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를 맞이하기까지
8인 좀아포 히빌 글합작
"이 세계는, 우리에게 구해질 가치가 없어."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C)떨리고설레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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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을 만들자고 했다.
수닝의 빌어먹을 귀와 머리통이 아직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게 맞다면, 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자식들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 수닝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당연히 녀석들이 자주 쓰는 비유적 표현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혹은 짓궂게도 그녀만 알아듣지 못한 농담이거나.
그래서 수닝은 한참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웃으면서 재잘대는 동료들의 대화를, 짧은 지식을 짜내 어떻게든 같이 즐겨 보려고 노력하면서.
“응? 수닝 언니,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폭, 리타가 가볍게 옆구리를 찔렀다. 그제서야 수닝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저를 쳐다보는 일곱 명의 다양한 눈빛에서, 그녀는 그 말의 뜻이 제가 이해한 바로 그대로임을 깨달았다. 뭐라고? 당황스러움과 경악이 반쯤 섞인 수닝의 침묵을,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으로 오해했는지 리타는 친절하게도 다시 설명해 주었다.
“방금 멋사가 한 말 있잖아.”
백신 말이야! 리타가 꿈을 꾸듯 읊은 그 단어가 거대한 망치가 되어 수닝의 두개골을 울렸다. 아찔한 기분에 침음하며 수닝은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마지막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고, 천천히 되물었다.
“지금 장난하는 거지?”
-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수닝은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그걸 일컫기에는 화려한 보석과 알알히 나열된 진주들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아까웠지만, 모두들 그녀의 것을 그렇게 불렀던 탓에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그것은 광택 없는 검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목 하나를 겨우 감쌀 크기의 고리였다. 둥글둥글하게 세공된 돌이 앞쪽에 박혀 있었는데, 수닝의 것은 갈색이 도는 붉은색이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전화가 오면 수닝은 받았다. 그리고는 목걸이의 돌을 누르고, 전화가 지시하는 (매일 달라지는)코드를 읊었다. 그러면 잘그락 소리를 내며 목을 조이던 감촉이 사라졌다. 그때부터 30분. 수닝에게 주어진 해방의 시간이었다.
정확히 28분 30초가 지나면 삐삐 효과음이 났다. 그로부터 30초가 더 흐르면 목걸이의 돌은 괴상하게 울기 시작했다. 아기 울음소리와 여자의 비명 소리, 차 경적 소리가 섞인 끔찍하고 요란한 소리였다. 몇 번 아파트 민원-그들은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고, 뺨을 때리고, 수닝을 비롯한 초능력자들을 싸잡아 욕했다-이 들어온 이후로, 소리가 울릴 때가 되면 수닝은 씻다가도 말고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목의 물기만 대충 닦은 채 목걸이를 도로 착용했다. 여름이면 습기가 차 갑갑하고 간지러웠지만 참아야만 했다.
목걸이를 오래 하지 않으면 손등에 박힌 위치 추적 장치가 작동했다. 마음만 먹으면 칩을 파내고 피를 뚝뚝 흘리며 달아날 수도 있었겠지만 수닝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같은 짓을 저지른 사람들의 운명이 어떤지, 매주 금요일 자정마다 강제로 상영되는 382번 채널에서 지겹게도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김없이 붙잡혀 팔이 뒤로 돌려져 묶였다. 그대로 차에 실려 정부의 흰색 건물로 끌려갔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몇 번 도망치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학교를 같이 다녔던, 때로는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기도 했던 숏컷의 여자애였다.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수닝의 집 문을 두드렸다. 제발 함께해 달라며 무릎을 꿇더니 애원하고, 눈물짓고, 비난했다. 너라면 할 수 있어! 수닝, 네가 강하다는 걸 너만 몰라.
수닝은 몸을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뜨겁게도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제발! 그녀가 몸을 비틀며 울부짖었다. 수닝은 차분히, 그러나 단호하게 잡힌 손을 놓았다. 그대로 문을 닫고 들어간 집 안에서조차 동급생의 목소리는 따라들어왔다. 수닝은 차마 문가에서 떠나지 못한 채,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죽 미끄러졌다.
비참해라! 지긋지긋한 감정이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선택하는 것은 다른, 지독히도 오랜 시간 학습된 무기력이었다. 친구의 발걸음은 몇 번을 간청하다 포기하고 돌아섰음에도 수닝은 간절함이 남아 만든 환청을 한참이나 더 들어야만 했다.
그날 그녀는 조금은 울었다.
-
“장난하지 마.”
수닝이 으르렁거렸다. 불안할 때면 늘 그랬듯, 왼손을 들어 오랜 구속이 남긴 목의 짓무른 자국을 벅벅 긁었다.
“왜?”
악어가 물었다. 수닝은 눈동자를 굴려 그를 쏘아보았다. 악어는 그녀의 반응을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특유의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수닝은 목덜미를 조금 더 긁었다. 그 빌어먹을 목걸이를 부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욱신거리고 미친 듯이 가려웠다.
수닝이 쏘아붙였다.
“그러는 너는 왜 그러고 싶은데?”
“아까 말했지.”
악어가 설명했다. 수닝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좀비 바이러스가 언제 종식될지 모르잖아.”
예전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가 눈으로 물었다. 수닝은 미간을 찡그렸다.
"좀비는 더욱 더 강해져서 이제는 우리가 잡기도 어렵게 됐고. 차라리 백신을 만들어서 우리가 이 일을 끝내는 거야.”
“그래,”
중력이 끼어들었다.
“우리는 세상을 구할 수 있어. 영웅이 되는 거야!”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수닝은 얼핏 알 것도 같았다. 그는 늘 그랬다. 곱게 꽃밭에서만 길러진 화초마냥, 행복한 꿈에 젖어서는 헤벌레. 수닝은 중력이 답답했다. 같은 초능력자면서도, 비슷한 모양과 기능의 구속구를 평생 달고 살아왔으면서도 어째서 저딴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면 시원하게 빰을 몇 대쯤 갈기고 싶었다. 아니, 작은 화상 흉터를 만들어 줘도 좋겠다….
"입 다물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기에, 수닝이 택할 수 있던 길은 날카로운 위협뿐이었다.
"영웅 따위가 도대체 뭔데?"
목걸이 때문에 별 것도 아닌 게!
괴물! 살인마! 저리 가세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오해와 모욕. 겁먹은 짐승의 본능처럼 그녀를 향해 쏘아지던 화살들, 하나하나 갈갈이 찢어 죽이고 싶었던 각각의 기분. 매번의 절망과 상처를 떠올리며 수닝이 울컥울컥 쏘아붙였다.
"너 기억 안 나? 우리가 목걸이를 풀려고 무슨 지랄을 떨었는지?"
완력으로 잡아뜯고, 불을 지르고, 만득의 능력으로 간섭하고, 심지어는 목에다 톱을 가져다 대는 일까지 감내했다. 결국 풀어냈을 때의 쾌감, 그 상쾌함과 해방감을 수닝은 잊을 수 없었다. 30분이 지나도, 한 시간이 지나도. 날이 바뀌고 다음 해가 떠올라도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 수닝은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수닝은 짓무른 목의 흉터를 긁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가 도대체 뭐길래 우리가 그딴 짓을 해야 하는데?"
꺼지라고! 역겨우니까 내 눈 앞에서 당장 사라져!
모든 기억이 아직도 눈꺼풀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눈만 감으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불꽃이 되어 세포를, 장기를, 그녀 자체를 이루고 핏줄을 타고 흘렀다. 수닝은 이를 악물었다. 내게는 이렇게 생생한데, 어째서 너희는…. 놀란 중력의 표정 따위는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영웅이 필요하면 잘난 지들끼리 알아서 만들면 되잖아. 왜 비겁하게 우리에게 손을 벌리는데!"
너는 더 이러고 살 수 있어?
문의 잠금장치가 작동하기 직전에 아슬하게 스며들어왔던 친구의 말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수닝이 물었다.
"너희는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어?"
하지만 수닝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원하는 대로 했다. 늘 그렇듯.
◈◇◈
수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었다. 어느 누가 원수를 위해, 죽도록 미워하는 존재를 위해 노력을 쏟아붓겠는가. 괴물의 시체에서 백신, 적어도 그 비슷한 것의 가능성을 찾아낸 이후 수닝이 재료 수급에 손을 보탠 이유는 단 한 가지. 오로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잘 다루지도 못하는 불을 가지고 낑낑대는 모습이, 상처에 잡히는 시뻘건 물집이 보기 싫어서였다. 다들 밤을 새는 와중에 혼자 엎어져 잠이나 자기도 좀 그렇고.
수닝은 익숙하게 리타의 집 현관문을 따고 들어왔다. 모두 일찍 일어나 거실에 모여 있었다. 수닝은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그러다 부재를 깨달았다.
“리타는?”
“자요.”
악어가 턱짓했다. 부엌 옆쪽 방이었다. 누가 봐도 그녀가 거기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 하얀 서리가 문손잡이에 두껍게도 끼어 있었다. 멋사가 물었다.
“왜요, 리타 누나한테 할 말 있어요?”
“아니, 그냥.”
수닝이 어깨를 으쓱했다.
“고생하네.”
괴물의 조직을 가져다가 어찌저찌 해서 만든 약은,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갑게 보관해야만 했다. 일반적인 냉장고나 냉동고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오로지 리타만이 유지할 수 있는 온도가 필요했다. 단 1도라도 허용 범위에서 벗어나는 순간 백신의 효과는 사라지기 때문에 리타는 아예 백신을 보관하는 방 안에서 생활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다들 고생이야.”
물 흐르는 소리가 나더니 너불이 화장실에서 걸어나왔다. 그는 죽 기지개를 켜며 수닝의 옆자리에 앉았다. 다크서클이 내려온 얼굴로 수닝을 잠시 쳐다보다가, 두껍게 솜이 채워진 쿠션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나 조금만 잘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깨워 줘요.”
“그냥 방에 들어가서 자지 그래?”
“아냐, 그 정도는 아니….”
콜록.
시작은 말을 끊고 튀어나온 작은 기침 소리였다. 너불이 옷소매로 입을 가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수닝은 등을 기대었던 소파 등받이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뭔가 문제가 생길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에서 너불이 맡은 부분은, 백신에 잔재하는 괴물 조직의 독을 흡수하는 일이었다. 그딴 짓을 하면서도 멀쩡한 게 제대로 되어먹은 인간의 반응일 리 없었다.
중력이 물었다.
“괜찮아?”
“어. 잠깐 사레가 들려서.”
수닝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너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뺨이 살짝 창백할 뿐, 겉모습은 별다른 이상 없이 멀쩡했다.
“진짜 괜찮은 거지?”
“그렇다니까. 나 그냥 좀 자고 싶어….”
그는 단순히 조금 피곤한 사람처럼만 보였다. 걱정이 지나쳤나? 수닝이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너무 예민해진 것도 같았다. 아니면…. 그녀는 볼을 긁적였다. 프로젝트에 대해 너무 비판적인 나머지 내심 무언가 문제가 생기길 바라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백신 제작의 성패보다는 항상 건강이 우선시되어야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수닝은 통조림을 땄다. 끈적한 가공식품 특유의 기름이 몇 방울,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수닝은 캔과 숟가락을 탁자에 내려놓고 손틈을 핥았다. 고소하고 느끼한 맛이 마른 혀에 스며들었다.
너불이 눈을 감은 채 기침을 몇 번 더 했다. 여전히 찐득찐득 달라붙는 손가락으로 수닝은 목 언저리를 긁었다. 이번에는 손톱을 세워,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벅벅. 이상하게 답답한 기분이었다. 얇은 막 하나가 딱 달라붙어 떨어질 듯 떨어질 줄 몰랐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 수닝은 번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잘 알았다.
이질감이었다.
-
너불이 쓰러졌다. 리타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창백하게 질려 비틀거렸다. 수닝은 격양된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양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결국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분명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두에게 철저히, 어쩌면 의도적으로 무시당한 가능성. 목덜미에서 간지러운 통증이 느껴졌으나 그녀는 인지하지 못했다.
수십 미터 아래의 절벽으로 안전장치 하나 없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몇 번 타 봤던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락에는 끝이 없었다. 다시 올라갈 길 또한 보이지 않았다. 수닝은 울고 싶었다. 점점 심해진 기침에 묻어나온 핏방울을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 아무 일도 없다며 꽉 말아 쥐던 손가락을 억지로라도 펴 보았어야 했다.
수닝은 소파에 누운 너불의 옷깃을 꾹 붙잡았다. 통증을 참으려는지 앙다문 입매가, 굳게 닫혀 벌어질 줄 모르는 눈꺼풀이 아프게 뇌리에 박혔다. 파리하게 요동치는 속눈썹에 수닝은 본능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 소스라치며 힘을 풀었다. 세게 쥐었다가는 날아갈까, 그러나 혹 놓치는 순간 날아갈까. 애매하게 긴장이 들어간 손목이 아려왔다.
“내가 그러게 내버려 두자고 했잖아!”
수닝이 악을 썼다.
“그냥 지들끼리 싸우든, 아파서 뒤지든 신경쓰지 말자고 했잖아!”
잃어버릴 수 없었다. 이대로 망가지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녀에게 머물 자리 하나 내어 주지 않는 각박한 세상에서 겨우 찾아낸 마음 붙일 곳을, 수닝은 놓칠 수 없었다.
초능력자 아파트라는 허울 좋은 이름의 감옥에서 처음 안식처를 발견한 그 날 그녀는 맹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리라. 세상으로부터 다시 한 번 버려지는 한이 있어도 결코 부서지고 다치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이제 어떤 결과를 낳을지 확실해진 프로젝트를, 그녀가 반대하지 못할 이유 따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젠 끝이야. 난 그만두겠어."
수닝이 선언했다.
“이 세계는 우리에게 구해질 가치가 없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
여덟은 둘로 나뉘었다. 넷은 리타의 집에 남았고 넷은 수닝과 함께했다. 그녀의 손을 들어 준 사람이 너불을 제외하고도 둘이나 더 있단 사실은, 수닝으로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모두가 중력이나 멋사처럼 꽃밭에서 뛰놀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악어와 만득이 수닝을 따라나섰다. 리타는 남아 있기를 선택했다. 도대체 세계의 어떤 부분이 그녀를 그리도 매료시켜,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원하고 싶게 만드는지 수닝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알량한 자존심과 주입당한 도덕심 탓이리라고, 핑맨의 말을 토대로 추측할 뿐이었다.
"나도, 리타를 다 이해할 순 없어."
떠나려는 뒷모습에 대고 핑맨이 내뱉었던 말은, 분명 그 비슷한 것이었다.
"사실 그만두는 게 맞지 않나, 하고 밤마다 고민을 해."
그러나 그는 인간, 온갖 차별과 여론과 시선으로 그들을 작은 빌라에 가둬 버린 약하디약한 생명체들이 눈에 밟힌다고 말했다. 십여 년간의 의무 교육이 강제로 집어넣은 도덕심이 과연 효과가 있긴 했는지, 마음 같아선 다 죽여버리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수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공감하지 못할 말은 아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핑맨이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
긍정의 의미를 담아 수닝이 턱짓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구해질 가치가 없다고 했지."
"그런데?"
핑맨이 느릿하게 물었다. 먹기 싫은 반찬을 씹어 삼키듯 천천히, 꼭꼭.
"그럼 그 가치는, 누가 정해?"
수닝은 침대에 누워 불 꺼진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떠나는 자리에 핑맨이 던진 마지막 말, 어서 가자는 악어의 손짓에 미처 답하지 못했던 질문이 귓가에 남아 사라질 줄을 몰랐다.
적당한 대답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구하는 이가 그녀였으므로, 그녀가 정할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수닝은 그러지 못했다.
세상은 구해질 가치가 없는 곳이다. 그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 '구해질 가치'란, 누구의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냐? 수닝은 목덜미의 짓무른 자국을 꾹꾹 힘을 주어 문질렀다. 그 날 그녀의 밤은 늦게까지 저물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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