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잿빛 괴담

그 동네에 글쎄, 유령이 나온다는 거야.

*등장하는 지명은 모두 가상의 공간이며, 실존하는 장소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잿빛 괴담

(C)떨리고설레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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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쪽 소실천 너머에 있잖아. 아니, 모천동 말고 그 주변 동네들 말야. 거기에 글쎄, 귀신이 나타난다는 거야. 흔히 생각하는 목 달랑거리는 놈이나 침대 시트 뒤집어 쓴 애들 장난감이 아니라, 진짜 사람처럼 생겨선 돌아다니고 말도 하는 유령. 무섭다고?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사실 이 녀석, 은근 착하고 정이 많거든. 소중한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슬쩍 모습을 드러내어, 잠시 그인 척 행세를 하면서 온갖 좋은 것들을 남겨 주고 간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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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더라구요."

 핑맨이 말했다. 하천 건너 그 어디지, 도서관 옆에 무각동 영락빌라 사는 N 있잖아요, 걔한테 들은 이야기에요. 나름 고심해서 고른 화제이건만 악어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소복히 쌓인 눈을 검은 운동화로 꾹꾹 밟으면서 그렇구나, 영혼 없는 한 마디만 던졌다. 무미건조한 반응에 핑맨은 조금 실망했다. 허무맹랑하지 않아요? 끊어진 대화를 애써 이으려고 노력하면서, 핑맨은 발을 재개 놀려 악어의 신발 자국을 쫓아 걸었다. 특히 그 사람이 생전에 쓰던 물건을 쥐여 주면 사라진다는 거요. 그가 말했다. 누가 만들어낸 얘긴지는 몰라도 상상력 진짜 없다, 무슨 마법사 영화에 나오는 요정도 아니고. 당신이 제게 이걸 주셨어요, 저는 이제 자유에요! 하면서 가려나?

 순간 악어가 걸음을 멈춰 핑맨은 하마터면 그의 어깨에 코를 박을 뻔했다. 그러게, 정말 바보 같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야. 악어가 중얼거렸다. 유치하고 아이들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이 심심한, 으응, 뭐 그런 이야기지…. 그리고 한참을 입을 다물었다.

"…근데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요?"

 뜻밖의 반응에 머쓱해진 핑맨이 말을 돌렸다. 그제서야 악어는 원래의 활기 있는 목소리를 되살렸다. 아아, 맞아. 이쪽이다. 그가 복잡한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치고 들어갔다. 여기 보면 벽돌이 빠진 구멍이 있거든? 길치인 것치고는 제법 상세한 안내였다.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한 번 꺾으면 돼.

 핑맨은 제 길에 있는 돌더미를 걷어내며 악어의 뒤를 따랐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따라잡으려면 평소보다 두 배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이건 반칙이잖아. 반쯤 뛰다시피 맞춰 걸으며 핑맨이 생각했다. 치사했다. 악어는 제 다리가 남들보다 한참은 길다는 걸 항상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걷는 속도를 바꾸지 않았다. 저기요, 악어 형님! 몇 미터쯤 앞에서 바람에 찰랑이는 하얀 뒤통수에 대고 핑맨이 소리쳤다. 같이 좀 가죠? 악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느린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약간 걸음을 늦춰 주는 악어였다. 한결 편해진 움직임을 느끼며 핑맨은 악어와 발을 맞추었다. 정말 여기에 편의점이 있는 게 맞아요? 잠시 말없이 있다가 핑맨이 물었다. 지진에 무너져 내린 건물 더미로 길이 막히기 전에도, 사람들이 별로 왕래하지 않았을 것 같은 좁은 골목이었다. 동네 양아치들이나 일진 놀이 하는 중고생들 정도만 몇몇 죽치고 앉아 있게 생긴. 그는 손전등을 들어 옆을 죽 비추었다. 돌로 긁어낸 자국과 스프레이 페인트가 반쯤 메운 벽은, 그 흔한 가로등 빛 하나 받지 못해 어둡고 외로워 보였다. 정말 있다니까, 악어가 대꾸했다. 너 나 못 믿어? 하, 핑맨이 코웃음쳤다.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지 믿죠."  

"난 항상 정직한 사람인데."

 진심이에요? 핑맨이 투덜거렸다. 한번 마음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 보세요. 악어는 크게 팔을 벌려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당연하지, 난 언제나 믿음직하다구? 뮤지컬 배우라도 된 듯 과장되었고, 두꺼운 패딩 탓에 더 우스꽝스러운 동작이었다.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핑맨이 물었다.

"근데 악어님은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요?"

"나야 뭐 혼자 돌아다니다 봤지."

 부럽네요, 핑맨이 말했다. 그래도 악어님이나 되니까 다들 혼자 다녀도 된다고 허락하는 거잖아요. 그는 홀로 동네를 순찰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동료들이 보인 극심한 반대를 떠올렸다. 특히 수닝이 눈깔이 뒤집어져서는, 혼자 나갈 거면 차라리 저를 죽이라고 주장했다. 네가 신체 능력이 좋고 칼을 잘 쓴대서 방심하면 안 돼. 요즘 세상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위험하다고! 그러면서 다른 놈을 꼭 하나씩 딸려 보냈다. 하필이면 시끄러워서 생각 정리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멋사나 중력이 같은 녀석을.

"다들 너 걱정해서 그러는 거지."

 악어가 후후 웃었다. 그건 그렇지만…. 핑맨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애꿎은 안감만 쥐었다 놓으며 괴롭혔다. 나도 가끔은 조용히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한걸요. 거긴 너무 시끄럽다구요. 악어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래서 내가 왔잖아. 그가 팔을 뻗어 핑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방해 안 되게 조용히 있을게, 하고 싶은 거 마음껏 생각해. 그러면서 반대편 손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지금은 말고 조금만 이따가…. 차가운 안개에 가려 그림자만 어렴풋이 보이는 작은 건물이었다.

"편의점 다 왔거든."

"헐, 뭐야."

 핑맨이 감탄했다. 진짜 있네요? 악어가 뿌듯하게 웃었다. 날 믿으라니까. 형 말 들어서 나빴던 적 없잖아? 반박할 말은 산더미였지만 굳이 꺼내지 않았다. 대신 핑맨은 가슴을 가로질러 둘러멘 웨이스트백을 뒤적여 목장갑을 찾았다. 추위에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억지로 구겨넣고, 산산조각 난 유리창 파편을 대충 정리했다. 그를 따라 창틀을 성큼 뛰어넘는 악어의 신발에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조각들이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하세요, 핑맨이 말했다. 넘어지면 크게 다쳐요. 사박사박 부스러기를 밟으며 악어가 대꾸했다. 그러고 있어!

 핑맨은 손전등을 입에 물고 벽면을 더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내었다. 치지직대는 소리에 전구가 나간 줄로만 알았는데, 몇 번 스파크를 튀기더니 아슬아슬하게 켜졌다. 편의점은 어질러진 흔적 하나 없이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서진 창문 밖에서 눈이 조금 들어온 것만 빼면, 누군가가 지금껏 관리해 왔다고 해도 믿을 만했다. 가지런히 물건이 들어찬 가판대를 둘러보며 핑맨이 감탄했다. 

"와, 대박. 아무도 안 온 데네요?"

 악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긴 웬만하면 모르는 곳이니까."

 음료수를 보관하는 냉장고의 전원이 꺼진 게 조금 안타까웠지만, 겨울이라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핑맨이 우유 팩을 손으로 눌러 얼어붙은 정도를 확인하는 동안, 악어는 찌그러진 창고 문을 발로 차 열더니 상자를 내어 왔다. 그를 잠시 창고 문 앞에 세워 놓고 핑맨은 편의점 안을 돌며 가져갈 물건들을 양팔 가득 챙겼다. 라면이나 통조림, 죽과 3분 요리 같이 식량이 될 만한 것들이 먼저였다.

"적당히 챙겨, 나중에 또 와서 가져가면 되잖아."

 핑맨은 악어가 안은 상자에 짐을 와르르 쏟아 놓았다.

"그러면 번거롭잖아요, 일단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죠."

"잠깐 집 갔다 온다고 안 사라져. 무리하지 말고 저녁때 애들이랑 또 와."

 알겠어요, 대답하면서도 핑맨은 가판대를 쓸어 담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햄버거, 샌드위치, 열량 높은 에너지 바와 소세지. 육포랑 부탄 가스, 거기에 땔감으로 쓸 만한 편지 봉투들…. 정말 안 많겠어? 악어는 몇 번 더 권유하다가 이내 포기한 듯, 상자를 내려놓고 문가로 자리를 옮겼다. 새어 들어오는 겨울 바람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고 지나갔다. 추워. 운동화 코로 타일 바닥을 툭툭 차며 악어가 손에 입김을 불었다. 그러게 누가 문가에 서 있으래요. 핑맨은 제 목도리를 벗어 악어에게 폭 씌워 주었다. 찬 공기에 발개진 조막만한 얼굴이 새빨간 더미에 파묻혔다. 굳이 안 줘도 되는데…. 악어가 머쓱하게 웅얼거렸고 핑맨은 고개를 저었다. 저 짐 들고 가려면 거슬리니까 그냥 하고 있으세요. 악어는 수긍하며 늘어진 목도리 끄트머리를 손에 쥐었다. 알았어.

"소주도 몇 병 챙길까요?"

 상자를 안아 올리다가 핑맨이 문득 물었다. 전기도 끊기고 장작으로 쓸 만한 것도 없는 황폐한 도시에서, 술은 추위를 잊게 해 주는 좋은 친구였다. 그런데 얘가 버틸 수 있을까요? 그는 턱짓으로 제가 안은 상자를 가리켰다. 물건으로 꽉 차 찢어질 듯 아슬해 보였다.

"다시 올 때 가져가."

 악어가 망설임 없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내가 봤을 때, 너 분명히 그거 다 못 들고 가거든. 핑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쯤 열린 냉장고 문을 어깨로 밀어 닫았다.

"좋아요."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악어의 안내를 받으며 핑맨은 골목길을 나왔다. 우리 오늘은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을 수 있겠어요. 그가 말했다. 햄도 잔뜩 있길래 몇 개 들고 왔거든요, 양념이랑. 상자를 드느라 손이 부족한 그를 대신해 손전등을 비추다가 악어가 옆을 돌아보았다. 그래? 잘됐네. 즐거운 듯 그가 웃었다. 멋사가 간만에 실력 발휘하겠다!

"아, 그러고 보니 멋사."

 하려고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핑맨이 말했다. 요즘 악어님 만나도 인사 안 하는 거 봤어요? 그러면서 상자를 받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닳을까 봐 목장갑을 벗어 두었더니, 차가운 공기가 에고 지나가는 마디마디가 미치게 시려웠다. 그 자식, 진짜. 그는 손이 조금이나마 덜 아프도록 상자를 고쳐 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리 잘 한다고 몇 번 치켜세워 줬더니 빠져가지고.

"나중에 제가 날 잡고 크게 한 번 혼낼게요."

 그러나 악어는 대답 없이 후후 웃을 뿐이었다.

-

"뭐야, 핑맨이 왔네?"

 어디 있다 왔어, 혼자 나간 거 아니지? 머무르고 있는, 폐허 중에서도 그나마 덜 무너진 건물에서 수닝이 나오다가 아는 척을 했다. 핑맨은 대답 대신 씩 웃으며 상자를 살짝 들어 보였다. 수닝님, 이거 봐봐요. 가득한 식료품들을 발견하자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대박. 그녀가 감탄했다. 요즘 무사한 마트도 별로 없는데, 이런 건 또 어디서 찾아 왔대! 핑맨은 흥분해서 달려드는 수닝을 살짝 피하며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멀쩡한 편의점을 발견했거든요."

 공은 나 말고 악어님한테 돌리세요. 그 사람이 알려 줬으니까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말에 순간 수닝의 표정이 굳어들어갔다. 악어… 님. 그녀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얼굴에 스쳐간 것은, 안타까움과 다른 몇 가지가 뒤섞인 오묘한 표정이었다. 핑맨은 의아해서 고개만 갸웃했다. 어째서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라, 핑맨님."

 창문 틈으로 빼꼼 내민 멋사의 머리통이 머쓱해진 분위기를 환기했다. 멋사야, 이거 봐. 핑맨이가 가져왔어. 수닝의 손짓에 멋사는 그녀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와, 대박. 그가 폴짝 창틀을 뛰어넘었다. 근처에 안 털린 데가 남았어요? 세상에. 햄도 있네, 우리 오늘은 이걸로 뭐 해서 먹으면 되겠다. 상자를 뒤적이며 감탄하다가 멋사가 고개를 들고 문득 물었다. 근데 핑맨님,

"목도리는 또 어따 두고 왔어요?"

 악어님 건데 혹시 잃어버린 건 아니죠? 덧붙는 질문에 핑맨은 눈썹을 홱 올렸다. 뒤에 분명 목도리를 한 악어가 보일 텐데, 저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람. 섭섭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최근 들어 악어에게 싸늘해진 녀석의 태도를 상기하면서였다.

"어디다 두고 왔냐니, 저기 악어님한테…."

 악! 멋사가 갑자기 지른 고함에 핑맨은 화들짝 놀랐다. 언제 기분 좋았냐는 듯, 순식간에 새빨갛게 익어 오른 얼굴로 녀석이 화를 냈다. 또 그 얘기에요? 수닝의 것과 마찬가지로 핑맨이 짐작할 수 없는 이유에서였다. 언제까지 악어, 악어! 제발 그만 좀 하면 안 돼요? 핑맨은 얼굴을 찡그렸다. 오멋사 너, 해도 정도가 있지, 도대체 그게 무슨 실례되는 말이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제발! 멋사가 악에 받친 외침으로 핑맨의 말을 끊어내었다. 살짝 답답해져 핑맨이 맞서 짜증을 내었다. 너 정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악어님 여기 똑똑히 계시잖….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는 입을 열려다 말았다. 늘 있던 무언가의 부재를 깨달아서였다. 멋사가 히스테리를 부릴 때마다 항상 앞장서서 말리던 악어였는데, 이번엔 어째서인지 입을 열지 않았다. 핑맨 형,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소란 탓인지 어느 새엔가 뛰쳐나온 만득이 어깨를 붙잡았다. 억센 악력에 짓눌린 피부가 얼얼하게 아팠다. 언제까지 과거에만 매달려 있을 거에요. 하필이면 악어의 토닥이는 손이 닿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이제 그만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어요?

 순식간에 변해 버린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던 그 때. 고요히 떠오른 가설 하나가 핑맨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유난히 길을 잘 찾던 이질적인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소실천 너머에 있잖아, 모천동 말고 그 주변 말이야. 담뱃불을 꾹 비벼 끄던 N의 목소리가 핑맨의 귓가를 앵앵 맴돌았다. 그 동네에 글쎄, 유령이 나온다는 거야. 아니, 아. 그는 파들거리며 떨리는 눈꺼풀을 깊게 감았다 뜨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이 생전에 쓰던 물건을 쥐여 주면, 아, 드디어 마음을 정리했구나, 안심하고 떠나 버린다지? 그러고는 악어와,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악어가 있었던 자리와 눈을 마주했다. 멋사가 울먹거렸다. 악어님은 옛날 사람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지금 현재라구요. 그러니까 제발, 정신 차려요.

 그 유령은 있잖아, 소중한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슬쩍 모습을 드러내어. 잠시 그인 척 행세를 하면서 온갖 좋은 것들을 남겨 주고 간대.

"악어님은 이미 죽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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