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 환락

신부님, 있죠. 이 세상에는 악마가 있대요. 저는 본 적 있어요. 악마는요. 새까맣지 않았어요. 오히려 새하얗고… 또 붉었어요. 마치 불꽃의 색처럼요. 악마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그 앞에서 사람들은 황홀하다는 듯이 제 삶을 바쳤어요. 사람들이 전부 죽자, 악마는 홀연히 사라져버렸어요. 거기에는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재뿐이었죠.

 

歡樂

 

레온은 갑작스럽게 귓속말하는 어린아이를 보고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 마을에서도 가장 책을 좋아해서 다 크면 도시로 나가서 멋진 소설가가 될 거라고 장담하던 아이였다. 다정한 신부님은 주머니에 있는 사탕을 어린 손에 꼭 쥐여주고 멋진 꿈이라며 칭찬해주었다.

힝…, 진짜 봤는데…. 억울하다는 듯이 볼을 부풀리면서도 손에 들어온 달콤한 맛에 꺄르르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손목시계를 흘겨보던 레온은 나무판자와 공구를 들고 뒤뜰로 향했다.

본래 귀족이었던 미소노 레온이 수도에 있던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 마을의 작은 성당으로 내려온 지 벌써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성당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낡고 건물에 관리할 사람은 레온 뿐이라 틈틈이 직접 손 보지 않으면 어디 하나가 망가져 있기에 십상이었다.

오늘 아침에 확인했더니 성당 뒤편에 있는 창고에 작은 구멍이 생겨 그 틈으로 길고양이가 들어왔었다. 새끼를 낳기 위해 잠시 추위를 피할 셈이었던 것 같았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나무판으로 막아두고, 고양이는 다른 상자를 만들어 주자.

무성하게 자란 식물이 밟히지 않게 조심스럽게 피해서 창고 문을 열자 야옹, 하는 소리가 울렸다. 보송보송한 하얀 털이 있는 아기고양이가 열린 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레온을 보며 뺨을 비볐다. 귀여운 모습에 레온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어미 고양이는? 고양이를 확인하던 레온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어미 고양이는 어린아이를 안은 채로 고롱거리고 있었다.

고양이만큼이나 하얀 머리를 가진 아이는 잔뜩 해진 옷을 입고, 신발도 없이 걸어 다녔는지 상처투성이 발에서 피와 진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기? 괜찮니? 갑작스럽게 들리는 말소리에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던 아이는 깜짝 놀라 일어나 레온을 경계했다.

저기… 괜찮아, 해치지 않아. 나는 이 성당의 신부인 미소노 레온이란다. 저기… 이름이 뭐니? 아니, 춥진 않니? 아플 거 같은데, 괜찮아? 배고프지는 않아? 빠르게 쏟아내는 레온의 말에 겁먹은 것처럼 몸을 구석으로 숨겼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레온은 주머니를 뒤져 사탕을 꺼냈다.

사탕을 뜯어 반으로 쪼개 한쪽을 레온이 먹고야 아이는 입에 사탕을 집어넣었다. 새콤한 레몬맛이었다.

…지낼 곳이 없다면 성당에서 지낼래?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된단다. 거부감이 든다면 오늘 밤만이라도 어때?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어. 따뜻한 밥도 줄게. 배고프지 않아?

아이는 아직도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음… 그러면 성당 문을 열어둘 테니까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렴. 이 앞을 쭉 나오다 보면 나오는 십자가가 걸린 건물이란다. 안으로 들어와서 쭉 들어오면 부엌이 있어. 거기에 먹을 만한 걸 내어놓을 테니까, 배가 고프면 들어와서 먹으렴. 알겠지?

레온은 창고 문을 닫고 나가 벽면에 나무판자를 살짝 걸쳐두고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아침에 먹다 남은 빵이랑 우유가….

테이블 위에 이것저것 늘여놓던 레온은 혹시나 아이가 헤매지 않게 불을 켜놓고 다른 방으로 몸을 숨겼다.

의자에 앉아 살짝 졸던 레온은 시계를 슬쩍 보였다. 새벽 3시,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긴 신부복을 나풀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아이가 먹었을까, 걱정과 함께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이는 입가에 빵부스러기를 잔뜩 묻힌 채로 잠들어 있었다.

배가 부르니 조금 경계가 풀렸는지 아주 푹 잠든 것 같았다. 레온은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제 침실로 데리고 갔다. 침대에 눕혀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고는 자신도 의자에 앉아 아이의 배를 토닥거려주다가 작게 자장가도 불러주었다.

이 아이가 행복한 꿈을 꾸며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

 

나유타가 성당에 들어온 지도 벌써 삼 일째였다. 도망갈 거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다르게 아이는 계속 머물고 있었다. 아이에게 나이며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를 물었지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름을 묻는 말에만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하게 나유타, 라고 말했다.

나유타를 깨끗하게 씻기고 머리카락을 말리자 보송보송해진 머리카락이 마치 고양이 귀처럼 뿅 하고 부풀었다. 몸집이 작아 마을 아이들이 어릴 때 입던 원피스를 입히자 조금 크기는 했지만 잘 맞았다.

하하, 웃던 레온은 나유타의 손을 이끌고 성당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요 며칠 동안 동화책을 읽어줘도 고개를 저었고,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장난감도 소용이 없었다. 오늘은… 음….

레온은 머쓱하게 웃으며 기타를 들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찬송가가 아닌 노래는 오랜만이었다. 지금은 마을 아이들을 모아두고 찬송가를 부를 때 피아노를 치지만, 한참 신학교를 다닐 때 들판에 누워 가끔 기타를 치고는 했다. 오랜 세월을 추억하며, 공백에 삐걱거리지만 부드러운 음률에 맞춰 조심스럽게 노래했다.

나유타의 붉은 눈이 음악을 접하고 나서야 반짝거렸다. 어? 이게 먹히네? 속으로 생각하던 레온은 나유타에게 같이 부르자 권했다. 나유타는 가만히 있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음을 내뱉었다. 그것에 홀린 듯이 레온은 손가락도 멈춘 채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노랫소리였다.

몇 소절을 더 부르던 나유타는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

레온도 이제 늦었으니, 내일 더 하자며 마무리 지어버렸다.

밤이 깊어 잠들어야 하는데, 레온은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옆에 누워있는 나유타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떻게 이런 작은 몸에서 이런 소리가 날 수 있을까와 함께 나유타의 노래가 머릿속을 헤매었다. 복잡한 생각을 다 정리하지도 못한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아주 깊은 잠에.

 

*

 

꿈을 꾸었다. 하얀 불꽃이 성당 전체에 퍼져 손 쓸 도리도 없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레온은 간만에 악몽을 꿨다며, 잠에서 미처 다 깨기도 전에 책상으로 손을 쭉 뻗어 로사리오를 붙잡았다. 불안감이 조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일어나 침대를 살폈는데, 나유타가 이상했다. 아니, 눈이 이상한 걸까. 제 허벅지까지도 오지 않던 아이가, 하룻밤 사이에 허리까지 큰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아이는 원래 하루가 다르게 크는 법이라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레온이 당황한 사이에 눈을 비비며 일어난 나유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레온도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나유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

 

갑자기 훌쩍 커버린 나유타는 때때로 아무도 없는 기도실에서 홀로 노래를 불렀다. 늘어져 있는 나무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아, 마음껏 노래를 불렀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던 할아버지는 때때로 지팡이를 짚고 성당까지 들어와 기도실 바로 밖에서 그것을 듣고는 했다.

우연히 기도하러 왔다가, 들은 모양이었다.

겨울이 가까워지며 통 기운이 없던 어르신이었는데, 이상하리만큼 나유타의 노랫소리를 좋아했다. 레온에게 나유타에 관해 물어보다가 직접 만나기를 원했지만, 아이가 낯을 많이 가린다는 말에,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유타의 노래를 들으니 아픈 것도 덜하고 몸이 좋아지는 느낌이라 말했다.

레온은 할아버지와 함께 문밖에서 그것을 듣기도 했다.

나유타는 하루가 다르게 부쩍 커갔다. 어제는 허리춤에 정수리가 닿던 아이가, 오늘은 가슴께까지 오고, 내일은 레온과 시선이 비슷해질지도….

갑작스러운 성장에 레온은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처음 나유타가 자라기 시작했던 날의 위화감을 끊임없이 좇으며….

이미 머릿속은 나유타로 가득 차 있었다.

시시때때로 나유타의 공허한 목소리에 맞춰 기타를 연주하고 싶다는 작은 마음이었다.

나유타가 돌연히 노래를 그만둔 것은 어느 겨울날이었다.

 

*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날이었다. 나유타는 이제… 레온과 비슷한 키가 되었다. 아니, 그렇게 된 지 한참 되었다. 20대 중반의 풋풋한 어린 청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운….

조금은 무료하던 일상에 나유타가 찾아와, 색채를 더해갔다.

제 신분만 아니었다면, 나유타를 제 호적에 넣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레온은 오늘도 성당에 올 어르신을 위해 미끄러지지 않게 눈을 쓸어내고 있었다.

눈이 많이 내렸으니 오지 않는 게 어떠냐 말씀드렸지만, 어르신의 완고한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유타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노래를 찾아 헤맸다.

레온이 삽을 정리하는 동안 한참 노래가 들리다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소리가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레온이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 앞에는 의자에서 쓰러진 할아버지와 나유타가 서 있었다. 아침에 봤던 것보다 더 앳된 모습으로.

바로 뛰어가 할아버지를 살폈다. 손목을 아무리 만져도 맥이 뛰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무언가에 현혹된 것처럼 눈을 감을 새도 없이 이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묵주를 꺼내 들고 짧은 기도를 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관에 할아버지를 옮기고, 조촐한 장례식이 시작됐다. 마을 사람들이 한 대 모여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매끈한 나무 안에서 편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짧은 작별 인사가 끝나고 관이 닫히자 아이들과 부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남편들은 관을 묻기 위해 삽을 들었다. 아무도 없는 빈 성당에 나유타가 관 뚜껑을 열고, 살짝 걸쳐 앉아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나유타는 제 손등을 할아버지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순간, 열기와 함께 관 속에는 재만 남아버렸다.

누군가 있다는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레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

 

신부님, 요즘 피곤해 보여요. 괜찮으세요?

마을 아이의 걱정에 레온은 괜찮다며 웃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피곤한 감이 있었지. 세월의 흐름 때문일까. 아니, 그렇다기에는 아직 20대 중반이고…. 요 며칠 나유타에 관해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장례식 이후 나유타는 노래는커녕,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돌연, 나유타의 음색에 취해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나유타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사막 속에 버려진 부랑자처럼, 나유타에 대한 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욕망에 통째로 삼켜진 느낌이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것을 이겨내려고 몇 번이나 기도를 중얼거리다가 피아노 앞에 앉아 되는대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입을 놀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피아노를 쾅 내리치며 고개를 숙였다. 보고 싶어졌다.

나유타….

 

*

 

미소노 레온 신부의 모습은 병자와 같았다. 윤이 흐르던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하게 갈라지고, 눈 밑은 퀭하니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사람처럼 메말랐다. 수시로 올라오는 토기에 물 한 잔 마음껏 마시지 못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기도를 읊다가 쓰러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옆 마을에서 의사가 한두 번 정도 찾아왔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햇빛을 받지 못한 식물처럼, 그저 날마다 말라갈 뿐이었다.

레온은 곁에 있던 나유타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이게 최후라면, 적어도 마지막은 나유타의 자장가를 듣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나유타는 기타를 품에 안아 들고 레온을 찾아왔다.

침대 모서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이야기 속의 그 악마는 사실….

…이제는 악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냥… 나유타를 안아 주고 싶다고, 그런 마음뿐….

기타는 현이 거의 삭아 아슬아슬하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짧고 긴 순간이었다. 반주가 멈추자 나유타의 목소리도 멈췄다.

나유타는 레온의 앞에 섰다. 가슴팍에 레온을 품고 듣는 이도 없는 자장가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가 너무나 애절해서, 레온은 아마 웃으며 잠이 들었을 것 같다.

삭막한 그림자가 레온의 얼굴을 한참이나 가리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 사라졌다. 그곳에는 재가 풀풀 쌓인 낡은 목제 악기와 조금 남아버린 온기뿐.

악마는 다른 이의 수명을 양분 삼아 커갔다. 하지만, 빼앗긴 이가 죽을 때면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악마조차 모르고 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아챘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의 목숨만이, 악마를 키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훌쩍 커버린 악마는 신부의 흔적을 좇으며 생각했다. 사랑했노라고.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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