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라이미라크의 가호가 내리는 날에 다시 만나요

C6 신의 기사단, C7 아포칼립스 스포일러

2023. 08. 21 최초 작성

2023. 12. 14 포스타입에서 옮김

※ 나나새 님께 드리는 글입니다.

마비노기 팬픽션

밀레시안과 르웰린의 연정에 기반한 관계

C6 신의 기사단, C7 아포칼립스 스포일러

르웰린은 자신의 첫 데이트가 설렐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손을 잡을 때 수줍을 것이라고도, 처음 하는 키스가 두근거릴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의무 같으리라.

그러나 지금 그는 세차게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데이트 상대를 기다리고 있다.

말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부담스럽지 않은 캐주얼한 정장, 그리고 정원에서 기른 프리지어 한 다발. 산뜻한 주홍색이 꼭 들뜬 제 마음과 닮아 향을 핑계로 가만히 입술을 묻어 보았다. 정성 들여 기른 보람이 있게끔 향이 좋다. 당신의 마음에도 닿을 수 있다면, 그래서 고개를 기울인다면 싱그러운 향 위에서 두 입술이 포개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꼭 직접 닿는 것이 아니라도 좋았다. 같은 마음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바쁘다는 이유로 미루어 다른 이의 손을 탔던 정원이 다시 주인을 맞이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결코 짧지 않았던 혼란과 방황의 시간 속에서 그는 다시금 정원 가위를 들었다. 잎이며 가지를 다듬어 정갈한 모양을 만들면 제 마음속에서 삐죽 튀어나온 낯선 감정도 가라앉을 것처럼, 그렇게.

그다지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정원을 돌보는 동안 의무, 책임, 그런 것들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시도 잊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위를 자꾸 덮으려는 무의식의 시도 때문에, 그 자신의 갈등 때문에, 그는 늘 속이 복잡했다.

한동안 온실의 유향나무를 돌봤다. 진액을 받아 유향을 만드는 동안 기도를 올렸다. 그러면 신을 위해 온전히 삶을 바치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러나 꽃은 피고, 또 피었다. 봄에는 봄꽃이 피고 여름에는 여름꽃이 피더니 가을에는 가을꽃이 피고 심지어 겨울에도 꽃은 피어났다. 그게 제일 나빴다. 그가 돌보는 유향나무의 지근거리에서 피어난 그 꽃들이. 지긋지긋한 꽃.

어디서나 당신이 보였다. 당신을 닮은 온갖 향이 그를 둘러싸는 동안 외면하고 도망치기 바빴던 그는, 어느 순간 저항하기를 그만뒀다. 뛰어들기를 택했다. 오롯한 자신의 의지였다.

그러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널뛰던 마음도, 흔들리던 믿음도. 얼굴에 미소가 돌아오고 손끝의 유향이 지워졌다. 수많은 꽃들이 그의 정원에서 새로이 피어났다.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은 모든 꽃들.

프리지어는 그중에서도 당신에게 가장 처음 선물하고자 결심한 꽃이었다.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설령 한때 그를 괴롭게 만들었더라도 그조차 행복했다고. 지금도 늘 행복하다고. 그런 기분을 전하고 싶어서...

르웰린은 포장지가 내는 바스락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애써 싱그럽게 모셔 온 꽃을 망치고 싶지는 않다. 과하게 들어간 힘을 빼며 그가 시계를 보았다. 오실 때가 된 듯한데, 좀처럼 늦지 않으시는 분이니.

밀려드는 재앙 속에서 경중을 가리고 순위를 정하는 일은 선량한 영웅에게는 꽤 버거운 것이었다. 제 손끝에 수많은 목숨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두려워하는 기색만 보아도 그러했다. 떨리는 손은 무기를 꽉 쥐어 가릴 수 있어도 창백한 얼굴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어떤 것은 영영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어떤 것은 익숙해지는 데 끔찍한 대가를 치르는 법이고. 영웅이 위태로운 심장을 안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비틀대며 통과하는 동안 곁에 있던 동료 중 하나인 르웰린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당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는 캐묻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주고 싶지도 않았고, 혹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굳혀 훌쩍 떠나버릴까 두렵기도 했다. 그리하여 상세한 과거사는 알 수 없었지만, 누구를 먼저 구하느냐 하는 문제는 공리주의 따위를 다루는 교과서에서나 봤던 사람이었으리라는 것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르웰린은 급박한 상황에서 문제들을 분류하는 방법을 일러주어야 했다. 희망적인 것은, 영웅이 검은색 분류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대가가 영웅 자신에게 검은색 딱지가 붙는 것이라도 말이다. 소생하기 위해 얼마나 어려운 시간을 걸어왔던가.

다행히 지금은 꽤 긴 평화가 지속되고 있다. 영웅 자신의 목숨을 비롯하여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다. 보름을 기본 단위로 짜이는 일정도 그럭저럭 여유로워서 던전과 던전 사이에 첫 데이트를 슬쩍 끼워 넣을 정도는 되었다. 물론 시간은 넉넉하게 잡았다. 아무리 영웅이라도 사하긴 비린내와 배 쥐의 털을 달고 데이트를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배려할 충분한 지식과 지혜가 그에게는 있었으니까.

그럼, 혹시 만남을 준비하느라 조금 늦어지시는 걸까? 르웰린은 외람되지만 귀엽다고 생각했다.

3분, 눈 몇 번 깜빡이면 흘러갈 분침의 작은 움직임이 오후의 햇살처럼 한없이 늘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땅을 두드리듯 갈비뼈를 두드리는 심장을 안고서 연인은 그늘에서 나와 빛을 마주할 결심을 한다. 빛 속에서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사랑이 눈부실 것을 알아서, 그도 당신을 자신의 이름 같은 인상으로 마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무기점의 그늘을 떠나 광장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사랑의 순간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소리와 함께 그 충돌이 일어났다.

"르, 르웰린! 정말 미안해, 괜찮아?"

"괜찮습니다. 평..."

엉망으로 흐트러진 꽃 위에서 욱신거리는 팔을 갈무리하며 자세를 바로 한 그가 답하다 말고 입 속으로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덕분에 평생 기억에 남을 첫 데이트가 될 것 같으니까요,

같은 말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테니까. 첫 데이트부터 평생이니 결혼이니 하는 얘기를 꺼내는 남자는 최악이다.

"평?"

"...평지기도 하고요. 한 번은 경사진 곳을 지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토끼 때문에 알터가 깜짝 놀라 발을 헛디뎌서 같이 뒤엉킨 채로 데굴데굴 구른 적이 있거든요. 어찌나 생채기가 많이 났던지 아벨린 님이 저희가 주먹다짐이라도 한 줄 알고 치료 후에 엄하게 혼내셨었죠."

그에 비하면 정말 별것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이는 르웰린은 속과 달리 태연해 보였다. 그러나 누구나 당황하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라. 숨기지 못했어도 너무 놀라서 알아보지 못하신 듯하니 상관은 없겠지만.

영웅은 저도 모르게 웃으려다 처참한 현장이 눈에 띄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이 되어서는 얼른 르웰린의 위에서 일어나 손을 내민다.

"일어날 수 있겠어?"

"그럼요. 이 정도로 문제가 생기면 기사의 이름이 울죠."

보는 눈이 많아 귓가에 작게 속삭인 그가 생긋 웃으며 손을 잡았다. 그대로 일어나려다 따끔한 통증이 일어 손을 뒤집어 보니 돌바닥을 짚을 때 쓸렸는지 손바닥에 난 상처가 눈에 띈다. 구급낭을 꺼내는데 마침 당신도 같은 것을 꺼내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미소가 피었다. 절로 웃게 되는 것, 역시 그런 게 사랑인 걸까.

르웰린은 당신에게 치료를 맡기며 뒤늦은 인사를 한다. 소독약이 스치는 상처가 따끔할 텐데도 미소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무튼, 좋은 오후입니다, 로테노아 님."

"다 됐다. 움직이는 데 불편하진 않아?"

"멀쩡하네요. 감사합니다."

붕대까지 맬 상처는 아니었지만 손에 난 상처는 가벼운 것이라도 무기를 쥘 때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일단 붕대로 처치하는 것이 표준 절차다. 기사단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익숙해진 당신도 자연히 그렇게 해 두었다.

"아냐, 내 잘못인걸. 그런데 피가 잘 멎질 않네."

소매가 비칠 듯 말 듯 얇은 원단으로 된 셔츠라 팔꿈치의 붉게 달아오른 찰과상이 유독 눈에 띄었다. 손을 치료하기 전부터 이미 봐 두었던 터여서 유심히 살펴보던 당신이 앞섶으로 손을 뻗으며 말한다.

"안 되겠다. 벗어 봐."

"네? 여, 여기서요?"

당황한 르웰린이 다치지 않은 손을 끼워 넣어 당신을 막았다.

이곳은 광장 바로 앞이다.

"아."

상처에 정신이 팔려 주변 상황도 잊고 있었다. 광장을 등지고 있던 탓도 있으리라. 르웰린이 말을 더듬는 건 왕성 연회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다. 얼마나 놀랐으면. 깨달음 뒤에 몰려오는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당신을 달래듯 그가 방향을 제시했다.

"힐러의 집으로 갈까요?"

"...그러자."

르웰린은 남은 꽃의 잔해를 수습하여 한 손에 들고는 당신 곁에 섰다. 민망함을 덜도록 화제를 돌리려는 모양인지 사근사근한 어조가 흘러들어온다.

"그나저나 룬다 던전에 다녀오시는 것 아니었나요? 코일 던전 쪽에서 오신 것 같던데... 음, 로테노아 님? 왜 자꾸 옆으로 가시는 거죠?"

"예상보다 빨리 끝났거든. 그래서... 그야, 마차랑 말이 자꾸 오니까?"

오늘의 일정이 그랬다. 룬다 던전을 소탕하고 데이트를 즐긴 뒤 한밤중에 코일 던전으로 향하는. 하지만 막상 룬다 던전의 여신상을 통과해 나오니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아 아예 코일 던전까지 끝낼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러면 밤새 르웰린과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세피로트가 불러낸 푸른 게 한 무리가 끈질기게 달라붙는 바람에 밴 비린내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허둥지둥 달려오다 사고를 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냥 조금 늦고 말 것을. 미안한 마음에 시무룩해진 당신이 사과의 말을 중얼거린다. 르웰린은 언제나처럼 괜찮다고 말했다.

반면 당신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길 쪽으로 서려던 르웰린은 당신이 주춤대며 옆으로 밀려나듯 움직이는 통에 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결국 이유를 묻고 나서야 당신이 저를 에스코트하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그 정도는 알아서 피할 수 있다고 말하려다 그냥 길 안쪽에 서서 걷기 시작한다. 다친 상태에서 주장해 봐야 큰 의미는 없을 테고, 무엇보다 당신이 너무 미안해하시니까.

게다가 이런 위치라면 손을 잡을 수도 있어서 좋았다. 다친 손이 왼손이라 당신의 오른편에 서서는 어려웠을 터다. 살며시 꽃을 옮기는데 그 사이로 가늘고 긴 손이 뻗어왔다.

"주려던 것 아니었어?"

"그렇긴 합니다만, 망가졌잖아요."

"망가지지 않았어. 오히려 향은 더 진해졌는걸."

꽃을 무르는 르웰린에게서 기어이 향을 가져온 당신이 말하자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귀끝이 조금 붉어진 듯도 하다.

나란히 걷는 둘의 손끝이 이따금 맞닿는다. 사람들을 피하느라 너무 가까이 붙어서 자꾸 닿았다 떨어지는 손끝이 꼭 입술처럼 느껴졌다. 손을 잡는 데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던 르웰린은 힐러의 집에 닿기 직전에야 간신히 손끝을 걸어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손가락이 맞물리며 따뜻한 손바닥이 느껴진다. 움찔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물리자 놓치지 않도록 따라오며 단단히 얽는 움직임이 좋았다. 기다리고 계셨던 걸까. 하루가 멀다 하고 꽃이며 초대권을 들고 찾아가던 자신이니까, 의아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이 미숙한 건 아무리 그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총을 처음 잡았을 때의 제 어설픈 모습을 보면 분명 당신도 웃게 되실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러니 언젠가는 지금의 모습을 떠올리며 함께 웃게 되지 않을까.

그래도 되도록이면 일찍 용기를 낼 것을 그랬다. 이제 정말 코앞이라 놓지 않을 수가─

"...음, 로테노아 님?"

"응?"

에린에서 한 번도 연애를 하지 않았던 영웅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들키면 당신이 귀찮아질까 걱정하던 차였는데, 계속 잡고 있어도 되느냐고 묻는 것보다 화단을 돌보던 아그네스가 이쪽을 발견하는 것이 빨랐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차피 들킨 것 이 온기를 놓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그가 깍지 낀 손을 단단히 붙들며 말한다. 돌아오는 당신의 미소가 아름다웠다.

"어서 오세요. 아프신 데가 있으신가요? 아니면 포션이라도...?"

"처치실 하나만 잠깐 빌리고 싶어."

순수한 인상의 힐러도 당황했는지 말끝이 늘어졌다. 뒤늦게 르웰린의 상처를 발견하고서 상태가 보기보다 심하다 걱정스레 말하며 황급히 처치실을 열고 흙 묻은 장갑을 벗어 내려놓는다. 손을 깨끗이 씻은 아그네스가 트레이에 소독약이며 거즈, 반창고 따위의 드레싱 용품을 챙겨 오더니 꼼꼼한 힐러답게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확인까지 마치고 나서야 자리를 비워주었다.

당신이 손을 씻고 오는 동안 르웰린은 침상에 앉아 처치실 안을 살핀다. 여느 처치실이 다 그렇듯 퍽 냉막한 공기가 감도는데 연두색과 청록색이 교차하는 체크무늬 천과 작은 화분들을 놓아 조금이라도 따뜻한 분위기로 바꾸려 한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집결지 근처에서 부상을 당해 방문했던 단원들에게서 좋은 평을 듣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차근차근 내부를 훑어보며 상의를 벗는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피가 방울져 흐르는 느낌이 났으니 보기는 해야 할 터다. 기사로 살다 보면 상처 앞에 성별은 큰 의미가 없어지는 법이라 딱히 부끄럽지는 않았다. 슬쩍 팔을 돌려 보니 멍이 든 오른쪽 팔꿈치 아래 긁히고 쓸린 상처가 보인다. 돌바닥 위에 넘어진지라 은근히 깊게 팬 부분도 있었다. 하필 여름이라고 얇은 옷을 입은 것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이런, 노아 님이 걱정하시겠는걸.

"으음."

"미안, 너무 세게 눌렀지?"

르웰린이 고개를 젓는다. 소독약이 지나가니 당연히 따끔하기야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전혀 아니었으니까. 그저...

"아까 기사의 이름이 운다고 하지 말 걸 그랬나 봐요."

그렇게 많이 아픈가? 사실 어디 부러진 거 아니야? 당신의 눈이 크게 뜨이자 그가 얼른 걱정을 물리칠 말을 덧붙였다.

"조금, 어리광 부리고 싶어져서요."

"그럼 하면 되지. 대신 붕대까지 다 감고 나서야."

살그머니 끌어안으려던 손이 단호한 말에 밀려났다. 불퉁해진 입술에도 당신은 봐주는 법이 없다. 아무리 좋아해도, 아무리 닿고 싶어도 치료가 먼저니까. 아무리 튼튼해 보이는 다난이라도 감염되는 건 금방이더라.

차마 반박하지는 못하지만 대놓고 불만 어린 얼굴이 제법 귀엽다. 이럴 때면 어리긴 어리구나 싶어져서 조금 웃음도 나고. 꿋꿋이 붕대를 다 감고 끝났다는 의미로 팔을 활짝 벌리자 르웰린이 꾸물꾸물 품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렇게나 어리게만 보였는데 자신도 기사라고 주장하는 듯 웅크리지 않으면 품에 다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보니 신기하기만 하다. ...한편으로는 살짝 두근거리기도 하고.

곧 단단한 두 팔이 당신을 마주 끌어안았다. 옅은 한숨과 부비적대는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간질거림이 인다.

"로테노아 님."

"응."

그냥, 좋아서요. 스치듯 속삭인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 손끝을 넘어 손바닥까지 타고 내려온 입술 위로 빛나는 보석안이 언뜻 비친다. 손가락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휘는 눈매가 아름답다고 생각할 무렵, 르웰린은 묘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잡은 손을 냉큼 머리 위에 올리며 말했다.

"단장님을 쓰다듬어주실 때마다 조금 부러웠거든요."

"...전혀 몰랐어."

이제 아셨으니 저도 쓰다듬어주세요. 눈을 내리감은 그는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고양이 같다. 자연히 느릿느릿 정성을 들여 쓰다듬게 되었다. 잘 넘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좀 더 어린 인상으로 변해 가는 동안 이마를 지나 콧날로 미끄러지는 엄지 아래서 손이 뺨을 받친다.

기대 오는 온기 위로 좋은 향이 풍겼다. 어쩐지 아까 선물 받은 프리지어의 향을 닮았다. 향수는 아니고, 떨어져 으깨진 꽃의 향이 머리카락에 닿았을 것 같지도 않은데. 신기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자 아래에서 손끝이 올라와 입술을 막았다.

"아직 키스는 이르잖아요."

...하려고 한 적도 없어! 말문이 막힌 가운데서도 표정은 훌륭하게 억울함을 표현해냈다. 당신의 얼굴을 본 그가 키득거리며 웃더니 손을 떼곤 중얼거린다.

"농담이에요."

그러고는 당신의 목을 감아 가까이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그냥, 제가 먼저 하고 싶었거든요."

한참 만에 입술을 뗀 르웰린이 붉어진 귀를 매만지다 당신의 물음에 고개를 든다.

"...혹시 체리 꼭지 같은 거 묶어?"

"해본 적은 없지만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톡톡, 르웰린이 제 머리카락을 건드리자 당신은 반사적으로 손을 얹었다. 키스, 잘했으니까 쓰다듬어 달라고? 그가 작게 웃으며 몸을 돌려세운다.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셨어요."

아. 길고 곧은, 그리고 굳은살이 느껴지는 손끝이 뒤통수를 파고들던 감각이 떠올라 마른세수를 한다.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타래를 땋느라 드러난 귀 끝이 붉은 모양이다. 집중하는 듯 조용해진 르웰린은 남은 꽃송이 중 가장 온전한 것만을 골라 머리를 땋는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고마워, 이제 제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 속에서 당신이 인사한다.

"있잖아요, 로테노아 님."

"응."

"저 옷이 없어요. 한 벌 빌려주실 수 있나요?"

땋은 머리를 어깨 앞으로 넘긴 그가 뒤에서 당신을 껴안으며 물었다. 등으로 느껴지는 온기에 새삼 상의를 벗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래도 좋은 문제,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이었는데. 맨 가슴만 봤나, 기사단과 지내다 보면 정확히 어딘지 모를 하반신의 부상을 찾느라 바지를 잘라내는 일쯤이야 일상다반사다.

여관방이라도 들 수 있으면 감지덕지지 보통은 한 막사나 참호에서 뒤엉켜 자는 게 일반적이었고. 신시엘라크 저택은 보급 기지 역할도 수행하고 있어서 그곳에서 숙박한 적도 많았고, 반대로 당신의 집에서 그가 자고 간 적도 많았다. 그만큼 한 공간에 머무는 건 익숙한데도, 허구한 날 입장권이며 표를 가져와서 이름만 첫 데이트일 뿐 이미 할 건 다 했는데도, 왠지 모르게…

"데이트는 라이미라크의 가호가 내리는 날에 다시 하는 것으로 하고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느슨한 채근이 이어졌다.

"그래, 그러자."

이미 답을 아는 목소리로 당신이 덧붙인다.

"기껏 땋아 준 머리가 엉망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다시 땋아드리면 되죠. 언제라도요, 노아 님."

조금만 걸어가면 의상실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채, 둘은 손을 맞잡았다. 다시 만날 즈음에는 이미 가호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이로 깊어져 있겠지만, 그럼에도 약조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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