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나의 경배

너는 영원히 나의 경배는 받을 수 없을 거야!

2023 형님조 회지 합작 <나의 -->

나의 경배

Your Glory

(C)떨리고설레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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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신전 입구에 길쭉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구두 바닥이 대리석과 마찰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묵직한 몸무게가 실린, 그래서 또각또각보다는 뚜벅뚜벅에 가까운, 저것은 남자의 발자국이다.

걸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춘다.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아니지만 마치 그러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수많은 사람이 거쳐 간 탓에 돌은 주변보다 미세하게 맨질맨질하다. 그 자리에서 남자는 무릎을 꿇는다.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깊이, 신전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거대한 신상을 향해 절한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신의 조각상은 금이 가고 상하여 관리되지 않은 티가 역력하지만 여전히 웅장하다. 감히 형언할 수 없이 자애롭게,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퍼부어졌던 그 지극한 사랑을 담은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바로 그 신상 뒤에서, 핑맨은 얕게 심호흡을 한 뒤 오른손의 단검을 고쳐 쥔다.

오늘 그는 저 남자를 죽인다.

핑맨은 고양이처럼 걸어가 남자의 발 앞, 그와 신상 사이에 선다. 

이마를 바닥에 붙인 남자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다. 뒤통수와 어깨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붉은 망토에는 한 줄기의 미동도 없다. 심지어는 들숨과 날숨에서 기인하는 얕은 들썩거림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너른 신전은 지나가는 쥐의 발소리마저 들릴 듯 적막하다. 핑맨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인다. 아직 나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냥 그런 척 하는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한다.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대로 뜨거운 심장에 칼을 박아 넣으면 끝날 세상이니까.

핑맨은 남자의 머리통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는 젊다. 그러나 결 고운 머리카락은 천 년은 산 사람인 양 희게 바랬다. 아니, 바랬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그 단어는 대상에 본디 색이 존재했음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의 머리칼은, 적어도 핑맨이 기억하기로는 단 한 번도 색채를 가진 적이 없다. 그리고 핑맨은 신을 제외하면 남자에 관해 가장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므로, 그의 머리털은 태초부터 하얬고 영영토록 그러하리라고 단정해도 좋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새 도화지마냥 새하얗게 맑기만 한 색. 수백 번 다시 보아도 견딜 수 없이 역겨워, 혹여나 꿈에나 나올까 두려운 빛깔. 핑맨은 악어를 증오한다. 그가 살아 온 모든 순간에,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다하여 그렇게 했다.

모든 최초는 의미를 가진다. 새로운 것을 처음 경험하는 그 순간은 다른 무엇보다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때문에, 나머지 전부가 뒤섞이고 일부는 날아가 잊어버렸을지라도 핑맨은, 그 처음만큼은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다.

때는 개척의 시대다. 태초의 짐승이 아직 남아 날뛰고 이에 맞서는 인간의 피가 끊기지 않던 혼란의 시대다. 동시에 신에게 선택받은 인간들이 최후의 하나로 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멸망의 시대다.

그것이 핑맨의 첫 번째 삶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악연의 시작, 그의 삶을 망친 모든 불행의 근원이었다.

일찍이 그는 악어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매우 오래전의 일이다. 세상이 존재하기도 전부터 무작정 흘러만 온 시간을, 정확히 얼마만큼 돌이켜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신에게 선택받아 개척자의 이름을 얻기 전 핑맨은 세상을 떠도는 만물상이었다. 아비의 삶은 아들에게, 어미의 운명은 딸에게 전해지는 오래된 법칙을 따라 먼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업이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은 물론 그뿐이 아니었는데, 핑맨은 모래 속에서 진주를 누구보다 먼저 파헤칠 줄 알았다.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이었다.

젊은 농부를 처음 본 순간 일어난 단번의 매료는 그러니 필연이었다. 저것은 귀하다. 곱게 세공된 녹주옥마냥 투명하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핑맨은 판단을 마쳤다. 

구름을 자아다 엮은 듯한 머리카락과, 예술가가 인생을 갈아넣은 조각상같이 꼿꼿한 체형도 물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중 무엇보다 빛나는 것은 허름한 옷차림으로도 가리지 못할 품위. 

악어는 빛났다. 핑맨은 알았다. 그는 위대한 건물에 모인 이 중 가장 귀중한 존재, 돈이라면 못 팔 물건이 없는 만물상마저도 아끼고 아꼈다가 가장 마지막에야 내놓을 보석이다. 

그래서 핑맨은 결심했다.

저것을 가져야겠다.

당연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우렁한 첫울음이 울린 날 아기를 받은 산파가 선포한 예언 때문이었다. 

이는 야망이 크고 고귀한 뜻을 품을 이의 사주라. 범인(凡人)의 것과는 결코 같지 않으리니, 필히 왕의 길을 걸으리라.

그래, 핑맨은 왕이 되길 원했다. 예언이 언젠가 이루어지리라 확신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결말은 무엇이었나. 그때 제가 얼마나 건방졌는지 핑맨은 지금도 분노를 섞어 자조한다. 영광은 그의 것이 아니고, 악어는 약속된 듯 옥좌에 오른다. 핑맨은 절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왕의 칼이 숨통을 끊을 때까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기억을 모두 갖고 시작한 두 번째 생에서 그는 이번에야말로 예언이 성취될 때라 믿었다. 또 세 번째, 네 번째…. 어쩌면 십수 번을 더 거듭 살았을 때까지도 그 믿음은 변함없었다.

그러나 이변은 없다. 

악어는 맡겨 둔 물건을 챙기러 왔다는 양 오연하고 무던한 태도로 제 자리를 가져간다.

핑맨은 억겁을 바쳐 소망한 것이 악어의 손에 들어가는 장면을 지켜만 본다. 때로는 눈앞에서, 때로는 조금은 먼 자리에서.

늘 똑같다.

거듭된 실패에 부딪히며 사랑은 분노로, 애정은 증오로 뒤틀린다. 핑맨은 검게 삭아만 가나 악어는 여전히 태양처럼 빛난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 결코 꺼지지 않을 빛이다. 

핑맨은 슬슬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왕의 자리는 결코 그의 것이 아니다.

핑맨은 생각을 그치지만, 위대한 왕은 여전히 아까의 자세를 고수한다. 바닥에 딱 달라붙어 추해 보여야 마땅할 모양인데도, 어찌 그리도 변함없이 정갈한지 핑맨은 이질감에서 비롯된 불쾌함을 느낀다.

본질을 바꿀 수는 없으나 덧칠하여 가릴 수는 있다. 적어도 보는 입장에서는 훨씬 나을 것이다. 악어의 하양도 곧 붉게 물들 색이니 잠깐은 참아 줘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기분이 조금 괜찮아진다. 찬란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오만한 왕의 몸뚱아리는 제 핏구덩이에서 뒹굴 것이다. 그가 숭배하고 사랑하여 마지않는 드높은 신이 바라보는 아래서!

순간 핑맨은 강한 희열에 사로잡힌다. 신전 안의 기묘한 위치 관계를 인식한 탓이다. 악어는 신상에 대고 무릎을 꿇었으나 정작 그와 조각상 사이에는 핑맨이 있다. 위대한 왕의 경외가, 언젠가 그들을 수호한 신이 아닌 한낱 인간을 향하는 것만 같은 그림이 아닌가!

잠시 핑맨은 이대로 세상이 끝이 나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참으로 바라마지않던 순간. 세상에 감정이 필요치 않다고 믿는 이였다면 숙원의 달성이라고도 여겼을 법한 장면이다. 

그러나 그는 이성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환희는 말 그대로 찰나일 뿐이다. 대신 핑맨은 땀으로 미끄러운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는다. 

짧은 심호흡과 함께 바꿔 잡은 단검을 바닥으로 내리꽂지만, 노력은 알 수 없는 저항에 가로막혀 허공으로 흩어지기만 한다.

핑맨은 당혹스럽다. 왕을 감싸는 물리적인 방어막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제 마음의 문제임을 안다. 핑맨은 그러나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거듭된 시도는 헛손질에 그친다. 손바닥이 다시 미끌미끌하다. 핑맨은 분노한다. 당장이라도 칼을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

악어는 지금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핑맨이 그러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왕이자 신이 인정한 마지막 왕. 수십 번의 거듭에서 단 한 번도 제가 밟고 올라선 적 없는 이 남자를 이날 다시 찢어 죽이고 그 살점을 씹어 삼키겠다고 핑맨은 몇 밤에 걸쳐 저주했다.

그러니 악어는 죽어야 한다.

핑맨이 그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자리를 좀 옮기는 것이 좋겠다."

악어는 여전히 이마를 바닥에 대고 있어서, 처음에 핑맨은 제가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비로운 그의 왕은 다시 입을 엶으로써 그것이 핑맨의 착각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그림이 이상하잖아."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핑맨은 세상에서 악어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바라던 바는 아니었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훤히 보인다.

왕이 언짢아하는 상황은 제가 핑맨에게 절하는 듯 보이는 모습이 아니다.

핑맨이, 한낱 인간이 감히 존귀한 신상 앞을 가로막고 섰다는 점에 분개하는 것이다.

그게 핑맨을 더 화나게 만든다.

"무슨 상관이야."

코끝이 먹먹해지는 기분으로 핑맨이 코웃음친다.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는 신!"

아무도 더는 고대의 절대자를 믿지 않으며, 버려진 신전을 찾는 이는 오직 순백의 왕뿐. 사실을 알려 준 것뿐이건만 악어는 거칠게 반응한다. 처음으로 고개를 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다.

물론 핑맨의 목적은 왕의 관심을 끌려는 것이었으므로 이미 달성되었다.

"말조심해야지."

악어가 지적한다.

"자칫 노하시겠어."

"제깟 게 노하면 뭐 해?"

핑맨은 잇새를 지나 쏟아져나오는 말의 폭포를 느낀다. 그 거센 물살을 그로서는 통제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이 죽인 짐승의 사체를 두려워했나? 당신의 망토와 모자와 침실 깔개에 겁을 먹었나?"

최초로 대륙의 통일을 이룩하고 마수를 모조리 토벌한 흑룡왕은 제가 벤 괴물의 가죽을 벗겨 망토를 만들었다. 성에 걸린 가장 거대한 초상화에도 그려진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왕에게 대대로 내려져 왔다.

악어가 느릿하게 대꾸한다. 핑맨이 한순간 제 열기마저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담담한 목소리와 어조다.

"나는 내가 죽인 모든 것을 존중한다."

핑맨은 입을 다물고, 악어는 복슬복슬한 털이 달린 제 검은 망토를 만지작거린다. 그 손가락 끝에서 잠시 사그라들었던 감정이 다시 거세게 타오른다. 핑맨은 왕의 어깨에서 짐승 가죽을 잡아뜯고 싶은 충동에 부딪힌다. 빼앗아서 바닥에 내던지고 발로 짓밟고 싶다. 너덜너덜 긁히고 찢기어 누구도 원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형편없이 망가뜨리고 싶다. 엉망진창 누더기를 악어의 발 앞에 던져 놓고, 그러고는 물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나에 대한 존중인가?

하지만 분명 악어는 이렇게 답하리라.

나는 항상 너 또한 존중했다.

악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단번에 눈높이가 반전된다. 기억하는 모든 생에서 악어는 항상 핑맨보다 키가 컸다. 이것조차 신의 안배일까, 그가 항상 왕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도록 하는. 핑맨은 저도 모르게 살짝 옆으로 비켜나 선다. 뒤늦게 그걸 깨닫고 칼을 잡은 손에 꼭 힘을 준다.

악어의 시선이 느릿하게 암살자의 손을 향한다. 잠시 거기 머물러 있다, 다시 천천히 핑맨의 얼굴로 올라온다.

"아우야."

이번 생에서 악어는 왕의 적장자고 그의 오랜 대적자는 사생아 출신 왕자에 불과하다.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

핑맨이 으르렁거린다.

"그래, 핑맨."

대신 들리는 것은 최초의 이름이다.

"내 오랜 친구."

오랜, 친구.

핑맨은 그 말이 불편하다.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렸으며, 악어는 자기 방어 수단이라고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분명 포식자는 자신이고 악어는 무력한 피식자의 입장이여야 하건만, 어찌 반대인 느낌이 드는지 핑맨은 알 수 없다.

악어가 말한다.

"네가 무엇을 바라는지 안다."

너는 맨 위에 서고 싶은 것이지. 나를 네 발 아래 무릎 꿇리고 진심 어린 경배를 받고자 하는 것이지.

악어는 그 뒤로 아무 말도 소리 내어 뱉지 않았으나, 핑맨은 꼭 그의 육성을 들은 것만 같다.

"가련하게도."

하고 읊조리는.

청청한 눈깔에는 안타까움이 어린 것이, 핑맨을 동정하는 꼴이 명백하다. 핑맨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짓누른다.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만 싶다.

이는 야망이 크고 고귀한 뜻을 품을 이의 사주라. 

범인(凡人)의 것과는 결코 같지 않으리니, 필히 왕의 길을 걸으리라.

필히 왕의 길을!

어떤 예언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견자가 사기꾼이어서가 아니라, 그보다 강한 힘이 보장하는 운명과 얽혀서다.

세상은 악어의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비참하게도 세계는 지극히 불공평하고, 신의 사랑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부어진다.

어느 삶에서 핑맨은 신을 죽였다. 그가 숨 쉬는 공기나 다름없는 인간의 믿음을 끊었다. 그러면 악어가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되지 않을 줄 알았다. 운명은 어떠한 의지도 갖지 않고 무작위로 흘러갈 줄 알았다. 그렇게 숙원을 달성할 수 있겠다 믿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존재에는 반드시 흔적이 따른다 했던가. 신의 소멸과 함께 흩어질 줄 알았던 많은 것은 여전히 그의 시체로 남았다.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며, 왕의 자리는 가장 높은 곳에 그대로. 

핑맨은 실패했다.

세계의 법칙이 그러한 것마저 악어를 위한 일 같다. 아니, 분명 그 때문에 설계된 규칙일 것이다. 보라, 세상 전부가 한 인간을 위한 신의 안배다. 핑맨이 이만큼으로도 모자라 수천 번을 더 거듭 살아도 결코 헝클어뜨릴 수 없을, 놀랍도록 촘촘하게 짜인 완벽한 거미줄이다.

"알아?"

이제 핑맨은 미쳐 버릴 것만 같다. 어쩌면 저도 모르는 새 이미 돌았는지도 모른다.

핑맨은 뺨에 배어나는 물기를 느낀다. 손등으로 아무리 닦아내어도 얼굴은 계속 축축하게 젖어 있다. 눈물인지, 땀인지 그는 구분하지 못하며 그러고 싶지도 않다.

대신 핑맨은 거칠게 씹어뱉는다.

"그럼 이제 죽어."

아니면 그때처럼 또 나를 죽여.

수백의 살해당한 왕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또 수십의 살해당할 뻔한 왕을 기억하는가. 한 왕의 혈통에서, 그리고 계보가 바뀌어도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중 얼마가 악어였고 자신이었는지 핑맨은 더는 세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 두 환생자 중 하나는, 다시 헤아릴 수 없는 죽은 이의 반열에 들어선다.

악어는 오늘 죽어야 한다.

핑맨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그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도피밖에 선택지가 남지 않을 뿐이다. 다시 시작. 한 번 더 처음으로. 다음에는 숙원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알량한 자기 위안에 모든 것을 걸고서.

"죽어!"

핑맨은 이를 악물고 팔을 내리찍는다.

이번에는 어떠한 저항도 없다.

산것의 심장이 토해내는 뜨거운 피가 살해자의 손과 칼을 타고 바닥까지 흘러 고인다. 악어는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는다. 두 가쁜 숨소리가 허공에서 얽히고, 핑맨은 제가 저지른 죄를 감상하듯 내려다본다. 최초의 살해가 아니나 늘 처음 같다.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듯 뺨이 얼얼하다.

악어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핑맨이 그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초의 삶에서, 흑룡왕의 부왕 수닝은 어떤 주장을 했다.

사랑과 증오는 본질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일찍이 핑맨은 악어를 사랑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니 어떤 관점에서 그 사랑은 아직까지도 변함없다.

흐릿한 동공이 천천히 굴러 위를 향한다. 초점이 맞지 않지만 여전히 예쁘다. 오래전 핑맨이 녹주옥 구슬 같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눈동자다. 핑맨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지만, 아름다운 것에 주의를 빼앗김은 만물상의 오랜 본능이다. 

그렇게 핑맨의 집중을 붙잡아 놓고서 악어는 눈으로 읊조린다.

아, 불쌍하다.

너무 안타까워.

핑맨은 아무 소리도 듣지 않아도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제 오랜 익숙함이 저주스럽다. 

악어가 거듭 말한다.

참으로 가여운 자로구나.

"이 살해로 너는 세상을 얻겠지."

하얀 손이 허공을 잠시 부유하다가 웅덩이에 닿는다. 가는 손가락으로 돌바닥에 작은 그림이 그려진다. 핑맨은 눈을 가늘게 뜬다. 피로 된 왕관은 소름 끼치도록 시뻘겋게 붉다.

"너는 왕이 될 거야."

악어가 선포하듯 말한다.

"높고도 위대한 왕이…."

이내 그는 대리석에 손등을 문질러, 애써 그린 형체를 뭉개 버린다. 핑맨은 신을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악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며, 반대로 악어 또한 마찬가지다.

핑맨은 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네가 정말 원하는 바가 아닐 텐데."

하지만 위대한 왕좌는 그가 정말 원하는 결말이 아니다.

핑맨은 이를 악문다.

무엇을 지불해서라도 가지고 싶은 보석이 있었다. 마땅히 손에 들어오겠다고 여겼건만 절대로 잡히지 않는 환상 같은 보물이다. 동경은 짧고 소유욕은 오래 간다. 강산이 몇 번이고 변하고도 남을 시간에, 다정한 소망은 악착같은 집념으로 변모했다.

그가 애초에 오르고 싶던 옥좌의 이름은 세상의 왕이 아니라 악어의 왕이다. 꼭 신에게 바치는 것 같은 충성과 진심 어린 경외가 뒤따르는 자리다.

무릎 꿇은 하얀 뒤통수에 발을 올리고 위풍당당하게 세상을 내려다보겠다는 꿈을, 핑맨은 한때 꿨었고 부끄럽게도 아직 간직하고 있다.

그래, 핑맨이 정말 얻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의 경배.

악어의 경배.

"내가 틀렸니?"

핑맨은 입을 열지 않지만, 악어는 침묵에서도 충분히 대답을 찾아낸다. 만족을 입술에 머금고 악어가 콜록댄다. 아니 핑맨이 듣기에는 기침이 아니라 웃음인 것도 같다. 쉬이 구분하기 힘든 소리가 한참을 새어나오다 힘겹게 멈춘다.

가냘픈 호흡을 겨우 붙들고 악어가 선언한다.

"너는 영원히 나의 경배는 받을 수 없을 거야!"

이것은 저주인가? 아니, 그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다. 악어에게는 핑맨이 결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못된 의도 따위는 없다.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핑맨은 더욱 비참해진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안쓰럽구나!

눈동자에 같잖은 동정을 띄우고선 악어는 자지러지게 웃는다. 이번의 소리는 정체가 확실하다. 깔깔대는 웃음이 귓가에 파고들 때마다 핑맨은 몸서리친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닥쳐!"

핑맨은 칼등으로 왕의 뺨을 후려친다.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던 팔이 미끄러지며 희고 창백한 얼굴이 바닥에 부딪힌다. 더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악어는 쓰러진 채로 가만히 누워만 있다. 그러나 입꼬리에 걸린 비릿한 미소는 여전하다.

한 줄기 피가 고운 턱선을 타고 흐른다. 닦을 생각도 않고 악어가 중얼거린다. 입에 고인 비릿함 때문에 발음이 조금 뭉개지지만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지."

핑맨은 숨이 멎는 것만 같다.

잡지 못할 별을 쫓느라 영원을 바칠 바에야 차라리 스러져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텐데.

도대체 몇 번의 생을 더 거듭해야 이 지긋지긋한 악연이 끝날까.

비명이 울려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래된 신전을 채운다.

죽어가는 이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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