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각자의 꽃밭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네.

자의 꽃밭

(C)떨리고설레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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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네."

뭐요? 중력은 하마터면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니, 거의 떨어뜨렸나. 바닥에 몇 장 힘없이 흩어진 종이를 수닝이 재빨리 모아다 쥐여 주었다. 놀란 이는 그만이 아니었다. 리타는 손톱 끝을 만지작대던 손가락을 멈추었으며(어정쩡하게 지은 표정이 상황에 맞지 않게도 제법 웃겼다), 멋사는 반쯤 머금었던 포도주를 그대로 잔에 뱉어내었다. 만득은 잉크가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놀리던 깃펜을 멈추었다. 오로지 태연한 건 왕뿐이었다. 그는 방 안에 모인 이들의 반응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반쯤 기울이고 부드럽게 몇 번, 눈을 깜박였다.

"…예?"

적막을 깬 건 너불이었다. 송구합니다만 폐하, 방금 뭐라고….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왕은 개척자 시절의 동맹이던, 가장 친애하는 부왕의 요구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흑룡왕은 친절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다시 한 번 단단히 못을 박았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네.

이번에 중력은 진짜로 종이를 떨어뜨렸다. 아까처럼 한두 장이 아니었다. 그와 다른 여섯 명의 부왕들이 거의 한 달간 심여를 기울여 모은, 온갖 고귀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의 초상화가 회의장 온 바닥에 흩어졌다. 이번에는 아무도 감히 주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핑맨조차도 제가 방금 들은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가만 서 있었으니.

"뭐, 뭐, 뭐, 뭐라고요?"

멋사가 말을 더듬었다. 만나는 분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그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넘어진 잔의 포도주가, 바닥에 흩어진 종이 몇 장을 적시고 흘렀지만 신경쓰는 이는 없었다. 그보다는 아무에게도 주지 않을 것 같았던 그들의 왕의 마음을, 감히 빼앗은 여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이 더 컸다. 대체 어떤 가문의 영애시랍니까? 멋사가 물었다. 아니 그 전에,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라는 거, 그 분도 아십니까? 개척자 시절에나 쓰던 격식 없는 말투였지만 그의 너그러운 왕은 지적하지 않았다.

"…나를 도대체 어떤 인간으로 생각하는 건가."

하! 리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예의 없는 비웃음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헛웃음이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중력도 똑같이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인이 있으시단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누구보다 경애하는 목석 같은 그의 왕께서.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결혼을 약속한 사이시란다! 심지어 그 분도 동의하셨단다!

"그러니 더 이상 같은 문제를 내게 들고 오지 말게."

흑룡왕은 태연하게, 그러나 가차 없게 바닥에 떨어진 초상화를 카펫 삼아 즈려밟고 방을 나섰다. 뒤에 남은 일곱 명의 개척자들은, 여전히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해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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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말도 안 돼."

종이를 모아 쥐며 리타가 중얼거렸다.

"동감이야."

수닝이 동의했다. 우리 왕께 마음을 빼앗긴 분이 계시다고? 저 키에, 몸매에, 성격에, 얼굴을… 마음에 담은 영애가 있다고? 그러나 따지고 보니 어느 하나 꿀리는 부분이 없었기에, 그녀는 트집을 잡으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없는 게 더 이상하긴 하네."

"그래, 왕님을 흠모하는 영애는 많아."

리타가 말했다. 다만 왕께서 마음에 두신 여인이 없었을 뿐이지. 축축하게 젖어 달라붙은 종이를 간신히 집어올리며 그녀가 탄식했다. 나는 저 사람이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하마터면 취향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볼 뻔했다니까?

"어쨌거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핑맨이 말했다.

"우리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잖아."

그 말에 모두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이제 슬슬 왕께서도 좋은 비를 맞으셔서 후사를 보셔야지, 흑룡왕이 일찍 떠난 식사 자리에서 나온 화제였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 않아? 아니야, 생각해 봐. 우리 왕을 닮은 아기님이 성을 돌아다니면 어떨지! 분명 그분 얼굴을 똑 닮았을 거야, 그런데 그분과는 정반대로 조그맣겠지?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그 말이 결정타였다. 반대 의견은 하나도 없었다. 이에 그들은 열심히 전국을 돌아다니며 내로라하는 가문의 영애들과 이름난 미녀들의 초상화와 신상 정보를 모으고, 밤을 새워 또 골라내었다. 단아하고 정숙하신 분이 나을까? 왕님을 휘어잡을 정도로 기가 세도 좋겠어. 이쪽은 어때, 아니 그 아가씨는 가문이 너무 한미한걸. 하지만 우리 왕님 정도의 권력이면, 어느 영애분을 들여도 상관 없지 않겠어? 게다가 외가의 입김이 세서 망한 왕조가 한둘이야. 그럼 이쪽은? 검은 머리가 탐스럽게 예쁘긴 한데, 역시 왕께서는 금발을….

그들의 왕이 알았다간 팔짝 뛰며 거절했을 걸 알았기에 모든 과정은 비밀로 했다. 그러느라 조금 더 오래 걸렸다. 그렇게 한 달에 걸쳐 완성된 것이, 수십 장에 육박하는 종이 더미였다. 중력이 방금 회의장에 들고 등장했던, 멋사의 포도주 자국과 왕의 발자국이 남은 바로 그 양피지.

그래! 멋사가 크게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야겠어."

그들은 그렇게 오랜만에, 한 마음 한뜻으로 단합하여 왕의 집무실에 쳐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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