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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미지에의 탐구

C6 신의 기사단, C7 아포칼립스 스포일러

2020. 08. 27 최초 작성

2023. 12. 18 포스타입에서 옮김

※ 스챠 님께 드리는 글입니다.

마비노기 팬픽션

C6 신의 기사단, C7 아포칼립스 스포일러

르웰린의 두 눈에 에린의 영웅이 처음 맺힌 때는 어느 여름 왕성에 드리운 아름드리 거목의 그늘 아래서였다. 기록된 활자로 수없이 덧그려본 인상과는 조금 달라,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단 한 번 본 것이 전부인 영웅을 향한 의문은 아니었다. 루나사의 기록 혹은 제 독해력 내지는 상상력에 대한 가벼운 의문이었을 뿐이다.

그래,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영웅에 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세상사에는 수많은 갈래가 있다. 어쩌면 그는 변덕을 부릴 수도 있었다. 해가 되지 않을 충동에 잠시 몸을 맡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르웰린은 영웅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랜 시간 그를 지켜봐 왔다. 영웅이 아는 곳에서, 그러나 영웅이 모르는 시간을. 알반의 기사이자 라흐의 귀족인 그는 왕성에 들르면 임무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주변의 정보를 수집하곤 했다. 귀족으로서의 습관이기도 하고 기사로서의 본능이기도 한 잘 훈련된 시야의 끄트머리에 영웅은 종종 들었다. 그는 충분한 관찰을 통해 석재를 조각으로 깎아내듯 영웅에 대한 인상을 정립해나가고자 했다.

다소 날카로운 색의 백발에 피처럼 붉은 눈. 흰색에도 톤이 있다. 영웅의 머리카락은 유리처럼 차갑고 쨍한 그런 색이었다. 그 아래로 떨어지는 다소 냉랭한 표정과 당당한 걸음걸이는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자유를 상징하는 듯했다. 겨울 하늘을 가르는 강하고 단단한 새처럼.

그러나 자유롭고 높은 것들이 흔히 그러하듯 영웅은 고독해 보였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그런 날이 없겠냐마는 영웅의 고독은 평범한 이들의 것보다는 깊고 진한 듯 보였다. 불 위에 너무 오래 방치해 잔뜩 졸아버린 시럽처럼. 가끔은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날도 있었다. 혹은 잃을 길조차 가져본 적 없다는 듯 비 오는 타라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날도.

르웰린은 오래도록 대상을 관찰했지만, 그 조각이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는 알 수 없었다. 여러 조각가가 같은 대상을 조각하여도 전부 다른 인상의 작품이 나오는데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그림에 있어 어찌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까. 관찰자가 관찰 대상에게 감화되거나 동화되는 일은 흔하다. 그러므로 르웰린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 노력이 어느 정도의 결실을 맺었는지는, 혹은 결실을 맺을 수 있기나 하였는지는... 오직 당사자만이 알 수 있으리라.

이를테면 영웅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아래에 숨겨진 의도나 의미가 있는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다지 알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단지 이따금 곤란할 때가 있었다. 왕성을 제멋대로 종횡무진하는 덕에 하마터면 직접적으로 마주칠 뻔한 때가 서너 번쯤 되었다. 이상하게도 영웅의 앞에서는 무뎌지는 직감 탓에 직전에야 경고를 받고 아슬아슬하게 피하곤 하였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모처럼 찾아온 선명한 예감을 보란 듯이 따른 것은. 어쩌면 오기 따위가 조금은 섞여 있었는지, 르웰린은 아직까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계의 문이 열렸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알반 기사단은 에린의 수문장과도 같다. 외부의 침입에 가장 민감하고 준비된 집단이었다. 영웅의 질기고도 오랜 인연─들─이 추락하던 날에는 어떤 별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하늘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날의 르웰린에게 찾아든 막연하고도 희미한 예감은 지금 열린 것이 단지 물리적인─혹은 신성神性한─의미의 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말해왔다. 서사와 인연으로의 문 역시 열렸으리라고, 그는 긴밀하게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다. 문에서 조금 비켜난 곳에, 아마 그즈음에나 자리한 사람이리라.

언젠가 알반에서 영웅을 보게 되리라 예상했느냐 묻는다면 르웰린의 직감은 그러하다 말했을 것이다. 그는 에린의 영웅이었고 모든 흐름은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르웰린은 운명에 크게 저항해본 적이 없었다. 운명은 예언과도 같기에. 예언이란 반드시 그렇게 되게끔 결정지어진 일련의 결과를 뜻한다. 반면 자신은 고작해야 예지 같은 것이었다. 변하기도 하고, 빗나가기도 하는.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더 많은 것을 보는 그는 그렇기에 흐름에 순응하는 법을 알았다. 마치 자연처럼. 물론 그는 인간이었으므로 가끔은 그리고 잠깐은 길을 비켜 걷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인 흐름에는 영향을 줄 수 없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토록 많은 연어가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도 물을 벗어나 살 수 있는 연어는 하나도 없듯이.

르웰린이 아직 성물을 건네지 않았던 어느 날인가에 소슬비 오는 타라에서 영웅을 마주쳤던 적이 있다. 신시엘라크로서 왕성에 들른 날이 아니라 기사로서 타라에 들렀던 어느 여름날에.

그럴 예정이었던 것은 아니다. 피치 못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영웅이 다리가 부러진 떠돌이 강아지 앞에서 오랜 시간을 쪼그려 앉아 있었고 르웰린은 향수는 입지 않았으나 로브는 걸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웅이 신성력의 향을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래도 같은 선택을 했을지, 그 사건을 떠올릴 때면 르웰린은 문득 충동의 한계에 대해 궁금해지곤 한다.

영웅은 강아지에게 힐링을 쓰고 있었다.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그러고 나서 다시금 채운 마나를 전부 소진할 때까지 사용하였으니 쏟아부었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골절에는 뼈를 맞추고 부목을 대어야지, 힐링은 별 소용이 없었다. 영웅은 그것을 모르는 듯했다. 그쯤 힘을 썼으면 왜 낫지 않는지 알아볼 법도 혹은 다른 방법을 찾을 법도 한데 영웅은 묵묵히 힐링만을 썼다.

꼭 눈만 가리면 다 숨었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 같다고 르웰린은 생각했다. 혹은 무기력하게 늘어진 채 정형행동만을 반복하는 새 같다고도.

원인을 때로는 집요하기까지 한 태도로 추적하여 근본부터 제거하는 르웰린의 성향과는 영 상성이 맞지 않았다. 평행선을 달리는 이를 마주했을 때의 미묘한 불쾌감이 뒤를 따른다. 현재는, 물론 중요하다. 단지, 과거로부터 배우지 않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고서는 그토록 소중한 현재도 오래 이어가지는 못할 뿐이다. 그러나 비웃고 싶지는 않았다. 비난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는 사람이었다. 에린은 그를 두고 흘러갔다. 에린이 흐르는 시내라면 영웅은 시냇가에 놓인 바위 혹은 땅이 물로 쓸려나가지 않도록 심겨진 나무 같은 것이었다. 그물을 던진들 어차피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것이라면, 모든 것이 있는 힘껏 움켜쥐어봤자 손아귀 사이로 하릴없이 흘러나가기만 하는 모래알과 같은 것이라면, 단지 현재를 즐기는 것 외에 어떤 선택지가 있으랴. 영웅에게 시간은 연속성이 있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니었다. 분절되어 흩어진 파편과도 같은 것이었다. 주워 모은들 날카로운 모서리에 손이 베일 따름이었다. 누군가는 온전한 그릇을 들고 시작하는데 누군가는 깨진 파편만을 들고 시작한다.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나, 특히 더 편을 들어주지 않는 누군가는 있는 듯했다.

그러니 그대로 두면 며칠이고 그럴 기세라 잠시 도움을 주기로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냥 지나쳐도 되었을 일을 정체를 들킬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하였다는 사실을 사건에 얹는다면, 그것이 전환점이었다는 사실이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날지도 모른다. 관찰자가 프레임 안으로 진입하는 어떤 순간의.

"그 부상은 힐링으로 치료할 수 없어요."

"그래? 그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데?"

영웅은 갑자기 나타난, 후드를 눌러쓴 수상한 사람의 존재에도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고 사연을 궁금해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문제의 해결 방안을 궁금해 했을 뿐이다. 해하려는 의도 따위는 손쉽게 파훼할 만큼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에린의 영웅씩이나 되는 존재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따위를 묻지 않아서였는지도. 지금에 와서는 높은 확률로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뼈를 맞추고 부목을 대어야 하죠. 지금의 경우는 뼈가 크게 어긋난 것 같진 않으니 부목을 대고 붕대만 감아주면 될 것 같아요. 혹시 붕대가 있으신가요?"

"아니, 없어. 하지만 잠시 기다려봐. 금방 사 올 테니까."

르웰린이 근처의 가로수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단검으로 다듬는 동안 영웅은 힐러집에서 붕대를 구해 왔다. 르웰린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많은 전투를 치르는 사람이 붕대조차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니. 원래 그토록 무모한지, 아니면 여분의 생명이 있으니 굳이 상처를 치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러나 르웰린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르웰린은 그저, 묵묵히 부목을 깎아 강아지의 다리에 대고 붕대를 감으면 그만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영웅이 말했다.

"잘 아네. 좀 해봤나봐?"

"견습 사제라서요."

"아하, 타라에서 수련하는 걸 보면 끗발 좀 날리는 모양이네? 그럼 법황청에도 데려다줄 수 있겠지? 거기 추기경이 이런 거 좋아한다며."

아, 이런 거란 거, 개를 말하는 게 아니고 주워다 기르는 일 말이야. 영웅은 그렇게 덧붙였다. 의외의 상냥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르웰린은 후드 너머로 영웅을 올려다보는 대신 담담히 고개를 숙이며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잘 가. 고마웠어."

영웅은 어떠한 미련도 질문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르웰린은 운무 속으로 사라지는 영웅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오랜 시간의 관찰보다도 오늘의 이 짧은 만남으로 알게 된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짧은 만남보다는 알반으로서 함께 움직였던 시간들로 인해 알게 된 것이 너무나, 많다고 느꼈다. 막상 문자로 나열하면 얼마 되지 않는 양 같은데 보고서에 쓰지 못하거나 써서는 안 될 것들을 포함하니 지나치게 멀리 오게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깊은 진흙 속에 빠진 듯했다. 물들어 되돌릴 수 없는 부츠는 버려지거나 혹은 차마 버리지 못한다면 계속 문간에 놓여 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르웰린은 다시 신을 수 없는 것과 다시 신어서는 안 되는 것의 차이를 기민하게 구분했다.

르웰린은 천칭 앞에 선다. 어떤 경우에라도 천칭은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기울어진 땅 위에 천칭이 놓여 있다면 그 위에서 살아가는 영웅은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그는 어째서 천칭을 엎어버리고 싶어 하지 않는가? 태생이 그러하기에? 그렇다기에 그는 너무나 제멋대로다. 이 세상을 사랑하기에? 그렇다기에 그는 사랑하는 만큼 증오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흥밋거리가 남아서? 그렇다기에 그는 지나치게 지루해 보인다.

르웰린은 아무도 몰래 성물을 들고 나갔던, 공식적인 첫 만남에서의 영웅의 반응을 기억한다. 두 눈을 빤히 바라보던 영웅은 말했었다.

"본 적이 있던가?"

"아뇨, 저는 당신을 처음 뵙는데요."

그리고 돌아온 어느 여름에 게이트의 마구간 앞에서 말을 지키는 늠름한 개의 모습을 보던 영웅, 카시아 스피카가 말한다.

"그때 그 향. 너였구나."

"네, 사실은 처음이 아니었어요. 화나셨나요?"

어쩌면 그 순간 르웰린은 조각가가 아니라 옆에서 같이 깎여나가는 조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주연을 맡을 수는 없는 조그마한 부조나 장식 정도일지라도.

"아니."

"그러실 줄 알았어요."

르웰린이 처음 에린의 영웅을 두 눈에 새긴 것은 마구간에 깔린 짚 위로 올라서는 장성한 성견의 앞에서였다. 양가감정의 존재가 의아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를 스쳐 가던 옅은 불쾌감이, 그와는 상성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영웅에게 천칭을 기울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리하여 알반의 기사는 운을 떼었다. 영웅이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 그렇게.

"물론, 사과도 없이 그냥 넘어갈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지만요."

세상을 덮은 흰 눈을 그리는 듯한 백발에 비둘기의 피 같은 붉은 눈. 마음에도 톤이 있다. 영웅의 머리카락은 온 세상을 덮어오는 눈보라와도 같은 그런 색이었다. 그 아래로 떨어지는 굳건한 표정과 담담한 걸음걸이는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집행자로서의 의지를 상징하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새장을 끌고 다니는 새처럼 지치고 무거운, 그래서 독이 오른 영혼을. 그러나 독한 말을 쏟아낼 수 있는 부리가, 때로는 진실된 독조차도 뿌릴 수 있는 그 부리가 오늘은 얌전했다. 돌아오는 답에 르웰린이 눈을 살풋 접어 웃는다.

"네, 기꺼이요."

세상사에는 수많은 갈래가 있다. 어쩌면 그는 변덕을 부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해가 되지 않을 충동이어도 몸을 맡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이제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르웰린은, 여전히 탐구하기로 한다.

그 미지를,

카시아 스피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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