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운더 타입 5천자
5090자. 긴장, 불쾌감, 일방적인 관계
⚠️최후반부 욕설 주의
뜨거운 물줄기가 어깨를 때릴 때마다 피로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고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에 집중했다. 촬영장에서의 소란스러운 분위기,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 그리고 억지로 만들어낸 웃음이 물소리와 함께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이런 시간은 항상 소중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서 잠깐의 이 고요함을 나는 좋아해 마지않았다.
욕실 안은 따뜻한 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시끌벅적한 바깥세상과는 완벽히 다른 나만의 작은 안식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평소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물기와 함께 씻겨 내려간 건 몸의 피로뿐만이 아니었다.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겪는 감정적인 피로도 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피로란 매번 씻어내도 매일같이 다시 묻어나는 것이다. 나 자신이 이토록 무기력해지는 느낌을 받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거울이 뿌옇게 김이 서려 비친 내 모습이 흐릿했다. 손바닥으로 물기를 닦아내 제대로 거울에 비친 나와 눈을 마주쳐 보았다.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현실은 결코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껏 잘 버텨왔지 않는가. 아, 몸에 남아 있던 긴장이 풀리면서 나름 마음까지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이 몇 분의 시간이 나에게는 큰 위로였다.
하지만 그 시간도 오래가지 않았다. 샤워를 끝내고 수건을 얼굴에 가져다 댄 순간 고요를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 벨 소리였다. 평소라면 그대로 무시했을 텐데, 얼핏 휴대폰 화면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K PD’. 그 이름이다. 그 녀석, 왜 항상 이렇게 예민한 순간에만 나를 찾는 건지.
잠시 망설였다. 받지 않을까 고민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K와 얽힌 관계는 복잡했다. 내 경력에 꽤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고, 현재 내가 출연 중인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최근 그와 엮이면서 생긴 불편한 감정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내게 없었다.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배! 뭐 해요?"
나의 복잡한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처럼 밝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활기찬 톤이 오히려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K는 혼자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오늘 촬영 진짜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방송 진짜 재밌게 나올 것 같아요. 선배 덕분에 완전 대박 칠 것 같아요!"
나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래, 뭐."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나는 K가 어떤 말을 꺼낼지 이미 알고 있었다. 특유의 패턴. 그 녀석은 항상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다른 주제로 넘어가곤 했다. 일 얘기로 시작해, 개인적인 이야기로 본론을 꺼내는 게 그 녀석이었다. 다정한 말투로 접근해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근데, 선배... 방금 씻었어요? 목소리가 따뜻하네."
녀석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그날 '그런 말'을 꺼냈을 때처럼.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저 상냥한 말투를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이상한 불쾌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방금 뜨거운 물로 몸을 씻어냈건만, 마치 다시 더러운 무언가가 몸에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그냥 씻고 나왔어."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최대한 이 대화를 길게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K는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진짜 뭐 없어요. 그냥 선배 목소리 듣고 싶어서. 아, 선배랑 같이 있는 시간 너무 좋았는데, 요즘 바빠서 사적으로는 많이 못 봤잖아요. 아쉽네요."
속이 점점 뒤틀렸다. 이런 대화는 이미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역겨움. 그날 전까지는 그저 좀 독특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왜, 천재들은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일'이 있었던 후... 녀석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그 미묘한 뉘앙스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불쾌한 티를 내봐도 녀석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그러고도 남을 음침한 녀석이다.
"너 진짜... 이런 말 그만할 수 없어?"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징그러워. 듣기 거북해."
K는 잠시 멈칫하더니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가벼운 웃음소리를 냈다.
"아, 선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요. 그냥 장난이었잖아요. 알잖아요, 내가 원래 좀 친한 사람한테 장난치고 그러는 거."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가슴 안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게 올라왔다. '장난'이라니. 그건 장난이 아니었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나를 장난처럼 농락하면서, 녀석은 묘하게 선을 넘는 말을 던지곤 했다. 불쾌감은 이미 거기서부터 느껴지는 거였다. 그의 말과 행동 속에는 분명 무언가 더 있었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따지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었다. 짜증이 나지만, K는 이런 일들을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녀석은 지금 내가 출연 중인 프로그램의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서 업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PD 중 한 명이었다. 앞서 말했듯 내 경력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기에 함부로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배, 사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새로운 프로그램 기획 중이거든요. 이거 완전 대박 칠 것 같아요. 그리고 선배한테 완전 딱 맞는 프로그램이기도 하고요."
녀석의 말이 끝나자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역시 나왔다. 오늘 녀석이 내게 접근하는 이유는 결국 이거였을지도 모른다. 새 프로그램. 솔직히 그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K가 능력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녀석이 주도한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성공했고, 지금 내가 출연 중인 프로그램도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만약 녀석이 나를 새로운 프로그램에 캐스팅한다면, 그것 또한 내 경력에 큰 도움이 될 게 뻔했다.
하지만 이 불쾌한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저 일을 제안하는 것뿐이라면 좋겠지만… 녀석의 행동에는 항상 그 이상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가 마치 녀석이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기대를 충족시켜야만 하는 것처럼 나를 몰아가는 무언의 압박이 나를 괴롭게 했다.
"새 프로그램?" 나는 일부러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어떤 건데?"
내가 관심을 보이자 K는 기뻐하며 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선배, 이번에는 완전 색다른 포맷이에요. 또 예능인데, 선배 스타일에 딱 맞을 것 같아요. 상황극 형식으로 갈 거고, 거기서 선배가 주연처럼 끌고 가는 거예요. 선배 특유의 화끈한 리액션 있잖아요? 그걸 제대로 살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에요."
잠시 동안 가만히 녀석의 말을 들으며 침묵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마음속에서 묘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프로그램은 분명 내 스타일에 잘 맞을 것 같았다. 나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더 많은 주목을 받을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위해 내가 감수해야 할 일들이 걸렸다. K와의 불편한 관계가 계속될 것이고, 이 메스꺼운 분위기를 견디며 계속 녀석의 기대를 받아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갑자기 찾아온 달콤한 기회에 어쩔 수 없이 솔깃해지는 내가 있었다. 아무리 불쾌하더라도 녀석과의 일적인 관계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더 괴롭게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동료들을 보며 이 업계에서의 성공은 단지 실력이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껴왔다. 성공은 능력 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잘 지내고, 눈에 띄는 기회를 잡느냐에 달려 있었다. 내가 이 상황에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무엇이 더 중요한 선택일까? 나의 자존심일까, 아니면 커리어일까. 지금까지는 어찌 됐든 참아왔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만 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선배, 진짜 한 번만 생각해봐요." K의 목소리가 다시 귀에 들려왔다.
"나 선배 없으면 진짜 이번 프로 힘들어요. 그리고... 나 말고 누가 선배를 이렇게 잘 살려줄 수 있겠어요? 우리 둘이 잘 맞잖아요, 일적으로도."
속으로 반쯤 기가 막혔다. '잘 맞다'니. K가 말하는 '잘 맞는' 게 무슨 의미인지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그 생각 자체가 역겨워서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지금은 깊은 생각보다는 그저 얼른 이 불편한 대화를 끝내고 싶어졌다.
"뭐, 들어보긴 해야겠네. 일단 미팅 잡히면 말해."
"아, 선배! 진짜 기대돼요!" K는 흥분한 듯 말했다.
"이번에는 진짜 선배가 주인공이에요. 선배 없이 절대 안 돌아갈 프로그램이니까, 나중에 제대로 설명할게요."
나는 소심하게 복수하듯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았어. 근데 이런 식으로 밤에 전화해서 그런 얘기하는 거 좀 그만하지.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거 예의 아니다."
K는 잠시 멈칫하는 듯싶더니 금방 익숙한 톤으로 돌아갔다.
"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근데 선배, 나랑 통화하는 거 싫어해요? 나 진짜 선배 좋아하거든요. 그런 말 하면 내 마음이 아프잖아."
우웩, 속이 뒤틀렸다. 다시 차갑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녀석을 상대로 완전히 선을 긋는 건 쉽지 않았다. 분명 K는 나의 경력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얽힐 가능성이 컸다.
"너 진짜... 적당히 좀 해."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듣기 싫다고 몇 번 말해야 알겠냐?"
녀석은 얄밉게도 여전히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대신 꼭 생각해봐요. 이 기획 정말 선배한테 딱 맞는 거니까."
이 와중에도 끊임없는 자기 어필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대단한 거야?"
"그럼요! 선배, 지금까지 해온 거 보면 알잖아요. 내가 다 잘 준비해놨어요. 이번엔 선배가 마음껏 자기 스타일로 밀고 나갈 수 있게 기획한 거라니까요."
지나치게 열정적인 목소리. 그 열정은 오히려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녀석의 말투나 태도는 언제나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능력 있는 PD로서의 프로페셔널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불쾌하게 나를 압박하는, 나를 향한 개인적인 관심을 내비쳤다. 마치 두 개의 다른 K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짧은 한숨을 뱉고서 덧붙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K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진짜로... 선배가 옆에 있어서 엄청 고마워요. 나, 선배 진짜 좋아하거든요."
"진짜 너..." 나는 말끝을 흐렸다. 화를 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화를 내봤자 녀석에게는 아무 영향도 주지 않을 게 뻔했다.
K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 "아, 선배,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라니까요. 나 진짜로 선배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니까. 장난 아니고."
"그만하라고 했다."
슬슬 비슷한 레퍼토리에 지쳐 대꾸할 힘도 없었다. K는 나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즐기는 것처럼,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알겠어요, 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나중에 더 얘기해요. 선배 잘 자요."
순간 휴대폰을 내던질뻔했다. 속이 뒤틀리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뭐라고 화를 내기도 전에 수신 종료 음이 울려 퍼진다. 뚜— 뚜—, 반복적인 신호음. 그 녀석과의 대화가 끝났다는 사실만으로 머릿속을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속은 복잡했다. 내가 K가 제안한 기회를 잡으면, 난 커리어적으로 더 큰 도약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녀석과 계속 이런 식으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이 업계에서 살아남으면서 쌓아온 모든 것들이, 녀석과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녀석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선배, 나 진짜 좋아하거든요. 소름이 끼치고 구역질이 난다. 장난이라 치기엔 너무 자주 그 말을 했고, 진심이라 치기엔 일하는 자리에서는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안고 있는 걸까. 아니, 애초에 그게 중요한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실 내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녀석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오늘도, 나는 녀석의 불쾌한 말과 행동을 그냥 넘겨버렸다. 자신을 방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했다. K는 업계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좋은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녀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분명 내 경력에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게 정당한 이유일까? 단지 출연 기회를 잡기 위해 그의 말들을 참고 견디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스스로 물어보았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침대에 주저앉아 휴대폰을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 씻은 후 따뜻했던 내 몸은 어느새 다시 얼어붙은 듯 딱딱하게 뭉쳐있었다. 샤워는커녕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찜찜하고, 불편했다.
"씨발."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녀석과의 통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늘 기분 나쁜 감정들을 억누르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녀석이 던지는 출연 제안이나 새로운 기획 얘기에 솔깃해지는 나 자신이 싫었다. 욕심은 어쩔 수 없었다. 커리어는 커리어고, 나는 더 잘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이렇게 모욕적인 일을 감당하는 게 맞는 걸까?
"하... 몰라, 씨발..." 나는 다시 한 번 욕을 내뱉으며 침대에 털썩 누웠다. 따뜻했던 샤워 후의 기분은 이미 사라지고 불편함만이 남았다. 어떻게 하면 K의 농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애초에 벗어나는 게 가능한 일인지조차 까마득해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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