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사냥개 _ 上

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너는 이미, 그 이빨에 목을 물어뜯기고 있을 거야.

(C)떨리고설레다 2019

WTK의 사냥개, 최고의 사냥꾼. 한번 문 건 절대로 놓지 않는, 최상위 포식자. 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너는 이미,

그 이빨에 목을 물어뜯기고 있을 거야.


/

사냥개

/


 

01

 

핑맨이 복도로 나왔을 때, 저 끝에서는 악어가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악어님.”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는 그는 피곤에 찌든 얼굴이었다. BA의 팀장이란 게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핑맨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틈만 나면 불러대는 간부들에 쏟아지는 서류들까지. 가끔 제가 배정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간부와의 미팅이 있으면 늘 그렇듯, 악어는 셔츠와 정장 바지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핑맨은 잠시 그의 자리에 서 있는 저를 그려 보았다. 맨 위까지 단추를 꼼꼼히 채우고, 일에 방해되지 않게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라. 상상만 해도 어울리지 않았다.


목이 답답한지 악어가 암녹색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커피 먹을래?”

“사주시게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뭘 자꾸 사 주는 그의 습관 정도야 이미 꿰뚫고 있었다.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핑맨은 곁에 따라붙으며 싱긋, 되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서류 더미를 빼앗아 들자, 양 팔에 전해지는 무게가 묵직했다. 평소보다 한참은 적은 양이었는데도. 그는 종이 탑을 고쳐 안으며 팀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은 맨날 이런 걸 어떻게 들고 다닌대.


악어가 대답했다.


“그런 말은 안 했는데.”

“에이.”

언제나처럼 빠르고 단호한 반응이었다. 핑맨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그러든지.”

그래도 제가 내겠다면서 고집 부리리라고 생각했던 악어에게서 돌아온, 웬일인지 얌전한 답에 조금 놀라며.


“방에 들렀다 가실래요?”


 악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히 빈손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악어의 손에는 서류 파일 하나와 볼펜이 들려 있었다. 봄날의 개나리를 연상시키는 선명한 노란색, 중요하긴 해도 기밀까지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가져왔겠지만.


“뭐 드실래요?”


 즐겨 찾는 카페의 메뉴판을 보며 묻자 그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똑같은 걸로.”


 카운터 너머에 선 알바생의 긴 생머리와 예쁘장한 얼굴이 바로 눈에 띄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온 모양이었다. 핑맨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눈치 빠르게 물었다.


“주문하시겠어요?”


핑맨은 지갑을 뒤적여 카드를 꺼냈다.


“아메리카노 둘이요. 하나는 샷 추가해 주시고요.”

“아이스로 드릴까요?”

“네.”


 그러고는 그새를 못 참고 서류를 들여다보는 악어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덧붙였다.


“제가 사는데 좀 더 비싼 거 드시지.”

“됐네요.”


 악어는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나보다 월급도 적은 게.”

“와, 이걸 이렇게?”


 뭐라고 멋지게 받아쳐 주고 싶었다. 모아둔 돈은 더 많거든요, 라던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핑맨은 괜히 큰 소리만 쳤다. 저축이란 건 어릴 적 길렀던 돼지저금통밖에 모르는 터라.


“가서 자리나 잡으세요!”


 악어는 킥킥거리며 외진 곳의 창가 자리에 파일을 내려놓았다.


“아, 혹시.”


서투른지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던 아르바이트생이 조심스레 물었다.


“테이크아웃 하시나요?”


 목소리도 귀엽네, 핑맨은 은근슬쩍 카운터에 몸을 기대며 악어의 자리에서 제 말이 들릴지 대충 가늠해 보았다.


“아뇨. 유리잔에 주세요. 아, 그리고…”


 혹시 남자친구 있으세요, 끝나고 시간은요?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뒤에서 살벌한 눈빛이 날아왔다. 그걸 느끼고 핑맨은 움찔 말을 멈췄다. 이게 들린다고? 미쳤네. 뒤를 돌아보자 악어와 눈이 마주쳤다. 서류를 펼쳐 놓고 볼펜을 돌리며 그가 생긋 웃었다. 


 작업, 걸면, 뒤진다.


 입모양으로만 하는 말이었지만, 위협으로서는 충분했다. 찔끔 놀라 핑맨은 기울이던 몸을 바로잡았다. 빠르게 깜박이는 알바생의 크고 예쁜 눈동자도, 이제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신가요?”


 대신에 그는 싱긋 미소지었다.


“아뇨, 괜찮아요. 필요 없다네요.”

 

.

.

 

“너 그렇게 아무한테나 작업 걸고 다니면 안 되는 거야.”


 주문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악어의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BA 요원인데.”

“어, BA 아니면 괜찮은 거에요?”

“뒤진다, 진짜.”


 우스갯소리처럼 내뱉은 말에 악어는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핑맨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치고, 지갑과 영수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악어님이랑 같이 오면 잘 안 넘어오는 거 알면서.”


 악어가 눈을 흘겼다.


“잘 안 넘어온 게 그만큼이냐? 아주 하트가 막 떠다니던데, 그 아가씨.”


 에이, 핑맨은 손을 저었다.


“그만큼이라뇨. 누가 들으면 제가 쓰레긴 줄 알겠네.”


 악어가 태연스레 답했다.


“맞잖아.”

“아니거든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샷 추가 나왔습니다.”


 더 반박하려는 순간, 알바생의 명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실 말로도 이길 자신이 별로 없어서, 이때다 하고 핑맨은 벌떡 일어났다.


“음. 가져올게요.”

“오야.”


악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로 눈을 돌렸다.

 

.

.

 

“이게 악어님 거.”


 카운터에 다녀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을 때에야 그는 종이에서 빠져나왔다. 핑맨은 의자를 빼고 앉으며, 서류의 토할 것 같이 빽빽한 글씨를 흘끗 넘겨다보았다. 잠깐 시선을 두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파 오려 했다.


“뭔 일이 그렇게 바빠요?”


 유리잔을 집어들고 악어는 눈가를 문질렀다.


“몰라. 별 거 다 있네.”


 다소 빠른 속도로 비워지는 그의 잔을 보다가, 핑맨은 제 음료를 한 모금 삼켰다. 바뀐 알바가 물 조절을 잘못했는지, 평소 먹던 것보다 밍밍했다. 그러고 보니까 양이 조금 많은 것 같기도 하고…. 빨대로 대충 휘젓자 얼음이 유리와 부딪히는 소리가 쟁강쟁강 울렸다.


“그러게 오는 서류 다 받지 말고 깽판 좀 치라고 했잖아요.”


 3분의 1쯤 비우고 컵을 내려놓은 손에 다시 펜이 들렸다. 악어가 폭, 한숨을 내쉬며 핑맨을 쳐다보았다.


“니가 하라는 대로 깽판 쳐서 이렇게 된 거잖아.”


 악어님이 깽판을 잘못 친 거 아닐까요, 핑맨은 반쯤 입을 열었다 울리는 전화벨에 다물었다.


“너 전화 왔다.”

”알아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자 급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너 지금 어디야? 악어님이랑 같이 있어?”


 리타였다. 핑맨은 핸드폰을 떼고 귀를 문질렀다.


“귀 아프다. 악어님 나랑 커피 마셔.”


 그녀가 말했다.


“간부들이 악어님 오지게 찾는데? 서류 오늘까지인 거 있냐고 물어봐. 그거 빨리 달래.”


 귀에 대고 있지 않는데도 들릴 정도로, 빠르고 높아진 목소리였다. 안절부절못하는 게 전화기를 통해서까지 느껴졌다. 간부 직속도 참 힘들긴 하지, 또 누가 엄청 갈군 모양이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악어에게 핑맨은 전화기를 내밀었다.


“박리타가 오늘까지인 거 있냐고 묻는데요?”


악어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손을 뻗어 낚아챘다.


“줘 봐.”


통화는 한참이 걸렸다.


“아니, 그거 방에 있다니까요. 저 밖인데 조금 이따가 갖다 주면 안 돼요?”


전화기를 넘어 리타의 높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안 된다는데요? 지금 당장 갖다 달래요.”


마침내 전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돌려준 악어는 서둘러 서류와 볼펜을 챙겼다. 반도 채 못 비운 커피잔을 쳐다보는 아쉬운 시선을 눈치채고 핑맨이 말했다.


“급하면 먼저 가세요. 정리하고 곧 따라갈게요.”


악어는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미안. 다음에는 내가 살게.”


 딸랑, 카페 문의 벨이 울리고 검은 코트를 입은 뒷모습이 재빨리 멀어져 갔다. 핑맨이 테이블 위에서 종이 두어 장을 발견하기 바로 직전에.


“악어님, 뭐 두고 갔…”


 10pt의 군더더기 없는 바탕체로 인쇄된 곳곳에 들어간 빨간 첨삭이 보였다. 흘려 썼지만 읽기 어려운 편은 아닌 악어의 글씨였다. 핑맨은 눈으로 맨 위 몇 줄을 죽 훑었다. 독극물, 맹독, 고도로 위험….


“쓰레기겠지?”


 결론을 내리고선 종이를 곱게 접어 제 코트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혹시 모르니까, 악어님 책상 서랍에 돌려 두어야지. 문득 쳐다본 악어의 컵은 채 절반도 안 비워져 있었다. 핑맨은 그 옆에 들고 있던 제 것까지 내려놓고 일어섰다. 오늘의 일정에 혼자서 쓸쓸하게 커피 마실 계획은 없었으므로.


 돈이 조금 아깝긴 해도 미련과 같이 버리기로 했다. 혼자 먹으면 친구 없는 사람 같잖아. 핑맨은 코트에 팔을 끼우고, 쟁반을 카운터에 가져다 주었다. 아르바이트생의 명랑한 인사 소리를 들으며 카페를 나왔다.


“안녕히 가세요!”

 

 

.

.

 

 이른 봄의 조금 쌀쌀한 날씨는 상쾌했다. BA 건물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핸드폰이 또 울렸다. 이번에 핑맨은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익숙하긴 했으나 썩 통화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었기에, 언짢은 티를 내지 않으려 목을 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업무용 폰으로 전화해도 되냐?”


 전화 너머의 상대는 질문을 대충 넘기고는 제 말을 했다.


“네, 형. 요즘 우리 임무는 어때요? 뭐 새롭게 하라는 거 없어요?”


 이게 진짜. 핑맨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많이 컸다? 이제는 말도 막 씹고.”


 과자를 먹는지 전화기 너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떠긴 뭐가 어때. 일이 있으면 내가 진작에 얘기했겠지. 넌 간부 된다는 놈이 정보 수집이 그렇게 느려서 어떡하냐.”

“흠. 언제쯤 들어오려나.”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일단 알겠어요, 형. 나중에 일 들어오면 나부터 알려 줘야 돼요.”


 어느새 건물 입구였다. BA 마크가 새겨진 높다란 빌딩을 올려다보면서 핑맨이 말했다.


“어. 다 왔으니까 이만 끊자.”


 화면의 빨간 버튼을 누르기 직전, 들릴락말락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곧 봐요.”


 

/


02

BA.


 특별히 훈련받은 요원들로 이루어진, 경찰보다 조금 더 높이 있는 정부 직속 특수 부대는 테러나 마약 등 대규모 범죄 수사에서부터 커다란 재난재해 처리까지, 공무원이나 군인들 선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많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특히 10여 년 전에 등장한 동기 모를 테러 조직 WTK로부터의 시민 보호가 주요 임무였다.


“형.”


 핑맨이 본사 건물로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메신저백을 멘 중력이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어. 어디 가?”


 그가 들고 있는 새파란 감자칩 봉지에 손을 넣으며 핑맨이 물었다.


“에이, 알면서. 공부하러 가죠!”


 BA의 간부가 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간부 후보인 악어처럼 착실히 경력을 쌓아 길을 밟아 가거나, 현 간부 중 하나인 남봉처럼 1년에 두 번 있는 시험을 통과하는 것. 중력은 후자였다. 핑맨이 웃었다.


“야, 시험만 벌써 몇 년째잖아. 언제 통과해?”


 그는 팔꿈치를 푹 휘두르며 눈을 흘겼다. 핑맨은 맞은 제 옆구리를 꾹 문질렀다. 키는 조그만 주제에 힘은 또 얼마나 센지 조금 욱신거렸다.


“닥치세요. 이번에는 남봉님이 비법 노트 줬거든요?”

“그 인간을 믿냐?”

“믿네요. 그럼 저 감.”


 삐졌는지 중력은 몸을 홱 돌려 서고 쪽으로 멀어져 갔다. 핑맨은 재빨리 그의 뒤를 쫒았다.


“아, 같이 가!”

 

 

.

.


“핑맨님. WTK의 개가 지금 BA에 있다는 얘기가 있거든요?”


 너덜너덜한 갈색 공책을 넘기다 중력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오래 전에 들어왔다는 것 같아요. 다들 비상이던데.”


과자 봉지에 손을 집어넣자 손 가득히 감자칩이 딸려왔다. 그만 드세요, 중력이 투덜거렸다. 양심 있어요? 핑맨은 못 들은 척 과자를 입 안에 털어넣었다.


“어, 근데?”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거기 있는 우리 쪽 귀가 가져온 정보래요.”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살짝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 귀는 승진하겠네?”

“뭐 그렇겠죠. 그 베일에 싸인 사냥개의 정보를 가져왔다고 다들 칭찬하고 있어요.”


 별로 높은 위치도 아니었다는데 말야, 중력이 덧붙였다.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내가 간부가 되면 그런 인재를 많이 길러내야지. 핑맨은 입을 다물고 과자만 씹었다. WTK의 사냥개는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을 때만 모습을 드러낼 만큼 치밀하다던데. 그쪽에서 일부러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은 정말 없는 걸까.


 뭐, 상관 없으려나? 핑맨은 과자를 목구멍으로 꿀꺽 넘겼다.


“그래? 대단하네.”

“뭐야, 관심 없어요? 자세한 거 더 말해 주려고 했는데.”

“뭔데.”


 중력은 녀석이 옆구리에 흉터를 가지고 있다던가, 왼손 약지가 오른손 약지보다 조금 짧다던가 따위의 각종 정보들을 늘어놓았다. 알아낸 건 대단하긴 했는데, 그렇게 쓸모없는 데다 진위 여부도 확실하지 않은 정보에 휘둘릴 만큼 핑맨은 여유롭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예전에 연구소에 있어서, 지금은 없어지긴 했지만 한때 손등에 번호를 달고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것 같길래. 그는 중력이 들고 있는 공책을 내려다보며 말을 돌렸다.


“그게 남븅신 공책이야?”


 다행히도 핑맨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중력은 호칭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 정리 되게 잘 돼 있어요.”


 그가 쫙 펼쳐서 보여 주는 페이지를 핑맨은 눈으로 훑었다. 정리 잘 되어 있는 공책이라고 말하기에는 글씨가 조금, 아니 많이 더러웠다. 거의 해독반을 붙여야 할 수준 같은데. 읽고 평가까지 할 수 있는 그가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역시 악필은 악필이 알아본다는 건가…. 핑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글씨를 읽어 내려 애쓰다가 물었다.


“이번에는 붙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거야 해 봐야 알죠, 뭐.”


 답하는 그에게서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핑맨은 어깨를 으쓱했다.


“잘 되겠지.”

 

 

.

.


 목적지인 연구실은 서재 바로 옆에 있었다. 당당하게 박차고 들어간 문 안의 사람은 언제나처럼 만득이었다.


“웬일이에요?”


 눈이 마주치자 구석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보글보글 끓이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놀라. 나도 실험 할 줄 알거든?”


 주변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유리병과 통들을 둘러보며 핑맨이 말했다. 대부분이 노란 라벨이 붙은 만득의 것이었다. 악어를 제외하고는 연구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팀원들 덕에 만득은 널찍한 실험실과 쌓인 재료들을 거의 혼자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쩐 일이냐고요. 연구실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사람이.”


 핑맨은 제 의자를 빼어 등받이에 검은 코트를 걸쳤다.


“형한테 말투가 띠껍다?”


 멋사랑 다니더니 점점 멋사처럼 되어 가는 것 같아. 그가 투덜거렸다.


“일도 없고 심심해서 와 봤다 왜. 갔으면 좋겠어?”

“…아뇨.”


 대답은 느릿하게 돌아왔다. 그냥 넘어가기는 뭔가 봐 주는 것 같고 찝찝해서, 핑맨은 만득의 머리카락에 손을 쑤셔넣었다. 잘 빗어내린 결 좋은 머리가 완벽하게 망가질 때까지 헤집었다.


“아, 진짜!”


 투덜대는 그를 뒤로 하고 만족스럽게 캐비넷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만득이 불렀다.


“핑맨님 실험복 멋사가 가져갔는데요.”


 한숨을 폭 내쉬면서 핑맨은 멋사의 캐비넷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부주의한 멋사는 실험복을 자주 태워먹는 바람에 종종 핑맨의 옷을 빌리곤 했다. 실험실에 자주 드나드는 악어와 만득을 제외하면 가장 키가 비슷한 이가 그인 탓이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드는지 멋사는 항상 옷이 짧다며 키부심을 부렸다. 180이 조금 못 되는 핑맨의 옷은 180 조금 넘는 그에게 그다지 짧지 않을 텐데도.


“그 놈은 내 옷 짧다면서 왜 난리래?”

“모르죠, 저야.”


 옷은 사물함 안 옷걸이에 대충 걸려 있었다. 핑맨은 그걸 내려 입고, 제 자리로 돌아오면서 악어의 책상에 놓인 작고 투명한 병을 주머니에 슬쩍했다. WTK나 할 짓이라고 천대받는 독극물 관련 연구를 악어는 몰래 꾸준히 해 오고 있었는데, 핑맨도 최근 그쪽에 관심이 생기려던 참이었다.

 

 

.

.

 

 

 애초에 목적은 악어의 끈적거리면서 투명한 액체였던지라. 그 몇 방울만 더 작은 병에 옮겨 담으면 볼 일은 끝난 거였다. 만득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대충 시간을 때우다, 창 밖의 하늘이 노릇하게 익어갈 때에야 핑맨은 작은 병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병을 제자리에 돌려 놓고 실험복을 벗는데 만득이 뒤를 돌아보더니 물었다.


“벌써 가게요?”

“어. 밥 먹어야지.”


 핑맨은 시계를 흘끗 보면서 대꾸했다. 일곱 시를 가리키는 시계는 종종 좋은 핑곗거리가 되곤 했다.


“그러네요.”


 만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전히 끓고 있는 냄비로 시선을 돌렸다.


“안 가냐?”

“어차피 조금 있으면 멋사가 와요. 걔 친구 없어서.”


 핑맨은 벗은 실험복을 잘 개어서 캐비넷에 집어넣었다.


“그래라. 난 중력이나 데리러 가야겠다.”

“네. 들어가세요.”

“멋사한테 내 옷 입었으면 꼭 돌려놓으라고 전해 주고.”

“그럴게요.”

 

.

.

 

“오, 핑맨님.”


 중력은 과자 때문에 배부르다며 저녁은 거르겠다고 했다.


“이젠 안 바쁜가 보네? 아깐 엄청 급하더니.”

“응, 악어님이 빨리 와 줘서.”


 누군가와 말하고 싶은데 악어는 안 됐다. 어딜 찾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참에, 다행히 리타가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근데 어디 가?”

“밥 먹으러.”


 그녀가 특유의 높은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성인이 된 지 한참은 지났으면서, 아직도 애 같은 목소리와 말투였다.


“혼자 먹냐? 우리 핑맨이는 친구도 없지요.”

“지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괜히 반가웠다. 그는 리타가 따라붙는 걸 뿌리치지 않으며 앞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중력이는? 또 안 먹는대? 걔 그럼 키 안 클 텐데.”

“이미 글렀지.”


 식당 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북적였다. 모두 식판에 특이하게 생긴 갈색 덩어리를 서너 개씩 갖고 있었다. 배식대를 눈으로 쓱 훑자, 맨 끝에 작은 초코 케이크가 옹기종기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예산을 아끼느라 맛없기로 유명한 BA 식당치고는 뜻밖의 메뉴였다.


“중력이 알면 짜증내겠다.”


 괜히 즐거워진 핑맨의 말에, 뒤늦게 알아차렸는지 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BA가 웬일?”


 ‘하나씩만 가져가세요’ 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지만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싸. 많이 먹어야지.”


 그녀는 신이 나서 식판을 집어들고 앞질러 저녁을 떴다. 핑맨도 느릿하게 따라 걸어가다가, 재미있는 걸 보았다.


“어, 유부 없는 유부초밥 주먹밥이다.”


후리가케로 비벼진 밥을 보며 자연스레 말을 던지자, 홱 돌아 노려보는 도끼눈이 매서웠다.


“안 닥쳐?”

“오늘은 유부 없는 유부초밥 주먹밥을 먹어볼 거에요.”


 퍽. 조금 거칠게 쓰다듬었는지 손바닥이 닿은 뒤통수가 얼얼했다. 핑맨은 머리를 감싸며 눈을 흘겼다. 리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낮게 콧노래를 부르며 초코 케이크를 식판에 가득 담았다.


“잘 먹겠습니다!”

 

.

.

 

“뭘 봐.”


 시선을 느낀 핑맨이 식판에서 고개를 들고 투덜거렸다.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그러게 까불지 말지.”


 리타는 생긋 웃더니 그의 식판에 놓인 초코 케이크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핑맨이 급하게 젓가락을 가져다 막았지만 한 발 늦었다.


“야, 그만 좀 처먹어!”


 빼앗긴 것은 벌써 두 개였다. 여섯 개나 담아 왔으면서 그새 다 먹고. 돼지 새끼, 핑맨은 중얼거리다가 흘끗, 눈치를 봤다. 리타는 못 들은 모양인지, 혀를 쏙 빼물고 얄밉게 핑맨을 놀렸다.


“미안, 미안. 이제 안 먹을게.”

“리타님.”


 너무나 당연하게도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핑맨은 식판을 제 쪽으로 최대한 당기고, 마지막 유부 없는 유부초밥을 한 입 뜨면서 던지듯 물었다.


“독극물 연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갑작스런 질문에 리타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응? 나야 뭐, WTK에 대비하려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지만. 아무래도 간부들 보기에는 별로지?”


 그러면서 케이크로 팔을 뻗는 폼이 자연스러웠다. 아슬아슬하게 막으며 핑맨은 살기를 담아 노려보았다.


“그만 먹어라.”

“그런데 왜?”


 리타는 가볍게 무시하고 다른 길을 공략했다.


“아니. 요즘 그쪽에 관심이 생겨서. 나도 한 번 해 볼까 하고.”


 끊임없는 도전에 포기한 척 케이크 하나를 내주자, 그녀는 낮게 환호성을 터뜨리며 잽싸게 입에 넣었다. 


“나도라니? 또 누가 해?”


 케이크를 한 입 크게 베어무는 바람에, 목소리도 같이 뭉개져서 나왔다. 핑맨은 한참을 생각한 끝에야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몰랐어? 악어님도 그쪽 연구 하시는 것 같던데.”


 리타는 뿌듯한 표정으로 빵을 우물거렸다. 연구실에 들어가 봤어야 알지, 공부 좀 해. 중얼거리는 핑맨을 노려보며.


“그래? 의외네. 거역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 봤을 것 같은 사람이.”


 핑맨은 답 대신 빈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돼지 새끼. 다 처먹었으면 빨리 나와.”

 리타는 남은 케이크를 입에 쑤셔넣으며 따라 일어났다.

“누나한테 말을 예쁘게 해야지!”

“유부 없는 유부초밥은 조용히 하자.”

 퍽. 핑맨은 뒤통수를 문질렀다.


 

/

 

03

 가능성은 있지만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잘한 경우의 수는 치워 버리고 제가 보고 싶은 대로만 세상 보기. 그게 BA 간부들이 가장 잘하는 짓이니까.

 

.

.

 

 

 악어가 방에 돌아온 건, 케이크 상자를 든 중력이 팀원들을 전부 이끌고 찾아온 것보다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아, 단 거 먹으니까 텁텁하다.”

 혼자서 치즈 케이크를 큼지막하게 세 조각이나 잘라 먹은 수닝이 입맛을 다셨다.

“늙어서 그래요, 수닝님.”

 그녀는 답 대신 멋사를 한 대 갈겼다. 멋사는 머리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때리면 머리 나빠져요!"

“넌 더 나빠질 거 없어서 괜찮아.”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막내를 수닝은 가볍게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핑맨아, 커피 없어?”

“있는데 수닝님 줄 건 없어요.”

 입가에 치즈 케이크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아 왜!”

 수닝이 소리를 빽 지르자 핑맨은 제 입을 터는 시늉을 하며 덧붙였다.

“…알아서 타 드세요. 입에 묻은 거나 떼시고.”

 그녀는 궁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포트에 물을 받으러 갔다. 멋사가 외쳤다.

“컵은 여섯 개인 거 알죠?”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몰라.”

 

.

.

 

 커피 포트에서 물이 끓었다. 핑맨은 조용히 앉아 보글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작은 백색소음을 들으면 언제나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누구 왔나 본데?”

 그때 누군가가 희미하게 문을 두드렸다.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귀가 밝은 중력이었다.

“제가 열게요.”

 바깥쪽에 앉아 있던 만득이 문을 열자 악어가 비척거리며 들어왔다.

“만득이 안녕. 다들 있었네.”

 축 처진 목소리였다.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는 모습에도 힘이 없었다.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며칠 밤을 새도 기운은 있던 사람이었는데. 핑맨은 눈을 가늘게 뜨고 팀장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또 무슨 일 있나? 어떤 새끼야.

 수닝이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붓다가 아는 척을 했다.

“악어님 왔어요?”

 악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크 좀 먹을래요?”

“아뇨. 괜찮아요.”

 그럼 이거라도, 수닝이 내민 컵을 악어는 거의 쓰러지듯이 주저앉아 받아들었다.

“저희 이만 갈까요.”

 만득이 눈치 빠르게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악어가 저지했다.

“커피는 먹고 가. 수닝님이 열심히 탔잖아.”

 반쯤 일어나던 중력이 엉거주춤 도로 앉았다. 수닝은 웃으며 커피잔을 돌렸다. 핑맨은 제 앞에 불쑥 내밀어진 머그컵을 받아들었다. 손에 전해지는 온기가 따뜻했다. 아침에도 커피 먹었는데, 이것도 마시면 잠 안 오겠다… 하고 뒤늦게 후회하면서.

 멋사만 빼고 각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컵을 하나씩 가졌다.

“멋사는?”

 피곤한 와중에도 살필 겨를은 있는지 악어가 물었다.

“내가 뺏어먹은 건 아닌지 미안하네.”

“아뇨.”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른 멋사가 재빠르게 답했다.

“저 요즘 잠 못 자서 커피 안 먹잖아요. 악어님 올지도 모른다고 수닝님이 하나 더 탔어요.”

 평소였다면 이미 눈치챘을 악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닝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가 너무 지친 나머지 멋사의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아니면 피곤해서 그냥 넘겼을 뿐인지 핑맨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제 머그잔에 입을 대며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

.

 

“다 먹었으면 이만 가죠. 저 공부해야 돼서 바쁘거든요?”

 뜨겁지도 않은지, 한입에 들이켜고는 중력이 외쳤다. 만득이 곁눈질로 흘끗 쳐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나와 같은 이쪽의 모습에 그나마 안심이 되어 핑맨은 피식 웃었다.

“그래, 중력이 오랜만에 머리 쓴댄다.”

“쓸 머리는 있어요?”

 멋사가 놀리면서 따라 일어났다. 만득은 주변에 흩어진 케이크 부스러기를 신발장 쪽으로 털었고, 수닝은 빈 케이크 상자들과 포크를 한데 대충 모았다. 마지막으로 리타가 앉아 있던 악어의 침대에서 일어남으로써 갈 준비를 마쳤다.

“갈게요.”

“잘 가.”

 다들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고, 두 사람만 남은 방 안은 조용했다. 핑맨은 아래층 침대에 앉아 셔츠를 갈아입는 악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얇은 반팔 티셔츠만 걸친 새하얀 등이 짧게 몇 번 흔들렸다.

“핑맨아.”

 편하게 입는 초록색 져지에 팔을 끼우며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나, 이번에 승진 어려울 것 같아.”

 

탕.

 핑맨이 침대를 거칠게 내리치자 스프링에 힘이 가해지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깜짝이야."

 악어는 움찔했지만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이쯤 되면 크게 웃음을 터뜨리거나, 적어도 작은 킥킥거림과 함게 장난이었다고 해명해야 정상인데. 악어는 여전히 그답지 않은, 차분한 어조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불안해서 핑맨은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미쳤대요? 어떤 새끼가 그래요?”

 져지의 지퍼를 죽 올려 잠그고 악어는 뒤를 돌아보았다. 말 좀 예쁘게 하자, 따라왔어야 할 말도 없이 부드럽게만 지어지는 미소가 단호했다. 핑맨은 한마디 더 하려다 꾹,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다는데요?”

 질문은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잠깐의 침묵에 제 실수를 깨달은 핑맨은, 분명 상처 받은 표정이 드러났을 악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걱정과 다르게 악어는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그게 오히려 더 슬퍼 보여 미안해졌다.

“내가 일처리를 너무 못한대.”

 핑맨은 참지 못하고 침대를 다시 한 번 내리쳤다.

“감당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을 들이부으니까...!”

“너 가끔 보면 나보다 더 다혈질인 것 같아.”

 악어는 말을 자르며 웃음지었다.

“들었지? 이쪽에 잠입해 있다는 WTK 쪽 사냥개. 아마 리타님이 얘기해 줬을 거야. 아님 중력이거나. 둘 다 입이 가벼우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핑맨은 우선 가만히 듣기로 했다.

“그거, 원래 내가 직속이라 나한테 올라온 서류거든. 그런데 내용이 너무 믿을 수 없어서 잠시 보류해 뒀단 말야.”

 악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근데 그 자식이 못 참고, 그새 다른 간부한테 올려 버린 거야.”

“…어떤 내용이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핑맨은 애써 내뱉고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사냥개가 아마 우리 팀에 있을 거래.”

 악어는 제 최측근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근데 난 안 믿어.

“그쪽에서 일부러 흘린 거짓 정보가 아닐까 해.”

 목소리에 담긴 체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죄책감이 들어 핑맨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악어가 말했다.

"우리 팀원들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


04

 

 여섯 시쯤 되었으려나, 막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얼핏얼핏 들리는 인기척에 핑맨이 눈을 뜬 게 그 즈음이었다. 도로 잠들려던 순간, 닫힌 화장실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줄기가 잠을 쫒아내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수도꼭지의 물소리에 그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한참이 더 흐르고서야 악어가 얼굴에 손을 대고 화장실에서 걸어나왔다.

 코 언저리를 가린 휴지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핑맨은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또 코피 나요?”

“괜찮아.”

 악어가 낮게 웅얼거렸다.

“어제는 몇 시에 잤는데요?”

“…아직."

 책상 위에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가 증명하고 있었다. 핑맨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무능한 이에게는 서류가 내려오지 않는다. 일을 못해서 승진에서 밀려났다는 말은 핑계임이 분명했다. 사냥개 건도 마찬가지고. 유능한 데다 순하고, 만만하기까지 한 젊은 인재를 조금이라도 더 부려먹고 싶었던 거겠지. 언제까지나 떨어뜨릴 수는 없을 테니, 다음 심사까지 남은 6개월 정도라도. 더러운 BA의 간부 자식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을 이 정도까지 굴려?

“안 괜찮은 거잖아요!”

“괜찮다니까.”

 악어가 태연히 책상에 앉자, 핑맨은 재빨리 침대 위층에서 내려와 그가 든 볼펜을 빼앗았다.

“줘.”

 그래도 돌려주지 않고, 강하게 명령했다.

“가서 자세요.”

 두 사람의 관계에서 항상 명령을 내리던 입장이던 악어는, 상황이 뒤바뀌자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괜찮아. 밤에 커피 먹었….”

“고집 부리지 마시구요.”

 아무렇지 않은 척 생긋 웃는 그에게 핑맨이 으르렁거렸다.

“간부들한테는 내가 알아서 잘 이야기할 테니까 그 다크서클이나 어떻게 좀 해 보시라구요.”

“어떻게…”

 악어가 말했다.

“너 간부들이랑 안 친하잖아.”

“…내가 그 정도 능력도 없는 것처럼 보여요?”

 피곤해서 코피까지 흘렸으면서, 장난칠 기력은 남아 있는지 그는 눈을 접으며 생긋 되물었다.

“아니야?”

 핑맨이 투덜거렸다.

“그 정도 능력은 되니까 악어님이나 가서 처 주무세요. 다크서클에, 주름에. 늙은 거 봐. 누가 보면 수닝님인 줄 알겠네.”

 그러고는 악어가 신경질적으로 날린 연필꽂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

.

 

 

 오후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많이 이르지만, 평소에 일어나는 것보다 한참은 빠른 시간이었다. 고작 몇 시간 덜 잤다고, 눈꺼풀이 무겁고 피곤했다. 핑맨은 가장 차갑게 틀어 놓은 물을 열심히 얼굴에 문질렀다.

“아야.”

 물이 닿은 오른쪽 손등이 따끔따끔했다. 또 자다가 손톱으로 할퀸 모양이었다. 오래된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습관인지라 이제는 익숙했다. 핑맨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손에 호호 바람을 불어 말리면서 화장실에서 걸어나왔다. 상처 부분을 꾹꾹 누르자 아직도 피가 엷게 배어나왔다.

 옷장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정장을 꺼내어, 혹시나 쌓여 있을지 모를 먼지를 털어내었다. 마지막으로 입은 게 언제였더라, 와이셔츠 앞섶을 잠그는 손가락이 계속 미끄러졌다.

“아, 씨..”

 단추를 몽땅 뜯어서 내던지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내었다. 꼴에 조직의 임원들이라고, BA의 간부들을 만날 때에는 편한 옷은 절대 금지였다. 평소에 입는 셔츠나 니트 같은 옷차림으로 나갔다가는 당장이라도 미운 털이 박히고 말 테다. 개 같네, 진짜. 낮게 중얼거리며 핑맨은 이리저리 거울을 보았다. 전에 있었던 곳에서는 편하게 입어도 괜찮았어서, BA의 격식과 정장을 입은 제 모습이 어색했다.

 마지막으로 서류 가방을 챙겨 들고, 핑맨은 자고 있는 악어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갔다 올게요.”

 그를 등진 채 벽을 바라보고 누워 있던 악어는, 부스스 고개를 돌리며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다녀 와.”

 

.

.

 

 남봉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간부들 중 거의 유일하게, 흑심을 품지 않고 악어를 아끼는 사람. 그닥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야 핑맨은 기꺼이 참아 줄 수 있었다.

 오전 열한 시의 BA는 분주했다. 핑맨은 바지런히 이동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듯 살피며 목적지로 향했다. 옷차림은 제각각 달랐지만 묻어나는 분위기는 대부분 비슷했다. 업무가 한창 많을 때에는 저도 저렇게 살았던 것 같은데. 꽤나 오래 전이라 기분이 조금 묘했다.

“죄송합니다만, 남봉님은 이 시간에 사람을 받지 않으십니다.”

 핑맨이 넥타이를 고쳐 매며 남봉의 사무실 앞에 서자, 깐깐하게 생긴 단발머리의 비서가 앞을 막았다. 파운데이션을 얼마나 처발랐는지 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얼굴이 마치 회칠한 인형 같았다.

 핑맨은 빙긋이 웃었다.

“내가 뵙자고 한다고 전해요.”

 비서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그녀의 살짝 치켜 올라가는 눈썹에 그는 미소를 유지하며 답했다.

“핑맨입니다.”

 그러자 새하얀 얼굴이 진짜 석고처럼 굳어졌다.

“…알겠습니다. 우선 말씀은 드리도록 하죠.”

 문을 열고 들어가는 뒷모습마저 경직되어 있었다. 당황을 나름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 같기는 한데, 그를 속이기에는 너무 어색했다. 핑맨은 낮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애초에 그는 이런 일로 신경쓰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 이름이 BA 내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고. 본부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만만하게 보는 간부들에게 크게 난동을 한 번 피웠기 때문이었다.

 처음 마주한 사람들이 그 악명 높은 이름을 듣고 얼굴을 굳힐 때마다 핑맨은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한 발짝 물러나 느긋이 그들의 반응을 관찰하는 걸 즐겼다.

“들어오시랍니다.”

 다시 회색 인형이 된 그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 고마워요.”

 핑맨은 씩 웃으며 열린 문 안에 발을 디뎠다. 책상 앞에 앉아 뚱하게 서류를 뒤적이던 남봉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가도 좋아요.”

 핑맨은 문 쪽을 돌아보다가 밍기적거리던 비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도망치듯 황급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또 무슨 일로 왔냐.”

“악어님.”

 핑맨은 사무실 안에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이도 직급도 남봉이 위였지만, 그는 꿋꿋이 반말을 고수하고 있었다.

“악어님이 왜.”

 대답 대신 핑맨이 손을 내밀자 남봉이 노란색 커피믹스를 던져주었다. 명색이 간부인데 좀 비싼 거나 들여놓지, 하면서 그는 포장을 뜯어 내용물을 붓고 천천히 물을 따랐다.

 빈 커피믹스 봉지로 종이컵을 휘휘 젓자 단 냄새가 퍼졌다. 안 좋은 물질이 나온다며, 수닝에게 매번 야단을 맞으면서도 고치지 않는 습관이었다. 핑맨은 소파에 등을 푹 기대며 젖은 봉지를 테이블에 대충 내려놓았다. 남봉은 눈을 찌푸렸지만 딱히 뭐라고 하진 않았다.

“악어님 말이야, 너무 하는 게 많은 것 같아서.”

 얼마나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정리하지 않고 원본을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잠도 거의 못 자고, 어제도…”

 그래서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혹시 그쪽에서 허락해 준다면 나도 일을 조금 나눠 하고 싶은데.”

 말하면서 핑맨은 종이컵 바닥에 찰랑이는 커피를 죽 들이켰다. 역시 믹스커피라서 그런가. 프림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달달한 게, 핑맨의 취향은 절대 아니었다.

“음.”

 남봉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흔쾌히 답했다.

“알겠어. 그렇게 말해 둘 테니까."

 그러고는 빠르게 덧붙였다.

“이제 꺼져.”

 이런 반응 나올 줄 알았지. 핑맨은 킥 웃으며 빈 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예, 예. 갈게요.‘

/

05

 핑맨은 악어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말했고 그건 남봉도 그렇댔다.

 사실 그뿐만 아니라 핑맨의 팀원 전부, 혹은 BA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어는 거의 모두에게 사랑받았고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간부들이 그를 경계하고 미워하는 걸지도 몰랐다.

 

 

.

.

 

 

 남봉의 사무실을 나오자 비서가 차갑게 쳐다보았다. 모른 척 가볍게 미소 지어 주고는 핑맨은 계단 쪽으로 향했다.

“이제 들어와도 된대요, 남봉님이.”

 악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되든 내버려 두었으리라. 승진에서 밀리든, 과로로 뒤지든 말든. 그는 언제나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보는 쪽을 선호했으니까.

 이번이 조금 다른 것은, 물려받게 될 팀장 자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거나 단순히 가까운 사이여서가 아니었다. 인수인계는 악어의 승진 이후에 받아도 무방했으며, 팀뿐 아니라 BA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친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악어는 뭔가 달랐다. 핑맨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 모두가 입을 모아 똑같이 이야기했다. 너무 높아서 존경과 사랑으로 올려다봐야만 할 존재 같다고. 핑맨은 그저 악어를 존경했다. 괴물 같은 재능과, 따라오는 오만함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그 자신감의 근거를 동경했다.

 작년이었던가, 2년 전이었을 수도 있다. 사신수의 무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WTK에게 빼앗기기 전에 먼저 찾을 팀이 필요해졌을 즈음 핑맨은 본부에 왔다. WTK가 벌인 폭탄 테러로 그를 제외한 지부의 전원이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악어가 있었다.

 

“안녕.”

 새로운 팀장이라는 사람은 훤칠하게 큰 키에, 하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핑맨은 저보다 10cm는 족히 커 보이는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작은 키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앞에 서니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그에 비해 옆에 선 파란머리는 난쟁이처럼 보여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핑맨님이세요?”

 작은 쪽이 서류 파일을 뒤적이며 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는 컸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아 핑맨은 얼핏 그의 정수리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요.”

 제가 정확히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너는 뭔데 그런 걸 묻냐,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겠지. 다만 악어가 중재했던 기억이 난다.

“악어, 에요.”

 앞으로 쑤욱 다가온 손에 올려다본 얼굴은 다소 나른하게 웃고 있었다.

“그쪽 새로운 팀장.”

 최근에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눈웃음이었다. 핑맨이 손을 맞잡자, 그는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놓고는 이어서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은 중력. 인사해.”

 조그만 남자가 칫, 혀를 차며 손을 내밀었다.

“중력입니다.”

 핑맨은 악수한 손을 꾹, 세게 잡았다. 중력이 표정을 썩히며 쳐다볼 정도로.

“핑맨이에요.”

“..예에.”

 뭐야, 하는 불평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큰 소리로 웃고 싶었지만 잠시 참고서, 핑맨은 싱긋 가볍게 미소지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력이 말했다.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요.”

 

.

.

 

 악어는 아주 오래 전부터 BA에서 길러졌다고 했다.

“지금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떤 간부님이 거두어 주셨죠.”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떤 간부? 핑맨이 눈으로 묻자 중력은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고, 주위를 살피더니 낮게 속삭였다.

“아, 그 있잖아요.”

 첫 인상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같았다. 낯을 가린다는 개념이 없는 건지 조그만 개처럼 발발대며 돌아다녔다. 비슷한 종류를 핑맨은 알았다. 뭐였더라, 말티즈였나?

“WTK와 결탁한 혐의로 거기 가신 간부님 말이에요.”

 '거기'는 수용소를 뜻하는 BA 은어였다. WTK 와 결탁한 간부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더 묻고 싶었지만 반응이 너무 굳어 있어서 그만두기로 했다. 핑맨이 입을 다물자 중력은 안심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핑맨님은 입사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얼마나 됐댔더라, 갑작스런 질문에 바로 떠올리기 어려워 핑맨은 손가락으로 보이지 않게 꼽아 보았다. 스물여섯이랬으니까. 일곱, 아니 여덟? 열이었던가.

“10년?”

 어우, 장난 아니다. 중력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본부 오자마자 우리 팀이라니 대단하다 했죠. 어쩐지, 오래 있긴 있었네. 그 정도면 팀에서 세 번째일걸요?”

 세 번째, 생각보다 낮은 순서에 조금 놀랐지만 중력은 반대인 듯 싶었다. 나한테도 선배네, 헐. 그가 호들갑을 떨며 덧붙였다.

“내가 세 번째였는데, 아깝다.”

 새 팀은 최고참들 중에서도 최상위 반열에 드는 요원만 모아 놓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다들 근무 기간이 길어서, 입사한 지는 기본이 7년에다 평균 나이는 25.8세. BA치고는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정부 휘하의 히어로 기관은 인력 부족과 업무 자체의 위험성으로 임무에 투입되는 나이도, 은퇴도 빨랐다.

 지부의 최고들만 모아 놓은 본부에 온 것도 일찍이라. 어려서부터 길러진 악어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팀원이 5년. 아무리 짧아도 1년 이상이랬다.

“근데 본부 오자마자 우리 팀이면 진짜 대단한 거긴 해요! 왜 진작 안 왔지?”

 간부들이 일을 안 하나, 중력이 중얼거렸고 핑맨은 무언가 토를 달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여기 수준이 이 정도인 거 아니야? 반쯤 입 밖에 낼 뻔했다가 급하게 집어삼켰다. 원래 있던 곳에서는….

 다소 어색하게 대화가 끊겨 순간 찔끔했지만, 다행히도 답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는지 중력은 다른 말을 이었다.

“뭐, 악어님은 못 이기겠지만요. 진짜 괴물이에요, 그 사람.”

 솔직히 살짝 코웃음을 친 건 사실이었다. 핑맨은 어디에서나 최고라 인정받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스스로도, 타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악어가 얼마나 완벽할지는 모르지만 설마 저보다 더하겠어, 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자만이 완전히 깨부숴진 건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먼저 말을 걸어온 건 저쪽이었다. 이름이 수닝이랬나, 갈색 곱슬머리를 어깨 정도로 기른 팀원이었다. BA에서 보기 드문 여자 요원에 핑맨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게다가 예뻐?

“무슨 일이시죠?”

 수닝 뒤에 서 있는, 분명 만득이라고 저를 소개했던 키 큰 금발 남자로 눈을 돌리며 핑맨이 날카롭게 물었다. 기분이 조금 언짢아져서였다. 여기는 왜 다들 키가 큰 거야. 만득도, 아까 스치듯 중력이 인사한 멋사라는 꼬맹이도 180은 훌쩍 넘어 보였다.

“아, 저.”

 저 멀리 앉아 있는 악어를 곁눈질로 보며 그가 살짝 머뭇거리자 수닝이 대신 말을 꺼냈다.

“게임 안 할래요?”

 핑맨은 눈을 가늘게 떴다.

“게임이요?”

 예쁜 여자, 평소였다면 바로 전화번호를 묻고 데이트를 신청했을 테지만 이번엔 그만두기로 했다. 언제까지 봐야 할지도 모르는데, 혹시라도 사이가 틀어지면 불편해질까 싶어서였다.

 팀원에게 그딴 짓을 했다가는 죽여버리겠다는 듯한 악어의 눈빛에 쫀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런 나른한 눈으로 저리 매섭게 노려볼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기는 했어도.

 악어가 중력에게 안내를 부탁한 직후, 지나가는 여직원한테 바로 작업을 걸었던 게 아주 조금 문제였던 것 같기도 했다.

 수닝이 답했다.

“네. 일요일마다 하는데, 이걸로 한 주 동안 서열을 정해요.”

 그러고는 따라오는 이름이 익숙했다. 워그라운드라고, 알아요? 핑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매일 빠져 살다시피 하는 종류의 게임이었다.

“사실 이름만 똑같지 BA용으로 제작된 다른 버전이긴 한데, 재밌을걸요.”

“악어…님도 해요?”

 뭐라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가, 예전에 쓰던 호칭을 골랐다. 다행히 여기서도 같은 것을 쓰는 모양이었다. 당연하죠,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바로 승낙했다.

“할게요.”

“그럼 따라오세요.”

 수닝이 말했고 핑맨은 만득의 뒤를 따랐다. 가상현실 훈련실? 도착한 방에 달린 팻말을 핑맨은 눈으로 읽었다. 운율이 살아 있는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

“저기 앉으시면 돼요.”

 죽 늘어선 여러 대의 가상현실 기계 중, 수닝이 가리키는 곳에 들어가 마스크를 썼다. 띠리링, 기계가 사용자를 인식하는 맑은 연결음이 들렸다.

 

 BA의 워그라운드는 FPS 게임 마니아인 핑맨에게도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가상현실용으로 손을 조금 댔다더니, 실제 상황과 굉장히 비슷한 느낌이었다. 자기장이 없는 대신 좁은 맵에서 한 사람만 남을 때까지 게임을 계속 진행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거의 완벽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악!”

 정확히 열두 번째 죽음을 맞은 핑맨이 소리질렀다. 그는 가상현실 마스크를 던지듯 벗고 맞은편 기계에 앉은 새 팀장을 노려보았다.

“아니, 에임 진짜 미쳤어?”

 악어의 캐릭터는 템 파밍을 전부 마치자마자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스나이퍼로 모든 팀원들을 사살했다. 가까스로 근접전을 시도했더니, 이번에는 다른 총으로 막혔다. 맞추기 어렵게 아무리 무빙을 쳐도 귀신같이 따라오는 총알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구급 상자는 또 얼마나 있는 거야. 몸을 굴릴 때마다 핑맨은 생각했다. 분명 몇 발 맞췄는데도 공격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저 인간은 운도 어마어마하게 좋은 모양이었다.

“아, 진짜!”

상황을 종결낸 건 당연한 듯 날아오는 헤드샷.

“핵 쓴 거 아니에요?”

“야, 정확히 니 처음 반응이랑 똑같다.”

 멋사의 옆구리를 찌르며 만득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중력이 바닥에 떨어진 핑맨의 마스크를 주워들었다.

“내가 미쳤다고 했죠? 저 사람 괴물이라니까?”

 맞은편에 앉은 악어는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한번 더 해요!”

 핑맨은 건네받은 가상현실 마스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외쳤다.

“…우리 언제 자요?”

수닝이 투덜거리며 가상현실에 접속한 것을 마지막으로, 열세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도전은 스물 한 번째에서 멈췄다. 악어의 완벽한 압승이었다. 절 굽히지 않을 것 같던 핑맨의 오만한 자존심은 한 사람 앞에서 그렇게 꺾였다.


.

.

 

 

06

 

핑맨은 2층 침대의 아래층, 그러니까 악어의 것에 누워 핸드폰 스크롤을 쭉 내렸다. BA 요원들에게 평생 동안 금지된, 평범한 국민으로서의 삶을 구경하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일반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것도 허용되지는 않았으나, 다 뚫는 방법이 있었다. 사람이 너무 융통성이 없으면 못 사는 법이잖아.

“거기 내 침대 아니냐?”

악어가 화장실에서 나와 머리를 털며 눈을 흘겼다. 핑맨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2층은 올라가기 귀찮단 말이에요.”

“옷은 갈아입고 눕자…”

 이젠 체념한 듯 악어는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책상의 서류로 눈을 돌렸다. 잔뜩 쌓인 종이 탑을 보는 눈에 피로가 깃들었다.

“뭐여.”

 가장 중요한 내용이 뭔지 이미 아는 핑맨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악어님 씻을 때 박리타가 갖다 줬어요.”

“리타님이? 부르지 않고.”

 악어는 머리를 닦던 수건을 화장실 앞 바닥에 내팽겨치곤 책상으로 움직였다. 치우는 거 지 일 아니라고. 핑맨이 빽 소리를 질렀다.

“옆에 빨래 바구니 있잖아!”

“니가 넣어 줘.”

 핑맨은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구르듯 내려와 수건을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핑맨아.”

 오오, 서류를 들춰 보던 악어가 낮게 감탄을 내뱉었다.

“뭐요.”

“내려왔어.”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핑맨은 괜히 처음 본 척 고개를 쭉 빼고 팀장의 손에 들린 서류를 살펴보았다. 끝에 선명하게 찍힌 붉은 인장. 맨 위에서부터 내려온 업무 분담 허가서였다.

“너 생각보다 능력 있구나. 다시 봤어.”

 허용. 아까는 그렇게 예뻐 보이던 두 글자가 갑자기 짜증이 났다. 어떤 결과가 태어났는지 뒤늦게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이제 놀고먹는 생활은 안녕. 서류 지옥에서 살아야 할 시간이었다. 솔직히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그냥 계속 놀겠다고 할걸. 하지만 이미 늦었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진 제 표정이 이상하리란 건 짐작되었다.

 멍하니 한참을 내려다보다 핑맨은 결국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가 말했죠? 나 이런 사람이라니까.”

 악어도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못생겼다.”

“안 물어봤거든요!”

 서류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 보니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핑맨이 제안했다.

“워그라운드 할래요?”

“갑자기?”

악어가 싱긋 웃었다.

“그래. 근데 너 나 못 이기잖아.”

“이길 거거든요!”

핑맨은 쏘아붙이며 앞서 가상현실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래서 할 거에요, 말 거에요.”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왔다.

“할래.”

 

.

.

 

“멋사 불러? 중력이? 수닝님.. 은 좀 아닌가.”

 악어가 먼저 마스크를 쓰고 게임에 접속하며 물었다.

“일대일 하죠.”

 핑맨이 비장하게 답했다.

“이번엔 진짜 이길 거에요. 빡겜할 거라구요.”

“그래라. 게임 시작한다?”

 네에, 답하자마자 맑은 알림음이 울렸다.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러고는 화면에 붉은 숫자가 떴다. 3, 2, 1. 핑맨은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바로 비행기에서 몸을 날렸다. 예측하지 못한 듯 악어가 낮게 감탄했다.

“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은 플레이도 잠시, 피가 튄 화면이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세 발의 총알이 빗나가고 집중력이 흔들렸을 때, 귀신 같은 에임에 잡힌 것이다. 이게 맞는다고? 핑맨은 주먹을 내리치다가 허공만 찍고 내려놓았다. 일반 컴퓨터뿐인 피시방을 하도 자주 갔더니 생긴 습관이었다.

“아니!”

 악어가 빙글거렸다.

“이긴다며?”

 시작 화면의 검은 알파벳이 보였다. 워 그라운드. 분명 진짜 죽일 각오로 달려들었는데, 뭐가 문제였지. 핑맨은 글씨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봐요. 핵 썼죠? 이거는 신고 어떻게 하지.”

 그게 패배자의 무기라고 그는 믿었다. 자신의 플레이를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승리하지 못한 이만이 가진 특권이다. 그리고 확인에 확인을 반복하며 발전해 나가는 거야.

 악어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훈련에 핵이 어딨냐.”

“..한번 더 해요.”

 이렇게, 계속.

“그러자.”

 마지막에 웃는 건 내가 될 거에요.

 

 

.

.

 

 

 몇 시간을 연달아 반복한 끝에 체력이 딸린 악어가 마지막이라고 선포한 판이었다. 핑맨은 옥상에 엎드려 숨을 죽이고, 스나이퍼의 붉은 십자가 한가운데 타겟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악어의 플레이 스타일은 스피드보다는 힘. 대규모 RPG를 하면 항상 힘에 몰빵하던 습관은, 실전에서뿐만 아니라 단지 한 판을 위한 스탯 설정에도 영향을 끼치곤 했다. 들키지 않고 위치만 잘 선점한다면, 스피드에 주력하는 만득보다는 잡기 쉬운 편이었다. 특히 스나이퍼처럼 한 방이 가능한 무기로는.

 즉, 수비형이 아니라 공격형 인간이란 말이었다.

“어디로 튄 거야?”

 처음부터 몸을 드러내지 않기로 작정하고 잔뜩 긴장한 채 다닌 터라, 아직 알아채진 못한 것 같았다.

“에이, 잘 찾아보세요.”

 핑맨이 느릿하게 답했다. 끝날 때까지 안심하면 안 되었다. 이론상으로는 잡기 쉬운 쪽이래도,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란 말을 생으로 씹어먹는 컨트롤이 매번 변수였기 때문이었다.

“핑맨이 여깄냐.”

 악어의 캐릭터가 정확히 핑맨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순간 팔에 쫙 돋는 소름을 애써 무시한 채, 핑맨은 방아쇠를 당겼다. 탕.

 악어가 비명을 질렀다.

“악!”

 플레이 화면에 메세지가 떴다. acau님이 당신의 헤드샷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어? 핑맨은 눈을 깜박이며 글자들을 여러 번 되읽었다. 고작 두 음절의 짧은 단어가, 제가 기억하는 그 뜻이 맞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 시체에 몇 발 총을 더 갈기고는, 벅차오르는 감정에 핑맨이 환호했다. 한 발만 늦었어도 누워 있는 건 제가 되었을 터였다.

“내가 이길 수 있다고 했죠?”

 이제는 열 판 정도마다 한번 꼴로 나오는 승리였다.

“와, 아쉽다.”

 악어가 툴툴대며 마스크를 벗었다.

“조금만 빨랐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핑맨도 마스크 속에서 상기된 얼굴을 꺼냈다. 평소였다면 바로 샤워실로 달려갔을 만큼, 축축하게 땀으로 젖은 피부조차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한 발만 더 쏠걸!”

 

 악어의 한탄을 들으며 핑맨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결국 마지막에 웃는 건, 내가 될 거에요.

/

 

07

“정확히 언제라구요?”

수닝이 물었다. 악어는 손에 쥔 서류 파일을 흘끗 내려다보고는 빠르게 답했다.

“9월 8일. 6개월 조금 덜 남았네요.”

 에? 리타가 의아한 소리를 내뱉었다. 악어님 생일 전날이잖아요. 원래 이렇게는 날짜 안 잡지 않아요? 악어는 눈동자를 굴렸다. 어쩔 수 없죠. 급하다는데.

“한번만 더 말해 봐요.”

멋사가 부탁했다.

“그럼 다시 읽을게.”

 핑맨은 눈에 꾹 힘을 주고 팀장의 손에 들린 서류 파일을 쳐다보았다. 검은색 파일에서 빨간색 '기밀' 스티커만 혼자 선명했다.

“일단 이번에 회수할 무기는 흑룡. 사흉수의 왕이니만큼 황룡만큼 강할 테니까, 절대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전에 황룡 회수할 때 봤지.”

 봤지, 얼마나 치열했는지. 덧붙이는 목소리가 아슬아슬 떨리고 있었다. 사냥개 한두 마리만 보내서 처리하던 평소 방식과는 다르게, 그때 WTK는 모든 전력을 다 쏟아부어 무기를 확보하려고 노력했었다. 회수에는 성공했지만 BA 쪽이 큰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그걸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말했다시피 6개월 남았고, 그때까지 훈련에만 전념해야 해. 특히 맨날 놀고먹은 핑맨이. 분발하자. 요즘 살쪘더라.”

“예?”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와 하마터면 핑맨은 피를 토할 뻔했다. 악어가 킥킥거렸다.

“너 체중계 올라가서 고민하는 거 다 봤어.”

“아니거든요?”

 풉, 누군가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자식이야. 홱 뒤를 돌아보자, 멋사가 재빨리 입가를 가리고 시선을 피했다. 핑맨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저놈의 멋사 새끼, 내가 언젠간 콱 죽여버릴라.

“악어님, 그렇게 때리면 핑맨님 진짜 죽어요.”

 말려주는 건 만득뿐이었다. 악어는 킥킥 웃다가 눈 언저리를 꾹 훔쳤다.

“알았어, 알았어. 계속 가자. 일단 워그라운드는 매일 해야 해.”

 게임이 원래는 훈련용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핑맨은 새삼스레 상기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각자에게 맡길게. 신체 능력 이전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기. 너무 해이해진 거 아냐?”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마지막이 1년 전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악어는 맑게 웃었다.

“오늘부터야. 이번에도 성공하자.”

 

 

 그게 아침의 일이었고, 핑맨이 방에 돌아온 건 자정이 거의 다 되어 가는 늦은 밤이었다.

“알지?”

 악어가 넥타이를 잡아당겨 풀며 물었다.

“뭐를요.”

 핑맨은 악어의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훈련에, 서류에, 워 그라운드에 굴렀더니 팔다리가 저리고 쑤셨다. 머지않아 몸이 남아나지 않을지도 몰라. 핑맨은 흘끗 멀쩡해 보이는 악어를 곁눈질했다. 팀장의 대단함을 지금 그는 처절히 실감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팔팔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맞긴 한 거지, 저거.

“진짜 몰라? 서류 안 봤어?”

 고개를 끄덕이자, 악어는 한숨을 푸 쉬더니 타박했다.

“솔직히 안 읽고 도장만 찍지, 너.”

 살짝 찔려서 핑맨은 반쯤 몸을 일으켰다. 악어는 책상에서 서류 한 장을 가져다 들이밀었다. 코끝을 스칠 듯한 거리에 핑맨은 놀라 손을 휘저어 밀어냈다.

“깜짝이야. 뭐에요.”

“읽어 봐.”

 피곤한 나머지 눈도 침침해져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악어가 승진한다는 내용 같았다.

 와, 핑맨이 감탄했다.

“드디어네요, 진짜. 더럽게 오래 걸렸다.”

“이거 성공하면 네가 팀장이야.”

 빙긋 웃으며 뭐라 덧붙이려는 그에게 귀를 기울이는데,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아, 죄송.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악어는 붉은 넥타이를 핑맨이 일어난 침대 위에 던졌다.

“그래.”

 

.

.

 

“여보세요.”

 숙소 건물을 나오며 핑맨은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는 아무때나 막 건다, 너. 이번엔 또 왜.”

“뭐야, 바빴어요?”

 목소리의 피로를 눈치챘는지 상대가 되물었다.

“알면 조용히 해. 나 요즘에 악어님 일 나눠서 하는 거 알잖아. 넌 왜 내가 피곤할 때마다 거냐?”

“형은 왜 내가 전화 걸 때마다 피곤해요?”

 한 마디도 안 져, 진짜. 이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저번에 비슷한 말을 했다가 그대로 역관광당했던 기억이 있어서였다. 그러는 핑맨님은 어떻게 한 마디도 못 이겨요, 하고.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

“같이 들었으면서 뭘 그래.”

 그건 맞아, 전화 너머에서 상대가 큭큭거렸다. 핑맨이 투덜거렸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재잘거렸다.

“알려주려구요. 때가 됐다고.”

 핑맨은 손톱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기억해 버렸다. 제가 번거롭게 BA 본사까지 들어오면서 이루려고 했던, 원래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속에 든 걸 모조리 게워내고 싶은 기분에 이를 악물며 그는 씹어뱉듯 답했다.

“..알아.”

“이제 주인공을 부르세요, 핑맨님.”

 말 안 해도, 너무 잘 알고 있어.

“무대는 전부 완성되었으니.”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핑맨은 가슴 위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구역질로도 빼낼 수 없는 무언가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듯 답답했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서 있다 방으로 올라왔다. 악어는 이미 잠든 듯 불이 꺼져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감에 의지해 제 침대를 찾아갔다. 이불의 안정적인 포근함에 파고들자 탁, 하고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핑맨은 눈을 감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밀려오는 잠에 몸을 맡겼다.

 너무 지쳤다.

 

 

.

.

 

 

 아침에 일어나자 악어는 방에 없었다. 핑맨은 비척비척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몽롱한 정신을 물로 씻어내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시계를 흘끗 넘겨다보다 깜짝 놀랐다. 피곤해서 늦잠을 잤는지, 악어와 일을 나누기 전에 일어나던 시간보다도 늦어 있었다.

 점심 배식은 다 끝났겠고. 오늘 식사는 아무래도 밖에서 해야 할 모양이었다. 악어님은 안 깨워 주고 어딜 간 거야. 핑맨은 투덜거리며 지갑을 챙기고, 늘 입는 검은 코트를 어깨에 걸쳤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악어의 투명한 병이 만져졌다. 카페에서 남기고 간 종이를 악어의 책상에 돌려 놓을 때 함께 제 서랍에 넣으려고 했었는데. 그랬다가는 누군가가 발견할까 봐 그대로 놔뒀던 것이었다. 핑맨은 견출지를 뜯어 악어의 이름을 휘갈겨 쓰고는, 병에 붙인 뒤 다시 집어넣었다. 그 옷을 그대로 입고 핑맨은 건물을 나섰다.

“어디 가요?”

지나가던 중력이 묻자 가볍게 답했다.

“밥 먹으러.”

 건물 밖은 언제나처럼 화창했다. 가을도 아니면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높았다. 둘셋씩 짝지어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도 없어 보였다. 이런 꾸밈없는 분위기를 핑맨은 좋아했다. BA 특유의 꽉 막히고 더러운 공기나 가식적인 예의도 없이, 오후의 한가함을 가득 품어 활기차기만 한 거리. 자유로웠다.

 별로 먹고 싶은 건 없었지만 배는 고팠다. 한참 길거리를 서성이다가 결국 고른 건 편의점의 삼각김밥과 컵라면이었다. 스티로폼 용기에 뜨거운 물을 붓고 김밥을 뜯는데, 누군가가 세게 부딪혀 와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아, 씨…”

멋사에게 하던 대로 으르렁거리며 뒤를 돌아보다가, 알바생의 머쓱한 얼굴이 보여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쨍한 보라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눈에 띄었다. 키는 좀 작아도 눈꼬리가 처져 귀여운 상이었다. 그냥 땅꼬마인 누구랑은 다르게. 매번 하는 생각이지만, 여자들한테 인기 좀 많겠구만. 핑맨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다음부턴 조심하세요.”

 핑맨은 핸드폰을 꺼내려 양쪽 주머니에 한번씩 손을 넣어 보았다. 가만 보자, 지갑은 컵라면 옆에 있고. 빈 주머니에서 전화기만 손에 잡혔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자 새로운 기사가 죽 떴다. 가장 흥미로운 제목을 클릭하고, 핑맨은 삼각김밥을 한 입 크게 삼켰다.


/

 

08

 

 핑맨이 소식을 들은 건, 임무를 보름쯤 앞둔 어느 밤이었다. 술에 취해 기밀을 유출하면 안 된다는 배려 아닌 배려로 BA 요원들은 건물 지하의 칵테일 바만 이용할 수 있었다.

 환기 안 된다고 삼겹살에 소주도 못 마시게 하면서, 배려랍시고 생색내는 게 기분 더러웠다. 단골 펍의 구석 자리에 앉아 처량하게 칵테일이나 홀짝이는데 옆에 다가와 앉은 리타가 들려 준 얘기였다.

“핑맨님.”

 리타는 바텐더에게 술 이름을 말하며 핑맨을 살짝 곁눈질했다. 누구랑 이미 마시고 왔는지, 살짝 꼬인 발음이었다.

“고마워요.”

“뭐?”

 핑맨은 날카롭게 대꾸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임무가 없는 시기에 간부 바로 밑에서 일하는 리타는 좋은 정보원이었고, 최고의 정보는 언제나 술의 힘을 빌려 흘러나오는 법이었다.

 그녀가 주문한 건 딱 봐도 달짝지근해 보이는 분홍색 칵테일이었다. 수닝의 추천으로 몇 번 먹어 본 적이 있었는데,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막 술을 접하는 사람들이나 젊은 여자들이 좋아할 느낌. 예쁜 잔을 내려다보며 리타는 눈을 반짝였다. 핑맨은 제 것에 입을 대고 뭔가 괜찮은 게 나오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아, 근데.”

 몇 모금 마시더니 리타는 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2주 남았는데 술 먹어도 괜찮아요?”

“안 취하면 되죠.”

 그러는 당신은 이미 취했잖아, 쏘아붙이려다가 참고선, 핑맨은 대신 달콤한 말을 내뱉었다. 술 취한 이를 어떻게 구슬릴 수 있는지, BA 건물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는 분명 그일 터였다. 리타는 그러네요, 하고 순순히 수긍하더니 술을 한 모금 더 입에 머금었다.

 그녀의 잔은 느리게 비워졌다. 핑맨의 기나긴 인내심에도 결국 한계가 올 만큼.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핑맨은 세 번째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리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하하, 그녀는 낮게 취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핑맨님, 눈치가 빨라.”

 리타는 잔을 내려놓고는 제 머리카락을 빗어내렸다. 핑맨이 처음부터 알아차렸듯, 불안할 때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게 그녀의 습관이었다.

“내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핑맨님 찾아간다는 걸 잘 아시네.”

 리타는 핑맨 쪽으로 한껏 몸을 기울이고는, 낮게 속삭였다.

“사람이 죽었어요.”

 이제는 아예 두 손을 전부 사용해서 엉킨 부분을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본사 건물에서, 것도 독으로.”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리타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핑맨은 시계를 흘끗 보는 척 말을 돌렸다.

“늦었는데 이만 숙소로 가죠.”

 그녀는 더 마시고 싶다고 찡찡대다가, 여태껏 비운 잔의 개수를 핑맨이 손가락으로 세어 주고 난 뒤에야 뜻을 굽혔다.

“알았어…”

“데려다 줄게요.”

 핑맨은 제 겉옷과 그녀의 것을 의자에서 벗겨내어 팔에 걸쳤다.

“아, 맞다.”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잡으면서,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우리 전에 누구 있지 않았어요?”

“뭐?”

 아, 그 있잖아. 핑맨은 손가락을 넣어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있었잖아요. 독 연구한다던 사람인가?”

 리타는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깡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닌가? 아님 말구요.”

 

 

.

.

 

 

“어디 갔다 와?”

 타이밍도 참 개 같지, 방에 들어서던 핑맨은 욕실에서 막 나오던 악어와 마주쳤다. 그는 늘 그렇듯 녹색 체육복 바지만 입고 있었다. 씻고 나서 웃통을 벗고 나오는 것은 몇 년간 함께 지내며 깨달은 악어의 버릇 중 하나였다.

“아, 옷 좀 입으세요!”

 상체를 하얗게 드러낸 모습에 핑맨이 짜증을 냈다. 사실은 조금 부러워서였다. 타고나길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이 아닌지, 비슷하게 훈련하는데도 악어의 것은 유독 잔근육에 그치곤 했다. 거기에 자잘하게 새겨진 흉터들까지.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매력적이었다. 정말 별칭 그대로, BA의 비너스.

 악어가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부럽냐?”

 그는 핑맨을 짜증나게 하는 법을 너무 잘 알았다. 핑맨은 홱, 고개를 쳤다.

“내가 여자라도 데려왔으면 어쩌려고!”

 악어는 눈을 굴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너는 나한테 죽겠지?”

 이 사람도 한 마디도 안 져 줘. 핑맨이 투덜댔다. BA는 어디서 말싸움 이기는 법이라도 단체로 훈련받고 오나 보지?

“어디 갔다 오냐고오.”

 악어가 리타처럼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물었다.

“술 먹었어요!”

“박리타랑?”

 핑맨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수닝님이 이 밤에 전화하더라. 박리타 아직 안 들어왔다고.”

“걔 많이 취했던데.”

 악어의 시선에 깃든 미약한 경멸을 눈치채고는 핑맨이 소리쳤다.

“내가 그렇게 안 먹였어요! 누구랑 먹고 왔거든?”

“아니, 그랬으면 달래서 보냈어야지!”

 나만 갖고 뭐라 그래. 핑맨은 입을 삐죽이며 반쯤 벗은 신발을 도로 신었다. 악어가 놀리는 투로 물었다.

“삐졌냐?”

“술 깨고 올 거거든요!”

 

 밖에 나와 하는 일은 언제나처럼 전화였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그는 바로 받았다.

“들었어, 소식.”

 핑맨은 그가 자랑스럽게 말을 꺼내기 전에 선수를 쳤다.

“멋진 일을 했더라.”

전화 너머에서 피식, 하는 헛웃음이 들렸다.

“…뭐야, 핑맨님.”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모르는 새 동정이 몽글몽글 피어올라 목소리에 녹아 있기라도 했던 건지. 그는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그 사이에 정이라도 든 거에요?”

 핑맨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듯, 웃음 섞인 말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알잖아.

“그는 BA의 미래야. 지금까지의 모든 간부들을 통틀어도 그보다 재능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가 덧붙였다.

“그 사람이 거기 있는 한 핑맨님은 절대 최고가 될 수 없어. 어디에서도.”

 그러니까 잘 해, 작은 말을 추가로 남긴 채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이어진 건 침묵이었지만, 핑맨은 다른 말을 더 들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어떻게 해야 해.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당신이 원하던 일이었잖아?

카테고리
#기타
추가태그
#늪지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