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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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것도 운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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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r Eclipse

(C)떨리고설레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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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인간은 귀납적인 사고를 한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에 기반하여 내일을 추측한다. 어제에 대하여 오늘이 그런 것 같이 내일 또한 오늘에 대하여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일어나지 않읕 일을 완벽히 예측하는 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귀납은 나름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추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귀납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모든 안전한 오늘이 마찬가지로 안전한 내일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어떠한 재난이 오늘 발생하지 않은 것이 앞으로의 안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 내일도 오늘을 토대로 단정지을 수 없다.

그것이 귀납의 오류이다.

시작 이래 인류가 범한 가장 큰 실수였다.

-

"중력아."

악어가 으르렁거렸다. 분노가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다. 압도적인 키 차이가 그를 한층 더 거대해 보이게 했다. 흘끔 눈을 굴려 위쪽을 올려다봤다가 날선 시선과 마주쳤다. 중력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중력을 포함한 모든 BA의 전투원들은 어려서부터 공포를 잊는 훈련을 받았지만, 악어는 늘 그걸 쓸모없게 만들었다.

"내가 뭐라고 했더라?"

"……."

질문이 요구하는 바를 파악할 수 없었다. 머리를 굴리기를 포기하고 중력은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많은 경우에 침묵은 유효한 답안이 되었다.

"대답."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한층 더 낮아진 톤으로 악어가 다시 윽박질렀다. 중력은 침을 삼켰다. 머릿속이 백지로 변해 버린 느낌이었다. 새하얗게 타들어가는 잔해 속에서 그는 겨우겨우 악어가 당부했던 것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중력은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멋대로 뛰쳐나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또…."

"항상 지원 가능한 인력이 남는지 살필 것. 지원 가능한 인력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뒤 진입할 것. 진입 이후에는 지시에 귀 기울일 것."

죄목을 본인 입으로 말하게 하는 건 아무래도 잔인하다고 생각했는지, 악어는 친절하게도 중력이 대답해야 할 항목을 하나하나 읊어 주었다.

"…그리고, 과도한 흥분 상태를 피할 것."

이 중에서 네가 지키지 않은 것이 몇이지? 악어가 물었고 중력은 이를 악물었다. 악어는 어떠한 물리적 압박도 가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는 명치를 몇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중력이 웅얼거렸다. 할 수 있는 말은 어차피 하나밖에 없었다.

"여기는 네가 예전에 있던 어중이떠중이들 모임이 아니고, 하나하나가 절대 잃어서는 안 될 귀중한 전력이다."

중력의 옛 부대는 국가에서 분류한 기준으로 엄연한 엘리트였고, 절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으되 아무도 감히 악어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악어는 정예 중에서도 정예, 개인의 전력이 일반 부대 수십 개에 버금가는 명실상부한 군의 최강자였다. 그런 이의 눈에 아무나가 쉽게 찰 리가.

"네 안일한 판단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면 부대 전체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어. 알겠나?"

그만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다면 그나마 덜 억울했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중력은 겨우 참았다. 변명한답시고 이것저것 늘어놓았다가는 악어의 잔소리가 한참을 더 길어질 것을 알았다. 중력이 지금 화가 난 것은 악어보다는 오히려 멋사였다. 그가 진입을 망설일 때 그 자식이 한번 밀고 들어가자고 살살 꼬시지만 않았어도. 

중력의 죽일 듯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멋사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혀를 낼름 내밀었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이었다. 참자, 참자, 참자…. 중력은 인내심을 다스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되뇌어야만 했다. 저 빌어먹을 자식. 언젠가 잡아다가 맛있게 쌈 싸 먹고 말아야지.

"대답."

악어가 재촉했다. 중력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

"오늘은 좀 센데?"

"…몰라."

어깨에 묵직한 것이 얹혔다. 남봉이었다. 중력의 어깨에 한쪽 팔을 걸치고는, 다른 팔을 뒤로 쭉 뻗으면서 기지개를 켰다. 보통 때에는 투덜거리며 치웠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남봉의 팔을 어깨에 올린 채 중력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난 분명 말렸다?"

"그래. 저 새끼가 가란다고 간 내가 잘못이지."

어쩐지 찝찝하다 했어, 중력은 애꿎은 바닥만 툭툭 걷어찼다.

"맞지."

멋사가 깐족거렸다. 

"넘어간 사람이 잘못이지, 꼬신 사람이 잘못이게요, 그럼?"

"꺼져!"

중력은 냅다 녀석을 걷어찼다. 두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좀 있던 탓에 중력의 발은 허공을 찢기에 그쳤지만, 멋사가 움찔했으므로 그는 나름대로 만족했다.

"짧아서 안 닿죠?"

"알면서도 니는 쫄았잖아."

중력이 덤벼들 태세를 취하자 멋사는 냉큼 만득의 뒤로 숨었다. 그렇게 하면 웬만한 사람에게 공격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녀석은 너무 잘 알았다. 만득은 한숨을 쉬면서도 멋사를 얌전히 넘겨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중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로 발을 굴렀다. 

너불이 투덜거렸다.

"니들은 그만 좀 싸워라."

"그래, 어떻게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대냐."

몇 걸음 앞서 걷던 수닝이 끼어들었다.

"악어님도 다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중력이는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심지어 이번에는 결과도 좋았잖아?"

"그래서 더 뭐라고 한 걸 거야. 잘못했다간 정말 위험할 뻔했으니까."

"다음에 조심하면 되지."

이번에는 리타와 핑맨까지 합세해 거들었다. 한숨을 쉬다 말고 중력은 웃었다. 여럿이서 마음을 모아 한 사람을 위로해 주는 일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대단하긴 했죠."

만득이 쐐기를 박았다.

"판도라 모체(母體)라니, 운도 좋았어요."

"맞아."

흥분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중력은 남봉의 옆자리로 돌아가 발 맞춰 걸으면서, 그가 다시 팔을 올릴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었다. 악어에게는 혼이 났어도 그때의 기분은 극도의 짜릿함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떠올린 중력이 기분 좋게 웅얼거렸다. 

"맞아…."


2 |

어느 날 땅에서 검은 덩어리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컨테이너 두 개 정도의 크기로, 거대한 계란 모양으로 생겨서는 젤리 같은 제형을 가지고 있었다. 어떠한 군대의 물리적 충격에도 파괴되지 않다가, 화염방사기의 불꽃을 맞고서야 정체를 드러냈다. 막 광산에서 캐낸 석탄보다 다섯 배는 시커멓고 인류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해괴한 것보다 열 배나 징그러웠다. 그런 생명체들 수천, 수백 마리가 꿈틀거리며 세상으로 빠져나왔다.

그것은 벌레의 알이었다. 정확히 벌레라고 부를 수 있는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생김새의 유사성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학자들의 경우는 조금 달랐는데, 압도적인 흉측함에 대한 경의를 담아, 비슷한 일을 겪었던 어느 신화 속 여인의 이름을 빌렸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판도라'가 되었다. 그리고 마치 이름값이라도 하듯, 한번 열린 판도라의 상자는 닫히지 않았다.

그랬다지만 중력도, 그의 부대에 속한 누구도, 심지어는 악어마저도 잘 몰랐다.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

뜨거운 물로 씻었더니 몸이 노곤했다. 눈꺼풀이 하도 무거워서, 눈을 감으면 서서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으며 중력은 크게 하품했다. 옆 침대의 만득이 양말을 갈아신다 말고 웃었다.

"피곤하세요?"

"안 피곤하면 사람이겠냐?"

"일리 있는 말이에요."

중력은 베개를 팡팡 두드려 폈다. 살짝 일어나는 먼지는 후 바람을 불어 쫒았다. 움직임이 많다는 건 즉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도 많다는 뜻이다. 남들보다 훨씬 많이 움직이는 중력은 늘 빨리 방전되는 편이었다. 그나마 충전도 빠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얼른 주무세요."

"응."

중력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벽을 향해 몸을 웅크렸다. 뽀송한 베개에 머리를 대면 늘 기분이 좋았다. 목숨을 바치기 전에 사치라도 마음껏 누리라는 탓인지, 최전방의 물품은 항상 최상품이었다. 향긋하게 풍기는 고급 섬유유연제 냄새도 빠른 숙면을 도왔다. 두 번째 하품이 끝나기도 전에 중력은 이미 곯아떨어져 있었다.

-

하얀 화면에 줄을 서던 글자들이 멈추었다. 악어는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침침한 눈을 비볐다. 당일의 성과를 보고하는 문서를 완료했다. 할 일이 끝났으니 드디어 쉴 수 있었다.

책상 위의 시계는 자정 오 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면 조금만 더 있다 가야겠다. 악어가 결정지었다. 조금만 더 앉아서, 한 번만 더 검토하고 일어나야지. 그는 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머그잔을 집어들었다. 수닝이 습관처럼 차를 채워 놓는, 늘 거기에 있어서 이제는 풍경의 일부가 되어 버린 찻주전자 세트였다.

악어가 책상에 앉아 있던 시간을 증명이라도 하듯 찻물은 미지근했다. 악어는 연노랑의 향긋한 액체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물건이라고 했던가, 악어가 되짚었다. 수닝이 뭐라고 이름을 말해 주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맛이야 좋았으니 별로 상관 없었지만.

악어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판도라 모체, 파란색 중력의 이름 옆에 쓰인 부분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엄청난 수확이었다. 벌레의 어마어마한 번식력을 인간으로서는 쉽게 감당할 수 없었기에, 모든 싸움의 궁극적 목표는 번식력이 있는 개체, 즉 모체를 사살하는 것이었다. 벌레는 인간의 예상보다 지능이 좋아서, 그 점을 파악하자마자 모체를 그들의 영역 가장 안전한 곳에 숨겼다. 그래서 모체 사냥은 사실상 하늘에 별 따기였다. 최정예인 악어의 부대도 달성하기 힘들 만큼.

그런 모체를 잡았다. 다른 종류도 아닌 판도라의 모체를. 중력이 이 일을 해냄으로써, 안전 지역에 있는 가족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떨어질 것이었다. 중력뿐 아니라 악어를 포함한 부대원 전체의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악어는 미간을 짚었다. 야단을 맞고 울상이던 녀석의 표정이 떠올랐다. 역시 오늘은 너무했나. 중력은 아무리 위험하고 무모한 일도 성공시킬 능력이 충분한 사람인데, 그 점을 알면서도 늘 화를 내고 만다.

아니, 그래도 잘못한 건 고쳐주어야지. 악어는 화면의 인쇄 버튼을 눌렀다. 위잉거리며 프린트기가 종이를 뱉어냈다. 호전적이면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자만하기 쉽다. 그리고 그 자만은 훗날 분명, 그들의 목을 옭아맬 올가미로 작용한다. 그럴 일이 결코 없도록 하겠다고 악어는 언젠가 맹세했다. 중력이 극복한 시련이 무거울수록, 얻어낸 결과가 달콤할수록 더 호되게 지적하겠다고 다짐했다. 

악어는 서명하고 도장까지 찍은 서류를 팩스기에 넣었다. 메일이라도 가능했다면 편했겠으나, 그가 있는 곳은 안타깝게도 군대였고 군대는 민간인의 세상과는 철저하게 단절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기계의 달칵거리는 소음을 배경 삼아 악어는 책상을 정리했다. 팩스기가 도로 토해낸 종이는 잘 정리해 서류 파일에 꽂았다. 무언가 잊은 것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는 서재를 나왔다.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복도는 어두웠다. 불을 켤 법도 하건만 악어는 꿋꿋이 어둠을 헤치고 걸었다. 하도 오래 밟아 온 길이라 이미 익숙했다. 그는 방문을 열고, 문 바로 앞에 있는 제 침대에 파고들었다. 커튼을 꼼꼼히 쳐 두어서 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코 고는 소리만 간혹 들리는, 고요한 밤이었다.


3 |

입대는 강요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원하는 자의 가족은 일정량의 식량과 돈을 받는다. 그가 전장에서 공을 세울 경우에는 상금이, 사망할 경우에는 위로금이 추가로 지급된다.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형편이 어려운 가족에게는 그것마저도 절실했다.

그렇게 자원한 - 혹은 자원당한 - 이들은 대부분 일반 병사가 되지만, 십 대의 아이들 중 재능이 특출난 이는 따로 선별된다. 그들은 정예 전투원 양성소, 즉 BA에 입소해 특별한 훈련을 거친다. 그 BA에서도 가장 오래 살아남은 자들. 그 영리함과 강함과 빠름이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남을 인정받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 최전방보다도 앞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최정예가 악어와 그의 부대였다.

-

멋사가 칫솔을 물고 욕실에서 걸어나왔다. 일어나자마자 이를 닦는 것은 멋사만의 하루 일과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밤 동안 입 속에서 세균이 번식하기 때문에 아침을 먹기 전에 청소해 줘야 한댔다. 중력은 녀석의 말이 굉장히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귀찮음을 이길 수 없었기에 따라 실천하지는 않았다.

"밥 먹어라."

주방 쪽에서 핑맨이 불렀다. 멋사가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중력은 쯧쯧 혀를 차며 느긋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가끔씩은 이렇게 게으른 쪽이 유익하기도 했다.

식당은 고소한 냄새로 가득했다. 프렌치토스트와 계란후라이. 핑맨이 즐겨 하는 아침 메뉴였다. 둘 다 달걀이 사용된 음식이라, 처음에는 조금 이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했으나 먹다 보니 나름대로 괜찮았다. 중력은 그릇을 들고선 앉을 자리를 찾았다. 너불이 탁탁,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여기 와."

중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을 먼저 내려놓고, 의자를 빼면서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상여금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그 점을 깨닫자 기분이 살짝 들떴다.

"수닝님은 동생이 있다고 했나?"

"응. 이제 결혼할 나이인데, 이번에 돈이 도착하면 결혼 자금으로 충분할 것 같아 다행이야."

"그렇겠네."

뿌듯했다. 중력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빙그레 웃었다. 

"중력이는?"

"어?"

적어도 질문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중력은 깜짝 놀라 어벙하게 되물었다. 당황을 화제를 알지 못하는 탓으로 이해했는지, 리타는 친절하게도 다시 물었다.

"이번에 집으로 들어가는 돈, 어디에 쓰일 것 같아?"

"우리 집…."

그러고 보니 상금은 제 가족에게도 주어질 테다. 생각은 조금 천천히 흘러갔다. 집에서는 그걸 어디에 쓰려나. 사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질문도 들어왔겠다, 예의상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고민한다고 모르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되지는 않았다. 중력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하긴, 그럴 수도 있지."

말해 놓고 보니 흐름을 깬 것 같아서 중력은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다행히도 리타는 남봉에게 비슷하게 물음으로써 원래의 분위기를 유지했다. 중력은 대신 식사에 집중했다. 채 녹지 않은 설탕 알갱이가 잇새에서 사각거렸다. 핑맨은 늘 프렌치토스트에 설탕을 잔뜩 뿌렸다.

군에 입대하는 모든 병사들은 두 부류로 정확히 나눌 수 있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본인의 의지로 들어온 쪽과 가족이 부양받기 위해 억지로 밀어넣은 쪽. 수닝으로 대표되는 전자는 보통 가족과 사이가 좋았고 입대한 지 오래되어도 애틋하게 여겼다. 그들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원동력으로 했다. 지켜야 할 것이 확실했기에 대체로 능률도 괜찮았다. 

반면 후자의 삶을 운용하는 연료는 제각각 달랐다. 그들은 살아갈 힘을 가족에게서 찾지 못했다. 대신 자기만의 이유를 만들었다. 동료애, 충성심, 의무감, 혹은 흥미…. 무엇으로 연명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효율은 크게 차이가 났다. 중력은 후자였고, 굳이 따지자면 흥미로 버티는 쪽에 속했다.

중력은 전장에 투입되었을 때의 흥분,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까지 활기를 전하는 느낌을 좋아했다. 벌레의 젤리 같은 껍데기를 총알이 뚫으면 검은색 액체가 물컹, 하고 흩어지는 모양도 좋아했다. 중력은 제가 싸움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 위한 과정을 떠올리면, 그리고 그 일을 다시 겪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중력의 우선 순위에 가족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좋은 아침."

악어가 뒤늦게 들어오는 소리가 흐름을 끊었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요."

악어는 운동복 소매로 대충 얼굴을 훔치고 자리에 앉았다. 이마가 땀에 젖어 반들거렸다. 멋사의 습관이 일어나자마자 이를 닦는 것이라면 악어는 아침식사 전에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땀 냄새 많이 나냐?"

악어가 토스트에 포크를 쿡 박으면서 물었다. 핑맨이 어깨를 으쓱했다.

"새삼스럽게요."

"그래."

"오늘은 뭐 없어요?"

너불이 물었다. 악어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사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도 없었다. 아침이 이렇게 평화로운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럼…."

"다들 오늘 일정 보고."

상부로부터 진격 명령이 떨어지거나 벌레의 습격이 있지 않은 날에는 각자의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기강이 해이해져서 잔뜩 늦잠을 자거나 하루 종일 뒹굴거리는 일이 없도록, 그런 날이면 악어는 꼭 하루의 할 일을 물었다.

악어 맞은편의 수닝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계획을 불렀다.

"책을 읽을 건데요."

가끔 필요한 것을 요청하면, 철저한 검토를 거쳐 생필품과 함께 보내 주는 경우가 있었다. 수닝의 서재 - 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소박한 책꽂이 - 도 그렇게 받은 책으로 가득했다.

"로맨스 소설이요?"

악어가 놀렸다. 수닝이 울상을 지었다.

"대리만족 정도는 봐 주세요…."

요리를 하겠다는 멋사의 말에 남봉은 그 요리를 시식하겠다고 덧붙여 큰 웃음을 자아냈다. 핑맨과 너불은 산책을 하겠다고 했다. 리타는 만득에게 배드민턴을 함께 치자고 했고 만득은 수락했다. 중력은 뒷마당을 오가는 길고양이들과 조금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좋네."

악어가 웃었다.

"다들 즐겁게 보내요."

중력은 마지막 남은 프렌치토스트 조각을 포크로 찍었다.

평화로웠다.

그러나 세상에 오래 가는 평화란 없는 법이었다.


4 |

벌레의 각 개체는 번식을 거듭했고, 학자들은 그것에 여러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야행성인 포실, 나방의 더듬이에 지렁이의 꼬리를 가진 피아닌 따위의 새로운 이름이 생겨났다. 그러나 최초의 것, 가장 검고 흉측하고 영리하고 강한 것은 여전히 판도라였다. 악어의 부대 주변을 빼곡히 점령한 종류, 벌레의 주 전력이자 악어와 그의 부대원들의 가장 큰 적이었다.

-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울렸다. 작은 소리에도 깨는 핑맨은 물론이고 잠귀가 유독 어두운 만득까지 모두를 단번에 깨어나게 할 만큼 요란했다. 

한밤중의 사이렌. 한밤중의 침공. 드문 일이었으되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머리맡에 꼭 보호복과 무기를 두게 되어 있었다. 악어는 조끼를 머리부터 내려 입었다. 버클을 조여 가슴과 배를 잘 가리도록 하고 부츠의 끈을 단단하게 묶었다. 마지막으로는 총의 잠금장치를 풀면서 복도로 달려나갔다.

"위치는?"

"북동쪽으로 10킬로미터."

천천히 도착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악어가 물었다. 오늘의 당번인 남봉이 스피커로 대답했다.

"지금은 강에 발이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7분 안팎으로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종류는?"

"포실 서른에 판도라 다섯입니다."

"까다롭겠군."

쯧, 악어가 혀를 찼다.

"맞이하러 가자!"

차를 타고 2분쯤 달렸으려나, 센 강 인근의 어느 도시에서 그들은 적을 마주쳤다.

무너진 건물, 부서진 도로 파편, 사람의 손을 떠난 지가 하도 오래되어 녹이 슨 채 나뒹구는 망가진 자동차. 사실 도시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폐허였다. 그러나 시가전을 치르기에는 부족할 것 없는 전장이었다. 벌레보다 체구가 작은 인간은 게릴라전에 유리했고, 악어는 다른 누구보다 전략을 짜는 데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여기까지는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그 '마주침'이, 한쪽은 상대의 위치를 알고 다른 쪽은 알지 못한 채 이루어지는 형태가 아님은 계획에 없었다. 벌레가 어떻게 머리를 썼는지, 기존에 파악한 것보다 일찍 강을 벗어난 탓이다. 적당한 곳으로 몸을 숨길 시간도 없어 악어는 큰길 한가운데에서 적을 맞이해야 했다. 조수석에 앉은 중력이 걱정스럽게 그를 곁눈질했다. 

여기가 우리가 죽을 곳인가?

악어는 썩어들어가는 속은 숨기고 미소를 지으며, 중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혼자가 아님이 그나마 다행이구나.

선전 포고처럼 차에 무언가 날아왔다. 물풍선 같은 형태의 그것은 차와 충돌하자마자 터져 검은 내용물로 앞유리를 몽땅 덮었다. 참으로 현명하기도 하지, 나올 수밖에 없도록 시야를 봉쇄하는 것이다. 벌레는 인간의 가장 발달한 기술을 이기지 못했으므로, 차를 타고 곧장 돌진한다면 몇 마리 정도는 문제 없이 깔아뭉갤 수 있는 까닭에.

옆유리는 무사해 악어는 그쪽으로 바깥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가 봐 둔 곳이 바로 앞이었다. 악어는 차 문에 손을 얹었다.

"작전은 바뀌지 않는다.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라."

악어와 중력은 말 그대로 미끼였다. 한 마리, 많아야 두세 마리씩 다니는 것들을 유인해 저격수가 숨은 곳으로 끌고 간다. 몰려다니기보다는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 포실에게 맞춰 작성된 전략이었다. 악어는 그 방법을 그대로 밀고 갈 생각이었다. 원래는 약간의 인기척만으로도 충분했다는 점에서 차질이 있긴 했지만, 두 사람의 능력으로는 아마 해결이 가능했다.

"우선은 개별 행동이다.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해."

"알겠습니다."

"그곳에서 만나자." 

저격을 준비하는 다른 동료들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았기를, 그래서 그들이 무사히 제 일을 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

악어는 다섯 번째 스팟, 만득이 지키는 곳 근처에서 중력과 조우했다. 중력은 다리를 절뚝이며 악어에게 다가왔다. 악어도 그닥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깨는 관통당했고 그 와중에 팔도 부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살아 있었다. 이 정도면 선방이었다. 악어는 골목의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중력도 따라했다.

군대는 군인에게 가족의 안전과 부를 약속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젊음과 자유를 앗아간다.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죽을 때까지 여기 있을 것이고, 어쩌면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군인으로서의 맹세는 곧 남은 생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약속이었으므로. 악어는 중력의 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짙은 결연함이 드러났다. 생과 사를 건 치열한 싸움의 흔적이었다.

원래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되는 사람이 있었다. 싸움에 싸움을 거듭하면서 하나둘씩 사라졌고, 이젠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졌다. 전장에서 오래 구른 군인일수록 자주 호소하는 증상이었다. 동료에 대한 기억 상실. 추억이 쪼개지고 부서지다 결국은 파도가 덮친 모래처럼 멀리 씻겨져 내려가는, 그래서 결국에는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느껴지는 현상. 그게 반복되다 보면 점차 초연해진다. 한 겹 유리벽 너머에서, 우리 안에 든 동물 같은 죽음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가만히 서서 손을 올리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 있다. 차갑고 얇은 유리창. 절대 깨질 일 없어 보이지만 실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고 마는, 만우절도 아니면서 세워진 어느 거짓말. 

악어는 궁금해졌다. 우리는 죽음에 초연해진 걸까, 아니면 초연해지고 싶은 걸까.

"악어님."

문득 중력이 물었다.

"운명을 믿으세요?"

이건 운명일까, 내가 선택한 길일까.

운명은 존재하나, 아니면 인간의 나약이 빚어낸 허상일 뿐일까. 

나는 싸우길 원하는 건가, 아니면 실은 도망치고 싶은 건가?

언젠가 인류는 패배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승리할 것이다. 악어는 둘 중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둘 중 무엇도 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악어가 아는 유일한 한 가지에 의하면, 인류의 전쟁이 끝나는 날 그와 그의 사람들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악어는 만득이나 중력처럼 희망에 찬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우리의 최후는 한 줌 새하얀 모래알. 아무리 움켜쥐려고 해도 손틈으로 쉽게 흘러내리는, 그래서 결국 아무도 찾을 수 없게 바닷속 깊이까지 가라앉고야 말 어떤 돌의 부스러기.

악어는 후회했다. 아니, 후회하지 않았다. 가끔씩은 잠을 자기를 잊어버릴 정도로 괴로워했으되 결코 그러지는 않았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것이었다.

악어는 대답하는 대신 반대로 물었다.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것도 운명일까?"

군대에 들어온 이후로 악어는 떠받들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말 타고났다고, 오로지 벌레를 베어 죽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고.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모두가 그를 높였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시멘트 위에 타일을 올리듯 바닥 밑에는 더 깊은 바닥이 있다.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언제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악어는 늘상 궁금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정말 여기가 맞나. 형편없는 최후가 예정되어 있는 이곳이, 정말 나의 자리일까.

근처에서 괴기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마지막 남은 개체였다. 악어는 소리의 크기로 거리를 가늠하면서, 저와 중력의 몸상태를 흘긋 확인했다. 만득의 시야에 완벽하게 들어오려면 약간의 인기척이 필요할 텐데. 조금 더 뛰라고 하는 것은 거의 살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악어는 결국 혼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어라."

중력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같이-"

"됐어. 다녀올게."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것도, 운명일까.

그러니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게 맞을까.

Is it fate to be smashed to pieces?

/Sawano Hiroyuki, Zero Ecli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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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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