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우조로│해수를 헤엄치는 호랑이
폴라 탱 보틀 속 마리모 속편
해적 동맹을 맺은 선장과 단둘이 남게 될 때면 조로는 생각했다.
저 새끼, 나를 베고 싶은 건가?
*
폴라 탱 호에 승선하고 일주일이 되던 날, 조로의 기분은 심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첫째로 배의 구조가 심각할 정도로 복잡했다. 조로에게 있어 써니 호가 미로라면 외부보다 내부 공간이 많은 폴라 탱 호는 미궁에 가까웠다. 둘째로 트레이닝을 할 공간이 비좁았다. 적정량의 운동으로 꾸준하게 심신을 단련해야 했던 조로에게 몸을 펴는 게 고작인 잠수정은 빈말이라도 넓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길은 걷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찾게 되어 있고, 심신을 다지는데 꼭 격한 운동을 할 필요는 없는 데다 남의 배에 짜증을 부릴 만큼 조로는 경우 없지 않았다. 마지막 세 번째,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존재만 없었더라면.
“난 너희가 수퍼 친한 줄 알았는데.”
우솝과 카드 게임을 하던 프랑키가 말했다. 잠수함의 선원들은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이면 동맹 해적단과 사무라이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고는 했다. 동맹을 제의해온 주제에 언제든 배신할 수 있음을 잊지 말라 경고하며 날을 세우던 선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파티했을 때도 둘이 잘 붙어있었지.”
사무라이들과 함께 패를 고민하던 우솝이 프랑키의 말을 거들었다.
“그때랑 지금이랑 좀 달라.”
조로는 그쪽에 시선을 두는 대신에 탁자 한켠을 차지한 술병들을 흔들며 대꾸했다. 아직 내용물이 남은 병을 찾기 위함이었다. 단언하는 조로의 목소리에 한쪽에서 책을 보고 있던 로빈이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반 정도 남은 술병을 흔들던 조로가 손을 멈췄다. 입이 무거운 정도가 지나친 남자였다. 말하지 않겠다 다짐하면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와도 말하지 않았다. 조로를 아는 로빈은 말하고 싶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을 담아 웃었다. 조로를 아는 우솝과 프랑키는 처음부터 어떤 것도 듣지 못한 사람들처럼 굴었다. 조로를 알게 된 사무라이들 역시 황급하게 딴청을 부렸다. 조로가 입을 열게 만드는 건 그들의 그러한 태도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전원 전투에 임하는 극 소수정예 해적단 중에서 평상시에도 전투원이라는 조로의 위치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 위치에 걸맞게 불필요한 고민을 하게끔 만드는 것들은 베어야 하는 장애물 정도로 인식하는 조로였지만, 때로는 영리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곳에는 잔꾀를 부리는데 도가 트거나, 현실적인 해결방안을 제의하거나, 문제를 보다 현명하게 들여다볼 줄 아는 동료들이 있었다.
이윽고 조로가 입을 열었다. 로빈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조로의 말이 이어지고, 프랑키는 들고 있던 카드 패를 내려놓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조로가 한숨을 쉬면 사무라이들은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조로가 느껴오고 겪은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을 때, 프랑키와 마찬가지로 카드를 내려놓은 우솝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로, 그건 말이야…….”
*
사랑이라고? 이게? 그런 게 나랑 하고 싶다고? 그 정도나 되는 남자가?
세상엔 아는 게 없어도 알게 되는 게 있다. 사람들은 그걸 본능이라 불렀고, 조로가 지식을 쌓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트 해적단의 선장. 정상결전 당시 루피를 구한 의사. 최악의 세대. 자신과 비슷하지만 루피의 반대에 서 있는 남자. 그래서 더 위험한 남자. 조로가 트라팔가 로우에 대해 본능적으로 깨달은 건 그게 전부였다. 바다에 목숨을 내놓았으나 그 이유가 야망은 아닌 남자. 그럼에도 조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남자 역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동맹이었으나 적이었고, 비슷한 사람이었으나 결국 서 있는 곳과 가야 할 곳이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단다.
그것도 아주 뜨겁고, 열렬하며, 저릴 정도로 애틋하게.
순서대로 프랑키, 로빈, 우솝이 그의 사랑을 꾸미는 데 쓴 표현이었다. 조로는 거짓이라 믿고 싶은 쪽이었다. 그들이 작정하고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가설이 훨씬 더 그럴듯했다. 사황과의 결전을 앞둔 지금 같은 때에 동료와 찢어져서 다른 해적의 배를 탄 그들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배를 뒤엎지 않은 건 로우 본인으로부터 아무것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장실에 틀어박혀서는 가끔 새어 나오는 시선조차 언제나 배후에서, 마치 미련이라도 되는 것처럼 옷자락 끝에 위태로이 매달려있을 뿐이었다. 그 침묵에서 조로는 살기든 사랑이든 당장 와노쿠니로 가는 잠수정 안에서 그가 무엇도 내비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그러고 나면, 굳이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시선으로 탐해도 상관없었다. 보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남자의 번뇌에 휩쓸릴 만큼 태평하지도 않다. 기어코 검을 빼 들고 노린다면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마찬가지로 검을 쥘 뿐이다. 대검호를 목표로 삼아놓고서 사람을 베지 않는 의사에게 진다는 가정은 하지도 않았다. 자신은 잠깐 섬이 되었을 뿐이었다. 오랜 항해로 잠시 그리운 마음이 들 뿐인 육지 덩어리. 잠깐 배를 댈 수는 있어도 곧 떠나게 될 것이다. 조로가 살아온 삶이 그랬고, 로우가 살아온 삶이 그러했다.
무엇보다도 혼자 정리하겠다는 기특한 태도를 보이는 이에게 굳이 말을 얹고 싶진 않았다. 동맹에 대한 배려보다는 귀찮음의 문제였다.
그리고 로우는 조로의 옷깃을 최악의 방식으로 잡아당기고야 말았다. 폴라 탱 호의 일을, 이 배를 다룰 권한을 그의 손안에 쥐여준 것이다. 경솔하고도 건방진 일이었다.
동맹에 대한 모든 결정과 권한은 선장인 루피에게 있다. 롤로노아 조로는 그것에 거스르거나 불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맹 상대가 멍청하고 얼빠진 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혼자 정리하리라 믿었기에 다문 입이었다. 그 침묵을 오해할 만큼 속 편하고, 배의 키를 타선의에게 넘길 정도로 물러터져서는 곤란했다. 결국 조로는 들은 건 아무것도 없이 선을 그었다. 혼자 무슨 착각을 한 거냐며 노발대발해서 검이라도 빼 들었으면 좋았을 것인데─가장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로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장 자신이 들은 걸 이해하지 못한 것도 같았다가, 끝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고작 선을 넘지 말라는 말로 의표를 찔린 사람처럼 굴었다. 김이 새는 건 순식간이었다.
꼴사나웠다.
그 방에 있던 모든 게.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허무한 감상을 입밖에 내는 대신에 조로는 남몰래 로우에게 붙여뒀던 '편리한 이동 수단'을 떼어냈다. 선을 넘는 그 즉시 베어버리면 그만이었음에도 조로는 더 이상 사랑에 시달리는 트라팔가 로우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로우는 필요 없었다.
*
기어코 해수에 머리를 처박고 기절한 로우를 마주하게 된 날, 조로는 또다시 무엇도 듣지 못한 입장을 가지고 먼저 목소리를 내어야만 했다. 나랑 무엇이 하고 싶냐고. 로우는 제게 마음이 없으면 없다 말하라고 날을 세웠다가, 뇌와 심장을 빼버리고 싶었다고 고백했다가, 당장 바다에 빠지면 자신을 구할 거냐 물었다. 조로는 그가 앞서 내뱉은 것들을 듣고도 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면, 로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거면 됐다. 너랑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면 됐어. 심장이라도 달라고 할 줄 알았던 외과의는 그게 끝이었다. 울 것 같은 목소리와 달리 형용하기 어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혼자 있고 싶다는 말로 처음으로 선장실에서 쫓겨난 조로는 능력으로 이동된 문밖에서 생각했다.
그거면 됐다니, 나랑 할 수 있는 게 그 정도면 됐다니.
왜 우리 사이에 뭐가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
…그 정도라는 게 뭔데?
*
악마의 도움 없이도 마수라 불리며 온갖 흉악한 이명을 달고 사는 조로였으나 사랑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인지 알았기에 하지 않았다. 조로는 연인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목숨은 바다에 묻고, 꿈은 미래의 해적왕에게 바쳤으며 시간과 노력은 대검호에게 쏟았고 약속은 친구의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사랑을 고백할 수는 있어도 너를 위해 살아 돌아오겠다는 말은 빈말로라도 할 수 없었다. 곁에 사람이 없어도 외롭지 않은 천성으로 태어난 게 천만다행인 삶이었다.
사랑이 제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로우에게도 어울리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조로는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문장에서 자신이라는 주어보다도 그가 사랑을 한다는 서술어를 믿을 수 없었다. 조로가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게 없다면 로우는 상대에게 바칠 수 있는 게 없다. 당장 몸에 새겨진 것들만 봐도 그랬다. 그것들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는 건 위치와 규칙성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랑 할 수 있는 게 그 정도면 된다니.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본능을 날 세워도 조로는 로우가 말하는 그 정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동료들과 같아진 건 아니다. 로우는 해수에 머리를 처박은 날을 계기로 틀어박혔던 선장실에서 나왔다. 하트의 선원들은 드디어, 마침내 같은 소리를 하며 눈에 보일 정도로 안심했고, 밀짚의 선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조로에 대한 배려였다. 그러고 나서는,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방법으로 조로를 피하기 시작했다. 다른 선원들이 함께하지 않으면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았다.
부선장은 조로였음에도 해야 할 말은 로빈에게 전했다. 펑크 해저드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어진 그의 모습은 드디어 상대가 그어둔 선이나 지켜오던 침묵의 의미를 파악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조로 역시 대충 로우가 감정에 매듭을 지은 거라 생각하고 넘어가면 됐는데, 문제는 그가 시야에 들어올 때면 저절로 신경을 세워버리는 자신에게 있었다. 제삼자가 있을 때만 공간을 나누면서 꼭 자신이 시야에 닿는 곳에 앉는다는 걸 알았다. 가장 똑똑한 로빈에게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것뿐이라면서 그녀가 혼자 있을 때는 찾아가지 않는 걸 알았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건데, 로우는 그 가운데에 서 있음을 알았다.
조로가 알게 된 건 딱 거기까지였다. 검을 뽑아 들고 덤비기 직전이던 사내가 이제는 본인의 위치를 지킨 채, 정말로 바라는 게 없다는 듯이 군다는 것. 그리고 그 태도가 미친 듯이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는 것도.
지급된 선실 바닥에서 웃옷을 벗은 채 팔굽혀펴기를 반복하던 조로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머리가 복잡했다. 이런 정신으로는 될 것도 안 됐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는 일은 성미에 맞질 않았으니, 결국 조로가 할 수 있는 건 복잡한 머리를 철판으로 만들어진 벽에다가 갖다 박는 일이었다. 금속의 차가움이 운동으로 열이 올랐던 피부를 식혔다. 그러고 나면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그는 그날 모든 것을 끝냈는데, 이제 와서 뒤늦게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능력으로 사람을 갖다 놓을 거면 올바른 곳에 놔야 하는 거 아닌가? 애꿎은 원망은 덤이었다. 벽에 머리를 박으면서 저절로 숙인 시야에 자신의 손바닥이 들어왔다. 검을 쥐는 부근에는 굳은살들이 박혀있었다. 주먹을 쥐는 것도 잠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조로는 한켠에 세워둔 세 자루의 검을 허리춤에 맸다.
한심한 꼴을 하는 건 더 이상 사절이다. 애초에 잔꾀를 부리거나, 현실적인 해결방안을 제의하거나, 현명하게 문제를 파악하는 건 동료의 방식이지 조로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뒤늦게 시작했다면 죽을 각오로 쫓아갈 뿐이다. 헤매는 일 없이, 방해하는 게 있다면 베어내면서.
망설임 없이 선실 문을 연 조로는 폴라 탱 호 복도로 거침없이 내디뎠다.
그의 배는 보기에는 복잡한 구조여도 걷기만 하면 항상 선장실로 가는 희한한 구조를 가진 배였다.
그렇게 약 세 시간을 걸친 걸음 끝에 도착한 선장실 앞에서 조로는 평소와 다른 기색을 읽는다. 안에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오랜만이라든가 하는 감상보다도 먼저 경계를 품은 조로는 세 자루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 슈스이에 손을 올렸다. 기습을 받아칠 태세로 천천히 문을 열면 그를 중심으로 펼쳐져야 할 룸이 구체의 형태로 저에게 날아왔다. 아차 할 새도 없이 반투명한 돔이 자신을 감싼다. 처음 보는 형태의 기술이었다. 기어코 심장을 뽑을 생각이었는지. 자신의 불찰을 탓하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슈스이를 뽑아 들고 나면 한가지 위화감이 온몸을 스쳤다.
슈스이에게서, 제게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로우는 언제나 그렇듯 귀곡을 어깨에 올린 채로 바닥에 앉아있었다. 깊게 눌린 모자의 챙 그늘에서 빛나고 있는 눈은 동맹과 거리가 멀다. 무슨 속셈이냐고 물어야만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싹한 소름이 전신을 달렸다. 자력으로 능력을 해제할 생각이 없다면 이쪽에서 풀어버리면 될 일이다. 그리고 조로는 능력을 해제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상대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가는 것. 배의 파손은 그가 신경 쓸 문제였다. 귀철을 꺼내 들고, 화도일문자를 입에 무는 순간이었다. 조로를 감싸던 막이 위에서부터 사라졌다.
“…지속 시간은 이 정도인가.”
세 자루의 검이 모두 날을 드러냈음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던 로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조로가 하나 남은 눈을 찌푸렸다.
“뭐 하자는 거냐.”
“나름의 수련이라고 해두지.”
로우의 손안에서 파란색 돔이 커질 것처럼 맺히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에게 싸울 의사가 없음을 안 조로는 검들을 다시 집어넣었다.
“상대가 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드는 게?”
“…드레스로자에 입성하기 전에 완성하려던 기술이었다.”
그것만 말하고 로우는 입을 다물었다. 질문과 전혀 다른 대답을 캐묻는 대신, 조로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그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온갖 책들과 종이들로 혼잡했던 선장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눈높이가 맞게 되자 로우는 모자의 챙 끝을 잡아당겨 아래로 숙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조로야. 또 길을 잘못 찾은 거라면.”
“소리를 낼 수 없게 만드는 건 상대에게만 가능한 일인가?”
조로의 얼굴에는 순수한 궁금증이 차올라 있었다. 로우는 시선을 회피했다.
“방금 같은 경우는 능력 자체가 내가 평소 쓰던 것과 다르다. 소리를 차단하는 일 자체는….”
설명을 이어 나가던 로우가 입을 다물었다. 조로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조로는 직전에 자신이 만든 구체의 룸과 평소에 만드는 룸의 차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리 동맹이라고 한들 제어가 완벽하지 않은 히든카드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로우는 평소의 룸이나 펼쳤다. 백 마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빨랐다. 손안에서 미약한 바람이 불었다. 조로는 잔뜩 경계한 채로 검을 뽑아 들었던 직전과는 상반된 태도로 순식간에 선장실을 감싼 막을 바라보았다.
“내가 펼친 공간이라면 언제든지 가능해.”
로우의 중지와 엄지가 가볍게 마찰하는 것과 동시에 앞서 맛봤던 위화감이 피어오른다. 상황의 변화를 깨달은 조로는 검집을 세워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느껴지는 감각이라고는 손안에서 검집이 밀리는 듯한 느낌이 전부였다. 어떠한 진동도, 소리도 느껴지지 않으니 자신이 정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당장 보이는 실전 가치는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조로는 이 기술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성가시기 짝이 없는 전법으로 사용될 것을 알았다.
적에 관한 공부를 하는 성실한 타입은 아니었음에도 미리 경험해보고자 한 것은 알지 못하면 당해버리고 마는 그의 능력 때문이다. 아군으로는 든든하지만, 적으로 만나면 골치가 좀 아픈 게 아닌 능력이었다. 로우의 능력은 두 가지다. 심장을 뽑는다든가, 영혼을 바꾸고도 또 다른 활용의 여지가 있는 강력한 악마의 능력 그 자체와 그런 힘을 갖추고서도 탐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아내는 로우 개인의 능력.
소리를 차단한다고는 했지만, 소리보다는 진동 자체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조로는 몇 번이고 검집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사라진 청각과 덩달아 혼동이 오는 시각을 제외하고 사물의 움직임을 식별할 수단을 찾아내는 것도 잠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야 했는지는 모른다. 본능의 명령이었다. 맞은 편에 앉은 로우는 팔짱에다가 귀곡을 끼운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당장 칼을 빼서 찌르면 반드시 피할 것이다.
방심하는 듯한 겉모습과 달리 로우의 예민한 기색을 읽어낸 조로는 그를 샤워실에서 건져내던 때를 떠올렸다. 오래 담아두는 건 친구와의 약속밖에 없던 조로가 드물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어렴풋한 소금 짠 내, 축축한 바닥, 습기가 배어 있는 공간 속에서 잠겨가던 검은 머리 남자. 죽음이 내려앉은 손가락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물이 고인 세면대에 박혀있었다. 들리는 건 바다가 흐르는 소리 말고는 무엇도 없던 그때.
지금 남자의 모습에 그때와 비슷한 건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로는 그를 베어내려던 검을 땅에 떨어트렸다. 꽤 무게가 있을 검들은 울리는 느낌조차 없었다. 로우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채였다. 상반신을 일으킨 조로가 바닥을 짚고 로우에게 다가섰다. 나무 바닥의 삐걱거림조차 들리지 않는 이질적인 침묵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좁혔다. 마침내 서로가 내뱉는 숨이 서로의 피부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왔을 때, 로우가 눈을 떴다. 조로의 침입으로 모자가 들리고, 보여진 미간은 좁혀져 있었다. 뭐 하는 거냐. 들리진 않았으나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비교적 짧은 말에도 입이 닫히기까진 걸렸으니 그 뒤에 속삭인 건 제 이름일지도 모른다. 웃음이 터졌으나 귀로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어 이마와 콧대가 맞닿았다. 미간을 찌푸린 로우는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귀곡을 움켜쥐었고, 조로는 고개를 비틀었다.
초록색 머리칼에 의해 로우의 모자가 완전히 뒤로 넘어간다. 로우의 동공과 입술이 동시에 열리는 순간 혀보다도 먼저 치아가 부딪혔다. 스스로의 어수룩함에 두 번째 웃음이 터지려는 그때, 조로의 시야가 뒤집혔다. 언제나 로우의 품속에서 꼿꼿하게 세워져 있던 귀곡이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보기보다 악력이 강한 손이 조로의 턱 끝부터 뺨을 감싸 쥐었다. 뒤이어 숨이 삼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조로는 그제서야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누가 먼저 고개를 뒤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행위가 끝나고 조로는 크게 웃었고, 로우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바다에 빠졌을 때 구해주는 정도로 충분한 줄 알았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여긴 바닷속이다.”
“하다 하다 나랑 말장난하자고?”
“그게 아니야, 조로야.”
로우가 다급히 말했다.
“그럼 뭔데.”
“…그냥 네 말이 맞는 걸로 하지.”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 시원함을 넘어 호탕하게 웃던 조로는 몸을 일으키고는 바닥에 놓은 검들을 허리춤에 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선장실에 들어온 직후의 모습으로 돌아간 조로는 다시 등을 돌려 로우를 보았다. 그는 뒤로 넘어간 모자를 주워 쓰고 있었다. 귀곡은 주인에게 외면당한 적 없다는 듯이 어깨에 얹어져 있었다.
“네가 말하는 그 정도라는 거, 정확히 뭐였냐.”
조로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간 로우에게 물었다. 그의 얼굴에 혼란함이 드러나는 건 아주 잠깐이었다.
“넌 사람을 쉽게 버리지 않아. 하물며 동맹을 맺은 상대라면 더더욱. 그래서 내가,”
로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내가… 멍청하게 군다고 해도, 위험한 상황에 놓인다면 도와주겠지. 탄 배가 다르고 목표하는 것이 달라도. 그게 너라는 사람이니까. 난 그게… 좋았을 뿐이야.”
로우는 핑핑 돌아가려는 사고를 붙잡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까닥하다간 이걸 물어보는 의도가 뭔지, 방금 키스에는 무슨 의미가 담겼는지 하나하나 물어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앞에서 더 부릴 멋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이상으로 말을 덧붙여서 먼 훗날 후회를 안 할 자신이 없었다.
“그거 괜찮네.”
조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로우가 홀린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거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그는 정말로 웃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해라. 내가 멋대로 오해하기 전에.”
“무슨 오해.”
그래 놓고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대답했다. 결국 로우는 손으로 제 눈가를 짚었다. 그래도 진심을 내보이고 후회하는 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음을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기대할 것 같아, 이대로라면.”
“…….”
“네가 말했던 거. 이 넓은 바다에서 각자 다른 배를 타고 각자의 항해를 할 테니 만나는 일부터가 어려울 거라던 그거.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 서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몇 날 며칠을 보내다가 한참 나중에서야 알게 될지도 모르는 그런 거.”
“그걸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냐.”
“너랑 하고 싶으니까.”
나는 그런 게 너랑 하고 싶으니까…. 끝말을 제대로 뱉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짓눌려서 말하기가 힘들었다. 위치상 심장을 짓누를만한 장기는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 비단 심장뿐만 아니라 온갖 곳에서 의학 지식에서 벗어난 통증이 느껴졌다. 특히 눈이 그랬다. 꿈이라면 당장 깨어났으면 했다. 그를 사랑하고 익사하기를 다짐하면서 이런 고통을 바란 건 아니었으니까. 로우는 분명 심해로 잠기기를 택했다. 이렇게 폭풍우 치는 파도에 휩쓸려서 혼란해 하는 건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럼 하자. 그런 거든 그 정도면 충분한 거든 뭐든.”
“조로야, 장난으로 대답해도 되는 말이 아니다.”
“너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트라오.”
조로가 무릎을 접고 허리를 숙였다. 그가 앉아있는 저에게 눈높이를 맞추려는 것을 눈치챈 로우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숨겼다.
“난 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라서 그 정도 같이 애매한 건 싫어.”
“방금은 괜찮다면서.”
“끝까지 들어라.”
“…….”
“난 너한테 아무것도 못 줘. 목숨도, 꿈도, 노력도, 하다못해 흔한 약속도.”
입을 다문 로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도 내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겠지. 목숨도, 바다에 나온 이유도, 네 몸에 박은 심장도. 만약 내가 지금 죽는다고 해도 넌 이 배를 와노쿠니에 확실히 도착시킬 거다. 그리고 루피에게 약속한 사황을 끌어내릴 거고.”
“…….”
“그게 마음에 들어.”
조로가 천천히 로우에게 팔을 뻗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모자가 손쉽게 벗겨지고, 그 밑에 가려진 눈이 드러난다. 주위가 벌겋게 달아오른 눈은 상대를 죽일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조로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네가 날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널 바꾸지 못한다. 그리고 네가 그런 날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그런 네가 제법 싫지 않아.”
한계였다.
“이 정도면 뭐라도 할 수 있지 않겠냐.”
로우는 잔뜩 웅크리고 있던 팔을 뻗어 조로를 끌어안았다.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심장 소리를 외면하고자 눈을 감았다. 차고 넘치는 대답이었다. 조로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는 그 순간, 로우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바다에 잠겨 죽는 것만큼 편히 죽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깨지는 유리병은 결국 자기 자신이 될 것이다. 바람이 닿지 않을 심해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로우는, 조로를 놓지 않았다.
트라오, 지금부터 할 기술이, 나의 한계다……. 어정쩡하게 싸워봤자 소모될 뿐이야…. 통하지 않을 그때가 죽을 때겠지. 뒷일은… 부탁한다.
너는,
이봐!!! 카이도! 그 녀석은 우리 선장이다! 우선 이쪽 머리부터 먼저 짓뭉개보시지!!
너란 사내는 기어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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