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이장님과 사장님

뒷세계 생활 청산한 악어와 다시 꼬드기려는 핑맨

악어팬카페 김심령(leef***)님이 쓰신 동명의 썰(https://m.cafe.naver.com/bjcrocodile/3328769)을 기반으로 작업했습니다.

본인은 뉴띵마을을 보지 않았으므로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설정 오류를 발견하시면 말씀주세요.

(C)떨리고설레다 2020


-01-

 잠을 막 깨면 늘 그렇듯 기분이 멍했다.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등줄기를 긁으며, 핑맨은 커튼을 확 걷어 햇빛을 들였다. 하도 안 닦아서 손때와 빗자국이 그대로 얼룩진 유리창을 뚫고 빛줄기가 새어들어왔다. 쓸데없이 밝은 빛에 눈이 부셨다.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는 핑맨은 침대에서 굴러내려왔다.


 빌어먹게도 또 다시 아침이었다. 아니, 아침은 아닌가?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다가, 핑맨은 반쯤 기울어진 채 아슬아슬 매달려 있는 시계를 흘긋 바라보았다. 지금이, 열한 시… 먼지가 꼈는지 분침 끝이 흐릿해, 눈을 작게 떠야 겨우 보였다. 숫자 9를 살짝 넘어 간 바늘. 정확히 정오가 되기 14분 전이었다. 시간을 인식하니 배가 고팠다. 식탁 위에 어제 남은 빵 조각이 있었는데 별로 먹고 싶게 생긴 모양은 아니라. 돌아다니다 보면 누가 주겠지, 하고 그냥 집을 나오기로 했다.


"…아."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벌컥 밀어 열다가 핑맨은 하마터면 앞에 선 누군가의 면상을 후려칠 뻔 했다. 다행히도 직전에 반 걸음 뒤로 물러나 잘생긴 얼굴을 보존한 악어는, 생글생글 미소를 유지하며 새하얀 바구니 하나를 핑맨에게 안겼다. 조금 묵직하다, 싶은 무게 위에 예쁘게 덮인 녹색과 하양의 체크무늬 천. 얼떨결에 받아 들고서, 핑맨은 천을 걷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사과 두어 개, 우유 병, 꿀이 들어 있게 생긴 작은 단지에… 빵도 들었네? 식빵의 노릇노릇한 표면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 보자 미미하게 남은 온기가 느껴졌다. 


"뭐에요."

"아침 안 먹을까 봐. 우리 주민들 등골 빼먹지 말고 이거나 먹어."


 아아, 아침은 아닌가… 하고 덧붙이는 악어는 여전히 생글생글 예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부드러운 말투가 어쩐지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짐짓 놀라는 척을 하며 핑맨이 말했다. 세상에, 등골을 빼먹는다구요?


"악어님,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저를 도대체 어떤 놈으로 보시는 거에요…."


 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순간 악어의 얼굴이 싸하게 물들었다. 예전에 수도 없이 봐 온, 눈썹을 살짝 모으고 입꼬리를 늘어뜨린 싸늘한 정색. 핑맨은 아하하 소리내어 웃고 싶은 기분을 겨우 참아내었다. 그럼 그렇지, 사람이 그새 바뀌었을 리가 없잖아. 바구니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 들고 다시 올려다보았더니, 악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예쁘게 웃고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따라 웃으며, 핑맨은 매끈매끈 윤기가 흐르는 사과를 크게 베어물었다. 이가 박히자마자 스며나오는 과즙이 달콤했다. 악어가 말했다.


"맛있게 먹고, 나한테 민원 좀 안 들어오게 해라."

"노력은 할게요."


 입 안을 과육으로 가득 채우고선 핑맨이 웅얼거렸다.


"근데 악어님도, 소꿉놀이는 이제 지겨울 때 되지 않았어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애들 장난이야, 웃음기를 섞어 덧붙이는 말에 악어의 미소 표면이 쩌적, 작게 갈라졌다. 어떻게 대답할까, 핑맨은 사과를 마저 씹어 삼키고는 그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애써 표정을 추스르고는 악어가 말했다. 글쎄….


"…난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또 이렇게 나오시려고? 핑맨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악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천천히 돌아섰다.


"어디 가서 헛소문이나 퍼뜨리지 마. 진짜 간다."

"…일단 안녕히 가십쇼."


 쩝. 핑맨은 입맛을 다시고는 깊게 파인 사과의 잇자국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뭐가 헛소문이란 건지… 난 항상 옳은 말만 하는구만. 어울리지 않게 종종거리며 멀어져 가는 악어의 뒷모습을 잠깐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밥이나 먹어야겠다.






-02-

 핑맨이 사는 세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악어, 얼핏 들으면 동물하고 착각할 법한 이름의 그 남자가 손을 떼겠다고 선포한 지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도. 심지어 그는 바깥의 사람들에게마저도 만만찮게 유명했다. 핑맨의 세계에 한 번이라도 발을 담가 본 놈은 물론이고, 이제 갓 발끝을 적신 풋내기들마저도 사장 악어, 라는 옛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핑맨은 꿀 스푼을 들어 빵에 꿀을 덜었다. 벌통 모양의 나무 스푼을 따라 뚝뚝 흘러내리는 금빛 액체에 절로 침이 고였다. 촉촉하게 젖은 식빵을 반으로 접어 크게 한 입 베어 물면서, 자기 전에 우체통에서 꺼내 둔 편지 다발을 뒤적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검은색 씰로 봉인된 편지 봉투였다. 봉투에는 구멍을 뚫어, 작은 돈주머니에 달아 두었다. 핑맨은 검은 주머니의 은빛 실을 풀어 열고, 안에 든 걸 확인했다. 둘, 넷, 여섯…. 상당한 수의 금화였다. 나머지 빵을 입 안에 욱여 넣고, 핑맨은 끈적한 손으로 편지봉투를 뜯었다. 이번에는 누구일까나?


 평범한 편지지 세트에 새빨간 글씨, 봉인은 검은 실링 왁스. 의뢰금의 절반은 실패해도 회수 불가한 선금으로, A사의 검은 돈주머니에 넣고 동일 회사의 은색 실로 묶어서 편지와 동봉할 것. 청부 살인을 전문으로 하는 해드림의 사장 핑맨에게 의뢰를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었다. 빵을 삼키다가 사레가 들려 황급히 우유를 벌컥이고, 핑맨은 봉투를 뜯자마자 나오는 이름을 읽었다. 성별조차 추측할 수 없는 날카로운 글씨체로 빼곡하게 이름과 신상 정보가 적혀 있었다.


 악어, 키는 약 190cm에 마른 체격. 나이는 확실치 않으나 스물 일곱에서 서른 사이로 추정. 보기 드문 하얀 머리에 녹색 눈동자. 현재는 뉴띵마을의 이장으로 해당 마을에 거주 중. 스물 셋 전후의 사진으로 보내 드립니다.


 동봉된 사진은 반쯤 몸을 돌려 카메라를 응시하는, 지금보다는 조금 앳된 모습의 악어였다. 이마에 얹힌 선글라스를 한 손으로 밀어올리며, 얼굴에는 당시에 지겹도록 짓던 영업용 웃음을 띠고. 입고 있는 녹색 하와이안 셔츠와 똑같은 것이 빨강으로 핑맨의 옷장에도 있었다. 무지로 갈아탄 지 오래되어서 쓸모도 없는 옷이었지만 아직 버리지 못하고 남겨 둔 채였다.


"이야."


 핑맨이 감탄했다.

"인기쟁이네…"

 가끔은 부러울 정도라니까? 악어의 의뢰가 들어온 것은 두 손으로 꼽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일단 그만 둔 이후로 핑맨이 모아 둔 사진만 열세 장. 손을 떼기 전까지 합치면 손발을 전부 합쳐서 세도 모자랐다. 의뢰금은 또 얼마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한 몇 년 놀고먹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도대체 돈을 얼마나 뜯어먹은 거야?"


 옛날 악어의 별칭은 도박의 왕, 판만 열렸다 하면 미친 듯이 쓸어담는 그의 모습을 핑맨은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매번 본 이도 그러는데 어쩌다 한 번, 그것도 적의 위치에서 겪은 놈은 어떠할까. 원한 살 만 했지, 했어…. 중얼거리며 핑맨은 서랍을 열고 악어의 사진과 편지를 쑤셔넣었다. 아무리 큰 돈이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


"정말 마지막 경고입니다."

"지금이 벌써 다섯 번째 마지막인 거 알아?"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도, 악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치자 오히려 움찔한 쪽은 핑맨이었다. 여전히 생긋생긋, 특유의 예쁘장한 눈웃음이 어째서 이렇게 소름돋게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제가 당황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 핑맨은 일부러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슬슬 그만 하시죠. 그만하면 재미 다 보셨지 않습니까."

"…이거 얼마 받고 하십니까?"


 그러나 악어에게서 역으로 돌아온 질문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종류의 것. 심지어 말투도 가끔 분위기 잡을 때만 쓰는 존댓말인지라, 핑맨은 얼떨결에 대답해 버렸다.


"꽤 많이 받았… 근데 왜요?"

"아, 별 건 아니고."


 하하, 악어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냥 제가 그 사람 도로 청부할까 해서."


 그러면서 쥐여 준 주머니가 묵직했다. 본인 전문 분야면서, 왜 직접 안 하시고, 하는 말이 쏙 들어갈 만큼. 핑맨은 급하게 끈을 풀고 속에 든 금화를 확인했다. 넷, 다섯, 열둘에… 스물. 이 사람 보소? 핑맨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악어를 쳐다보았다.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태연스레 물었다.


"부족한가요?"

"…그럴 리가요?"


 악어가 말했다.


"의뢰 양식이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괜찮은가요?"

"아, 하하… 그럼요. 어떤 분이신데."


 핑맨은 애써 입꼬리를 말아올리면서 미소지었다. 의뢰인을 보호하기 위해 청부 살인은 무기명으로 진행한다는 해드림의 원칙 따윈 더 이상 알 바가 아니었다. 글씨체로 사람 특정하는 일이야, 지겹도록 해 온 전문가에게 맡기면 될 테고.


"처리는 확실한가요?"

"당연하죠. 옛날부터 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머리라도 드릴까요? 조용히 묻자 악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그러면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섬득했다. 그냥,


"…조용히 처리해."







-03-

 큰 키를 접어 가며 농작물을 돌보고 있던 악어는, 핑맨이 밭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몸을 돌리고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지난 달엔가 실수로 당근을 밟아 죽인 이후로 그는 핑맨이 밭에 들어올 때마다 늘 그러곤 했다. 어차피 경계 태세라고 해 봤자 생글생글 짓는 미소를 조금 거두는 정도에 불과했기에, 핑맨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악어가 있는 안쪽까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래도 당근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밀짚모자를 쓰고 목에 수건까지 두른 게, 정말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었다. 멜빵바지에 파란 장화까지 신으면 더 완벽할 텐데. 악어의 목에 둘린 녹색 수건에는 하얀색 꽃 자수가 들어가 있었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이곳의 그는. 누구의 솜씨인지, 송이송이 곱게도 놓인 꽃봉오리들에 시선을 주며 핑맨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장님. 수건 예쁘네요."


 어째서인지 악어는 핑맨에게 이장이라고 불리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핑맨은 이장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쓰곤 했다. 과연 효과는 바로 나타나, 악어는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웃음기를 싹 지우고 얼굴을 구겼다.


"안 물어봤는데."


 아하하, 핑맨이 웃었다.


"왜 그렇게 까칠해요. 누가 거슬리게 해? 그런 놈들은 그냥 죽여버리세요, 악어님 잘 하는 거 있잖아."

"너."

"예?"

"니가 빡치게 하는데, 너 썰어도 되냐?"


 하하하…. 핑맨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애써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농담도 잘 하셔, 우리 이장님은! 능숙하게 받아 넘기고 그는 악어처럼 쪼그려 앉았다. 손바닥이 빨간 목공용 장갑을 낀 악어의 손에 풀떼기들이 슉슉 뽑혀나왔다. 곁에 수북히 쌓인 잡초 더미에서, 핑맨이 싫어하는 옅고 풋풋한 풀 냄새가 났다.


"도와드릴까요?"

"괜히 잡초 뽑는답시고 당근 죽이지 말고 가지?"

"아이, 그 때는 어렸고! 저도 이제 다 컸으니까 이런 건 할 줄 알죠. 제가 또 손재주 좋기로 유명하잖아요?"

"누가 그래?"

"제가요."


 악어는 잔뜩 얼굴을 구기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짜증을 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저는 이미 열 번은 더 찢겨 죽고도 남았을 테다. 멋사와 남봉의 의뢰를 받아 누구에게였더라, 한번만 더 쓰레기 같은 건축물을 세우면 찢어버리겠다고 전했던 협박처럼. 핑맨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자, 악어가 눈을 흘기더니 투덜거렸다.


"…나는 그냥 네가 나가 뒤져도 좋겠다고 생각해."

"저도 악어님을 좋아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제가 죽으면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이 슬퍼하겠어요…"

"………."

"안 돼요, 악어님… 죄송하지만 저는 그렇게 못된 사람이 될 수 없어요."

 악어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손을 뻗어 핑맨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흙이 묻은 장갑의 까슬한 촉감은 둘째 치고, 어마어마한 악력이 목 근육을 눌러와 핑맨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아아아아! 아파요!"

"적당히 좀 해라…"

"이장님이 사람 잡는다! 도와주세요!"

 그러나 목덜미에 가해지는 힘은 갈수록 세질 뿐이었다.

"이장님!"

"아, 무슨 일이에요?"

 멀리서 누군가가 불렀을 때에야 악어는 핑맨을 놓아주었다. 핑맨은 얼얼한 목덜미를 문지르고, 어깨를 움직여 뭉친 근육을 풀었다. 목을 돌릴 때마다 뿌드득거리며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아으… 소리 들려요?"

 어느새 웃는 낯으로 돌아온 악어를 흘겨보자, 그는 그대로 도르륵 눈만 굴려 핑맨을 쳐다보았다. 함박 밝은 웃음을 짓느라 잔뜩 접힌 애굣살 아래에서 혼자 싸늘한 눈동자가 물었다. 어쩌라고? 핑맨은 어이가 없어져 신발로 애꿎은 흙덩이만 툭툭 찼다. 하, 내가 진짜, 참.

 악어를 불렀던 주민이 다시 외쳤다.

"이거 좀 봐 주실 수 있어요?"

"금방 갈게요!"

 악어는 핑맨의 발에 걸려 흩어진 잡초들을 대충 모아다 더미 위에 얹었다. 옆에서 몇 마디 깐족대는 핑맨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주변 정리가 얼추 끝나자 목장갑을 벗어다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흙 부스러기 몇 개가 악어의 바짓자락에 떨어졌다. 그걸 털고 싶어 반쯤 손을 뻗었다가, 핑맨은 이내 마음을 바꾸고 거둬들였다.

"…내 밭에서 당장 안 꺼지면 죽여 버린다."

 자리를 떠나려다가 악어가 으르렁댔다. 핑맨에게만 겨우 들릴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위협할 목적이었다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솔직히 조금 찔끔한 것을 애써 감추며 핑맨이 덧붙였다. 와, 지금. 이장님이 주민들 협박하는 거에요?


"이거 어디 무서워서 살겠나."


 뒤에서 뭔가가 뎅강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핑맨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밭을 유유히 걸어나왔다.




-04-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핑맨은 고개를 반쯤 들어올렸다 곧장 떨어뜨렸다. 늘어진 채소 잎에 시야가 가려, 목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이장의 밭이라는 걸 그는 알았다. 애초에 알고 들어온 곳이었으니까.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악어였을 뿐. 한때 같은 부류였던 사람이니 정 때문에라도 도와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에서였다.


"뭐, 가…"


 쯧쯧, 악어가 혀를 찼고 핑맨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중얼대는 목소리는 제 귀에도 겨우 들릴 정도로 작았다. 악어는 삐딱하게 서서 핑맨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멀쩡했다면 금방 불쾌해져서, 뭐 하는 짓이냐고 멱살을 잡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도 없었다. 길들여진 개마냥 얌전히 누운 핑맨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악어는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졌다. 이어서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무언가. 낯선 쓴맛에 핑맨은 얼굴을 찡그렸다. 침에 녹아서는 입 안을 미끌미끌 굴러다니는 건 알약이었다.


 순간 온갖 생각이 핑맨의 머릿속을 정신없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뻔했다. 죽이려는 속셈이겠지. 독살은 흔적을 찾기 어려우니, 여차하면 나왔더니 뒤져 있었다고 변명하면 될 테다. 신뢰를 상당히 쌓은 모양이라 의심하는 이도 없을 테고… 핑맨은 푹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면 좀 못된 짓을 많이 하긴 했기에, 사죄라고 치고 그냥 물고 있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생각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악어는 피식 웃더니 설명했다.


"뭐라는 거야. 진통제거든?"


 그러면서 벙쪄서 굳어 있는 핑맨의 등허리께에 손을 댔다. 아윽…. 닿는 손가락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핑맨은 움찔 떨었다. 악어는 아랑곳하지 않고, 순식간에 핑맨의 윗도리를 끌어올리더니 머리 위로 벗겨내어 던져 버렸다. 정말 진통제일 뿐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빠르고 정확한 모습이 왠지 믿음이 갔다. 게다가 죽일 거였으면 이렇게 하지도 않았을 것 같고. 때문에 흙에 닿은 맨살이 시렸어도 핑맨은 그냥 그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악어는 천을 꺼내고, 널브러져 있는 몸 아래쪽으로 손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능숙하게 상처를 싸매 놓았다. 조금의 끊김조차 없는 완벽한 마무리였다.


"됐다."


 손을 탁탁 털며 악어가 말했다.


"해드림인지, 뭔지. 그 지랄을 하니까 그 새끼들한테 걸린 거 아냐, 멍청한 놈."

"멍청이, 아니거든…"


 핑맨이 이를 악물고 웅얼거렸다.


"누가 누구 보고 멍청이라… 윽."

"움직이지 마."


 흘린 신음은 꽤나 괴로운 음성이었음에도, 악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팔을 잡아당겨 핑맨을 억지로 앉혀 놓았다.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붕대가 잘 묶였는지 확인하더니,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 등을 내어주었다.


"업혀."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지, 살짝 몽롱해진 정신에도 그 말만큼은 잘 들렸다. 잘난 건 지겹도록 봐서 이미 알고 있지만, 도대체 무슨 깡으로 저러는지. 핑맨은 통증을 잠시 잊고 피식, 낮은 웃음을 흘렸다. 저기, 혹시 까먹었어?


"…내가 그 등에 칼이라도 꽂으면 어쩌려고."


 하, 악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럴 거잖아. 지랄 말고 좀 업혀."

"ㅎ, 하면 어떡할 건데?"


 말하다가 혀를 씹었다. 쪽팔린 데다, 비릿한 피 맛이 약과 섞여 찝찝했다. 핑맨은 고개를 돌리고 침을 뱉어내었다. 입 안에 남아 있던 에메랄드 빛의 약 잔해가 흙바닥을 푸르게 물들였다.


"뱉지 마."

"…피 맛 나."

"그래도."


 악어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아, 그건 그렇고.


"싫으면 그냥 여기서 뒤지던가."


 그러면서 들이대는 등짝에 핑맨은 못 이기는 척, 살짝 몸을 기댔다. 세상 참 많이도 변했다. 어릴 적에는 너무 넓어 보여서, 업혀만 있으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을 것 같은 등이었는데. 지금은 저도 비슷해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너불이가 걱정하겠다."


 근데 따뜻한 건 여전하네… 핑맨은 대답 대신 탄탄한 악어의 어깨에 뺨을 얹었다.






-05-

 핑맨은 그간 모아 두었던 검은 씰의 봉투들을 책상 위에 와르르 쏟아놓았다.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서 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너불이 홱 눈썹을 치켜올리며,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감히 돈을 떼어먹으려는 몇몇 양심 불량의 인간들에게는 썩 잘 통하는 표정이었으나 핑맨에게는 아니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자 녀석이 으르렁거렸다.


"또 뭔데."

"이거 쓴 새끼들."


 핑맨은 맨 위에 놓인 봉투를 열어 종이를 너불의 눈 앞에 펼쳐 놓았다. 붉은 글씨로 빽빽하게 가득 메워진 편지지. 너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팔랑팔랑, 몇 장 가볍게 넘겨보았다.

"뭐."

"찾아와."

"…몽땅?"


  너불은 낮은 언덕을 이룬 편지들을 살짝 곁눈질하더니 당황해서는 물었다. 언짢은 말투였다. 이미 그의 책상 위에 충분히 많은 종이들이 쌓여 있던 것을 감안하면 지극히도 정상적인 반응이었지만, 그거야 당연히 핑맨이 알 바는 아니었다. 핑맨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너불은 아직까지도 상황이 잘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표정과 정신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우스웠다.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그런 녀석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핑맨이 싱긋 덧붙였다.


"앞으로도, 종종 생길 거야."

 너불의 비명과, 아마도 펜으로 추측되는 무언가가 문에 맞고 떨어지는 소리를 뒤로 하고 핑맨은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

 악어의 밭에 발을 들이자마자, 어김없이 악어는 핑맨의 움직임을 경계하듯 눈으로 쫓았다. 재미있어서 의미없는 왔다갔다를 몇 번 했더니, 악어가 신경질을 부렸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좀 가라! 아하하, 핑맨이 웃음을 터뜨렸다.

"난 이장님 유머감각이 참 좋아요."

"나는 네가 정말 싫어."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핑맨은 악어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목을 쭉 뽑고 넘겨다본 악어의 팔 너머에서는, 전날 내린 비로 집을 잃은 지렁이 몇 마리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지렁이는 땅이 비옥하다는 증거였고, 악어의 밭이 좋다는 건 핑맨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것과는 별개였다. 지렁이의 통통한 분홍색 몸뚱아리가 천천히 꿈틀거리자, 핑맨의 얼굴도 따라서 일그러졌다. 저게 뭐야, 징그럽잖아… 

"그게 뭐에요!"

 악어가 태연스레 대답했다.

"네 친구."

"……그냥 닥치고 있을게요."

 비가 아직도 안 말라 축축한 땅을 핑맨은 손가락으로 후볐다. 흙바닥이 깔대기 모양으로 움푹 파였고, 거기 있던 흙먼지는 손톱 아래에 밀려들어갔다. 핑맨은 반대쪽 손가락으로 손톱 밑의 흙때를 파내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자, 어느새 핑맨의 존재조차 잊었는지 제 일에만 열중하는 악어가 보였다. 쭈욱, 팔을 들어 기지개를 켜며 핑맨이 지나가는 말인 척 입을 열었다.

"이장님."

 핑맨이 불렀다. 으으음? 악어는 하던 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웅얼거림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굳이 이 생활을 고집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세요?"

 그는 생각하는 듯 잠시 눈을 감고 끄응 소리를 내다가, 마침내 답을 찾았는지 고개를 들고 핑맨을 쳐다보았다.

"별로… 특별한 이유는 없던 것 같은데."

 그때 지겨워서 그랬었나, 덧붙이는 말에 어쩐지 핑맨은 허무해졌다. 겨우 지루함 때문에 던져 버릴 만큼, 악어에게는 그게 가벼운 일이었던가? 악어가 되물었다.

"그런데 굳이 이유가 있어야 해? 재밌으면 상관 없는 거잖아."

 아,

 그것도 그런가. 핑맨이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이장님, 알아서 잘 살아 보십시오. 당신이 무슨 생각 하는지 저는 평생 이해는 못 하겠지만."

 악어가 웃었다.

"임마, 나도 너한테 이해받기 싫거든?"

 그러면서 콩, 소리 나게 핑맨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괜히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핑맨은 잠자코 악어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악어는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원을 만들더니 그걸 좌우로 살살 흔들었다.

"그나저나 너도 언제 도박이나 하러 와라. 나도 돈은 벌어야지 않겠냐."

"악어님 도박장엘 오라고요?"

 핑맨이 기겁했다.

"당신이 여는데 내가 왜 가요!"

 악어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흘겨보면서도, 핑맨은 사실 제가 조금이나마 안심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하루라도 피 터지게 싸우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인간이었으면서 마음이 바뀐 척, 개과천선한 척 얌전히 살아가는 모습에. 사실은 정말 변해 버린 걸까 봐 무서웠었는데.

 도박장을 연다는 것 자체가, 아직 예전의 악어가 남아 있다는 증거라고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아, 맞다. 나 어디 좀 가 봐야 해."

 갑자기 악어가 말을 돌리며 일어섰다.

"너도 놀지 말고 일 좀 해."

"아, 예…"

 그러면서 밭을 나가는 악어는, 웬일로 핑맨을 쫒아내지 않았다. 정말 바쁜 나머지 잊어버린 건지, 아니면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기로 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핑맨은 어느새 제 머리 위에 올라와 있는 악어의 밀짚모자를 만지작거렸다. 요즘 들어 피부가 좀 탄 거 같다고 투덜거렸더니, 무심하게 툭 얹어 준 모자였다.

 이렇게 보니까 또 좋은 사람 같잖아. 핑맨이 생각했다. 그러면 나 혼자 밑바닥에 남아 있는 것 같잖아…. 그러니까 악어, 미안하지만 당신도 다시 내려가자. 천천히 멀어져 가는 악어의 뒷모습이, 옛날 녹색 하와이안 셔츠를 입던 시절과 얼핏얼핏 겹쳐 보였다. 싫다면 내가 친절하게 끌어내려 주지, 물귀신처럼 말이야!

"악어님!"

 핑맨은 벌떡 일어나, 팔을 흔들며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왜."

"저 집 갈 건데, 그쪽으로 가는 것 같으니까 같이 가자구요."

 악어는 얼굴을 구겼지만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핑맨은 악어와 발 맞춰 걸으며 주머니에 비죽 튀어나온 목장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 아직도 묻어 있는 흙먼지도. 손을 뻗어 털어내자, 왜 망설였는지 이해되지 않을 만큼 녀석은 순순히 떨어져나갔다. 악어가 말했다.

"뭐 묻었냐? 고맙다."

 대답 대신 핑맨은 되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숨길 생각 없죠?"

"뭘? 숨길 것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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