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솔트] 당신의 이름.

2368자 미완작.

공백 by 삼울

그 자는 천성이 무작하였으나 잔악하거나 몽매한 자는 아니었다. 허나 지나가는 폭풍이 어떠한 분노 한 점 없이 제 경로를 가로막는 나무를 거꾸러트리듯 레오니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충분히 잔혹해 질 수 있었다. 그러니 그는 언제까지고 이솔트에게 세상을 겁탈할 정복자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신의 뜻을 따르는 이가 매일 밤 저와 살을 접붙이며 동이 틀 적이면 함께 한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이에게 그리 회자된다는 것은 짐짓 우스운 일이다. 허나 이솔트에게 그의 약탈 행위를 신의 뜻을 받드는 숭고함과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 저열함으로 가르는 것엔 유의미한 구분이 있지 않다. 신이야말로 이솔트에게 가장 무례한 이였기에. 

그러니 이솔트에게 이런 일은 퍽 생소하다. 

"이게 무슨…."

나직하게 혀를 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물푸레나무 완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지러지고 삭아내린 정신은 드물게 제자리를 찾았다. 끝없이 감산해가는 시간을 셈하는 것만 남은 인생은 기껍지도 절망스럽지도 않다. 그저 다음이 주어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이솔트에게 이 마지막 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는 이미 지쳤다. 

언젠가 황소와 사자의 사체를 지나 여름 장미를 손에 쥐었던 자는 제 앞에서 순박하게 웃는다. 분절된 생애를 연속된 것으로 기억하며 이전과 이후를 셈하는 법을 잃은 자는, 기이하게도 일련의 순서만은 생생히 기억하는 자신을 의아해하며 정복자의 시선을 마주한다. 알비온의 왕된 자. 최초의 소드마스터인 자는 마주한 석양에 송곳니를 드러내며 아이처럼 기뻐한다. 호수의 여공작은 그 웃음 아래 서린 오래된 서리를 안다. 그가 짓는 표정은 언제나 무언가를 숨기는 자의 것이며, 그가 지닌 바다의 빛은 아래 바닥을 보인 적 없다. 입꼬리 한 번 올리지 않은 네니브 호수의 여왕은 남편의 미소를 그리 평한다. 두 사람 사이로 한갓진 햇살이 길게 늘어진다. 질 좋은 실크 오간디의 색은 여왕의 에테르와 같은 순백색이다. 길게 늘어뜨려 놓은 얇은 천은 미풍에도 한들거리며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레오니드의 몹시도 크고 투박한 손에 들려진 수반 위로 한숨 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대에게 주기 위해 마련한 것이외다. 어때, 마음에 드나?"

까마득한 시절, 무뢰배 같던 말투를 잊을 법도 하건만 왕은 제 아내의 앞에선 흘러가는 유수 속에서도 부스러기 한 점 깎이지 않은 반석 마냥 굴었다. 혼잡한 기억 속에서도 자신에게 네니브의 이름을 버리라 요청하던 이의 얼굴, 그것에 앞선 것이 존재함을 아는 여왕은 가끔 그 말투에 날카로이 웃음을 터뜨린다. 신경질적인 웃음이 자신의 음성을 만나 내용을 잃을 것을 알기에 행위에는 장소를 고르는 거침이 없다. 모두가 그 소리를 기꺼움으로 받아들일 때에도 그 웃음에 담긴 뜻을 오해하지 않을 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 마냥 천진히 웃는 그대로 제 한 손에 들린 수반을 이솔트의 시야 안으로 밀어보인다. 다른 이들은 양 손으로도 들지 못할 수반에는 물까지 채워져 있다. 은과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작은 호수가 연약한 햇빛을 반사하여 얼굴에 어룽진다. 양각으로 섬세히 새겨진 사슴과 여우, 토끼와 같은 동물들의 눈동자가 살아있는 것 마냥 시선을 따라온다. 

제 남편이 부린 것이라고 믿기 힘든 얄팍한 수에 이솔트는 할 말을 잃고 만다. 그의 행위를 따라 둥글게 일어나는 수면. 물둘레로 난반사 된 빛에 메이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뜬다. 망막 아래 맺힌 순은의 동물들이 겹쳐지는 것은 한가로웠던 옛날의 기억이다. 삭고 바스러져 모든 것이 떨어져나갔다 생각하였으나 좋은 시절의 시간은 언젠가의 호수 밑바닥에서 찰랑인다.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이솔트를 스쳐지나고,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는 법 없는 이는 참을성 있게 다음을 기다린다. 

"…나는 당신이 이런 식으로 굴 때 가장 해석하기 힘들어. 바라는 것은 전부 손에 쥐고 보는 자가 한다고는 생각도 못할 짓만 하는 군."

흘러나온 목소리는 기대하던 것이 아닐 법도 하건만 답을 들은 이의 얼굴은 몹시도 밝다. 표정은 저토록 방정맞거늘 얼굴 근육을 화려하게 운용하는 와중에도 수반에선 일렁임 이상의 동요는 일지 않는다. 그것이 들고 있는 자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호수의 여왕은 시선을 늘어뜨린다. 

그리고 레오니드는 그 촘촘한 속눈썹에 맺혀진 빛의 결정들을 시선으로 훑는다. 끈질기고도 절박한 쫓음이다. 대양 아래 묻혀져 있는 것은 까마득한 심연이다. 천년으로 이미 닳아버린 네니브의 여왕은 그가 첫 생에서 발광하다 죽었다는 것을, 그 다음 생에서도 그리 곱게 죽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러고도 매번, 삶이 시작할 때 마다 매순간 이솔트를 찾는 발걸음을 옮겼다는 것을 가벼이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허나 그는 그것이 결코 못마땅하지 않다. 못마땅할 수가 없다. 그는 신을 들먹이며 제 청혼을 받아들이던 이를 결코 잊지 못한다. 매 생의 모든 순간에서 앞서 있었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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