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마비노기/카즈피네] 영원한 계절

마비노기 메인스트림 C6 신의 기사단 중 G19~G20 스포일러 포함

재해석 by 보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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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게시일: 2022.01.10 (https://posty.pe/cetnhh)


피네는 눈을 깜빡였다. 잠시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는 듯했다.

오늘 이멘 마하에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쉬이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는 장대비였다. 알반 기사단의 에일레르 조와 헤루인 조는 함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야외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두 조장은 방을 구해 하룻밤을 묵기로 결정을 내렸다.

비는 밤이 깊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지붕 위로, 유리창 위로 비 듣는 소리가 요란했다. 일제히 고공에서 낙하한 물방울들이 앞다투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의 탓인지 피네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유독 오지 않는 졸음을 기다리며 몸을 뒤척이던 피네는 결국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둔 창밖엔 두터운 비구름에 가려 별빛 한 점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이 있었다.

침대 밖으로 나온 피네가 창가에 다가섰다. 이불의 온기가 사라진 피부 위를 선득한 기운이 휘감았다. 저도 모르게 살짝 어깨가 떨렸다. 숄이라도 하나 가져올걸. 마디마디에 스미는 듯한, 눅눅한 공기가 머금은 한기는 싫다. 피네는 팔짱을 낀 채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받은 빗줄기가 그어 대는 불규칙한 그림자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큰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시꺼먼 그림자 하나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피네는 반사적으로 원드에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피네는 그림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얇은 잠옷 너머로 다소 서늘한 체온이 느껴졌다. 곧 맞닿은 살결이 비슷한 온도로 데워졌다. 귓가엔 익숙한 숨소리, 코끝엔 익숙한 체취. 놀랐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어쩐지 조금씩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누르며, 피네는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음, 카즈윈?"

대답 대신 기나긴 한숨이 들렸다. 더운 숨이 훑고 지나간 귓바퀴가 간지러웠다. 피네는 소리 죽여 웃었다. 그리고 잔뜩 움츠리고 있던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가둔 채 딱딱하게 굳어 있는 오랜 친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흰 손이 단단한 등을 가만가만 어루만지듯 토닥였다. 거세게 울리던 심장의 박동이 점점 잦아들며 몸의 긴장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카즈윈은 피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응."

대답과 동시에 피네를 다시 한번 힘주어 안았다. 피네가 작게 웃으며 제 팔에도 힘을 주며 카즈윈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벼 왔다. 그제야 카즈윈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

"응, 그래도 이제 괜찮아."

카즈윈이 피네의 품 안으로 파고들듯 안겨 왔다. 체격 차가 있어 어떻게 해도 카즈윈은 안긴 쪽이라기보다는 안은 쪽이었지만. 언제 이렇게 커 버린 거람. 피네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했다. 목덜미로 느껴지는 카즈윈의 뺨이 따뜻했다.

"……꿈을 꿨어."

"꿈?"

"응."

"나쁜 꿈이었어?"

카즈윈은 대답 대신 피네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쁜 꿈 꾸고 내 방으로 오는 거, 이젠 졸업한 줄 알았는데."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은근히 장난을 걸어 왔다. 아직도 긴장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안심시켜 주려는 것이리라. 카즈윈은 푸스스 웃으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창문 너머로부터 비쳐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채, 피네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새로 돋아난 잎의 색을 한 눈동자는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피네가 싱긋 웃었다. 카즈윈의 마음속으로 따뜻한 봄의 미풍 한 줄기가 지나갔다. 카즈윈은 손을 뻗어 피네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자칫하다가는 깨지기 쉬운 어떤 것을 만지듯이. 피네는 피부에 닿는 단단한 손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그 손등을 제 손으로 살포시 감쌌다.

카즈윈이 입을 연 건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였다.

"가끔."

"응."

"꿈을 꿔……그때의 일."

오늘은 그게 좀, 너무 생생해서. 작은 목소리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피네는 카즈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심해와도 같은 색의 두 눈동자는 밤의 어둠 속에서 한층 검은 빛을 띠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곳."

"응."

"너는 힘들어 하며 울다가, 사도로……변해 버리고, 나는."

피네를 마주 내려다 보던 카즈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금이 가듯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꿈속에서, 나는 말이야, 피네."

카즈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난 여전히 널 구하지 못해."

알고 있음에도 아무 것도 행하지 못하는 무력감만큼 사람을 자기혐오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게 있을까.

눈을 뜨면 연기처럼 사라질 것에 불과한 꿈인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 광경의 재현은 지독하게도 선명한 나머지 카즈윈의 시간을 그때의 한복판으로 돌려놓고 만다. 목이 쉬도록 피네의 이름을 외치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그때로, 그 비참함의 구렁텅이 속으로. 카즈윈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피네는 카즈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손을 뻗어, 제멋대로 헝클어진 채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빗어 넘겨 주었다. 어스름이 내릴 무렵의 바다와도 같은 짙푸른 머리카락을 매만지다가 시선을 돌려 눈을 맞췄다. 아까부터 줄곧 자신만을 바라보던, 한여름 밤하늘 같은 진청색 눈동자. 그 다정한 눈빛에 피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바보."

콩, 소리가 났다. 앞이마가 조금 얼얼했다. 카즈윈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제 앞으로 바짝 다가온 피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피네의 눈은 살포시 감겨 있었다. 속눈썹의 개수를 헤아려 볼까, 카즈윈은 잠시 생각했다가 곧 관두기로 했다. 틀림없이 도중에 모두 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피네는 말이 없었다. 카즈윈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닿은 곳으로 느껴지는 온기가 은은했다. 고요한 가운데 유리창을 내리치는 빗소리와 서로의 숨소리가 뒤섞인 귓가만이 소란했다.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피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마 카즈윈밖에 없을걸?"

피네의 감은 두 눈이 천천히 열렸다.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는 이 어둠 속에서도 보석 같았다. 봄날의 햇볕 같이 따스하게 빛나는.

"물론 밀레시안 님이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동안 카즈윈이 날 도와준 게 전혀 쓸모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

페라 화산에서 있었던 일, 그 후의 일도 밀레시안 님이 다 말씀해 주셨어. 피네가 부연했다. 카즈윈은 머쓱한 듯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어쩐지 밀레시안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피네와 함께 있는 날 쳐다보더라니. 눈이 마주치자 더욱 활짝 웃으며 힘내라는 손동작을 하기까지 했다. 엄지를 척 들어 보이기도……. 아니, 대체 뭘 힘내라는 건가 싶었는데. 그 미소의 의미에 대한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았다. 카즈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밀레시안은 다들 그런가?

다음에 그 묘하게 짜증나는 얼굴을 성소에서 마주치게 되면 붙잡고 추궁할 계획을 세우느라 바쁘게 돌아가던 카즈윈의 사고회로가 일순 정지했다. 피네가 카즈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포옥 안겨 왔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말하려던 문장을 절반밖에 입밖으로 내지 못한 것은 그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제 편한 대로 말을 잘라 먹는 카즈윈의 어법이 익숙한 피네에게는 그것이 이해에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카즈윈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날 부정하지 않을 수 있었어. 누구보다도 '나'를 봐 주는 사람이니까. 나조차 그러길 포기했던 그 순간조차도."

"……."

"그러니 그렇게 말하지 마.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런 얘길 하면 난 정말 슬퍼."

피네가 고개를 들어 카즈윈과 눈을 맞춰 왔다. 걱정과 속상함이 잔뜩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카즈윈은 희미하게 웃으며 피네의 뺨을 어루만졌다. 작게 끄덕이는 고갯짓에 피네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감히 말하건대 그의 생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간절하게 신을 불렀던 때였다. 제발 그녀를 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녀를 구원해 주십시오. 제게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하나뿐인, 나의 가장 소중한—.

언제나 그랬듯이 그의 신은 직접 응답하지 않았다. 그저 거기엔 밀레시안이 있었다. 마치 아튼 시미니가 안배하심과 같이.

지고한 주신께서 손수 빚은 이 낙원에서 그녀가 부재한다는 전제를 단 한 번도 가정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성립할 수도 없었다. 봄이 없다면 척박한 겨울만이 영속할 뿐이다. 그녀가 없는 곳이 낙원으로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즈윈에게 피네는 지극히 당연한 세상의 필요조건이었다.

그리고 그 낙원의 시작이자 끝은 품에 안겨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있지, 카즈윈."

피네의 목소리가 가만히 들려왔다.

"나는 알아. 카즈윈이 얼마나 다정하고 속이 깊은지."

"……."

"책임감은 또 얼마나 강한데."

"……그만해."

"아직 더 있는걸. 그리고 또……."

말끝을 늘리며, 피네의 시선이 카즈윈의 눈동자를 찾았다. 일견 성실한 것 같지도 않고 말수도 적어 무심해 보이는 남자애는 전부터 (그 남자애의 표현을 빌리자면) 낯간지러운 말에는 면역이 없어 곧잘 눈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곤 했다.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네. 피네는 생각했다. 카즈윈과 함께 있을 때면 석양이 지는 여름날 저녁의 바닷물에 몸을 담근 것 같았다. 무심한 듯한 그 다정함은 알맞은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피네에게 꼭 필요한 만큼이었다.

피네에게 있어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기대어 쉴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카즈윈이었다. 마치 무성한 녹음을 드리운 한 그루의 여름 나무 같은.

집요한 시선을 이기지 못한 카즈윈이 결국 이쪽을 바라봐 주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 잔뜩 곤란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겠지.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떤 얼굴일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어둠 속에서 두 쌍의 마주쳤다. 피네는 그녀의 여름을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카즈윈이 날 많이 좋아하는 것도 알아."

카즈윈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에 안도했다. 첫째는 지금이 한밤중인 점, 그리고 두 번째는 방 안에 별다른 조명이 없어 캄캄하다는 점이었다. 귓바퀴와 두 볼에서 제법 열감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온 얼굴이 볼품없이 빨개져 있을 게 분명했다. 밤의 어둠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엄폐물이었다.

그러나 카즈윈은 피네의 말을 구태여 부정하지는 않았다. 사실이니까.

칠흑 같은 창밖으로 새하얀 균열이 명멸했다. 그 빛을 받은 피네의 은빛 머리카락이 더욱 희게 빛났다.

예쁘다.

카즈윈은 생각했다. 굳이 입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어여쁘디 어여쁜 그의 봄이 싱그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렇지, 카즈윈?"

단지 존재함으로 구원이 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세계는 신의 은총으로 충만했다. 그 사실에는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확신했다.

카즈윈은 환하게 웃으며 두 팔 가득 피네를 안았다. 피네도 화사한 미소로 화답하듯 안겨 왔다.

"응."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곁에 있을게."

영원히.

그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요, 맹세였다. 카즈윈은 피네의 이마 위에 서약과도 같이 입을 맞추었다. 그게 제법 간지러웠는지 피네가 작게 웃었다.

무서운 기세로 퍼붓던 비는 어느 새 그쳐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서로의 계절이었던 두 사람은 서로의 품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을 한가득 수놓은 별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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