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사냥개 _ 下

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너는 이미, 그 이빨에 목을 물어뜯기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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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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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모두가 죽은 사람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자연스럽게 나돌 법한 피해자의 신분이나 직위, 심지어 범인에 관한 루머조차도 하나 없었다. 어쩌면 위쪽에서 철저히 비밀에 부쳤을지도 모른다고 핑맨은 생각했다. 정보가 빠른 데다 입도 가벼운 멋사나 중력이 이런 일을 알고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리타가 몇 마디 더 해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대했다. 또 필름이 끊긴 모양이었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다른 피해자를 더 만들지는 않았을까, 불안해지는 속을 누르며. 핑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훈련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그렇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2주가 지났다.

.

.

 

핑맨은 하품을 하며 수류탄이 제 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졸려 죽을 것 같았다. 해가 뜨려면 한참이나 남은 시간부터 이게 뭔 난리람.

“자.”

다른 손으로는 악어가 내미는 저격총을 받아들었다. 잡히는 두께와 손끝에 걸리는 방아쇠의 위치가 익숙했다. 빛을 받아 무기의 표면이 매끈거렸다. 내가 이 날을 위해서 죽기살기로 연습했지. 핑맨은 엄지손가락으로 번쩍이는 부분을 문질렀다. 매끄러웠다.

“진짜 할 거야?”

너 파밍 좋아하잖아, 걱정스러운 악어의 물음에는 고개를 저어 답했다.

“괜찮다니까요.”

원래 저격수로 예정되어 있던 건 악어였다. 예정이 바뀐 것은, ‘WTK 쪽에서 아직 흑룡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정보가 있으니까 저격수는 줄이기로 했어.’ 하며 악어가 스나이퍼를 매만질 때 핑맨이 손을 들어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래요.

 뜻밖의 상황에 모두가 놀라 그를 쳐다보자 웃으며 설명했다. 찾는 건 악어님이 제일 잘하고, 그렇다고 저격을 포기할 수도 없는데 어떡해요.

 내가 하는 게 최선 아니야? 무대 장치의 일부로 잘 짜여 준비된 답은 모두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했고, 아무도 결정에 토 달지 않았다. 그렇게 저격수 자리가 핑맨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래, 뭐.”

 악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타에게 권총을 마저 건넸다.

“하긴 핑맨이도 실력 많이 늘었더라.”

“원래 잘했거든요?”

 핑맨은 투덜대며 수닝에게서 붕대를 받아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수납 공간이 많은 조끼는 칼 같은, 사소하지만 꼭 필요하며 가급적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숨겨 보관하기 좋았다.

“헬기 준비되었대요.”

 핑맨은 탄창을 챙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간부와 연락하러 갔던 만득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핑맨은 흠칫 몸을 떨며 손목을 문질렀다. 공기에 살얼음처럼 긴장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다들 제대로 챙겼는지 한 번씩 더 확인해요.“

 그걸 두드려 깬 건 악어였다. 천천히, 그렇지만 강하게. 그가 말했다.

“잘 하고 오자.”

 핑맨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 가족들.”

 

그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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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맨은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며 몇 개 없는 멀쩡한 건물 옥상에 자리를 잡았다. 답사를 통해 알아낸, 이곳 폐허에서 가장 은밀하고 높은 곳이었다.

 심지어 사전 답사팀에도 핑맨은 지원했었다. 비록 몸은 피곤했고 왕복길에 하도 떠들어댄 나머지 머리가 아팠지만, 얻어낸 것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대가였다.

“들려요?”

 통신 상태가 좋지 않은지, 악어의 웅얼거리는 대답 소리가 치지직거리며 들려왔다. 핑맨은 이어폰을 다시 조정했다.

“진입해도 돼요.”

“알았어.”

 이번에는 아까보다 선명했다. 악어가 말했다.

“가죠.”

 오더가 떨어짐과 동시에 시야에 흩어지는 팀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핑맨은 스코프로 움직임을 하나하나 쫒았다. 악어와 만득 구역의 사이, 높은 짐으로 가려져 현 위치에서만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으슥한 골목도 들여다보았다. 원래 탐사 구역 배치도는 팀장에게만 알려진 기밀이었지만, 핑맨은 우연히 악어의 서류를 나누다가 슬쩍 본 적이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수닝. 그 옆이 중력. 스코프로 들여다본 멋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오더 들을 때 집중을 안 한 모양이지. 핑맨은 이어폰을 두드려 멋사와 연결했다.

“너 왼쪽일걸?”

“아하.”

 감사, 짧은 말과 함께 통화는 끊어졌다. 뭘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모든 팀원들의 뒷모습을 죽 훑었다. 아무도 시야에 잡히지 않게 되면, 핑맨이 움직일 시간이었다.

 임무에 왔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확 실감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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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어요!”

 이어폰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건 수닝의 들뜬 목소리였다.

“진짜요?”

 멋사가 기뻐 되물었다.

“진짜 정보를 못 얻었나 보네.”

악어는 낮게 중얼거리더니 명령을 내렸다.

“그럼 우리 빨리 모일까요. 혹시라도 습격이 오면 위험하니까, 수닝님 근처 사람들은 엄호해 주고.”

“모이는 덴 아까 거기인 거죠?”

 만득의 물음에 돌아오는 답을 듣기도 전에, 핑맨은 이어폰을 두드려 소리를 꺼 버렸다. 적이 오면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게 저격총을 잘 조정해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팔을 쭉 뻗었다. 잠시 밑에 내려가고 싶었다.

 오면서 화장실에나 들를까.

 

 볼일을 마치고 핑맨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기 무섭게 건물 바로 아래에 멋사가 도착했다. 이어서 나머지도 하나 둘 모여들었다. 처음으로 맡아 본 큰 역할이 부담스러운지, 수닝은 팔을 계속 어루만졌다. 검은 문양이 그녀의 어깨에서부터 내려와 소매 끝에서 살짝 보였다. 기하학적이고 화려한 도형들로 가득 찬 독특한 무늬들은 대충 봐도 절대 현대의 것이 아니었다.

“누구누구 안 왔어?”

중력이 물었다.

“만득이랑..”

 하나, 둘, 셋, 넷. 멋사가 사람 수를 셌다.

“악어님.”

“내가 연락할게.”

 핑맨은 이어폰을 톡톡 두드려 악어와 연결했다.

“왜 안 와요?”

 뛰었는지 가빠진 목소리로 그가 답했다.

“가고 있어!”

“거기 골목으로 들어오면 빨라요.”

 악어와의 개인 통화를 끊고, 단체방에 도로 들어오자마자 리타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만득이가 전화를 안 받아.”

 핑맨은 답 대신 스코프를 조절해 이리저리 확대해 보았다. 으슥한 골목을 넘어들어오는 하얀 머리카락이 보였다. 재빠르게 움직이다가, 악어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굳어들어갔다. 핑맨은 가슴이 긴장으로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꿀꺽, 침을 삼켰다. 본 걸까?

“악어님!”

 벌떡 일어나며 외치자, 밑에 있던 팀원들이 그를 올려다보더니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 뭐 해요?”

 악어를 발견했는지 달리기 시작하는 그들에 핑맨도 건물에서 재빨리 내려왔다.

“악어님…?”

 가장 먼저 악어에게 도착한 중력이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가깝지는 않은 거리였지만, 그 얼굴에 물든 당혹과 긴장은 꽤나 잘 보였다.

“무슨 일이야?”

 다음은 역시 멋사였다. 핑맨은 마지막으로 도착해 숨을 고르며, 현장을 하나하나 눈으로 담았다. 살피려는 척 몸을 굽히고 흘러내린 만득의 손을 살짝 짚었다. 전해지는 온기가 따뜻했다. 다행히도, 아직은.

“…죽었어.”

 중력이 만득의 코 아래에서 손가락을 떼고는 낮게 선포했다. 헉, 누군가가 겁에 질려 낮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정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수닝일 거라고 핑맨은 거의 확신했다.

“거짓말하지 마!”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뻗는 멋사를 중력이 팔로 가로막았다.

“가만히 있어.”

 벽에 기대어 앉은 만득은 너무 평온해서, 입가에 흘러내린 붉은 선만 빼면 마치 잠든 사람처럼 보였다. 외상이 보이지 않는데도 피가 이렇게 많은 건, 상처가 등에 있기 때문이겠지. 핑맨은 생각하며 악어의 양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체를 벽에 기대어 놓은 게 그인지 피로 젖어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쏠리자 악어는 몇 걸음 뒷걸음질쳤다.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상황판단이 빠르니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금세 파악한 모양이었다.

“이건 악어님 거잖아.”

 당황이 가득한 공기 속에서 홀로 차분한 건 리타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 짙은 플라스틱 칼자루에 A,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악어가 첫 임무를 성공시킨 기념으로 ‘그’ 간부에게 선물받은 물건이랬다.

“핑맨님.”

 리타가 피에 젖은 칼을 들고 핑맨을 돌아보았다.

“악어님이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난…!”

 악어는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움직였지만, 갑자기 난입한 침입자에 전달되지 않았다.

“!”

 비명 한 점 없이 수닝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등에 꽂힌 칼과, 침입자의 팔로 옮겨가는 흑룡의 문양을 핑맨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검은 무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수닝에게서 볼 수 없던 것이었고, 무엇보다 강하고 불길한 느낌이 났다.

“안녕.”

 침입자가 후드를 벗으며 맑게 인사했다. 얼핏 보면 수닝과 비슷한 아담한 체구. 방금 저지른 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독히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핑맨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쓱 훑었다.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저 자식이, 여기 있어… 묻는 듯 정신없이 눈동자들이 굴러다녔다. 당연히 대답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침입자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러다 악어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살짝 쳐진 눈꼬리가 더 아래로 내려가 부드러운 눈매를 만들어냈다. 상황을 모르는 이가 지나가다 봤다면 참 순진한 청년이구나, 하고 감탄할 만큼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로서, 핑맨은 그렇게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야.”

 WTK의 간부 후보, 활동하는 인물 중 최강자라고 여겨지며 유일하게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사냥개.

 너불이 말했다.

“BA들아.”

 그리고 별 일 없던 폐허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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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 연락이 닿은 남봉은 따로 요원들을 보내 죽은 이를 데려오겠다고 했다. 두 명이나 빈 헬기 안은 쓸쓸했다. 분위기도, 공간도. 만득이 없는 탓에 대신 운전석에 앉은 멋사가 말했다.

“출발합니다.”

 안내, 라기보다는 중얼거림에 가까운 작은 소리였다. 핑맨은 의자에 등을 기대어 숨을 고르고, 옆에서 팔을 연신 누르고 있는 중력을 내려다보았다. 지혈제를 뿌리고 붕대를 여러 겹 감았음에도 빨갛게 피가 묻어나왔다.

 너불은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움직여 모든 공격을 흘려냈다. 먼 옛날 대륙을 통일했다던 흑룡의 힘이 저런 것인가, 지금은 적인 것도 잊은 채 감탄할 정도로. 대충 놀아 준다는 듯한 동작이었음에도 저 정도라는 게 놀라웠다.

 아무리 힘을 내어 버텨 봐도 상처는 하나둘 늘기만 해서. 이대로 끝나려나, 포기하고 싶어질 즈음에 그는 가지고 놀던 수닝의 칼을 바닥에 던지더니 가볍게 사라졌다. WTK가 어떤 경우에도 BA 전멸을 목표로 하는 걸 고려하면 뜻밖이었다.

 그렇게 허둥지둥 헬기를 타고 도망치듯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오직 잃기만 한 채.

“도와 줄까?”

핑맨이 다리에 붕대를 감느라 낑낑댔더니 리타가 넌지시 물었다.

“아냐, 거의 다 했어.”

 긴장이 풀리자 뒤늦은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핑맨은 헤드셋을 낀 머리를 도로 등받이에 가만히 기댔다.

 일어난 일들이 마치 꿈만 같았다. 피곤한 와중에도 핑맨은 머리를 굴려 사건들을 정리했다. 흑룡을 찾았는데 빼앗겼고, 빼앗은 사람은 너불이었고. 또 누가 죽었고, 다쳤고… 악어님만 빼고. 악어의 몸을 덮은 피는 전부 타인의 것이었다. 일부러 그를 비켜 갔는지 아님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흘끗 넘겨다본 악어는 잔뜩 움츠러들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제가 수상해 보인다는 걸 스스로도 아는 모양이었다.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던 모습에, 핑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조금 있자 다시 머리가 아팠다. 핑맨은 눈을 감아, 생각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피곤할 뿐이었다.

 

“착륙하겠습니다.”

 멋사의 메마른 말과 함께 내려앉는 헬기를, 검은 가면을 쓴 사람들이 빙 둘러쌌다.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핑맨은 겨우 눈을 뜨다가, 당황해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이렇게나 빨리?

 검은 조끼에 하얀색으로 새겨진 글씨가 또렷했다. BA. 그리고 그 아래에 흘림체로 적힌 서명 같은 것은 간부 직속 부서의 표식이었다. WTK의 사냥개만큼이나 비밀스럽게 움직여서 아무도 누가 있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BA의 내부 감찰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 움찔했다. 핑맨은 어깻죽지를 어루만지며 스스로를 달랬다. 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악어.”

 가장 문가에 앉은 중력부터 천천히 내렸다. 내부 감찰부 요원들은 악어의 차례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이름을 불렀다.

“함께 갑시다.”

 악어는 반항 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답게, 벗어나려는 노력 따윈 무의미하다는 걸 잘 아는 모양이었다.

 핑맨은 맨 마지막으로 운전석에서 내리는 멋사까지를 눈으로 쭉 훑었다. 리타는 반항적인 눈빛으로 악어의 뒤통수만 응시했고, 중력은 바닥, 멋사는 제 손가락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다들 생각이 복잡한 듯했다.

“다른 분들은 돌아가셔도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건 핑맨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나? 멍한 기분이었다. 조금은 더 좋을 줄 알았는데. 그는 앞선 중력을 따라 느릿하게 걸었다. 바닥을 스치는 신발 소리가 투박했다. 피곤하고 토할 것 같았다. 내부 감찰부 요원의 인사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마냥 어렴풋했다.

“쉬십시오.”

 그냥 좀 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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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핑맨은 막 맨 넥타이를 풀고, 마지막 단추까지 꼼꼼히 잠근 뒤 다시 매었다. 아무리 망나니라도 BA인 인간이라면 이런 자리에서는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오랜만에 아침도 굶었다. 뭐라도 배에 집어넣었다가는 그대로 토해내 버릴 듯한 기분에서였다. 빈속에 입는 정장은 썩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핑맨님.”

 똑똑, 문을 두드리는 낮은 소리에 중력과 함께 가기로 한 걸 기억해냈다. 핑맨은 옷걸이에서 잡아 뺀 정장 자켓에 한쪽 팔을 대충 끼우고는 큰 소리로 옷장 문을 닫았다.

“지금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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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의 법정은 핑맨이 영화에서 흔히 보던 것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가운데의 판사석과, 양 옆에 세 개씩 늘어선 증인석과 감찰부석. 감찰부가 아마도 검찰이라고 불리는 것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악어를 판사석을 등지고 세워 두었다는 점만이 달랐다. 그는 지친 눈으로 관중석을 대충 훑다가 핑맨과 눈이 마주쳤다. 그 시선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국 핑맨은 눈을 내리깔았다.

“요원 악어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살인과 WTK와의 결탁, 악어의 혐의는 두 가지랬다.

 증거 또한 각각 두 가지였다. 시체에서 악어가 연구하던 독극물 성분이 발견된 것과 만득을 죽인 것, 너불이 놓고 악어를 공격하지 않았으며 사냥개의 소재를 빨리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

 독극물 관련 자료는 핑맨에게 익숙했다. 촘촘한 검은 글씨 사이로 첨삭된 빨간 펜. 악어의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는데, 그걸 입수한 모양이었다. 또 현장에 있었던 핑맨조차도 헷갈렸던 너불에 관한 내용은 감찰부 측에서 증거로 제시한 리타의 카메라 영상에서 보니 확연히 드러났다.

 그리고 리타가 초소형 카메라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핑맨은 내심 놀랐다. 카메라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 간부 직속은 감찰부가 아니라도 대부분 그런다는 듯했다.

 악어는 이제 출입구 위에 달린 시계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죄인처럼 뒤로 묶인 팔이 불편해 보였다. 사실 불편하기는 핑맨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조차 모르게 치솟는 불쾌감에 판사 역할을 맡은 간부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잘 알아듣기 힘들었다.

 옆에 죽 앉은 팀원들을 훑어보니, 다들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심지어 자신감 넘치던 리타조차도 제 머리카락만 빗어내리고 있었다.

“선고하겠습니다.”

 마침내 최종 판결이 선포될 때, 핑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살인과 WTK와의 결탁, 두 가지의 혐의에 대해 피고인 요원 악어는,”

 하지만 결국 찾아올 결말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유죄임을 선포합니다.”

땅, 땅, 땅.

 핑맨은 묵묵히 걸어가는 악어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눈을 도로 내리깔았다. BA는 일반인들의 사회와는 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세뇌당해 온 요원들의 세계에서 배신은 곧 죽음이었고 수용소에서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는 건 간부뿐이었다.

“…윽.”

 느끼한 것만 잔뜩 먹은 것처럼 속이 안 좋아졌다. 핑맨은 고개를 돌리고 황급히 입을 가렸다.

“괜찮아?”

 리타가 등에 손을 짚으며 물어왔다.

“…어.”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반쯤 잠긴 목소리가 스스로도 어색했다. 핑맨은 낮게 헛기침을 몇 번 뱉었다. 답답했다. 목이 메이고 코가 따끔거렸다.

“그냥, 속이 좀 안 좋아서.”

 수용소에서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는 건 간부뿐이었다.

 

 본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경우, 요원 악어에게는 간부직을 수여한다.

 

 간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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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악어가 죽었댔다.

 잠깐의 면회조차 허용되지 않아, 리타를 통해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랬다. 그날 핑맨은 하루 종일 자느라 소식을 조금 늦게 들었다.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찾아온 중력이 침대에 걸터앉아 리타의 말을 전해 준 게 저녁 여섯 시 반쯤이었으니까.

“자요.”

 리타가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처럼, 중력은 달콤한 것을 먹었다. 핑맨은 내밀어진 초콜릿 맛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톱밥을 뭉쳐 놓은 것마냥 텁텁하고 퍼석거렸다. 그제서야 핑맨은 상기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어서 몰랐는데. 초콜릿은 악어가 돈을 줘도 안 먹겠다고 할 정도로 싫어하는 맛이었다. 아니 싫어하던 맛이었다. 이젠 과거형이어야만 했다.

 사탕을 깨물어 부수자 이가 저렸다. 혀가 아릴 정도라 그렇게 싫던 단맛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와르르 쏟아 놓은 막대 사탕들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중력이 물었다.

“저녁 안 먹으러 갈 거에요?”

“..방금 일어났는데 뭔 저녁이냐.”

 그럼 저는 밥 먹으러 갈게요, 중력은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사탕 더미를 침대에 그대로 두고. 시계는 벌써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게 팀원을 보내고, 핑맨은 가만히 앉아 제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저의 세계에서는 비난받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수없이 해 와서, 비난받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발가벗은 채 사람들 앞에 선 기분이 드는지, 왜 속에서 자꾸 뭔가가 치밀어 오르려 하는지 그는 정말 알 수 없었다. 어려웠다.

 핑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서 방을 뛰쳐나왔다. 무언가 답을 찾아야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전화였다.

“악어님이 죽었어.”

 일단 말을 던져 놓고, 핑맨은 조용히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서요?”

 그러나 그는 태연했다.

“형이 원했던 일 아니에요?”

 핑맨은 몸을 움찔했다.

“팀장 자리를 차지하고 BA의 실세가 되는 거. 그 사람이 있으면 절대 불가능했단 거 잘 알면서 왜 그래요.”

 실세 자리를 탐냈던 건 맞다. 단순히 권력을 잡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고! 핑맨은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런 방식이 맞나. 다만 예상치 못한 변수 탓에 달라 보인 걸지도 몰랐다. 그가 잠자코 있자 상대는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혹시 알아요, 악어님이 진짜 WTK였을지?”

“아니잖아.”

“그렇죠.”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전 알잖아요, 사냥개가 누군지.

“왜요, 또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돌아가고 싶다.

“이만 끊을게.”

 전화를 끊고 핑맨은 미친 듯이 거리를 헤매었다. 헤매다가, 자켓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또 울릴 때에야 멈췄다.

“핑맨님, 어디야?”

 리타가 답지 않게 창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핑맨은 제 옆에 걸린 술집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본부 건물 지하의, 장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어두운 펍과는 다르게 요란하고 화려했다.

 그러고는 전화기 너머의 리타에게 천천히 답했다.

“뭐 좀 마실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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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실에 다녀온 리타를 반기는 건 좋아하는 분홍색 칵테일 두 잔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핑맨을 쳐다보았다.

“이거 싫다매.”

 핑맨은 답 대신 제 잔을 한 모금 마셨다. 싫을 정도로 달달하던 칵테일이, 양치질이라도 하고 먹은 것처럼 텁텁했다.

 중력이 준 초콜릿 맛 사탕처럼. 핑맨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리타님이잖아.”

 한참이 지나 술기운이 옅게 올라올 무렵에야 겨우 용기를 내어 입을 열 수 있었다.

“악어님 고발한 거.”

“맞아, 나야.”

 리타는 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내렸다. 아니라고 울거나 악을 쓰며 부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꽤나 진지하게 한 걱정이 무색하게도 인정은 순순히 돌아왔다.

“처음 보는 독극물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왜인지 모르지만 그 사람 생각이 났어.“

 맞다, 이 사람. 필름이 끊겼었지. 핑맨은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그게 맞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리타는 달콤한 칵테일을 마시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네.”

 왜일까, 핑맨님. 나는 정말 모르겠어. 리타의 한탄을 들으며 핑맨은 제 잔을 천천히 비웠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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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범인은 사건 현장에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 어째서인지 핑맨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제가 저지른 일이 무사히 처리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복도에 사람이라고는 없는 이른 새벽이었다. 핑맨은 죽은 팀원이 안치되어 있는 영안실에 조용히 서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아니지만, 진짜 현장은 사라졌으니 그렇게 봐도 무방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문이 열렸다. 핑맨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들어온 이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뭐야.”

 핑맨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멋사는 움찔했다. 그 표정에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핑맨이 씩 웃었다.

“그래.”

 그가 말했다.

“너였구나?”

 멋사가 총을 꺼냈다. 그가 무기를 가져올 줄은 몰랐던지라 조금 놀랐지만, 핑맨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제 것을 들었다.

“염치없이. 더러운 WTK 주제에 어따 대고 총을 겨눠?”

 서로가 서로에게 총구를 향한 이 상황에서는 승산이 거의 없다는 걸 핑맨은 잘 알았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멋사의 것에서도 불이 번쩍일 것이다. 그러고는 러브샷, 나란히 서로의 심장을 꿰뚫겠지. 멋사도 알고 있는지 날카롭게 핑맨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 사람들을 죽여? 악어님이랑, 만득이가 어떤 사람이었는데.”

“왜, 너도 죽여 줄까? 그렇게 좋으면 따라가.”

 핑맨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멋사 뒤의 문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날 죽여도 이제 들켜 버렸으니 어떡할래? WTK의 사냥개도 별 것 아니군.”

 점점 가까워져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왔나? 핑맨은 침을 꿀꺽 삼키며 멋사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싶었다.

“멍청하긴. 이런 말 들어본 적 없어?”

 이제 문이 열리고 아군이 들어오면, 제가 이긴 줄만 알고 떠드는 저 멍청한 요원의 목숨도 끝이다.

“WTK가 기르는 사냥개는, 사냥감의 목숨을 끊을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지.”

 핑맨은 멋사의 뒤쪽, 문이 소리 없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씩 미소지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넌 덫에 걸린 거라고.”

 탕, 총에서 총알이 발사되었다. 핑맨의 것도, 멋사도 아닌 또 다른 누군가였다. 핑맨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생긋 웃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멋사의 몸을 내려다보며 핑맨이 말했다.

“이긴 건 나야.”

 외부인이 정정했다.

“‘우리’ 겠죠.”

 너불이었다.

 

 

.

.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탁 하고 풀렸다. 다리를 가누기가 힘들어 핑맨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괜찮아요?”

 너불의 서늘한 손가락이 볼에 닿았다. 그는 핑맨의 얼굴에 튄 피를 훔치고는, 옷에 대충 문질러 닦고 반대편 손을 내밀었다.

“와, 타이밍 오졌다. 좀만 더 늦었으면 큰일났던 거 알죠.”

“CCTV 많은데. 안 찍혔냐?”

 핑맨은 도움을 사양하지 않으며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손등을 반쯤 덮은 용의 문양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한두 장은 찍혀도 괜찮아요. 증거가 남으니까.”

 순간 무늬가 반짝 빛나며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돌아왔다. 핑맨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너불은 제 손을 내려다보며 뿌듯하게 대꾸했다.

“능력 중 하난데 쩔죠? 꽤 좋더라고요, 이번 무기는.”

그는 조심조심 죽은 요원의 피 웅덩이를 벗어나더니 물었다.

“돌아가고 싶다고 했죠.”

“…어.”

 핑맨은 꽉 움켜쥔 주먹을 등 뒤로 숨기고,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떨림을 최대한 감췄다.

“여기 너무 답답해. 숨 막혀.”

“좋을 대로 해요.”

 원래대로라면 이런 투정 따위는 무시당했어야 마땅했다. WTK에는 약한 놈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해결해 줄 능력이나 머리를 가진 간부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너불은 달랐다. 핑맨은 제가 어떤 말을 해도 그가 그저 그러시던가요, 하고 들어 줄 것을 알았다. 머리도 능력도 모조리 갖춘 녀석이었다. 테러로 진짜 핑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저를 대신 밀어넣은 것도 너불의 두뇌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너불은 픽 웃으며 허리를 숙여 손가락을 액체에 적셨다. 핑맨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또 이렇게 생각해 왔죠. 이 사람은 흑룡이 난입해서 죽인 걸로 합시다.”

 WTK, 세 글자가 영안실의 하얀 벽에 붉고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유는 뭘로 할까, 악어의 복수?”

 그 사람이 WTK라는 설정 아직 유효하죠, 장난스러운 물음에 핑맨은 씩 웃었다.

“당연하지.”

“자, 그럼 핑맨님은 어떻게 죽을래요. 추락사? 아님 나한테?”

“…여기서 죽은 걸로 하자.”

 좋아요, 너불은 문양을 빛내며 사라지더니 한참 뒤에야 나타났다. 순식간에 눈 앞에 생겨난 사람에 잠시 당황했다가, 핑맨은 긴장을 풀며 웃었다.

 너불이 가져온 건 핑맨과 굉장히 비슷한 체구의 남자 시체였다.

“이 사람이 핑맨님이 되어줄 거에요. 얼굴만 뭉개면 아무도 모르거든.”

 BA 간부들은 빤해 보이는 상황에서까지 속임수를 의심할 수 있을 만큼 귀찮은 것을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고맙다.”

핑맨이 말했다.

“뭘요.”

너불이 답했다.

“우린 같은 배를 탄 가족이잖아요.”

 가족.

 가족? 핑맨은 얼굴을 찡그렸다. 쿵, 머리가 울리고 귀가 멍멍했다. 뱃속 깊은 곳에 바위가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답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곳에서 나왔다.

악어님 올지도 모른다고 하나 더 탔어요.

“왜요?”

중력이는? 또 안 먹는대? 걔 그럼 키 안 클 텐데.

그가 멍하니 있자 너불이 날카롭게 물었다.

“또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니야. 그냥.”

핑맨은 화들짝 놀라 생각에서 벗어났다.

잘 하고 오자, 우리 가족들.

“…나에게 가족은 WTK뿐이라.”

이건 저에게 하는 말이었다.

.

.

 

 

 아, 이 어리석은 사냥개야. 악한 주인을 거역하지 못하고 네 손으로 가족을 망가뜨렸구나,

 또.

.

.

사냥개(명사) 

1) 사냥할 때 쓰는 길들인 개

2) '염탐꾼'을 속되게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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