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왕이 아니다
내 모든 생을 다해서 너희를 미워해.
2023 마크에이지 회지 합작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변화를 눈치챕니다.
몹시 작은 차이이나 이곳은 내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오래된 서재. 모르고 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인장 없이 풀로만 봉인된 미색 봉투가 얌전히 책상에 놓였습니다.
학교 문양이 새겨진 우아한 녹색 우표와, 같은 색 잉크로 겉면에 적힌 익숙한 필체가 눈에 띕니다. 악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썩 훌륭하지도 않은 서툰 흘림체. 더 볼 것도 없습니다. 뜯어 내용물을 읽지 않아도 편지의 시작을 장식할 말을 알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후원자님께.
내가 이 편지를 받기 시작한 지도 벌써 세 해가 다 지나갑니다.
내용을 읽지 않게 된 것은 또 두 해 전의 일입니다.
열지도 않은 편지 봉투를 보관함에 마구잡이로 쑤셔넣습니다.
발송자는 제 마음이 이런 식으로 취급됨을 알기나 할까요.
물론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은 내 일곱 번째 생입니다.
/
NOT
MY
KING
(C)떨리고설레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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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 톡.
너불은 고개를 든다. 창문에 하나 둘 물기가 맺힌다. 토독, 톡.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는 소음이 거슬린다.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아무렇지 않아 했겠지만 그는 아니다. 아직도 영향을 주는 것은 최초의 삶. 극도로 발달한 감각은 도통 평범한 삶을 누리게 두질 않는다.
커튼을 치면 조금 나을 것이다. 너불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의자 소리는 조용하다. 다리에 천이 잘 감겨 있군, 좋아.) 무심코 휘두른 팔에 늘어진 줄이 걸린다. 보라색 장식 술을 잠시 쳐다보다가 손을 흔들어 떨친다. 이런 데에까지 설렁줄로 사람을 부를 필요는 없다.
그대로 창가에 다가간다. 화려한 꼬임으로 장식된 커튼 끈을 푼다. 창문을 가리기 전 어둑한 창밖을 잠시 넘겨다본다.
흐린 선이 그어지는 하늘은 회색이다.
.
.
"렉시온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또?"
집사가 건네는 봉투를 낚아채듯 받아든다. 봉인은 뜯겨 있다. 아카데미에서 오는 편지는 항상 내용을 검토하고 올리라고 명령한 탓이다.
"걔가 뭔 사고라도 쳤대?"
걸러지지 않았으니 어련히 중요한 일이겠거니, 생각하며 너불은 봉투를 연다.
"아닙니다."
"그럼?"
편지지를 꺼내다 말고 멈칫한다. 집사의 표정에 언뜻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섞인다.
"졸업식에 정말 안 오시겠냐고, 하는…."
"그러니까 안 간다고 했잖아."
너불은 와락 표정을 구긴다.
"거긴 말귀를 못 알아듣나?"
망할 양반들이, 애는 안 가르치고 이딴 연락이나 보내고 앉았다. 이러니까 졸업생이 죄다 그 모양이지. 너불은 몇 번째였더라, 하여튼 저번 생의 '황제 살해자'를 떠올린다.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나 렉시온을 수석으로 졸업한 우등생이었다. 그 생에 놈은 왕을 거의 죽여 놓았고, 덕분에 너불만 왕을 살려내느라 죽도록 고생했다.
그게 아마 두 세기쯤 전의 일이니, 일반인 기준으로도 썩 오래되진 않았다. (아닌가? 너불은 이제 보통 사람의 삶을 거의 잊어버렸다) 이러고도 대장장이 렉스의 이름을 딴, 대륙 최고의 교육 기관이라고 자부할 수 있나. 너불이 툴툴댄다. 애들한테 도대체 뭘 가르치는 건지.
물론 아카데미의 책임은 한 생뿐이고, 황제 살해자는 수백 년을 거듭한 지독한 숙원에 엉켰다. 학교에 따질 문제가 맞나 싶지만, 거기까지야 너불이 알 바는 아니다.
너불은 편지를 바닥에 내팽개친다.
"이런 건 알아서 치우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집사가 변명한다.
"저도 주인님이 한 번쯤 학교를 방문하셨으면 하는데요."
"네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래 가문을 모셔 온 사람이라 그런지 말하는 데에도 스스럼이 없다. 3년 동안 한 번도 발길 않으셨잖습니까? 그 말이 괜히 귓가에 꽂힌다. 너불은 오른쪽 귀를 문지른다. 그랬지, 녀석을 거둔 지 3년이나 지났다. 달리 말하면, 녀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3년 전이었다. 주워다가 아카데미에 처박아 놓고는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좀 너무하다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집사가 또박또박 묻는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너불은 눈알을 굴려 먼 곳을 본다. 그 새하얀 얼굴을 멀리 떨어뜨려 두는 것. 제게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라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주인님이 아이를 거두신 이유를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너불은 집사의 고집 센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본다. 아무런 깊이도 없이 투명하기만 하다. 오래된 숙원이나 위대한 오만의 혼탁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의 그것이다. 녀석이나 황제 살해자와는, 하다못해 아침마다 거울에 비치는 제 눈과도 다르다.
그러니 이해 못할 수밖에 없다. 집사는 이 운명에 속한 이가 아니니까. 흑룡의 왕과 황제 살해자와 그 외의 여섯 명이 얽힌, 거대하고도 완벽하도록 신이 짜낸 이야기 밖의 인간이다.
아,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인가. 너불은 때로는 집사가 부럽다. 무지(無知)란 실로 엄청난 행운이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탄생한 세계. 영원한 들러리로 살 수밖에 없는 숙명을 너불은 진작 깨달았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오래도록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그러니 녀석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당연한 것을.
그 속도 모르고 집사는 한탄만 한다.
"매번 연락도 그렇게 오는데…."
금전적 지원 말고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후원자. 반면 달에 두 번씩 꼬박꼬박 편지를 쓰는 피후견인. 너불은 한 번도 답장을 보낸 적이 없고, 하다못해 최근 들어서는 읽기조차 않은 그것.
너불은 쓴웃음을 짓는다.
환생자는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랬다가는 지나치게 조숙한 정신 세계 때문에 혼란스러워할 수 있으므로. ('신의 안배'다. 황제 살해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불은 그의 비뚤어진 욕망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류의 통찰은 일리 있다고 보았다.) 대신 적당한 나이가 되면 꿈을 통해 전생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적당한 나이가 언제인지는 생마다 다르다. 너불은 늘 궁금했다. 녀석은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한 걸까, 아니면 되찾았으나 모르는 척하는 걸까.
70통의 편지는 어린아이가 품은 순수한 진심일까, 수백 년 묵은 능구렁이의 양의 탈을 쓴 거짓일까.
녀석이라면 충분히 후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녀석은 일곱 생애에서 너불이 본 중 가장 교활하고 치밀한 새끼니까. 속을 시꺼멓게 칠하느라 색깔을 다 써버린 탓에, 외형이 그토록 찬란히도 하얗다고 너불은 믿는다.
"…어린아이가 가엾지도 않으신가요?"
집사가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콕콕, 손가락으로 찍어낸다. 같잖게도. 너불은 픽 헛웃음을 친다.
"연기가 형편없군."
"티 많이 났나요?"
"그래."
허리를 굽혀 바닥에 형편없이 떨어진 편지를 주워든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진줏빛 편지지에는 살짝 구김이 갔다. 하지만 내용을 읽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진한 녹색의 필기체로 정중하게 적힌, 부디 졸업식에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십사 하는 부탁. 발신인 란에는 악어 학생의 지정교사, 하고 화려한 서명이 뒤를 잇는다.
"…젠장."
익숙한 금빛 문양을 노려보다가 너불은 푹, 한숨을 내쉰다.
가기 싫다. 정말 가기 싫다. 그 뽀얀 얼굴을,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해 뿌연 녹색 눈동자를 더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제 발목을 잘라서라도 불참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이 고약한 인연의 굴레를 끊을 수만 있다면.
왕을 제 운명에서 지워낼 수만 있다면.
"14일이면 언제지?"
집사가 반색한다.
"다음 주 금요일입니다, 주인님."
"시간은 있군."
하지만 너불은 안다.
다 의미없는 반항일 뿐이다.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결국 가게 될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렇게 설계된 삶이니까.
그게 너불의 존재 이유니까.
"맞춰서 가겠다고 전해라."
악어가 주인공인 이 왕의 이야기에서 일곱 주변인은 저마다의 역할을 갖는다.
'황제 살해자', 핑맨은 흑룡왕의 오랜 숙적.
반대로 너불은 왕의 조력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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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의 맨 아랫서랍, 가장 안쪽 구석에 상자를 하나 넣어 두었다. 각 모서리를 순금 장식으로 마무리한 흑단나무 보관함이다. 바닥을 제외한 다섯 면에 빽빽이 조각된 무늬가, 꽤나 고급스러운 물건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정작 주인의 다루는 손길은 전혀 정중하지 않다. 너불은 상자를 책상에 거칠게 내려놓는다. 탕,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려 귀가 아리다.
잠금쇠를 풀고 뚜껑을 연다. 녹색 왁스로 봉인된 미색 봉투가 가득하다. 너불은 편지를 하나씩 꺼낸다. 바닥의 보라색 안감에 음각으로 새겨진 용이 드러날 때까지.
쭉 펼쳐 놓으니 70여 통이라는 숫자가 제법 크게 느껴진다. 절로 한숨이 나오지만, 마음을 다잡고 가장 오래된 봉투를 연다.
악어를 만나기 전에 전부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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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은 무의미하다.
세 번째 생에서 너불이 얻은 깨달음이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다음 생으로는 가지고 가지 못한다. 앞으로 몇 번을 더 반복할지 모르는 삶, 흩어질 물질에 집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동시에 너불은 자문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삶의 끝에는 명예만이 남는다.
제 이름을 드높이는 것. 장대한 인류사에 조그마한 발자국이나마 남기는 것.
그래야 수십 번의 생을 살아낸 이후, 과거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알량한 자부심이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생에서도 너불이 권력의 흐름에 귀를 기울인 이유였다.
왕의 후계자는 둘로, 한쪽은 황제 살해자고 반대편은 제 3의 인물이었다. 너불은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열심히도 재고 또 쟀다. 핑맨은 압도적인 경험량을 가졌으나 혈통이 너무 별로였다. 지금의 귀족파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 공주가 승리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뒤늦게라도 악어가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물론 해 봤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낮다고 예상했다. 이렇게 나이를 먹기까지 악어를 마주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생에 미루어 보아 악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대에 태어났을 수도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느라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어느 정오, 계획에 없던 거리를 지나가다 너불은 예상치 못한 발견을 하나 했다.
"잠깐 멈추지."
손을 들어 마차를 세우고, 친히 땅을 밟아 아이를 데려왔다. 소년은 살짝 당황했으나 겁먹은 듯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를 마차 안에 올려놓고 찬찬히 위아래를 훑었다. 천 년은 산 사람인 양 희게 질린 머리카락. 촉촉하게 물기가 맺힌 말간 피부. 녹색 눈동자는 언뜻 투명한 듯싶으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끈적끈적한 교앙이 묻어나왔다.
너불은 헛웃음을 삼켰다.
이것은 틀림이 없는 악어다.
신의 사랑을 받는 자, 성공이 예비된 이.
너불에게는 다른 말로, 명예를 보증하는 수표다.
오늘과 같이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회색 하늘의 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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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불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봉투를 덮는다.
편지의 어느 곳에서도 음흉한 위선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게 왠지 모르게 너불을 화나게 만든다. 이제 악어는 거짓이 조금도 티나지 않을 정도의 괴물이 되어버린 걸까.
사실이 아님을 안다. 악어의 편지에서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진심만이 강하게 느껴진다. 너불은 그것이 싫다. 애써 부정하고만 싶다. 일곱 번의 경험으로 얻은 깨달음을 하나 추가하자면, 기억을 되찾지 못한 어린 시절의 성격은 매 생에서 비슷하다. 그러니 너도 한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겠구나.
너불은 머리를 쥐어뜯는다. 악어는 그가 미워하는 그대로의 인간이어야만 된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래야 너불의 오랜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테니까. 최초의 삶, 개척과 멸망의 시대에. 최후의 하나가 될 자격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있다고 믿었던 순수한 자신이 조금이나마 덜 미워질 것 같으니까.
살짝 열린 문틈을 지나는 공기의 흐름마저 짜증이 날 지경이다. 너불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편지를 마저 읽는다. 존경하는 후원자님께. 그래도 이걸로 마지막이다.
후원자님, 제가 이렇게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
그래도 제 졸업식에는 한 번쯤 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 졸업생 대표로 상도 받아요. 다 후원자님 덕분이라고 보여 드리고 싶어요.
…
졸업생 대표로 왕자님도 방문하신대요.
마지막 문장이 시선을 잡아끈다.
역대 렉시온의 졸업생 중 왕자라고 부를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는 조금 늦게 깨닫는다. 너불은 헉, 하고 숨을 참는다. 순간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 든다.
황제 살해자가 숙적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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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불은 명예를 원한다.
역사책 일부에, 모두의 기억 속에, 세상 곳곳에 영영토록 제 이름들을 남기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악어를 후원하는 유일한 이유냐 묻는다면 아니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너불은 너무나도 어지럽다. 저도차 알지 못하는 감정이 복잡하게도 뒤섞여 있어서 어렵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 장대한 서사시에서 너불은 왕의 조력자다.
첫 번째 삶, 위대하고도 위대한 흑룡왕의 곁에는 그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푸른 사내가 있었다. 그 시퍼런 백호 녀석이 아니라 왜 하필 제가 선택되었는지 너불은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결코 악어가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자의로든, 신이 설계한 대로든. 악어를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차라리 제가 죽을지언정 감히 왕에게 해를 끼칠 엄두는 못 내는 이가 너불이다. 살해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죽음을 방조하지조차 못한다.
악어를 거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에게 힘을 보탬으로써 찾아올 어마어마한 명성이 탐이 나서- 차라리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세상에는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을까.
이 빌어먹을 인생. 아직도 너불은 매일 밤, 뼈 마디마디와 세포 하나하나마다 깊은 저주를 새긴다. 빌어먹을 세계. 빌어먹을 신.
빌어먹을 악어.
나는 내 모든 생을 다해 너희를 미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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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불은 편지를 도로 보관함에 담는다.
상자의 뚜껑을 덮고, 맨 아랫서랍 깊숙이 밀어넣는다.
첫 번째 생, 한없이 단호하고 오만하던 눈을 기억한다. 세상 전부를 손아귀에 넣고 한없이 만족스러워하던, 그럼에도 부족한지 연신 새로운 것을 찾던 욕심쟁이의 눈빛을.
왕의 발아래 무릎 꿇고 그에게 경배하며 너불은 끊임없이 되새겼다.
너는 내 왕이 아니다.
그 말을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묻었다. 도합 일곱의 생을 버티고도 조금도 흐려지거나 얼룩지지 않았다.
너는 내 왕이 아니다.
네가 우리를 발아래 무릎 꿇린 최초의 삶에서부터 줄곧 그랬다.
너는 내 왕이 아니고, 나는 그저 내 개인적 욕심으로 너를 도울 뿐이다. 너를 둘러싼 운명에 편승하여, 내 이름을 드높이는 일이 한결 쉬워지도록, 그저 이게 전부다….
그러니 이번에도 너를 해하려 할 오랜 숙적을 나는 막을 것이다.
비록 너는 내 왕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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