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tep Distance
LEVLIC 2024
I.
재회
해변에 인접한 시가지 광장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느끼는 것은 자신만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광장 중심의 분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젊은 군인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며 강박적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훑었다. 수상한 거동을 보이는 자는 없다. 하지만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가 어제 전달받은 정보에 따르면.
그는 외국 출신의 혁명가를 찾고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나 그가 거물이라는 사실만은 안다. 자신과 엇비슷한 나이의 남성이라는 사실도. 정보 제공자에 의하면 그는 오늘 이곳에서 평범한 시민을 가장해 이곳 모르타 섬 내부의 불온 세력과 접선할 예정이었다. 물론 군부가 이 사실을 파악했다는 것을 그가 알 리는 없다. 그러니 지금은 절호의 기회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접선하는 순간을 포착해 미행하고 섬 안의 본거지까지 소탕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으나 워낙 꼬리를 잡기 힘든 작자임을 고려할 때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챌 가능성이 높았고, 사실상 그를 붙잡기만 해도 본전이었다.
광장 안의 사람들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피던 군인의 눈이 한 청년을 향했다. 여름 날씨에 적합한 가벼운 셔츠 차림을 한 남자였다. 검은 선글라스로 가려져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곧게 다물린 입을 하고 있어서인지 단호하고 심지가 굳은 인상을 준다. 그는 여느 행인과 다름없는 분위기를 풍기며 분수 옆의 벤치에 앉아 있었지만 잘 뜯어보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도 보였다. 확인할 가치는 있다.
“잠시 검문입니다. 신분증을.”
군인은 그의 눈앞으로 다가가 그렇게 말을 걸었다. 선글라스 안의 시선이 움직이더니 똑바로 군인의 눈을 응시했다.
“…여기 있습니다.”
그는 잠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갑작스러운 검문에도 별 반항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여권을 꺼내 내밀었다. 섬 각지에서 폭동이 잇따른 지 몇 달째, 시내에서 검문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제 일상다반사였다. 이유를 따져 묻거나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체포당하기 십상이었는데, 이는 권리 침해가 아니라 폭동을 저지하여 무고한 피해를 막기 위한 예방책이라는 것이 표면상의 논리였다.
군인은 그의 여권을 받아들어 한 장 넘겼다. 카를 아포스톨로스. 그리스 출신. 언뜻 봐서는 평범한 여권이지만 만일 상대가 평범한 외국인 방문객이 아니라면 위조된 신분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군인은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모르타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업 관련입니다. 원하신다면 체류 허가증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당장은 없지만 관련 서류도.”
파고들 만한 구석은 없었지만 군인은 그의 대답이 대본을 읊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확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정도는 예상한 일이라는 듯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오늘은 무슨 일로 나와 계십니까?”
“마침 일이 쉬는 날이어서, 휴식을 겸해.”
“사람이 지나다니는 이런 광장에서 휴식을?”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친구라 함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이곳 사람입니까?”
그렇게 물어도 그의 표정에 동요는 없었지만, 여태껏 막힘없었던 대답이 반 박자 느려졌다. 이건 어쩌면 신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질문 공세를 이어가려던 군인을 가로막은 사람이 있었다.
“카를?”
목소리를 낸 것은 흰 선드레스에 여름용 리넨 숄을 걸친 여자였다. 챙이 넓은 모자 아래로 어깨를 넘는 길이의 옅은 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는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카를의 팔을 잡아당겨 팔짱을 꼈다.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요? 정말이지, 이런 식의 숨바꼭질을 하면 찾아줄 거라고 생각하다니.”
여자는 꽤 값비싸 보이는 목걸이와 팔찌, 반지 따위를 하고 있어 여러모로 상류층의 인간으로 보였다. 혁명가와 어울릴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말씨로 보아 외국인이 분명한데, 이런 사람이 섬 내부의 불온 세력일 리는 없다.
“친구라는 건 이분?”
군인의 말에 여자는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라고 소개한 거예요? 아아, 이건 꽤 상처인데. 외국까지 나와서 굳이 숨겨야 하는 관계는 아니잖아요, 우리?”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레 고개를 기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 허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에 대해 캐물었을 때 반응이 늦어진 것은 은밀한 접선이 있어서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흔해빠진 사랑놀음에라도 속하는 귀찮은 관계 때문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슬슬 돌려받아도 될까요? 약속이 있어서.”
여자의 말에 군인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카를의 손에 여권을 돌려주었다. 그는 여권을 받자마자 여자의 손에 이끌려 광장을 뒤로 했다. 어지간히 잡혀 사는 관계라도 되는 걸까. 미동 없던 표정을 잠시 떠올리던 군인은 그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고 다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광장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행인 속을 걸었다. 멀리서 보면 군인이 넘겨짚었듯 여가를 즐기는 평범한 연인처럼 보이는 모양새였지만 사실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연인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혹감, 반가움, 약간의 초조함, 그리고 다른 것들. 둘은 시가지 내부의 주택가에 이르러 계단을 오르고 빈 방 하나에 들어갔다. 침대맡에 여행용 가방 하나가 놓여 있을 뿐, 사람이 사는 흔적이 전무하다시피 한 휑한 공간이었다. 창문이 굳게 닫힌 방 안에는 미세한 먼지가 떠돌았다. 여자는 문을 걸어잠그는 것과 동시에 내내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상대인 카를―아니, 혁명가 레프 아스트라이아를 마주보았다. 이내 느리게 입이 열렸다.
“3년 만이네요, 레프.”
* * *
아스틸이 모르타 섬의 본국인 파르카이에 발을 들인 것은 한 달쯤 전이었다. 아스틸은 여행가로, 특정한 거점을 두지 않고 떠도는 생활을 했다. 그런 생활을 위해서는 가끔 한 곳에서 머물며 자금을 모을 필요가 있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뻗은 형태를 한 파르카이에는 항구도시가 많아 여행을 하며 거쳐 가기 좋았고, 마침 항구 근처의 안내소에는 한 달 정도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아스틸이 일하게 된 곳은 안내소라는 간판을 내걸긴 했지만 사실상 관광객들보다는 늘 오가는 물류업 종사자들이나 지역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쉬어 가는 공간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소문을 접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최근 가장 화제가 되는 것은 파르카이의 자치령 모르타 섬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로,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섬 내부의 행정을 장악하다시피 한 군부가 폭압과 착취를 일삼고 있는 것이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워낙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체제인 데다 통신과 출입국 등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군부의 감시가 미치고 있어 사실상 섬 내부에서 반기를 드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으나, 최근 몇 달간 그런 견해를 뒤엎듯 곳곳에서 저항의 물결이 일었다. 그 결과 무엇이 모르타 섬의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있는가, 라는 주제가 자주 화두에 올랐다. 혹자는 독재 국가 아래에서 억압받는 시민들을 차례차례 해방시켜 왔다던 한 거물 혁명가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기도 했다.
아스틸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압제에 익숙해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을 몇 년의 시간을 들여 설득하고 이끌 수 있는 사람. 그가 잘 아는 사람 중에도 그런 인물이 있다. 레프 아스트라이아. 그와의 연락은 3년 전쯤을 기점으로 갑자기 끊어졌지만, 통신의 제약이 있는 섬 안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사실 그간 장소를 특정하지 못했을 뿐이지 대략 비슷한 상황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객관적으로 따져 본다면 그가 정말 모르타 섬에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은 일이나 스스로의 직감에는 자신이 있다. 물론 장소를 안다고 해서 찾아갈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와는 설명이 복잡한 계기로 만나 꽤 오랜 여행을 했다. 회의주의에 빠져 있었던 그가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였던가. 이후로는 다시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일종의 불규칙적인 동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동행이지 동반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래를 기약한 것은 아니었으니 연락이 끊겼다고 해서 찾을 권리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삶의 궤도를 되찾은 그가 혁명가로서의 일을 하고 있을 때 구태여 개입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를 지나치게 속박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므로.
그러니 어느 날 파르카이의 안내소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면 아스틸이 모르타 섬에 발을 들여놓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날은 궂은 날씨 때문인지 안내소에 들르는 사람은 평소의 반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담소를 즐기고 싶더라도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서까지 방문하고 싶지는 않은 법이었다. 그래서 옷과 머리카락이 흠뻑 젖은 세 명의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안내소 안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들 중 하나가 곧장 아스틸이 선 카운터 앞으로 다가와 내륙 쪽으로 향하는 교통편에 대해 물었다.
“이런 날씨에 당장은 무리겠네요. 평소라면 택시를 추천할 텐데 지금은 저녁이라서. 잡기가 힘들죠.”
아스틸은 그렇게 답하며 눈앞에 선 사람에게 힐끗 시선을 보냈다.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의 행색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초췌했다. 비에 맞아 몸에 달라붙다시피 한 망토에는 얼룩인지 진흙인지 모를 것이 달라붙어 있었다. 평온을 가장한 얼굴에서는 숨길 수 없는 조바심이 묻어난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내일 새벽에는 비가 그칠 것 같으니까 버스도 택시도 정상 가동될 거예요. 근처에 있는 숙박시설이라면 안내할 수 있는데.”
“그렇군요….”
이 사람은 어디서 왔을까. 본래 파르카이에 살던 사람이라면 굳이 안내소에서 교통편을 찾을 이유가 없고, 외부인이라면 빗속을 뚫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금방 떠나려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아스틸은 그가 불안한 눈치로 쥐락펴락하는 손에 밧줄을 쥔 듯한 규칙적인 자국이 남은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맨손으로 작은 배를 정박시킬 때 꼭 저런 흔적이 남는다. 아스틸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설마 배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지금 이 비를 뚫고?”
“아닙니다. 관광을 위해 왔는데 급히 돌아갈 일이 생겨서요.”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미세하게 빨라진다. 호흡도 약간 거칠어진다. 그런 것들을 알아보는 것보다도 빠르게 직감이 속삭였다. 거짓말이다.
“아하.”
속아 넘어간 척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머리를 굴려 본다. 제대로 된 선박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항해에 나서지 않을 테니 개인 소유의 요트 등을 이용한 것일 테고, 작은 배로 오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장소는 모르타 섬뿐이다. 출입국 심사가 엄격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불법 출항의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단순한 범죄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듣고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시선, 거짓말을 하는 순간에도 신중히 단어를 고르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절박한 순간이라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투지 같은 것. 한참 어수룩하긴 하지만,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당장 교통편을 잡는 건 무리지만… 일단 안쪽에서 이야기하죠. 마침 빈 방이 있으니까 써도 될 거예요.”
그리고 아스틸의 예상대로 그들은 모르타 섬 출신의 망명자들이 맞았다. 솔직한 사연을 듣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진심을 캐내는 건 아스틸의 특기였다. 반란을 모의하던 중 누군가가 군부에 그들의 얼굴과 신분을 팔아넘겼고 그 결과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내통자가 있다는 정보조차 전하지 못한 채 떠나와야 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통해 이 사실을 전하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맙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확실히 있고요?”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나라 밖에 혁명을 지원하고자 하는 동지 분들이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만 하는 거고요. 제때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언제까지 찾으면 되는 건데요?”
“며칠 후에 중요한 접선이 있다는 정보를 군부가 입수했을 테니, 그전까지 정보가 샜다고 알려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누가 듣기에도 며칠 만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세 명의 망명자는 눈앞의 상대가 고민하듯 턱을 괴는 모습을 바라보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이미 손에 든 패를 전부 내보였다. 그건 그만큼의 절실함이 상대에게 전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직 상대의 패는 몰랐지만, 이쪽의 카드는 뒤집혔으니 무언가를 걸어 볼 차례였다.
“…무리한 요구인 줄은 알지만, 부탁드릴 수는 없을까요.”
* * *
“그런 일이 있어서 오게 된 거예요.”
아스틸은 설명을 이어가며 평소 하던 것에 비해 지나치게 화려한 목걸이를 풀어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만에 하나를 위해 준비한 연출이었는데 생각보다 쓸모가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체류 허가증을 위조하는 데만 며칠이 걸려서 좀더 일찍 당신을 찾아내 상황을 설명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래서 좀 당황스러운 방식이 된 건 사과할게요.”
그 말을 들은 레프의 얼굴에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같은 말을 간신히 삼키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곧 그는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뇨. 감사합니다, 아스틸 씨. 그런데…”
“그런데?”
“위험한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말했잖아요, 부탁받았다고.”
“…….”
“물론 내가 없어도 당신이 알아서 잘 해결했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 발각됐다면 아스틸 씨도 문책을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짧지 않은 시간이 가로놓인 만큼 서로의 달라진 점은 금방 눈에 들어왔다. 전보다 길어진 머리카락이나 깊어진 눈매 같은 것들. 그럼에도 기억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윤곽이 거기 있다. 여전히 같은 간격을 둔 채.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스틸은 농조로 답했다.
“그런 걱정 말고 좀더 붙임성 있는 말을 해줄 순 없는 거예요? 오랜만이라거나, 보고 싶었다거나. 좀 기대했는데.”
“…놀리지 마십쇼.”
선글라스 안쪽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레프는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시 만난 건 기쁘지만 오래 있어달라고는 못 합니다.”
“알아요.”
아스틸이 모르타 섬에 머물러서 좋을 것은 없었다. 입국할 때는 운이 좋았다지만 가짜 체류 허가증을 언제 들킬지는 모르는 일이다. 더군다나 반란자로 낙인찍혀 망명한 이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그 자체로 중죄였다. 그러나 레프는 당장 떠나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고, 아스틸도 지금 바로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아스틸은 잠갔던 문을 여는 대신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직 짐을 풀지도 않은 가방을 내려다보았다가, 어렵게 재회한 상대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윽고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만 여기 있다가 갈게요. 며칠만.”
II.
회고와 여름밤
모르타 섬 외곽의 폐허에 작은 빛이 켜져 있었다. 바닥에 내려놓은 구식 램프의 빛이다. 그 외에 의지할 것이라고는 달빛뿐이었다.
그럼에도 폐허 곳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이 수십은 되었다. 그들의 모습은 각기 달랐다. 해진 외투를 입고 코가 닳은 구두를 신은 중년,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십 대의 소년소녀들, 비교적 멀끔한 차림을 하고 벽에 등을 기댄 젊은이. 그들은 모두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섬에서 복종은 일종의 미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무조건적 복종은 미덕이 아니며 의무는 더더욱 아닙니다.”
한때는 건물의 기둥이었음직한 잔해를 무대 삼아 선 레프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에게는 지금보다 나은 삶을 꿈꿀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지금껏 살아온 세상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은 더 좋아질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손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잘못된 권력에 저항하는 것을 통해서.”
레프의 어조는 담담했다. 감정에 찬 채로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식의 연설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요 없는 차분한 목소리임에도 무감정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의 주어는 늘 ‘우리’ 였고, 그 말에는 태생이나 과거에 상관없이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동지로 여기게 하는 힘이 있었다.
“군부는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는 것도, 검열과 감시를 일상화하는 것도 그 일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껴 마지않는 지금의 체제란 무엇입니까? 공장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착취당하며, 빈곤에 쫓겨 거리로 밀려난 이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감히 반기를 든 이들은 모두 폭력 아래에서 진압당하거나 지하로 끌려갔습니다.”
청중 사이로 동의의 속삭임이 퍼져 나갔다. 그들 자신이 겪거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었다. 마침내 누군가가 일어나 소리쳤다.
“저항하자!”
그 말에 다른 누군가가 호응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단결합시다!”
뒤이어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외쳤다. 같은 의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고양감이 그들을 움직였다. 고요했던 폐허를 어느새 외침이, 울림이 메운다. 사람들의 시선은 짙게 깔린 어둠 사이에서 하나의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틸은 집회가 끝난 뒤 그 자리에 남아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잔뜩 주눅 들어 있었던 이들 대부분이 한결 나은 표정을 하고 돌아갔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마음을 한 번에 움직인다는 건 새삼 대단하네요.”
레프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램프를 들고 돌아오자 아스틸은 그렇게 말을 붙였다. 기름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도 불은 아직 꺼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없던 마음을 생기게 만드는 일이 아니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일깨운 것뿐입니다.”
“그렇겠지만.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죠.”
청중이 완전히 해산한 것을 확인한 뒤 두 사람도 걷기 시작했다. 아스틸이 모르타 섬에 상륙한 지 어느새 몇 주가 훌쩍 지난 시점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며칠만 머무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착하고 나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출입국 검사가 강화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허점이 있는 허가증으로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섬 밖으로 나가기를 주저하고 있자 며칠 후에는 일반 시민의 출항 전반이 엄격히 통제되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외부와의 소통을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선포나 마찬가지였다. 이국의 혁명 세력이 섬 내부의 반란을 지원한다는 사실이 퍼진 결과였을 것이다. 아스틸에게도 레프에게도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두 사람 다 누구의 탓도 아닌 일을 물고 늘어지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섬 안에서 달리 할 일이 없었던 아스틸은 레프에게 조력하게 되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는 것에 가까웠다. 군부의 감시가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해진 상황에서 한 명의 힘이라도 더 필요하기도 했고, 막상 함께해 보니 아스틸이 생각 외로 도움이 되기도 했다. 레프가 다수를 이끄는 것에 탁월하다면 아스틸은 개인을 설득하는 것에 능했다. 양쪽 다 상황판단이 빠른 덕에 긴 설명 없이도 전하고자 하는 바가 곧잘 통했고, 세세한 결정에서 두 사람의 의견은 대체로 일치했다. 실제로 서로가 아는 사실을 취합하는 짧은 대화만을 통해 정보가 유출된 경로를 파악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합을 맞춘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음을 고려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돌아가기 전에 잠깐 들를 거죠?”
아스틸은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하지 않았지만 레프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한참을 더 걸어 낡은 가로등이 깜빡이는 거리로 들어선 뒤 복잡하게 얽힌 골목 사이를 지나 한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가게 창고로 쓰이다가 방치된 공간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안쪽 깊숙이 들어가자 먼지가 잔뜩 쌓인 문이 나왔다. 다만 손잡이는 사람이 자주 오간 흔적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반들거렸고, 문 아래쪽에서는 빛이 옅게 새어나왔다.
문을 열자 인쇄기가 작동하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늦은 시간임에도 수 명이 모여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인쇄물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카를 씨!”
레프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최종 확인을 부탁드리고 싶었던 참입니다.”
그들이 손에 든 것은 군부의 악행을 알리는 유인물이었다. 제작은 물론 소지조차 불법인 일이다. 이런 밤중에 사람 눈을 피해 제작할 만큼. 문 근처에 선 채로 유인물을 한 장 집어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결함 없이 잘 쓰인 무난한 글이었다. 테이블 건너편에서 레프가 조언을 건네는 나직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가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읽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어의 선정, 자주 쓰인 표현의 뉘앙스, 글 전체에서 느껴지는 어조 등. 그의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감탄하는 소리도 들렸다.
“안나 씨가 읽기에도 괜찮은가요? 저, 열심히 썼거든요….”
아스틸이 유인물을 손에 든 것을 보고는 빨간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늘어뜨린 소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나 레드포드. 아스틸이 모르타 섬에서 쓰고 있는 가명이었다. 사람들은 레프의 지인이라는 설명만 듣고도 이곳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스틸을 동료로 대했다. 레프에게 보내는 그들의 신뢰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특히 지금 말을 건 붉은 머리의 제피르는 아스틸에게 금방 정을 붙여 가까운 언니 대하듯 했다.
“괜찮은데요. 힘 있는 글이고. 게다가 전문가 앞에서 내가 할 말은 없다고요.”
아스틸은 장난스레 답하며 레프 쪽을 향해 눈짓했다. 그의 시선이 돌아오는 순간에 맞춰 짧게 미소짓고 다시 입을 열었다.
“카를이 쓴 글과 닮았어요.”
“저, 정말이에요? 헤헤….”
느낀 그대로를 말하며 유인물을 내려놓자 제피르가 기쁘게 웃는 표정이 보였다. 일종의 찬사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불연속적인 동행을 반복하던 시절 아스틸과 레프는 가끔 편지를 교환하곤 했다. 이념이나 사상을 강조하는 글이 아니라 단순히 안부를 전하는 용도의 편지에 불과했지만 레프의 문장에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는 맺고 끊음이 확실한, 즉 상당히 간결한 문체로도 전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표현했다. 불필요한 감상을 쳐내 길지 않게 마무리한 글임에도 일말의 다정함이 느껴지는 것 또한 특징이었다. 제피르가 쓴 글에도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단순히 선동과 폭로를 부추기는 것 이상의 어떤 따뜻함이 존재한다고 할까. 어린 나이부터 공장에서 일해 왔던 제피르는 레프가 처음 모르타 섬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동지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동안 학교도 나가 보지 못했다가 혁명을 이끌어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비로소 이것저것 배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스틸은 그가 쓴 유인물을 받아든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한때는 글조차 모르던 그가 마음을 다해 쓴 종이 한 장이 타인을 끌어들여 행동의 주체로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자, 그럼 오늘은 이걸로 마칩시다! 최종 원고도 정해졌으니 숨 좀 돌리자고요.”
누군가가 그 말을 하는 동시에 조용한 박수가 흘렀다. 혹시라도 모를 감시의 눈을 끌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시간 간격을 두고 한둘씩 조심스럽게 자리를 떠났다. 레프와 아스틸이 지상으로 올라온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당신도요.”
정적이 깔린 길 위로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아스틸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에 보이는 별들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나열했다. 아주 어렸던 시절, 스스로를 점성술사라고 부르던 동행인과 만나고부터 생긴 습관이다. 부랑자로 살면서도 평생 별과 사랑, 자유를 노래하며 살아갈 것 같았던 그 사람은 결국 희망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함께 세상을 바꾸자고 말해주는 목소리가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불타는 건물 앞에서 아스틸을 돌아보던 모습이다. 그게 자포자기한 인간의 광기 어린 소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움직임의 일부가 될 수도 있었던 걸까. 낙천적인 미소를 짓던 제피르의 얼굴에 예전 동행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감상은 어떠십니까.”
그 물음을 듣고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예전 일을 떠올리고 있었던 탓인지 답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약간 낮아졌다.
“간단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투지를 가진다는 건 희망에 자기 자신을 걸어보는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거기까지 말하고 미소지은 아스틸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을 따르기로 한 사람들의 표정이 생동감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레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가로서의 삶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쥐여 주는 순간이 좋았고, 평생을 억눌려 살아왔던 이들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순간이 좋았다. 사실 실의에 빠졌던 순간에조차도 그동안 뜻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보여준 의지를 잊어본 적은 없었다. …잊으려 한 적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저항하는 의지가 인간의 것임을 잘 알기에, 억압하는 의지 또한 인간의 것임이 괴로웠던 것이다. 언젠가 소중한 제자를 잃은 이래로 사람과 삶에 대한 그의 관점은 늘 양가적이었다. 그 사실을 곱씹듯, 나온 답은 과거형으로 끝났다.
“그게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아스틸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가 멈춰서 레프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어떤데요? 계속할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오래전에 비슷한 대화를 했던 것 같다. 이유에 대해서. 계속할 이유, 살아갈 이유, 삶을 포기하지 않을 이유. 레프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말을 고르다가 짧게 답했다.
“어느 정도는.”
아스틸은 입꼬리를 올렸다. 별빛 아래로 은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가 뻗은 손이 스치듯 레프의 어깨를 쓸고 지나갔다.
“그거면 됐어요.”
그 말을 신호로 두 사람은 다시 발을 내디뎠다.
III.
이탈
컵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은한 커피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아침이었다.
레프는 소파 위에서 눈을 떴다. 지도를 보며 시위 경로를 확인하던 것이 마지막 기억인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 한참 훑어보았던 지도는 소파 앞의 탁자에 올려진 채였다. 늘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선글라스도 지도 위에 깔끔히 접힌 채로 놓여 있다. 먼지가 앉지 않도록 얇은 손수건 한 장을 올려 둔 것에서 조심성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키자 밤 동안 덮고 있었던 듯한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것도 어젯밤까지는 없었던 물건이다.
“일어났어요?”
탁자의 빈자리에 차갑게 식힌 커피 한 잔이 놓였다. 일과처럼 굳어진 아침 메뉴다. 제 몫의 커피를 든 아스틸이 표정을 살피듯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별로 못 잔 것 같은 얼굴인데.”
“…그건 피차일반인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 이상으로 잠겨 있었던 탓에 레프 자신도 내심 움찔하고 말았다. 총시위 결행을 며칠 뒤로 앞둔 탓에 최근은 거의 쉼없는 일정의 연속이었다. 평소 규칙적인 생활을 해 오던 편이었는데도 피로가 쌓인 탓에 어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다. 아스틸도 피곤한 것은 마찬가지인지 한 손으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중간에 일어나서 챙겨 주신 겁니까.”
떨어진 담요를 주워들며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하자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우연히 깼던 거고, 이 정도는 뭐. 그보다 하나뿐인 침대를 뺏어서 미안한 기분이라고요.”
그동안 둘은 위치를 특정당하는 것에 대비해 줄곧 며칠 간격으로 거처를 옮겨 왔다. 혁명 자금이 모자란 상황에 방이 여럿 딸린 곳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 같은 소리였고, 지금도 좁은 침대 하나에 소파가 딸려 있을 뿐인 공간을 함께 쓰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불편한 일은 없었다. 오히려 함께 여행하던 기억이 주는 편안함이 자리했다. 3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다.
“결행까지 일주일도 안 남았네요. 잘 되려나.”
“승산은 반반이라고 봅니다. 남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죠.”
커피를 몇 모금 넘기고 나니 그래도 한결 나은 목소리가 나왔다. 아침 식사는 곁들일 버터나 잼 따위도 없는 딱딱한 빵으로 빈말로라도 훌륭한 음식은 못 되었다. 그래도 둘은 담담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불평 없이 식사를 마쳤다. 아스틸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모르타 섬에 왔던 날과 같은 선드레스를 입은 채로 나타났다.
“그럼, 다녀올게요.”
오늘은 아스틸과 제피르가 모르타 섬 동부의 혁명군을 총괄하는 간부에게 총시위의 세부 계획을 전달하는 날이었다. 부유한 외국인을 연상시키는 차림을 하는 것은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다. 제피르는 조금 거리를 두고 상황을 살피며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역할이었는데, ‘안나 씨의 보조’ 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는 제법 기쁜 표정이었다.
“조심해요.”
“아스틸 씨도.”
언제나처럼 긴 말을 덧붙이지 않는 인사가 오갔다. 레프는 한 손을 살짝 들어올리는 것으로 아스틸을 배웅한 뒤 다시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총시위의 목적은 군부 독재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섬 한가운데의 중앙본부를 탈환해 점거농성을 벌이는 것으로, 우선 군부의 병력을 섬 곳곳으로 분산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각 지역의 지도자 격인 인물들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동선을 맞춰 두는 것이 작전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아스틸과 제피르가 오늘 떠난 것도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두 사람만 보내는 것에 약간의 걱정은 있었지만 중앙 지도부의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함께 갈 여력이 없었다. 레프는 지도를 되짚어 가며 회의에서 공유할 내용을 정리한 뒤 밖으로 나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완만한 내리막길을 걸어 언덕 아래의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전화를 거는 대신 낡은 전화번호부를 몇 장 넘겨 원하는 페이지를 찾고, 누군가 낙서라도 한 것처럼 남아 있는 숫자 몇 개와 알파벳을 확인했다. 타인이 볼 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정보에 불과한 암호를 그는 익숙하게 읽어냈다. 회의 장소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간 세 번째 건물, 2층 맨 마지막 방. 다시 거리로 나온 뒤 일부러 골목길 안쪽을 빙빙 돌다가 미행이 없는 것을 확실히 하고 난 뒤에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우선 섬 서부 해방위원회에서 보고입니다. 활동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들이 수십 정도 늘고,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상류층의 사람들도…”
“남은 시간을 무기의 확보에 쏟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입니다. 그리고 결행일의 바리케이드는 섬 중앙 광장을 기준으로…”
그런 식의 활동 보고, 작전의 공유, 질의응답이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진 탓에 정오 전에 시작한 회의가 끝난 것은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모여 앉았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녹초가 된 표정이었지만 결의를 다진 후 해산했다. 오늘은 다른 일정이 없으니 이만 휴식해도 좋았지만 레프는 유인물 배포의 진척을 확인해 두려 지하의 인쇄소를 찾았다. 남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인쇄소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방 한구석에 앉은 굽은 허리의 사내가 레프의 모습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카를 씨.”
거뭇하게 변색된 나일론 셔츠 위로 낡은 회색 조끼를 입은 그의 이름은 유러스였다. 유러스는 군부의 눈에 띄지 않게 불법 유인물을 유통하는 일을 했다. 중책을 담당하지 않는 일종의 말단 조직원이었지만 인쇄소 사람들은 진중하고 차분한 그가 함께 일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꽤 위안을 얻는 모양이었다. 그와 같은 공장에서 오래 일했다던 제피르는 유러스를 ‘어떤 일이 생겨도 평정을 유지하는 든든한 아저씨’ 라고 평했다.
레프는 짧게 묵례한 뒤 곧바로 용건을 꺼내려 했으나 유러스의 낌새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긴장한 듯한 모습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는 별로 나아지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좋지 않은 신호다. 이럴 때는 대화를 주도하기보다도 상대를 기다려 주는 편이 나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유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카를 씨는 외국인이시지요. 그리스 사람이라고….”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었지만 레프는 무표정으로 끄덕였다.
“예. 그건 왜 물으시는지.”
“그럼에도 도와주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저희가 해방된다고 해도, 여긴 당신의 조국도 아닌데….”
그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일정했지만 갈수록 작아져 갔다. 그런데도 말은 띄엄띄엄 이어졌다.
“여기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의 곁에 있어줄 수도 있고….”
그 질문에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도 답이 나왔다.
“제게는 그것보다 우선해서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
유러스의 고개가 어떤 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눈은 시선을 둘 곳을 잃고 제 양손을 향했다. 굳은살이 잔뜩 박힌, 전형적인 공장 노동자의 손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도무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모양입니다….”
레프는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를 깨달았다. 안 좋은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다. 유러스는 오늘 스스로가 저지른 일을 고해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을 것이다. 드문 일은 아니다. 결의를 가지고 오래 일한 이들의 긍지조차도 때로는 손쉽게 팔린다. 정보 하나에 돈 몇 푼을 주겠다는 제안, 보호해 주겠다는 회유, 안위를 조심하라는 협박. 그러나 그들을 내모는 결정적인 이유는…
“아내가, 병세가 중합니다. 약이 필요해서….”
비틀린 목소리로 나오는 몇 마디가 상황을 전부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군부의 제안에 응해 돈을 받고 내부의 정보를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긍지를 팔아도 양심마저 내버릴 수는 없어 여기까지 왔다는 것도 짐작 가능했다. 레프는 미간을 약간 좁혔을 뿐 책망도,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몰랐다. 대신 여전한 무표정으로 물었다.
“유러스 씨, 군부에 알린 내용은 어디까지입니까. 이 장소를 밝히신 겁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저 가장 가까운 시일에 있을 접선만 알려주면 된다고 해서, 오늘 오전 섬 동부에서 만남이 있을 거라고만….”
오늘 오전, 섬 동부. 짚이는 것이 있다.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건네던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잠깐, 그건―”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인쇄소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카를 씨!”
제피르였다. 급히 뛰어온 듯 머리는 마구 헝클어지고 뺨은 상기되어 있었다. 제피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비틀거리다가 겨우 테이블을 붙잡았다. 이내 최악의 상황을 알리는 말이 흘러나왔다.
“도와주세요, 카를 씨. 안나, 안나 씨가… 군부에….”
* * *
“안나 레드포드 씨, 영국 출신이라…. 먼 길을 오셨군요.”
핸들을 쥔 군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러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위압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아스틸은 표정 변화 없이 입을 꾹 다문 채로 차의 앞유리를 통해 바깥을 응시했다.
“타지 사람이라고 해서 신변이 보장될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뒤쪽에서 누군가 총신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운전석뿐만 아니라 차 뒷자리에도 군인 두 명이 앉아 있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자리였다. 그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고, 어디까지 속아 줄까. 속이지 못한다면 언제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까. 아스틸은 최대한 중의적으로 답하는 쪽을 택했다.
“외국인이라고 안전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말이 통해서 좋군요, 레드포드 씨. 그럼 아는 걸 전부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런 곳까지 파견됐을 리는 없으니.”
요구가 퍽 추상적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손에 들어간 정보는 많지 않은 듯했다. 고작해야 오늘 아스틸이 나간 자리에서 접선이 이루어질 거라는 사실 정도인 것 같았다. 달리 체포되거나 의심받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앞으로도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여기서 그 어떤 정보도 흘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면?”
“하하, 처음에는 누구나 그런 식으로 잡아뗍니다만.”
군인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레드포드 씨가 자의로 협력하든 그러지 않든 언젠가는 끝날 일입니다. 하지만 일찍 말씀해주신다면 그쪽은 조금 덜 고통스럽게 끝나고, 이쪽은 여러모로 수고를 덜겠죠.”
그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이다음에 벌어질 일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도착할 때까지는 입장을 밝혀 주셔야 처분을 결정하기 쉬워집니다. 정보부에 몸담은 치들은 성질이 급하거든요.”
마치 친절이라도 베푸는 듯한 말투가 불쾌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손목을 구속한 수갑이 죄어드는 듯한 착각이 든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제 몸을 건사하겠다고 정보를 팔아넘기는 것을 두고 비겁하다 일갈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안다. 본래 그는 무언가를 책임지는 것과는 천성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단 한 번 맡은 책임을 위협 앞에서 내던질 정도로 나약하지도 못했다. 마음을 정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스틸은 협력 따위 거부하겠다는 말을 하려 운전석에 앉은 군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는 막 커브길을 따라 왼쪽으로 선회하려는 참이었다.
“당신들이 어떻게 나오든 나는…”
쾅!
그때 차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온 대형 차량이 커브 반대편에서 운전석이 있는 옆유리를 그대로 들이받았던 것이다. 군인이 브레이크를 밟기도 전에 차는 그대로 밀려나 가드레일에 충돌했다. 모든 일이 한순간에 일어나 앞뒤를 따질 틈도 없었지만 아스틸은 곧장 차 문을 열어젖히려 시도했다. 그러나 찌그러진 가드레일과의 틈이 좁아 아무리 밀어 봐도 힘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함께 탄 군인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아스틸은 이를 악물고 금이 간 차창을 양 손목에 걸린 수갑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급박한 마음이 앞서 아픔은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부딪히자 유리가 완전히 박살나며 틈이 생겼다. 그대로 바깥으로 몸을 던지다시피 해 빠져나오자 방금까지 몸을 실었던 차는 구겨진 것처럼 한쪽 면 전체가 파손된 상태였다. 겨우 주위를 둘러보려는 찰나 익숙한 장갑 낀 손이 아스틸의 팔을 붙잡았다. 모자를 눌러써 얼굴을 가린 채였지만 알아보지 못할 리 없는 사람이다.
“레프….”
“이쪽으로!”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느냐고 묻기도 전에 레프가 아스틸을 일으켰다. 그가 이끄는 대로 발을 움직이자마자 뒤쪽에서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몇 발은 바로 옆의 가드레일에 구멍을 냈고 몇 발은 도로를 맞혀 시멘트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레프는 몸을 낮추더니 빠른 동작으로 손에 든 병에 불을 붙여 군인들 쪽으로 던졌다. 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도로 위로 불길이 일었고, 총격이 잠깐 끊긴 틈을 타 두 사람은 가드레일을 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어둑한 숲 속을 한참 동안 내달렸다. 바닥에 깔린 나뭇가지가 바스러지는 소리, 수풀이 스치는 소리, 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 따위가 한꺼번에 섞여 귀 옆에서 윙윙거리는 혼란 속에서도 오직 멈추지 않고 뛰는 것만이 중요했다. 말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호흡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시내로 이어지는 길이 드러났다. 둘은 멈추지 않고 샛길 사이로, 골목 사이로 뛰어들었다. 다리는 무거워지고 시야가 흐려져 도무지 계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눈앞에 늘어선 문 중 하나가 열리고 누군가가 내뻗은 손이 두 사람을 건물 안으로 끌어당겼다.
한동안은 숨을 몰아쉬느라 눈앞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했다. 문에 등을 기댄 채 가까스로 호흡을 가라앉히자 시선이 닿는 곳에는 제피르가 안도 섞인 눈물을 글썽이며 아스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으로 벽에 기댄 레프의 모습도 보였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난 탓인지, 평정은 기묘할 정도로 금방 돌아왔다. 아스틸은 눈앞의 두 사람을 향해 약하게 웃어 보였다.
“방금… 목숨을 빚진 것 같네요. 고마워요.”
이곳은 안전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 * *
혹시라도 있을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전등은 전부 끄고 창문에는 커튼을 쳤다. 테이블 위에 놓인 양초 몇 개가 일렁이며 방 안에 희미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 방은 군부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혁명군의 거점 중 하나로, 건물의 위치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평소에는 잘 쓰이지 않는 곳이었다. 레프는 인쇄소를 나서기 직전 제피르에게 이곳에 며칠 머물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일러두었다. 그 덕분에 안쪽은 비교적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생필품이나 식량, 붕대와 소독약 등도 마련되어 있었다. 돌아온 아스틸과 레프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던 제피르는 겨우 감정을 추스른 후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며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레프가 씻고 돌아왔을 때 아스틸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댄 채 졸고 있었다. 흐린 불빛 아래로 차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베이고 쓸린 흔적이 곳곳에 남은 것이 보였다. 특히 수갑이 채워졌던 손목은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했다. 차고 있던 수갑은 옷핀과 철사를 가지고 한참을 씨름한 결과 어떻게든 풀렸지만 손목에 남은 상처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사실 정도가 덜하긴 해도 상처투성이가 된 것은 레프도 마찬가지였다. 도로 파편이나 유리 조각에 맞아 가며 이곳까지 왔으니까. 험한 길을 달리면서 몸 여기저기에 찰과상이 생긴 것은 덤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두 사람의 옷은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되어 도무지 다시 입을 수 있을 수준이 아니었으니 제피르가 여분의 옷을 가져다 놓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아스틸 씨.”
얕은 잠이었는지 아스틸은 레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역시 피곤한 듯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는 있었지만.
“주무실 거라면 침대가 있습니다.”
“며칠이나 연속으로 침대를 독차지하면 미안하잖아요.”
농조로 돌아온 답에도 레프는 진지하게 답했다.
“부상자시잖습니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면서.”
“…이럴 때는 말 좀 들으십쇼.”
결국 가벼운 훈계조로 말한 레프는 근처에 의자를 끌어와 앉고는 소독약을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스틸이 말없이 손목을 내밀었다. 레프가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는 동안 아스틸은 이따금씩 표정을 약간 찌푸렸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아스틸은 깔끔하게 붕대가 감긴 양 손목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전처럼 돌아다니는 건 힘들겠네요. 여기서의 신분도 얼굴도 들켜 버렸고.”
레프는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잠깐 주저한 끝에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몸을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결행일까지… 아니, 결행일에도. 이곳은 안전할 테니 조금 답답하더라도 여기서―”
“아니, 잠깐만요.”
아스틸은 곧장 레프의 말을 가로막았다.
“앞으로 조심하겠다는 뜻이었지 숨어 지내겠다는 뜻은 아니었는데요.”
“필요하다면 숨어 지낼 생각도 해야 할 겁니다. 오늘…,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두 번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된 거 두 번 목숨을 걸어보는 걸로 하죠, 뭐.”
이쪽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너무 태연한 어조의 답이었던 탓에 레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그런 식으로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진심이라는 거 알잖아요.”
“…….”
촛불 너머로 보이는 아스틸의 눈이 시선을 맞춰 왔다. 양쪽의 색이 다른 눈동자가 레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목숨을 건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닌데도 그런 말을 하는 건 불합리하지 않아요?”
레프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원래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아스틸 씨는 휘말린 것뿐입니다. 만약….”
처음 이곳에서 만났던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철저하게 선을 긋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늦었으니 위험을 실감한 지금부터라도 멈춰세워야 했다.
“아스틸 씨가 저를 생각해서 이러는 거라면 이건 더더욱 안 될 일입니다.”
“이건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의지예요, 레프.”
아스틸은 곧바로 반박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조금 날 선 목소리로 말이 이어졌다.
“내가 아끼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다고요.”
“이건 제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스틸 씨가 중요한 건 저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걱정하는 거니까.”
10년이 넘게 지난 일인데도 소중한 사람을 잃었음을 깨달았던 순간은 아직도 지나치게 생생했다.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 세상에의 원망, 별이 보이지 않는 밤에 홀로 방향을 잃고 남겨진 기분. 그건 두 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다른 문제였다면 상대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했을 텐데도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은 그 순간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 마음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테지만 아스틸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나라고 걱정하는 법을 모르는 줄 알아요? 나도 당신이 안전하길, 다치지 않길 바란다고요. 그런데 당신에게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그러니까 막지 않는 거잖아. 그럼 당신도…”
무언가 더 말하려 하던 아스틸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방 밖의 복도 쪽에서 제피르가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서였다.
“…여기까지 합시다. 우선 눈부터 붙이고.”
아무것도 정리된 것은 없었지만 레프는 그렇게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으로 그를 쫓던 아스틸이 결국 마지못해 끄덕이는 모습을 일별하고는 레프는 방을 나왔다. 문앞에 선 제피르에게 들어가도 된다는 손짓을 해 보이고 복도를 걸어 아무도 없는 거리로 나섰다.
새까만 밤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주 먼 곳에 있으면서도, 손을 뻗으면 스치듯 닿을 것처럼 선명한 빛이다.
IV.
의미라고 부른다면
언젠가 주고받았던 대화가 귓가에서 메아리친다.
- 나도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당신이 위태로워 보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요. 무르려면 지금밖에 없어요, 후회해도 책임은 못 지니까.
- 후회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위태로워 보여서, 정말 그것뿐입니까? 만일 제가 신경쓰인다는 이유로 같이 다니게 만든 거라면…
- …그런 게 아니라, 내 욕심으로 당신이 제대로 살아가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내게 꽤 중요해져서.
눈을 뜬 아스틸이 가장 먼저 본 것은 페인트칠이 벗겨진 천장이었다. 시선을 내리자 정면의 테이블에는 반 이상 타 버린 양초가 놓여 있었고, 닫힌 커튼 사이의 작은 틈을 뚫고 바깥의 햇빛이 들어와 이불 위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안나 씨, 괜찮으세요?”
침대 바로 옆에서 제피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열이 나는 것 같아서 못 깨웠어요. 잘못되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그 말을 듣고서야 약간의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그간 피로가 쌓인데다 바로 전날에 추격전까지 벌였으니 제때 일어나지 못했을 만도 했다. 무게가 느껴져 제 이마를 건드려 보니 젖은 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스틸은 몸을 일으켰지만 제피르가 만류했다.
“저, 조금 더 쉬는 게 좋겠어요.”
둘 외에는 사람의 기척이 없는 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서야 무언가를 깨달았다.
“카를이 여기 있으라고 했군요.”
제피르는 비밀을 들킨 것처럼 어물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결행일이 지날 때까지 안나 씨의 안전을 확인해 달라고….”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레프는 이미 계획을 재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합류했을 터였다. 제피르를 남겨 둔 것은 아스틸을 걱정해서도 있을 것이고, 당분간 이곳에서 숨어 지내 달라는 부탁의 우회적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아스틸은 붕대가 감긴 제 손목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도, 자신이 그에게 개입하고자 하는 마음도 ‘상대가 중요하다’라는 명분 아래에 있다. 결국 소중한 타인이라는 이름 안에 각자의 상실과 바람을 투영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스틸은 제피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입에서 나온 것은 다소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당신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있나요?”
제피르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지만 곧 아스틸을 마주보고 답했다.
“저는… 여기서 만난 사람들이 소중해요. 배운 것들도. 그러니까 따르고, 지키고 싶어요. 카를 씨나 안나 씨도요.”
“만약 혼자 더 편하고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건가요?”
제피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저 혼자 행복해지는 걸로는 부족한 것 같아요. 모두 함께 이뤄야 할 일이 있으니까.”
아스틸은 빙긋 미소지었다. 그처럼 간절히 이루고 싶은 이상은 없을지라도, 마음만은 잘 알고 있다.
“나도 비슷해요.”
오래전에 생각한 적이 있다. 스스로 선택한 사람의 곁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로웠다고. 당장 내일 살아있을지 알 수 없더라도 그걸로 좋았다고.
“안나 씨에게는 카를 씨가 소중한 사람인 거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어쩔 수 없더라도,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은 물러서고 싶지 않다. 상대가 도움을 원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설령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다 해도 욕심을 부리고 싶은 순간이 있는 법이다. 처음 동행을 제안했던 그때처럼. 그러니까….
“제피르, 도와줄래요?”
* * *
결행의 새벽이 밝아 왔다.
잡동사니, 가구, 집기, 손에 잡히는 것을 있는 대로 가져와 최대한 높게 쌓아올린 바리케이드가 섬 중앙의 시가지 곳곳을 막고 있었다. 이미 섬 곳곳에서는 싸움이 시작되었을 것이고 이곳에서도 얼마 후 격전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레프는 낡은 지붕들 너머로 희미하게 건너다보이는 군부의 중앙본부를 응시했다. 저곳을 손에 넣을 수 있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주변에 선 이들 중 제대로 된 무기를 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군부의 눈을 피해 무기를 빼돌리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빛만은 꺾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골목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긴장한 채로 무기를 들어올렸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업복을 입고 상자를 품에 든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곁에서 방향을 안내하는 것은 붉은 머리를 땋아내린 소녀였다.
“…….”
레프가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주위 사람들이 먼저 이름을 불렀다.
“제피르!”
곧 바리케이드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들은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권총과 여분의 탄창이 채워져 있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도움이 되는 것은 확실했다.
“제피르 씨, 이걸 다 어떻게.”
“그, 그동안 무기 유통 쪽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포섭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모을 수 있어서요…”
“혼자서 말입니까?”
제피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역시나 예상했던 이름이었다.
“안나 씨와 함께요.”
위험에 빠진 것이 아니라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하나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오늘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말은 없었습니까?”
제피르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눈에 익은 글씨체였다.
당신이 말리는 일을 굳이 할 생각은 없지만, 함께 있어도 괜찮다고 허락해줬으면 좋겠어요. 두 번은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적혀 있는 내용은 그것뿐이었다. 쓰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적히지 않았지만 고집스러운 어조가 그대로 담겨 있어 마치 직접 말이라도 걸어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레프는 손에 든 종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후회라는 말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 함께해 주지 못했다는 후회. 정반대의 방향임에도 어딘가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렇기에 양보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서로의 과거를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러나 상대가 이 정도의 진심을 내밀어 온다면… 지금 한 번은 과거의 그림자를 떨쳐내도 될지도 모른다.
오래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레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옮겼다. 조금 떨어진 건물과 건물 사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구석이 있었다. 이 위치에서는 그저 빈 공간으로 보였지만 레프는 제피르에게 답을 전하는 대신 그쪽을 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스틸은 멋쩍은 듯 미소지으며 제피르와 레프 쪽으로 합류했다.
“들켰네요.”
“…처음부터 숨어 계실 생각은 없었던 것 아닙니까?”
“미래를 읽었다는 걸로 해 둘까요?”
뻔뻔하기까지 한 답이었지만 이미 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합류한 이들과 함께 전열을 정비하고 빠르게 마지막 확인을 한 뒤 다시 원래 섰던 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 순간 아스틸이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주위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레프,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
이번에는.
듣는 사람을 믿게 만드는, 또는 믿고 싶게 만드는 어조였다. 반드시 맞아떨어지는 예언을 입 밖에 내는 사람처럼 확신에 찬 눈빛이 레프를 향했다.
단 한 번, 시선을 주고받는다. 그것만으로 마음 깊은 곳에 있던 불안을 몰아냈다. 결국 전부 후회로 귀착될지도 모르지만, 단순한 후회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멀리서 거리를 울리는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밀려오는 파도에 맞서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굳건히 자리를 지킨 채 앞을, 태양이 뜨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후 모르타 섬에 자유가 찾아온 순간으로 기억될 날이었다.
Epilogue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여름의 햇빛은 며칠 사이에 기세가 줄어들어 제법 가을다운 날씨가 찾아왔다. 해변을 산책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그에 맞춰 아스틸과 레프의 옷차림도 모르타 섬에서 처음 만났던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레프는 조끼 위로 붉은 코트를 걸쳤고, 아스틸은 무늬 없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채였다. 꽤 길었던 머리카락은 함께 여행하던 시절처럼 짧게 잘랐다.
아스틸은 여행용 가방을 한 손에 든 채 반대쪽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바다 건너편을 확인했다. 모르타 섬의 본국, 파르카이가 어렴풋하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지금부터 향할 목적지였다. 군부의 중앙본부가 함락된 이후로도 출항이 완전히 정상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었지만 섬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예 불가능은 아니게 되었다. 레프는 섬 내부의 여러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조금 더 머무를 예정이었고, 오늘은 아스틸이 혼자 파르카이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해변을 따라 걸어 항구에 도달했다. 출입국을 통제하기 위해 늘어선 군인들이 이제는 없다는 점이 자유가 찾아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박해 있는 작은 배 앞에서 둘은 한 걸음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했다.
“여기서 작별이군요.”
레프의 말에 아스틸은 가까이 다가가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레프가 장갑을 벗고 마주 손을 내밀자 한 번 꾹 붙들었다 놓았다. 마지막으로 레프의 얼굴을 확인하듯 바라본다. 잠시 작별의 말을 고민했다. 결코 상대의 전부가 될 수는 없지만 주고받은 온기 속에는 분명히 서로의 일부가 있어서, 그 사실을 단어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 결국 짧게 갈무리한다.
“기다릴게요.”
평소에는 변화가 적은 표정에 살짝 미소가 자리하는 것이 보였다. 동반이 아닌 동행, 기약하지 않는 미래, 서로의 곁을 유성처럼 스쳐지나갈 뿐인 관계라고 해도.
“기다리겠습니다.”
어딘가에는 이 다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궤도가 겹치는 순간을 향해.
아스틸은 배 위에 몸을 실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와 돛을 한껏 부풀렸다.
이내 배는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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