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이안] 연주자 뜻대로
해석의 방식
서도윤은 생각했다, 이름은 곧 개체 고유의 것이며 개체와 다른 것을 구분하기 위한 표식이자 그 개체를 뜻하는 것이라고. 그의 누적된 경험 상 분명 옳은 정의였다. 실제로 인간이 태어났을 때, 반려동물을 들였을 때, 새로운 종을 발견했을 때 그에 적절한 명칭을 붙이는 것은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서도윤'을 받았던 때가 선명했다. 어리던 때, 이모에게 구함받아 이국의 땅으로 향했던 무렵, 슈테펜이라는 부름에 흠칫거리는 저를 위해 새로 건네준 이름이었다. 그것을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다소 걸렸으나 서도윤이 된 이후로 제 발작이 확실히 줄었다. 그건 마치 다시 태어난 것과 비슷해서 서도윤은 제 이름 석 자를 퍽 아꼈다. 이름의 뜻은 중요치 않았다. 서도윤이 된 후 새로 얻게 된 것들이 소중했다. 한국의 좁은 땅에서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꽤 괜찮은 크기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장이나 독일에서만큼 잘 폭발하진 않는 저 자신이라든가. 아주 깊진 않지만 친구라고 할 만한 인연 따위도.
그렇기에 독일로 돌아갔을 때―'서도윤'을 내려놓고 다시 '슈테펜 로스'를 집어들었을 때― 적응하는 초기에는 꽤 심하게 고생했었다. 환경에 적응하고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하며 많이 안정되었으나 여전히 슈테펜보단 서도윤으로 불리는 게 좋았다. 그것은 최근에도 마찬가지였기에 가끔 연락하는 이모가 "차라리 거기서도 서도윤을 쓰지 그래?"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그럴 때마다 서도윤은 거절했다.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하는 놈들이 감히 '서도윤'을 망치는 게 싫다는 이유로. 이모는 어이없다는 듯한 숨을 흘렸으나 서도윤의 고집을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서도윤에게 있어 이름은 중요했다. 이름이 바뀐다고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름에 담긴 흔적은 달라진다 여겼다. 서도윤의 이름에는 정신과 진료 기록도, 가정폭력이나 사이비 종교와 엮인 흔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소중하고, 중요했는데…….
"슈티."
그의 찬란한 빛에겐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정확히 저를 인식하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호명하는 것이었는데, 생전 불려본 적 없는 방식들이었다. 슈, 슈티, 슈테펜, 도윤, 서도윤, 슈티프…. 감히 저를 슈 같은 애칭으로 부를 사람이 없었기에 처음엔 저를 부른다는 지각조차 하지 못했다. 서도윤은 제 이름이 이렇게나 다양한 형태로 불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것에 기분이 상하는 것도 아니어서 서도윤은 아주 생경한 기분으로 뻣뻣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에게 다가갔다.
그가 나를 슈라고 부르면 나는 슈가 되는 걸까. 그가 나를 슈티라고 부른다면, 슈테펜이라고 부른다면.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이름의 무게를 아는 서도윤은 그런 것을 생각했다. 그럼 나는 몇으로 쪼개지는 걸까. 이안이 저를 스물로 쪼갠다면 저항없이 스물로 쪼개질 생각이었다. 그 눈을 보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이안이 홀로 선 독주회, 그의 손끝에 이끌려 악곡이 따라갔다. 악곡을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순간순간 파격적이라 해도 좋을 변주를 넣고 곡의 해석에 깊이를 더했다. 곡을 재정립하면서도 그 곡의 본질을 고스란히 살리는, 신기에 가까운 기교와 천재적인 감각이 음율로 화해 무대를 울렸다. 공기마저 함께 떨리고 관객들조차 감히 숨을 쉬지 못했다. 그저 오만하고 포악하기까지 한 장악력이 이 악곡에 처음 이름 붙여진 수백 년 세월을 지나 수 세대를 꿰뚫어 진동했다. 전율, 경악, 경이가 관객석을 채웠다. 쏟아지는 음의 압력에 연약한 살갗 위로 소름이 쫙 끼쳤다. 직접 듣지 않고서야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이 펼쳐졌다. 순간,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둘이나 수용할 수 있는 무대가 너무도 작아보였다. 오직 한 사람, 스포트라이트 아래의 한 사람만이 웅대하게 서 있었다.
완전히 몰입해 깊고 선명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차양을 드리운 속눈썹 아래서도 또렷했다. 활이 당겨지며 마찰하자 현이 가늘게 울었다. 그의 왼손이 움직인다.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옳다는 것처럼 어긋남 없는 음을 정확히 짚어나갔다. 음의 울림이 깊어 등줄기가 선득했다. 활을 든 오른손이 공간을 찢는 것처럼 바이올린 위를 유영한다. 스스로를 위한 지휘이자, 연주이자, 악곡을 향한 존중이었다.
내려뜬 시선이 드넓은 무대를 따라 흐르다 예고없이 올라섰다. 이안만을 비추는 강한 조명빛이 은색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겨 휘돌았다. 명확한 의지로 빛나는 눈동자. 몰입과 만족에 흠뻑 젖은 눈이 찬란했다. 그 안에 빛이 있었다. 빛이 그곳에…….
빛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본질만을 비추었다.
자각한 적 없는 세계의 법칙이 불현듯 닥쳐온 것만 같았다. 일견 제멋대로 연주하는 것 같은 이안의 변주가 파도처럼 몰아쳤다. 불규칙적이고 돌발적이며 일관적이지 않은 연주가 완벽에 가깝게 곡을 해석해 풀어냈다. 서도윤에겐 익숙한 방식이다. 더없이 익숙한 형식의―. 일순, 세계가 맞물리는 기이한 감각이 머릿속을 마비시켰다. 이안의 기억이 속삭였다. 좋은 아침, 슈. 늦었어, 도윤아. 오토가 방금 목줄 가지러 갔는걸. 슈티, 새 작품이야? 슈테펜, …이리 와. 서도윤, 핫초코에 우유 넣어달라니까. 무릎 좀 빌릴게, 슈티프. 그 모든 부름이 '저'를 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명은 그저 호명일 뿐이요,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모두 '저'임을.
명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소중한 '서도윤'과 진창이나 다름없는 '슈테펜 로스'가 같아졌다는 것과 다름없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다. 서도윤도 슈테펜 로스도 형태만 다를 뿐 사실 같다는 것이, 마치 저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받은 듯했다. 이안이 어떤 변주를 어떤 상황에 넣든, 그 곡 자체는 변하지 않은 채 존중받는 것처럼.
악곡의 끝, 환호와 함께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따라 서도윤이 기립해 박수쳤다. 수천 명이 동시에 박수치자 그것만으로도 공간이 무너지는 듯했으나, 그 모든 것을 한 몸에 받은 이안은 그저 만족스러운 연주였다는 듯 희미한 흥분을 띠며 웃었다. 여유와 예의를 갖춘 인사 끝에 무대의 조명이 꺼졌다. 1부와 2부 사이의 짧은 인터미션. 관객석에 불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한숨 돌리며 감탄과 탄식이 섞인 대화를 주고 받았다. 일부는 잠시 좌석을 비우고 대다수가 좌석에 착석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가운데서 기이한 기분에 젖은 서도윤은, 슈테펜 로스는 다소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빈 공간만이 남은 무대를 쳐다보았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감당하기 버거운 사랑을 받는 듯했다. 하아, 한 박자 늦게 올라오는 열기에 서도윤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조그맣게 앓았다. 제가 악곡이고 이안이 연주자라면, 앞으로 남은 평생을 이안의 방식으로 연주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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