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마비노기/르웰밀레] 우주를 건너

G25 왕성 연회에 르웰린의 파트너로 입장한 경우, 연회가 끝난 뒤의 이야기

재해석 by 보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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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게시일: 2021.04.25 (https://posty.pe/nrs835)


라흐 왕성 안에서도 오가는 사람이 적은 구석진 곳, 르웰린 신시엘라크는 얼굴을 찡그린 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의 앞에는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될 만큼 별난 옷차림을 한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그리고 에린 전역을 통틀어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부류는 단 하나 뿐이다.

밀레시안은 곁눈질로 흘끔흘끔 르웰린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에린의 영웅 밀레시안이 르웰린 신시엘라크의 눈치를 보는 일은, 솔직한 말로 발생 빈도를 따졌을 때 그다지 별난 일에 속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장소가 타라, 그것도 라흐 왕성이라면 꽤 사건성을 띠게 된다. 보는 눈이 많은 타라에서는 시종일관 미소 띤 얼굴로 다니는 르웰린이다. 그러나 오늘 신시엘라크의 왕자님은 밀레시안에게 그 어여쁜 미소를 보여줄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었다.

"저기, 르웰린."

"네."

"어, 그러니까……화났어?"

"……."

르웰린은 대답 대신 그저 제 눈앞에 선 사람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는 종종 모리안을 구출하고 수호자의 마음을 돌린 데다가 —기실 르웰린은 아직 이 일을 좋게만은 회상할 수 없었다— 마나난까지도 설득해 낸 구세의 영웅이 눈치 없기로는 구제불능에 언행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출처 불명의 온갖 이상한 걸 줄줄이 달고 다니는 이 얼빵한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의심의 여지라고는 한 치도 없는 사실에 회의적이 되곤 했다. 바로 이 순간처럼. 소년은 마치 보석과도 같이 오묘한 빛깔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르웰린이 생각보다 오래 말이 없자, '그렇지만 난 정말 르웰린이라면 괜찮은데' 따위의 혼잣말을 우물거리던 밀레시안은 불안해졌다. 이번엔 어떤 코스로 날 혼내려고 이러지? 상냥한 얼굴로 그렇지 못한 잔소리들을 쏟아내겠지. 지금이라면 네 심정을 백 번도 천 번도 이해할 수 있어, 알터. 그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밀레시안이 앞으로 받게 될 처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준비를 함과 동시에 알터를 향한 동지애를 곁들인 그리움에 휩싸여 있던 차였다.

"밀레시안 님."

"……어, 어?"

허둥대며 한 박자 늦게 대답하는 밀레시안을 보며, 예상한 반응이었다는 듯 르웰린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제가 드린 당부 잊지 않으셨죠? 왕성은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은 곳이라는."

밀레시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왜 그런 이야길 해 드렸던 걸까요?"

질문하며, 소년은 눈매를 살짝 휘며 웃었다. 그와 마주 보던 유리알 같은 두 눈이 슬며시 옆으로 굴러가는 게 보였다. 짧은 침묵에 뒤이어 다 기어들어 가는 대답이 들려왔다.

"……말조심하라고?"

르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 이해하셨네요."

잔뜩 의기소침하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르웰린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웃을 뻔했다. 표정 읽기가 이렇게까지 쉬워서야……. 라이미라크 교단 관계자들이며 귀족들이 득실대는 곳을 필사적으로 피해 나오길 천만다행이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간단히 말씀드렸지만, 쓸데없는 오해는 밀레시안 님이 불리한 상황에 부닥칠 빌미를 만들 수 있단 말이에요. 저는 신시엘라크의 사람이고, 당신은 에린을 구한 영웅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입지가 곧 왕권과도 직결되는 문제라는 건 잘 아실 테고요. 국왕이 곤경에 처하는 걸 바라진 않으시겠죠?"

억지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부러 국왕을 언급하기까지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바꾸어 말하자면, 구차하게) 앞뒤가 잘 맞지도 않는 것 같은 구구절절을 늘어놓는 이 상황이 저답지 않다는 생각을 애써 억눌렀다. 어쩐지 조금은 시끄러워진 속을 외면하며, 말을 마친 르웰린은 팔짱을 낀 채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은 턱까지 괴고 사뭇 진지한 태도로 르웰린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내 고요하게 침잠해 있던 눈동자가 르웰린을 향했다.

"으응, 근데 나 한 마디만 해도 돼?"

"말씀하세요."

"이대로 도망쳐 버리자는 말 농담이었겠지만, 난 정말 그래도 상관 없어."

"……."

밀레시안은 별에서 온 여행자라더니, 혹시 그 정신머리도 별들 사이에 두고 다니시는 겁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르웰린은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까지 제 말은 어디로 들으신 건가요?"

"본의 아니게 다난들 알력 싸움에 등 터지는 것도 지겹고, 오해 사는 일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백안시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음, 여차하면 실력행사로 나가지, 뭐. 알지? 내가 좀 강하잖아."

문자 그대로 폭탄선언이었다. 르웰린은 뜨악한 표정으로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뒤, 밀레시안에게로 바짝 다가서서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을 거는 르웰린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밀레시안 님, 왕궁에서 경솔한 언사는 특히나 삼가시는 게 좋다고 제가 몇 번이나—"

"르웰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르웰린은, 마찬가지로 차분히 빛나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르웰린의 입술이 뭔가를 더 말하려던 듯 머뭇대다가 이내 꾹 다물어졌다. 밀레시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방금 한 말은 절반쯤 농담이야. 미안해."

"……'절반쯤'이요?"

"응, 아아 잠깐만, 혼내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줘. 어디까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설명할게."

밀레시안은 '절반'이라는 단어 선택에 다시 열리려는 르웰린의 입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어디 한 번 들어는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듯한 눈빛을 한몸에 받으며, 그는 짐짓 목을 가다듬었다. 곧 영웅의 입술이 열렸다.

"많이 힘들고 지치는 건 사실이야. 에린의 수호자든 뭐든 전부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치고 싶어질 때가 없었다고 한다면 진짜 거짓말이고. 난 어떻게 해도 이 세계에서 영영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걸까 생각할 때마다 좀……슬프기도 했고."

르웰린은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밀레시안은 입술 위로 톡톡 손가락을 두드리는 르웰린을 향해 싱긋 웃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난 에린을 떠나지 않을 거야.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상냥한 다난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그 친구들이 이렇게 오래오래 날 기억해 주고, 또 함께해 주고 있잖아. 그리고 그 안에 르웰린, 너도 있다는 사실이 나는 정말 기뻐."

밀레시안은 눈을 들어 르웰린을 바라보았다.

"으음, 너도 알다시피 난 쓸데없이 오지랖도 넓고 부탁을 잘 거절하지도 못하잖아. 손해만 보는 바보라고 불려도 별로 할 말은 없지만 말이야."

영웅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 순간 르웰린의 손은 밀레시안의 손 안에 단단히 깍지 끼어진 채 붙잡혀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한 르웰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치만 그 덕분에 나무 그늘 밑에 서 있던 널 만나서 지금은 이렇게 서로의 파트너로 연회에 입장하는 사이가 되었잖아?"

르웰린은 서서히 가까워지는 밀레시안의 얼굴을 보았다. 찬란한 빛을 담은 별의 두 눈동자에 비치는 건 오롯이 자신 하나뿐이었다.

"난 널 만나기 위해 저 우주에서 별들을 건너 이곳에 온 게 틀림없는데, 그런 네가 있는 이 세계를 내가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어?"

소년에게서 풍겨오는 다디단 꽃향기가 산뜻하게 코끝을 간질였다. 밀레시안은 환하게 웃으며 깍지 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사랑의 도피행 정도는, 너만 원한다면야 내겐 아주아주 쉬운 일이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지 않은 이야기를 참 잘 하시네요."

"에헤헤."

"뭐가 에헤헤, 입니까."

르웰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 왕성에서 나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르웰린이 말했고, 밀레시안은 동의했다. 손을 빼내려는 르웰린에게 밀레시안은 사람이 없는 이 복도 끝까지만 계속 잡고 있자고 제안했으며, 르웰린은 못 이기는 척 승낙했다. 그런 소년이 귀여워 밀레시안은 속으로만 웃었다.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이 느긋한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앞뒤로 흔들렸다.

복도 끝 모퉁이에 다다르기 직전, 르웰린이 말없이 멈춰 섰다. 밀레시안도 따라 걸음을 멈췄다. 밀레시안의 손 안에 잡힌 자신의 손을 가만 내려다보던 르웰린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말씀, 정말로 진심이세요?"

"응, 진심이야. 나는 르웰린을 좋아하니까."

별처럼 빛나는 두 눈이 흔들림 없이 소년을 향하고 있었다. 그랬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은 평온한 얼굴로 전혀 그렇지 않은 내용의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방심한 탓에 저도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덜컹거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르웰린은 짐짓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살짝 붉어졌을지 모르는 두 볼과 자제력 없이 번지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함이다.

다시 밀레시안을 마주하는 르웰린의 얼굴엔 소년의 풋풋한 설렘 대신 물푸레나무를 닮은 유연함만이 서려 있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교계에서 곤란해질 제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죠."

타박하는 듯한 말투와는 달리, 소년의 얼굴은 눈앞에서 빛나는 그의 별을 향해 화사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 써서 해주신 제안이니 약속으로 여기고 잘 받아두겠습니다. 나중에 모른 척 무르기 없기예요."

맑은 웃음소리가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복도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손이 아쉬운듯 떨어져 나갔다. 별에서 온 여행자와 르웰린 신시엘라크는 나란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레이트 홀에 다다랐을 때였다. 밀레시안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근데 있지, 르웰린."

"이번엔 또 뭡니까?"

"너 당황하면 말 더듬는 거 정말 귀엽더라."

르웰린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뒤, 능청스럽게 옆머리를 쓸어넘기며 대꾸했다.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는걸요?"

소년의 손짓을 따라 꽃향기가 잔잔히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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