 아주 오랜 시간 후에 보게 되는 눈꺼풀의 떨림,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마법처럼 눈을 뜨는 일, 우리는 그런 것들을 기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안다. 그렇게 거창한 기적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눈을 고요히 들여다보면 언제든 기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의 눈 속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는 사람의 하루하루가 곧 기적이다.

사랑하는 이의 눈에 임하는 것이 기적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축복이다. 그가 작은 죽음을 극복하고 일어나는 순간,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마침내 들어 올린 눈꺼풀 아래로 빛이 스며들 때 저물었던 나의 세상이 함께 열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야말로 세상을 머금는 가장 깊은 그릇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흔히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내려와 나팔을 울리는 환희라 하는 그 묘사는, 결코 과하지 않다. 어떠한 감동도 감격도 사랑하는 이의 삶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 그저 축복만을 빌 따름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온 우주가 네 눈 속에 있는 것만 같아.

어차피 저물 것인데요.

그러니 더더욱 봐둬야지. 잊지 않도록.

네가 영영 저무는 순간은 결코 잊지 못할 것과 달리 모습이나 향기 따위는 아무리 보아도 결국은 잊힐 테지만, 바위를 깃털로 쓸어 없앨 정도로 느리게 흐르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결국은 닳고 닳아 필연적으로 오고야 말 그 망각의 순간을 조금이라도 미룰 수 있도록.

르웰린, 네 평생을 사고 싶어.

그건 비매품이에요.

어스름한 새벽달의 뭉근하고도 설익은 색이 네 눈 속에 있었다. 속눈썹을 내릴 때면 드리우는 그늘이 빛을 만나 때론 회색과도 같은 새벽을 피워올려 네 눈 안에 안개를 자욱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네 눈을 닮은 눈이 왔고,

르웰린, 네 평생을 사고 싶어.

대여는 마음에 안 드세요?

네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나무 사이로 비끼는 햇살이 온통 선명하게 쏟아져 네 눈은 말 그대로 보석처럼 반짝이곤 했다. 수많은 자연의 색을 담아 한 번을 움직일 때마다 저마다의 색으로 빛나는 오팔과도 같이 네 눈은 단순한 어떤 색의 이름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네 눈을 닮은 비가 왔고,

르웰린, 네 평생을 사고 싶어.

은퇴하면, 생각해볼게요.

노을의 타오르는 듯한, 마지막 남은 시간을 모조리 불태우는 듯한 강렬한 붉은빛이 네 눈 속에 생겨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혹은 설원처럼 차가운 어둠이 내려앉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네 눈을 닮은 폭풍이 몰아쳤고,

르웰린, 네 평생을 사고 싶어.

이젠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도요.

그리하여 네가 나를 바라볼 때, 네 세상에만 꽃이 피었던 것은 아니다. 내 마음 속에도 꼭 같은 꽃이 피곤 했다. 그렇게 네 눈을 닮은 꽃이 피어났다.

그럼 남은 평생이라고 할까?

좋아요.

다정한 말 한 마디 해준 적 없는 나의 사람, 언젠가 이 사랑으로부터 홀로서야 할 나를 위하여, 죽음을 앞둔 그 순간 잠이 작은 죽음인 것이 아니라 죽음이 긴 잠에 불과한 것이니 삶과 생명이 순환하는 그 마지막 여정에 오르는 자신을 축복 속에 보내달라 말하며 나를 위로하던 나의 작은 사람,

오랜 시간을 자던 그가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 꼭 같은 시간을 홀로 깨어 있던 나는 그에 감사하며 가늘게 마른 손을 가만히 잡았었다. 그 순간에 그가 하고 싶어 했던 말을 안다. 사실은 심해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조용히 당신을 사랑해왔다거나, 혹은 당신을 홀로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그런 가없는 말들. 그는 마지막까지 어렵게 그 말들을 삼켰다.

괜찮아.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할 필요 없어. 너를 잊지 못할까 두려워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 나는 너로 인해 강해질 거야. 강철처럼.


밀레시안 님은 다정한 사람이에요.

한참 만에야 르웰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제는 곧 저물 기억임에도 최후의 최후까지 그 모습을 새기려는 듯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사랑한다는 것보다도 훨씬 더 쓰고 아픈 네 마지막 말을,

알아, 알고 있어, 르웰린, 그래도 나는 너를 기억할 거야.

그리고 어느 겨울의 끝자락에,

르웰린.

르웰린?

...잘 자, 르웰린.

결국 영원한 잠이 네 눈꺼풀 위에 내려앉고, 그렇게 봄은 오지 않고 고요히 저문 채로,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러.

네가 눈을 감으면 온 우주가 죽어서 가라앉는 것만 같아.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모든 게

다시 

살아나지.

(이제 와선 아무래도 너는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존재가 아닌가 싶어.) ¹

Mozart L'opéra Rock- Dors Mon Ange


¹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의 Mad Girl's Love Song에서 일부 변형하여 차용. 원문은 다음과 같다.

I shut my eyes and all the world drops dead;

I lift my lids and all is born again.

(I think I made you up inside my 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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