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종말은 잠잠하게

그 날 세상에 있던 사람은 약 78억 명이었다.

종말은

잠잠하게

(C)떨리고설레다 2020

그 날 세상에 있던 사람은 약 78억 명이었다. 너무 커서 가늠조차 잘 안 되는 수치를 직접 증명이라도 하듯, 집 앞의 어딜 나가도 사람들이 붐볐다. 지하철, 영화관, 카페… 빛을 쫓는 날벌레처럼 시원한 곳이라면 어디든 몰려들었다. 오로지 만득만 고장 난 에어컨과 곧 똑같이 될 것 같은 선풍기를 옆구리에 낀 채 집 바닥에 붙어 있었다. 조금이나마 살 만할까 해서 카페에 가려 했지만, 어제처럼 빈자리도 없는 여러 매장을 떠돌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올 게 뻔해 그만두었다. 게다가 에어컨 기사님도 곧 오신다고 했고…. 멋사가 가위바위보 내기에 져서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으니 녀석을 기다리며 조금만 버티면 될 것 같았다. 냉장고에라도 머리를 처박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만득은 털털대는 선풍기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뙤약볕에 잔뜩 달아오른 땅과 생명체의 호흡이 내뿜는 열기로 후끈 더운, 여느 때와 같이 분주한 늦여름이었다.


"…다음 속보입니다.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긴데요,"


 거기까지가 딱 평범한 일상이었다. 겨우 수리한 에어컨을 틀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을 때 들려온 뉴스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그 순간까지가. 대부분의 소식이 그렇듯 제게는 절대 찾아오지 않을 먼 이야기처럼 느껴져서였다. 멋사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채널을 고정하고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아이고야, 영혼 없는 감탄사만 남기며 만득이 차릴 차례인 저녁 식사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나 계란말이 먹고 싶은데. 저녁엔 계란말이 해 주라, 당근이랑 시금치는 빼고. 계란말이는 만득이 자신 있는 분야가 아니었기에, 한참을 설득한 끝에 겨우 계란 후라이로 합의를 봤다. 그러는 동안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밥을 먹자 멋사는 언제나처럼 수박을 잘라 왔다. 만득은 한 조각 집어 들고선 녀석이 쏘아 대는 시시껄렁한 농담에 대꾸했다. 멋사는 수박 씨까지 꼭꼭 씹어 삼키며 습관적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휙휙 돌렸다.


"아까 그거 보면 안 돼?"

"저번에 봤던 건데 또 보게?"


 아무런 불행도 걱정도 없이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던 편안한 순간들. 그걸 만득이 한껏 누리는 와중에도 줄곧 기현상은 지속되고 있었다. 찢어질 듯 울어대는 매미, 밤을 꼬박 새우게 만드는 열대야… 아스팔트 바닥을 달구며 올라오는 토할 것 같은 열기와 모든 것을 견디게 해 줄 서늘한 에어컨 바람.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똑같은 반복에서 얻어지는 안정감에 제가 얼마나 맞춰져 있었는지를 만득은 너무나 뒤늦게 깨달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는 심각했다. 다음 날 눈을 떴더니, 인구 수의 감소를 보도하는 긴급 재난 문자가 수십 통이 쌓여 있었다. 스팸으로 치부하고 지우려던 문자 메시지의 링크에서 만득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고 멋사에게 공유했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심지어는 길거리를 걷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었다. 평범한 월요일 아침의 출근을 태연히 준비하던 멋사가, 신발에 발을 밀어 넣다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여느 때처럼 작업을 시작하려 컴퓨터 앞에 앉은 만득은 대답조차 못 한 채 손톱만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멋사가 영상을 한 번 더 돌리자, 저게 뭐야! 외치는 음성과 달그락, 떨어지는 소리가 텅 빈 침묵을 가득 메웠다. 멋사는 아무 말 없이 뒤로 감기를 눌러 똑같은 부분만 계속 반복시켰다. 무엇이 내었는지 만득은 짐작할 수 없는 소리가 끝없이 재생하여 소음을 만들어냈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만득의 기본 바탕 화면과 제 발에 끼워진 하얀 단화를 번갈아 보다가, 멋사는 도로 신발을 벗었다.


 그날 저녁까지의 인구수는 40억 명 대로 줄어들었다. 멋사는 출근을 하지 않았고, 만득도 빠듯한 마감 기한을 조금이나마 바싹 밀었다. 대신 텔레비전 앞에 앉아 보도를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건을 전부 통계해 얻어낸 결과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의 옆에는 큼지막한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다. 70억, 68억, 54억 명… 새빨간 화살표가 그리는 절벽은 갈수록 가팔라졌다. 무서운걸, 만득은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 차갑게 식은 손을 허벅지 아래로 집어넣었다. 에어컨 바람이 이렇게 서늘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멋사는 담요를 어깨에 꼭 두르고는, 쿠션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텔레비전 화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극한의 감정 상황에서 늘 그랬듯,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하게 몸을 떨며. 꿈이겠지, 만득이 생각했다. 내일 일어나면 달라져 있을 거야. 하지만 다리에 눌려 저린 손의 감각은, 악몽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역시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득이 간절히 바라던 꿈 또한 아니었다. 다음날 지구의 인구수는 10억 명이었다. 또 3억 명, 5천만 명, 7만 명, 850명…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어디로 갔는지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할, 단어 그대로의 '증발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같은 뉴스가 빗발치다가 그마저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뉴스를 전할 앵커들마저 같은 운명을 맞은 탓이었다.


 재앙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길거리의 노숙자부터 카메라 앞에 선 연예인까지, 바깥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라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확히는 주인 없이 길거리에 한둘씩 떨어진 물건들로 이루어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아나운서 S씨가 대표적인 예였다. 공식적으로 국내의 첫 번째 희생자인 그녀는 아무도 듣지 않는 12시 뉴스를 생방송으로 전하다가 실종되었다. 하필이면 뭐라도 보자, 하며 만득이 텔레비전을 켠 바로 그 순간에. 눈을 깜박이는 짧은 찰나에 S씨는 온데간데없었으며, 오로지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만이 조금 더 남아 전파를 타고 전해져 왔다. N기자가 더 자세히 전해 주시겠습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정확히 6일하고도 18시간 47분 13초가 흐른 지금 지구에 남은 건 단 한 명이었다. 적어도 만득이 알기로는 그랬다.


-


 멋사가 사라지던 그 순간을 기억했다. 세 번째 날이었다.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추모하고, 없어질 미래를 장식하자는 허울 좋은 의미에서 모든 경제 활동이 중지되었다. 사람들은 평소에 꿈도 꾸지 못했던 사치품 매장과 코너로 몰려들었다. 한심하다고 만득은 생각했다. 어차피 없어질 일이라면, 차라리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짓을 하는 게 낫지 않은가. 이를테면 평소에 전하지 못했던 말을 건넨다거나,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보낸다거나 하는. 하지만 멋사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녀석은 곧 죽어도 아이스크림은 먹어야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만득은 인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을 그딴 일을 하면서 넘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다. 어쩌면 녀석의 원대로 하는 게 제 바람과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했으므로.


 멋사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편이라 다행히도 몇 개 남아 있었다. 멋사는 과장되게 신나하며(만득이 꾸준히 봐 온 멋사는 불안할 때 오히려 오버하는 경향이 있었다) 냉동고를 열어 냉큼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주변의 모두처럼 계산도 하지 않고 포장지를 벗기다가, 만득이 눈을 깜박한 그 순간 멋사는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철퍽, 반쯤 포장지가 벗겨진 피스타치오맛 콘 아이스크림만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위에 박혀 있던 초콜릿 칩과 과자 부스러기가 처참하게 짓이겨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는 기분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비참하게 죽어 가는 아이스크림의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만득은 주춤주춤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목소리를 내려 목을 쥐어짰지만, 과자 조각이 튀어 박히기라도 한 듯 신음 한 줌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제가 손에 든 아이스크림마저 떨어진 것을 만득은 눈치채지 못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숨쉬기가 어려워서, 만득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렸다. 마트에서 산 싸구려 삼선 슬리퍼가 달아난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대로 집까지.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만득은 소파로 뛰어들어 얼굴을 묻고, 빨라진 심장의 혼란스러움을 꺽꺽대며 삼켰다. 머리가 아프고 숨이 막혔다. 방금 일어난 것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멋사는 만득의 인생에서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기껏해야 서른도 안 된 놈이 오래 알아봤자 얼마겠냐고 되묻는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서도. 만득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먼 고등학교에 배정받았을 때 가장 먼저 말을 걸어 온 게 녀석이었다. 그때의 한 마디를 시작으로 3년 내내 인연을 지속해오다가, 근처 대학에 진학한 김에 함께 시작한 자취가 벌써 5년을 넘어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면 함께 나가 술도 마시고, 상사나 옛 연인 얘기를 되씹은 게 한두 번이던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어 서로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이 거의 없는, 만득에게 녀석은 어떻게 보면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도저히 슬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만득은 멋사를 추모했다. 3일하고도 20시간가량이 흐른 지금까지, 한순간도 빠짐없이 내내. 피곤하다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다거나 하는 생리 현상을 느낄 때마다 만득은 멋사를 생각했다. 제가 녀석과는 다르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실감했다. 배가 고프면, 슬퍼해야 마땅한 이런 상황에서까지 허기를 느끼는 인간의 몸을 역겨워했다. 어차피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데 그냥 굶어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늘 이기는 것은 본능 쪽이었다.


 물 젖은 솜처럼 축 처진 몸을 이끌고 억지로 향한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찬장에도 멋사가 먹던 커피 믹스 반 박스만이 보였다. 만득은 잠시 고민하다가 커피를 두 개 집어들었다. 프림과 설탕의 진한 단맛, 느끼하게 목을 넘어가는 식감. 혈관에 도는 카페인 기운과 커피를 먹은 이후의 텁텁한 우울함은 그닥 좋아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커피 포트에 물을 끓이며 만득은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벗길 때의 멋사의 표정을 떠올렸다. 만득에게는 평범한 아이스크림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오히려 그보다 훨씬 떨어지는 피스타치오 맛 아이스크림이 도대체 무엇이 좋다고. 녀석은 마트뿐 아니라 모 아이스크림 전문점에 갈 때도 늘 그것만 먹곤 했다. 너도 이거 어때? 진짜 맛있어. 매번 똑같은 대답을 알면서도 장난삼아 권하고, 만득이 거절할 때마다 어째서 이런 별미를 안 먹느냐며 틱틱대었다. 내 인생 아이스크림이야. 감히 얘를 모욕하다니 참을 수 없어! 만득은 손으로 눈가를 눌러 뜨거워지는 눈 주변을 억지로 식혔다. 냄새만 맡아도 올라오는 불쾌함이 무슨 상관이야. 그깟 아이스크림 따위, 이젠 얼마든지 먹어 줄 수 있는데.


 멋사는 피스타치오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청록색 포장지를 벗길 때마다 짓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다는 환한 미소. 조금만 과장을 섞자면, 보고 있는 사람 모두를 웃게 할 수 있을 얼굴이었다. 벌어진 일은 분명 비극이었으나 만득은 녀석의 마지막이 그런 웃음으로 마무리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커피 믹스 두 봉을 전부 비웠는데도 여전히 배가 고팠다. 만득은 지퍼백과 비닐 장갑을 넣어 두는 서랍에서 장바구니를 꺼냈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기는 해도 편하고 좋다며 멋사가 항상 들고 다니던, 접으면 딸기 모양이 되는 보라색 가방이었다. 하도 오래되어서 때가 타고 낡았으니 제발 좀 버리라고, 만득이 아무리 잔소리를 해대어도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었다. 이게 다 추억이란 거야. 그럼 나도 늙고 오래되면 버릴 거냐? 뭔가 이상하긴 한데 반박할 말이 없는 건 멋사의 논리가 가진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장바구니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만득은 멋사의 똥고집에 처음으로 감사했다. 순순히 말을 들어 가져다 버렸더라면 지금 이런 기억 따위는 떠올릴 수 없었을 테지….


 만득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천천히 아파트를 나왔다.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으나 아직은 밝았다. 멀리서 노을을 쬐던 고양이 한 마리가 만득과 눈이 마주치자 야옹 하고 울었다. 아랫집의 목소리 큰 남자가 매일 밥을 챙기던 놈이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그가 근처를 지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아났었는데, 갑자기 아는 척을 하는 것을 보면 배가 고프긴 고픈 모양이었다. 미안, 나는 너한테 줄 게 없어. 만득은 입속말로 작게 중얼거리고는, 발걸음을 빨리 놀려 자리를 피했다. 끝까지 저를 쫓는 굶주린 시선을 애써 무시하면서. 슬픈 일이었다. 안타까웠다. 누군가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역시 세상에는 인간이 필요했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길거리는 조용했다. 어디로 갈까 하는 짧은 고민 끝에, 항상 사람들로 붐비던 번화가의 24시간 편의점을 골랐다. 학원에서 우르르 몰려나온 아이들이 안을 꽉 메워야 정상인 시간이었으나 지금은 조용했다. 누군가가 최후를 맞은 듯 배터리가 다 된 휴대폰만 카운터 앞쪽에 떨어져 있었다. 만득은 컵라면 몇 개와 삼각김밥, 우유와 사과 주스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물건이 떨어지다 천에 걸리는 소리가 침묵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 나오라고 징징대는 멋사를 기다리며 들렀을 적엔, 딱 맞게 줄인 교복을 입고 비속어를 섞어 가며 재잘대는 학생들로 지나가기도 힘들었었는데. 그게 고작 일주일도 채 안 된 일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만득은 사람들이 없는 곳의 침묵을 좋아했지만, 그보다 시끌벅적한 거리에 묻혀 있는 쪽을 더 사랑했다. 끔찍했다. 절대 느껴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이 사라지는지 만득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사람이 왜 하필이면 저여야 하는지도.


 지구 최후의 생존자인 줄만 알았던 제 포지션이,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깨달은 게 바로 그 때였다. 저기…. 어설픈 부름이 들렸을 때 만득은 한참을 고민했다. 과연 이게 진짜 사람의 목소린가, 아니면 환청인가?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돌리자, 식료품을 가득 안고 입에는 막대 사탕을 문 여자가 서 있었다. 둥글게 부풀어 오른 볼을 옴찔거리며, 머쓱한지 눈을 데록데록 굴렸다. 만득은 그녀의 하늘색 후드집업과 연분홍 운동화를 훑어보았다. 또 푹 눌러쓴 하얀 볼캡 아래로 흘러나온 봄날의 새싹 같은 연둣빛 머리카락.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어 그녀의 경계를 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환상을 보고 있는지도 여전히 조금은 헷갈렸고.


"안녕."


 그녀가 인사하고는, 저도 어색했는지 괜히 변명을 주워섬겼다. 미안, 사람을 보는 게 하도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그랬어요. 그러더니 양손으로 받치고 든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얼 저리도 많이 먹으려는지, 비죽 튀어나온 파를 시작으로 온갖 식료품이 가득해 꽤나 무거워 보였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손에 만득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여 같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에요?"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난 리타, 소개하는 목소리가 한 조각 우울함 없이 명랑했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을 만득은 알았었다. 사랑받고 컸다는 것이 한눈에 느껴지는, 세상이 제게 너무 친절하고 아름다워서 똑같이 돌려줄 수밖에 없는 사람. 만득… 이에요. 그가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하자, 그녀는 작게 따라 읊조리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제안하는 말투가 너무 익숙해서 만득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우리 집 갈래요? 맛있는 거 해 줄게요.


 리타는 만득보다 세 살이 많은 여자였다. 나이 차이를 알아차리자마자 그녀는 그냥 누나라고 불러, 하며 바로 말을 놓았다.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아 그만두고 카페를 차렸어. 그렇게 말하면서 리타는 깔깔 웃었다. 커피 준이라고 알아? 몇 번 왔던 것 같은데. 그녀의 기억이 맞았다. 단골인 멋사 따라 만득도 들른 적이 있었다. 프랜차이즈도 아닌데 근방에서는 제법 유명해서, 크진 않아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고 녀석이 자랑하던 소리를 똑똑히 기억했다. 친절하기로 소문난 주인이 저 사람인가…. 생각하며 만득은 리타의 옆얼굴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냄비를 내려놓으며 환하게 웃는 입꼬리와 따라서 살짝 처진 눈썹이, 자기 일에 만족한다는 것을 열렬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적당히 손이 가는 일 하다가 전공 따라 살고 있는 만득과는 비교되게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부대찌개로 만득은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어색하더라도 인사는 하는 게 예의 같아 적당한 말을 열심히 찾아 주워섬겼다. 두툼한 주방 장갑을 벗으며 리타가 뿌듯하게 웃었다. 맛있을 거야, 가장 자신 있는 요리니까. 동생(그때 미소에 스쳐 지나간 희미한 슬픔을 만득은 잡아내었다)이 이걸 진짜 좋아했거든. 그러더니 리타는 축 처지려는 분위기를 띄우려는지, 만득이 어설프게 든 수저를 보고 깔깔대었다. 부담 갖지 마, 그냥 편하게 잡아.


"잘 먹겠습니다!"


 그녀가 경쾌하게 외쳤고 만득도 따라 웅얼거렸다. 잘 먹겠습니다.


 리타보다 한 살 어린 그녀의 동생은, 잠시 마트에 다녀오겠다며 나갔다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누가 봐도 남자 방이라는 게 느껴지는, 풋풋한 남성용 향수 냄새가 나는 옷장에서 리타가 잠옷을 꺼내었다. 만득은 제 앞에 내밀어진 옷을 살짝 마땅치 않아 하며 받아들었다. 하얗고 큼지막한 티셔츠와 남색의 세 줄 반바지. 혹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잘 빨아 정리해 놓았다던 리타의 동생 것이었다. 내가 세상의 마지막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을 때 나는 정말 기뻤어. 옷장 문을 닫고, 여전히 만득에게 등을 보인 채로 리타가 말했다. 그러니까 너는 사라지기 전까지만이라도 나랑 함께 있어 줬으면 좋겠어…. 집에 가지 말아 달라는 부탁에 만득이 얼핏 비친 곤란함을 염두에 둔 듯한,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어떻게 초면인 사람을 이토록 신뢰할 수 있는가, 만득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오늘 처음 말을 섞은 사람을 집에 들이고, 심지어 자고 가라며 권할 수 있지? 쏟아지는 온갖 뉴스들로부터 그가 추론한 세상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적진 한가운데였으므로.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약간이나마 공감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 그녀와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던 녀석과 오래 지내 와서가 아닐까 싶었다.


 만나는 이마다 천사인 사람들이 간혹 있다. 애정 어린 말만 듣고 보기 좋은 것들만 알고 자라 온몸으로 아름다움만 뿜어내는 사람들. 세상이 제게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랑할 가치 있는 자들이라고 만득은 정의했다. 그들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웃음을 웃었다. 몇 명 더 만났었지만 바로 떠오르는 건 둘이었다. 리타, 그리고 만득이 그렇게 그리는 멋사. 모두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기에 초면인 이에게 다가가는 데 별로 망설이지 않는 것이겠지. 그들은 세상을 사랑했고 세상 또한 그러하였다. 그들이 사랑스러운 사람이기에 좋은 인연만 만났는지, 아니면 좋은 인연만 만났기에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 것인지. 순서가 항상 의문이었지만 만득은 결론지을 수 없었다.


"응?"


 리타가 대답을 갈구하듯 말간 눈으로 만득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렇게 애달프게 짓는 미소를 어떻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만득이 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리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우리 영화 보자! 그녀는 신이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은 만득을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나쵸와 콜라를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꺼내오더니, 저는 소파 아래쪽 매트에 앉았다. 큼지막한 쿠션을 하나 끌어안고 간식을 만득에게도 권했으나, 입맛이 별로 없어서 만득은 거절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다 먹을게?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지면 어쩌지,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리타는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과자 그릇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거 알아? 진짜 재밌어, 약간의 감상평을 곁들이며 리타가 틀어 준 것은 판타지 애니메이션이었다. 화려한 이펙트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열정과 독기와 배신으로 가득한 대사들이 이곳저곳을 날아다녔다. 만득은 영화, 특히 만화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사라진다면, 그건 내 눈앞에서여야 해. 남동생의 이야기를 하다가 지었던 리타의 결론에 대신 정신을 사로잡혀서였다. 언제 어디서였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헤어지는 건 싫어…. 애틋하고 처량하게, 비에라도 흠벅 젖은 것마냥 축 늘어지는 목소리로 리타가 중얼거렸을 때 만득이 떠올린 이는 멋사였다. 항상 낙관적으로 세상을 살던 사랑스러운 오랜 친구, 숨 막히게 끈적거리며 녹아내리던 아이스크림으로 귀결된 짧은 인생. 그러니까 없어질 거면 내 눈앞에서 해! 다시금 강조하는 말에 만득은 튀어나오려던 말을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오히려 그편이 더 힘들걸요…. 대신 침묵으로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다.


 요란한 테마곡이 울려 퍼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고 나서야 만득은 겨우 생각에서 벗어났다. 다른 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영화에는 하나도 집중하지 못했다. 어땠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며 몸을 일으키다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리타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할 줄 아는지 쿠션을 더 꼭 끌어안고선 몸을 잔뜩 말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그릇이 기울어져서 나쵸 몇 개가 머리맡엘 굴러다녔고, 얼굴을 가로질러 흩어진 머리카락이 쌕쌕 고르게 내뱉는 숨에 살랑대며 흔들렸다. 만득은 입안으로 흘러 들어간 끄트머리를 잡아당겨 빼내 주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대신 방향을 바꾸어 과자 부스러기를 줍고, 먹었던 자리를 대강 정리했다. 그러고는 소파에 도로 앉았다.

 소중한 사람의 부재에 인간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만득이 최근 며칠 사이 가장 깊게 생각했던 논제였다. 이전에도 궁금해한 적은 잠시 있었으나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내가 고른 것은 옳은 방법인가? 세상에 존재할 수많은 반응 중 만득이 선택한 쪽은 회피였다. 그는 멋사의 것들을 모조리 집어넣고, 방문을 꼭꼭 닫아 잠근 채 애써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다시 마주했다가는 제가 어떤 기분을 느낄지 상상하고 싶지조차 않아서. 반면에 리타는 괴로울수록 부딪히려는 성향의 사람 같았다. 언젠간 굳은살이 생기리라고 굳게 믿기에, 도망치기보다는 맞서 싸우기를 택하는. 만득은 옆에 놓인 검은 고양이 모양 쿠션을 꾹 눌렀다.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었다.


 영화를 틀어 주면서 리타는 쉬고 싶거든 동생 방 침대를 사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불이랑 다 빨아 뒀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누워! 만득은 고개를 끄덕여 답했지만 제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리타의 동생 방에 감히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멋사의 방을 내어주지 못하는 것처럼. 리타는 그렇게 함으로써 괴로움을 이겨내는 사람일지 몰라도 만득은 아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리타의 방에 들어가 베개와 이불을 챙겨왔다. 에어컨 바람에 감기 들지 않도록 어깨까지 꼼꼼히 덮어 주고선 저는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쪽잠을 청했다.


-


 정신이 멍했다. 머릿속을 꾹 압축해 놓아 공간이 너무 많이 생긴 기분이었다. 만득은 옷장의 선반과 작년에 산 크림색 캐리어 위로 손만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삐걱대는 팔이 마치 제 것이 아니기라도 한 듯 어색했다.

 가져갈 물건은 생각보다 적었다. 잠옷으로 입는 반팔 티셔츠, 바깥에 나갈 때 종종 걸치는 얇은 셔츠, 거기에 바지와 양말. 잠시 망설이다가 속옷도 몇 개 챙겨 넣었다. 늘 옷장이 꽉 차 있어, 매일 집에만 처박혀 있는 프리랜서치고는 제법 옷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캐리어에 담으려고 보니 봐줄 만한 게 몇 개 없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들은 얼룩이 묻어 있어 남한테 보여주기는 조금 그렇고. 만득은 반의 반도 안 찬 캐리어와 거실을 구경하는 리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실 제가 어쩌다 집에 와서 이렇게 짐을 싸고 있는지 만득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리타가 아침부터 흔들어 깨워서 밖에 나가자고 졸라댄 이후로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너희 집엘 갈 거야. 잠에 겨워 게슴츠레 뜬 만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리타가 통보했다. 잠자리가 꽤나 불편했을 텐데도 여전히 활기찬 모습이었다. 네? 만득의 소심한 반발은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나갈 준비를 끝마친 까닭이었다.

"짐은 챙겨 와야 될 거 아니야. 어서 가자!"

 아침은 갔다 와서 먹자, 뭐 먹고 싶은지 천천히 생각해 둬. 그러면서 리타가 하얀 볼캡을 머리 위로 푹 눌러썼다. 낮이라 그런지 후드집업 대신 병아리를 닮은 노란색 반팔을 입었다. 아래에는 워싱이 들어간 찢어진 진청 반바지. 볼 사람도 없는데 선크림을 꼼꼼히 바른 팔다리가 하얬다. 연보랏빛 굽 높은 슬리퍼 바깥으로는 새파란 페디를 한 발톱이 도드라졌다. 바다를 닮은 로열 블루의 바탕에 큼지막한 보석 파츠를 붙여, 여름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화려한 디자인이었다. 한참을 쳐다보는 만득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리타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예쁘지? 그저께 했어."


 네…. 만득은 어설프게 대답하며 신고 왔던 하얀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시원해 보여요. 조금 성의 없어 보일까 봐 황급히 덧붙였다. 어디서요, 누가요, 설마 직접 하신 거에요? 생각나는 각종 질문을 몽땅 꺼내기에는 부족한 말주변을 아쉬워하면서. 하지만 리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기분 좋게 웃었다. 집에서 직접 발랐지. 여름에는 역시 파란색 아니겠어?


 만득은 옷장 구석에 처박혀 있던 새파란 티셔츠를 찾아내었다. 약간의 보랏빛을 제외하면 리타의 발톱과 거의 흡사한 색이었다. 여름에는 역시 파란색 아니겠어, 똑같은 말을 하며 멋사가 사 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안 어울린다고 몇 번 입지도 않고 만득에게 주어 버렸지만. 만득도 파란색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아무데나 넣어 둔 탓에 조금 구김이 갔지만 그럭저럭 봐 줄 만했다. 만득은 그걸 잘 개켜서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한참은 텅 빈 자리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만득은 벌떡 일어나 제 것이 아닌 방으로 향했다. 멋사의 옷장에 빽빽하게 걸린 옷 중에는 분명 만득의 것도 몇 벌 섞여 있을 터였다. 만득이 가끔가다 진짜 괜찮은 옷을 샀을 때면 멋사가 빌려 입고선 종종 까먹었으므로. 그러니까 그것만 가져가는 거야. 만득은 다짐하며 잠가 두었던 문고리를 돌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다른 물건엔 손대지도, 아예 보지도 않을 테니까, 그럼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말도 안 되는 생각임은 만득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문이 반쯤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을 때, 만득은 바보 같은 헛소리나 지껄이고 앉았던 십 초 전의 저를 죽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멋사가 좋아하는(좋아하던- 만득은 현재형을 과거형으로 바꾸는 연습을 해야 했다) 색 중 하나인 청횟빛 벽지, 검정 위주의 깔끔한 인테리어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어질러진 방. 의자에는 마른 수건이 대충 얹어져 있고, 벗어 둔 양말과 종이 뭉텅이들로 정신 사나웠다.

 잠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던 만득은, 무슨 일인가 하여 리타가 나와 보았을 때에야 겨우 문을 닫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리타가 걱정스레 물었고 그는 꾸역꾸역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리타는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다행히도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펼쳐진 만득의 캐리어로 화제를 돌렸다.

"저게 전부야?"

"네…. 별로 없네요."

"괜찮아."

 리타가 어깨를 으쓱하며 밝게 말했다. 그럴까요, 작은 질문을 던지고선 만득은 허리를 숙여 캐리어를 닫았다. 어차피 너도 곧 사라질 테니까, 따위의 대답을 기대했지만 이어진 말은 정반대였다. 리타가 짐을 덜어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만득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옷이야 백화점에나 가면 되지. 그녀가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내일 같이 가 줄게.

"짐 다 쌌으면 이만 나갈까?"

 지글지글 익어가는 4차선 도로 한복판을 만득은 걸었다. 그의 집에서 가져온 에이포 용지 몇 장으로 리타가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거기서 가끔 넘어오는 바람이 땀에 젖어 달라붙은 만득의 귀밑머리를 식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나 끌고 올걸, 리타가 투덜거렸다.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까 장롱 면허라도 상관없잖아. 만득은 대답 대신 그녀와 발을 맞춰 걸음을 재게 놀렸다. 털털대며 굴러가는 캐리어의 바퀴가,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를 빼면 거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그게 너무 머쓱해서 만득은 차라리 배낭을 가져올걸, 하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랬다면 적어도 생각을 정리할 침묵 정도는 생겼을 텐데.


 그때 비가 내렸다.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던 빗방울은 만득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폭우가 되어 그를 덮쳤다. 순식간에 젖어 들어가는 옷에 만득이 당황해서 리타를 쳐다보았다. 근처에 비를 피할 만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리타는 잠시 망설이더니 저 끝을 가리켰다.


"우리 카페 가자!"


 허겁지겁 밀어젖힌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급하게 들이닥쳤음에도, 유리문 위쪽에 달아 놓은 종은 맑게 땡그랑거리며 오랜만의 손님을 반겼다. 혹시나 해서 열어 뒀지, 리타가 뿌듯하게 웃으며 앞서 들어갔다. 난리 통에 열쇠를 잃어버린 건 절대 아니고!

 베이지와 갈색 위주의 인테리어가 포근한 느낌을 주는 카페였다. 앉으면 쑥 들어갈 것 같이 생긴 소파에는 귀여운 토끼 모양 쿠션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의자에 폭 파묻혀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을 만득은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아무 데나 편하게 앉으라는 리타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 옷에 예쁜 천이 젖는 게 신경 쓰였다. 리타를 따라 카운터 앞으로 향하자, 비에 젖은 운동화 밑창이 카페 바닥의 타일과 마찰하며 삑삑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에어컨 틀까?"

"더워요?"

"그건 아닌데."


 그럼 괜찮아요, 만득이 대답했다. 축축하고 습했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조금 시원해진 것 같기도 했고. 리타는 카운터에 놓인 수건에 아무렇게나 손을 닦았다. 그럴게, 그녀가 종알거렸다. 에어컨은 역시 조금 춥겠지?


"뭐 좀 마실래?"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리타가 냉장고를 확인했다. 다행이다, 대부분 그대로 있네. 다들 여기서 가져갈 생각은 못 했나 봐. 혼잣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만득은 메뉴판을 올려다보았다. 아기자기한 글씨와 일러스트가 깔끔한 블랙 보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이스티로 부탁드릴게요, 잠시 고민하다 가장 간단한 걸로 골랐다. 좋았어, 리타가 과장되게 외치며 어디선가 등장한 앞치마를 질끈 졸라매었다. 반쯤 걷힌 커튼 너머로 여전히 쏟아지는 비를 넘겨다보면서, 만득은 카운터에 놓인 토끼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음료수는 금방 준비되었다. 리타가 만득의 앞에 아이스티를 내려놓으며, 제 카페라떼를 빨대로 달그락 저었다. 어떡해, 너 아침도 안 먹었잖아. 시곗바늘은 어느새 정오를 조금 넘겨 가고 있었다. 케이크라도 줄까? 만득은 달큼한 복숭아 향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보일락말락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의상 거절하기에는 사실 배가 고팠다.

 만득은 바지런히 냉동고를 뒤적이는 리타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음료수를 길게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금세 따뜻하게 데운 케이크를 내왔다. 감사합니다, 만득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며 포크를 들었다. 한 입 떠낸 치즈 케이크는 부드럽고 지독히도 달았다. 이에 힘입어 만득은 내내 이질적이던 한 가지의 점을 겨우 짚어내었다. 리타… 누나. 폐와 기도를 꽉 메우고 앉아, 그를 수십 번의 망설임과 수백 번의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든 의문이었다.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고는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바로 질문을 던졌다. 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어요? 조금만 뜸을 들였다간 오히려 묻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왜 굳이 미래를 대비하세요? 왜 하루하루가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살아가세요? 어차피 다 사라질 텐데요, 누나도, 저도.

 우리 모두가.

"응?"

 리타가 카페라떼를 쪽 빨아올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확실한 미래를 어째서 대비하냐고 묻고 싶은 거야? 그녀는 잠시 고민하면서 제 케이크를 포크로 푹푹 찍었다. 그러다 대답했다. 나는 그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해. 인생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대비해야 하는 거야.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확고한 신념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렇게 따지면 어차피 세상의 모든 것은 죽어, 그런데 우리는 왜 살아? 당장이라도 가서 뛰어내리면 되는 걸.

 만득은 잠시 말문이 막혀 멍하니 있었다. 새로운, 그의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가치관에 압도되어서였다. 나는 과거에 붙잡혀 살고 싶지 않아. 리타가 말했다.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해. 그러더니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난 사라지지 않을 거야. 누가 와서 그런 걸 권한다면, 정중히 사양할게. 정작 그렇게 말하는 태도는 하나도 정중하지 않았다.

"그딴 운명 따윈 필요 없으니까 가서 엿이나 먹으라지."

 

 여전히 할 말을 찾을 수 없어 만득은 침묵했다. 나는 사라지지 않을 거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완전히 부인하는 그녀의 결론이,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머릿속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다. 그런 운명 따윈 엿이나 처먹으라지…. 말해 놓고선 조용해진 분위기에 머쓱해졌는지, 리타가 창밖을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비도 그쳤는데, 우리 그만 집 갈까? 밥도 먹어야지."

"…케이크 먹었잖아요."

"그걸로 밥이 되니!"


 인간의 몸짓이 하나도 없는 오후를 유일하게 밝히는 건, 빗물에 젖어 반짝이는 깨진 가로등 파편뿐이었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리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 하나 묻어나지 않았다. 제가 신은 하얀 운동화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만득은 걸음을 옮겨 리타의 뒤를 따랐다. 어째서인지 이해할 수 없는 희망찬 확신을 가득 담은 채였다. 그래,


 우리는 종말하지 않으리라.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